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0일 수요일

러시아, Russia, Russian Federation 2.

러시아, Russia, Russian Federation 2.

러시아 안의 우리 문화

한인이주 개요

구 소련 정부가 1979년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구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은 38만9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인구조사방법상의 문제, 타민족과의 혼인, 그리고 그 자녀들이 자라서 구 소련인으로 등록하는 일 등으로 볼 때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중에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Uzbek)와 카자흐(Kazakh)의 두 공화국에 사는 한인이 각기 16만3000명과 9만5000명(1979년 기준)으로, 합계 25만8000명이 되어 전체 한인의 3분의 2를 차지하였다.

키르기스(Kirgiz)·타지크(Tadzhik)·투르크멘(Turkmen) 등의 공화국을 비롯, 사할린(Sakhalin)섬과 극동의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연해주지방·러시아(Russia)공화국의모스크바·레닌그라드(Leningrad), 캄차카, 로스토프(Ros·tov) 지역, 우크라이나(Ukraina), 카프카스(Kavkaz) 지방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1860년대부터 1936년까지 한인들의 러시아(구 소련 포함) 이주역사에 관해서 ≪재소한인의 역사 Ocherki po istorii Sovetskikh Koreitsev≫(1965, 알마아타)라는 책을 쓴 구 소련거주 한국인 학자 김승화에 따르면, 농민 13가구가 1863년 겨울밤에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Ussuri)강 유역으로 이주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이주민의 숫자는 그 뒤 점차 증가하여 1865년에는 60가구, 1866년에는 100가구에 달하였다.

1867∼1869년 사이에 우수리지역을 방문한 러시아 탐험가 프르제발스키(Przhevalsky,N.M.)는 우수리강유역의 티진헤(Tizinhe)·얀치헤(Yanchihe)·시디미(Sidimi)마을에 1,800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869년에는 대홍수와 흉작으로 말미암아 4,500명의 함경북도 주민들이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대량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1870년 연해주의 한인수는 8,400명에 달하였고, 1872년 사마르키(Samarki)강가에 블라고슬로벤노에(Blagoslovennoe)라는 최초의 한인마을이 세워졌다.

러시아는 이 지역을 개발시킬 목적으로 처음부터 이주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부유한 농부들의 땅을 소작하면서, 러시아 행정관리의 지시에 따라 우수리강과 아무르강 유역에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였다.

1884년 우리 나라와 러시아간에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이어 1888년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의 문제가 거론,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1884년 이전에 이주한 사람들은 러시아국적을 취득하고 극동지방에서의 거주가 허가되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전체 이주민의 20∼30%, 즉 1,845가구 9,000명으로서 일정한 토지를 분배받고 그 뒤 20년 동안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받았다.
1884년 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2년간의 유예기간을 주어 귀환하도록 하였다. 
우리정부는 지속적으로 러시아이주를 억제하였으나, 이주는 계속되었다. 

1910년의 일제강점과 1919년의 3·1운동 이후 많은 농민·독립지사 및 항일우국지사들이 이주하였다. 
1910년 우수리지방의 한인수는 러시아시민권 소유자가 1만7080명, 비소유자가 3만6996명으로 전체 5만4076명에 이르렀다.

1923년에는 시민권취득자가 3만4559명, 비시민권자가 7만2258명으로 전체 10만6817명으로 크게 늘었다. 
1920년대말 구소련거주 한인수는 25만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이주농민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연해주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이 85%나 되었다.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 중 80% 이상이 소작인이나 고용노동자로서 일하였다.

이들을 포함한 한인 농민들에 의하여 1905년 최초로 쌀농사가 시작되었다. 
러시아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니콜스크·우수리스키(Nikolsk·Ussuriyskiy) 등의 도시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인들의 러시아문화에의 동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적인 권리 없이 차별대우와 압박을 받아온 한인들은 두 방향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방향은 노동운동에의 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에 대한 항일투쟁이었다. 
항일투쟁의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으며, 한인들은 그 근교에 신한촌()을 형성하였다. 

그곳에 학교·교회·신문사·자치회관 등을 설립하였고, 축구경기나 연주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들 학교는 대부분이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소련지역의 한인들을 위한 학교가 1922년 45개에서 1927년 267개로 늘어났던 것은, 높은 교육열과 독립운동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로는 홍범도()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운동에의 참여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주로 독립운동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 10월혁명에 참가한 사람은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1918년 4월 이동휘·박애·김립·김 알렉산드라 페트로프나(Kim Alek·sandra Petrovna)에 의하여 하바로프스크에 한인사회당()이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얼마뒤 상해()의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Irkutsk)의 전러시아 고려공산당으로 양분되고 만다.

1922년 말 구 소련이 성립되면서 극동지역의 소비에트화가 사회의 전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1923년부터 농업·산업 및 소비자코뮌이 결성되었고, 극동에 거주하던 한인들 대부분도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927년에 출간된 ≪10월혁명 10주년과 소비에트 고려민족≫은 극동건설에 한인들이 기여한 점을 서술하고 있다. 

1927년 대규모로 시작된 콜호즈(kolkhoz : )의 조직은 1932년에 완결되었다.
1930년대 극동의 한인 집단농장들은 실질적인 진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포스예트(Posyet)지역 주민의 95%가 한인들로 구성되었으며, 경작지의 36.5%가 쌀농사를 지을 정도였으며, 어업과 산업분야에서도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붉은 한국인’이라는 콜호즈에서는 1929년까지 부유층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문화분야에서도 1932년 한인극장이 세워지고, 1923년부터 발행되던 한인신문 ≪선봉 ≫이 1937년까지 계속 간행되었다.
그러던 중 1937년 가을 극동지역의 한인들은 스탈린정권의 무자비한 소수민족 조처에 따라 거의 대부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당하게 되었다. 

