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 , Iron Age, 鐵器時代.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를 사용했으며, 변한이나 가야 등은 우수한 철기를 만들어 이름을 떨쳤다.
인류가 철을 이용해 도구로 사용하게 된 시기부터 역사시대 이전까지의 시기.
한국 고고학에서 철기시대란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서기전 300년경부터 삼국이 정립된 서기 300년경까지를 말한다.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은 이 시대를 두 시기로 나누어 서기전 300년에서 서기 전후(혹은 서기전 100년)까지를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로, 서기 전후(혹은 서기전 100년)부터 서기 300년까지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구분하고 있다.
반면 일부 연구자는 이를 통합해서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지칭하기도 한다.
한반도에 여러 국가들이 생겨나고 철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게 된 시기이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변한이나 가야 등은 우수한 철기를 만들어 이름을 떨쳤다.
철기 시대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삼국이 정립된 기원후 300년경까지를 말한다.
고고학에서의 시대구분은 19세기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톰센(Thomsen, C. J.)에 의해서 처음 이루어졌다.
그는 1836년에 간행된 덴마크 국립박물관 안내책자에서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도구에 따라 돌, 청동, 철의 순서로 계승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 후, 그의 제자인 월사에(Worsaae)가 층서적인 발굴을 통해 이를 보완하면서 선사시대를 석기시대(StoneAge)·청동기시대(Bronze Age)·철기시대(Iron Age) 등으로 나누는 삼시대법(三時代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삼시대법은 곧 바로 전 세계 고고학계로 파급되었다.
철은 청동기를 잇는 새로운 금속기로 인류가 도시나 국가를 형성한 문명단계에 들어서면서 등장하였다.
청동에 비해 철의 원료는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어서 야철기술(冶鐵技術)만 습득하면 생산이 가능하였다.
인류가 철을 최초로 이용한 예는 서기전 4,000년대에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철제구슬로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철의 제작은 서아시아의 아나토리아(Anatoria) 지방에서 출현한 히타이트(Hittite)제국(서기전 1450∼1200)에서 시작되었다.
히타이트제국이 멸망한 뒤 철은 급속히 사방으로 퍼졌다.
대체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서기전 13세기, 이집트는 서기전 12세기, 이란은 서기전 10세기, 유럽은 이보다 약간 늦은 서기전 9∼8세기경에서야 철이 보급되었다.
서기전 8세기경에는 북방 흑해연안에도 야철기술이 전파되어 이 지방 주민들의 기마유목화(騎馬遊牧化)를 촉진시켜 스키타이(Scythai)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스키타이 유목족에 전파된 철기문화는 동방으로 퍼져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파급되었다.
중국에서 인공철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등장한다.
전국시대 후반에 들어서면 철기의 보급이 현저하게 진전되었으나 출토유물들은 농공구(農工具)가 주류를 이루었다.
전국시대 말에서 전한(前漢) 초에 걸쳐서 철의 생산이 급진전되지만 여전히 주조(鑄造)로 된 농공구가 주이고, 무기는 청동제를 사용하였다.
전한 말에서 후한(後漢)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강(鋼)이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철제 큰칼〔大刀〕와 같은 무기가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으나 대체로 크게 두 단계를 거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첫째 단계는 중국제 철기가 들어온 시기이다.
서기전 4∼3세기에 해당하는 명도전(明刀錢)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서북지방에 걸쳐서 철기류와 함께 출토되었다.
평안남도 덕천군 청송리에서는 명도전이 철제이기(鐵製利器)와 함께 출토되었고,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에서는 연(燕)나라 제품이 분명한 철제 농기구가 일괄 발견된 바 있다.
