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3일 토요일

맹자, 孟子, Mencius.

 맹자, 孟子, Mencius.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생몰 연도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공자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라는 맹자 자신의 말과, 맹자가 만난 제후들의 재위 연대를 고려할 때 그 활동 시기는 전국 시대 중엽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생몰 연도에 관해서는 기원전 372~289년 설과 기원전 385~304년 설이 있다. 

맹자가 태어난 곳은 당시 노나라와 인접한 추()라는 소국이었다. 
‘성인이 살았던 곳과 가깝다’는 맹자 자신의 말대로, 오늘날 중국 산둥성 쩌우()현에 있는 맹자묘는 취푸()현에 있는 공묘, 공부, 공림 등에서 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에 따르면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제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후한 시대 조기()의 [맹자제사]()에 따르면 맹자는 직접 자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연대적으로는 앞의 [사기]의 설이 보다 타당하다.

이른바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직지교 이야기는 전한 시대 유향이 편찬한 [열녀전]에 나오는데, 이야기 자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에 가깝다. 
다만 맹자의 어머니가 현모()로서 맹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맹자가 어머니의 장례를 유달리 각별하게 마음 써서 지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군주들에게 설파하는 유세()를 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얼마 동안 유세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양나라 혜왕과 양왕, 제나라 선왕, 송나라 언왕, 추나라 목공, 등나라 문공 등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분명하다. 
맹자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 
말년의 그는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전념했다. 
사마천은 [사기] ‘맹자순경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국들은 바야흐로 합종연횡을 통한 싸움에 힘쓰고, 전쟁만을 능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맹자는 요순()과 하․은․주 삼대의 성왕들의 덕치를 주장하고 다녔으므로, 그의 주장은 찾아간 나라들의 실정과 부합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물러나 만장 등 제자들과 함께 시()와 서()를 정리하고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천술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인의’()를 주창

사실상 맹자로 인해 유교에서 의가 인에 못지않은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의의 중요성은 맹자 시대의 전반적인 사상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맹자]에는 ‘은 사람이 거해야 할 편안한 집이고, 는 사람이 걸어야 할 바른 길이다’(이루상)라는 대목이 나온다. 
‘왜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양혜왕상)라는 대목도 나온다. 

[논어]에서는 인()도 의()도 지(), 용(), 신() 등의 다른 여러 덕목들과 사실상 동렬의 것으로 등장한다. 
인과 의를 대비시키거나 합쳐서 말하는 경우는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인은 유교에서 최상의 덕목으로 일컬어진다. 
맹자가 유교에 미친 많은 영향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의()의 가치와 의미를 중시하여 높였다는 점이다.

맹자의 논적인 고자()는 이른바 인내의외(), 즉 인은 내면적인 것이고 의는 밖으로 드러난 외면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장자] 내편과 [묵자]의 십론 가운데에도 인과 의를 대비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나온다. 
그러나 인과 의를 나란히 일컬어 ‘인의’로 말한 것은 맹자가 처음이다. 
맹자를 인의의 제창자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맹자의 사상과 학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왕도론과 성선설이라고 하지만, 인의야말로 그 둘을 뒷받침하고 연결 짓는 축에 해당한다. 
인의의 정치를 행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는 것이 왕도론이며, 인의의 마음을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게 성선설이다. 
요컨대 맹자의 정치론과 인간론에서 공히 중추를 이루는 것이 인의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의’에서 인과 의의 뜻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때에 따라서는 일종의 가족 도덕에 한정되어 각각 효()와 제()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으나, 대체로 인은 연민이나 친애()를 뜻하고 의는 정의나 도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인의’는 그 자체로 도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인간의 도덕적 각성과 수양을 요구하는 성선설

성선설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도덕적 소질을 갖추고 있다는 주장이다. 
자공은 스승 공자에 대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성()과 천도()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좀처럼 듣지 못했다’라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공자의 제자 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맹자 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성행했다.

[맹자] ‘고자상편’에는 성선()의 입장을 취하는 맹자와, 인간의 본성은 본래부터 선과 불선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고자() 사이의 한 발치 양보도 없는 논쟁이 실려 있다. 

