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3일 화요일

박문수 . 朴文秀. 1

박문수 . 朴文秀.


박문수(1691~1756)에 관한 설화는 문헌에도 꽤 많지만 특히 구비설화는 다른 인물담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 가운데는 박문수의 행적을 반영한 것도 있겠으나, 이전부터 전해 오던 설화에 박문수 이름이 결부된 것도 꽤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설화 속의 박문수는 암행어사를 표상하는 일종의 ‘보통명사’에 해당하는 예가 많아서 단순하게 인물전설로 다루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암행어사 ,暗史.

조선시대 왕의 측근의 당하( : 정3품 하계 통훈대부 이하) 관원을 지방군현에 비밀리에 파견해 위장된 복장으로 암행하게 한 왕의 특명사신.
당하 관원 중에서 임시적으로 특명해 이들을 비밀리에 보내면서 수령의 득실( :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과 백성의 질고( : 고통이나 어려움)를 탐문해 돌아와서 임금에게 사실대로 아뢰는 것을 직무로 하였다. 
수의() 또는 직지()라고도 한다.
암행어사가 일반어사와 다른 점은 일반어사는 이조()에서 임명하고 그 거동이 공개적인 것에 비해, 왕이 친히 임명할 뿐 아니라 그 임명과 행동을 비밀에 부친 점에서 특색이 있다고 하겠다.
비밀을 본질로 하는 특명사신 파견의 전례는 조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헌부의 당하 관원을 행대() 또는 행대감찰이라 해 지방에 파견할 때, 
혹은 왕의 측근의 관원을 경차관()에 임명하고 지방에 파견할 때, 염문규찰()의 편의상 비밀리에 파견해, 
잠행체찰()했다든가 암행규찰()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암행을 전제로 한 불시분견()·출기불의()·성기도종()·제기선성(: 행방을 알리지 않는 것)·
추생분견( : 추첨분견, 즉 암행어사가 행선하는 군현을 왕이 추첨으로 결정함.) 등의 기사도 실려 있다. 
당시 그들의 성과가 암행어사 탄생의 계기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1392년(태조 1) 의주 등 국경지역의 불법적인 월강무역(貿)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시대 최초로 행대어사를 분견한 예가 있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수령·감사 등 지방관과 경차관() 및 토호()·향리 등 지방세력의 불법탐학을 규찰하는 것이었다.
즉, 태조∼태종 때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정비하던 시기로, 이들은 수령보다 토호 등 지방세력의 불법을 집중적으로 규찰하였다. 
세종∼단종 때는 부민고소금지법()의 시행과 더불어 수령의 권한이 확대되고 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수령의 무능과 비리를 적발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이 후 성종 때까지 지속적으로 파견되면서 지방제도 정비와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이 제도를 더욱 보완·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세조∼성종 때에는 행대어사의 품계가 수령과 같은 6품이어서 불법수령을 직단()할 수 없는 한계를 시정하였다.
즉, 5품 이상의 관료에게 대관직()을 겸임시켜 3품 이하의 관원에 대한 직단권을 발휘할 수 있는 분대어사제도()를 시행해 수령규찰의 임무를 전담시켰다.
이 후 지방관들이 자신의 직분이 안정되면서 이를 이용해 백성에 대한 탐학과 질고를 은밀히 자행하는 예가 많았다. 
이에 행대어사제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게 되자, 행대어사를 보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령감찰의 방법이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성종 때 조지서()는 이른바 측근의 관원으로 응교직()에 있었는데, 그 직을 가진 채 조선 팔도에 각각 추생분견한 관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활동과 관련해 1490년(성종 21) 1월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지서가 어사가 되어 항상 번개와 같이 관부에 출입함이 야골( : 들에 사는 매)과 같으며, 순찰할 때는 복색이 무상해 혹은 관복하고 혹은 미복( : 변장하는 것)해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알 수 없다고 하더라."
여기서의 '어사'는 암행어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특명사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공식적으로 어사명칭을 붙이지 않은 것은 어사가 황제의 특명사신이므로 그 사용을 삼간 때문으로 보인다.
중종대에 한산군()이손()은 암행지법()은 성종 때의 조익정()이 계문해 생긴 것이라고 했는 바, 위 기록과 부합하는 주장이다.
암행어사라는 성어()가 실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중종 4년(1509) 11월 정묘조에 부원군() 김수동()이 "근일 암행어사를 분견해 수령의 범죄를 적발하는 것은 편치 못한 일이오."라고 한 발언 속에 나타난다. 