명도전은 중국연나라의 동으로 만들어진 화폐로서 표면에 ‘명(明)’자가 양주(陽鑄)되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유입된 철기류는 중부지역을 거쳐 서남부지역까지 파급되었는데 충청남도 부여 합송리유적, 당진 소소리유적과 전라북도 익산 신동리유적, 완주 갈동·신풍유적, 장수 남양리유적 등지에서 주조철기가 청동기류와 함께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 시기의 철기는 주조로 된 농기구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세형동검(細形銅劍)을 표지로 한 청동제 무기와 덧띠토기〔粘土帶土器〕등이 사용되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건국 전후에 한반도로 들어온 철기문화의 여파가 남부지역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단계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서기전 108년 한나라 무제(武帝)에 의한 낙랑군(樂浪郡)의 설치는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철기는 우리나라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도끼·가래·낫 등 철제 농경구와 단검·창·꺽창을 비롯한 무기류가 전국적으로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중·남부지역 철기문화는 최소한 두 가지 통로로 유입된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의 통로는 육로를 이용한 것으로 대동강유역으로부터 한강유역을 거쳐 낙동강유역으로 파급되었다.
낙동강유역의 움무덤〔土壙墓〕에서 철기와 함께 중국 전한대에 제작된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 가상부귀경(家常富貴鏡) 등 거울이 발견되고 있으며 특징적인 토기는 와질토기(瓦質土器)이다.
다른 하나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동남부지역으로 파급되었다.
이 지역의 조개더미에서 화천(貨泉), 오수전(五銖錢) 등 중국의 화폐와 점뼈〔卜骨〕가 발견되었고, 특징적인 토기로는 경질민무늬토기와 적갈색연질토기 등이 있다.
두 계열의 문화는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혼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경주 황성동유적에서는 철을 채취하던 제철유적이 발견되어, 이 시대에 철 생산활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을 보면 서기 3세기경 영남 일대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대방(帶方), 왜(倭)와 철을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단 서기 3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기생산의 전국적인 확산은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 이 지역에서 밀려난 위만조선 유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큰 한편 해로를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철기 시대는 구리와 주석 등을 섞어 도구를 만들었던 청동기 시대의 뒤를 이은 시기이다.
처음에는 장신구나 단검 등을 철로 만들었지만, 철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농기구는 물론이고 일상 용품과 무기도 철로 만들었다.
이후 철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금속이 되었다.
석기나 청동기에 비해 단단하고 날카로운 철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자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땅을 일구거나 농작물을 베어 수확하는 등 여러 가지 농사일도 한결 편해졌다.
철제 무기를 먼저 사용한 나라는 군사력도 커져 강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를 사용했다.
고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의 연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고조선은 철제 무기를 사용하던 연과의 전쟁에서 패해 많은 영토를 잃어버렸다.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철제 무기로 무장한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기원전 2세기 말에 고조선은 더욱 강력한 철제 무기를 사용하던 한나라에게 패해 멸망했고, 고조선 땅에는 낙랑군 등의 한군현이 설치되었다.
이후 낙랑군을 통해 중국의 철기 문화가 한반도 곳곳에 빠르게 전해졌다.
남쪽의 삼한에서는 철제 농기구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농작물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상업과 전쟁이 발전하다.
철기 시대에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해 상업이 발전하고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 발전한다. 특히 중국과 교류를 많이 했다.
강력한 철제 무기로 인해 전쟁이 활발해지면서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 국가도 등장한다.
철기의 경제와 주거는 청동기와 거의 같기 때문에 여기서는 도구와 사회 파트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살펴볼게요.
혹시 현대 사회를 선사 시대처럼 도구에 따라 구분하면 어떤 시대라고 부르는지 아시나요? 석기 시대는 아니고, 청동을 주로 사용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간혹 플라스틱이라고 답하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현대 사회는 ‘철기 시대’입니다.
지금을 초기 철기 시대와 구분해서 후기 철기 시대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도 철기는 인간 사회의 주요 도구로 쓰인 거죠! 당연히 큰 변화를 가져온 도구입니다.
철은 청동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지금도 쓰일 정도로 단단하고 많이 생산되었어요.
일반인들에게 무기와 농기구로 보급되면서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가져오죠.
강력한 철제 무기로 인해 전쟁도 활발해지면서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 국가도 등장하게 되었다.
뭔가 딱딱 맞아 떨어지죠? 역사는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라 우리 머리로 이해 못할 게 없습니다. 자신감을 가지자
변한에서는 우수한 철이 생산되어 주변 지역은 물론이고 낙랑군과 대방군, 왜로 수출되었고,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변한의 뒤를 이은 가야도 우수한 철기를 만들어 수출했다.
철기의 경제와 주거는 청동기와 거의 같기 때문에 여기서는 도구와 사회 파트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살펴볼게요.