‘고자상편’에 실린 맹자의 제자 공도자()의 말에 따르면, 맹자의 성선설, 고자의 성무선무불선()설, 그리고 인간 본성에는 선악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어 본성을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설, 본성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설 등이 있었다.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관한 맹자의 주장은 인간의 마음이 인의예지() 각각의 실마리에 해당하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선설은 논리적 논변이나 구조를 갖춘 학설이라기보다는 맹자의 신념을 밝힌 것에 가깝다. 

성선을 주장하는 맹자의 의도는 결국 각 개인에 대해 도덕적 각성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부단하게 수양할 것을 요구하는 데 있다. 
맹자를 가리켜 유학에서 ‘마음의 본래 이치를 밝혀 도덕 수양을 하는 학문’ 즉 심학()의 사실상의 제창자로 일컫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맹자의 민본주의와 혁명사상 그리고 왕도() 정치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 임금이 걸을 쫒아내고 무왕이 주를 정벌했다는 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그렇다고 답하자 선왕이 다시 물었다.

“신하된 자가 자기 임금을 살해해도 괜찮은 겁니까?”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인()을 해치는 자를 흉포하다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학하다 하는 데, 흉포하고 잔학한 인간은 한 평민에 지나지 않기에, 한 평민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 ‘양혜왕’하

불인하고 불의한 군주는 민심을 잃게 되는데, 민심이야말로 하늘이 맡긴 사명이자 소임, 즉 천명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민심을 잃어 천명이 떠나간 군주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 
천명이 떠나버린 군주를 몰아내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 
여기에서 맹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을 엿볼 수 있다. 
맹자는 ‘백성이 귀중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대단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민본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힘으로 인()을 가장하는 것은 패도이다.

패도를 칭하려면 반드시 큰 나라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

왕도를 펴는 데는 큰 나라여야 할 필요가 없다.…

힘으로 남을 복종시킨다면 그것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며 힘이 모자라서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킨다면 그것은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정말로 복종하는 것이다.[맹자] ‘공손추’상

무력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패도가 횡행하던 시대에 맹자는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의()을 실천하는 정치, 이른바 왕도 정치를 꿈꾸었다. 
앞서 인용한 사마천의 기록, 즉 ‘요순과 하․은․주 삼대의 성왕들의 덕치를 주장하고 다녔으므로, 그의 주장은 찾아간 나라들의 실정과 부합될 수 없었다’는 기록은, 맹자의 왕도 정치 이상이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정을 알려준다. 
그가 꿈꾼 ‘왕도 정치의 군주와 나라’는 이후 유교의 역사를 통해 모든 유학자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이상이 되었고, 때로는 패악한 군주를 비판하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가능한 방법은 『논어』나 『맹자』에 실려 있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즉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이나, 목격했거나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참고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공자는 대략 기원전 551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으며 맹자는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로 분류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기원전 770년은 주() 왕실이 견융()이라는 종족에게 쫓겨 수도를 동쪽인 낙양()으로 옮긴 해이다. 
그 전까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봉건국가들이 위성처럼 분립해 있었으며 이들은 혈연과 제사와 군사에 의해 주 왕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즈음을 전후해서 이러한 봉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는 패자()들의 시대였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목만은 존중하면서 실상은 무력으로 다른 제후들을 정복했고 그럼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차례로 천하를 제패했던 제()나라의 환공(), 송()나라의 양공(), 진()나라의 문공(), 진()나라의 목공(), 초()나라의 장왕()은 5패로 불린다. 

춘추시대만 해도 ― 제후국들은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지만 ― 패자들은 근왕()의 기치를 내걸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제후들도 더 이상 근왕의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17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들은 동맹과 연맹의 결성, 외교적․군사적 전쟁을 통해 7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전국칠웅()이라 불리는 한()․위()․조()․연()․제()․초()․진()이 이들이다. 
이들은 천하를 제패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했다.

