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7일 토요일

홍길동 , 洪吉同 .

홍길동 , 洪吉同 .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작가인 허균이 이 작품을 쓰게 된 데에는 서자 출신의 스승인 이달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 사회로 출생에 따라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는 제도가 있었다.

어머니가 천민인 서자들은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사회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당시의 그러한 사회 상황과 그 속에서 겪는 길동의 갈등에 주목하며 ‘홍길동전’을 읽어 보자.

아울러 길동의 활약을 통해 허균이 그려 내고자 한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 파악해 보자.


핵심 정리

· 갈래 : 고전 소설, 영웅 소설, 한글 소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시간 - 조선 시대, 공간 - 한양, 합천
· 주제 : 신분 차별과 현실 세계를 비판
· 특징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등장 인물

· 홍길동 : 양반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총명하고 재주가 많지만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으며 자라.

· 홍문 : 홍길동의 아버지로, 좌의정 벼슬까지 오른 양반. 
어질고 덕이 많지만 결단력이 부족. 
작품 안에서는 홍 승상, 홍 대감 등으로 불려.

· 춘섬 : 홍길동의 어머니로, 원래는 노비였지만 길동을 낳은 뒤 홍문의 첩이 되어.

· 곡산모 : 홍문의 또 다른 첩으로 질투와 시기가 많아요. 길동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로.





1500년(연산군 6)을 전후하여 서울 근처에서 활약하던 농민무장대의 지도자. 
양반지주층을 중심으로 토지소유가 확대되면서, 토지를 잃고 지배층의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자기가 살던 곳에서 도망쳤다. 

이들은 산속으로 피해 무장대의 기본성원이 되어 양반지주나 관청을 습격했는데, 지배층들은 이들을 「도적」이라 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연산군 통치기간에는 전국 곳곳에서 이러한 농민무장대가 일어났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홍길동이 이끄는 무장대였다. 

홍길동은 양반관리의 복장을 하고 스스로 「첨지」라 하면서 무장한 많은 농민을 지휘해 여러 고을의 관청들을 습격했다. 

결국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취조당한 기록이 남아 있다. 
뒤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홍길동전>으로 소설화되기도 한다.


한문본으로 쓰여졌던 긴 소설을 국문본으로 줄였다고 하나 한문본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한문본과 국문본의 작자를 달리 보는 견해도 있다. 
홍길동에 대한 전설과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를 자료로 삼고 임진왜란 전후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줄거리는 재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서얼출신이었기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던 홍길동이 뛰어난 무술을 이용해 도둑조직인 활빈당의 두령이 되어 탐관오리를 무찌르고 빈민을 구제하다가 율도국이라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소설인 <수호전()>의 영향을 받아 사회개혁, 특히 적서차별 타파의 주장을 작품화한 것이다. 


『홍길동전()』은 비범한 재주와 능력을 지닌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적서차별()의 문제점이라든가 관리들의 치부행위 등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한 사회소설이다. 
일반 독자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홍길동에게 도술적인 능력을 부여하고 마침내는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영웅이 되는 영웅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연산군 때 활약한 실존 도둑이었다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허균()에 의해 소설로 재탄생되어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 홍길동. 
홍길동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어필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설 『홍길동전』의 파급효과 때문일 것이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크며 당시의 사회상을 적절히 반영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주목이 되는 소설이다. 
『홍길동전』이 반영하는 사회상은 서얼차별이 점차 심화되는 현실의 세계이다. 
홍길동은 바로 이러한 서얼의 대변자이다.

원통하고 답답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칼을 잡고 월하에 춤을 추며 장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더니, 이때 승상이 명월을 사랑하여 창을 열고 기대어 있는데 길동의 거동을 보시고 놀라 말하기를,

"밤이 이미 깊었거늘 네 무슨 즐거움이 있어 이러하느냐?"
길동이 칼을 던지고 크게 엎드려 말하였다.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타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사오니 이만한 즐거움이 없사오되, 평생 서러워하기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하여 상하 노복이 다 천히 보고, 친척과 고구()도 손으로 가리켜 아무의 천생()이라 이르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사오리까?"
이어 대성통곡하니, 대감이 마음에 가엾게 여기시나 만일 그 마음을 위로하면 이것 때문에 방자할까 하여 꾸짖어 말하기를
"재상의 천비 소생이 너뿐 아니다. 자못 방자한 마음을 두지 말라. 일후에 다시 그런 말을 번거로이 한다면 눈앞에 용납치 못하리라."

