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孟子, Mencius. 1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
맹자는 ‘마음을 다한다’는 뜻의 「진심」(상)이란 장에서 “부모형제가 모두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천하의 재능 있는 인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며 세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소위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것이다.
인재를 교육시키는 것을 낙으로 알았던 맹자이기에 공부에서도 대단히 적극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맹자 자신이 “구하는 데는 방법이 있고, 얻는 데는 명이 있다”(「진심」상)고 했듯이 공부에도 나름대로의 규칙과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규칙에 근거하여 정확한 공부법을 잡아야 한다는 정신이다.
하나는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즉, 공부의 규칙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수시로 자신의 학습 행위를 그 규칙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평생을 공부해도 제대로 된 방법과 길을 모른 채 헤매다 평범한 독서인으로 남게 된다.
맹자 공부법의 뿌리인 맹모(孟母)
공부에 관한 맹자의 기본 정신은 대단히 엄격하다.
이는 맹자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으며 특히, 그 어머니의 교육법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맹자의 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다시피 자식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씩이나 한 어머니이지 않은가.
맹모의 극성은 삼천지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결단(決斷)’이란 단어가 있다.
무엇인가 확고한 결정을 내리거나 굳은 결심을 할 때 ‘결단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근원지를 추적해보면 공교롭게도 맹모와 만나게 된다.
학업에 힘쓰던 맹자가 한번은 공부하다말고 밖에 나가 논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맹모는 아들을 불러다 놓고 맹자가 보는 앞에서 한동안 열심히 짜놓은 베를 칼로 서슴없이 잘라버렸다.
맹자는 깜짝 놀라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맹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들 맹자를 가르쳤다.
“베는 실 한 올 한 올이 연결되어야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한 방울 한 방울 쌓여야만 한다.
네가 공부하다말고 나가 놀았다는 것은 잘려나간 이 베와 마찬가지로 쓸모없어진다는 것과 같으니라!”
이 일화에서 이른바 ‘베틀을 끊어 가르친다’는 ‘단기지교(斷機之敎)’ 또는 ‘단직교자(斷織敎子)’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또 여기서 ‘결단’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관련 유적
맹자 관련 유적은 고향 추현에 그의 무덤과 사당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의 무덤인 맹모림(孟母林)과 ‘맹모삼천지교’와 관련된 유지 등이 남아 있다.
맹모삼천지교가 만든 성인,
맹자는 산둥성 추현 지방 출생으로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 또는 자거(子車)다.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는데, 조숙했던 공자와는 달리 말썽꾸러기였다.
모방하려는 기질이 강하여 주변 지역의 풍습을 곧잘 흉내 냈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세 번 이사를 다니며 가르쳤다고 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유명하다.
그가 노는 모양을 보니, 무덤을 만들고 발로 달공하는 흉내를 냈으므로 맹자 어머니는 “이곳은 아이를 기를 만한 데가 못 된다.”
하고는 이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이와 관련하여 《열녀전》에 나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 집은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흉내를 자꾸 내서, 이에 맹모는 “이곳도 아이를 교육할 만한 곳이 못 된다.” 하며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여기에서는 놀이를 하되, 제기를 차려놓고 어른에게 인사하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예를 다하는지라,
이때에야 비로소 맹모는 마음을 놓고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자식을 가르칠 만한 곳이구나.” 하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맹자의 어머니가 모성 교육의 사표(師表)로서 후세에 길이 빛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나 맹자가 생존했던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를 만큼 많은 사상가들이 나왔는데, 가령 유가 외에도 도가 · 묵가 · 법가 · 병가 등이 있었으며, 또한 황당무계하고 대담한 학설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잡다한 학설에 대항하여 유가의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이 바로 맹자였다.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맹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더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가 이웃집의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돼지는 왜 잡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무심코 대답했다.
“너를 먹이려고 그런단다.”
곧 맹모는 자신의 말에 크게 후회했다.