공자는 주 왕실 중심의 봉건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생각했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눈에서 보면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정치적 혼란기였을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전국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는 정책도 시도되었으며, 한편에서는 상인의 세력이 커져서 상인으로서 부에 의해 진의 재상까지 된 여불위() 같은 사람도 등장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제자백가()의 시대였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에 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으며, 
사상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다채로운 논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법가, 도가, 농가, 종횡가, 명가, 음양가, 잡가 등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왕성한 사상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맹자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해갔다.

맹자, 즉 맹선생의 성은 맹()이며 이름은 가()이다. 
추()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맹자는 인의()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일이 년 뒤에 혜()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송(, 하남성 상구현), 설(, 산동성 등현 서남쪽)을 거쳐 일차로 추에 돌아온 뒤, 다시 문공()의 초대를 받아 등(, 산동성 등현)으로 갔다. 
역시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노(산동성 곡부현)를 거쳐 고향인 추로 돌아왔다.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이었다. 
그러한 제후들의 현실적 관심과 맞아떨어질 여지가 없었던 맹자의 이론은 어느 제후에게도 채택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 되었을 때라고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그리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7편이다.

사려 깊은 교육환경

맹자는 이름이 가(), 자는 자여(輿)이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지금의 산둥성 취푸) 부근인 추(, 현 산둥성 추현 동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나라 희()씨 성의 귀족공자() 경부()의 후예로 부친의 이름은 격()이고, 모친은 장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환경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집을 옮겼었다. 
저 유명한 ‘맹모삼천지교()’가 바로 그것이다. 
맹자가 공부하는 기간을 채우지 않고 집으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짜던 베를 끊어 경계했다는 ‘단기지훈’이란 유명한 고사를 통해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공자 문하

맹자가 난 곳은 공자의 탄생지인 노나라의 창평향() 취읍(현 산둥성 추현)과 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또 사숙하였다. 
자라나면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 즉 공급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유가학파의 분류상 ‘사맹 학파’로 불리며 공문()의 적통을 대표한다. 
학설에 의하면 직접 자사에게서 배웠다고 하기도 하나 연대가 맞지 않는다.

맹자는 오경에 능통했으며, 『시경』과 『서경』(또는 『상서』)에 조예가 깊었다. 
말년에 문인 만장공손추 등과 함께 책을 써서 자신의 설을 세우는 한편, 시, 서 등 유학을 강론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종사했다.
그가 죽은 뒤 역대 왕조들이 잇따라 작위를 추증하여 그 위상을 높였는데, 송나라 때인 1083년에 추국공()에 봉해진 이래 1330년 원나라 때 ‘추국아성공()’, 1530년 명나라 때 ‘아성()’, 1935년(민국 24)에 ‘아성봉사관()’ 등으로 봉해졌다.

『한서』 「예문지」에 『맹자』 11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7편만 남아 있는데, 제자들과 맹자의 언행록이 수록되어 있다.

‘실력을 믿고 정벌의 명분으로 인의()의 이름을 빌리는 이를 패()제후라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국력이 강대해야 한다. 

덕으로 인의를 행하는 이는 천하를 귀복시킬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데는 반드시 강대국일 필요는 없다. 

실력으로 복종시키는 이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덕으로 복종시키는 이는 사람들이 기뻐서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맹자] 공손추상

시대적 배경



공자와 맹자의 시대적 차이는 몹시 컸다. 
공자가 처했던 춘추시대는 비록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쇠퇴했고 또 춘추오패가 나타났으나, 그래도 존왕양이의 풍조가 남아 있었고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재건할 수 있는 희망이 적게나마 있었다.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로서 주 왕실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여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도 망각할 정도에 이르렀고, 각기 제후들은 승부를 다투는 싸움을 벌여 약육강식의 난맥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폭력과 허망한 사설()이 횡행하여 천하는 극도로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은 도탄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며 갈 바를 몰랐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희미해져서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기자 공자께서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다는 그 춘추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모습이었으니, 중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일찍이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혼란시대였다.
이런 때에 맹자는 의연히 일어나 불타협의 굳은 신념으로 무력에 의한 패도를 버리고 하 · 은(상) · 주 3대의 전통인 인의왕도()의 덕치로 천하가 하나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여러 나라의 군주를 찾아 그들을 설득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정치적 이상주의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왕도정치에 의한 이상적인 세계의 건설을 주장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에 집착한 사상가였다.
맹자의 주장은 대부분이 당시의 실권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에 광분하고 있던 여러 군주에게 이()를 버리고 인의()를 찾으라고 했다. 
불쌍한 것을 보고 못 견디는 마음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하여 왕도덕치의 근원이 임금의 덕심()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이렇게 천하의 온갖 책임을 위정자 한 사람의 덕에 돌리면서도 맹자는 임금의 존재를 형편없이 격하시켰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고 했다. 
“임금은 백성과 같이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권()을 더없이 높였고 민본사상()을 최대한으로 고취했다.

