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7일 화요일

공자 [孔子, Confucius.

공자 [孔子, Confucius.

공자는 기원전 551년 오늘날 중국의 산둥성 취푸() 동남쪽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이다. 공자를 일컫는 영어 콘휴셔스(Confucius)는 존칭인 공부자()의 라틴어식 표기이다. 

공자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씨 가문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5살 때 노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제나라로 떠났다가 2년 뒤 귀국했다.
공자가 48살 때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중도()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 벼슬과 대사구()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500년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받음으로서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이 시기가 공자의 정치 생활에서 최전성기였다.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 씨 세력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고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났다.(기원전 497년) 
이후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4년만인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때 공자의 나이 68살이었다.

공자는 노나라의 ()을 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가장 아끼는 제자 안연이 세상을 떠나자 깊은 실의에 빠졌다. 
온몸으로 흐느껴 우는 공자를 제자들이 말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는 울고 싶은 만큼 울게 내버려두어라.’ 애제자를 떠나보낸 슬픔 가운데에서도 공자는 기원전 481년 [춘추()]를 완성했다. 
72살 때는 역시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일어난 정변에 휘말려 피살되었다. 
이번에도 공자는 제자를 위해 곡했다. 그리고 기원전 479년 73살 때 공자는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 언덕에 묻혔다.

생애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미자()의 후손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라고 이름지었다. 

공자가 출생한 후 곧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에 묻혔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자 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지방의 나이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공자는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공자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대부 맹희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을 때, 그는 후계자인 의자()에게 훈계하며 말하였다. 
"공구()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조상은 송나라에 있을 때 멸망당하였다. 
그 조상 불보하()는 원래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아우 여공()에게 양보하였다. 
정고보()에 이르러 대공(), 무공(), 선공()을 섬길 때,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매번 명을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하였다고 한다.

정()에 새겨놓은 명문()에 이르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 절을 한 뒤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중앙을 걷지 않고 담장가를 따라 다녀서 누구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이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청렴하게 살아왔다'라고 하였다.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듣기로 성인의 후손은 비록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반드시 재덕()에 통달한 자가 있다.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나 예를 좋아하니 그가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희자()가 죽자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과 더불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 
이해에 계무자()가 죽고 계평자()가 대를 이어 경()의 자리에 올랐다.

노 소공() 20년, 공자는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 
제 경공()이 안영()과 함께 노나라에 갔는데,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 목공()은 나라도 작고 외진 지역에 위치하였지만 패자()가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진()나라는 비록 나라는 작아도 그 뜻이 원대하였고, 비록 외진 곳에 처하였어도 정치를 베푸는 것이 매우 정당하였습니다. 
(목공은) 백리해()를 몸소 등용하여 대부()의 벼슬자리를 내리고 감옥에서 석방시켜 더불어 3일간 대화를 나눈 뒤 그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면 (목공은) 왕()도 될 수 있었는데, 패자가 된 것은 오히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경공은 매우 기뻐하였다.

공자가 35세 되었을 때, 계평자()가 후소백()과 닭싸움 끝에 노 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소공이 군대를 이끌고 평자를 공격하자 평자는 맹씨(), 숙손씨()와 연합하여 3가()가 함께 소공을 공격하였다. 
소공의 군대는 패해서 제나라로 달아났고, 제나라는 소공을 간후()에 거하도록 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경공()과 통하려고 하였다. 
공자는 제나라의 태사()와 음악을 토론하였는데 "소()" 음악을 듣고 그것을 배워,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하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이 반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유자()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을 성대하게 차려 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 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5-17)라며 안영을 찬양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은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었는지라 등용하지 못하겠다"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을 업신여기고 배신()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가 바른 길()을 무시하였다.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시()』, 『서()』, 『예()』, 『악()』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고, 가려고 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성사되지는 못 했다.

그 뒤에 정공()이 공자를 중도()의 읍재로 삼았다. 
일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기뻐하였다.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 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공자는 제사 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이 묻기를 “노나라에서는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하자, “곡식 육 만(약 2000섬)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에서도 곡식 육 만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에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공자는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만났다.

부인은 갈포()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 안에서 재배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 하였다. 
이 일로 자로가 화를 냈다. 