“내 듣건대 예전에는 태교(胎敎)도 있었다는데, 이 아이가 무엇을 알려고 묻거늘 내가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이것은 불신을 가르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생각에 맹모는 결국 그 돼지고기를 사다 먹였다는 것이다.
그 후 맹자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몇 년 후에 선생님이 그를 불러서 말했다.
“너는 내게서 배울 것을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 여기에 나올 필요가 없다.”
맹자는 공자가 태어난 곳에서 겨우 6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를 흠모했고 그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맹자는 노나라의 수도인 취푸(曲阜)로 가게 되었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 후 맹자는 말 타기를 배우다가 넘어져 팔을 다쳤는데, 마침 어머니와 헤어진 지도 오래되고 하여 고향으로 갔다.
그때 길쌈을 하던 맹모가 물었다.
“너의 공부가 얼마나 성취되었느냐?”
이에 맹자가 대답했다.
“별로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맹모는 칼을 들어 길쌈하던 것을 끊으며 말했다.
“네가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는 것은 마치 내가 이 칼로 여태까지 애써서 짜던 이 길쌈을 끊는 것과 같다.”
맹자는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쉴 줄을 몰랐다.
이것을 맹모의 단기지교(斷機之敎)라고 한다.
마흔 살을 전후로 추(鄒)나라의 벼슬길에 올랐으나, 혼란한 세태에 실망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그는 공자의 손자이기도 하고 또 증자의 제자이기도 한 자사의 문하에서 정통적인 유학을 배웠고, 수많은 제자들과 더불어 여러 나라를 주유(周遊)하며 유가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가 수백 명의 제자와 함께 수십 대의 수레를 이끌고 이동할 때는 일대장관을 이뤘으며, 용기가 넘치고 기질이 강했던 그는 여러 왕들에게 이상정치를 실시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기도 했다.
여든네 살까지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고, 자신의 이상을 전하기 위해 《맹자》를 일곱 편까지 썼다.
사람은 본래 착하다
사람의 천성은 선할까,
악할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이고, 다른 하나는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천성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듯이, 오직 선한 것만을 따른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되며, 현자의 모범적인 삶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착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잘못이나 죄는 밖에서 사람을 옭아매는 사회제도가 불완전한 데서,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의 예를 든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령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나 깜짝 놀라서 건지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잘 사귀어보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며, 그 아이의 지르는 소리가 듣기 거북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니···.”
이러한 맥락에서, 맹자는 인간에게 다음 네 가지의 ‘착함의 처음’이 있다고 말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시작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시작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시작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이라.”
이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어질다고 하는 증거다.
둘째, 누구나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의롭다고 하는 증거다.
셋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예의바르다고 하는 증거다.
넷째, 누구나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지혜롭다고 하는 증거다.
모두 이처럼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착해질 수 있다.
본래 착한 인간의 마음일지라도 불의 불씨나 물의 샘 줄기와 같아서 그것을 바르게 잘 이끌면 요원(燎原)의 불길이나 큰 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꺼지거나 말라버리기 쉽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인간의 선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는 과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부동심과 호연지기
수양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맹자는 우리가 착한 본성의 씨앗을 잘 보존하고 널리 키워나가는 방법으로,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수양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밖에서부터 찾아오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부동심(不動心)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 맹자는 먼저 참된 용기(大勇)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참된 용기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다.
이는 스스로 반성해봐서, 자신을 의롭지 않다고 여기면 아무리 헐렁헐렁한 옷을 입은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겁을 내게 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설사 천만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용기에 의해 부동심은 길러진다.
둘째, 우리가 부동심을 얻기 위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한다.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이다.
손상시키지 않고 곧게 키우면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만 의리에 맞는 행동을 취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면적으로 의리를 쌓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잠시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송나라의 어떤 사람은 자기 논에 심은 모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한 뿌리 한 뿌리씩 손으로 잡아 뽑아서 올려주었다.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나는 논의 모가 빨리 자랄 수 있도록 돕느라 매우 혼이 났다.”라고 했다.