맹자는 패도정치()는 악덕할 뿐만 아니라 오래 가지도 못하고, 또 천하를 통일하고 참다운 왕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보다는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으면 온 천하가 저절로 귀순심복()할 것이며, 그 때에야 스스로 천하를 덕으로 다스리는 참다운 왕좌에 오를 것이요, 그것이 바르고 영원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무력을 배제하고 덕치를 주장한 맹자는 당연히 보민양생(), 즉 민생을 중하게 강조했다. 
맹자의 민생주의는 바로 맹자의 경제사상의 일환이기도 했다. 
맹자는 농업생산을 진작하여 백성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안락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안정, 민생안정이 정치의 바탕이라는 생각은 오늘에 와서는 당연하지만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일대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맹자의 민생안정은 제후들의 포악을 막고 반대로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맹자는 민생안정을 국민복리 면에서도 강조했다. 
“양잠을 장려하여 비단을 증산하고 가축을 증산하여 노인들에게 따뜻한 비단옷을 입히고 든든하게 고기를 먹이라”고 강조했다. 
백성을 안락하게 살게 해주고 나아가서 백성을 교육하여 높은 경지에 이끌어 올려야 한다고 했다. 
맹자의 정치사상은 필연적으로 교육사상과 연결된다. 
그는 말했다. 

“정성껏 학교 교육을 시행하고 더 나아가 효제인의를 넓히면 노인들이 길가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일흔 살의 노인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그런 상태로 다스린다면 바로 왕도의 임금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훗날 유가가 독존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그는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란 뜻으로 ‘아성()’으로 추앙되었지만, 당시 정치판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맹자의 이러한 티없는 선의에서 우러난 사상과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설정된 여러 가지 방책은 정치제도, 사회정세, 경제정책, 문교시책, 생활태도, 학술문화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선명하게 반영되었고 폭넓게 논의되었다.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민본사상은 아주 귀중한 주장으로 정치사상의 질을 높였다. 
그는 공자와 더불어 ‘공맹()’으로 불리기도 하고,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도 했는데, 순자의 ‘성악설()’과 함께 중국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을 제공했다.

맹자 주요사상

천인합일(天人合一)

맹자에게 있어 하늘은 천리()이자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며 또한 우주의 주재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뜻, 즉 천의()의 발동자였다. 
사람은 본성 속에 하늘을 지각하고 따르는 속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즉 맹자는 말했다. 
“영명한 본심을 극진하게 계발하면 본성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늘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영명한 본심을 잘 간직하고 본성을 잘 배양하면 천도를 따라 섬길 수가 있다.”

결국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과 일치 즉, 천인합일하게 마련이며, 동시에 하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이므로 천명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사람이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다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명수를 잘 받아,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성선설(性善說)

공자의 도는 맹자에 이르러서 더욱 선양되고 빛났다. 
맹자는 도의 근원을 요 · 순으로부터 시작하여 우 · 탕 · 문무(문왕()과 무왕()) · 주공() 그리고 공자를 거쳐서 자신에 이르기까지 도의 정통을 세움으로써 유교의 체계를 확립시켰다.

