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9일 목요일

오성과 한음설화 . 鰲城─漢陰說話.

오성과 한음설화 . 鰲城─漢陰說話.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에 관한 설화.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면서 장난이 심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물설화의 하나.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에 관한 이야기. 
오성과 한음은 조선선조 때의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면서 장난이 심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다.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정()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이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 놓았던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포천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도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인 동시에,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래 이야기로 풍부한 내용과 다양한 현장 증거물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전설은 전승 집단이 진실하다고 믿고,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물을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의 성격을 띠고 있어, 그 내용의 사실성 여부보다는 전승자의 의식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포천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전파·전승해 오면서 그들을 기리는 한편,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이를 통해 배우고 가르치며 실천하여 왔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포천 지역에서만 모두 7편이 채록되었고[『포천의 설화』 참고], 이밖에 다른 지역에 전하는 것 16편[『경기 북부 구전 자료집』Ⅰ에 7편, 『경기 북부 구전 자료집』Ⅱ에 9편]이 있고, 종손이 편찬한 『한음 이덕형 선생 이야기』에 4편[관악산에서 과거 공부했다는 일화], 기타 각종 문헌 자료에 일화가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이항복의 생애

이항복()[1556~1618]은 고려 말 대학자 익제() 이제현()의 후손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 호는 백사()이며, 오성 부원군에 봉해져 오성 대감으로 알려져 있다. 
1556년에 서울 서부 양생방[남대문 시장 주변]에서 출생하였다[문인 박미가 지은『백사 연보』와 『북천일록』참조].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 보냈으나 곧 학업에 열중하였다.

1580년[25세]에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영의정 권철의 아들인 권율()의 사위가 되었고,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90년에 호조 참의, 1592년에 임란시[도승지] 왕비, 왕자,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 원병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명의 사신 접대를 전담하였다.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7회], 이조판서[1회] 겸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1595년], 우의정[1598년, 오성 부원군]을 거쳐 영의정[1600년]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에는 벼슬에서 물러나와 노원[상계동 지역]에 머물렀고, 10월에 한음이 세상을 떠나자 직접 염하고 장례를 주관하였다. 
1616년에는 망우리에 동강 정사를 짓고 동강 노인으로 자처하며 지냈다. 
이후 인목 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 
1618년에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1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5월, 63세]. 1618년 8월에 포천 선영 부 묘소 좌측 을좌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었으며, 『백사집』이 남아 있고, ‘이순신의 충렬묘비문’, ‘한음묘지’도 남겼다[백사의 묘지와 묘표, 음기는 월사 이정구가 지었고, 신도비명은 상촌 신흠이 지었다]. 
이정구가 평하기를 “당색에 물들지 않고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했다.”고 칭송하였다[정신문화 연구원의 『한국 인물 대사전』과 『포천 군지』, 포천 문화원의 『포천의 서원』, 『백사집』 등 참고].

이덕형의 생애

이덕형()[1561~1613]은 1561년에 서울 남부 성명방[동자동]에서 출생하였다. 
유년 시절 한때 경상도 상주의 진외가에서 부친과 지냈으나 6세경에 상경하여 도저동에서 살았다.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 호는 한음()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1561~1613) 이덕형의 묘 및 신도비의 전경. 
지중추부사 민성의 아들이다 포천군 자작리 외가(영의정 유전이 외삼촌)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며 양사언(楊士彦)문하에서 수업하고 1580년(선조13) 이항복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북면 용연서원에 배향되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침착하였으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임에도 교우를 청하여 양사언()[1517~1584]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1580년[20세]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다. 
선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1591년[31세]에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최연소 문형, 유성룡의 후임, 3회]. 임진왜란 때에 왜장을 직접 만나기를 시도하기도 하였고, 선조를 호종하였고, 명군의 파병을 성사시켰다. 
이여송()의 접빈관으로 활동하였고, 대사헌, 한성 판윤을 거쳐 병조 판서[1593년, 2회], 이조 판서, 우의정[1597년], 좌의정, 영의정[1602년, 3회]을 지냈다. 
1613년에는 영창 대군의 처형과 인목 대비 폐모론을 이항복과 함께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삭탈되었고, 용진[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한음 별서[백사·노계·휴정 등이 가끔 내왕함]를 짓고 물러나 있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익()이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글씨와 문장이 뛰어났다[신도비 내용으로 정신문화 연구원의 『한국 인물 대사전』, 『포천 군지』, 『포천의 서원』, 『한음 문고』, 『한음 이덕형 선생 이야기』등 참고].