혹시 현대 사회를 선사 시대처럼 도구에 따라 구분하면 어떤 시대라고 부르는지 아시나요? 석기 시대는 아니고, 청동을 주로 사용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간혹 플라스틱이라고 답하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현대 사회는 ‘철기 시대’입니다.
지금을 초기 철기 시대와 구분해서 후기 철기 시대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도 철기는 인간 사회의 주요 도구로 쓰인 거죠! 당연히 큰 변화를 가져온 도구입니다.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은 북부·중부·남부지역 등 각 지역별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먼저 북부지역에서 가장 이른 철기시대 유적은 평안북도 위원 용연동유적, 영변 세죽리유적 등이다.
용연동유적에서는 연나라 제품이 분명한 쇠도끼〔鐵斧〕·쇠화살촉(鐵鏃)·쇠꺾창〔鐵戈〕등과 함께 쇠낫〔鐵鎌〕·반달쇠칼〔半月形鐵刀〕·쇠가래〔鐵鍬〕·쇠호미〔鐵鋤〕등의 농기구가 일괄 발견된 바 있다.
세죽리유적의 철기시대 층에서 확인된 집자리는 모두 지상가옥이다.
집자리에서 명도전, 포전(布錢) 등의 화폐와 삿무늬토기〔繩蓆文土器〕및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세죽리유적이 존재했던 시기의 무덤으로는 움무덤, 조개더미, 독무덤〔甕棺墓〕등이 주를 이루며, 유물로는 철기, 청동기와 더불어 회색의 삿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철기로는 호미, 괭이, 삽, 낫, 반달쇠칼, 도끼, 자귀 등이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시기의 문화유형을 소위 “세죽리-연화보유형”이라 명명하고 있다.
동북부지역인 함경북도 회령 오동유적에서는 제6호 집터에서 주조 쇠도끼가 출토된 바 있다.
무산 호곡동유적에서 5기와 6기에 속하는 집터가 철기시대에 속하며 다수의 철기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5기에 속하는 집터에서 출토된 주조 쇠도끼는 연나라의 철기와 관련된다고 보고 있다.
대동강유역에서 철기시대의 무덤은 널무덤〔土壙木棺墓〕, 덧널무덤〔土壙木槨墓〕, 귀틀무덤〔木室墳〕으로 구분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널무덤의 연대를 서기전 5세기에서 2세기 중엽으로, 덧널무덤을 서기전 2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
강서 태성리유적의 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과 동투겁창〔銅矛〕등의 청동기류, 쇠도끼, 철단검 등의 철기류, 화분토기〔花盆形土器〕, 배부른 단지 등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철기시대 초기의 유적으로는 서흥 천곡리 돌널무덤〔石棺墓〕, 황해도 송산 솔뫼골 돌돌림무덤〔圍石墓〕, 함흥시 이화동 움무덤 등이 있다.
대동강유역의 철기문화는 세형동검이 만들어지고, 움무덤이 유입된 서기전 3∼2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서기전 1세기 이후에는 귀틀무덤과 벽돌무덤〔塼築墳〕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낙랑군 계통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집터 유적으로는 가평 마장리, 이곡리유적과 춘천 중도유적을 들 수 있고, 이후 조사된 것으로는 하남 미사동유적, 수원 서둔동유적, 횡성 둔내유적, 양양 가평리유적, 명주 안인리유적, 중원 지동·하천리유적 등이 있다.
이 유적들에서는 중부지역 특징적인 여(呂)자형 집터와 철(凸)자형 집터가 발견되었고, 유물로는 경질민무늬토기, 두드림무늬토기〔打捺文土器〕, 회색토기 등의 토기류와 다수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화성 기안리유적에서는 대규모 철기 생산시설이 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단야로(鍛冶爐)와 더불어 숯가마, 송풍관, 송풍구, 쇠찌꺼기〔鐵滓〕,쇠조각〔鐵片〕등이 조사되었다.
중부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낙랑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낙랑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음 알 수 있다.
중부지역 철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는 움무덤, 독무덤, 돌무지무덤〔積石墓〕등이 있다.
움무덤은 가락동유적의 제1호 무덤에서 처음 알려졌다.