공자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내가 만일 잘못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공자가 조()나라에서 송()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았고, 월나라 왕 구천()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 하였다. 
일행은 곧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 하였다.

위령공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쓰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텐데” 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과 순화()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다,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감히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나는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 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가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 하면, 또 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자인 염구()를 불러들였다. 
자공()은 공자에게 노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있음을 알고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공자님을 부르게 하라” 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공자는 초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들은 굶고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공자가 강송()과 현가()를 그치지 않자, 자로가 성을 내며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를 불러 말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했는데, 우리의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자로가 말하였다.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야, 만약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남의 신임을 얻는다면 어째서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겠느냐? 만약에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 비간()이 있었겠는가?”

자로가 나오고 자공이 들어가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하고 통리()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연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말하였다. 
“안연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안회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 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재무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이었다.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가 병이 깊은 후 자공이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하였다.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이 시들려나!” 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애공 임금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공리(: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로 숭앙되고 있다” 하였다. (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에서 발췌)

연보

B.C.551 아버지의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탄생

B.C.549( 3세) 아버지 죽음

B.C.535(17세) 어머니 죽음

B.C.533(19세) 결혼

B.C.532(20세) 아들 리() 출생, 자는 백어()

B.C.522(30세)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함

B.C.518(34세) 노나라 맹리자가 죽으면서 맹의자 등 두 아들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배우라고 당부함

B.C.517(35세)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함

B.C.502(50세) 공산불요가 공자를 부름

B.C.501(51세) 처음 벼슬을 하여 노나라 중도재()가 됨

B.C.500(52세) 다시 사공()이 되고 다시 대사구()가 됨

B.C.497(55세)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감

B.C.496(56세) 광 땅에서 액운을 만남. 필힐이 부름

B.C.495(57세) 위나라 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남자()를 만남

B.C.494(58세) 벼슬을 그만두고 위나라를 떠남

B.C.492(60세)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가다가 환퇴의 액운을 당함

B.C.489(63세) 진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돌아감

B.C.488(64세) 다시 위나라(출공 재위4년)에 벼슬함

B.C.484(68세) 노나라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자 노나라로 돌아감, 고국을 떠난 지 14년만임. 이후 유약, 증삼, 자하, 자장 등의 제자를 가르침

B.C.483(69세) 아들 리가 죽음

B.C.481(71세) 제자 안회가 죽음, 제나라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자 노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간했으나 실현되지 않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낙심하여 『춘추』 저작을 절필함

B.C.480(72세) 자로가 위나라 난리에 죽음

B.C.479(73세) 세상을 떠남(, 『공자전』, 삼련서점, 2002 참조)




극기복례()와 정명()에 ... 의 공자
공자라고 하면 ()부터 떠올리지만 공자에서 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이다.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말하는 배움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인가? 그것은 예다. 
공자가 말하는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제도, 문화, 문물, 사상, 예법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이러한 예는 문()이기도 하다. 

악명 높은 양호로 오인되어 광() 지방 주민들에게 붙잡혔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이 문()을 말살시킬 작정이라면 살아날 수 없겠지만, 하늘이 문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면 그들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주나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공자의 자의식을 엿보기 충분한 발언이다. 

공자가 말한 ‘이 문’()에서 ‘문’은 주나라 문화의 총체이자 곧 예이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를 시대상을 배경으로 되새겨보면, 당시 사회는 하극상()의 상황, 즉 대부가 제후를, 제후가 제왕을 이기려하고 그 지위를 넘보는 상황, 사실상 주나라 봉건 질서가 무너져가는 현실이었다. 
‘자기를 극복해 예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극복해야 할 것은 하극상의 주체 또는 그러한 욕망이다. 
돌아가야 할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질서와 문화다. 
극기복례는 결국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통적인 주나라 정치·사회·문화 질서가 흔들리면서 많은 이들이 본래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합당하지 않은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 
주나라 정치·사회·문화 질서를 회복시켜야 한다.’ 
극기복례에 관한 한 공자는 다분히 보수적인 모습을 지닌다. 
공자의 정명(), 즉 이름의 뜻과 실제가 같도록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유교무류()에 나타난 혁신가로서..
공자는 출신 성분, 사회적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유교무류(),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늘날에는 당연해 보이는 이 생각은 그러나 공자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공자의 교육 목표는 군자(), 즉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었는데,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 일은 전통적인 신분 질서에 따라 귀족들이 세습했다. 
공자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능력과 덕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며, 여기에서 혁신가로서의 공자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전적으로 공자가 창안해 낸 생각이라 하기는 힘들다.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전통적인 주나라 신분 질서와 사회 계급 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를 도모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시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유교무류로 대표되는 공자의 교육 철학과 인간관은 충분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극기복례에서 볼 수 있는 보수성과 유교무류에서 볼 수 있는 혁신성. 변화와 혼란의 시대를 산 공자의 얼굴은 한 가지가 결코 아니다.