오성과 한음이 맺은 관계

이항복과 이덕형은 여러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에 어려서부터 친구로 자란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벼슬길에 나선 이후에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두 사람 다 율곡()의 추천으로 사가독서()에 참여한 사실, 임진왜란 때에 정치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뛰어난 공을 세운 점, 
명나라와의 관계를 열어 그 유지에 함께 기여하였고, 임해군()이 관련된 사건의 처리 및 인목 대비 폐모론과 영창 대군의 처형 등에 대해서 입장을 같이 하는 등 관직 생활에서 거의 평생 동안 동고동락했음을 알 수 있다.

당파도 이항복은 율곡의 서인 계열이었고, 이덕형은 퇴계(退)의 동인 계열이었지만, 둘 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당쟁에 휩싸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직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벼슬을 교대로 맡았던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성()의 삼상()[이덕형·이항복·이원익()]으로 불리었다. 
이와 같은 평생의 교분으로 한음이 먼저 세상을 뜨자, 오성은 한걸음에 달려가서 손수 염을 하고 장례를 도왔다고 한다.

한음의 아들이 오성에게 묘지()를 청하자, “그대 아버지가 세상에 없으니 나 또한 진심으로 의견을 나눌 친구가 없어지게 되었구나. 
나는 한음보다 나이로 치면 조금 위지만 덕이나 재주로 말하면 한참 아래였건만, 세월이 태평할 때는 같이 홍문관에서 학문을 닦았고 전쟁 중에는 서로 바꿔 가며 병조를 맡았었다. 
평생을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다가 이렇게 끝을 맺게 되니 비통한 마음뿐이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책을 맡아 가면서 나를 이해해 주는 이는 그대 아버지뿐이었고, 나는 평생 그를 존경하며 따랐으니, 이제 어찌 친구의 행적을 기록해 주지 않으랴.”고 하며[『한음 이덕형 선생 이야기』참고], 기꺼이 묘지명을 써 주었다.

오성과 한음의 포천과의 인연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둘 사이의 이러한 평생의 우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특히 포천 지역에 연고가 있어 여러 편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먼저 백사[오성]에 대해 알아보면, 『견성지()』에 “수원산 오금사 아래에 옥동반석이 있는데, 50명이 충분히 앉을 만하다. 
백사가 홍지성()과 함께 매년 봄, 가을에 이곳에 와서 놀며 감상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백사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포천에 자주 왕래했음을 보여 준다. 
기록으로 보아 백사의 할아버지 때에 포천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몽량]는 포천에도 살았고, 집안의 친척들도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도비[1652년, 상촌() 신흠()이 찬함.]에 보면 “할아버지[예신]가 숨은 덕이 있어서 일찍이 포천에다 묘소 자리를 잡고 말하기를 ‘내 뒤에 연이어 2세대가 반드시 출세할 것이다’고 하였다”고 나온다. 
죽기 전 북청 유배길에도 포천에 들렀고, 사후에도 포천에 묻혔다.

한음의 경우에는 외가가 포천 자작리에 있어서 어려서부터 왕래했음이 분명하고, 어렸을 적에 양사언과 교유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외숙[유전()]도 영의정을 지낸 바 있고, 후에 임해군이 그 첩을 빼앗고 살해했던 유희서[유전의 아들]는 그의 외종형이기도 하다. 
한음은 백사에 비해서 포천과의 연고가 약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일생이 외가와는 아주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인연이라고 할 수 없다.

오성과 한음의 성품

전기적 사실에 나타난 오성과 한음의 성품을 알아보면, 우선 백사는 “어릴 때부터 영리했고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마음이 침착하고 생각이 깊어 도량이 넓었다. 
뒤돌아보거나 말을 할 때나 침묵을 지킬 때나 모두 구차함이 없었다. 
8세에 시를 지었으며, 나오는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재물을 멀리 했으며, 의리를 좋아하고 웅건하여 얽매이지 않았다. 
씨름을 잘하고 공도 잘 차서 거리에서 용력을 내면 여러 소년들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훈계하여 호습[호기 부리던 습관]을 버리고 진실하게 되었다.”

“공의 풍채는 무겁고 원대하며 기품이 높고 넓었다. 
넓직한 이마에 우뚝 솟은 콧날에 양쪽 볼은 풍만하고 얼굴은 희었다. 
수염은 편편히 휘날리고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않았으나 기운은 일세를 덮었다. 
행실은 변폭을 쓰지 않되 움직임에 법도가 있었다.”, 
“친구와의 교제에 있어서는 진실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의리를 붙들어 승낙하기를 무겁게 하며 취하고 주는 데는 청백하되 구하지 않고, 분간하되 이상한 일을 세우지 않았다.”, 
“공이 소년 시절부터 기백과 의리를 짊어지고, 늦게는 학문을 좋아했다.”고 신도비를 통해 전하고 있다[신흠이 찬한 신도비 참고].