분명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대감'이라 불러야 하는 서얼의 신세. 
그 하소연에도 아버지는 "모두가 그러한데 왜 너만 원통하다 하느냐"면서 냉정하게 길동을 물리치는 장면이다. 
『홍길동전』에서 갈등이 가장 증폭되는 부분이자, 길동이 명문 재상의 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도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홍길동전』은 적서차별이 점차 심화되는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사회의 모순을 기본적인 모티브로 설정하여 소설을 전개하고 있다. 
이것을 모티브로 하여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백성들의 욕망 등을 함께 펼치고 있다.
『홍길동전』은 영웅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소설 곳곳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장치들이 설정되어 있다. 
홍길동은 판서()인 아버지와 시비() 출신인 어머니 춘섬 사이에서 출생한다. 
주인공에 대한 이러한 환경 설정은 홍길동이 필연적으로 신분문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조선시대 서얼의 존재는 양반의 취첩() - 양반이 원래의 부인 이외의 다른 여성을 배우자로 맞아들이는 것 - 을 허용하는 사회적 구조에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서얼()은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그다지 큰 차별을 받지 않았다. 

16세기 이후 조선사회에 명분과 신분차별을 옹호하는 성리학 이념이 강하게 정착되면서 반상의 구분, 적자와 서얼의 차이가 보다 분명해졌다. 
과거제도에서 서얼을 배제한 것은 적서차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시대 젊은이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인 과거제도의 응시자격 박탈은 한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없애는 가혹한 조처였다. 
이러한 흐름은 성리학의 이념이 보다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다. 
『홍길동전』의 경우처럼 아버지가 있으되 아버지라고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홍길동전()』은 비범한 재주와 능력을 지닌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적서차별()의 문제점이라든가 관리들의 치부행위 등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한 사회소설이다. 
일반 독자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홍길동에게 도술적인 능력을 부여하고 마침내는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영웅이 되는 영웅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연산군 때 활약한 실존 도둑이었다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허균()에 의해 소설로 재탄생되어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 홍길동. 홍길동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어필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설 『홍길동전』의 파급효과 때문일 것이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크며 당시의 사회상을 적절히 반영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주목이 되는 소설이다. 
『홍길동전』이 반영하는 사회상은 서얼차별이 점차 심화되는 현실의 세계이다. 
홍길동은 바로 이러한 서얼의 대변자이다.

작자의 체험이? 

『홍길동전』은 작자 허균의 체험이 다분히 형상화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주인공 홍길동이 서얼로 설정된 것은 작자의 체험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아버지 허엽이 판서직을 역임하고 형, 누나 모두 학문과 문장으로 명망을 떨친 명문가의 기대주였다. 
그는 이러한 신분적 특권을 스스로 박차버렸다. 
오히려 그는 스승인 이달이 서얼이라는 점 때문에 차별 받고, 서양갑·심우영 등 명문가의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좌절 당하는 현실을 결코 좌시하지는 않았다.
양반이 첩을 두는 것을 관행적으로 인정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서얼은 양산되었고, 의식 있는 서얼들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되었다. 
한 개인으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서로 간에 힘을 북돋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서얼은 능력 면에서는 적장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대개 첩을 두는 양반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첩을 두게 마련이고 이때에 맞아들인 첩은 어느 정도 용모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원래의 정실부인보다 뛰어난 규수가 첩으로 들어왔고, 이러한 부모를 둔 서얼은 단지 신분만 천했을 뿐이지 지적 능력에서 정실 자식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얼들은 점차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고 서얼 제도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홍길동전』의 구체적인 모델이 된 광해군 5년(1613)의 '칠서지옥()'으로 불리는 사건은 서얼들의 불만이 체제 변혁까지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칠서', 즉 '일곱명의 서자'가 현실개혁에 뜻을 품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는 1608년에 제기한 그들의 서얼허통() - 서얼들도 관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 - 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있었다.
1613년 봄 서인의 영수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위시하여 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치인·박치의·허홍인 등 7명의 서자가 조령() 에서 은상()을 살해하고 은 7백 냥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 
국문 도중 이들이 몇몇 무인들과 결탁해 역모를 꾸몄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하자 때문에 차별 받는 현실을 바꿔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사건이 있기 전부터 스스로 강변칠우() - 강변을 중심으로 모이면서 사회변혁을 도모했던 일곱 명의 친구, 여기서는 7명의 서얼을 의미함 - 