이에 놀란 그의 아들이 달려가 보니, 논의 모들은 벌써 다 말라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기(氣)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모를 억지로 뽑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맹자는 지적했다.
수양이 잘된 사람은 절대로 물질에 대한 욕심에 유혹되어 도덕적 신념이 흔들리지도 않거니와 어떤 위협이나 곤란 아래서도 인의의 행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무리 부귀하여도 음탕한 데 빠지지 않으며, 아무리 빈천하여도 주체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리 무력으로 위협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이 많아지면 성적인 음란에 빠지고 술이나 도박에 취하기 십상인데,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결코 그런 일에 빠져들지 않는다.
또한 사람이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비굴해져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마련이지만,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그러하지 않는다.
아울러 웬만한 사람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무릎을 꿇기 십상이지만, 역시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원칙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가령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했다고 해서 흥청망청 쓰지도 않고, 비빌 언덕조차 없이 가난해졌다고 해도 끝까지 인간의 도리를 지켜나가며, 어떠한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왕도정치와 정전제도
개인마다 스스로 수양을 잘해야 하겠지만, 한 나라가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이에 맹자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국가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
‘사람의 본성은 어질기 때문에, 위정자는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른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그 정치론의 핵심이다.
왕도정치는 먼저, 공리주의(功利主義)를 배격한다.
맹자는 양 혜왕(梁 惠王)에게 공리주의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약 임금께서 어떻게 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주장하신다면, 대부(大夫)들도 어떻게 하여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이며, 또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하여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아래가 서로 자기의 이익만을 얻기 위해 다투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
신하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어버이를 섬기고, 동생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해서 형을 섬긴다면, 그것은 인의가 아니라 이익 때문에 서로 만나는 것이 된다.
그러하면서도 멸망하지 않은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맹자는 통렬히 비판한다.
둘째, 왕도정치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왕들은 우선 백성들의 생산 능력을 안정시켜 위로는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게 해주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할 수 있게 해주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굶어 죽지 않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맹자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장해주기 위해 정전제도의 실시를 주장했다.
이 제도는 여덟 집이 한 정(井)이 되어 집집마다 100무(畝)의 토지를 받아 농사를 짓되, 한가운데 있는 공전(公田)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도록 하는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5무 되는 집터 안에 뽕을 심고 누에를 치면 쉰의 늙은이도 모두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닭과 돼지를 길러 새끼 치는 것을 돌봐주면 일흔의 노인도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성들에게는 생업을 보장해준 뒤에 비로소 도덕적인 생활로 이끌어야 하는 반면, 지도층에게는 생업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인 생활을 솔선수범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먹고살 만큼의 녹봉을 주되, 그렇다고 정치지도자들이 재산을 쌓아놓아서도 안 되고 부와 사치와 음란을 누려서도 안 된다.
정치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어질고 너그러운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
형벌을 줄여주고 세금을 가능한 한 적게 거두며,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먹고사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백성들이 효성과 공경, 우애와 진실, 신의와 도덕을 닦게 하여 살고 죽는 일에 유감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맹자는 인의를 숭상하고 덕을 본위로 하는 왕도정치가 이(利)를 숭상하고 힘을 본위로 하는 패도정치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왕도정치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천자(天子)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덕스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임금은 백성들의 신뢰를 받는 현자 가운데서,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닌 선양에 의해 추대되어야 한다.
사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다시 세우는 세습제도나, 오늘날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방식에는 모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왜곡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덕스러운 사람을 추대해 왕으로 모시도록 하는 방식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맹자는 본 것이다.
이렇게 추대된 통치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만일 막강한 힘을 가진 군주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에는 당연히 백성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에는 다른 군주를 모셔올 수도 있다.
군주로서의 의무를 게을리 하여 백성들의 마음에서 멀어진 자는 왕위를 물러나게 해야 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심지어 살해해도 좋다.
