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루. 1
한식(韓式) 가옥의 지붕 구조의 하나로, 합각(合閣)지붕·팔작집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팔작지붕 [八作─] (두산백과)
최고의 누각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로 칭송받는 영남루는 강물 위 높은 절벽으로 자리하여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영남루는 그동안 문화재·학술적 가치 조사·평가에서 현존하는 대표적인 관영 누각으로 고려말 중창한 뒤 역사가 650년 이상된 명확한 건축기록을 가진 건축으로 인정받고 있다.
건물 구성·배면·형태면에서도 창의적이고 독특한 특징이 있어 가치가 높은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밀양의 누정(樓亭)Ⅰ-영남루-(附)밀성대군지단,천진궁,아랑사
密陽 嶺南樓-(附)密城大君之壇,天眞宮,阿娘祠
1. 밀양 영남루(嶺南樓) - 조선시대 영남 도호부 객사
…굽이굽이 사연 간짓한 밀양강 바라보며 '아리랑 恨' 달래네
▲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로 칭송받는 영남루(嶺南樓)는 강물 위 높은 절벽에 자리잡아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입구에서 낮익은 얼굴을 만난다. ‘애수의 소야곡’ 의 작곡가 고 박시춘이다. 밀양시가 영남루 입구 왼쪽 언덕에 박시춘의 생가를 복원하면서 그의 동상도 조성해두었던 것이다. 박시춘의 생가를 복원한 뒤 박시춘을 밀양의 자랑이라고 홍보하던 밀양시가 한때 곤욕을 치렀다.
일제시대때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시민의 혈세를 들여 친일 인사의 생가를 복원하는 일이 맞느냐는 시비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영남루 입구에도 재밌는 물건이 하나 있다. ‘밀양아리랑’ 노래비다. 비석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니 비석 뒤 스피커에서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밀양아리랑이 우렁차게 흘러나온다. 버튼을 직접 눌렀는데도 깜짝 놀랐다. 자기 발자국 소리에 놀란 고양이 형국이라고나 할까.
영남루가 있는 너른 마당으로 들어서면 왼쪽 건물은 영남루, 오른 건물이 천진궁이다. 천진궁에는 단군 신위를 비롯해 부여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 등의 시조, 고려 태조 및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사의 물줄기가 한 굽이굽이 꺾어돌 때 마다 역사의 새 장을 펼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이다.
침류각은 객사로 쓰였던 곳으로 일제시대 구들장으로 개조했다가,
다시 마루로 원상회복 했다고 한다.
1542 중종37년에 부사 박세후가 다시 중건하였다.
1582년 선조15년에 병화(兵火)로 대루와 부속당우가 불타버렸는데, 1637년 인조15년에 부사 심흥이 재건한 것을 부사 이지온이 단청을 하였으나, 1842년 헌종8년에 실화로 소실한 것을, 2년 뒤인 1844년에 부사 이인재가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것이다.
"낙동강 좌측의 아름답고 큰고을" 이
"문경새재 이남의 이름높은 누각"
"높은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아름다운 누각"
"영남루에 오르니 넓고 높은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라는 의미이고, '병인 오월(丙寅 五月)' 이라는밀양강과 밀양읍성이 함께 어울리니 하나의 그림과도 같다"
누가 높은 다락을 지어 하늘 가까이 올렸나
벽 사이에 걸린 판상시가 기둥머리를 다 채웠네
세월은 세차게 흘러 개을 속에 임하니 지난 일 아득하여 기둥 가에 기대네 십리 뽕나무와 삼에는 비와 이슬이 깊었고 한 지경 산과 물에는 구름과 연기가 자욱하네 늦게 찾아오니 저무는 해 아름답게 보이고 달빛 가득한 긴 강에 다시 자리를 펼치네 하륜의 시 ‘영남루’ 누각 안에는 ‘영남제일루’ ‘현창관’ ‘용금루’ 같은 현판이 걸려있다. ‘현창’은 ‘훤희 트여 시원하다’는 뜻이고 ‘용금’은 ‘절벽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다운 누각’을 수식하는 말이다. 밀성대군 지단(密城大君之壇)
역대왕조 시조의 취패를 모신 천진궁(天眞宮)
아랑의 영정을 모신 아랑사(阿娘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좌우로 길게 능파당과 침류각을 이어가는 누각의 모습은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을 멋지게 보여준다.
신라시대 영남사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에 누각이 만들어진 것은 고려시대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세기 중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고려시대 이후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글과 글씨가 누각 내부에 가득하다.