이 말은 중종이 당시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많이 파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종은 1507년 정월 기묘일에 어사 권홍() 등 인명을 분견하였다. 
출입촌항문민폐막( : 촌항에 출입해 백성의 질고를 물음.), 제각읍지공자재건후( : 각 고을에서의 대접을 거절하고 말린 밥을 휴대함.), 무제번폐( : 힘써 번거로움과 폐 끼치는 것을 덞.)했다는 것을 보면, 분견된 6인의 어사는 암행어사였음이 틀림없다.
암행어사 파견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이 있었으나, 역대의 왕들은 이를 꾸준히 시행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왕조정치가 점점 쇠미해지자 더욱 빈번히 파견되었으며, 제도적으로도 정비되고 발전되었다.
한편, 암행어사가 아닌 각종 일반어사도 많이 파견되어, 조선 말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각종 어사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는 어사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암행어사가 제도적으로 완성된 단계의 형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왕이 어사가합인( : 어사후보자)의 추천을 명령하면 3의정()이 시종관안()을 놓고 가합인을 뽑아 초계( : 선발해 아룀.)한다. 
왕은 전국 360군현의 이름을 기입한 참댓가지가 들어 있는 죽통( : 추첨통)에서 암행시찰할 군현을 뽑아 추첨으로 결정했는데, 이를 추생()이라 불렀다.
암행어사를 일명 추생어사()라고도 불렀다. 
왕의 소환으로 어전에 나온 어사가합인은 왕으로부터 추생한 군현의 이름이 기입된 봉서()를 지급받고, 승정원에서 승지로부터 팔도어사재거사목() 한 권, 마패() 한 개, 유척() 두 개를 지급받고 퇴궐한다.
봉서는 암행어사 임명장이나 다름없는데, 표면에 '도남대문외개탁( : 남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봄.)' 또는 '도동대문외개탁( : 동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봄.)'이라고 써 있었다. 
어사는 이를 지정된 대문 밖에 나가 비로소 열어보고 임무를 확인한 뒤 목적지로 직행하였다.
마패는 역마 사용권을 부여하는 증패로 1마패에서부터 5마패까지 5종이 있었는데, 암행어사에게는 2마패가 지급되었다. 
마패의 소지는 봉명사신(使)임을 입증하는 것이므로 권력의 상징이었고, 어사의 봉고()나 처분문서()에 마패를 날인해 직인으로 대용하였다. 
유척은 영조척()으로서, 형구()의 남조( : 권력을 남용해 만듦.) 여부를 검열하는 데 사용하였다.
암행어사는 명령을 받은 바로 그날 즉일 출발이 원칙이었다. 
역마를 타고 한두 명의 대리( : 곁에서 시중을 두는 하급 관리)를 데리고 목적지로 향하였다.
관내에 들어가면 수령의 탐도혹형()이나 향간호우()의 가렴주구를 탐지하기 위해 폐의파립( : 남루한 옷과 찢어진 삿갓)으로 변장하고, 풍찬노숙 염문정찰()하였다.
암행어사가 염찰을 마치고 생읍( : 추생군현의 고을)에 들어가 수령의 관가에서 개좌( : 관가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음.)하는 것을 출두라고 불렀다. 
출두의 방법은 관가의 삼문()을 역졸과 대리가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출두!'를 외친다.
암행어사는 잠적장소에서 유유히 관가로 행차해 수령과 이속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동헌() 대청에 착석 개좌한다. 
공문서의 검열을 번열()이라 하고, 관가창고의 검열을 번고()라 한다.
불법문서가 현착()되면 수령의 관인과 병부()를 압수하고 창고에 '(봉고)' 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해 창고 문을 봉한다.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하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재심해 풀어주고 체수( : 죄가 결정되지 않아 오랫동안 감금된 죄수)를 풀어준다.
양민을 괴롭히는 향간호우를 적발 착수비관( : 어사발급의 영장)을 발급, 체포구금하고 처벌하였다. 
원부()·원부()의 소지( : )나 정장()을 접수하고, 제사( : 판결·처분)·입안( : 증명문)·완문( : 처분하는 문서) 등을 발행해 원한을 풀어주었다.
암행어사가 소임을 마치고 귀환하면 서계( : 보고서)와 별단( : 부속문서)을 각 한 통씩 작성해 왕에게 복명하는 날에 제출한다. 
서계는 수계()라고도 불렀으며 생읍시찰에 관한 특별지시사항, 봉서에 지시된 특별사항 등을 채록·탐문해 서한형식으로 조목조목 기술하였다.
별단은 서계에 미진한 사항, 연도제읍(沿)에 관한 시찰사항, 어사재거사목에 규정된 일반적인 폐정사항에 대한 개선책을 담은 의견서로서, 어사 자신의 교양과 정치적 식견을 개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계는 필수적 복명요건이지만 별단은 임의사항이었다.
영조와 정조대에는 서계와 별단의 내용 여하로 어사의 인물이 평가되었으며, 출세에 영향이 미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암행어사가 귀환하고도 장기간 서계를 제출하지 않거나 서계를 대필시킨 것이 알려지면 추고()·처벌하였다.

