2018년 2월 26일 월요일

장자. 莊子.

장자. 莊子.


중국 고대 도가()의 사상가. 
이름은 주(). 송()에서 태어나 맹자와 동시대에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원본 『장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에게 가탁()하여 『장자』라 명명한 것인 듯하다. 
『장자』는 공자ㆍ맹자보다 노자와 함께 장자가 존중되기에 이르렀던 한대 초기에, 전국 말 이래의 도가의 논저()를 부가하여 성립한 것으로서, 통일된 체계는 없지만 도가 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볼 수 있다.

기본 사상의 중심은 당시 지배자의 지위에서 몰락하고 있던 사상가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삶에 얽힌 근심과 고난으로부터 관념론적으로 도피하려고 한 인생론에 있다.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ㆍ정신을 버리고 '허정'(), '염담'()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자유ㆍ독립을 얻어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이 '진인'()이다.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도'()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지식론이 깔려 있다.



뱁새가 황새의 뜻을 어찌 알랴!

『장자()』를 읽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있다. 
저 먼 북쪽 깊고 어두운 바다에 곤()이라는 커다란 물고기가 사는데, 이 물고기가 새로 변하여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면 대붕()이라는 새가 된다고 한다. 
이 물고기와 새는 너무나 커서 그 크기가 수천 리고, 대붕이 되어 날아오르는 높이만 해도 구만 리나 된다고 한다. 참 크기도 하고 또 높이도 날아오른다. 
대붕의 비상()이 정신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든 세상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든 이 이야기에 가슴 시원해지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장자』 「소요유」에 나오는 곤()과 붕()의 이야기를 읽으며, 대개는 곤과 붕에 자기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참새와 비둘기가 대붕을 보고 비웃는 이야기를 읽으며 "뱁새가 황새의 뜻을 어찌 알랴!"는 속담을 떠올리곤 할 것이다. 
장자의 모습은 대붕에 가까웠을까 아니면 참새나 비둘기에 가까웠을까? 아니 이 곤과 붕의 이야기를 읽고 참새와 비둘기를 조소해 온 전통 지식인들이나, 지금의 우리는 대붕에 가까울까 아니면 참새나 비둘기에 가까울까?

노예근성 & 정신적 자유 사이에'

북경의 거리에 차가운 바람이 휘감던 1921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 오히려 미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계몽주의자라고 풍자하였던 중국의 문인 루쉰()은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힐난한 작품 『아Q정전』을 발표한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까닭에 늘 주변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지만 스스로는 늘 독특한 정신적 승리법으로 의기양양한 아Q를 통해, 루쉰은 기울어가는 중국의 운명을 방관만 하는 중국인들을 비난하였다. 
루쉰에게 아Q는 중국의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중국인의 얼굴이자, 중국 지식인의 비애였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중국의 철학자 관봉()은 중국인의 패배주의 정신의 근원이자 아Q의 모습이 『장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관봉이 자신의 주장을 위해 사용한 근거의 대부분은 전통 지식인들이 밝혀 놓은 것이었다. 
『장자』는 전체가 33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오늘날 대개의 학자들이 믿고 있듯이 장자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은 '내편()' 7편이고 나머지는 후학의 저술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관봉은 바로 이러한 주장을 가장 체계적으로 논증한 학자이다.

