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7일 화요일

영남루. 1

영남루. 1
한식() 가옥의 지붕 구조의 하나로, 합각()지붕·팔작집이라고도 한다. 

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고 처마끝은 우진각지붕과 같다. 

맞배지붕과 함께 한식 가옥에 가장 많이 쓰는 지붕의 형태이다.



팔작지붕 본문 이미지 1
[한국의 고유지붕]
[네이버 지식백과] 팔작지붕 [八作─] (두산백과)

최고의 누각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로 칭송받는 영남루는 강물 위 높은 절벽으로 자리하여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영남루는 그동안 문화재·학술적 가치 조사·평가에서 현존하는 대표적인 관영 누각으로 고려말 중창한 뒤 역사가 650년 이상된 명확한 건축기록을 가진 건축으로 인정받고 있다. 
건물 구성·배면·형태면에서도 창의적이고 독특한 특징이 있어 가치가 높은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밀양 영남루, 密陽 嶺南樓.

  • 밀양 영남루, 密 樓.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內一洞) 밀양강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건축.


    객사의 부속건물로 쓰였던 영남루 왼쪽이 능파당, 사진에 나오지는 않지만 오른쪽 계단 아래가 침류각이다. 


    세 개의 건물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훌륭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

    요약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內一洞) 밀양강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건축.
    지정종목보물
    지정번호보물 제147호
    지정일1963년 01월 21일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3940 지도
    시대고려 말 창건, 조선 초 재건
    종류/분류누(정)각
    크기정면 5칸, 측면 4칸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로 칭송받는 영남루(嶺南樓)는 강물 위 높은 절벽에 자리잡아 멋진 풍경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2018년 8월 3일 금요일

해방 과 건국 운동

해방  과 건국 운동

그날이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광복절 노래>



1945년 8월 15일 오전, 서울 시내 곳곳에 일본 천황의 중대 발표를 예고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이날 정오, 라디오에서 "짐은 제국 정부에게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였다."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선언이었다. 
그것은 온 민족이 꿈에도 그리던 한국의 해방을 뜻하였다. 
그날 아침 조선 총독부의 정무 총감 엔도는 미리 여운형에게 일본의 패전 사실을 알리고, 일본인이 안전하게 제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각 석방, 서울의 3개월 치 식량 확보, 치안 유지와 건국 사업에 대한 일본의 간섭 금지 등을 약속받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8월 16일 아침, 감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거리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환영하고, 해방을 기념하는 인파로 넘쳐 났다.

해방과 건국 준비해방의 기쁨은 건국 준비를 위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8월 16일 건준은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였다. 여운형은 엔도와 벌인 협상 과정을 보고하면서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을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자."고 외쳤다.

건국 운동을 전개하다

해방을 맞이한 날 저녁, 신간회 활동을 같이하였던 여운형과 안재홍 등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를 구성하고 활동에 나섰다. 
건준 지역 지부도 잇달아 결성되어 8월 말까지 145개 지부가 생겨났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선언문

건준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띤 인사들이 참여하여, 민족의 뜻을 대변할 민주적인 정부 수립을 준비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더 활발하였다. 
이들은 건준에 참여 1928년에 강제로 해체된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 공산당은 전면적인 토지 개혁은 물론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인사들이 두루 참가하는 인민 정권을 세우자고 나섰다.

건준과 조선 공산당은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끼리 정부를 만들어 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1945년 9월 6일, 건준은 인민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음을 선포하고, 각 지부를 인민 위원회로 전환하여 지방 정부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송진우와 김성수 등은 건준에 참여하지 않고, 별도로 한국 민주당(한민당)을 결성하였다. 

한민당에는 일제하의 지주와 기업인 들이 많았으며, 친일파도 상당수 있었다. 

한민당은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일제와 민족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자는 등의 방침을 내건 조선 인민 공화국의 타도를 주장하였다.



38도선해방 당시 분단을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38도선으로 1,300년 동안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던 공간이 인위적으로 분할되고 말았다.
사진 속의 군인이 38도선을 표시한 이 마을 길은 그로부터 얼마 뒤 아예 오갈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 38도선

건국 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한국을 나누어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8일에 미국의 요청으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의 나진, 청진 등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남하를 계속하였다. 