폭압정치를 펴며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임금은 이미 임금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를 퇴위시키거나 죽인다 한들 신하 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초상화가 제거되다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함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그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인의의 도덕정치, 이른바 왕도정치를 주장함으로써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공자가 주로 교육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맹자는 군왕이나 권력자, 그리고 귀족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맹자가 그들에게 가르친 방법은 아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지와 용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군주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은 도리어 맹자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가 민심에 바탕을 둔 인의정치를 주장하면서도, 군주제를 선호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민주제 아래에서는 국민 개개인을 교육시켜야만 하는 데 비해, 군주제 아래에서는 왕후 한 사람만을 올바르게 이끌면 족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정치를 담당한 소수, 나아가 한 사람만 현명하면 나라는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고 믿었던 까닭이 아닌가 싶다.
맹자는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라도 물러나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초상화와 글이 문묘(文廟)에서 제거된 일도 있었다.
역대의 왕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흔들 수도 있는 맹자의 정치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많다.
맹묘(孟廟)
‘아성묘(亞聖廟)’라고도 부르는 맹자의 사당 맹묘는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다.
역대로 맹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다.
맹묘의 역사는 북송 인종 경우(景祐) 4년인 1037년에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연주지주(延州知州)로 있으면서 사기산(四基山)에서 맹자의 무덤을 방문하고 무덤 옆에다 사당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 맹묘를 확장하고 수리했고, 명나라 때 지금과 같은 규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아성전(亞聖殿)이 남북 중축선상에 자리잡은 사당 내의 주체건물인데, 7칸에 높이 17미터, 길이 27.7미터 깊이 20.48미터이다.
중층에 녹색 유리기와를 얹었다.
처마 밑으로 팔각기둥이 26개가 있는데 기둥 전체에 용과 봉황 그리고 꽃을 조각했다.
사당은 전체적으로 장방형이며, 모두 다섯 구역에 64칸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1만 2,000여 평에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역대로 중수한 횟수만 38차가 넘는다.
현존 건축물들은 청 강희(康熙) 연간에 지진으로 기울어진 다음 다시 중건한 것이다.
중축선 양 옆으로 침전(寢殿) · 계성전(啓聖殿) · 맹모전(孟母殿) · 치엄당(致嚴堂) · 도주사 · 동서무(東西廡) · 제기고(祭器庫) · 성생소 · 강희 및 건륭(乾隆) 어비정(御碑亭) 등이 늘어서 있다.
사당 내 비갈이나 석각만 350기가 넘는다.
그 중 이름난 것으로는 원나라 때 다시 만든 진(秦)나라 이사가 소전체로 쓴 ‘역산각석(嶧山刻石)’을 비롯하여 서진시대 유보(한 순제)의 묘표, 당나라 구양순의 ‘소옥화묘지명(蘇玉華墓志銘)’ 등이며, 이밖에 청나라 때 세운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비석이 있다.
사당 안은 고목이 우거져 하늘을 가릴 정도인데 회나무가 많고 간간히 홰나무 · 은행나무 · 등나무 등이 눈에 띈다.
“지언문 밖에는 홰나무 안에서 나무가 자라나 홰나무를 감싼 기이한 측백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측백나무가 홰나무를 끌어안았다’고 말한다.
수백 년 풍상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짙은 잎사귀가 자라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나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맹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맹부(孟府)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 맹자 후손들의 고택인 맹부는 처음 세워진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동쪽으로 맹묘와 이웃하고 있으며, 맹묘를 북송 선화 3년인 1121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맹부도 그 무렵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맹부의 앞쪽은 관아이고 뒤쪽은 주택이다.
현재 건축은 모두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남북 길이 226미터, 동서 폭 99미터에 전당과 문 그리고 회랑이 모두 116칸이다.
대문은 검은 옻칠을 했고 양 옆에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사자가 웅크리고 있다.
문 안쪽 동서 회랑은 맹부를 지키는 수위와 심부름꾼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두 번째 문을 들어서면 정중앙에 대당(大堂)이 있는데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문무관원을 접대하며 친족과 가족의 법규 따위를 논의하는 곳이다.
당 안에는 조정에서 하사한 각종 패와 깃발이 진열되어 있다.