이들이 강제 이동되기 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는 1926년 약 5만2000명의 한인들이 이미 정착하여 있었다. 
그들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하여 그곳으로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알마아타(Alma Ata)에서 간행되고 있는 한인신문 ≪레닌기치≫에 의하면, 1928년 한인 수십가구가 극동지역으로부터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Kzyl·Orda) 변두리로 이주하고 최초의 쌀농사집단인 카즈리스(Kazriz)와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을 조직하였다고 한 통계에 따르면, 1939년 카자흐공화국에 대략 4만5000명, 우즈베크공화국에 7만3000명의 한인이 더 늘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민족학자 자릴가시노바(Dzarylgasinova,R.)에 의하면, 1939년 중앙아시아와 카자흐공화국에 18만2000명의 한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1927년 구 소련 극동지역에 거주하던 17만명 가량의 한인들이 거의 모두 중앙아시아로 옮아간 것이 된다.
중앙아시아로 이동된 대부분의 한인들은 처음에는 시르다리야(Syr Darya)강과 아무다리야(Amu Darya)강유역, 카자흐공화국의 카라탈(Karatal)산맥의 계곡과 일리(Ili)강유역 및 우즈베크공화국 등에 정착하였다.

일부는 우즈베크공화국의 타슈켄트(Tashkent)시 남쪽 베카바드(Bekabad)에 자리잡았다. 
카자흐공화국에서 한인들이 정착한 곳은 크질오르다와 우슈토베(Ushtobe)지역이었다. 
그들은 주로 토지경작에 종사하면서 자신들의 거주지역에 한인집단농장을 형성해갔다.


우즈베크공화국의 카라칼파크(Karakalpak)자치공화국의 쿤그라드(Kungrad)에 있는 아반가르드(Avangard)·노비비트(Novyy Byt)·프라브다(Pravda)는 가장 유명한 집단농장이었으며, 주로 쌀과 목화경작을 전문으로 하였다.

정착 초기의 한인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고 농기구·비료·건축자재, 심지어 자금지원까지 있었다. 그
들은 관개수로를 건설하고 부지런히 일하여 짧은 기간 안에 미개척지를 농토로 바꾸었다. 
이곳에는 극동으로부터 이주된 이들 외에 그 뒤에 들어온 세 집단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첫 번째는 1945년 이후 북한으로부터 온 산림노동자와 어부들이다.
두 번째는 구 소련에 유학한 북한지식인들 가운데 정치적 이유에서 귀국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수지만 문화적 주체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세 번째는 사할린에서 온 한인들이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제 말기 이른바 <국가동원법>에 의하여 강제 연행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제는 광산과 벌목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하여 남한지역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납치해갔으며, 정신대의 일원으로 여인들도 얼마간 끌려갔다. 
일제 말기 사할린거주 한인 수는 무려 6만 명이나 되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구 소련의 참전으로 사할린은 구 소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인들은 피난했거나 미소귀환협정에 의하여 1946∼1949년 사이에 모두 귀환되었으나, 한인들은 그 협정의 결함과 일본의 책임기피로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1946년 5월 사할린 전역에는 대략 4만3000명의 한인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들은 무국적자로 있다가 1948년 7월 소련국적이나 북한국적 취득권유에 따라 대부분 신분증명서를 발급받았으며, 제2세대는 거의 소련시민권을 얻었다.
1985년 말 사할린에는 4만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 중 대략 70%가 구 소련시민권을, 나머지는 북한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있는 이산가족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무국적자로 남아 온갖 차별대우와 압박을 감수한 사람들도 수백 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할린의 구 소련시민권소지 한인들은 여러 통로를 통하여 중앙아시아로 이주해갔다. 
이들은 사할린 동포에게 보내는 한국 방송을 듣고 그 소식과 가요 등을 중앙아시아에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1992년 구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연방공화국으로의 계승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고, 우리 나라도 1990년 한·소 국교수립에 따라 재 러시아 한인의 존재도 실질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1995년 1월 기준 재 러시아 한인동포는 10만6852명이고, 재 러시아 체류자도 점점 늘어나 1,473명에 이르고 있다.


생활상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한인들은 1937∼1956년에 이르는 약 20년간 여행이나 거주지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지정된 지역에서 밀집하여 생활터전을 닦아왔다. 
이는 이질적인 유목문화 풍토 속에서 한인들이 생존, 번영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적응력을 마련해주었다.
1959년까지만 해도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70%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1960년 이후 도시진출이 급증함에 따라 도시거주인의 비율이 59%로 바뀌었다.

도시거주 인구비율을 보면, 우즈공화국에는 1959년 20%에서 1970년에는 58%로 변했고, 
타슈켄트지역에는 62%, 키르기스공화국에는 64%, 투르크멘공화국에는 71.7%, 그리고 타지크공화국에는 89.8%의 한인들이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자흐공화국에서도 1979년 한인들의 8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시거주 인구비율은 소련에서 유태인 다음으로 높은 것이다.
그 주요원인은, 첫째 교육적 동기에서 젊은이들이 보다 나은 사회진출을 위하여 대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려는 데 있다. 

둘째 경제사정이 호전됨에 따라 그들의 활동영역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집단농장에서 생활하며 스스로를 ‘고려사람’이라 부르는 1·2세대 한인들과, 도시에서 살며 자신들을 소련한인 (SovietskieKoreitsy)이라 칭하는 2·3세대 한인들로 나누어진다.