죽림칠현() - 중국의 위나라, 진나라 초기에 노장사상을 숭상하여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7명의 선비 - 을 칭하면서 서로 간에 교분을 형성하면서 시국을 탓하였다. 
중앙의 관리들과의 교유를 통하여 자신들의 입장이 정치권에 반영되기를 기대하였다. 허균은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관리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지녔던 허균은 이들의 처지에 크게 공감했으며 나아가 서얼들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 사상의 동반자임을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유재론」과 같은 글은 신분 차별 없이 인재의 폭넓은 등용을 주장한 허균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였다.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해주지만은 않는다. 
옛날부터 선철()들은 명확히 그런 줄은 알아서 혹은 초야()에서 인재를 구했으며, 혹은 병사들의 대열에서 뽑아냈고, 혹은 패전하여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혹은 도둑의 무리에서 고르며, 혹은 창고지기를 등용하였다. 
임용한 사람마다 모두 임무를 맡기기에 적당했고, 임용당한 사람들도 각자가 지닌 재능을 펼쳤다. ··· 
예로부터 지금까지 서얼 출신이라 하여 어진 인재를 버리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하여 그 재주를 쓰지 않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고 개가()한 자손은 모두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 
변변치 않는 나라로서 두 오랑캐 사이에 끼어있으니, 모든 인재가 국가의 쓰임이 되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판에 도리어 인재등용을 막고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다"고 하니, 이것이 월() 나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웃 나라에 알리지 못할 일이다. 

한 부인이 원한을 품는 것도 걱정스러운데 원망하는 남정과 홀어미가 나라 안에 반이 넘으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기는 또한 어렵다.
허균은 「유재론」에서 서얼이라 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점임을 지적하고, "원망하는 남정과 홀어미가 나라 안에 반이 넘는다"는 표현으로서 서얼 차별이 사회 문제가 될 것임을 강력히 경고하였다.

사회상
홍길동의 어린 시절은 문무, 특히 병법에 능한 비범한 아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모아진다.
길동은 나이 십일 세라.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절륜()하며, 시서백가어()를 알지 못함이 없으나, 대감 분부에 바깥 출입을 막으시매, 
홀로 별당에 처하여 손자와 오자의 병서를 꿰뚫어 귀신도 측량하지 못하는 술법이며 천지조화를 품어 풍운을 임의로 부리며, 육정육갑()의 신장() - 둔갑술을 할 때 부르는 신장 - 을 부려 신출귀몰한 술법을 통달하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어라.

위 인용문의 무술이나 축지법, 둔갑술 등 각종 도술에 대한 관심은 유가사상보다는 조선시대에는 비주류 사상으로 밀려난 도가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도가사상은 주류적 흐름인 성리학에 밀려났지만, 김시습이나 서경덕처럼 도가사상에 깊이 심취된 학자들도 있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서경덕의 수제자인 점을 고려하면 가계적()으로도 허균과 도가사상은 연결 고리가 있으며, 홍길동과 함께 도술에 능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우치의 사례에서도 이 시기에 도가사상이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율도국의 왕이 된 홍길동이 칼을 잡고 춤을 추며 불렀다는 노래 또한 도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칼을 잡고 우수에 비겨서니,
남명() - 남쪽 바다 - 이 몇 만 리뇨.
대붕()이 날아가니
부요풍() - 회오리 바람 - 이 이는도다.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경전 『장자』의 첫 편 「소요유()」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허균 자신도 또한 「장생전」에서, "내가 젊은 시절에 협사()들과 친하게 지냈고, 장생과도 해학을 주고받을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냈으므로, 그의 잡기 놀이를 모두 구경하였다. 
슬프다 그는 신이었거나 아니면 옛날에 말하던 검선()과 같은 부류가 아니냐"고 술회한 것으로 보아 호협한 기상을 가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에는 5편의 인물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천첩의 서얼 출신 이달을 비롯하여 아전 남궁두, 비렁뱅이 천민 장생, 몰락한 양반 엄처사, 
의업에 종사한 중인 장산인 등 모두가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에서는 철저히 소외된 인물이었다. 
허균의 캐릭터를 통해 볼 때 홍길동의 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홍길동의 최대 위기는 의붓어미인 초낭이 '특자'라는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 하는 대목이다. 
뛰어난 무술로서 특자를 제압한 길동은 특자는 바로 베어버리지만 의모()인 춘낭에 대해서는 어쩌지를 못하고 부친에게 엎드려 절하고 오히려 자신이 집을 떠나는 길을 택한다. 
"소인이 이제로 집을 떠나가오니 대감 체후만복()하옵소서. 
소인이 다시 뵈올 기약이 아득합니다"고 하면서, "목숨을 도망하여 천지로 집을 삼고 나가오니 어찌 정해진 거처 있사오리까 마는 평생 원한이 가슴에 맺혀 씻을 날이 없사옵니다"하고 하소연하는 길동 앞에서 부친은, 