시원스런 기둥 사이로 걸려 있는 편액은 ‘영남제일루’로 당시 10세인 이증석의 글씨라 하니 어린 소년이 넘치는 힘으로 써내려간 모습이 대단하다.
영남루는 남아 있는 건물의 보존 상태로도 우리나라의 으뜸이다.
현재 영남루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누각 마루에 앉아 밀양강의 시원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영남루와 부속건물인 침류각은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층을 구분하여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월랑은 그 위에 지붕을 얹은 화려한 모습이다.
마주 보며 자리하는 천진궁은 과거 객사건물의 일부로 지금은 단군의 영정과 역대 여덟 왕조의 시조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밀양시립박물관까지 둘러보는 한나절의 나들이는 밀양 최고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코스다.
영남루 앞 마당에 마치 새겨놓은 것처럼 바위를 장식하는 꽃무늬는 자연이 남긴 석화다.
영남루 경내에서 동쪽으로 난 문으로 빠져나오면 무봉사와 밀양시립박물관 그리고 아랑각으로 빠지는 세 갈래 길이 나온다.
먼저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을 보고나서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길을 걸어 밀양시립박물관으로 해서 아랑각으로 내려오는 동선을 잡으면 가장 적절하다.
권근의 ‘영남루’
능파(凌波)란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미인(美人)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의미한다. 또한 파도(波濤)를 넘는다는 뜻도 있다.
침류각과 마찬가지로 단기4290년 (1957년 9월), 정유추 배수환(丁酉秋 裵綉煥 ) 이라는 글자가 동일인이 같은날에 '능파각'과 '침류각'의 현판을 썻음을 알수가 있다.
영남루에서 본 밀양강
서쪽으로는 종남산의 줄기아래 낙동강으로 향해 흐르는 밀양강의 물길을 조망할수 있다
능파각(凌波閣)에서 본 밀양강
밀양읍성의 성곽 아래로 밀양강이 흐르고 건너 강 건너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능파각(凌波閣)에서 본 밀양강 -멀리 산성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에 있는 침류각枕流閣은 세종때 덧붙여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영남루보다 낮게 지어 통로를 계단으로 만들었다. 상하고저 층층으로 지어 건축미와 기능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현판이름은 ‘침류수석’이라는 고사에서 나왔다. 냇물을 베게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는 뜻이다. 이꼴 저꼴 안보고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자연과 더불어 안분지족하는 삶, 선비의 이상향을 담았다. 서쪽에 있는 능파각凌波閣은 연산군 때 덧 지었다. ‘능파’는 ‘물위를 사뿐히 걷는 신선’ ‘ 빼어난 물의 경치’ ‘ 뱃놀이 할 때 부르는 노래’ 등의 뜻으로 쓰인다. ‘침류’도 ‘능파’도 밀양강을 끼고 있는 영남루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영남루에서 본 천진궁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
밀성대군( 密城大君)은 조선 후기 이후 편찬된 각종 박씨 족보에 의하면 신라 경명왕의 첫째 아들로서 밀양 박씨의 시조이다 박혁거세 거서간의 30세손으로서 이름이 박언침(朴彦忱)이며, 어머니는 석(昔)씨이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학 자료를 제외하면 밀성대군 박엄침이 존재나 경명왕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자료가 현재로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밀양의 전해져 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왕자 밀성대군의 묘가 영남루의 흙이 유실되자 영남루 북쪽 뜰에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부근에 사는 박세에게 말하여 여러사람이와서 보니 과연 오래된 묘 자리였다. 대군의 묘인지 확인 할만한 유물은 없었으나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라 밀성대군의 유지(遺址)임이 믿을 만하다하여 설단(設壇) 협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천진궁(天眞宮) -경남유형문화재 제 117호
영남루 경내에 있는 건물로 원래 이곳은 요선관이 있던 자리이다. 효종 3년(1652)에 지었으며 공진관(拱振館)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자리에는 원래 1665년(현종 6)에 부사 홍성구가 창건한 격선관이 있었다. 영조 15년(1739)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에 크게 수리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재위 918∼943)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이출목 주심포(柱心包)식으로 단층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목조로 된 기와집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겹처마집이다. 5량가구에 연등천장을 하였고, 단군제단 상부와 박공마루의 하부 양쪽에 단순한 우물천장을 만들었다.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기단은 낮은 2기단으로 앞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벽으로 되어있다. 최근에 원래의 문틀에 2중의 문을 덧대어 달았는데, 기법이 미숙하여 기둥의 높이를 전통적 비례에 비해 높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내부에는 단군 이래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다. 중앙 맨 윗자리에는 단군의 영정, 동쪽 벽에는 부여·고구려·가야·고려의 시조, 서쪽 벽에는 신라·백제·발해·조선 시조 들의 위패가 있다.