구 소련거주 한인들은 1960년대의 도시진출경향과 또 다른 민족들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생활모습들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주택은 외형은 변하였지만 방 한두개는 온돌로 되어 있으며, 소수 노인들은 전통한복을 지켜왔다. 
세시풍속으로 설·단오·추석에 성묘를 하고 잔치를 벌이며, 첫돌·혼례·환갑·장례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식생활에서는 간장·된장·고추장이 기본을 이루고 김치·두부·설렁탕·만두·국수 등이 애호되고 있다. 
아울러 디딜방아·맷돌 등의 옛 생활도구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한국어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전통생활양식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지켜졌고,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다지 바뀌지 않아 그 뿌리의 깊음을 알게 해준다.

≪레닌기치≫에서는 매년초 그리고 매달초에 달력을 발행하는데, 거기에는 24절기와 한식·삼복 등이 음력으로 함께 명기된다고 하였다.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의 고려사람들은 개장(국)이라 하여 보신탕을 즐긴다고 한다.

한국음식이 인근민족들 사이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시장에서는 한국김치가 상품으로 팔리고 있으며, 한국음식이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도 진행되었다.

혼합사료산업을 위한 국립과학연구소의 카자흐스탄지부에 연구원으로 있는 리 스타니슬라프(Li Stanislav)의 연구결과는 간장과 된장이 우유보다 높은 칼로리를 가지고 있고 더 쉽게 소화된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한인들이 종사하는 직업과 사회활동은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의 이동과 그 뒤 1960년대부터의 도시진출경향에 따라 상당히 변하였다.
중앙아시아로 이동된 한인들은 자연조건이 달라 전과 같은 다양한 직종을 가지지 못하고 시골에서 주로 쌀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문화와 생활면에서 같은 국영농장이나 집단농장에 살면서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민족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극동에서부터 해온 쌀·보리·콩·채소 등의 경작을 계속하고, 오늘날에는 대규모의 목화재배에도 성공하였으며, 한편 그들에게 전혀 생소한 케나프와 같은 식물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과 같이 사는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는 가축사육도 중요한 직종의 하나가 되었다. 
한인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낙농에 익숙해 있으며, 또 마초재배에도 종사한다. 
국지적이기는 하지만 우즈베크공화국의 안디잔(Andizhan)이나 호레즘(Khorezm)에서는 원예도 행해지고 있다.

도시거주 한인들의 직업면모는 ≪레닌기치≫에 소개된 내용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기관이나 노동조합·대학교·정부관리·교육기관·관영기업체·공장·병원·연구소·기사·기술자·과학자·예술가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당기관이나 노동조합·대학교·정부관리 및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구 소련 전체인구 중에서 당원은 10%에 미치지 않는 데 비하여, 타슈켄트 거주 한인 4만명 중에서 30%가 당원이라는 사실도 주목할만하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거주 도시한인들이 추구하는 직업성향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직업들은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요구하는데,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인들의 높은 비율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골거주 한인들의 쌀농사와 그들이 소속해 있는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의 생활상도 주목할만하다. 
중앙아시아에 쌀농사를 도입시킨 것이 바로 한인들이고, 이들은 다른 민족들에게 쌀농사문화를 가르쳐주고 보급하였으며, 쌀이 소련의 주요곡식 중의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83년 구 소련의 쌀생산량은 대략 300만톤에 달하였다. 
그 중 80만톤이 카자흐공화국에서, 50만톤이 우즈베크공화국에서 생산되었는데 한인이 그 주요생산자들이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한인농민으로서 아반가르드국영농장에서 일하는 김만삼이 유명하다.
그는 크질투(Kzyltu) 국영농장의 일원인 사하예프(Sahayev,I.)에게 쌀농사를 가르침으로써 터키계 민족들에게 벼문화를 전파하였다. 
그는 1944년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크질오르다는 카자흐공화국의 ‘쌀의 수도’로 불린다.
구 소련정부는 1950년대 이래 쌀농사를 위한 연구기관을 조직하여 그 연구개발에 힘써왔다. 
한인들도 거기에 참여하여 많은 기여를 하였다. 

고 모이세이(Ko Moisey)는 우즈베크공화국의 우즈베크쌀농사과학연구소의 쌀농사기술과정 부장이자 농업과학의 후보자로서 이 연구소에서 30년 넘게 일하여 왔다. 
그는 벼의 보급에 관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 블라디미르(Han Vladmir)는 경제과학의 후보자로서 같은 연구소에서 당서기로 일하여 왔다. 
벼교배종연구가인 신 알렉산드르(Sin Aleksandr)는 1959년 그의 러시아인 동료와 함께 우즈로스(Uzros)·7·13과 크리미살라(Krymysala)를 교배시켜 새 품종 우즈로스·59를 개발하였다. 
1968년에는 러시아인 동료와 함께 새 품종 우즈베크스탄·5를 개발하였다.

카자흐공화국의 발하슈(Balkhash)호수 남쪽에 있는 카라탈 쌀실험농장의 소장인 황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는 맛있고 생산력 높은 품종을 개발해왔다. 
그는 알라쿨스키(Alakulskiy)·우슈토빈스키(Ushtobinsky)·카라탈스키(Karatalskiy)의 새 품종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카자흐농업연구소에서 쌀뿐만 아니라 보리·옥수수 등의 작물연구도 계속하였다.

이러한 한인들에 의해서 많은 쌀농사 전문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이 주도되어 왔던 것이다. 
카자흐공화국에는 탈디쿠르간(Taldy·Kurgan)·침켄트(Ckim·kent)·알마아타, 그리고 크질오르다의 네지역에서 쌀농사가 행해지고 있다.

탈디쿠르간지역의 우슈토빈스키국영농장·
프라브다국영농장·프룬제 (Frunze)실험농장이 주로 한인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침켄트지역에는 보스호드(Voskhod)·콤뮤니즘(Kommunizm)·카자흐공화국국영농장이 손꼽힌다.