"오늘로부터 네 원한을 풀어줄 것이니, 네 나가 사방에 돌아다닐지라도 부디 죄를 지어 부형에 근심을 끼치지 말고 쉬이 돌아와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는 뜻밖의 말을 전한다. 
도망자의 신분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비로소 길동의 한을 풀어준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 한 장본인이 부친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목숨을 살려주는 장면을 통해서는 조선사회를 지배하는 효의 관념이 여전히 투영됨을 볼 수 있다. 
홍길동이 도적으로서 성공한 후에도 부형이 고난에 처하자 스스로 체포를 당하는 길을 택하는 장면이나, 
율도국 정벌을 계획할 때 부친상을 당하자 삼년상을 모두 마치고 군사훈련을 하는 장면에서 효의 가치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사회상이 나타난다.

홍길동은 서얼차별이라는 '현실의 장벽' 속에서 뜻하지 않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현실의 도피 수단으로 도적이 된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선택이지만, 한편으로는 도적이 되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임을 잘 보여준다. 
홍길동이 연산군대에 실존했던 도적이라는 점과 『홍길동전』에 영향을 준 『수호전』의 주인공 또한 도적인 점, 
1613년 은상을 약탈한 도적들이 허균과 친분이 있었던 서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설 속의 주인공은 별다른 선택 없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도적의 우두머리가 된 홍길동은 부정축재로 재산을 모은 해인사나, 탐관오리가 수령으로 있는 지역 등을 집중 약탈하는 의적()이 된다. 
그들 무리의 이름은 백성들을 살려준다는 뜻으로 '활빈당()'이라 한다. 
홍길동은 사회적으로 고통을 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탐관오리를 통쾌하게 물리침으로써 민중들에게 대리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 등 의적들이 매 시기마다 등장하는 것은 도적을 통해서라도 탐관오리들의 부패상을 응징하려는 민중들의 열망이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짜임새 있게 사회상을 반영하는 소설 『홍길동전』의 후반부는 허구적인 상황이 설정되면서 예리한 사회의식을 조금씩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소설이라는 공간을 이용하여 작자가 소망했던 바를 파격적으로 실현해 나가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홍길동이 백룡의 딸을 납치한 요괴와 싸워 승리한 후 그녀와 결혼한다는 것이라든가, 포도부장을 물리친 후 병조판서를 제수받는 것, 홍길동이 현재의 유구국 - 
오늘날 일본 오키나와 부근 - 으로 추정되는 율도국으로 건너가 율도국 왕을 제압하고 왕이 되는 내용은 동화적 요소가 강해지면서 사회소설이라는 『홍길동전』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홍길동은 가상의 공간인 율도국의 왕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결국 홍길동은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공간, 즉 이상세계에서만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신분차별이 엄격한 당시 사회의 높은 벽을 끝내 넘어설 수는 없었던 허균의 모습을 대변한 것은 아닐까?