광복 후 지역 유지들의 뜻을 모아 발족한 단군 봉안회가 1956년부터 단군 봉안전으로 사용하면서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御天大祭) 10월3일 개천대제(開天大祭)를 밀양시장이 직접 초헌관으로 참석하여 엄숙히 올리고 있다.
천진궁의 삼문인 만덕문
만덕문의 뒷면
만덕문(萬德門)이다. 우리나라의 대표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중 ‘삼일신고’ 천훈에 “계만선 문만덕”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천진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천진궁(天眞宮)
천진궁(天眞宮)은 옛 객사 건물의 하나였는데 지금은 단군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릐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중앙 수좌애 단군의 영정과위패가 봉안되고 동벽에부여,고구려,가락,고려시조왕의 위패를 모시었고, 서벽에는 신라,백제,발해,조선왕조 시조의 위패를 파례로 봉안하고있다
주존인 단군상과 위패
동벽의 가락시조왕과 고려 태조왕 위패
동벽의 부여시조왕과 고구려시조왕 위패
서벽의 후조선태조왕과 발해고왕 위패
서벽의 백제시조왕과 신라시조왕 위패
천진궁의 단군 영정을 주존으로 모시고 좌우에 역대왕조의 시조의 위패 모셨다. 집기며 부착한 장식들이 난삽하기 그지없다. 종묘처럼 경건함를 찾을 길이 없다. 천진궁이란 말도 무당집같은 느낌이든다. 누가 관리를 하는 건지?
단군석상- 뒷쪽에 박춘석 노래비와 그의 흉상과 옛집도 보인다
단군석상과 삼성제왕석비
太上老君 七元聖君 三神帝王
태상노군(太上老君)은 노자 (老子)를 신격화한 것으로 노자는 장자와 함께 도가의 시조이다. 칠원성군(七元聖君)은 북두대성칠원성군(칠성)을 말하며, 아이의 수명을 늘려주고,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고 있다. 삼신제왕은 삼신상제(三神上帝)와 같은 말로 환인과 환옹치우 및 단군왕검을 가르키는 말이다
영남루에서 내려다 보는 밀양강과 밀양시가지는 한편의 파노라마다. 비가 오는 밀양강은 흐름이 도도하고 물의 빛은 짙푸르다. 강변은 깔끔하게 정리 돼 있는데 그 너머 비에 젖는 도심은 아스라하다. 난간 아래 성곽이 있고 성곽 아래에 대나무 밭이 있는데 이 대나무 밭에서 아랑이 억울하게 죽었다. 아랑의 원한을 풀어 준 ’아랑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정순문(貞純門)
이링긱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6호로 명종 때 죽음으로 순결을 지킨 아랑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30년 영남루를 중수할때 '중순아랑지비'라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아랑각이라 불렀다, 지금의 아랑사는 1965년 비각을 헐고 그자리에 맞배지붕의 3칸 사당과 삼문의 정문을 중창한 것이다
祠
사당안에는 아랑의 영정과 위관을 보안하였다. 영정은 이당 김은호화뱍아 구렸다아랑제향은 음력 4월 16일에 진행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밀양부사가 밀양에 부임해오면 첫날 밤에 죽었다.벼슬아치들이 밀양부사로 가는 것을 꺼렸는데 이상사라고 하는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했다. 밀양부사로 온 이상사는 첫날밤에 지내고도 멀쩡하게 살아 남아 통인(수령의 심부름이나 명령을 전달하는 아전) 주기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상사는 통인 주기를 처형하고 아랑의 시신을 대나무 밭에서 찾아내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러자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랑은 본래 조선 명종때 밀양부사 윤동옥의 딸이었는데 통인 주기가 아랑을 남몰래 사모했다. 주기가 유모를 시켜 아랑을 영남루로 유인한 뒤 사랑을 고백하고 겁탈하려다 실패하자 죽여 대나무 밭에 버렸다. 아랑이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기 위해 새로 부임하는 부사에게 귀신차림으로 나타났으나 놀란 부사가 혼절하여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밀양주민들이 아랑낭자의 정절을 기려 밀양강가의 영남루 아래쪽 절벽에 열녀사를 세웠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를 알수 없다.그후 밀양시가 ’아랑각‘을 지었으며 매년 음력 4월16일에 제사를 지낸다. ’영남루 제영‘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밀양아리랑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당시 밀양지방 아낙네들이 아랑의 정절을 사모하여 ’아랑아랑‘하고 불렀는데 그것이 변해 ’밀양아리랑‘이 됐다는 것이다.
