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9일 목요일

이항복 . 李恒福,

백사() 이항복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경주().  상(). 호 백사()·필운()·청화진인()·동강()·소운().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의 아들이며 권율() 장군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으로 오성과 한음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고, 오성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임진왜란 시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수습책에 힘썼다

백사(이항복(, 1556∼1618)은 조선시대에서도 특히 친숙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오성과 한음’이라고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부연이 필요 없겠지만 ‘오성()’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이고 ‘한음()’은 한원부원군 이덕형(, 1561~1613)이다. 
서로 다섯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뛰어난 인물이 특히 많이 배출되었던 16세기에도 우뚝한 존재였다.
그런 위상과 능력 때문에 이항복은 임진왜란과 당쟁의 격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왜란을 극복하는데 뛰어난 외교적 활약을 펼쳤지만, 당쟁의 여파로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동강().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의 방손()이며, 이성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신()이고,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로 결성현감 최륜()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

오성부원군()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과의 기지와 작희()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했다 한다.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의 아들인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 ≫ 강연()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에 의해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의 ≪강목≫ 한 질씩이 하사되고 옥당에 들어갔다. 
1583년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 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예조정랑 때 발생한 역모사건에 문사낭청()으로 친국에 참여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해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 무마해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파당을 조성하는 대사간 이발()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 후에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듬 해 정철()의 논죄가 있자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해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했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 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했고 윤승훈()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이 황응양()을 조사차 보냈다. 
이에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이 파견되었다.
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사유()의 3,000 병력이 왔으나 패전하자, 다시 중국에 사신을 보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여송()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탈환, 환도하였다. 
다음 해 선조가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를 설치해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했을 때 대사마()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
1594년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다.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해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하였다.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과 양호()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에 올랐다. 
이 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가 동료 사신인 경략()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使)가 되어 부사(使) 이정구()와 함께 명나라에 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 후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하자, 자신도 함께 휴전에 동조했다고 자진해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조정에서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 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602년정인홍()·문경호() 등이 최영경()을 모함, 살해하려 한 장본인이 성혼()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공격하였다. 
이에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 후 성균관 유생들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구금되어 권당( : 동맹휴학)하는 사태가 생기자, 그가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해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다.
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 일가의 멸문,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의 살해 등 흉계를 자행하자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해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별장 동강정사()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 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가 서궁(西 : 경운궁. 곧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죽은 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며 1659년(효종 10)에는 화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1746년(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을 보내 영당()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키는 은전이 있었다.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 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의 요청으로 봉사손()의 관리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후세인들은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면서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출생-사망1556 ~ 1618
본관경주()
자상()
백사()
시호문충()
별칭오성부원군, 오성, 오성대감, 동강노인
국적조선
활동분야정치, 행정, 외교
출생지경기도 포천
주요저서《백사집》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과 한음()의 우정과 해학이 얽힌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이의 문하로 서인에 속했다. 
이후 저작()·박사·정언()·수찬()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승지로 선조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으며, 전란 중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한음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다시 병조판서를 맡아 전란을 지휘하는데 앞장섰다. 
1598년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발생하 목숨을 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주사(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으로 전란을 무사히 극복하여 그 공로가 인정되었으며 1599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리에 있었으나, 대북파()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 등 강경 대북파가 주도한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귀양가는 길에 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시조가 유명하다.

《철령 높은 봉에》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었다가
님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과 북청의 노덕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 《사례훈몽()》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상신()〉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서울 부암동에는 이항복의 별장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으며 이 계곡을 '백사실계곡'이라고 부른다.



가문과 배경
이항복은 1556년(명종 11) 10월 15일 서울 서부(西) 양생방(, 지금 남창동ㆍ서소문동ㆍ태평로ㆍ남대문로 일대)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2남이었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고 자는 자상(), 호는 백사()ㆍ동강()이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우참찬(정2품)까지 오른 이몽량()이고 어머니는 현감 최윤(, 본관은 전주)의 딸이다.
아버지 이몽량은 우애가 깊고 너그러운 인물이었던 것 같다. 
[명종실록]의 졸기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형과 혼자 사는 누이가 가난했는데, 이몽량은 그 조카들을 모두 거뒀다고 기록되어 있다(명종 19년 10월 4일).
아버지가 참찬이라는 고관이었지만, 이항복은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아버지는 그가 8세 때 세상을 떠났고(1564년(명종 19) 10월) 어머니도 7년 뒤에 돌아갔다(1571년(선조 4) 9월). 그 뒤 그는 누이의 집에서 자랐다.
이항복의 가계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그가 도원수 권율()의 사위였다는 것이다. 
그는 1574년(선조 7) 18세의 나이로 권율의 딸과 혼인했고, 그 뒤 2남 1녀를 두었다.