종합해 보면 백사는 어려서는 한때 호습이 있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서는 의리와 공평무사함을 신조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한음의 성품은 다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린 나이에도 문장이 뛰어나고 행동이 숙성하여 아이들끼리 놀 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재주가 뛰어났으나 겉으로 내세우질 않아서 사람들은 그의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의 학식과 재주를 알아보고 매우 놀라워하였다. [중 략] 
사람들은 그를 총각 정승이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내가 스승[율곡]을 모욕한 한음의 장인[이산해]을 심하게 비방하였음에도 한음은 그 일로 내게 딴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한음문고』의 「한음 언행록」참고], “한음은 천품이 매우 고상하여 항상 정신이 맑았으며, 겸손하고 절제된 생활로 자신의 재주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한음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한음문고』의 「한음 묘지」 참조]. 이를 참고하면 한음은 어려서부터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았고, 겸손하였으며 신의가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두 사람이 기질상의 차이점은 있으나, 교우에 있어 신의를 지키고 일 처리의 공명정대함이나 정치적인 중립을 지킨 점 등은 닮았다고 하겠다. 
한음 20세, 백사 25세로 1590년 같은 해에 급제하여 동시에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발령을 받으면서부터 둘의 우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한음 문고』참고]. 
모두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30여 년간 국가의 대소사를 같이 하면서 깊은 우정을 맺은 것으로 판단된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어려서부터 절친하였던 것으로 나오지만, 나이 차이[5살]와 자란 곳이 그렇게 가깝지는 않아서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백사 연보』 참고].

이들의 우국충정과 제세안민의 충정, 공사의 엄정함, 우정과 해학, 청백리 정신은 오늘날에도 감동을 받기에 충분하다. 
당대의 교유가 현재의 두 집안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실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들 사후에 오래지 않아서 포천의 유생들이 재산을 모아 사우를 세워 각각 ‘화산 서원’과 ‘용연 서원’에 배향한 것도 또한 두 사람의 행적을 길이 후손에 전하고자 하는 포천 사람들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

포천 지역에서 채록된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모두 7편으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성과 한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하루는 한음이 오성에게 ‘오성의 약혼자에게 말시키기’ 내기를 걸었다.

오성이 한음에게 ‘작대기를 들고 나를 죽인다고 쫓아만 오라’고 하였다.

오성이 쫓기면서 처갓집으로 들어가 약혼자의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에 약혼자가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서 오성이 이겼다.




오성과 한음은 말썽꾸러기였고, 몹시 짓궂었다.

하루는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집 창문에 큰 보따리가 떨어져 있었다.

집에 들어가니 하인이 한 명밖에 없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하인이 떨면서 말을 못하였다.

오성이 없던 일로 하고 용서해 주었다.

이때 오성의 나이가 열 살 안팎이었는데, 남다른 포용력과 관용의 마음씨가 있었다[『백사 연보』 참고].




하루는 오성이 조회를 나가는데 시간이 늦었다.

모면할 궁리를 하다가 들어가면서, 중놈과 내시의 싸움을 말리느라고 늦었다고 말하였다.

누군가 물으니, “내시는 중놈의 상투를 쥐고 중놈은 내시의 불알을 쥐고 싸웠다.”고 하였다.

조정 백관들이 폭소를 터뜨리고 늦은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오성이 ‘한음 부인의 배꼽 밑에 큰 점이 있다.’고 소문을 냈다.

한음이 화가 나면서도 걱정하고 고민을 하였다.

고심 끝에 부인에게 얘기하였는데, 하필 부인에게 진짜 점이 있었다.

부인이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고, 한음에게 재상들을 모두 초대하라고 했다.

저녁으로 만둣국을 대접할 것인데, 맨 마지막 것은 반드시 오성 대감 앞에 놓으라고 하였다.

오성이 만둣국을 먹는데, 똥이 들어간 만두여서 기겁을 하였다.




오성은 잘 살았는데, 한음은 가난하였다.

어느 날, 한음의 동네에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한음이 오성에게 송장 처리를 상의하고 퇴궐 후에 만나기로 하였다.

한음이 오성을 골려 주려고 먼저 송장 옆에 가서 같이 누워 있었다.

한음이 갑자기 일어나 소리쳤으나, 오성은 그저 크게 웃기만 하였다.