<박문수설화>의 핵심은 암행어사 활동담으로, 한 가지 삽화 중심으로 구성되기도 하고 여러 삽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박문수 암행담의 첫머리에는 흔히 그의 과거급제에 얽힌 이야기가 놓인다. 
박문수는 과거 길에 상복을 입은 한 여인한테 불길한 느낌을 받고 그 집에 유숙했다가 여인이 외간 남자와 사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박문수가 뒷날 그 일을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길을 나섰는데 웬 도령이 나타나 과거의 시제()를 알려 준다. 
그 덕에 장원급제하여 어사가 된 박문수는 여인이 정부와 짜고 남편을 죽인 사실을 밝혀낸다.

전날 시제를 알려 준 도령은 죽은 남편의 원혼이었다고 한다. 
그 뒤 본격적으로 어사로 움직인 박문수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어느 가난한 집에 들어갔다가 오누이한테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는데, 그 오누이는 부자 정혼자에게 핍박과 함께 파혼 압력을 받는 중이었다. 
박문수는 어사 출두 후 오누이의 후견인이 되어 두 사람이 좋은 배필을 얻도록 해 준다. 
한 번은 그가 웬 중과 동행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여인을 겁탈하고 죽인 뒤 숨어 지내는 사람이었다.

박문수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 중을 징치하여 죽은 여인의 한을 풀어 준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다. 
박문수가 산에서 쓰러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웬 여인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젖을 짜서 먹여 준다. 
의식을 되찾은 박문수는 여인의 집에 출두해서 친척 행세를 하여 그 집이 크게 발복하도록 한다. 
박문수가 늘 문제를 훌륭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무뢰한들한테 쫓기는 사람을 보호하지 못해 그를 죽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원님놀이를 하던 한 아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잠깐 장님 노릇을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모르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박문수를 따라다니면서 놀라운 지혜와 용기로 문제 해결을 주도하기도 한다. 
깊은 산중에 있는 마을에 들어갔다가 주인을 겁박하던 흉악한 종들에게 둘러싸여 궁지에 처했을 때 아이가 기지를 발휘해서 마을을 빠져나와 관가에 연락하여 문제를 무사히 해결했다고 한다. 
박문수는 때로 문제 해결의 주체라기보다 접근이나 이용의 대상처럼 형상화되기도 한다. 
돈 많은 백정이 박문수의 친척 행세를 하다가 그의 도움을 얻어 훌륭한 양반으로 인정받는다는 이야기를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박문수설화>는 암행담에 해당하는 민담이 주류를 이루지만, 그의 행적에 얽힌 전설적인 자료도 있다. 
소금짐을 지고 고개를 넘다 쓰러진 노인을 구완하고 짐을 대신 져 줬다든가 암거미를 먹여 급살병 걸린 사람을 살렸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박문수는 문헌설화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그 형상은 구비설화와 꽤 차이가 있다. 
그가 등과 전에 천하박색의 물 긷는 여종과 동침해 준 덕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문헌에서 특징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헌에는 박문수가 다른 선비의 글을 빼내어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박문수가 가련한 오누이의 후견인이 되어 배필을 구해 줬다는 이야기는 문헌설화와 구비설화에 함께 나타난다.