작가의 꿈과 좌절

허균은 선조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문장가·사상가·개혁가였다. 
한국사에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무대를 장식하며 명멸해갔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흔하지는 않다. 
허균은 1618년 역적 혐의를 받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자료는 한결같이 허균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광해군 10년(1618) 윤 4월 29일의 평가를 보자.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찢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허균이 얼마나 기피인물로 낙인찍혔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개성이 강하였고, 과격하고 독단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이러한 기질을 인정하였다. 허균이 자기 형에게 올린 편지인 「가형()에게 답해 올리는 글」(『성소부부고』)을 보면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본디 성품이 방탕하여 세속에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마음이 또한 편협하여 참고 용납하질 못하니, 벼슬하면서 일을 처리할 적에도 간혹 엉성하게 꿰맞추는 실수를 면치 못하고, 일이 글러진 후에야 마음속으로 자책한 적이 자주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유분방한 그의 기질은 성리학 중심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새로운 변혁을 꿈꾸는 요인이 되었다. 
허균이 살았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조선사회는 보수와 개혁의 갈림길에서 고민하였고, 허균은 이러한 시기를 살면서 개혁의 길을 택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허균은 1568년(선조 2) 당시의 명문 경상도관찰사 허엽()의 3남 2녀 중의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허균이 태어난 곳은 조그마한 야산이 이무기 - 용이 되지 못한 구렁이 - 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교산(), 즉 '이무기의 산'이라고 불려왔다. 
허균은 자기가 태어난 강릉 외갓집이 있던 자리를 설명하면서, "개울 동쪽의 산줄기는 오대산 북쪽으로부터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내려오다가 바닷가에 와서 사화산의 수()자리가 우뚝 솟았다. 
예전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개울이 엇갈리는 곳의 밑바닥에 늙은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고 하여 자신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묘하게도 주인공과 용의 인연은 『홍길동전』에도 나타난다.

일일은 승상(홍판서)이 난간에 기대어 잠깐 졸더니, ··· 문득 청룡이 물결을 헤치고 머리를 들어 고함하니 산학()이 무너지는 듯하더니, 그 용이 입을 벌리고 기운을 토하여 승상의 입으로 들어오거늘, 깨달으니 평생 대몽()이라.

허균은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던 홍길동과 용을 연결시킴으로써, 자신은 비록 이무기에 머무를지라도 홍길동만은 소설의 세계에서나마 꿈을 이루는 용이 될 것을 바란 것은 아닐까?
허균에게는 맏형 허성()과 중형 허봉()이 있었다. 
이들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성리학과 문장, 외교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5세 위의 누이 허난설헌은 일곱 살부터 시를 훌륭하게 지어 소문이 자자했으며 여자 신동이라고까지 불렸다. 
허난설헌의 시재()와 다정다감한 성격은 허균에게도 영향을 주어, 1606년 허균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 난설헌의 시집을 주었다.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에 감탄하여 본국으로 가져가서는 중국의 역대 시문을 모은 책에 난설헌의 시를 수록하였다. 

명문재사()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밑에서 자라면서 난설헌과 함께 중형의 벗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달은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조선중기 삼당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재가 뛰어났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자신의 높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주인공을 서얼로 설정한 것은 좁게 보면 스승의 불행을 몸소 체득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넓게 보면 당시 조선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문제를 과감하게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모로 삶을 마감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자유인 허균의 꿈은 사라졌지만, 그의 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허균은 영원한 꿈을 이루고 있다.

사회에 저항, 

허균이 살던 당시 조선사회는 밖으로는 임진왜란으로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안으로는 붕당정치가 격화되어가는 시점이었다. 
허균은 「유재론」이나 「호민론」과 같은 글을 통하여 신분이나 배경보다는 능력이 있는 인재의 등용을 줄곧 주장해왔다. 
개혁성향을 지니고 실천하는 인재의 등용만이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사회개혁 의지는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의 창작으로 나타났다. 
사회개혁을 이루려던 그의 꿈은 '역모'라는 그물망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자유분방하고 진보적인 그의 사상은 당시에는 '역모를 위한 준비'로 평가절하 되었지만, 사회성 짙은 소설 『홍길동전』으로 부활하면서 그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홍길동전』은 서얼로 태어나 끝내는 율도국의 왕이 되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통하여,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신분차별의 벽을 넘어 보려는 성향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소설이자 영웅소설로 해석된다. 
저자 허균이 조선시대에 엄청나게 기피인물이 될 만큼 당시 사회체제를 비판하고 이러한 체제에 대해 적극 저항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소설은 보다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작자와 소설 속 주인공의 캐릭터에서는 너무나 유사한 점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허균은 서얼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었고, 1613년 칠서지옥과 같은 사건을 직접 경험하면서 『홍길동전』의 창작 의욕을 보다 불태운 것으로 여겨진다. 
신분차별을 받고 있던 자신들의 울분을 실력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서얼들의 집단행동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개혁성향이 짙었던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서얼들은 초능력적인 도술과 검술을 겸비한 홍길동으로 화려하게 재탄생한 것이다.