출세

이항복은 1580년(선조 13) 24세의 나이로 급제했다. 
조정의 중심 인물은 율곡 이이였다. 
20세 연상의 대정치가는 이항복과 이덕형 등을 홍문관에 추천했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항복은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이상 정6품), 홍문관 직제학, 우승지(이상 정3품) 등 주요한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앞서 말했듯이 62년에 걸친 이항복의 생애에서 그 후반을 구성한 주요 사건은 임진왜란과 당쟁이었다. 
그 사건들은 그 규모와 기간에서 각각 동아시아와 국내를 전체적으로 지배했다. 
기축옥사(1589)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났을 때 이항복은 30대 중반의 촉망받는 관원이었다. 
그가 그 사건들의 중심에 섰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까웠다.

왜란 에서 활동'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항복은 이조·병조·형조판서·대제학·우참찬(이상 정2품)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이런 사실은 그 시기 그의 비중과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증거일 것이다.
그가 특히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분야는 외교였다. 
그는 이덕형과 함께 명에 원군을 요청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고, 결국 이여송()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명군의 참전은 많은 부담과 피해를 안기기도 했지만, 평양 탈환에 성공하는 등 전황을 역전시키는데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명에서 파견된 사신과 장수들을 전담하다시피 만나고 접대했으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능란하게 해결했다. 
1598년(선조 31) 명 사신 정응태()가 동료인 경략() 양호()를 무고하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이항복은 진주변무사(使)로 명에 파견되어 갈등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런 공로로 그는 1601년(선조 34) 호종()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3년 전 기축옥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기 조선을 휩쓴 내홍()은 당쟁이었다. 
이항복은 서인의 대표적 인물로 당쟁의 중심에 섰다가 결국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당쟁 과 별세


이항복이 주로 맞선 정파는 북인이었다. 이항복이 당쟁에 개입한 첫 번째 계기는 기축옥사였다. 
그는 33세의 예조정랑(정5품)이었다. 
그 사건에 문사낭청(- 죄인을 문초한 조서를 작성하는 등의 일을 맡은 임시관직)으로 참여했는데, 신하들끼리 비난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중재하고 시비를 공정히 판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북인은 선조 말엽부터 세력을 확대했고, 그 영수는 정인홍(, 1535~1623)이었다. 
이항복은 왜란이 끝난 뒤 우의정(1598년)을 거쳐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1600년)에 올랐다. 
그는 이이와 성혼이 세상을 떠난 뒤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북인과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1602년(선조 35) 정인홍 등은 기축옥사에서 최영경()이 무고하게 옥사한데는 성혼()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공격했다. 
이항복은 성혼을 비호했는데, 북인이 탄핵하자 즉시 사직했다.
북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결국 광해군의 등극(1608년)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10년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이항복은 그 기간 동안 임해군() 처형(1609년(광해군 1)), 영창대군() 살해(1614년(광해군 6)) 등 주요 사안에서 북인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항복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사실은 한음 이덕형과의 우정과 거기서 나온 소화()들일 것이다. 
이항복은 전염병으로 몰살한 일가족의 염습을 이덕형에게서 부탁받고 혼자 그 집에 갔는데, 갑자기 시체가 일어나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했다. 
알고보니 이덕형의 장난이었다.
장인 권율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이항복의 집에서 자라던 감나무 가지가 자신의 집으로 휘어지자, 권율은 자기 집 소유라면서 그 감을 따먹었다. 
이항복은 권율의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그럼 이 주먹은 누구 것이냐”고 추궁했고, 결국 미안하다는 권율의 승복을 얻어냈다. 
언제의 일화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런 기지를 높이 산 권율이 그를 사위로 맞았을 가능성이 컸다고 추측된다.
난세일수록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역설과 순리를 넘나들거나 그 경계에 있는 현상일 것이다. 
뛰어난 인물이 그리 많았는데 어째서 난세가 닥쳤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고, 난세를 극복하려면 출중한 인물들이 그만큼 더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항복은 그런 난세를 통과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 명신이었다.

백사 이항복( , 1556~1618년)이 살아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의 조선 사회는 위기 의식이 충만한 사회 변혁기였다.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하듯이 성종대에 마무리지은 문물 제도가 1세기에 걸쳐 운용되면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선 왕조의 개창과 왕조 초기의 다난했던 정치적 격변기에 공훈을 세운 훈구파는 1세기가 경과하면서 기득권을 향유하는 정치적 구세력이 되었다. 
이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는 중종반정(1506년) 이후 그 입지를 강화하면서 성리학 이념의 구현에 박차를 가했다.