아직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은 미국은 예상보다 빠른 소련군의 남하에 놀라, 소련에 38도선을 경계로 한국을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 정책은 많이 달랐다. 

미국은 조선 인민 공화국이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부정하거나 무시한 채, 오직 미 군정만이 합법적인 통치 기관이라며 38도선 이남에 미 군정에 의한 직접 통치를 실시하였다.

38도선 이북의 소련은 건준의 하부 기관 인민 위원회의 활동을 대체로 인정하였으며, 한국인 대표자와 협의하여 정책을 추진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군정이든 간접 통치든, 미국과 소련 모두 한국인의 의사보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한 점은 동일하였다. 

미·소의 분할 점령은 국가 건설 방향을 둘러싼 한국인 사이의 분열을 확대시켰고, 분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성조기가 걸린 조선 총독부

성조기가 걸린 조선 총독부8월 25일 평양에 들어온 소련은 일본으로 하여금 건준을 개편한 인민 정치 위원회에 행정권을 넘겨주도록 하였다. 
미군은 9월9일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이날 일본 국기를 대신하여 미국 국기가 조선 총독부 건물에 게양되었다. 
소련과 미국 모두 한국에서 좌파가 우세하다고 판단하였는데, 그런 판단은 한국에 대한 두 나라의 점령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민족 운동 지도자
해외에서 활동하였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이 하나 둘 귀국함에 따라 완전 독립을 향한 희망이 불타올랐다.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소련이 점령한 이북으로 귀국해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화북 지방에서 조선 의용군을 이끌었던 김두봉과 무정이 대표적이다.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은 이북 사회주의 진영의 최고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군이 점령한 38도선 이남으로 귀국하였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미 군정은 여운형, 박헌영을 견제해 주길 바라며 이들의 활동을 도왔다. 

이승만은 한민당과의 협력을 모색하였고, 김구는 임시 정부 조직과 한국 독립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까지 해외 독립 운동 세력들이 대부분 귀국함에 따라,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더욱 활발해졌다.


국가 건설 방향 논쟁

해방 직후 사회(공산)주의 활동을 한 이들을 좌파라 하고, 반공을 내세우며 자본주의 질서를 강조한 이들을 우파라 한다. 
좌·우 어느 쪽에 속해 있더라도 좌·우파 간의 협력을 중시한 여운형 등을 중도파라 한다. 

사진의 왼쪽에 가까운 인물일수록 전면적인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강조하고, 친일 청산에 적극적이었다. 
한민당과 이승만은 친일 청산과 토지 개혁에는 소극적이었고, 김구는 친일 청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토지 개혁 문제에 대해서는 좌파와 생각이 많이 달랐다.


북쪽 
소련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이 좌파의 중심이었다면, 물산 장려 운동을 이끌었던 조만식이 우파, 국어 학자이자 조선 독립 동맹 활동을 한 김두봉이 좌파와 우파의 가운데쯤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좌파가 많았으며 중도파는 약했다.

김일성

김두봉

조만식
해방과 건국 운동 본문 이미지 1

남쪽 
조선 공산당을 이끈 박헌영이 좌파의 중심이었다면, 송진우 등 한민당 계열이 가장 심한 우파였다. 
이승만도 분명한 반공주의자였다. 
여운형은 좌파이면서도 민족적 단결을 강조한 점에서 중도파였으며, 김구는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였으나 사회주의를 반대한 우파였다.

박헌영
박헌영
여운형
여운형
김구
김구
이승만
이승만
송진우
송진우
선구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구성해 본 내각
선구회라는 단체가 1945년 10월 10일에서 11월 9일까지 150여 단체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나타낸 표이다. 
왼쪽이 1위, 오른쪽이 2위 득표자이다.
해방과 건국 운동 본문 이미지 2


해방, 새 세상에 대한 꿈이 부풀다

해방은 일제의 억압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새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국내외 여러 정치 세력들은 정당을 결성하여 민주적인 국가 건설을 도모하였으며,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저마다 단체를 결성하여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농민들은 군 단위 농민회를 조직하고,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전농)을 중심으로 단결하였다. 

전농은 일본인과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작료를 수확의 30%로 줄일 것(3·7제)을 주장하였다. 

노동자들은 공장 위원회를 조직하여 일본인이 떠난 공장이나 기업을 관리하면서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전평)를 중심으로 단결하였다. 