천안 청당동유적에서는 다수의 도랑〔周溝〕이 있는 움무덤, 즉 도랑움무덤〔周溝土壙墓〕이 조사되었다.
유물은 연질짧은목항아리〔軟質短頸壺〕와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청동제 말모양띠고리〔馬形帶鉤〕11점과 다량의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도랑움무덤이 조사되었다.
독무덤은 가락동 제2호분과 같이 움무덤과 합장(合葬)으로 발견되거나, 단독묘일 경우에도 돌무지무덤과 같은 다른 묘제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무지무덤은 양평 문호리유적, 춘천 중도유적, 제원 양평리·도화리유적 등 한강 상·중류에서 서기 2∼3세기경에 해당되는 무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발견되었다.
4세기 이후에는 백제식 토기의 등장과 함께 기단식 돌무지무덤 등의 고분이 등장하였다.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Ⅰ기는 세형동검이 사용되면서 일부 주조철기류가 나타나는 단계로 서기전 3∼2세기경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전라북도 익산과 완주지역에서 다수의 널무덤들이 확인되었다.
Ⅱ기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단계로 서기전 1세기 초반에서 서기 2세기 전반까지로 비정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광주 신창동유적,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 사천 늑도 조개더미, 김해 봉황대 조개더미 등이 있고, 창원 다호리유적, 경주 조양동유적 등지에서 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집터의 형태는 서남부지역에서 네모모양, 동남부지역에서 원형 혹은 타원형을 띠고 있다.
출토된 철기로는 쇠낫, 쇠도끼 등 농공구와 쇠창·쇠화살촉·철검 등의 무기류가 있다.
조개더미에서 주로 보이는 경질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지만 경도가 높아지고 기형이 다양한 토기를 말한다.
동남부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와질토기는 소성도(燒成度)가 낮아서 흡수성이 있고 기와와 비슷한 회백색 혹은 회색을 띠는 연질의 토기인데, 물레로 빚었기 때문에 토기의 벽이 얇고 표면이 고르며 기종도 다양하다.
Ⅲ기는 철기문화가 발달하는 단계로 서기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후반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집터는 대부분 네모모양 혹은 타원형 구덩식〔竪穴式〕집터이다.
무덤은 서남부지역에서 다수의 도랑움무덤이 확인되었고, 동남부지역에서 김해 양동리유적, 울산 하대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덧널무덤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덧널무덤에서는 장검,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쇠화살촉 등 철제무기류의 부장이 증가하였다.
서남부지역에서는 연질의 두드림무늬토기가 등장하고, 동남부지역에서는 와질토기가 지속된다.
두드림무늬토기는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워낸 민무늬토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일부는 물레로 성형해 등요(登窯)에서 구워낸 것인데, 기벽을 강화하기 위해 박자(拍子)로 기벽을 때린 두드림무늬가 있는 토기를 말한다.
서기 3세기 말 이후에는 서남부지역인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대형 독무덤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등장한다.
동남부지역의 경주와 김해를 중심으로 고식도질토기, 북방계 말갖춤〔馬具〕과 무기류가 출현한다.
이와 더불어 입지의 우월성, 독립부장곽(獨立副葬槨)의 존재, 무기의 개인집중화, 순장(殉葬)의 조건을 갖춘 고분, 즉 덧널무덤에 이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등이 출현하게 된다.
철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최근 유적 발굴조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하여 많은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철기시대 초기(초기철기시대)의 양상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고, 고대국가가 형성된 시기의 양상도 드러나고 있다.
철기시대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북부지역에서는 후기 고조선과 위만조선에 뒤이어 부여, 고구려, 낙랑, 옥저(沃沮), 예(濊) 등이 등장하였던 시기이고, 중·남부지역에서는 삼한에 이어 백제, 신라 및 가야 등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철기문화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유입되었고,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파되었지만, 토착적인 청동기문화와 융합되어 새롭게 생성, 발전되어 나갔던 역사적 특수성이 있다.
이 시기의 시대구분 용어에 대한 논란이 많다.