크질오르다지역의 쌀생산은 카자흐공화국 전체의 4분의 3에 이른다. 
그 중 한인들이 주로 일하는 농장은 아반가르드국영농장·제3인터내셔널집단농장·기칸느(Gigant)집단농장·칼리닌 (Kalinin)국영농장 등이다. 

우즈베크공화국에는 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호레즘지역·시르다리야지역·타슈켄트지역에 쌀농사가 주로 개발되어 있다.
카라칼파크의 19개 국영농장 가운데 전레닌공산주의청년연맹 국영농장이 한인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 
호레즘지역에는 알호레즈미(Al Khorezmi)·베고바트(Begovat)·굴리스탄(Gulistan)·얀기아리크(Yangiaryk) 국영농장이 손꼽히며, 많은 한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타슈켄트지역에서는 ‘10월혁명 40주년’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농장의 몇 개 여단, 자르야콤뮤니즈마(Zarya Kommunizma)농장·김병화농장·세베르니 마야크(SevernyyMayak)농장·아훈바바예프(Akhunbaba·yev)농장에서 한인들이 지도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타지크공화국에서는 ‘구 소련국경수비대창설 60주년’이라는 이름의 국영농장, 수르호브(Surkhob)농장 등지에서 한인들이 일하고 있다. 
투르크멘공화국에서는 ‘제22차전당대회’국영농장에 강 클리멘트(Kang Kliment)가 관리인으로 있으며, ‘제23차전당대회’국영농장에는 안 아나톨리(An Anatoliy)가 한 여단의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한인들은 쌀농사에만 종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목화·삼베 등을 전문으로 재배하는 한인농장도 있는데, 타슈켄트 부근의 폴리토트젤(Politotdel)집단농장이 좋은 예이다. 
이 농장 전체인구 1만7000명 중 한인이 8,000명에 달하였다. 1
975년에는 농장건립 50주년을 맞아 레닌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25개 마을로 편성되어 있는 농장의 관리인은 황만금이고 김학천(KimNikolay)이 문화부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농장은 경작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업과정이 기계화되어 있었다. 
이곳 한인들은 근면하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정부의 생산목표를 매년 초과달성하였다고 한다.

농민들의 월급은 평균 250루불로 도시인들에 비하여 약간 떨어지나, 개인소유의 땅에 농작물을 재배하여 별도의 부수입을 올리므로 도시인들보다 더 잘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와 같은 한인들의 1980년대 말까지의 구 소련에서의 적응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성공적이었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다.

우선 구 소련이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으로 나뉘어졌고, 그에 따라 지역적으로 삶의 터전도 바뀌어 이들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1980년대 말까지 구 소련에 자리를 잡아갔던 한인들은 1990년대 구 소련의 해체로 새로운 체제와 생활환경에 적응하는 데 많은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음이 잠정적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상황이나 실상은 제대로 파악되어지지 않고 있다.


언어·문자생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이름은 많이 러시아어화 되어 있다. 
이는 한인들이 극동에서 점차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가던 1920년대 이후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선 성()의 변화가 눈에 띄는데, 엄씨와 이씨가 각각 렘(Lem 또는 Rem)과 리(Li) 또는 니(Ni)로 쓰이고 불리는 것은 함경도방언의 발음에 기초하여 시릴자모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다음 논(Non)·프본(Fvon)·학(Khak)·헨(Khen)·혼(Khon)과 같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성이 보인다. 이들은 음역()과정에서 발생한 듯하다.

아가이(Agay)·마가이(Magay)·유가이(Yu·gay) 등 ‘가이’가 붙은 성도 있다. 
이것은 한인들이 처음 등록할 때에 ‘가()’자와 함께 함경도식 어미 ‘이’를 붙여서 성을 대는 바람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성을 러시아어로 음역하여 새로운 성씨를 만든 특이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유고프(Yugov)는 남쪽을 뜻하는 러시아 유그(Yug)와 러시아어 어미 오브(ov)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남씨()의 변형이다.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어온 이래 한인들은 정착생활을 해나가면서 점차 러시아식 이름을 쓰게 되었다. 
여성이름으로 마리야(Mariya)·예카테리나(Ye·katerina)·나데즈다(Nadezhda), 남성이름으로는 콘스탄틴(Konstantin)·미하일(Mikhail)·알렉산드르(Aleksandr) 등이 한국식 발음에 따라 약간씩 변형되어 쓰였다.


그 외 다른 민족들의 영향으로 게르만(German)·에벨리나(Evelina)·모이세이(Moisey) 등의 비러시아식 이름들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특기할만한 것은 돌림자의 사용이다. 
한인들 중에는 이러한 전통관습을 지켜 자식들의 러시아식 이름을 아디크(Adik)·알리크(Alik)·아론(Aron)·아르투르(Artur) 등과 같이 ‘아’자 돌림으로 붙이기도 한다.

구 소련에서는 조직체나 공장·거리 등에 국가를 위하여 크게 기여한 인물의 이름을 붙이고는 한다. 
이에 따라 한인들의 성명이 중앙아시아의 조직체나 거리에 붙여지기도 한다.

폴리토트젤집단농장 학교의 한 개척자집단은 이동휘라는 이름을 취하고 있으며, 크질오르다에는 홍범도거리가, 타슈켄트지역에는 김병화콜호즈가 있다. 
타슈켄트 남부에도 김병화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노동영웅인 민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Min Aleksandr Pavlovich)도 거리이름으로 되어 있다.
한인들의 한국어사용도 점차 바뀌어갔다. 