관봉에 따르면, 춘추()시대 공자의 사상이 당시 몰락해 가는 노예 소유주 계급의 이데올로기였다면, 전국() 시대의 장자는 이미 몰락해 버린 옛 이데올로기에 대한 향수에 젖은 시대착오적 인물이다.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정신적 자유만을 추구하였고, 그런 비현실성이 급기야 중국인의 패배주의 정신, 즉 아Q정신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관봉의 비판은 풍우란()과 같이 중국 문화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하자는 주장에 골몰했던 문화 보수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관봉의 이와 같은 격렬한 비판에 대해 대륙 중국 학계의 반응은 다소 냉담하였다. 
사회주의 중국 건설 이후 사상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지식인들에게 『장자』는 거의 유일하게 뼈아픈 현실에서 벗어나 정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심리적으로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도피처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정치적 담론의 영역에서보다 예술, 신화, 문학에서 또 예술가와 시인()으로서 더 부각되었다. 
이것이 20세기 대륙 중국에서 『장자』를 읽는 경향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는 낯설거나 황당한 말로 비쳐 질 것이다. 
『장자』를 한 번 펼쳐보라. 
처음부터 『장자』에는 거대한 물고기 곤이 커다란 붕새로 변화하는, 이른바 인간 정신의 고원한 승화를 은유적인 언어로 웅장하게 그리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대륙 중국의 『장자』 해석과 비판은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한 닫힌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넘겨버리기 쉽다. 
우리에게 관봉의 해석은 그렇게 터무니없어 보인다.

대륙 중국의 『장자』 해석만큼이나 20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장자』 해석 또한 역사적이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아로 새겨진 『장자』는 무엇보다 다석() 유영모나 씨imagefont 함석헌의 이야기가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 왈 『노자』와 『장자』 해석은,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유신 체제 아래에서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거나 "제발 건드리지 말라!"는 비판이자 자유를 향한 외침이었다. 
그에게 『장자』는 자유와 해방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물론 함석헌의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장자』의 「추수()」편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장자가 복수()라는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초()나라의 왕이 보낸 두 대부()가 찾아와서 왕의 뜻을 전하였다.

"부디 초나라의 정치를 맡기고자 하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듣기에 초나라에는 신령한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3천 년이나 되었다고 하더군요. 
왕께서는 그것을 헝겊에 싸서 묘당() 위에다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지만, 그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긴 채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랬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랬을까요?"
두 대부가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랬을 테지요."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닐 것이오."

장자는 왜 모든 지식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재상의 자리를 마다한 것일까? 
저 인륜과 도덕의 수호성인이라는 공자조차도, 반역을 꾀한 양호()의 부름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충직한 제자 자로()의 핀잔을 사지 않았던가! 장자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지난 세월의 비애가 더 컸던 것일까?, 정말 흔히 말하듯 무정한 정치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비정한 몸부림이 싫어서였을까?  장자의 이야기는 더러운 권력에 대한 조소로 비쳐졌던 것이다.

재상을 마다한 지식인, 

장자가 살던 전국시대는 전란과 정치적 소용돌이가 끊이지 않았다. 
전란의 회오리가 요동치는 시대는 뜻이 있으나 때를 얻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그런 시대이기도 하다. 
난세는 영웅을 기다린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장자에게는 그런 커다란 야망조차 없었던가 보다.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초나라의 왕이 보낸 두 대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들은 빨리 돌아가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시오.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굴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구속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아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오."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들에게 유세하였던 맹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장자』에서는 이 이야기가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데, 『사기』는 오로지 장자에 대해 이 일화만을 소개한다. 
그 이외의 사항은 아주 간단한 사항들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장자는 몽()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이고 칠원()이라는 고을에서 관리를 지냈는데, 양()나라의 혜왕(), 제()나라의 선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박학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10만여 자나 되는 글을 지었고 「어부()」, 「도척()」, 「거협()」 등을 지어 공자의 무리를 비방하고 노자의 학설을 천명하였다는 게 거의 전부이다.

우리는 『장자』에 기록된 일화들을 통해 그가 어떤 '인간'이었던가에 대해 조금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는 생전에 노()나라의 애공()과 만났으며, 위()나라의 혜왕()과도 만난 적이 있고, 특히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혜시()와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인의 상을 당해 슬퍼하기는커녕 춤추며 노래하였다는 기이한 행적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장자는 결혼했고 몇 명의 자식이 있었던 듯하다.