유교적 합리주의, 인문주의의 길을 놓은 공자
공자는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탄식했지만, 인격성을 갖춘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늘을 긍정했다기보다는 애제자를 잃은 비탄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관심은 주나라의 문물, 사상, 제도, 전통을 통틀어 일컫는 의미의 ‘문’()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있었으며, 인간의 역사와 문화와 삶 바깥의 신적(), 초자연적, 초월적, 신비적 영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유교를 현세적 합리주의, 유교적 합리주의, 유교적 인문주의 등으로 형용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공자의 이런 태도에 있다. 

공자 사상의 막대한 영향력 속에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은 적어도 그 주류 사상에서는 현세주의와 인문주의의 길을 걸었다.
공자는 제자 자로가 조상의 영혼과 귀신을 섬기는 법을 묻자 ‘아직 능히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 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라 답했고, 죽음에 대해 묻자 ‘아직 삶을 알지 못하는 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 답했다. 
공자는 사후의 삶 같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현재의 삶의 경험에 충실하면서 그 의의를 밝히고자 했다. 
제사를 올려야 마땅한 조상 이외의 다른 신에 제사 지내는 것을 꾸짖었으며, ‘귀신을 공경은 하되 가까이 하지는 말라’ 말했고 괴력난신(), 즉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상을 추구했던 공자. 
공자는 실패했는가? 적어도 그의 생애만 살펴본다면 성공을 거두었다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치를 실천에 옮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주나라 문화를 부흥시키려는 뜻도 여의치 못했다. 
자신의 가르침을 가장 잘 계승할 제자로 기대했던 안연도 요절하고 말았다. 
공자는 한나라 이후 비록 여러 차례 부침()은 겪었지만 2천 년 가까운 세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사상계의 패자()로 자리 잡았다. 
그토록 공자의 생명력이 길었을까? 공자와 유교가 지닌 보수성 또는 체제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 통치자의 지배 이념으로 적합했으며, 이에 따라 동아시아 역대 왕조들이 공자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일리 있는 주장이 있다.
공자의 생명력의 비밀은 어쩌면 그의 지독한 이상주의()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공자는 자기 당대에 ‘그 아니 될 줄 알면서도 애써 행하려는 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하극상의 혼란이 팽배한 현실에서 주나라 문화와 질서를 이상으로 삼아 추구했던 그로서는 당연히 들을 만한 얘기였을 법하다. 
바로 그 지점에 공자의 생명력이 있다. 
전통 동아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공자는 ‘그 실현하기 힘들 줄 알면서도 애써 실현키 위해 노력할 만한 이상적 정치와 문화와 사회관계’를 제시하고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현실에서 쉽게 이룰 수 있는 이상에 매료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루기 쉽다면 그것이 과연 이상일까? 이상은 이루기 힘들 때 이상으로서의 매력과 힘을 발휘한다.

공자의 사상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이다. 
인()에 대한 공자의 정의는 <논어>에서만 해도 사람다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보는 이유는 공자가 '인()'을 단지 도덕적 규범으로서가 아닌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사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공자 사상의 인()은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충(),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과 서()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을 중시하고 전승()한 것이 증자() 일파의 문인이다.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2월 26일 월요일

장자. 莊子 . 1

장자. 莊子 . 1

생각해 볼 문제들'