박문수는 실명의 역사인물 가운데 한국 설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설화 속 박문수는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암행어사를 표상하는 보통명사적인 인물의 성격을 지니는 때가 많다. 
그는 임금에게 받은 막강한 힘을 지닌 존재이면서 숨어서 움직이는 정의로운 문제 해결자로 형상화되는데, 무엇보다도 백성의 편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그가 문제 해결의 적극적 주체로 움직이는 경우 이외에 어린아이나 신령의 도움을 받거나 사람들의 이용 대상이 되는 예에서도 박문수는 늘 백성과 함께하는 인물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의 실수에 대한 이야기조차도 그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박문수의 형상에는 양반 관리에 대한 민간의 소망과 기대가 단적으로 담겨 있는바, 그것은 ‘백성의 편에서 정의롭게 움직이며 나라에서 받은 힘을 통쾌하게 발휘하는 인간적이고도 친근한 사람’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일부 설화에서 박문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엿보이는 것은 설화의 세계에서 그의 이름이 워낙 높았던 데 따른 자연스러운 반대급부라 할 수 있다.

역사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설화는 대개 인물전설의 성격을 지닌다. 
일부 표상적인 인물에 대한 전승은 민담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오성과 한음이나 숙종 대왕, 박문수 등이 그 사례인데, 박문수에 관한 전승은 민담 지향성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암행어사가 등장하는 수많은 설화가 박문수 이야기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박문수를 ‘어떤 암행어사’라고 해도 서사적 맥락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고유명사가 설화에서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된 셈인데, 이런 사례로는 박문수가 가장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숨은 해결자’로서 암행어사가 갖는 서사적 표상성과 매력도가 워낙 높았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문수는 구전설화의 세계에서 형성된 최고의 역사인물 캐릭터 가운데 하나로, 그가 세상을 숨어다니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다는 서사는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 매력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일찌감치 <박문수전>이나 <삼쾌정>으로 소설화된 바 있으며, 현대에도 동화와 만화로 거듭 출판되고 있다. 
암행어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라디오나 TV 드라마들도 박문수 설화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문수 테마 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은석산에 조성된 길.
어사 박문수 테마 길은 조선 시대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1691~1756]의 묘가 있는 은석산 일원 등산로를 따라 조성된 총 5.7㎞의 길이다.

천안시에서 박문수 어사의 숭고한 뜻을 도보 체험을 통하여 되새기고 인근 호국 충절 관광 벨트 탐방을 통해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천안시의 주요 관광 명소와 연계된 역사 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어사 박문수 테마 길은 시민들은 물론 신규 공무원과 공직자들의 현장 학습 코스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코스는 총 5.7㎞로 고령 박씨 종중 재실 주차장 출발~은석사~박문수 묘~팔각정~고령 박씨 종중 재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로 약 2시간이 소요된다. 
구간 중간 중간에는 휴식 공간·주차장·화장실 등 편의 시설을 비롯하여 박문수 생애와 어사 시절 일화 등을 담은 스토리텔링 판이 설치되어 있다. 
연계 탐방 코스는 박문수 어사 묘~아우내 장터[7.14㎞/15분]~유관순 및 조병옥 사적지 및 생가[2.95㎞/5분]~홍대용 과학관[4.51㎞/8분]~이동녕 기념관[8.43㎞/14분]~독립 기념관[1.7㎞/3분]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에 전해 내려오는 박문수와 산신령에 관한 이야기.