선조가 오성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하여 대신들에게 ‘주연을 베풀 테니 모두 술 한 잔과 안주로 계란 한 개씩을 올리라.’고 하였다.

영의정부터 술을 올리다가 오성의 차례가 오자, 임금에게 술만 권하고 안주는 올리지 않았다.

선조가 까닭을 물으니, 오성이 엉덩이를 치면서 ‘꼬끼오’ 했다.

오성은 자기가 수탉이기 때문에 알이 없다고 하였다.



옛날 송우리는 상하로 나뉘어져 각각 별도의 장이 섰다.

오성이 하루는 한음의 마부 노릇을 하면서 송우리 주막거리에 다다랐다.

오성이 점심으로 팥죽을 사서 나뭇가지로 저으면서 왔다.

한음이 연유를 물으니 ‘코가 떨어졌다.’고 하여, 한음은 굶은 채로 한양으로 갔다.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의 주도권은 대체로 오성에게 있고, 한음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야기들은 오성이 한음과의 내기에서 이기거나 한음의 계략이 실패로 끝나거나 한음을 놀리는것이다. 
오성에게 망신을 주는 것도 한음의 부인이었다, 
나머지는 오성의 성품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오성의 포용력과 관용 재치와 기지 대범함 등을 보여 준다.
오성의 짓궂은 성품도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대부분 오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들이 전승되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성이 봉변을 당하는 것은 한 편뿐이었다. 
천하의 오성도 약자인 여성에게는 한 수 아래라는 민중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성격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음은 ‘어려서부터 행동이 숙성하여 아이들끼리 놀 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는 오랜 지기인 이귀()의 『한음언행록』을 참조하면, 에서처럼 짓궂은 성품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히려 점잖고 어른스러웠다고 생각된다. 
신도비의 ‘나면서부터 성품이 뛰어나서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하면서도 조심성이 있어 장난 놀이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는 기록도 참고가 된다.

이에 비해 오성은 그의 신도비에 ‘어려서부터 의리를 좋아하고 웅건하여 얽매이지 않았다. 
씨름을 잘하고 공도 잘 차서 거리에서 용력을 내면 여러 소년들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훈계하여 호습을 버리고 진실하게 되었다.’
[『백사 연보』 오성은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약간 방황했던 듯하고, 소위 골목대장 기질도 있었던 듯하다. 이야기의 전승자들은 이러한 점을 십분 활용하여 이야기를 꾸몄다고 할 수 있다. 
오성의 해학과 골계, 재치와 기지에 넘치는 기질은 보다 민중적 기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이야기의 중심을 오성이 끌고 가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음보다 오성의 나이가 연장[5살 많음]인 것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백사 연보』에 “13세 때에 옷과 신발을 벗어 함께 놀던 가난한 친구들을 호탕하게 도와준 것도 여러 번이었다.”라는 기록도 그의 사람됨을 알게 해 준다.

이들이 하나의 이야기에 같이 등장하는 것은 관직에서 오랫동안의 교유와 각별한 우정, 임진왜란이라는 국난 극복에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함께 한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해군에 의해 핍박을 받아서 죽음에 이른다는 공통점이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된 결과이다. 
거기에 두 사람 모두 일찍부터 포천에 서원이 세워져 향사되어 온 점도 이야기의 전승에 아주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오성과 한음이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거나 둘 다 말썽꾸러기에 짓궂었다거나 오성은 잘 살았는데 한음은 가난했다거나 심지어 포천에서 함께 송우리로 왕래했다거나하는 내용들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내용들은 전승자들이 나름대로 이야기에 합리성과 개연성을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사 연보』의 이야기가 유포된 것이기도 하다. 
송우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일화 7]의 경우는 사실과는 아주 어긋나지만, 이것도 전설이 갖는 지역적 특성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전설에는 비장한 것이 많고, 이에 비해 흥미 위주의 민담은 인간 행위에 대해 구김살 없는 신뢰를 나타내고 낙관적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민담적 요소가 강한 전설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 중에 삶의 여유를 갖게 해주는 시원한 웃음을 제공하는 소화()적인 요소가 많다. 
소화는 골계의 고향이고 계속적인 공급처로서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문학을 살찌게 한다.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는 교훈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에 주목을 요한다.