▲ 박시춘 흉상과 생가.
라는 의미이다.
'강성여화'(江城如画 : 밀양강과 밀양읍성이 함께 어울려 하나의 그림과 같다'는 뜻)
현창관(顯敞觀 : '영남루에 오르니 넓고 높은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뜻)
3익공 쇠서와 연등천장
중층 누각으로 건물의 기둥이 높고, 간격을 넓게 잡아 규모가 크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공포는 익공양식의 건축으로는 가장 쇠서가 많은 3익공계이고,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에 겹처마 형식으로 처리해 꾸며져 있다
퇴계 이황의 글
영남루에는 그 외에도 이황, 이색, 문익점 등 여러 유명 문인의 시와 글을 새긴 현판이 많이 걸려 있다
기둥의 위를 가로 지르는 상,하의 보를 받쳐주는 용도로 문양도 아름답다
영남루는 조선시대 후반기에 속하는 건물로서는 건축미와 규모면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히는 건축물로 부사 이인재가 중건할 때의 상량문은 추남 이장한이 지었으며, 준공한 뒤에 김홍근이 지은 상량문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영남루 누마루에서 보이는 풍경
이란 의미 이라고 한다
'영남루 (嶺南樓)' 누마루와 '현창관(顯敞觀)' 현판과 '용금루(湧金樓)현판
누마루의 기둥과 마루의 배치
마루가 넓게 깔린 2층 평면은 내외진(內外陳)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기둥 사이의 사면을 모두 개방해 두었다
영남루 천정 가구 구조와 '현창관(顯敞觀) 편액
'현창관(顯敞觀). 현판은
이라는 뜻으로 오른쪽의 편액과 같이 귤산 이유원(李裕元) 이 썻다.
'영남제일루' 현판
영남루의 내부에 있는 "영남제일루" 현판는 아버지가 짓고 아들이 썻다는 유명한 현판으로 1844년 부사 이인재가 이곳을 중수하면서 부사의 큰아들인 이증석(11세)가 썻다고 전하며, 이 현판의 글씨는 지금까지도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왼편의 작은 글씨에 "계묘초하한이증석십일세서(系卯初夏澣李增石十一世書)" 라고, "1843년 초여름 이증석이 십일세에 쓰다" 라는 내용이 있다
'영남루 (嶺南樓)' 현판
'영남루' 현판은 부사 이인재의 작은 아들인 이현석(7세)이 썻다고 하며 당시 부사가 서예 신동으로 불렸던 두 아들에게 편액의 글씨를 쓰게 한것으로 보인다. "영남루"와 "영남 제일루" 모두 해서체의 비슷한 필체이다.
'용금루'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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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嶺南樓)와 침류각(枕流閣)을 연결하는 계단형 회랑인 월랑(月廊)
영남루(嶺南樓)는 전체적으로 부재도 크고 기둥 간격도 넓으며 중층(重層)으로 되어있어 우리 나라 건축 중에서는 크고 우람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건물 서편에 침류각 (枕流閣)이라는 부속건물이 딸려 있고, 지붕이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되어 독특한 외관을 구성하고 있다.
영남루(嶺南樓)와 침류각(枕流閣)을 연결하는 계단형 회랑인 월랑(月廊)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이루어진 계단형의 행각인 월랑(月廊)의 지붕으로,조선후기 우리나라 건축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영남루(嶺南樓)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층 누각 팔작지붕집이다. 기둥이 높고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어서 규모가 매우 커 보인다. 게다가 양쪽 옆으로 날개처럼 두 건물을 거느리고 있어 더욱 화려하고 웅장해 보인다.