1세대와 2세대, 특히 농장지역에서는 우리말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반면, 3·4세대들에게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거주 한인들 사이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한인들의 도시진출 경향에서도 드러나는 것이지만, 젊은 세대는 사회적 진출을 위해서는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야 하므로 우리말을 거의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통계에 의하면 1926년 재소한인 중의 98.9%가 우리말을 사용했던 반면, 1970년 우즈베크공화국에서는 74%로 떨어졌다. 
1979년에는 38만9000명의 한인 가운데 55.4%만이 우리말을 모국어로 사용하였고, 러시아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한인들이 47.7%로 늘어났다. 

이와 아울러 한인들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도 5% 가량 되며, 한인 남성과 러시아여인 사이의 결혼이 가장 흔하다.
한인들이 점차 전문직업인과 지식인계층으로 성장해가는 추세를 고려하면 러시아어가 한인들의 공용어로 될 전망이 높다. 
우리말 사용의 이러한 변동에는 한인들이 우리말 교육을 소홀히 한 측면도 없지 않다.

1936년의 강제이동 이전 극동지역에는 한인들을 위한 소학교 132개, 중학교 18개, 고등학교 3개를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이 있어서 젊은 세대의 한국어교육이 활발하였다.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뒤에는 사정이 변해서 카자흐공화국에서는 1937년부터 10년간 한인들의 교육이 러시아어로 진행되었다.

1940년대말부터 1950년대로 들어오면서 그 사정이 약간 호전된다. 
김남석과 헤가이(Khegay,M.)가 공동으로 ≪조선어 교과서≫ 2만부를 발행하였다. 
1949년 모스크바에서는 김병하가 ≪조선말본 제2학년용≫을, 그리고 마주르(Mazur,Y.M.)가 그것을 개정하여 ≪조선어교수강령 조선소학교 1∼4학년≫을 펴냈다.

김남석이 편집하고 헤가이가 1955년 개정한 ≪조선어교수방법재료집≫도 크질오르다에서 출판되었다. 
≪조선어교과서≫의 재판이 나오지 않는 실정 아래 한인들의 우리말교육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1980년대 폴리토트젤농장에 있는 1∼10학년 과정의 엥겔스학교에는 전체 900명 가운데 700명이 한국계 학생인데 한국어반에 9학년생 10명만이 일주일에 1시간씩 두 번 수업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타슈켄트의 니자미사범학교 한국어교육과는 1954∼1964년까지 존속하다 폐지되었다. 

1985년 9월부터 부활되어 5년에 걸쳐 총 80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중앙아시아에는 한글신문·한국어방송·한인극장이 있어 한국어교육 및 한인들의 문화활동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글신문을 보면, ≪레닌기치≫와 사할린지역 당위원회 기관지인 ≪레닌의 길로≫가 한글로 발행되었다. 

≪레닌기치≫는 소련에서 한글로 출판되는 것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재소한인문제·한인문학·어학 등의 이해에 없어서는 안 될 신문이었다. 
10월혁명 이전 극동지역에서는 이미 ≪해조신문≫·≪대동공보≫ 등이 간행되어 항일투쟁, 한인사회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뉴스를 한인들에게 제공해주었다.

혁명 이후 이 신문들은 더 이상 간행되지 못하였다. 
소련의 성립과 더불어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공산당 지역위원회의 한국부 기관지로 ≪선봉≫이 창간되었다. 
1923년 이 신문은 볼셰비키 극동지역위원회의 기관지로서 하바로프스크에서 주 2회 발행되었다.

1932년 극동지역에서는 ≪선봉≫을 포함하여 ≪문화≫·≪새세계≫·≪로동자≫·≪로동신문≫·≪적성 ≫ 등 한글로 된 6개 정기간행물과 7개 신문이 나올 정도였다.
이 중 ≪선봉≫은 5개년계획의 성취를 위한 노동자동원과 문화활동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성과 이백조가 주필을 맡았다. 

1937년 강제이동과 함께 ≪선봉≫은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되고, 대신 1983년 5월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지역신문으로 ≪레닌의 기치≫가 새로이 창간되었는데, 이것이 ≪레닌기치≫의 전신이며 1978년 사옥을 알마아타로 옮겨 198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하였다.

순한글 가로쓰기에 4쪽인 ≪레닌기치≫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주 5회 발행되었다. 
1938년 6월 21일 1만호발행을 기념하여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의 표창장을 받았다. 

신문발행부수는 1973년 1만3500부였으나 1979년 1만1000부로, 1987년에는 9,603부로 떨어지졌다.
이 신문사에는 주필·부주필·편집국장이 있었고, 그 밑에 생활부·농업부·문화 및 문예부·공업부·서한·대중사업부의 5개 부서를 두었다. 
타슈켄트에 지사가 있었으며, 두샨베(Dushanbe)·첼리노그라드(Tselino·grad)·프룬제 등에 주재기자가 나가 있었다. 

이외에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기사를 쓰는 지역기자들이 있었다.
1989년 주필은 한 인노켄치(Han Innokentiy), 부주필은 윤수찬과 조영환이었다. 
이 신문은 한글출판물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소련에서 우리말과 글의 존속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제4면 문예란에 한달에 한번씩 한인 문인들의 작품을 실어 유일한 작품발표지 역할도 하였다. 
한국어방송은 1984년 5월 알마아타의 카자흐방송국을 통하여 처음 시작되었다. 
1989년 한국어방송부의 부장은 최영근, 기자에 박용준·최미옥, 아나운서에 김옥려 등이 일하였다. 

1990년 수·금·일요일 주 3회 오후 2시 40분부터 3시까지 20분간 방송하였다.
방송내용은 당의 결정사항 보도, 뉴스분석, 소비에트 생활방식, 노동자들의 성공사례 등으로 짜여 있고, 한인 예술가나 문인들이 출연하기도 하며 유행가와 한국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수많은 청취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1987년 3월부터는 일요일에 한국어교육방송도 내보내주고 있다.