결과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포천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 속에서 폭 넓게 향유되면서 전승되어 왔다. 
여기에는 당연히 널리 알려진 이들의 교유를 바탕으로 한 전기적 사실과 포천 지역에 분포한 관련 유적 등 여러 자료들이 증거물로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공유해 오면서 포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소속감과 애향심·자긍심을 키워 나가는 한편, 그를 통해 즐거움과 교훈을 수백 년 동안 공감해 온 것이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 

오성과 한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그러던 중 오성이 약혼을 하였다. 
옛날 양반들은 약혼하고도 부인될 사람을 못 만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성도 약혼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하루는 한음이 오성에게 말하기를 “네 부인될 사람에게 말을 시키면 내가 한턱을 내고, 말을 못 시키면 네가 한턱을 내라.”라고 해서, 오성이 ‘그러마’ 하고는 둘은 내기를 했다. 
오성은 “그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작대기를 들고 날 때려죽인다고 쫓아만 오너라.” 하니, 한음이 작대기를 들고 ‘이놈, 때려죽인다’고 쫓아갔다. 
오성은 계속 쫓겨 가다가 자기 처갓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마루 대청에 서 있던 자기 약혼녀의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부인 나 좀 살려주쇼!” 하니, 약혼녀가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여보시오. 약혼을 했으면 겉만 봐야지 속까지 볼랍니까?”라고 말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오성은 한음과의 내기에서 이겼다고 한다.





오성과 한음은 말썽꾸러기였고 몹시 짓궂었다. 
가장 훌륭한 일들을 하였다. 그중에도 오성 부원군은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바가 깊었다. 
하루는 밖에 나가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자기 집 창문에서 큰 보따리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을 들쳐보니 자기 집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들이었다. 가지고 들어가니, 집에는 하인 한 명만 있고 아무도 없었다.

“자네, 이 보따리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하인은 벌벌 떨면서 말을 못하였다. 그 하인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이 들통이 난 것이었다. 
오성의 나이가 10살 안팎이었는데, 오성이 그것을 가지고 들어가서 하인에게 말하기를 “나도 몰랐던 일로 할 터이니, 이것을 그대로 두어라. 
그리고 너도 몰랐던 것으로 하라.”고 일렀다.

이렇게 오성은 어려서부터 포용력과 남을 용서하는 마음씨가 있었다.





하루는 오성이 아침에 조정으로 조회를 나가는데, 늦었다. 
임금을 모시는 조회 시간에 늦어서, 이를 ‘어떻게 모면할까’ 궁리하였다. 
그러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말하기를 “아! 참 오늘 별꼴을 다 보겠다. 
아니, 오다가 중놈하고 내시하고 싸우길래, 그 싸움을 말리느라고 늦었다.”고 하였다.

“그게 무슨 싸움이냐?”라고 다른 이들이 물으니, “아, 글쎄. 내시는 중놈의 상투를 쥐고 중놈은 내시의 불알을 쥐고 싸우는 게 아닌가. 
그것을 말리다 늦었단 말씀이야.”

조정 백관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조회에 늦은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루는 오성이 ‘한음 부인의 배꼽 밑에 큰 점이 있다’고 소문을 냈다. 
한음은 그 소문을 듣고 화가 나서 ‘이것을 어떻게 없애나’하고 걱정을 하며 고민을 하였다. 
부인이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별일 아니오.”라고 한음이 말하였다.
하도 고심을 하니까 그 부인이 또 다시 물었다. 
한음이 상황을 다 이야기하였다. 
하필 부인의 배꼽 밑에 진짜 점이 있었다. 
한음이 “당신 배꼽 밑에 점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궐 안에 소문이 다 퍼져 있소?”라고 말하였다. 
부인이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렸습니까?”라고 물으니, 한음이 대답하길 “물어보나 마나 오성밖에 그럴 사람이 없지 않소.”라고 말하였다.

한음 부인이 ‘좋은 수가 있다’고 하며, “내일 재상들을 다 집으로 초대하십시오. 
저녁 식사 대접으로 만둣국을 낼 것이 옵니다.”라고 말하였다. 
한음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부인이 시키는 대로 조정 재상들을 초대하였다. 
술을 한 잔씩 먹고 다들 취하여 기분이 좋을 때, 한음 부인이 직접 상을 들고 왔다. 
한음에게 몰래 맨 마지막에 들어가는 만둣국은 반드시 오성 대감 앞에 놓으라고 하였다. 
한음은 시키는 대로 오성 앞에 만둣국을 놓았다. 
모두들 맛있게 먹기 시작하는데 오성이 만두 하나를 꽉 깨물더니, “어!”하고는 쩔쩔매기 시작하였다.

다들 ‘왜 그러냐’고 하니, 한음 부인이 그 광경을 밖에서 보고는 소리를 질렀다.“거짓말하는 입에는 똥바가지를 안겨야 한답니다!”

부인이 오성에게 똥을 넣어 만든 만두를 주어서 복수를 한 것이었다.