당 앞 동남쪽에는 해시계가,
서남쪽에는 됫박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 회랑은 맹부를 관리하는 여러 관리들의 사무실이다.
대당 뒤에는 맹자의 후손들이 거처하는 내택(內宅)과 사서루(賜書樓)가 있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맹림(孟林)
맹림은 쩌우청시 동북 사기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맹자의 무덤이다.
‘신건맹자묘기(新建孟子墓記)’라 쓴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북송 경우 4년인 1037년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맹자 무덤이 발견되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선화 연간에 현성(縣城) 남관으로 사당이 옮겨졌다.
원풍 7년인 1084년 조정에서 30만 전을 내려 무덤과 사당을 정비하게 하고 제사를 위한 땅을 사는 한편 측백과 홰나무를 고루 심었다.
청 강희제 때 이르면 제사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한 땅이 약 2만 평으로 늘었다.
맹림 내에는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울창하며 작은 시내가 남북을 관통하고 흐른다.
신도에서 무덤에 이르는 길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돌로 바닥을 깔아 향전(享殿) 대문 앞까지 통하게 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향전은 5칸이고 전 뒤에 맹자의 무덤이 있다.
무덤 서쪽 300미터 지점에 옛 무덤 3기가 있는데, 맹손(孟孫) · 계손(季孫) · 숙손(叔孫)의 무덤으로 본다.
참고자료: 맹자를'
孟子之母, 敎化別分. 맹자의 모친은 교화에 분별이 있었네.
處子擇業, 使從大倫. 자식이 업(業)을 택함에 있어 대륜(大倫)을 따르게 했다네.
子學不近, 斷機示焉. 자식의 학업이 비근(卑近, 알기 쉬움)할 때에 베를 잘라 가르쳤네.
子遂成德, 爲當世冠. 자식이 마침내 덕을 완성하자, 당세에 세상에서 으뜸으로 삼았네.
處子擇業, 使從大倫. 자식이 업(業)을 택함에 있어 대륜(大倫)을 따르게 했다네.
子學不近, 斷機示焉. 자식의 학업이 비근(卑近, 알기 쉬움)할 때에 베를 잘라 가르쳤네.
子遂成德, 爲當世冠. 자식이 마침내 덕을 완성하자, 당세에 세상에서 으뜸으로 삼았네.
沉魄浮魂不可招, 가라앉은 백(魄)과 떠있는 혼(魂)은 불러들일 수 없고,
遺編一讀想風標. 유편(遺編, 맹자) 한번 읽고 그 풍도와 본보기가 그리웠네.
何妨擧事嫌迂闊, 거사(擧事)에 있어 오활(迂闊, 멍청함)함을 싫어함이 무슨 상관이오?
故有斯人慰寂廖. 이 사람 덕분에 무료함을 위안할 수 있네.
遺編一讀想風標. 유편(遺編, 맹자) 한번 읽고 그 풍도와 본보기가 그리웠네.
何妨擧事嫌迂闊, 거사(擧事)에 있어 오활(迂闊, 멍청함)함을 싫어함이 무슨 상관이오?
故有斯人慰寂廖. 이 사람 덕분에 무료함을 위안할 수 있네.
戰國縱橫際, 전국(戰國)이 종횡(縱橫)할 때에
姬周喪亂余. 희씨의 주나라가 난리로 어수선해졌네.
聖經渾掃地, 성인의 경전으로 혼연히 땅을 쓸었고,
爲著七編書. 7편의 책을 저술했다네.
姬周喪亂余. 희씨의 주나라가 난리로 어수선해졌네.
聖經渾掃地, 성인의 경전으로 혼연히 땅을 쓸었고,
爲著七編書. 7편의 책을 저술했다네.
삼천교자(三遷敎子) - 명 유준(劉浚)
孟氏三遷宅已荒, 맹씨 삼천(三遷)의 집은 이미 황폐되고,
至今猶說斷機堂. 지금은 오직 단기당(斷機堂)의 말만 전해지네.