연극 및 가무

중앙아시아에는 한인극장도 있는데, 그 공식명칭은 ‘카자흐공화국 국립한국인음악·희극극장’이었다. 
이 극장의 연원도 극동지역부터 시작되었다. 
강제이주 이전 극동지역 한인들의 활동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는 여러 문화활동과 함께 연극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그 결과 1920년대 블라디보스토크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한인극단이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당시 연극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사람은 김익수로서, 그는 러시아극단과 접촉하면서 러시아문학과 연극에 정통하였으며, 영화제작에도 관여하였다. 
하나의 한인극단은 태장춘·이길수·이함덕·김해운 등에 의해서 1924년 신한촌에서 창립되었다. 
이 극단은 ‘젊은 노동자’극단과 접촉하면서 한인들의 문화활동을 주도하였다. 

세번째 극단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제8자치학교의 극단이다.
연성용·최길춘·이건희가 이 극단에서 활약하였다. 
최길춘·이건희 두 사람은 뒷날 우즈베크공화국에서도 활약하였다. 

그밖에 푸칠로브카(Pucilovka)라는 마을의 농민학교에서 박일·김진·조명희가 활약한 한인극단이 있었고, 또 교사훈련연구소에 한인극단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연성용과 염사일의 주도하에 30명의 단원을 둔 ‘한국인노동자극단’이라는 전문극단이 탄생하였다.

당시 변모하는 사회상황을 묘사한 <황무지>가 첫 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져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1931년 지역당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재조직되고 1932년 9월에는 소련정부의 결정으로 ‘한인극장’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그 뒤 1937년까지 전문배우가 등장하였으며, 이정림 극본의 <춘향전>과 <심청전>이 각각 1935년과 1936년에 공연되었다.

1937년 한인들의 강제이주와 함께 단원을 포함한 전체 한인극장이 크질오르다로 옮겨졌다. 
이어 1942년에는 우슈토베로 이전되었다가 1959년에 다시 크질오르다로 되돌아갔다. 
그러다가 1969년 한인문화의 중심지인 알마아타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기에는 김진·김해운·이함덕·최봉도 등의 배우와 채영·최길춘·연성용 등의 연출가가 활약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주로 전쟁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다.
한인극장창설 50주년인 1982년에 이르기까지 이 극단이 공연한 작품 수는 180편이 넘었다. 

1982년 9월 1일부터 15일까지 극단창설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모스크바의 아카데미야 소극장에서 있었다. 
한진의 <춘향전>·<살아 있는 부처>·<토끼의 모험>, 태장춘의 <38선 남쪽>, 카자흐인의 서사시인 <코블란디> 등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그밖에 김 블라디미르·정 소프야·문공자·김조야·조규화·김 보리스·리 베니아민으로 구성된 아리랑가무단이 한국의 민요와 노래를 불러 갈채를 받았으며, 리 림마(Li Rimma)의 무용도 호평을 얻었다. 
이 극장은 또한 50년 동안의 예술활동 공로로 명예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82년 알마아타에서 출판된 김 요시프(Kim Josif)의 ≪소비에트 조선인극장≫은 이 극장의 역사, 소련사회에서 가지는 의미, 이 극장의 작품들, 극장발전에 기여한 배우 및 감독 등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1989년 단원은 100명이 넘었고, 4세대에 걸친 배우들이 일하였다. 
그 중 전문적인 연구수업을 받은 사람만도 70명이 넘었으며, 이 극장의 배우를 길러내는 교육기관도 중앙아시아에 셋이나 되었다.

타슈켄트의 오스트로브시키 연극예술연구소의 한인배우부는 1960년에 이어 1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알마아타음악연구소는 14명의 배우를 교육시켰다. 
알마아타연극예술연구소는 1975년 14명, 1984년 15명의 한인학생을 배출하였다.

교과과정은 무대표현·대화기법·한국어·민족문화와 역사·연기개선연습 등으로 짜여 있었다. 
그동안 이 극장에 의하여 공연된 작품에는 재소 한인들이 겪어온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잘 드러났다.

1938년에 공연된 태장춘의 <행복한 사람들>에서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뒤 그곳 이웃주민들과의 삶이 묘사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과 1947년에는 <홍범도>가 공연되었다.

1920년대 볼셰비키 편에 서는 극동 한인들의 갈등이 많이 다루어졌다. 
1957년 태장춘과 채용의 <빨치산들>, 1962년 채용의 <새벽>, 1963년 채용과 염사일의 <잊을 수 없는 날들>, 1966년 맹동욱의 <북으로 가는 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최근의 작품경향을 보면 1985년 <춘향전>·<심청전>·<양반전>·<흥부와 놀부> 등의 한국 고전과 한진의 <쇠를 처먹는 자>, 김 아나톨리(Kim Anatoliy)의 <할머니와 나>가 공연되어 고전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1986년 이후로는 동시대의 주제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1986년에 한진의 <폭발>, 강 겐리예타(Kang Genriyetta)의 <가을에는 벚나무꽃이 피지않는다>, 이사베코프(Isabekov,D.)의 <상속자들>, 김 아나톨리의 <선녀의 오솔길> 등이 공연되었고, <춘향전>·<심청전>과 같은 고전도 공연되었다.

1987년 전반기 공연작품은 <아리랑고개>·<흥부와 놀부>·<장의자 >·<너 먹고 나 먹고>·<춘향전> 등이었다. 
공연물로는 그밖에 러시아 및 외국의 작품과 이웃민족인 터키계 및 카자흐계 민족들의 작품도 공연되곤 하였다.

1989년 극장의 단장은 이 발렌틴, 부단장은 박 알렉산드르이고 문 빅토르는 무대장치를 담당하였다. 
단장의 부인 이정희는 사할린출신으로 배우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발음지도도 맡았다.