어사 박문수()[1691~1756]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하는데, 북면에도 여러 전설이 전하고 있다. 
「어사 박문수와 산신령」은 박문수가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안찰()하러 가다가 만난 행인이 알고 보니 효성이 지극한 처녀를 돕기 위해 현현한 산신령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민병달·이원표 등이 조사하여 1998년 천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천안의 민담과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어사 박문수가 삼남 지방을 안찰하기 위하여 신분을 감추고 초라한 행색으로 시골길을 걷는데 행색이 지관()인 듯한 행인이 같이 가길 청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걸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큰 마을에 다다랐는데, 때마침 상갓집이 있어 그 집에 하루 신세지기로 하였다. 

행인이 스스로 지관이라 밝히자 상주가 마침 여러 지관이 와 있으니 내일 함께 묫자리를 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행인은 묫자리를 정해 주면 대가로 1,000냥을 달라고 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한 지관이 나서며 “내일 영험한 징표가 나오는 자리에 묘를 씁시다. 
만약 영험한 징표가 있는 자리를 물색하지 못하면 나도 1,000냥을 내겠소. 
반대로 당신이 지면 행장()을 다 털어야 합니다.” 하며 큰 소리를 쳤다. 
행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여러 지관들과 행인은 산에 올라 명당을 물색하였다. 

잠시 후 전날 큰 소리를 치던 지관이 먼저 한 곳을 정하더니 땅에 나무를 꽂으며 그곳에 광중()[시신을 묻는 구덩이]을 지으면 광중에 황금빛이 역력할 것이라 하였다. 
행인은 코웃음을 치며 그 자리는 송곳 같은 바위가 솟아 시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였다. 
장정들이 달려들어 땅을 파 보니 행인의 말대로 송곳 같은 바위가 여러 개 솟아 있었다. 
잠시 후 행인이 자리를 정하고 장정들에게 파 보라고 하니, 토색이 좋고 광중에도 황금빛 이슬이 맺힌 것이 누가 보아도 명당이었다. 
상주가 기뻐하며 행인에게 1,000냥을 주었고 내기에 진 지관도 1,000냥을 주었다.

박문수가 행인과 다시 길을 떠나는데 이번에는 큰 기와집이 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행인과 박문수는 점심이나 얻어먹을 요량으로 기와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행인이 주인을 찾자 하인이 나오더니 “주인 영감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병이 나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점심을 대접할 정신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행인은 자신이 의술을 좀 아니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주인 영감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두 사람을 서둘러 방으로 모시게 하였다. 

행인은 환자의 진맥을 짚어 보더니 주인 영감에게 아들의 병을 고쳐 줄 테니 1,000냥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행장에서 약 한 알을 꺼내 물에 개어서 아들의 입에 넣었다. 
약이 목을 넘어가자 주인 영감의 아들은 숨을 깊이 쉬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주인 영감이 기뻐하며 행인에게 약속대로 1,000냥을 주고 점심을 정성껏 대접하였다.

박문수와 행인은 그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정자나무가 있는 곳에서 잠시 쉬어 가려는데, 행인이 박문수에게 “내가 다녀올 데가 있으니 여기서 이 돈을 가지고 기다려 주시오. 
만약 해 질 때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불빛을 찾아 가시오.” 하며 돈을 맡기고 어디론가 바삐 떠났다.

행인을 기다리던 박문수는 해가 저물어도 행인이 돌아오지 않자 먼 곳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따라 걸어갔다. 불빛은 산신당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산신당 앞에서는 한 처녀가 정성껏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박문수가 처녀에게 연고를 묻자, 
처녀가 대답하기를 자기 아버지가 나랏돈 3,000냥을 사사로이 쓰다 발각이 되었는데, 돈을 갚기 위해 백방으로 다녔으나 돈을 구하지 못하여 아버지가 죽을 처지에 놓였다고 하였다. 

처녀는 산신당의 산신령이 영험하다 듣고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다.