우선 철기시대의 문제점으로는 역사성의 부재를 들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경우, 초기철기시대(서기전 300∼100년)를 하나의 시대로 설정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고, 원삼국시대도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삼한시대의 경우, 역시 한반도 남부지역에 한정되는 용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하여 앞으로 이 시기의 시대구분 용어를 통합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철기도 석기나 청동기처럼 세계 곳곳으로 퍼져갔다.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기원전 3000~2000년 서아시아 지방에서였다.
기원전 1400년경에는 히타이트 족이 철을 독차지한 뒤 이 지역을 정복했고, 기원전 1200년경에 히타이트가 멸망하자 철기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철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기원전 4세기에는 한반도에까지 전해졌다.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았던 변한과 가야는 이름난 철기 생산국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은 품질이 매우 우수했다.
게다가 변한과 가야 사람들이 철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주변 나라에 수출까지 할 수 있었다.
철제 무기와 농기구 | 철기 시대 초기에는 장신구나 단검 등을 철로 만들었지만, 철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농기구는 물론이고 일상 용품과 무기도 철로 만들었다.
이후 철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금속이 되었다.
석기나 청동기에 비해 단단하고 날카로운 철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자,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인물
주몽 | 부여로부터 독립해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운 임금이다.
그는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쏘는 것마다 백발백중이었다.
그리하여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으로 주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온조 |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백제를 세운 임금이다.
형인 비류와 함께 자신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 부근)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는 위례성(지금의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했다.
비류가 죽은 뒤 미추홀의 백성들과 신하들을 통합했으며 나라 이름도 백제로 바꿨다.
박혁거세 | 신라를 세운 임금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한 땅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왕을 모시기 위해 높은 곳에 올랐다가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발견한 자줏빛 알에서 태어났다.
박과 같이 생긴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박’이라고 했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라고 했다.
널무덤과 독무덤.
철기 시대에 이르면 청동기 시대의 거대한 고인돌 같은 것은 더 이상 만들지 않았어요.
대신 흙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안에 나무로 된 널을 댄 다음 그 안에 시신을 묻는 널무덤이나 항아리를 관으로 이용한 독무덤이 새롭게 나타났다.
시신을 넣는 널무덤
널무덤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넓적한 나무널로 사각형 벽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넣는 방법이에요.
그 위에는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을 것이라 추측된답니다.
널무덤은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지다가 남부 지역으로 퍼져 나갔는데, 특히 낙동강 유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어요.
널무덤에서는 검, 거울, 옥 등 다양한 껴묻거리도 발견되었어요.
토기를 붙여서 만든 독무덤
독무덤은 큰 항아리 속에 시체를 넣어 만든 무덤이에요. 토기 하나를 사용해 묻기도 하고, 두 개를 붙여서 사용하기도 해요.
발견된 독무덤에서는 껴묻거리로 화살촉, 도끼 등이 발견되기도 한답니다.
영산강에서 발견된 대형 독무덤
독무덤은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어요.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독무덤은 다른 지방의 것들과는 달리 독자성이 뚜렷하고 매우 뛰어난 토기 제작 기술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대형 독무덤이랍니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나주 신촌리 고분군 전경.
초기 국가의 성립
1. 청동기 시대를 지나 철기 시대로!
2. 철제 농기구가 등장하면서 농사가 급격히 발전하다
3. 유물로 살펴보는 철기 시대
4. 철기 시대, 크고 작은 국가가 생겨나다
5. 철기 시대의 널무덤과 독무덤
6. 금와왕 신화가 전해 오는 부여
7. 부여의 문화, 윷을 통해 전해지다
8. 부여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9. 강요된 죽음, 부여의 순장
10. 부여의 뿌리를 가진 고구려
11. 고구려 사람들의 이모저모
12. 고구려 데릴사위 박신랑 씨의 하루
13.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옥저
14. 옥저의 색시가 전해 주는 민며느리제
15.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은 동예
16. 씨족 사회의 전통을 계승한 동예의 풍습, 족외혼
17.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들과 삼한
18. 삼한, 정치와 제사가 분리된 사회
19. 활발한 농업 활동을 한 삼한
20. 신성한 땅, 삼한의 소도 탐방
21. 시대 연표 및 관계 분석 - 초기 국가의 성립
초기 국가의 성립
1. 청동기 시대를 지나 철기 시대로!