絲成交匹勤方得. 실이 필(匹)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비로소 가능하고,
身入芝蘭久自香. 몸은 지초과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이 오래도록 향기가 나네.
俎豆容儀非賈衒, 사고 팖에 있어 제수를 올리고 용모를 갖추었으니
經綸事業豈尋常. 경륜과 사업이 어찌 보통이겠는가.
母賢子聖誰能似, 어머니는 어질고 자식은 성스러우니 누가 그에 견주리오
故里千秋尙有光. 고향에는 아직까지 천추의 빛이 남아있네.
至今猶說斷機堂. 지금은 오직 단기당(斷機堂)의 말만 전해지네.
絲成交匹勤方得. 실이 필(匹)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비로소 가능하고,
身入芝蘭久自香. 몸은 지초과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이 오래도록 향기가 나네.
俎豆容儀非賈衒, 사고 팖에 있어 제수를 올리고 용모를 갖추었으니
經綸事業豈尋常. 경륜과 사업이 어찌 보통이겠는가.
母賢子聖誰能似, 어머니는 어질고 자식은 성스러우니 누가 그에 견주리오
故里千秋尙有光. 고향에는 아직까지 천추의 빛이 남아있네.
古殿移邾邑, 고전(古殿)은 주읍(邾邑)으로 옮겨지고
高山近孔林. 높은 산은 공림(孔林)에 가깝다네.
遊從齊梁老, 제와 양나라에서 늙을 때까지 유세하면서
功續禹周深. 공적은 우왕과 주공보다 깊었다네.
孝弟先王業, 효제(孝弟)로서 선왕의 유업을 잇고,
耕桑海內心. 농사로써 나라 안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렸다네.
期應過七百, 나라의 주기가 7백년을 넘고 보니
運豈厄當今. 천운은 지금 액운이 되었다네.
辯說千秋奉, 변설(辯說, 아름다운 말)은 오랜 세월 신봉되고
精靈故國歆. 정령은 옛 나라에서 흠향(歆饗)을 받네.
四基岡上柏, 사기산(四基山) 언덕 위에 측백나무
凝望轉森森. 눈여겨보니 삼삼하게 펄럭이네.
高山近孔林. 높은 산은 공림(孔林)에 가깝다네.
遊從齊梁老, 제와 양나라에서 늙을 때까지 유세하면서
功續禹周深. 공적은 우왕과 주공보다 깊었다네.
孝弟先王業, 효제(孝弟)로서 선왕의 유업을 잇고,
耕桑海內心. 농사로써 나라 안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렸다네.
期應過七百, 나라의 주기가 7백년을 넘고 보니
運豈厄當今. 천운은 지금 액운이 되었다네.
辯說千秋奉, 변설(辯說, 아름다운 말)은 오랜 세월 신봉되고
精靈故國歆. 정령은 옛 나라에서 흠향(歆饗)을 받네.
四基岡上柏, 사기산(四基山) 언덕 위에 측백나무
凝望轉森森. 눈여겨보니 삼삼하게 펄럭이네.
戰國春秋, 又異其世. 전국춘추 또 그 세상은 기이하네.
陷溺人心, 豈惟功利.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어찌 공리만 찾았나.
時君爭雄, 處士橫議. 그때에 임금들은 자웅을 다투고, 처사(處士)는 멋대로 지껄였다네.
爲我兼愛, 簧鼓樹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로 생황 불고 북치는(망령된) 기치를 심었네.
魯連高風, 陳仲廉士. 노중련은 고풍을 불렀고, 진중자는 청렴한 선비처럼 행동했다네.
所謂英賢, 不過若是. 이른바 영재와 현인이 이와 같을 따름이었네.
于此有人, 入孝出弟. 이곳에 한 사람이 있어 집에선 효도하고 나가선 어른을 공경했다네.
一發千鈞, 道脈永系. 한 올의 실에 천근의 무게를 매달고, 도맥(道脈)을 오래 이었다네.