박문수는 그제야 자신에게 3,000냥을 들려 산신당까지 보낸 행인이 그곳 산신령임을 알아챘다. 
박문수가 산신당 문을 열어 보니 산신령의 영상이 꼭 행인을 닮아 있었다. 
박문수는 산신령에게 공경을 표시하고 처녀에게 3,000냥을 건네주었다. 
처녀는 그 덕분에 관가로 달려가 돈을 갚고 아버지를 구출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박문수가 봉노[주막집의 가장 큰 방]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박 어사, 미안했소. 
처녀의 효성이 하도 지극해서 내 박 어사의 신세를 졌소.” 하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박문수는 관가로 가서 고을 원님을 만나 처녀의 효성을 칭찬하며 잘 보상하도록 부탁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산신령의 현현’ 모티프는 설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화소이다. 
효성이 지극하다거나 충직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산신령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도와주는 이야기이다. 

「어사 박문수와 산신령」에서는 산신령이 직접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박문수를 중간자로 개입시킨다. 
매개자로 박문수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박문수가 민중에게 특별한 인물이었음을 보여 준다. 

박문수가 실제로 암행어사를 한 기간이 짧고 지역도 영남 지역 등으로 한정되었으나 박문수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하는 이유는 박문수에 대한 민중의 특별한 인식,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억울함을 풀어 주는 정의의 심판자로 여기는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신령의 힘.
* 유명한 암행어사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박문수 설화가 나왔다. *

박문수 어사가 팔도 강산을 이제 이래 암행을 하는데, 
한 군데를 가더니 재가 있다 이 말이야. 
재가 있는데 잿말랑에 올라 가니 그 조그마한 당집이 있는데 당집 옆에 조그만 일간 초옥이 있단 말이야. 그래, 거를 가서 주인을 찾으니 왠 할머니가 한 분이 떡 나와서,
"어디로 가는 손님이 이 시기에 저, 
날은 다 넘어 가는데 오셨느냐?"
"그래 내가 어데를 가는데 하룻밤 새워야겠습니다."
"아, 들어오시라."
고. 그래 들어 가서 앉았더라니 조금 있으니 왠 영감이 하나 탕건만 해 쓰고 떡 들어오더니,
"아, 자네 왔는가 아, 자네하고 갈데가 있네. 
날 따라 가세."
그래미 아, 가자는 기야 그래 나서서 길을 나세니 앞에서,
"내 가는 데를, 자욱을 딛고 오너라."
그래 따라서 따라 가니 얼매를 갔던지. 
한 군데 떡 가더니 제일 큰 집으로 떡 들어 가더란 말이야. 

그래 따라 들어 갔는데 그 집에 들어 가다보니 뭐, 약 때리는(대리는) 냄새, 경 읽는 소리 뭐, 그득하지. 
그래 들어가 죈(주인)을 찾으니 죈이 저 객실에서,
"저, 이리 들어오시오."
그래 인제 저녁을 안 먹었으니 저녁을 좀 가져 오시오."
그라니 저녁을 채래 왔는데 아, 
이 영감이 보더니,
"이건 모두 먹던 음식이고 이기 안 돼. 
이거 새로 해 와야 된다."
고 이래 트집을 한단 말이야. 

죈(머니) 이 들이 가더니 손님 둘이서 와가지고 그래구 허니 암만 뭘 하드래도 보아 하니. 
하마 보통인 분은 아니고 그래 저녁을 새로 해가지구 떡 갖더 대접을 해. 그런데 보니 안에서 온통 뭐, 경 읽는 소리 굿하는 소리 약 때리는 냄새. 
아, 그래 인제 죈을 떡 불러서 묻는다 이 말이야. 그 노인이,
"그대 여보게, 
약 짓는 냄새에다 경 읽는소리에다 뭘 하니 우째 이러느냐?"
물은즉은 주인이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께서 나이도 덜 됐는데 앓아서 사경입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 병자를 좀 봤으면 좋겠으니 거 약이다, 
모두 다 치우고 굿하는 소리니 경 읽는 소리니 이거 모두 다 치우라고 하고 우리가 들어 가서 보겠노라."
아, 그래 인제 죈이 젊은 사람인데 들어 가더니 그 참, 경 읽는 소리 뭐, 이런 거 다 치우고 고요하게 하구서는 이 두 분을 인제 병자 방으로 떡 모시구 들어가. 