노자』와 『장자』를 실제로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서로 같은 '도가'로 묶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생각해 보자.
최근에는 노자와 장자는 서로 구분되는 전통으로서 각각 노학(), 장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송ㆍ명 시대 이후에는 주로 노장이라 부르지만 석로()나 노불()처럼 이단으로서의 도교와 불교 전통을 지칭하는 용어는 자주 보여도 노장()이라고 같이 부르면서 비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장자』는 과연 반유가적 사상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장자』는 역대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공자를 비판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도왔다"는 소식의 평가처럼, 공자를 대변인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학설을 드러낸 경우가 많다. 
사실상 『장자』 철학의 핵심들은 공자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유학자들이 공자를 부를 때 쓰는 무관의 제왕이란 뜻의 소왕()이란 말은 『장자』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장자』를 막연히 반유가적이라 볼 수는 없는데 북송 이후의 유학자들이 대개 그러하였다.

『장자』는 문학적인 면이 강할까, 아니면 철학적인 면이 강할까?
오늘날 『장자』는 신화, 예술, 철학, 문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와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어느 한 영역이나 분야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이해가 가능한 텍스트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 지식론은 명가()의 궤변이나 전변()의 제물설()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도'()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도'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의 생사()를 기()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장자』의 새로운 부분에는 위와 같은 생각에 기초하여 무위자연()으로 인민을 통치한다고 주장한 정치 사상도 있다.

'아내가 죽었다. 
남편은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이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기록에 단 한 번 나온다. 
그 남편이란 사람은 다름 아닌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의 그 유명한 철학가 장자였다.

그의 좋은 친구이자 사상가인 혜시()가 장자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왔다가 아내의 관 옆에서 두 다리를 쩍 벌리고 땅에 주저앉은 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혜시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서 "저 사람은 자네와 평생을 살면서 자식을 낳아 기르고 함께 늙어가다가 이렇게 불귀의 객이 되었는데,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대야를 두드리며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라며 따져 물었다. 
장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지. 
내 아내가 죽었는데 나라고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라네. 
한 사람으로서 저 여자는 본래 생명도 형체도 심지어는 기()조차 없었다네. 
그뒤 언제부터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점차 한데 섞여 기가 되고 형체가 되고 생명이 되어 생겨난 것이지. 
지금 이 상황은 그저 생명이 죽음으로 변한 것뿐이라네.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과 같다고나 할까. 
그녀는 마치 편히 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네. 
그런데 내가 그 옆에서 엉엉 운다는 것은 생명변화의 이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짓이지. 
그래서 울지 않는다네(이상 『장자』 「외편」의 이른바 '망물우화()' 참조).
장자는 이름이 주(),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 몽종(, 지금의 하남성과 안휘성 경계 지점) 사람이었다. 
대략 기원전 369년에 태어나 기원전 286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기원전 약 372∼289년)와 동시대 사람이며, 명가()의 대표적 인물인 혜시(기원전 약 370∼310년)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려서는 너무나 가난해 쌀을 꾸어다 끼니를 때우거나 짚신을 꼬아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 일쑤였다. 
평소 옷을 누추하게 입었는데, 언젠가 한번은 위나라 왕을 만나러 갈 때도 더덕더덕 기운 옷을 입고 갈 정도였다.

장자는 사상적으로는 노자를 이어받았다. 
진·한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노·장'이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두 사람의 사상은 같은 궤적을 나타내고 있지만 표현방식이 서로 달랐다. 
노자가 시적인 잠언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반면 장자는 주로 산문형식의 우화로 표현했다. 
장자의 사상은 그 언어가 생기 넘치고 발랄했으며, 유머러스하면서도 많은 은유와 비유를 통해 심오한 사상을 반영했다.

장자 역시 노자처럼 '부러 일삼지 않아도 다스려진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스린다)'는 '무위이치()'를 주장했는데, 『장자』 「외편」 곳곳에 보이는 '무위()'와 관련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장자는 천하를 대할 때는 '무위'로 너그럽게 대해야지 '유위()'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무위'로 다스리면 천하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순박한 도덕성을 지킨다. 
세상 사람들이 본성에 따라 순박한 도덕성을 지킨다면 따로 다스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서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요()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즐거웠으며 삶은 평화로웠다. 이 모든 것들은 요 임금이 억지로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걸() 임금이 통치할 때는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려 했으나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좇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일부러 그들을 다스리려 한다면 그들은 본성을 잃는 것은 물론 편안함과 즐거움도 잃게 된다. 
나라도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장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무위'가 으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무위'의 평정한 상태로 만드는 데 중점을 두어야지 사람을 다스리는 데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할 때 천하는 관리될 수 있다.