『장자』에서 증언하는 인간 장자는 아주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외물()」에는 장자가 집이 가난하여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가 불쾌한 대접만 받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열어구()」에는, 송()나라 왕을 위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성공하고 돌아온 조상()의 입을 통해 장자가 얼마나 곤궁한 처지에서 살았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이 나온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 온 조상은 장자를 만나, "대체 이렇게 곤궁한 마을 뒷골목에 살면서 궁색하게 짚신이나 엮으며 목덜미는 그렇게 여위고 낯짝은 누렇게 떠 있다니, 나라면 이렇게는 살지 못할 거요"하고 거들먹거리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록들은 하나같이 장자가 무척 곤궁한 처지에서 살았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게 한다. 
장자가 누더기처럼 기운 옷을 입고 삼끈으로 얽어 맨 신발을 신고서 위나라 혜왕의 곁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혜왕이 말했다.
"선생은 어째서 이렇게 지친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장자가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것이지 지친 것이 아니오이다. 
선비가 도와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행하지 못했을 때 지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옷이 해지고 신발에 구멍이 난 것은 가난한 것일 뿐 지친 것이 아니오이다. 이는 곧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 
지금처럼 군주가 어리석고 신하들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지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 비간()과 같은 충신이 심장을 도려내는 일을 당한 것을 보면 분명하지 않습니까!"

혜왕의 눈에 비친 장자의 모습은 가난에 찌든 비천한 몰골이었던 모양이지만, 자신을 충신 비간에 비유하면서 은연중에 장자는 자신이 도와 덕을 속에 품고 있어 천하를 구제할 만한 그릇이지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다. 
외모가 아닌 가슴속의 웅지를 보고서 사람을 쓸 것을 종용한 듯하다. 
아무리 좋은 활이라도 명궁의 손에 쥐어져야 그 활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이며,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법이다. 
당시처럼 부패와 혼란이 극심한 시대에는 뛰어난 인재일수록 초라하고 볼 품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장자는 은연중에 꼬집은 것이다. 
비록 가난하였지만 장자는 값싼 동정에 몸을 팔거나 절개를 버려가면서까지 세상이나 권력자에 아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심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비웃은 조상에게도 호된 비판을 한다.

'진()나라의 왕은 병이 나서 의사를 부르면 종기를 터뜨려 고름을 빼는 자에게는 수레 한 대를 주고 치질을 핥아서 고치는 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준다고 하더이다. 
치료하는 데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수레를 더 많이 준다고 하는데 당신도 그 치질을 고쳐준 것이오? 수레를 많이도 얻으셨군요! 자, 어서 가버리시오.

장자는 혜시의 문인()이?