그래 들어 가니 그 단지 맏아들만 보고,
"문을 닫고 들어오너라."
그래 시켜서 떡 스이 들어 가서 보니, 아랫목에는 이불을 펴고 이불 위에 금방 아주 그만 숨을 놓는다 이 말이야. 
그래 이 영감이 뭔 종이에다가 뭐라고 해서 뭐라고 부적을 이래 쓰 ?...

홍판서 누명 벗겨 준 일화.
* 한 번 박문수의 이야기가 나오자, 정태규씨의 박문수 이야기는 끝이 없을 듯이 계속해서 나왔다. 
이 이야기 역시 [설화 36]에 이어서 '한 군델 또 어딜 가니껜" 하면서 시작되었다. 
정태규씨의 이야기술이 뛰어나, 조사자들도 함께 신이 났고, 정태규씨의 아들도 옆에서 연방 웃어 댔다. *

한 군델 또 어딜 가니래니껜 그러니깐,
 지금 그 임무를 다 마치느라고, 전라도 내려갔다 충청도 내려갔다 가는데 한 군델 가니래니껜 홍주 안서 홍고을이래는 동네라는 게 있는데. 
홍진사, 홍판서, 홍대감, 맨 그런 사람만 사는 아주 그런 고을이여. 
술집에 가서 술 한 잔 쓱 먹으려니껜 술집 주모가 뭐라 그런고 하니,
"거, 아주머니, 

술 한 잔 주시겨."
그러나, 이것 뭐 구걸하러 댕기는 이지, 술 먹을 사람은 아니야. 
거 미안하지만 술집여자가 주책입니다.
"여기 근데 질번지르한 기와집이 많으니 이 동네가 그 좋습니다. 
맨 지금 양반만 사는 동네 같수다."
그러니까,
"양반? 일 전짜리 서 푼이 양반이오? 말 마쇼. 
홍서방네 지금 생피붙어 가지구 지금 내일 모레 죽일 거요. 
홍판서 지금 낼, 모레 사형을 받을거요."
듣던 중 처음이라 이거야. 
그래 주모를 슬슬 추어가면서 이제 두어 마디,
"내가 엊그저께 홍진사네 집이 보리를 찧구서 키를 얻으러 갔는데, 
홍판서가 낫으로다가 메누릴 강탈하려다 말을 안 들으니까 낫으로다 목아질 찔러 죽였어. 

지금 홍진사가 낼 모레 사형받아서 지금 냅다 이렇게 찢어 죽인데야. 
그래 귀연하느라고 야단났어. 
낼 모레 갈 사람이라."
그래 시 박문수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깐,
'판서라면 그래도 족보가 있는 양반인데 어떻게 메누릴 강탈하나. 

이건 벌써 곡절이 있는 일이다.' 이거야. 그래 그,
"그러냐."
구. 그래서 먹구선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진 연에 그 집을 홍판서 집을 바로 갔어요. 바로 가서,
"이리 오너라."
그러니껜 쌍바라지 이중 창문을 열고 냅다 이렇게 고갤 내밀아 보니껜 누런 흔적이 꾸지지헌데 수심이 가득헌 사람이여. 그래,
"나는 길을 가던 행객인데 갈 데 없어 이리 왔다."
그러니껜 군말 없이 들어오라 이런단 말야. 
그러면 그 판서, 집에 있는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초동 같은 사람을 들어오라고 그럴 적에는 그 사람의 인심을 벌써 알 수가 있다 이거야. 
그렇지 않갔서?...