사람의 본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그 본성 속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 보아 넘길 수 없는 측은지심()인 인()을 비롯해서,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인 의(), 어른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는 사양지심()인 예(), 선악을 식별하는 시비지심()인 지() 등 사단()이 존재하며, 인간의 이 본성은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성은 본선()이라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잘못하여 우물로 빠져 들어가려는 광경을 발견했을 때 경악과 측은한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을 금치 못하는 것은 사람의 공통적인 것이라는 것을 들어 성선설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선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맹자는 선한 본성의 발단과 적극적인 확충, 선의 본성을 잃는 일을 막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논하고, 인간만사를 선한 본성에 따라서 처리할 것을 권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가게 되면 성인에 못지않은 경지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어버리면 본래부터 선한 본성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타락해 버린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발전을 지향하도록 줄기차게 고무해 주는 힘이 있다.

인륜(人倫)과 대장부(大丈夫)

맹자의 인생관이나 윤리관은 한 마디로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에 서 있다. 
맹자는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천지에 죄 될 일이나 부끄러운 일을 안 한 것, 천하의 수재들을 모아 교육하는 것이다. 
그 중에 임금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끼지 못한다.”

맹자는 가장 높은 작위를 천작()이라 했고, 인간 정치사회에서의 작록(祿)을 인작()이라 하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보다도 도를 더 존중했기 때문에 맹자는 인생의 가치를 “인을 이루고 의를 따르는” 데 두었으며, “의를 살리고 목숨을 버리라”고 했다. 
나의 생명보다도 인의()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의가 우주의 대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맹자는 대도의 윤리와 덕목을 지키는 사람을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대장부’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 즉 천하의 넓은 집에 몸을 두고, 의() 즉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대도()를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인의의 대도를 구현하고, 뜻을 못 얻으면 자기 하나만이라도 대도를 간다. 
부귀에도 타락하지 않고, 빈천에도 절개를 바꾸지 않으며, 어떤 권세 앞에도 굴복하지 않으니 그런 사람이 바로 대장부이니라.”

이러한 대장부는 지대지강(, 더없이 크고 굳셈)하고 천지에 대통하는 호연지기()를 지니고 있다. 
그 호연지기를 키우는 바탕은 바로 존심양성이다.

맹자는 자기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격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자기향상의 목표를 요 · 순 같은 성인에 둘 것을 말했다. 
대장부로 큰 뜻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굳센 신념이 있어야 함을 말했다.

맹자의 공부법

맹자의 공부법은 공자의 공부법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계통적이다. 
먼저 독서와 관련하여 맹자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독서 과정에서의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작용을 중시하여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다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진심()」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서두르거나 요령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굳센 의지와 항상심을 가지고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해야지 용두사미식의 공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맹자의 공부법을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맹자는 독서나 공부는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말한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구하면 얻는데 유리하고, 구하면 내게 존재하게 된다”(「진심」상). 
이 공부법을 간단하게 줄여 ‘자구자득()’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또 이렇게 말한다. 
“무릇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려우리오! 사람이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이니 그대가 돌아가 구하면 배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고자()」하). 
맹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깊이 나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얻으면 삶이 편안하고, 삶이 편안하면 자질이 깊어지고, 자질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그 근원을 만나기 때문에 군자는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이루()」하).

이 대목을 공부나 교육과 연관 지어 보면 이렇다. 
스승이 학생들을 보다 깊이 있는 공부로 이끄는 방법은 학생의 내적 동기를 계발하고 유도함으로써 스스로 구하여 얻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적 욕구에 기대어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얻게 하는 것이다.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학문의 길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다. 
그 놓인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고자」상). 이런 저런 잡념과 딴 마음으로 독서하는 태도를 맹자는 단호히 배격했다. 

맹자는 천하에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혁추()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사람과 사냥 따위에 마음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냐며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극진히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자」상)고 강조한다. 

공부에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마음으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머리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맹자는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를 우물을 파는 일에 비유하며 “뭔가를 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파고도 물이 안 나온다고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진심」상)라고 하여 공부나 독서를 견지하지 못하면 끝내는 헛공부가 된다고 지적했다.