오성 부원군은 형편이 좋아서 상당히 잘 살았던 반면 한음은 가난하였다.

어느 날 한음이 사는 동네에 전염병이 돌았다. 
동네 사람들이 다 죽어나갔다. 하루는 한음이 집에 가는 길에 괴이한 냄새가 풍겨 나와 “이게 무슨 냄새냐?” 라고 동네 사람에게 물으니, ‘송장 썩는 냄새’라고 하였다.

한음이 “왜 그냥 두느냐?”고 물으며, “존의와 소임[존의란 오늘날의 통장, 소임이란 오늘날의 반장격이다]을 불러 오라.”고 하니, 동네 사람이 대답하길 “그 사람들도 다 병에 걸려 누워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이튿날 한음이 대궐에 들어가서 오성과 상의를 하였다.

“송장이 다 썩어 가는데 어쩌면 좋겠느냐?”라고 물으니, 오성이 “존의나 소임이 치우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하였다.

“그네들도 다 병에 걸려 치울 사람이 없다.”고 하자, 오성은 “그러면 우리라도 가서 치워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퇴궐 시간이 되어 서로 헤어지면서 몇 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였다. 
오성이 “집에 가서 염을 하기 위한 삼베를 하인들에게 먼저 보내고 곧 가겠다.”고 하자, 한음이 생각하길 ‘이번 기회에 오성을 조금 골려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한음은 오성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저만치 오는 것을 보고 송장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송장과 같이 누웠다. 그것도 모르고 오성은 오자마자 삼베를 풀어서 송장을 염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필 송장처럼 누워 있는 한음을 묶기 시작하였다. 
한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야! 이놈아!”하고 소리치자, 오성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크게 웃기만 했다고 한다.



"선조 임금이 오성의 지혜로움을 시험하기 위하여 계략을 세웠다.  
많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저녁에 짐이 주연을 베풀 테니, 모두들 술 한 잔씩을 나에게 권하고 안주로는 계란 한 개씩만 올려라. 
지금 이 얘기는 너희들만 알고 있고, 오성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저녁이 되어 영의정부터 차례로 나와, “전하, 제 술 한 잔 드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도포에서 계란을 꺼내 “안주로는 이것을 드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오성의 차례가 왔다. 
오성은 임금에게 술을 권하고 나서는 안주를 주지 않았다. 
선조는 “왜 경은 술만 주고 안주를 안 주는고?”라고 하였다.

이때 오성은 대뜸 엉덩이를 탁탁 치더니, ‘꼬끼오’하며 닭 흉내를 내었다. 
선조가 말하기를 “그게 무슨 소린고?”하자, 오성은 “저는 수탉이기 때문에 알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조는 오성의 지혜로움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옛날 송우리는 하송우리와 상송우리로 나뉘어져서 각각 따로 장이 섰다. 
그 당시 포천에는 장이 없었기 때문에 하송우리의 장을 포천으로 빼앗아 왔다.

오성이 하루는 한음의 마부 노릇을 하였다. 
한음이 말을 타고 양반이 되고, 오성이 상놈이 되어서 한음의 말을 끌었다. 
이렇게 해서 송우리 주막거리에 다다르자, “나리, 점심을 드셔야죠?”라고 오성이 말을 하자, 한음은 “암, 먹고 가야지. 저기 가서 팥죽 한 그릇을 사 가지고 오너라.”라고 말하였다.

오성이 “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하고 팥죽을 사러 갔다. 
팥죽 한 그릇을 산 오성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옷에 쓱쓱 닦은 후, 팥죽을 ‘휘이’ 저으며 한음에게 가지고 갔다. 
그것을 보고 한음이 “야, 이놈아! 그것을 더럽게 저으며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다.

오성이 말하길 “제 코가 여기에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성은 한음의 점심을 굶긴 채로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전쟁 에도 한음과 오성의 우정



한음() 이덕형()과 오성()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친구 사이로 서로 아끼며 도와주면서 우정을 주고받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들이지만 이들의 우정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아서도 잔잔히 이어지고 있어 우리를 감동시킨다.