能不動心, 知言養氣. 부동심(不動心)에 능하고, 지언과 양기를 설파했네.
治世之略, 堯舜仁義. 치세의 책략과 요순의 인의로
愛君澤民, 惓惓余意.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주고, 내 뜻을 간곡히 하였네.
欲入孔門, 非孟何自? 공문에 들어가려면 맹자가 아니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리.
孟丁其難, 顔丁其易. 맹씨(孟氏)처럼 하기 어렵고, 안씨(顔氏)처럼 하기 쉽네.
語墨故殊, 道無二致. 묵자(墨子)와는 다르다고 하나 두 길이 아니네.
卓哉亞聖, 功在天地. 우뚝하도다! 아성(亞聖), 공은 천지에 있다네.
陷溺人心, 豈惟功利.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어찌 공리만 찾았나.
時君爭雄, 處士橫議. 그때에 임금들은 자웅을 다투고, 처사(處士)는 멋대로 지껄였다네.
爲我兼愛, 簧鼓樹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로 생황 불고 북치는(망령된) 기치를 심었네.
魯連高風, 陳仲廉士. 노중련은 고풍을 불렀고, 진중자는 청렴한 선비처럼 행동했다네.
所謂英賢, 不過若是. 이른바 영재와 현인이 이와 같을 따름이었네.
于此有人, 入孝出弟. 이곳에 한 사람이 있어 집에선 효도하고 나가선 어른을 공경했다네.
一發千鈞, 道脈永系. 한 올의 실에 천근의 무게를 매달고, 도맥(道脈)을 오래 이었다네.
能不動心, 知言養氣. 부동심(不動心)에 능하고, 지언과 양기를 설파했네.
治世之略, 堯舜仁義. 치세의 책략과 요순의 인의로
愛君澤民, 惓惓余意.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주고, 내 뜻을 간곡히 하였네.
欲入孔門, 非孟何自? 공문에 들어가려면 맹자가 아니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리.
孟丁其難, 顔丁其易. 맹씨(孟氏)처럼 하기 어렵고, 안씨(顔氏)처럼 하기 쉽네.
語墨故殊, 道無二致. 묵자(墨子)와는 다르다고 하나 두 길이 아니네.
卓哉亞聖, 功在天地. 우뚝하도다! 아성(亞聖), 공은 천지에 있다네.
夢寐懷鄒邑, 자나 깨나 추읍(鄒邑)을 그리다가
今來亞聖堂. 오늘에야 아성당(亞聖堂)에 왔다네.
斯文天不喪, 하늘도 사문(斯文)을 버리지 않아서
吾道日重光. 우리의 도가 날로 거듭 빛을 발하네.
古木森松檜, 고목 삼나무과 노송나무 사이에
豊碑峙漢唐. 한(漢)과 당나라 비석이 우뚝 서있네.
薪傳應有俟, 섶나무가 불을 전하듯 기다리고 있듯이,
誰復數筍揚? 누가 다시 영명을 드날리나?
今來亞聖堂. 오늘에야 아성당(亞聖堂)에 왔다네.
斯文天不喪, 하늘도 사문(斯文)을 버리지 않아서
吾道日重光. 우리의 도가 날로 거듭 빛을 발하네.
古木森松檜, 고목 삼나무과 노송나무 사이에
豊碑峙漢唐. 한(漢)과 당나라 비석이 우뚝 서있네.
薪傳應有俟, 섶나무가 불을 전하듯 기다리고 있듯이,
誰復數筍揚? 누가 다시 영명을 드날리나?
당시적구(唐詩摘句)
孟母遷鄰罷, 맹자의 어머니는 이웃을 가려 옮겼고,
將軍辭第切. 장군은 처음부터 저택을 사양했네.
將軍辭第切. 장군은 처음부터 저택을 사양했네.
韋生堪繼相, 위생(韋生)은 후손을 이어가길 감내했고,
孟子願依隣. 맹자는 이웃과 의지해 살기 원했네.
孟子願依隣. 맹자는 이웃과 의지해 살기 원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