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규엽 , 蔡奎燁.
생몰년대 : 1906(?)-1949(?)
출생지 : 함흥
채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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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1906년? 대한제국 함경남도 함흥부 |
사망 | 1949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함흥시 |
직업 | 성악가, 가수 |
장르 | 트로트 |
활동 시기 | 1930년 ~ 1949년 |
생몰년대 : 1906(?)-1949(?)
출생지 : 함흥
활동분야 : 가수
주요작품 : <유랑인의 노래>, <봄 노래 부르자>, <눈물의 부두>, <홍루원>, <순풍에 돛 달고> 등
성악가·작사가(유행가).
함경도 함흥(咸興) 출생.
일본 중앙음악학교(中央音樂學校) 졸업. 콜럼비아사 전속가수.
일본 예명은 장곡천일랑(長谷川一郞 하세가와 이치로)·좌백주이(佐伯周二 사하쿠 슈지.
한국의 대중가요 가수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로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취입하여 크게 히트하였다.
뒤에 콜럼비아악단을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광복 후 월북하였다.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모기윤(毛麒允) 선생에게 노래공부를 시작했고, 독일인 모이기르크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간다[神田]음악학원에서 성악기초를 닦았다.
1928년 귀국하여 YMCA에서 독창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서울 안국동의 근화여자학교에서 성악교사로 재직하던 중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봄노래 부르자》를 취입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가 되었다.
그해 일본인 고가(古賀政男)가 작곡한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우리말로 취입하여 크게 히트하였다.
그후 남인수(南仁樹)·백년설(白年雪) 등 신인가수의 등장으로 점차 인기를 잃었으며, 무명가수들을 모아 콜럼비아악단을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으나 흥행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기도 하였다.
1948년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표곡으로는 《명사십리》《시들은 청춘》《물새야 왜 우느냐》 등이 있다.
1926년 오사카(大阪)음악학교의 연구과(研究科)에서 공부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사 주최 신인연주회에서 1등으로 입상했으며, 1928년 5월 10일 YMCA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토월회(土月會)와 취성좌(聚星座)의 막간가수(幕間歌手)로 활약했으며, 후에 콜럼비아사의 전속가수로 있으면서 많은 유행가를 음반에 취입하였다.
1928년 일본유학에서 귀국해 1년 동안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의 음악교사로 근무했고, 1929년에는 경성여자미술학교의 음악교사로 이직(移職)하였다.
1929년부터 콜럼비아음반에 취입하기 시작했고, 콜럼비아사와 전속계약을 맺은 때는 1932년 1월이다.
1930년 서울에 왔을 때 우연히 콜럼비아회사의 파티에 참석해 나니와부시(浪花節)를 불렀을 때 콜럼비아의 경성 지사장인 핸드 포드가 그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유행가를 녹음하도록 권유했다.
그의 데뷔곡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유랑인의 노래"였다.
1930년 "봄노래를 부르자"와 "유랑인의 노래"를 첫 출반한 이후 20년 동안 그의 인기는 지속됐다.
1935년 매일신보에서 애독자 투표로 남자 가수 베스트 5를 선정해 발표했을 때 당당히 1위를 차지했고, 또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職業歌手)로 유명하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동경 본사로부터 채규엽이 꼭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193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하세가와 이치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가수활동을 전개했다. 1933년 가을 3년 만에 귀국하여 각지에서 귀향환영음악회를 가졌다.
그해 10월 20일 서울의 공회당에서 음악회가 열렸을 때에는 게스트로 콜럼비아사의 김선초·임헌익·김복순·안일파·김선영을 맞이해 "홍등야곡"(紅燈夜曲)·"봄노래"·"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님 자취 찾아서"·"비의 항구"·"슬픈 밤"을 노래하였다.
1934년에는 김선초(金仙草)와 함께 취입한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의 "떠도는 신세"와 이면상(李冕相) 작곡의 "봉자(峯子)의 노래"를 선보였고, 1937년 "명사십리"를 히트시켰다.
1938년 가을 태평레코드사로 이적해 1939년 1월 "북극의 오천키로"의 히트곡을 내었다.
가요계에서 모습을 감춘 뒤 갑자기 일본군 장교의 모습으로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했고, 일본 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친일행각에 앞장서 비행기 모금운동에도 적극적이었고, 연예인들을 위문공연에 총동원시켰으며, 1939년 콜럼비아사에서 폴리돌사로 전속을 옮겼다.