장자의 시대는 떠돌이 사인()의 시대였다. 
당시 중국에서 사인이란 오로지 벼슬에 나아가 제후를 도와서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종사하는 신분이었다. 
국가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여서 작고 약한 나라들은 점차 강력한 소수의 열강에 병합되어갔고, 그렇게 해서 나라를 잃은 사인들은 새로운 군주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떠돌이 사인이 대거 출현했는데, 이들은 부상하는 신흥 군주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이른바 유세()를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장자와 혜시의 만남은 유독 우리의 눈길을 끈다. 
혜시는 당시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두 나라, 곧 서쪽의 진()나라와 동쪽의 제()나라가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하던 무렵에 중원의 한복판에서 기울어가던 위()나라가 찬란하게 중흥하던 시절의 재상이었기 때문이다. 
장자는 아무런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조국 송()나라에 대한 미련을 접고 새로운 개혁의 기운이 가득했던 희망의 나라 위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혜시는 늘 장자에게 "당신의 말은 쓸모가 없소이다" 하고 핀잔하였던 모양이다. 
이 때문인지 「추수」편에는 장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혜시는 그에게 재상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후대에 장자의 후학들이 지어 낸 이야기로 보인다. 
오히려 「서무귀()」편에서 장자가 혜시를 애도하며 하는 이야기는, 장자와 혜시와의 관계가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장자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가다 혜시의 묘 앞을 지나게 되자 자신을 따르던 시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초나라의 서울인 영()에 거주하던 한 사람이 자기 코끝에 하얀 흙을 파리 날개처럼 얇게 바르고 장석()에게 이것을 깎아 내게 하였다. 
장석은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도끼를 휘둘렀으나 그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얀 흙이 전부 다 깎여 나갔지만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그 또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송()의 원군()이 장석을 불러들여 자기에게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장석은 예전에는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사람이 죽어서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장석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혜시가 죽은 뒤로는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졌구나!
적어도 이 이야기에 따르면, 장자에게 혜시는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장자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였던 지기()로 보인다. 
비록 그가 사인()의 신분이었다 하더라도 일국의 재상이었던 혜시와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혜시와 장자는 실제 어떻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아주 상식적인 추론을 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혜시와 장자의 관계를 후원자와 문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당시의 군주들은 훌륭한 인재를 모으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 위나라의 혜왕() 등은 모두 인재 육성에 가장 열심이던 군주들이다. 
맹자가 이들을 만나 유세하였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장자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역시 위나라의 혜왕, 송나라의 태재() 탕(), 노()나라의 애공()을 만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장자』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 또한 장자가 여러 유력자들에게 유세하였던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다. 
「설검()」의 이야기는 자못 맹자를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장자』 「설검()」편에서 그는 조()나라의 문왕()에게, 진정한 천자의 검이란 "한 번 휘두르면 제후의 행동을 바로잡고 온 천하가 복종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와 달리 제후의 검은 "한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고 군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된다"고 한다. 
서인()의 검이란 "위로 목을 베고 아래로는 간()이나 폐()를 찌르는 것으로서 마치 투계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문왕의 칼싸움 좋아하는 취향을 비난하여, 천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서인의 검을 좋아하는 것은 경멸할 만한 일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문왕 근처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검사들은 일자리를 잃어 자살하였다고 한다.

「설검」에 묘사된 이야기는 제나라 선왕이나 위나라 혜왕을 만나 거침없이 왕도() 정치를 시행할 것을 요구한 맹자의 기개와 다를 바 없다. 
장자는 그 거침없는 말투와 과장된 논조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 커다란 시기와 조소를 받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될 뿐이다. 
『장자』에서 처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어쩌면 처세에 능하지 못했던 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자조였는지도 모른다.

과거에서 미래로..

『장자』가 늘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사랑받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그에 대한 평가가 늘 호의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비록 그가 전국 시대의 인물이지만, 『장자』는 당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이었다. 
파란만장한 영웅 소설 『삼국지()』의 시대가 끝이 날 무렵 등장하는 죽림칠현()의 시대에 이르러 『장자』는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장자』는 이 시대에 편집된 책이다.

전통 지식인들의 『장자』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하다. 
동진() 시대의 왕탄지()는 없애버려야 할 책이라 했고, 신유학이 성립되는 송ㆍ명() 시대 이후에는 늘 이단의 책으로 취급되었다. 
『장자』의 「어부()」나 「도척()」편에서 유학을 비판한 내용이 신유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탓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장자』가 사랑받은 것 또한 도가에 배척적이었던 송ㆍ명 시대부터였다. 
한유(), 소식(), 왕안석() 등에게서 장자는 맹자와 다른 계열의 공자의 문인()으로 여겨졌다. 
『장자』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 비운의 운명을 살아가는 절망한 지식인들의 위안, 예술적 해방의 정신, 도교적 양생의 선구였다.

지난 20세기 한국에서 『장자』는 그동안 강력한 사회 비판과 해방의 철학, 자유와 평등의 옹호자, 미신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난 합리적 자연관의 대명사였다. 
이데올로기화된 권위주의적 사상에 대한 비판 철학으로 『장자』는 커다란 가치를 부여받았다. 
『장자』에 나오는 갖가지 비유적 이야기들이 전통 문인의 작품 창작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듯이, 독재와 참혹한 현실에 찌든 사람에게 『장자』는 마음의 위안이자 지혜의 보고였다. 
수많은 얼굴로 이해되었던 『장자』가 21세기에는 어떻게 비쳐질까? 그 또한 우리의 얼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