박문수 와 관생쟁이.
어사 박문수가 어명을 받들어 호남으로 암행을 나갔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노량진 포구에 갔는데 사람이 많고 복잡했다. 
그 중 유독 점쟁이 하나가 눈에 띄어 복채가 얼마인지 묻자 닷 냥씩이나 했다. 
사기꾼이 아닌가 싶어 관찰하고 있는데 어떤 부인이 관상을 보러왔는데, 닷 냥이라는 큰 돈을 내고서 점을 보았다. 
관상쟁이가 눈을 감고 글자중 하나를 찍어보라 하여, 부인은 한일자를 찍었다. 
찍고 나서는 집 나간 지 10년 된 남편의 생사를 알고 싶다고 하니 한일자가 누워있는 상이라 사람이 죽었으니 찾지 말라고 했다. 
부인은 닷 냥이 아깝기도 하고 믿기지 않기도 해 다시 한 번 점을 보자고 하여, 이번에는 약()자를 찍었다. 
“약자는 풀 초()변에 가운데 흰 백()자가 있고 양쪽에 실 사()자가 있으며 아래에는 나무 목()자가 있는데, 목관()에다 실로 꽁꽁 묶은 백골을 넣었고 그 위에 풀이 난 것으로 보아 죽은 지 한참 되었다.”고 했다. 
옆에 있던 박문수가 그럴 듯 해 보여 자신도 점을 쳐 보겠다고 했다. 
점 복()자를 찍었더니 점쟁이가 “어사님,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하며 빌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글자풀이를 해보라고 하자, 
사람이 서 있는데 점 하나를 찍은 것이 마패를 찬 암행어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봉양()에 바치는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일단 그곳을 빠져나온 후 한 거지에게 좋은 옷을 입혀 그 관상쟁이를 찾아가게 했다. 
실눈을 뜨고 점 복자를 찍으라고 시켜 거지가 그대로 하자 점쟁이가 단번에 걸인임을 맞추었다. 
사람이 섰는데 암행어사는 그 점이 마패이고 거지는 바가지라는 것이었다.

출두 [出頭]
암행어사가 직접 현장에 입회하여 좀 더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출두였다. 
출두시에 시간적 제한은 없었다. 
얼마든지 어사가 원하는 시간에 출두할 수 있었으며 날이 밝거나 야간에 출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방법은 수령관부의 3을 대동한 하리나 역졸이 마패로 두드리면서 "암행어사출두"를 소리치게 한다. 
대도시에서는 저명한 누각에 올라가 출두를 부를 수도 있다.
출두를 부르면 각 청사의 6방 이속이 관부에 모이게 되는데 수령은 이들 이속을 대동하고 암행어사를 영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암행어사는 자진거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잠종처소로부터 군관의 호위로 아헌에 나타나 수령의 영접을 받으며 평소 수령이 앉는 대청의자에 천천히 걸어 올라가 착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좌할 때는 뒤에 병풍을 치고 야간이면 등불을 밝혔다. 
각방의 이속들은 좌우에 열립하여 예를 갖추었다. 
군청에서는 수령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수령의 승용하는 승물을 가지고 상당한 의례를 베풀며 배례를 한 다음 동헌을 내놓고 보통 직원실로 옮긴다. 
수령을 규탄할 필요가 없는 때에는 직무수행을 위하여 동헌을 사용하겠다는 취지를 수령에게 통지한 후 아무도 모르게 동헌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어사가 출두할 때 입는 제복은 따로 없고 공복 차림이면 된다. 
공복을 마련하지 못했더라도 출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사의 공복은 당하관의 관복 중에서 평상복을 말하는 것으로 사모관대에 청색포를 입었고 특별복은 없었다.
암행어사(暗行御史) 출도(). 조선 시대 암행어사가 지방에 나타나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자기 신분을 밝히던 일. 어사 출또 또는 어사 출두(出頭)라고도 함

하교하기를, “수의(암행 어사)가 출도도 하지 않은 채 남몰래 갔다가 남몰래 돌아왔다는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하였다. 
시체가 구렁에 뒹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출도를 하지 않은 탓으로 다시금 가서 조사를 벌이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물론 생소한 탓도 있겠지만 그지없이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하겠다. 
처음과 두번째 올린 계사의 체례도 모두 착오를 범했는데, 그 잘못된 것이 임금의 명만 욕되게 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해당 어사 이희갑에게 서용하지 않는 처벌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 敎曰 繡衣之不出道 潛往潛來 事未前聞 目擊塡壑而不爲出道 以致更往行査之擧者 生疎之外 輕率莫甚 初再啓體 亦皆做錯 其爲僨誤 不可但以辱命言 當該御史李羲甲 施以不敍之典 [정조실록 권제42, 69장 뒤쪽, 정조 19년 5월 22일(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