한인극장은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집단농장이나 농촌 등을 순회하면서 1년에 25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 
모든 공연이 한국어로 진행되어 각 지역의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알려주고 민족긍지를 높이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여 왔다.

우즈베크공화국과 카자흐공화국에는 한인극장 외에 한인들로 구성된 몇 개의 소규모 가무단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가야금·아리랑·아침노을·도라지가무단이 그들이었다.
가야금가무단은 1969년 우즈베크 국립 카라야쿠보프 필하모니아에 부설되었다. 

단장은 진 페트르(Cin Petr)였고, 26명의 한인 배우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아리랑가무단은 한인극장의 후견 아래 활동하고 있었으며, 매년 카자흐공화국·우즈베크공화국과 중앙아시아의 다른 지역들 및 사할린·코카사스·우크라이나지역 등으로 공연여행을 다녔다.
김 블라디미르가 예술감독이었며 한 야코프가 단장직을 맡았다.

규모가 작은 아침노을가무단은 1972년 탈디쿠르간에서 발족된 후 줄곧 성장하여 카자흐공화국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여러 예술축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강 타챠나 이바노브나(Kang Tatyana Ivanovna)가 예술단장이었며,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단원으로 일하는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도라지가무단은 우슈토베의 한 국영농장 소속이었다. 
이밖에 폴리토트젤 집단농장의 문화궁전이 가무단을 재조직하려고 하였고, 한인들이 많은 여러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에서도 소규모 가무단이 예술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문학활동

구 소련내 한인들의 문학활동은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우리 나라와의 어떤 접촉 없이 반세기가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가꾸고 형성해왔다.

신한촌 시절의 연성용·채용·태장춘 등의 희곡작가와 조명희·조기천·한 아나톨리(HanAnatoliy)·김기철 등의 작가가 구 소련 극동지역의 한국문학을 창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 빈곤이나 정치적 이유로 새 삶을 찾아 그곳으로 이주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조명희의 공로는 주목할만하다.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된 뒤, 즉 1938년부터의 한국문학은 강태수·김광현·김기철·김남석·김두칠·김 보리스·김세일·김용택·김종세·김준·김증송·김 파벨(Kim Pavel)·남철·리 바실리(Li Vasiliy)·명철·박 미하일(Pak Mikhail)·박성훈·연성용·양원식·오 블라디슬라브(O Vladislav)·원일·이은경·이종희·임하·장윤기·전동혁·정상진·조정봉·주송원(Cu Aleksey)·차원철·최 예카테리나·한상욱·한 아폴론(Han Apollon) 등에 의해서 주도되어왔다.

구 소련내 한인작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소련 전역에 잘 알려져 있는 인기작가는 김 아나톨리이었다. 
그는 1940년 카자흐공화국의 튤카바스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1971년 고리키문학연구소를 졸업하였다.

사할린에서 군복무중 시를 쓰기 시작해서 1964년 사할린의 ≪레닌의 길로≫ 신문에 두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 뒤 그는 주로 소설을 썼는데, <묘코의 들장미 Myoko’s Sweet·Brier>와 <물색 Water Colour>이 1973년 아브로라사(Avrora)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 
그의 작품은 1910년 이후 극동지역 한인들의 생활모습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새벽의 오얏맛 The Taste of Blackthorn at Dawn>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의 단편집 ≪푸른 섬 The Blue Island≫(1976)과 ≪다람쥐 The Squirrel≫(1984)는 모스크바에서 간행되었고, 1987년에는 ≪바다의 신부 Bride of the Sea≫가 나왔다.

인간을 동물로 바꾸어 인간의 잔인한 성격을 보이려 한 ≪다람쥐≫는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초판 10만부가 불과 이틀 만에 매진될 정도였다. 
1985년까지 11권의 작품집을 출간하였으며, 영어·독어·프랑스어 등 8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이밖에 부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PuVladimir Nikolayevich)가 투르크메니아 작가연맹의 제2서기로 일하면서 소설·수필·동화 등 많은 작품을 러시아어로 발표하였다.

한인작가들의 문학작품과 활동을 보면 몇 가지 경향이 드러난다. 
소설에서는 레닌주의, 조국으로서의 구 소련, 제2차세계대전을 다룬 것과 극동 및 중앙아시아에서의 생활체험을 소재로 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 서정적인 작품이 약간 있으며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은 드물다. 
시에서는 일상생활과 사회적·윤리적 문제를 다룬 작품과 서정시가 가장 많다.

중앙아시아의 자연과 생활, 소련과 제2차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시도 적지 않았다. 
반면 어린이를 위한 것이나 극동생활을 다룬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발표지면은 거의 ≪레닌기치≫ 문예면에 국한되어 있고, 그래서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그 분량이 매우 적다.

이러한 발표지면의 문제는 한인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1982년 이래 알마아타에 있는 자주시(Zhazushy)출판사가 한인작가의 작품을 매년 1권씩 한글로 간행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시선집 ≪해바라기≫(1982)와 연성용의 ≪행복의 노래≫ (1983), 김준의≪숨≫(1985), 김광현의 ≪싹≫(1986), 그리고 1987년에는 김기철의 ≪붉은별들이 보이던 때≫·≪금각만≫ 등의 단편집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발표지면과 출판횟수는 한인작가들의 문학활동에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어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서 한글로 작품활동을 하는 젊은 문인들의 수가 점차 줄어가는 현상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학 연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한국어교육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미흡하지만, 러시아의 한국학연구는 상당한 역사를 지니며 다방면에서 왕성하였다.
19세기 말엽 한국이 외세의 각축장으로 변하자 러시아도 여기에 가담하면서 한국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극동대학교가 설립되어 한국연구가 개시되었다.