공자(기원전 551∼479년)도 순() 임금은 '무위이치'의 실천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세를 똑바로 남쪽을 향하고 있었을 뿐이다(『논어』 「위령공」)"라고 했다. 
장자는 순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당시를 분석하면서 오늘날 보기에는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비유를 들고 있다.
장자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하나는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부류이고, 또 하나는 일시적인 편안함에 희희낙낙하는 부류이고, 나머지 하나는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다니는 부류가 있다고 분석한다. 
순 임금은 이 중에서도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순 임금을 양고기에, 백성을 개미에 비유하면서 양고기는 개미를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개미는 양고기를 아주 좋아한다고 말한다. 
양고기에서는 개미를 끄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순 임금은 맛 좋은 양고기와 같기 때문에 백성들은 개미가 양고기를 향해 달려들 듯 그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순 임금이 도읍을 세 차례나 옮겼는데 그때마다 백성들이 그를 따른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 임금은 순 임금의 이러한 덕성을 살피고는 그를 개발되지 않은 지방으로 보냈고, 그 지방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번영을 이룩했다. 
순 임금은 늙어 눈귀가 어두워졌는데도 쉴 수가 없었다. 
장자는 순 임금을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는 순간 까치가 사마귀 뒤를 노리고 있구나." 이 구절은 『장자』에 실린 우화의 한 대목인데, 그 표현이 생동감 넘치는 것은 물론 오묘한 이치를 담고 있다. 
'객관적인 사물의 상호 제약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모략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눈앞의 작은 이익만 보지 말고 후환을 미리 막을 것을 경고하는 우화다(이 우화는 『설원()』 「정간()」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장자』 「외편」 '산목()'에 나오는데 그 줄거리를 한번 살펴보자.

장자가 어느 날 조릉()의 과수원 주변을 산책하다가 머리 위를 맴돌다 멀지 않은 과일 나무에 내려앉은 까치 한 마리를 보고는 활로 그 새를 쏘려 했다. 
이 순간 나뭇가지 위에 사마귀 한 마리가 두 다리를 쳐든 채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기분 좋게 맴맴 거리고 있는 매미를 덮치려는 모습을 발견했다. 
매미는 사마귀가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줄도 모르고 늘어지게 울고 있었다. 
매미를 잡으려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사마귀의 등 뒤에서는 까치가 사마귀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까치는 장자가 활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이 순간 장자는 깨달았다. "눈앞의 이익과 욕심에만 정신이 팔려 등 뒤에서 다가오는 화근을 잊는 수가 왕왕 있구나. 
다른 사람을 해치려 했다간 자신이 그 해를 입을 수 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장자는 활을 내던지고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과수원 주인이 급히 뛰어가는 장자를 보고는 도둑인 줄 알고 등 뒤에다 마구 욕을 퍼부었다.

장자의 말 속에는 정치·군사·철학 등의 분야와 관련된 모략사상이 적지 않다. 
산문형식에 생동감 넘치는 문체는 심오한 철학사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장자의 사상은 나름대로 한계점도 갖고 있다. 
그의 기본사상은 상대주의로, 만물은 '변화하지 않는 움직임이란 없고,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옮겨가고 있는'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성질과 존재는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은 크고 작은 것이 있고' '모든 것은 태어남과 죽음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식의 객관적 표준을 부정한다. 
 "이것도 바르다 할 수 있고 저것도 바르다 할 수 있으며, 이것도 틀렸다 할 수 있고 저것도 틀렸다 할 수 있다(「내편」)"는 것이다.

그럼에도 장자의 사상에는 틀림없이 적극적인 면이 있다. 
당시 사회를 "쇠붙이 하나를 훔친 자는 죽음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되는(「외편」)" 불합리한 현상을 뼈저리게 그리고 냉철하게 폭로하면서, 통치자에게 협력할 것을 거부했다.