1592년(선조 25)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조선군의 항거를 별로 받지도 않은 채 물밀 듯이 북상하여 수도 한성을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도성을 떠나 평양까지 피란을 왔으나 이곳도 안전치 못하여 다시 북상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왕은 먼저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선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떠나게 한 다음 윤두수와 김명원을 시켜 평양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밤을 타서 신하들을 거느리고 평양을 빠져나와 영변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덕형을 사신으로 삼아 명나라로 들어가 원병을 청해 오게 하였다. 이덕형이 사신으로 떠날 때 그의 친한 친구 이항복이 그를 전송하면서 “이번에 만일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는 나의 시체를 용만( : 지금의 평북 의주)에서 찾으시오.” 하고 결연한 빛을 띠며 말했다. 그러자 이덕형 역시 결연한 빛으로 “아닐세, 만일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대는 나의 시신을 노룡( : 명나라 수도)에서 찾도록 하게.” 하면서 비장한 작별을 하였다. 전쟁 중에도 서로를 격려하며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두 신하의 우국충정과 서로간의 우애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후일 명의 장군 이여송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우리 조정에서는 이항복을 접반사로 삼아 그들을 영접케 하였다. 이여송은 강을 건너오자마자 대뜸 손부터 내밀었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으나 혹시 저들의 비위를 거스를세라 조심스레 대하던 신료들이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접반사 이항복이 뚜벅두벅 걸어가서 소매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이여송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여송이 펼쳐보니 조선지도인데, 조선의 산천과 이정표, 그리고 각 군의 진영을 세밀히 그린 군사지도였다.

이에 거만을 떨던 이여송도 반색을 하며 “허, 조선에도 인물이 있군.” 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일화 의 오성대감

이항복은 큰 인물답게 신비스러운 일화를 많이 남겼다. 
태어나서 사흘 동안 젖도 먹지 않고 울지도 않아서 박견이라는 소경 점쟁이를 불러 보이니 “장차 큰 인물이 될 점괘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돌이 되기 전에 우물에 빠질 뻔한 얘기도 전해진다. 
유모가 우물가에서 어린 항복을 안고 있다가 잠시 졸았는데, 꿈에 얼굴이 긴 백발의 남자가 나타나 지팡이로 그녀의 종아리를 때렸다. 
“어째서 어린아이를 보지 않느냐?” 유모가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어린 항복이 우물에 막 빠지려는 찰나였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항복을 구했지만 꿈에 지팡이로 맞은 종아리가 며칠 동안이나 아파서 유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항복의 선조인 고려 말 명신 이제현()의 제사가 있었는데, 제삿상에 오른 영정을 보고 유모는 깜짝 놀랐다. 
우물가에서 졸고 있을 때 종아리를 친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항복이 8세 때 아버지인 참찬공 이몽량()으로부터 칼과 거문고를 시제()로 받아서 지은 시가 있다.
“칼은 장부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는 태고의 소리 간직했네().”

9세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새 옷을 입고 나가서는 헌 옷과 바꿔 입고 오는가 하면 새 신발을 신고 나가서는 맨발로 들어오기도 했다.
“동무가 너무 부러워하여 차마 그냥 돌아설 수 없었습니다.”
그랬으니 권율 장군이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위의 말을 따라 관복 밑에 짧은 베 잠방이를 걸치고 나왔는데, 바로 그 사위라는 자가 임금에게 관복을 벗고 조회하자고 청한 것이다. 
난감하지만 권율 장군은 관복을 벗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는 천성적으로 의협심이 강하고 장난을 즐기는 소년이었다. 
이항복과 그의 죽마고우 이덕형(, 1561~1613년)이 어린 날부터 즐긴 재담과 해학은 ‘오성()과 한음()’이라는 어린이용 만화까지 나와서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축구와 씨름 등을 즐기며 자유분방하게 자라던 그는 16세에 어머니마저 여의고 3년상을 치른 뒤에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는데, 진지한 학업 태도로서 명성을 얻었다. 
성균관에 입학하던 그 해에 도원수 권율() 장군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당시 권율 장군의 아버지가 영의정 권철()이었으니 고아 소년이 영의정의 손녀사위가 된 것이다. 
20세에 진사 초시에 오르고 25세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관료 사회의 꽃이라 불리던 청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항복이 병조판서이고 그의 장인인 권율 장군이 도원수이던 어느 해 여름의 일이다.
“장인어른, 날씨도 무덥고 하니 오늘 조회에는 의관속대를 다 갖춰 입고 가실 게 아니라 베 잠방이 위에 융복을 걸치고 가시지요.”
권율 장군은 고지식하게도 사위 이항복의 말을 따라 집에서 입는 베 잠방이 위에다 융복을 걸치고 대궐 조회에 참석했다. 
이항복은 병조판서의 조복을 제대로 차려 입었다. 
그 날 대궐 조회에서 이항복이 선조 임금에게 주청했다.
“전하, 날씨가 너무 무덥사옵니다. 
관복을 벗고 조회를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선조가 너그럽게 응락했고, 조회에 임한 모든 대신이 관복을 벗었다. 