독서나 공부는 축적이 핵심이다. 
축적되지 않는 공부는 헛공부다. 
쌓이는 과정 그 자체가 한 인간의 성숙도를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가 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하라고 한 것은 공부와 독서의 핵심과 그 효과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다 차거든 나아가라

인간이 성장단계를 건너 뛸 수 없듯이 공부에도 단계가 있다. 
지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공부의 질과 양은 달라지지만 그 지력과 관심에는 단계가 있다. 
쉽게 말해 성장과정과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공부와 독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흐르는 물이 웅덩이에 차지 않으면 흐르지 못한다. 
군자가 도에 뜻을 두어도 글을 이루지 못하면 통달할 수 없다”(「진심」하).
물은 밤낮없이 흘러 웅덩이를 채워야만 계속 흘러 바다에까지 이를 수 있다. 
맹자는 물을 공부에 비유하여 점점 축적되는 지식, 순서에 따라 꾸준히 나아가는 공부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 공부법은 앞에서 꾸준히 한 마음으로 공부하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꾸준히 한 마음’이 큰 테두리에서 공부의 태도와 자세를 말한 것이라면, 이 방법은 좀 더 구체적이다. 
그 같은 자세를 견지하면서 순서를 밟아 단계적으로 공부하면 지식은 축적되고 지혜는 깊어져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맹자는 오로지 마음이란 기관에 의지한 사유야말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듣고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우선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귀와 눈은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물에 가려진다. 
그래서 눈과 귀는 사물과 접촉하면 거기에 끌려 갈 뿐이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고자」상).
이 말은 실제 인식을 감성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는 요구다. 
반드시 사유를 거쳐 사물의 진실된 내면, 즉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맹자는 또 독서하면 의문이 생긴다고 주장하면서 앞서 말한 대로 “책을 다 믿느니 책이 없는 것이 낫다”(「진심」상)라고까지 말한다. 
어떤 공부가 되었건 의문을 품을 줄 모르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다. 
독서나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과 관심이며, 그 호기심과 관심의 이면에는 강한 의문이 함께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의역지(以意逆志)

맹자의 공부법에서는 작품, 특히 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띤다.
“시를 말하는 사람이 글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 않아서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것을 시를 안다고 할 것이다”(「만장()」상).
이 중에서도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이의역지란 대목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이 유력하다.

하나는 청나라 때 학자들의 해석으로 ‘옛사람의 뜻으로 옛사람의 뜻을 찾는 것’으로, 말하자면 ‘시로 시를 논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를 분석하여 작가의 사상을 유추한다는 의미다.

하나는 한나라 이래 다수의 해석이다. 
이 해석들에 따르면 ‘이의역지’에서 ‘의()’자를 독자의 사상 · 지식 ·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작품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 작가의 뜻을 이해하거나 유추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의역지’ 공부법은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우선 작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다른 작품들을 참조하여 그것들을 근거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주관에 근거하여 작품의 경향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나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절충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지인논세(知人論世)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다’는 ‘지인논세’는 그 방법과 의미가 확대되면 독서나 공부의 최고 경지가 된다. 
맹자는 이를 우선 책의 작가와 그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맹자는 작품과 작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인논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사람들의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는) 그 세상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로 올라가서 옛 사람을 벗하는 것이다”(「만장」하)

진정으로 그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경력과 사상 심지어는 감정과 인격까지 파악해야 한다. 
그 사람의 객관적 조건, 이를 테면 그가 처했던 시대적 환경 따위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좁게는 한 작가와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지만, 이 공부법이 확대되고 깊어지면 말 그대로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과 세상을 알고 논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모든 공부는 지나온 과정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진짜 독서고 제대로 된 공부다. 
명인들이 하나같이 제기하는 공부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넓게 배우고 상세히 해설하는 것은 되돌아가 요약하려는 것이다”(「이루」하)
맹자가 말하는 ‘상세히 해설’은 읽고 공부한 것에 대한 정교하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자세히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요약’은 공부한 내용에 대한 간명한 개괄을 말한다. 
공부는 먼저 넓고 치밀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이를 기초로 귀납하고 개괄하여 명확하게 공부한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이상 살펴본 맹자 공부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공부법이 대단히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로부터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 방법,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자신의 주관으로 요약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인 방법론들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공부법은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단계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