강석연(姜石燕)·다카시나 데쓰오(高階哲夫)·고가 마사오 등과 함께 콜럼비아관현악단 반주로 취입한 "That's O.K."·"가는 청춘"·"가련한 내 오빠"·"가을"·"가을밤"을 포함한 50여 곡의 유행가·유행가요·유행곡·유행만곡(流行漫曲)·유행소곡 및 그가 가야금과 바이올린 2중주로 취입한 곡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취입한 "비오는 요코하마"·"피서지의 추억"·"항구는 멋쟁이" 등의 유행가는 폴리돌음반에 전하며, 그가 취입한 "무지개 설움"·"서글픈 마음"·"울며 새우네"·"한 많은 몸"은 오케음반에 전한다.
콜럼비아음반에 유행가 43곡을, 폴리돌음반에 두 곡을, 오케음반에 두 곡을, 그리고 태평음반에 한 곡을 취입하였다.
채규엽과 관련된 여러 기사는 『東光』(1931) 22호, 『三千里』(1932) 4권 7호, 『三千里』(1933) 5권 3호, 『三千里』(1934) 6권 9호, 『三千里』(1935) 7권 1~5호·9호, 『三千里』(1935) 7권 7호, 『三千里』(1936) 8권 2호, 『四海公論』(1936) 2권 5호, 『모던朝鮮』(1936) 1호, 『三千里』(1938) 10권 11호, 『四海公論』(1938) 4권 9호, 『新世紀』(1939) 1권 3호, 『朝光』(1940) 62호 등에 소개되었다.
함흥 출생인 채규엽은 중학생 때 독일인 모이기르크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도쿄의 주오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으며, 유학 중이던 1928년에는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가지기도 했다.
1930년, 콜럼비아사에서 첫 작품 <유랑인의 노래>, <봄 노래 부르자>를 발표하였다.
1932년에는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라는 이름으로 일본 콜럼비아사의 전속 가수로 활동하였다.
일본 가요의 번안곡인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와 <희망의 고개로>가 히트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김봉자와 노병운의 정사 사건을 소재로 한 <봉자의 노래>를 비롯하여 <홍루원>, <순풍에 돛 달고>, <눈물의 부두>, <아득한 천리 길>, <녹슬은 비녀>, <외로운 길손>, <한 많은 신세> 등 수많은 노래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1935년 인기투표에서 남자가수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 작곡가 이면상을 찾아서 북으로 갔으나 두만강 끝 탄광으로 끌려가 죽었다는 설이 있다.
성악가·작사가(유행가).
함경도 함흥(咸興) 출생.
일본 중앙음악학교(中央音樂學校) 졸업. 콜럼비아사 전속가수.
일본 예명은 장곡천일랑(長谷川一郞 하세가와 이치로)·좌백주이(佐伯周二 사하쿠 슈지.
한국의 대중가요 가수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로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취입하여 크게 히트하였다.
뒤에 콜럼비아악단을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광복 후 월북하였다.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모기윤(毛麒允) 선생에게 노래공부를 시작했고, 독일인 모이기르크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간다[神田]음악학원에서 성악기초를 닦았다.
1928년 귀국하여 YMCA에서 독창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서울 안국동의 근화여자학교에서 성악교사로 재직하던 중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봄노래 부르자》를 취입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가 되었다.
중앙음악학교에서 정식수업을 받았다.
일본에서 사용한 그의 첫 예명은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였다.
1930년 3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봄노래 부르자」를 출반하여 직업가수 제1호가 되었다.
전속가수 체결을 맺고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 일본 유행가의 분수령을 이루게 한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를 우리말로 취입, 최고 인기가수가 되었다.
콜럼비아·포리도르·태평레코드사를 통하여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그해 일본인 고가(古賀政男)가 작곡한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우리말로 취입하여 크게 히트하였다.
그후 남인수(南仁樹)·백년설(白年雪) 등 신인가수의 등장으로 점차 인기를 잃었으며, 무명가수들을 모아 콜럼비아악단을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으나 흥행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기도 하였다.
1948년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표곡으로는 《명사십리》《시들은 청춘》《물새야 왜 우느냐》 등이 있다.
명사십리는 함경남도 원산의 갈마반도 남동쪽 바닷가 백사장이다.