러시아의 외교관·지리학자·과학자들이 뒷날의 한국학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많이 남겨놓았다. 
비추린(Bichurin,N.Y.)이 1900년에 저술한 ≪조선기술 ≫이나 쿠너(Kuner,N.V.)의 ≪조선입문≫같은 책이 그런 것으로서 은둔의 나라 한국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은 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항의 서술에만 그쳐 학술적인 연구를 통한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1900년에는 러시아 재무성에서 1876년부터 1899년까지의 우리 나라 산업·풍속·교육·종교의 모습을 조사한 ≪한국지≫가 나왔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소련의 한국학은 1917∼1939년과 1945년 이후의 두 시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시기에서는 홀로도비치(Kholodovich)가 레닌그라드에서 ≪한글사전≫을 펴내어 한국학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로서 레닌그라드는 한국학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혁명투쟁에 관한 저술들이 다수 출판되었다.
1939년 이후의 스탈린치하에서는 한국학연구는 사실상 중지상태에 놓여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레닌그라드의 동양학연구소가 모스크바로 옮겨지고, 그 뒤 1950년대 중반 스탈린격하운동 전개와 함께 한국학은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

스탈린이 죽은 뒤 195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0차공산당전당대회는 소련의 한국학연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과학원의 동양학연구소에 일본·한국학과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서 황동민이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고, 이로부터 한국학연구는 모스크바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현재 동양학연구소의 소장은 프리마코프(Primakov,J.)이며, 한국계의 게오르기 김(Georgiy,F.Kim)이 제1부소장을 맡고 있다. 
이밖에도 ≪오늘의 아시아와 아프리카≫지의 총편집국장, 소일친선협회 중앙위원회 부회장 및 러시아동양학자연맹의 부위원장직도 겸직하고 있다.

동양학연구소 한국학과에는 한국역사를 전공하는 티아가이(Tiagay,G.)가 게오르기 김의 후임으로 한국학과 과장을 맡고 있고, 소련한국학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카자케비치(Kazakevich, I.)·바닌(Vanin, Y.), 민속학전공의 자릴가시노바 등의 연구·교수진이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모스크바대학에서 강의도 하면서 전공분야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모스크바대학교의 아시아·아프리카대학에서도 한국학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대학 극동학부 부장인 한인 박준호가 한국사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태생인 그는 1941년 모스크바대학 역사·철학·문학부를 졸업하고 1947년 석사학위를 받은 뒤 같은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한국사연구를 시작하였다. 

1961년에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1년 이래 극동학부의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삼국사기≫ 역주작업은 주목할만하다. 
그는 1955∼1959년 사이에 <신라본기와 사회경제 제문제>라는 서문을 붙여 <신라본기> 12권을 제1부로 완역하였다.

1980∼1985년 사이에는 <역사가로서의 김부식>이라는 논문과 <고구려본기> 10권, <백제본기> 6권, 연표·해설 등으로 짜여진 제2부를 완성하여 1988년에 출판하였다. 
제3부 <삼국사기 지()>는 1990년대에 작업 중에 있었으나 출판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한국사연구 업적으로 재소 한인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소련과학원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그라드의 러시아과학원 동양학연구소에서도 한국학연구는 활발하였다. 
이 연구소는 1918년 동양고전 필사본을 보관하는 박물관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뒤에 연구소로 발전하였고, 1956년부터는 모스크바 소재 동양학연구소 지부로서 운영되었다. 
이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는 트로체비치(Trotsevich,A.F.)와 니키티나(Nikitina) 두 여교수는 언어학자 홀로도비치의 제자들이다.

트로체비치는 1969년 <춘향전>을 번역하였고 1975년 ≪한국중세전기문학≫을 펴냈으며, 1985년에는 <인현왕후전>·<창선감의록>·<구운몽> 등의 한문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레닌그라드에서 ≪선행과 축복받은 사람들의 주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니키티나는 <홍길동전>을 번역하였고, 1982년에는 7∼10세기 신라시대의 시를 다룬 ≪제사의식과 신화에 관련된 한국고대시≫를 저술하였으며, 향가의 연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 연구소의 희귀본도서관은 동양 22개국의 70개 언어로 쓰여진 10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고 있다. 

그 중 한국서적으로 250권의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다. 
≪동의보감≫, 15세기의 ≪동문선≫ 26권, 그밖에 칠언절구·칠언율시·오언절구 등의 한시 46권(130부)등이 포함되어 있다.

레닌그라드 소재 러시아과학원 민족학대학에서는 한국문화 및 민속학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오노바(Ionova)가 1982년 모스크바에서 출판한 ≪한국의 풍습과 그 사회적 역할≫은 그 좋은 예이다.
이밖에도 한국문학을 번역하여 소련에 소개함으로써 한국문학연구에 공헌한 사람들이 있었다. 

박일은 1962년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을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하여 소련에 널리 소개하였다. 
조브티스(Zhovtis,A.L.)는 박일의 번역작품에 매혹되어 한국의 시문학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모르는 형편이면서도 박일 및 여러 한국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김삿갓·박인로·정철 등의 고전시와 재소한인시인들의 작품을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로 옮겼다.


유물

러시아 내의 한국유물 수집과 소장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84년 조선주재 러시아공사로 온 베베르가 민비로부터 받은 찻잔·찻잔받침대·도자기 등 270여점이 그 시초였다. 
이 유물들은 레닌그라드 소재 민족지학 및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자개패물함·고려자기·한복 등을 포함하여 수집품은 2,000점에 이르고 있다.
1957년 북한에서 보낸 병풍도 여기에 소장되어 있다. 
실제로 전시되어 있는 것은 100여점에 지나지 않는다. 
모스크바의 국립동양미술박물관을 비롯하여 키예프·타슈켄트 등지의 박물관에도 한국유물이 다소간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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