전평은 8시간 노동제와 노동자의 단체 협약권 확립 등을 주장하였다.

여성들은 다양한 여성 단체를 조직하여 공·사창제 폐지, 남녀 임금 차별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학자들은 조선 학술원을 조직하고, 문화 예술인들은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 같은 연합 조직을 결성하여 식민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교육자들은 한글로 된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 민족 교육을 실천하였으며, 조선 교육자 협회 같은 자주적 교육자 단체를 조직하였다. 

수많은 사회 단체가 등장하면서 좌파와 우파 간 갈등도 생겨났으나, 여전히 사회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설렘과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제가 물러났으니 우리 독립."

회사는 일본 놈들의 전파 탐지기 성능을 높여 주는 화학 약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와 보니 사람들은 그대로 있는데 퇴직금을 지불하더라고유. …….

일본 사람들은 아직 한국에서 계속 머무를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때였어요. 

'평화 산업'으로 전환하자고 우리와 얘기가 됐다. 
우리는 일본에서 제올라이트라는 치약 원료를 들여와 치약을 만들어 팔았다.

그때 공장 노동자들이 '자주 관리 운동'이라는 걸 조직해 일본인이 시설물을 못 가져가게 하고, 한국인들에 의한 도난 사태도 막았어요. 
그러다가 8월 20일, 일본인들이 철수 결정을 내리면서 치약 제조도 실패로 끝났어요. 
가져온 원료량도 적은 데다 그 뒤로 더 좋은 치약이 나왔기 때문이에요

어쨌든 하루 아침에 세상이 뒤집혔는데도, 공장이 노동자들에 의해 신속히 관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별다른 준비가 있어서라기보다 저절로 생겨난 주인 의식 때문이었어요. 

영등포 일대의 조선 피혁이라든가 인천의 동일 방직, 부산의 조선 방직과 같은 일본계 큰 회사들을 모두 한국인 노동자들이 접수해 자주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이유야 뭐, 노동자들이 자기가 다니는 공장밖에 갈 데가 더 있었겠는가?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서 8월 말 9월 초순쯤 '전국 노동 조합 평의회(전평)' 결성과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 이일재의 증언, 《8·15의 기억》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논의를 했고. 

그 결과 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네 나라가 한국을 신탁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신탁 통치란?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강대국이 일정 기간 대신 통치해 주는 것’을 말한다. 

광복이 되었기 때문에 자주적 독립 정부 수립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결정을 민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구.

민족 지도자들은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탁 운동을 전개했다. 

반탁 운동 초기에는 공산주의자들도 반탁에 참여하여 전 국민이 거족적으로 반탁 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지시에 따라 신탁 통치안을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버렸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서로 대립이 발생했겠지. 

반탁 운동을 추진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찬탁운동을 전개하는 공산주의자들 간의 좌우 대립이 치열해지면서 국내 정치 상황은 한층 더 혼란해졌다.


8·15 광복의 과정

우리 민족의 독립과 건국을 위한 노력

* 우리 민족은 나라 안팎에서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 
한국 광복 군을 훈련시켜 국내로 진입하려 는 계획을 진행하였습니다.

* 건국 동맹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의 일부 민족 지도자들 이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조직하였습니다.
* 제2차 세계 대전중 연합국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노력을 인정하여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돕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

* 1945년 8월 초, 미국은 일본 땅에 두 발의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고,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나카사키 원폭 투하
나카사키 원폭 투하

8·15 광복

일본이 항복하자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8·15 광복 이후 민족 지도자들이 한 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조직

1945년 8월 15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결성
일제의 항복이 가까워지자, 조선 총독부는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철수시키고자 하였어요. 
조선 총독부는 당시 민중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여운형과 협상하고자 했어요. 
우리나라에선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지도자들이 건국 동맹을 조직하여 건국 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여운형은 조선 총독부가 협상을 요청하자, 

일본이 “독립 투사들을 전원 석방하고, 조선의 건국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협상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여운형은 곧바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답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에서는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논의하였습니다.