바다 기슭을 따라 흰 모래톱이 10리(4킬로미터)나 이어져 명사십리라고 불리는데, 이 일대에 해당화가 많이 핀다.
워낙 유명해 많은 대중가요에 등장했는데 김정구의 <바다의 교향시>가 대표적인 곡이다.
A면에 수록된 <명사십리>는 장재성 작사, 다케오카 노부히코 작곡의 곡이다.
일본인이 작곡한 엔카 풍의 노래지만, 해당화가 핀 명사십리의 봄 풍경을 옛사랑을 소재로 삼아 서정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노래다.
1930년대 전수린과 강금자가 시에론레코드에서, 김연월이 오케레코드에서 각각 <명사십리>를 발표했으나 곡명만 같고 다른 노래다.
해방 후 월북한 채규엽의 노래는 금지돼 김정구와 유춘산이 다시 불렀다.
손인호도 <한많은 명사십리>로 리메이크해 부를 만큼 인기가 많았다.
1926년 오사카(大阪)음악학교의 연구과(研究科)에서 공부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사 주최 신인연주회에서 1등으로 입상했으며, 1928년 5월 10일 YMCA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토월회(土月會)와 취성좌(聚星座)의 막간가수(幕間歌手)로 활약했으며, 후에 콜럼비아사의 전속가수로 있으면서 많은 유행가를 음반에 취입하였다.
1928년 일본유학에서 귀국해 1년 동안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의 음악교사로 근무했고, 1929년에는 경성여자미술학교의 음악교사로 이직(移職)하였다.
1929년부터 콜럼비아음반에 취입하기 시작했고, 콜럼비아사와 전속계약을 맺은 때는 1932년 1월이다.
1930년 서울에 왔을 때 우연히 콜럼비아회사의 파티에 참석해 나니와부시(浪花節)를 불렀을 때 콜럼비아의 경성 지사장인 핸드 포드가 그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유행가를 녹음하도록 권유했다.
그의 데뷔곡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유랑인의 노래"였다.
1930년 "봄노래를 부르자"와 "유랑인의 노래"를 첫 출반한 이후 20년 동안 그의 인기는 지속됐다.
1935년 매일신보에서 애독자 투표로 남자 가수 베스트 5를 선정해 발표했을 때 당당히 1위를 차지했고, 또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職業歌手)로 유명하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동경 본사로부터 채규엽이 꼭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193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하세가와 이치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가수활동을 전개했다. 1933년 가을 3년 만에 귀국하여 각지에서 귀향환영음악회를 가졌다.
그해 10월 20일 서울의 공회당에서 음악회가 열렸을 때에는 게스트로 콜럼비아사의 김선초·임헌익·김복순·안일파·김선영을 맞이해 "홍등야곡"(紅燈夜曲)·"봄노래"·"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님 자취 찾아서"·"비의 항구"·"슬픈 밤"을 노래하였다.
1934년에는 김선초(金仙草)와 함께 취입한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의 "떠도는 신세"와 이면상(李冕相) 작곡의 "봉자(峯子)의 노래"를 선보였고, 1937년 "명사십리"를 히트시켰다.
1938년 가을 태평레코드사로 이적해 1939년 1월 "북극의 오천키로"의 히트곡을 내었다.
가요계에서 모습을 감춘 뒤 갑자기 일본군 장교의 모습으로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했고, 일본 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친일행각에 앞장서 비행기 모금운동에도 적극적이었고, 연예인들을 위문공연에 총동원시켰으며, 1939년 콜럼비아사에서 폴리돌사로 전속을 옮겼다.
1943년 이후 연예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가 8·15광복 후 다시 연예계로 돌아와 왕년의 히트송을 열창하기도 하였다.
1947년 흥행사로 변신, 연예단체를 운영하다가 사업 부진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1·4후퇴 당시 월남한 연예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그가 월북하여 아오지탄광에서 중노동을 하였다는 소식만 전할 뿐 생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후 북한에서 간행된 자료에서는 1949년에 병사했다고 전하고 있기도 하다.
히트곡으로는「명사십리」·「시들은 청춘」·「물새야 왜 우느냐」등이 있다.
채규엽이 보급한 노래는 일본 엔카풍의 노래였으며, 주로 일본 노래를 번안하여 불렀다.
한국 최초의 전업 가수로 평가를 받는다.