그는 부귀와 이익을 천시했으며 명리를 뒤좇는 사람을 비웃었다. 
이런 그의 사상은 노자 사상과 통하는 점이 많다. 
우리는 '정수는 취하고 필요 없는 것은 버림으로써' 그의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중국 사상사에서 유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도가는 소극적 인생관을 앞세운다. 
장자는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냉소적이고 허무한 삶을 표방했다. 
소극적이라는 비평은 물론 퇴폐적이라는 비판도 따른다. 
장자의 사상에는 풍요로운 비유와 유머가 있다. 
장자의 모략사상이었다. 
고답적이고 형식에 치우친 유가사상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한 순간 사람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모략가로서 장자의 매력은 바로 이런 '일탈'에 있다고 하겠다. 
그의 일탈은 단순히 일탈에 머무르지 않고 그 추종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어 인간 처세의 중요한 모략으로 자리 잡았다. 
유가 일변도의 편협과 경색에 숨통을 트게 하는 일침()이 곧 장자 모략사상의 진수다.
장자는 이이(노자)와 어떤 관계도 없다. 
장자는 대체로 노자의 학설을 존중했고, 어떤 면에서는 더 극단적이었다. 
노자의 사상은 피하는 것이 나아가는 것이라고 여겼다. 
장자의 사상은 퇴폐적이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이며, 발생하는 모든 일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한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해서 그것을 늘려주려 하면 오리는 분명 두려워할 것이다. 
학의 목이 길다 해서 목을 늘려주려 하면 학은 슬퍼할 것이다. 
무릇 긴 것을 억지로 짧게 해서는 안 되며, 짧다고 해서 억지로 길게 해서도 안 된다."
도피조차도 의욕 없이 하는 것이니 그저 구차하더라도 살아가며 어떤 외부 형세에 의해 잘리고 농락을 당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정신승리를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장자는 진지하게 일을 대하는 것을 반대했다.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진실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이 싸워 당신이 나를 이겼다고 해서 당신이 옳은 것인가? 내가 당신을 이겼다 해서 내가 옳은 것인가? 두 사람 모두 옳을 수 있고, 두 사람 모두 틀릴 수 있다.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당신에게 찬성하는 사람이 판단하면 그는 당신을 찬성하는 것일 뿐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찬성하는 사람의 판단은 나를 찬성하는 것이지 어찌 공정하다 할 수 있는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의 판단은 우리를 반대하는 것이니 더욱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옳고 그른 것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시비에 의존할 수 있단 말인가."

각주

명 은 주옥봉(周玉鋒)으로 공산당원이자 철학자이다. 

  • 50년대 이후 대륙 중국에서 철학사 연구를 이끌었다. 
  • 그의 『장자』 연구는 영국의 그레이엄(A. C. Graham)에게 이어져 『장자』의 유파별 이해에 관해 획기적인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사가이자 신리학(新理學)을 통해 나름의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기도 했다. 
  • 현대 신유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철학사 저술은 우리나라에도 거의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중국 철학사가이다.

  • 고대 중국 은(殷)나라의 유명한 현인(賢人)으로 폭군 주(紂)에게 간언하다가 심장을 도려내는 벌을 받고 죽는다. 
  • 공자가 뜻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꼽은 것으로 유명하다.

  • 식객(食客)으로도 불리며 후원자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대신 자신의 학문이나 재주로 그에 대해 일정하게 봉사하던 처지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 위진(魏晉) 시대의 인물인 완적(阮籍)ㆍ혜강(嵆康)ㆍ산도(山濤)ㆍ향수(向秀)ㆍ유영(劉伶)ㆍ완함(阮咸)ㆍ왕융(王戎) 7명을 가리킨다. 
  • 이들이 정치계를 떠나 서로 교유하면서 대나무숲에서 술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세상을 조소하면서 기이한 행적을 남겼다고 한다.

  • 위진(魏晉) 시대의 학자로서 『장자』를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는 격한 주장을 담은 「폐장론(廢莊論)」이란 글로 유명하다.

  • 신유학(新儒學)이란 말은 풍우란이 공자ㆍ맹자ㆍ순자로 대표되는 선진(先秦) 시대의 유학과 당송(唐宋) 이후의 유학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신조어이다. 
  • 철학사에서 신유학이란 대개 송명(宋明) 시대의 이학(理學) 사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