1945년 8월 16일, 건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다.
"조선 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우리 민족 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 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이고 살기 좋은 나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모두 단결로 나아가자."
여운형
여운형
1945년 9월 2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강령을 발표하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 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려 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을 확보하려 함.
- 매일신보, 1945년 9월 -


민족 지도자들의 귀국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도자들과 이승만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이 귀국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카이로, 얄타 회담

카이로 회담

* 1943년, 미국·영국·중국의 대표자가 모여 열린 회담
* 일본에 대한 공격과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음.
카이로 회담에 모인 중국, 미국, 영국의 대표자들
카이로 회담에 모인 중국, 미국, 영국의 대표자들(왼쪽부터)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얄타 회담

* 1945년 2월, 미국·영국·소련의 대표자가 모여 열린 회담
*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이 참여할 것을 약속하였고,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가 처음 이야기되었음.
얄타회담에 모인 영국, 미국, 소련 지도자들
얄타회담에 모인 영국, 미국, 소련 지도자들(왼쪽부터)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분단의 과정

*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주둔 :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 쪽에는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주둔이 우리 민족에게 미친 영향 : 
분단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주둔 과정

* 미국과 소련은 일본이 전쟁에 져서 항복하기 전부터 한반도를 자기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한반도 북쪽에서부터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면서 아래로 내려왔고, 미국은 한반도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여 한반도 남쪽에 들어왔습니다.
38도선
38도선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담당하였으나 이는 분단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
광복이 되자 우리나라에 있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이유로 북위 38도선의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였습니다. 
실제로는 당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으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38선은 처음부터 분단선이었나?
처음에는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미국과 소련이 군대를 주둔하였을 때는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를 세울 계획이 없었습니다. 
먼저 신탁통치를 한 후에 독립 국가를 수립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부 수립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분분하였으며, 소련과 미국의 의견 차이가 커지면서 처음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길을 중심으로 초소를 세워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기 시작하다가 이후 철조망을 세워 통제 하였습니다. 
단순한 경계선이었던 38도선은 점차 남북간의 교류를 막는 장벽으로 변한 것입니다.


8·15 광복 후 달라진 생활 

광복 이후 사람들의 모습

* 일제의 탄압을 피해 다른 나라에 가서 살거나 일제에 강제로 끌려갔던 사람들 중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더 이상 일본인들의 횡포를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 학교에서는 우리말과 한글, 우리의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라는 이름이 쓰인 시기

등학교라는 이름이 쓰이기까지의 과정 : 소학교(갑오개혁) → 보통학교 → 소학교 → 국민학교(일제 강점기, 1941년) → 초등학교(1996년)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이유
- 국민학교라는 말은 일본에 충성하는 국민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 8·15 광복 이후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대로 사용하다가 많은 논의 끝에 1996년에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전평의 행동 강령전농의 행동 강령부녀 총동맹 행동 강령
· 최저 임금제 확립
· 8시간 노동제 실시
· 7일 1휴가, 연 1개월간의 유급 휴가제 실시
· 여성 노동자의 산전 산후 2개월 유급 휴가제 실시
·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 협약권 확립
· 해고와 실업 절대 반대
· 일제와 민족 반역자 기업을 공장 위원회가 관리
· 일제와 민족 반역자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
· 소작료는 수확의 30%로 하는 3·7제 실시
· 각종 세금과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
· 마름이나 관리인의 중간 착취 금지
· 금융 조합 등을 개편하여 농민이 공동 관리
· 고리대를 없애고 이자를 연 5% 이하로 인하
· 반농노 같은 머슴의 대우를 개선
· 남녀 평등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확보
· 8시간 노동제, 남녀 차별 임금 폐지
· 산전 산후 1개월의 유급 휴가제 실시
· 산원, 탁아소, 공동 식당과 아동 공원 완비
· 공·사창제 철폐, 인신 매매 금지 모자 보호법 제정
· 여성의 경제적 평등권과 자주성 확립

건국 준비 위원회 선전물(1945. 8. 16.)우리들 장래에 광명이 있을 것이니 지도층의 뜻을 잘 따라 달라는 내용이다.

다시 간행된 잡지해방 속간 제1호라 쓰여 있는 잡지 《별나라》표지 사진이다. 
1940년 무렵, 대다수 한글 잡지와 신문이 페간되었다.



해방 이후 첫 등교해방 이후 첫 등교를 보도한 신문이다. 
"씩씩하게 글 배우자"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국어와 국사 교육일본어와 일본 역사 교육 대신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교과서로 쓰기 위해 급히 만들어진 교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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