인기를 믿고 오만해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16세 소녀에게 고소를 당해 신문에 실린 적도 있을 만큼 사생활 관리에는 미숙했다.
종전 후 미군정 시기에도 악극단 등에서 공연을 계속했다.
사기 사건 피의자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949년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그동안 친구인 이면상을 믿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며, 1997년에 평양에서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라는 책에 채규엽이 1949년에 고향 함흥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월북 사실이 확인되었다.
취입한 "비오는 요코하마"·"피서지의 추억"·"항구는 멋쟁이" 등의 유행가는 폴리돌음반에 전하며, 그가 취입한 "무지개 설움"·"서글픈 마음"·"울며 새우네"·"한 많은 몸"은 오케음반에 전한다.
콜럼비아음반에 유행가 43곡을, 폴리돌음반에 두 곡을, 오케음반에 두 곡을, 그리고 태평음반에 한 곡을 취입하였다.
채규엽과 관련된 여러 기사는 『東光』(1931) 22호, 『三千里』(1932) 4권 7호, 『三千里』(1933) 5권 3호, 『三千里』(1934) 6권 9호, 『三千里』(1935) 7권 1~5호·9호, 『三千里』(1935) 7권 7호, 『三千里』(1936) 8권 2호, 『四海公論』(1936) 2권 5호, 『모던朝鮮』(1936) 1호, 『三千里』(1938) 10권 11호, 『四海公論』(1938) 4권 9호, 『新世紀』(1939) 1권 3호, 『朝光』(1940) 62호 등에 소개되었다.
함흥 출생인 채규엽은 중학생 때 독일인 모이기르크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도쿄의 주오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으며, 유학 중이던 1928년에는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가지기도 했다.
1930년, 콜럼비아사에서 첫 작품 <유랑인의 노래>, <봄 노래 부르자>를 발표하였다.
1932년에는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라는 이름으로 일본 콜럼비아사의 전속 가수로 활동하였다.
일본 가요의 번안곡인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와 <희망의 고개로>가 히트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김봉자와 노병운의 정사 사건을 소재로 한 <봉자의 노래>를 비롯하여 <홍루원>, <순풍에 돛 달고>, <눈물의 부두>, <아득한 천리 길>, <녹슬은 비녀>, <외로운 길손>, <한 많은 신세> 등 수많은 노래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1935년 인기투표에서 남자가수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 작곡가 이면상을 찾아서 북으로 갔으나 두만강 끝 탄광으로 끌려가 죽었다는 설이 있다.
♬눈물의 부두/채규엽♬
(조명암(趙鳴岩) 작사/김준영(金駿泳)작곡)
1.♬
비에젖은 해당화 붉은 마음에
맑은모래 십리(十里)벌 추억은 이네
2.♬
한 옛날에 가신님 행여 오실까
비 나리는 부두(埠頭)에 기다립니다
3.♬
저녘바다 갈매기 꿈 같은 울음
뱃사공의 노래에 눈물 집니다
이 노래는 일본 콜럼비아축음기주식회사(음반 번호 40612)에서 출반했으며,
서정적인 가사에 아직까지 가장 한국의 정서적인 미성 소유자라고한
함경도 출신 바리톤의 채규엽(蔡奎燁)이 노래한 <순풍에 돗 달고>,
<서울노래>, <비오는 포구>, <처량한 밤>,<아득한 천리길>,<봄 노래 부르자> 등과 함께
1930-40년대 지식층 및 그 당시 청춘 남녀들에게 대힛트한 가요입니다.
이 노래는 조명암(趙鳴岩) 작사, 김준영(金駿泳)작곡으로 가요라기 보다
<가고파>,<동심초> 같은 류의 가곡으로 넣을 수 있는 명곡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불렀던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
채규엽의 <희망가>
(1절)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같다
(2절)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대중가요 <희망가>는 새해에 맞은 노래다.
4분의 3박자 왈츠 풍으로 부르기가 쉽다.
노랫말엔 ‘희망’이란 말이 여러 번 나와 연초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
희망이 담긴 노랫말이 의미를 더해준다.
<희망가>는 노래를 부른 가수와 관련된 재미난 사연들이 많다.
국내 최초 레코드취입가수가 불렀다는 점과 일제강점기 때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불렀던 외국 곡을 번안해 탄생된 노래란 점이 특이하다.