2. 철제 농기구가 등장하면서 농사가 급격히 발전하다
3. 유물로 살펴보는 철기 시대
4. 철기 시대, 크고 작은 국가가 생겨나다
5. 철기 시대의 널무덤과 독무덤
6. 금와왕 신화가 전해 오는 부여
7. 부여의 문화, 윷을 통해 전해지다
8. 부여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9. 강요된 죽음, 부여의 순장
10. 부여의 뿌리를 가진 고구려
11. 고구려 사람들의 이모저모
12. 고구려 데릴사위 박신랑 씨의 하루
13.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옥저
14. 옥저의 색시가 전해 주는 민며느리제
15.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은 동예
16. 씨족 사회의 전통을 계승한 동예의 풍습, 족외혼
17.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들과 삼한
18. 삼한, 정치와 제사가 분리된 사회
19. 활발한 농업 활동을 한 삼한
20. 신성한 땅, 삼한의 소도 탐방
21. 시대 연표 및 관계 분석 - 초기 국가의 성립
기원전 300~200년 - 부여 건국
부여 | 기원전 3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만주 지방에 있었던 나라이다.
부여 | 기원전 3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만주 지방에 있었던 나라이다.
농업과 목축이 발달해 부유했지만, 4세기 이후에는 점차 세력이 약해져 고구려에게 멸망당했다.
부여는 5부족 연맹체 국가였다.
나라의 중앙은 왕이 다스리고 나머지는 가축 이름에서 유래된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부족장들이 다스렸다.
기원전 194년 - 위만이 위만 조선 건국
위만 조선 | 기원전 194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마지막 나라이다.
위만 조선 | 기원전 194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마지막 나라이다.
위만이 당시 임금이었던 준왕을 몰아내고 세웠으며, 기원전 108년 우거왕 때 한나라의 무제에게 멸망당했다.
기원전 200~100년 - 동예 · 옥저 건국
동예 | 동예는 위만 조선이 있었던 시기부터 강원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작은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동예 | 동예는 위만 조선이 있었던 시기부터 강원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작은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245년부터는 한군현 중의 하나인 낙랑의 지배를 받았고, 313년부터는 낙랑을 정복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해마다 음력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지냈고, 말과 풍습은 고구려와 비슷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41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에 의해 멸망당했다.
옥저 | 기원전 2세기부터 56년까지 함경도의 동해안 지방에 있었던 작은 나라이다.
부여 세력 가운데 일부가 갈라져 나와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옥저 사람들은 바닷가 근처의 기름진 평야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해산물을 잡으면서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다.
풍속이나 문화는 고구려와 비슷했으며, 크고 강한 나라로 성장하지는 못한 채 고구려에게 정복당했다.
기원전 108년 - 위만 조선 멸망. 한군현 설치
한군현 |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린 뒤 고조선 땅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한에서 임둔, 현도, 진번, 낙랑 등 네 개의 군에 관리를 파견해 다스렸다.
고조선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혀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은 금세 사라졌다.
낙랑군은 고구려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한나라와의 교역을 관리하는 무역 기지 역할을 했다.
기원전 57년 - 박혁거세가 신라 건국
기원전 37년 - 주몽이 고구려 건국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연맹 국가 ‘삼한’ | 마한, 진한, 변한을 묶어 부르는 말이다.
이들은 다시 여러 개의 작은 부족 국가들로 이루어졌다.
이 국가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생겨났지만 강하고 체계적인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마한은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있던 54개의 작은 부족 국가들을 뜻한다.
온조의 세력이 한강 유역에 백제를 세운 뒤 흡수되었다.
진한은 지금의 대구와 경주 근처에 있던 12개의 작은 부족 국가들을 뜻한다.
진한에서 가장 강했던 사로국이 이웃 국가들을 통합한 뒤 신라로 발전했다.
변한은 지금의 김해, 마산 근처에 있던 작은 부족 국가들이었다.
변한은 질 좋은 철을 생산해 수출하면서 부강해졌고, 이후 가야로 발전했다.
3년 - 고구려 국내성으로 도읍 옮김
56년 - 고구려가 동옥저 통합
194년 - 고구려 진대법 실시
204년 - 신라가 6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사현성 공격
260년 - 백제, 16관등과 공복 제도 만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