“경은 긴 옷이 없는가? 어찌하여 짧은 베 잠방이를 입었는가?”
대답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장인을 대신하여 이항복이 대답했다.
“전하, 권 도원수는 집이 가난하여 여름에는 항상 짧은 옷만 입고 지낸다고 하옵니다.”
선조는 좋은 옷 한 벌을 권율에게 하사하였다.
이항복의 의도는 전쟁중임에도 모시옷이나 명나라에서 수입한 비단으로 옷을 해 입는 다른 대신들을 비판하고 장인의 검소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진정한 선비 이항복

죽마고우였던 한음 이덕형과 어린 시절 재미난 일화들을 수없이 남긴 백사 이항복은 백사나 이항복이라는 이름보다 오성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1556년 포천에서 고려 때의 문장가 이제현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1575년 진사 초시에 올랐고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올랐다. 
1617년에는 인목대비 김씨를 폐위하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된 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이항복은 이때 유배지로 가는 도중 애틋한 시 한 편을 남겼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를 벗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이항복은 적소에 위리안치된 채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해에 관직이 회복되었고 시신은 고향 포천으로 이장되었으며 포천과 북청에 제향되었다. 이후 1659년 화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그가 살았던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엽의 조선은 동서 분당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국난으로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어느 한 파에 속하지 않고 중심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에 난처한 경우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항복은 의지가 곧고 강한 성격이었다. 
지나치게 명민하고 사리가 밝아 때로는 극히 타산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의를 지키며 살다가 의로 인해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죽은 뒤 조선 중기의 한문 사대가 중 하나였던 월사() 이정구는 “그가 관직에 있는 40년 동안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완벽에 가까웠던 이항복의 기품과 높은 인격을 칭송하였다. 
그는 기지와 해학이 뛰어났으며, 자신의 직책과 보신에 두려움 없이 강직하였고, 소신이 뚜렷해 시비를 정확하게 가렸으며,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였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있고, 가산면 방축리에 헛묘가 있다. 
그것은 유림들이 묘에 제사를 지낼 때 노론과 남인의 뜻이 서로 맞지 않아 일부에서 헛무덤을 만들어 따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의 주검을 놓고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끼리 왈가왈부했던 것이 조선의 당쟁이었다. 
이곳을 지나던 매월당 김시습은 「포천 고을에서」라는 시 한편을 남겼다.

쇠잔한 고을에 사는 사람 적어서 황량한 마을엔 나무만 무성하다.
좋은 바람 보리밭을 스쳐가고 가는 비는 마음 위를 지나간다.
길 작으니 사람 발자취 끊어지고 산이 둘러싸 골짜기 으슥하구나!
가고 갈수록 봉우리는 그림 같은데, 가고 나면 근심이 풀어지리라.

조선의 문신 이항복은 백사나 이항복이라는 이름보다 오성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 삭탈관직된 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은 해에 관직이 회복되었다. 
시신은 고향 포천으로 이장되었으며 포천과 북청에 제향되었다.


오성과 한음은 둘 다 장난을 좋아하여 서로 속이기를 즐겨하였다. 
하루는 오성이 한음의 부친을 찾아뵙고 신주 거풍하는 날이라고 속였다. 
한음의 부친은 오성의 말만 듣고 신주를 모두 꺼내 줄에 매달아 바람을 쏘였는데 한음이 나갔다 돌아와 이 광경을 보고 오성이 다녀갔음을 짐작하였다. 
이 장난을 되갚아 주기로 결심했다. 
한음은 평소 오성이 욕심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송편을 찔 때 그 중 하나를 크게 만들어 그 안에 인분을 넣게 하였다. 
오성이 한음의 집에 와 송편을 먹는데 한음의 의도대로 오성이 큰 송편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냉큼 집어 먹었다. 
오성이 먹으니 그 안에 인분이 들어있어 크게 골탕을 먹고 말았다. 
한음이 신방돌에 엉덩이를 얼려 부인의 배에 대는 장난을 쳤는데 이 때문에 부인이 냉병에 걸려 설사로 변소를 수시로 오가게 되었다. 
한음이 하인들의 복색을 하고 얼굴을 가린 채 변소에서 나오는 부인을 겁탈했는데 부인이 이후로 식음을 전폐하고 병이 들게 되었다. 
부인의 병이 점점 깊어지자 한음은 부인에게 그날 입은 치마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부인이 가져온 치마의 찢어진 부분과 한음이 가진 부분이 딱 맞으니 부인이 한음의 장난이었음을 알고 크게 웃어넘기고 재밌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