우리 노래로 알고 있는 건 곡조와 노랫말이 한국인 정서에 맞게 바뀌어 불린 까닭이다.
흐름이 대체로 부드럽고 멜로디가 쉽다.
1919년 3·1만세운동 물결이 지나간 뒤인 1923년 무렵부터 대중 속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민족염원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대중들 마음은 좌절과 허탈감에 빠졌다.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운 일본의 통치방식이 다소 누그러져 조선사회가 활기를 띄는 듯 했지만 민중들 일상은 그렇잖았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애조 띤 노래(창가)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 노래를 ‘희망가’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억압에 시달린 민초들의 바람이 <희망가>란 노래를 낳은 셈이다.
모진 겨울바람에 시달리며 봄을 기다리는 꽃봉오리 같은 백성들 소망의 외침이 <희망가>로 나타났다.
아쉽게도 <희망가>의 바탕이 된 외국 곡을 번안한 사람과 편곡자 역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토마스 가튼의 <夢の外>가 원곡으로 가요계에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대중가요로는 1925년 발매된 ‘조선소리판’에 실린 노래를 드는 사람들이 많다.
도월색의 <시들은 방초>, 김산월의 <장한몽>과 1926년 윤심덕이 불러 히트한 <사의 찬미> 등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희망가>가 이보다 훨씬 전에 나왔다.
나온 노래집엔 <청년경계가>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전국적 유행에 힘입어 일축(일본축음기상회)에서 음반으로도 발매됐다.
음반이 처음 나왔을 땐 다시 제목이 바뀌어 <이 풍진 세월>로 나왔다.
명확하진 않으나 1925년 전에 나온 노래가 틀림없다.
음반으로 취입된 우리나라 유행가 중 가장 오랜 작품으로 기록된다.
문화재청의 대중가요 1호 찾기 목록에 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희망가>의 작사가, 작곡가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레코드취입가수 채규엽(蔡奎燁)이 불러 히트한 것만은 사실이다.
채규엽은 일본서 음악공부를 한 사람으로 <봄노래> <방랑자의 노래> 등을 불러 인기가 높았다.
그는 국내 직업가수 1호이자 최초의 포크가수다.
일본 와세다대학 만돌린부에서 활동했던 한국유학생이 채규엽의 노래반주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돌린부 학생들은 만돌린은 물론 통기타도 연주하곤 했다. 통기타반주가 위주이고 아코디언이 간주부분에서 받쳐준다.
기타 줄은 섬유로 만들어져 언뜻 들으면 소리가 이상하지만 당시로선 최고로 좋은 악기 줄이었다.
가느다란 실을 여러 개 엮어 꼬아 만든 줄로 되풀이해 들을수록 담백하고 듣기도 좋다는 느낌을 준다.
1907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채규엽은 신명학교를 졸업,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정식 가수수업을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가가수다.
1930년 콜롬비아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돼 <봄노래 부르자>를 출반했다.
<명사십리> <시들은 청춘> 등 히트곡들을 남기기도 했다.
일본 최고 인기작곡가 고가마사오(古賀政男)의 히트곡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淚溜息)>를 번안한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우리말로 취입,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땐 한국 대중음악계 최고가수로 꼽혔다.
잡지사(삼천리)의 인기가수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채규엽, 친일활동하다 월북했다.
호스티스의 염세자살을 주제로 한 <봉자의 노래>를 널리 유행시켰으나 1939년 이후 행방을 감췄다.
8·15광복 뒤 다시 연예계에 나타나 활동했던 그는 1947년 연예단체를 운영했으나 사업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제 말 적극적인 친일활동과 해방 후 월북으로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람이 돼버렸다.
채규엽은 가수 전영록의 고모부다.
별세한 배우 황해 씨(전영록 부친)의 여동생과 결혼, 딸을 하나 뒀다.
‘어른이 부른 동요’라 할 수 있는 <외양간 송아지>를 취입, 국내에 처음 포크음악을 선보였다.
사생활 관리를 못해 일본 귀족의 딸과 재혼하고 사업에 실패해 빚을 져 고소당하는가 하면, 일제강점기 말에 비행기를 기증하는 친일 행각에 앞장섰다가, 해방 후 1948년 이면상을 따라 월북했다.
그는 북한에서도 자유분방한 행동을 일삼으며 공산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는 유명한 가수였지만 월북으로 인해 가요계에서 그의 이름은 잊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