영남루 양옆으로 있는 부속건물은 왼쪽 것이 능파당(凌波堂)이고 오른쪽 것이 침류각(枕流閣)이다. 특히 침류각과 영남루 사이에는 월(月)자형의 계단형 통로인 월랑(月廊)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남루는 웅장하면서도 당당한 기풍으로 진주 촉석루와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꼽이고 있다. 또한 진주 촉석루와 함양 농월정과 함께 영남의 3대 누각으로 꼽이기도 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조로, 익공식(翼工式)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보물 제14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남루에 오르는 계단
영을 통하여 오르도록 되어 있으나 중앙에 별도로 아래는 석조 윗부분은 목조로된 2층 구조의 계단이 있어 특이하다
영남루(嶺南樓)와 침류각(枕流閣)을 연결하는 계단형 회랑인 월랑(月廊)의 지붕모양
영남루(嶺南樓)의 정면 3개의 편액-'嶠南名樓'-'嶺南樓' -'江左䧺府'
'교남명루(嶠南名樓)' - 예서로 유명했던 이유원 글씨의 현판
영남루(嶺南樓) 정면에 있는 당대 명필 송하 조윤형이 64세에 쓴 글씨의 현판 '영남루'
예서로 유명했던 이유원 글씨의 현판 '강좌웅부(江左䧺府)'
'
밀양루의 정면 모습으로 세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중앙에 있는 '영남루(嶺南樓)' 편액은 송하 조윤형있고, '강좌웅부' 라고 오른쪽 편액은
'강좌웅부(江左䧺府)'는
침류각 (沈流閣) 현판
정유추 배수환 (丁酉秋 裵綉煥) 단기4290년 (1957년 9월) 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영남루와 침류각을 연결하는 계단형 회랑인 월랑(月廊)
빼어난 주변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룬 영남루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누각으로 꼽히는데 촉석루와 영남루는 모두 경상남도에 있다
영남루(嶺南樓)와 침류각(枕流閣)은 계단형의 회랑인 월랑(月廊)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남루(嶺南樓)와 침류각(枕流閣)의 연결하는 계단형 회랑인 월랑(月廊)
원래 영남루가 있는 이 자리에는, 신라 법흥왕때에 세워진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절은 없어지고,절의 종각으로 금벽루(金壁樓)라는 작은 누각만이 남아 있었는데, 고려 예종때 처음으로 영남루를 지었고, 1365년 (공민왕 14년) 김주가 중수를 하였으며, 절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嶺南樓) 라 하였다고 합니다.
밀양강가에서 본 영남루(嶺南樓)
영남루는 그동안 문화재·학술적 가치 조사·평가에서 현존하는 대표적인 관영 누각으로 고려말 중창한 뒤 역사가 650년 이상된 명확한 건축기록을 가진 건축으로 인정받고 있다. 건물 구성·배면·형태면에서도 창의적이고 독특한 특징이 있어 가치가 높은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밀양강가에서 본 영남루(嶺南樓)
침류정(枕流閣)-영남루(嶺南樓) -능파의 3건물이 연결되어있다
침류정(枕流閣)-영남루(嶺南樓) - 3건물이 연결되어있다
침류정(枕流閣)와 영남루(嶺南樓)는 원래 밀양 객사였다
영남루는 조선시대 영남 도호부의 객사 건물 인데 밀양을 찾아온 빈객이 시연을 즐기거나 시인 묵객이 잠을 자는 누대로 활용됐다. 신라시대에는 영남사의 종각인 금벽루가 있던 곳이었는데 고려시대에 절이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공민왕 14년(1365년)에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따 영남루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조 6년(1460년) 중수하면서 규모를 넓혔고 순조때 불에 탔지만 밀양부사로 온 이인재가 헌종 10년(1844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러고 있다.조선시대 건축물이 온건하게 남아있는 몇 안되는 자료다.
가운데 영남루가 있고 좌우에 능파각과 침류각이라는 익랑(좌우 출입문에 잇대어 지은 행랑)을 거느린 독특한 형태다. 마치 새가 양날개를 펴고 강과 도시를 내려다 보고 있는 형상이다. 정면 다섯칸, 측면 네칸형식인데 마루가 넓고 천정이 높은 웅장한 누각이다.
기둥은 장대하고 내부장식도 화려하게 치장했다. 천장에 방형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그림이 있고 들보에는 수많은 시인묵객 유명인사들이 글씨를 쓰고 시를 걸었다. 이같은 이유로 영남루는 평양의 부벽류,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영남루(嶺南樓) 의 야경
영남루 전경
영남루(嶺南樓) 오르는 돌계단 -획일적이 아니면서 계단과 경사로를 겸한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돌계단의 끝에 영남루 영역을 알리는 일주문이 서 있다
영남루(嶺南樓) 경내 주변애 산발적으로 분포되는 연한 납석의 석화(石花 )
비가 온 후면 국화 문양이 선명하다고 한다
일주문에서 바라본 영남루 (嶺南樓)와 침류각(枕流閣)
조선시대 밀양군 객사(客舍)였던 밀양관 (密陽館)의 부속건물로서,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행사나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화려함과 웅장함을 보여준다
영남루(嶺南樓)와 영남루 왼쪽에 별채인 침류각(枕流閣)의 옆 모습
영남루(嶺南樓)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별채인 침류각(枕流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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