『홍길동전』은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 허균의 모든 고민과 정렬을 쏟아 부은 걸작이었다. 
역모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 『홍길동전』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사회의 모순에 직접 저항하는 지식인의 책무를 허균 스스로가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허균과 홍길동은 실존인물과 소설 속 인물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폐쇄된 사회의 문을 열어보려 한 선구적인 인물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문제들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는 까닭?
첫째 
허균의 문집에 『홍길동전』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둘째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면 역모죄로 체포되었을 때 불온한 사상을 담은 『홍길동전』이 틀림없이 언급되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허균이 저자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조선중기의 학자인 이식의 『택당집』이나 조선후기의 학자 황윤석의 『이재난고』와 같은 글에 분명 허균이 저자임이 밝혀져 있고 내용 또한 허균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허균을 저자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홍길동전』은 ?
중국 『수호전』의 경우 다양한 이력을 지닌 108인의 영웅호걸이 등장하지만 『홍길동전』에서는 양반집 서자 홍길동이 사회적 모순 때문에 대도()가 되는 설정이다. 
대도의 연원은 『수호전』 보다는 연산군대의 실존도둑 홍길동이나, 허균이 주목한 서얼들의 은상 살해 사건이 『홍길동전』과 보다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설사 『수호전』에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홍길동전』은 저자 허균의 사회비판 의식이 창작욕과 맞물려 나온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허균은 『홍길동전』 이외에 다른 인물 ?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에는 스승 이달()의 전기인 「손곡산인전」을 비롯하여, 「엄처사전」의 엄처사, 「장산인전」의 의인() 장씨, 「남궁선생전」의 남궁두(), 「장생전」의 장생()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재능은 있지만 신분이 미천하여 불우한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나타난다.



홍길동이 율도국에서 왕이 되어 몇 사람의 첩을 두었으며 자기의 가족들에게 벼슬을 준다는 데서도 나타나 있듯이 봉건적 신분제 자체를 완전히 철폐하고 만민의 평등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물의 성격창조가 환상적인 측면이 많고 구체적 묘사가 부족한 점 등 소설기법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장편적 구성을 가진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측면에서 중세문학사에 중용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차별을 받고 자란 길동
홍 판서의 아들인 ‘홍길동’은 서자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높은 학식과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게 된다. 
갈수록 차별이 심해지고 자신을 해치려는 흉계까지 생기자 길동은 스스로 집을 떠난다.

의적이 되다.
길동은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알아보는 도적들의 청을 받아들여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길동은 그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이라 짓고, 부패한 벼슬아치들을 찾아내어 벌주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로운 일을 계속하여 백성의 큰 지지를 받는다.

병조판서가 되다.
반면 조정에서는 이런 길동을 잡으려고 하는데 길동은 그때마다 뛰어난 재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결국 임금은 길동이 원하는 대로 길동에게 병조 판서의 벼슬을 내린다.


활빈당 과 율도국으로 가다
그 후 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조선을 떠나 율도국으로 건너가 그곳을 정벌하고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누린다.

감상 나누기

홍길동은 참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 
서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고, 능력이 뛰어났지만 출세하기도 어려웠으니까요. 길
동은 이런 사회 현실 때문에 깊은 갈등에 빠졌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집을 나오는 결단을 내립니다.

홍길동의 영웅적 일대기를 통해 적서 차별제도와 탐관 오리들의 횡포를 비판한 ‘홍길동전’은 당시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답니다. 
자신의 소망을 대신 실현해 준 길동의 행동에 대리 만족을 느꼈다고 볼 수 있겠죠.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만을 갈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등은 사람과 사회 문제 사이에서 일어나기도 한답니다. 
홍길동이 겪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사회적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지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네요.

작가와의 만남

허균(1569~1618)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이에요. 
허균의 집안은 당대 최고 집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스승이 신분에 따른 차별의 벽에 부딪혀 불우한 일생을 보내는 것을 보고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였고, 그 후 사회 제도를 비판하기 시작했어요.

허균은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백성뿐이며 출생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능력을 펼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지요. 
《홍길동전》은 이런 허균의 바람을 대변해 주는 작품이랍니다.

살아있는 홍길동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전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홍길동의 자취가 남아 있는곳이 많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곳들이 있는지 함께 떠나 볼까요?

강원도 강릉시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태어나 살던 곳. 
허균의 생가와 기념관, 허균의 시비 등이 있답니다. 
강릉 경포호를 따라 홍길동 캐릭터 로드를 만들기도했어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마을에는 홍길동 생가터를 복원한 곳이. 
홍길동이 1440년에 장성군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홍길동 출생지를 복원한 것이지요. 
생가터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홍길동이 어려서 먹고 살았다는 길동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