조선 전기의 사화들은 바로 이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신구 정치 세력의 갈등과 길항 관계에서 파생한 사건이었다. 
기득권과 현실주의를 고수하는 훈구파가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 상황에서, 훈구파에 대한 견제 세력이 필요한 국왕의 후원을 받으며 중앙 정계에 진출한 성리학적 이상주의자들이 사림파였다. 
30년 단위로 부침을 계속하는 사림의 정치판 진출은 바로 그들 사제()의 1세대 간격을 의미한다. 
사화에서 죽음을 모면한 잔존 사림은 귀향하여 제자를 양성, 자신들의 이상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제자들은 성장하여 다음 세대에 다시 중앙 정계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항복의 성장기에 해당하는 명종대는 사화기()의 끝 지점에 해당한다. 
이미 전국적으로 사림이 배출되어 사림세가 대세화한 이 시기에 외척으로 대표되는 훈구 세력의 발호는 극점에 달해 있었고, 승려 보우(, 1509~1565년)를 등용하여 불교 부흥의 기치를 든 문정왕후의 정치 관여는 사림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림 세력은 불교 중흥이 성리학을 국학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기본 정책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사림의 나아가는 방향으로 볼 때 정치적인 반동기로 해석될 소지가 충분하였다. 
문정왕후가 사망할 때까지 불교를 배척하고 ‘요승()’ 보우를 죽이라는 사림의 상소와 파업이 끊이지 않았다.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는 ‘선교일체론()’과,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한 ‘일정설()’을 주장한 고승 보우를 ‘요승’이라 매도하고 유배지에서 기어코 살해해야 할 정도로 사림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의 구현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이항복이 자라던 시기는 불교 중흥의 기치를 든 문정왕후와 성리학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하려는 사림이 치열하게 부딪치고,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핵으로 하는 권력 핵심부의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던 시대였다. 
윤원형이 전리방축()된 1565년(명종 20년)은 이항복이 한참 민감한 나이인 10세 때였다. 
아마도 그 실상을 친구들과 함께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사건을 평생의 거울로 삼았을 수도 있었다. 
외삼촌의 세도와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서 기를 못 펴고 산 명종은 문정왕후가 별세하자마자 윤원형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필생의 과업을 다했다는 듯이 1567년 6월 승하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의 조카인 하성군() 균()이 입승대통()하여 선조가 되었다. 
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서 왕궁이 아닌 사가에서 성장했고 성리학자인 한윤명 등에게서 배웠다.

선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사림의 원로인 이황을 비롯하여 장차 기호학파의 영수가 되는 신진 기예 이이를 등용했다. 
이이는 이항복보다 20세 연상으로서 명종대의 실상을 체험적으로 숙지했다. 
과거에 급제한 것은 명종대였지만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은 선조대였으니, 이이야말로 선조대의 대표적 사림이라 할 수 있는데, 이항복은 기호학파의 일원으로서 이이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



이항복은 1613년(광해군 5) 관직에서 물러나 망우리에 동강정사()를 짓고 동강노인()이라고 자칭하면서 지냈다. 
57세였다.
1617년(광해군 9) 북인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고 시도하자 다시 한번 강력히 반대하다가 결국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1618년 5월 13일). 유배 가면서 삭탈되었던 관작은 즉시 회복되었고, 석 달 뒤인 8월 포천에 예장되었다. 
영욕이 교차한 62세의 일생이었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 1권과 ≪주소계의 ≫ 각 2권, ≪노사영언 ≫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이다.

이항복 집터

[ ─]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弼雲洞)에 있는 바위유적.
지정종목문화재자료
지정번호서울문화재자료 제9호
지정일2000년 07월 15일
관리단체종로구청
시대조선
종류/분류유적지
크기면적 397㎡
2000년 7월 15일 서울특별시문화재자료 제9로 지정되었다. 
바위유적이 있는 곳은 조선 선조 때의 재상 백사() 이항복()의 옛 집터로서, 현재는 배화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학교 본관 뒤뜰 큰 바위에 이항복의 후손인 월성(이유원()이 쓴 것으로 짐작되는 글이 새겨져 있다.
글 왼쪽에는 '필운대()'라는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동추() 박효관() 외 9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푸른 바위에는 흰구름이 깊이 잠겼다.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전해오니,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
글 뒤에 "계유 월성 이유원 제(), 백사선생 필운대()"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가운데의 글은 이유원이 지은 것이 확실하며, 오른쪽의 '필운대'라는 글씨 역시 필법으로 보아 이유원의 것으로 추정된다. 
서체의 흐름과 생가의 유적을 밝히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박효관 등의 이름을 열거한 오른쪽의 글은 이유원의 글보다 앞선 1873년이나 1813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항복의 옛집 건립과 관련된 명문()으로 보인다. 이 근처는 특히 살구나무가 많아서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