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4일 화요일

고조선 , 古朝鮮.

고조선 , 古鮮.


고조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다. 
고조선의 시기는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된 단군조선과 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위만조선으로 나뉜다. 

단군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엄연히 존재한 역사적 사실이며, 그 안에는 선민사상이나 토테미즘 등이 들어있다.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만주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생긴 국가이다(기원전 2333). 

당시에는 조선이라 불렀지만 이후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고조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알려 주며, 단군의 건국 사실과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은 우리 민족 자긍심의 원동력이 되었다.

고조선은 위만의 집권과 철기 문화의 수용으로 다시 한번 발전하게 된다. 
기원전 2세기에 위만이라는 사람이 고조선으로 내려와 세력을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조선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한반도 남부 지방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었다. 
이처럼 고조선이 강성해지자 한나라는 대군을 보내 고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을 공격하였다. 
고조선은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단군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일본의 식민사관인 ‘단군 죽이기’로 단군 이야기가 신화로 변질되었으나, 엄연히 존재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선민사상과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토테미즘 등을 담은 단군이야기와 함께 단군 조선은 1500년간 이어졌다.


한국인에게 단군은 국가의 조상. 
어느 누군가에겐 용납하지 못할 우상숭배의 인물이기도 하고, 어떤 나라에선 훼손하고 부정해야 할 인물이기도 합니다. 

10월 3일 개천절은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한 국경일입니다. 

민족의 뿌리를 국가 차원에서 기리고 있지만 일부 시민단체와 개인의 견해 차이로 단군상이 수년간 철거 논란에 휩싸이고, 학교와 공원 등지에 세워져 있는 단군상의 목이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단군은 누구인가? 
단군은 종교가 아닌 민족의 상징입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을 위만조선(滿)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전한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에 ‘발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산해경()》에는 조선이 보하이만[]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에 들어와 주()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바로 고조선입니다. 
원래 이름은 그냥 조선이었는데 이후에 등장하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비교하려고 옛 고() 자를 붙이게 됨. 

아무튼 고조선도 나무가 아니라 숲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고조선의 시기는 크게 2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어요. 
첫 번째는 단군이 다스리던 시기이고, 두 번째는 위만이 다스리던 시기입니다. 

각각 단군조선위만조선이라고 불러요. 
단군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되었고, 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는 위만조선 때입니다. 
고조선은 이야기의 흐름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는 것은 선민사상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넓고 넓은 지구 중에서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왔잖아요. 

한민족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아직 해결 안 된 부분이 있잖아요. 
정말 ‘하늘’에서 왔을까 하는 부분이죠. 

이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환웅이 이끈 집단이 강한 부족이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국어에서는 과장법이라고 하죠? 

당시 선진 문화인 청동기 문화를 갖고 있던 환웅 부족이 신석기 문화에 머물러 있던 지역으로 이주해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정리해볼게요. 
환웅은 첫째, 하늘의 자손임을 드러내는 선민사상을 의미하고, 둘째, 선진 기술을 가진 이주민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홍익인간,
 환웅의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은 홍익인간을 의미해요. 
우리나라의 건국 이념이기도 하고요.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왔어요. 

바람, 비, 구름을 주관하는 자들이죠.
이건 뭐랑 관련이 있을까?  

모두 농사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자연 현상들입니다. 
당시는 농사가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던 사회였으니까 이런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




곰 숭배 부족이 호랑이 숭배 부족'


단군 이야기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곰과 호랑이가 출연합니다. 
곰이랑 호랑이가 찾아와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환웅은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마늘과 쑥만 먹으면서 견디라고 하죠. 

곰과 호랑이가 정말 와서 말을 하진 않았겠죠? 
곰이나 호랑이 같은 동물을 숭배하는 신앙을 뭐라고 했죠? 맞아요, 
이 대목은 ‘토테미즘’을 보여줍니다.


곰과 호랑이는 각각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을 뜻해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곰은 끝까지 참아내지만 호랑이는 중간에 포기하죠.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과의 싸움에서 호랑이 부족이 진 것을 뜻합니다. 

선진 기술을 가진 환웅집단(이주민)과 곰부족(토착민)이 결합할 수 있었던 거.
환웅과 웅녀의 결혼은 정말 세기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자식이 바로 단군왕검입니다.




사회를 다스리다.


단군은 무당을 뜻해요. 
어원을 따라가 보면 우리나라의 ‘당골’이나 몽골어인 ‘탱그리’를 표현한 말입니다. 
왕검은 임금을 뜻해요. 
고조선은 종교적 지배자와 정치적 지배자가 일치한 제정일치 사회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어떤 문화를 배경으로 고조선이 세워졌죠? 청동기 문화였습니다. 
청동은 많이 생산되지도 못하고 단단하지도 않았어요. 
강력한 무기와 군사력으로 부하들을 무장시키고 힘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는 방법은 주먹이 아니라 ‘신의 권위’였어요. 
종교적 권위를 통해 지배를 정당화한 겁니다.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니 내 통제에 따르라!”라는 거죠.
그럼 이 제정일치 사회는 언제 바뀔까요? 맞습니다. 

철기가 등장하면서 제정이 분리돼요. 철기는 단단하고 생산도 많이 되잖아요.
철제 무기가 보급되면서 전쟁이 치열해지게 되죠. 
더 이상 지배층은 신들린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군의 통치 권력, 1500년간,,,

‘신화’ 속에서 단군은 1500년까지 살다가 산속으로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거, 완전 뻥 아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해요. 
단군이 한 명이고, 그 한 명이 1500년을 살았으면 당연히 말도 안 되죠. 
여기서 단군은 한 사람의 이름이 통치자의 직위명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직책이죠.
1500년 동안 단군이 살았다는 얘기는 여러 명의 ‘단군’ 직위 통치자가 1500년 동안 통치 권력을 이어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제 단군 신화가 아니라 단군 이야기라고 한 게 이해가 가시나요?

일연이 쓴 <삼국유사>
일연이 쓴 <삼국유사>

제정일치 , 祭致.


신을 받들고 제사하는 일을 정치의 중심으로 삼으려 한 사상이나 정치 형태.

고대 국가의 권력 형태로 제사와 정치를 같은 인물이 담당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지도자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천지신명과 소통할 수 있는 제사장의 역할까지 겸했던 것이다. 
제사와 정치를 모두 담당하며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고조선의 단군도 그러한 형태로 보고 있다. 
‘단’은 제사를 지내는 제단, 혹은 큰 박달나무(숭배의 대상)를 의미하고 ‘군’은 임금을 뜻한다. 
삼한은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정 분리 사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통 제정일치 사회가 더 발달된 단계로 파악된다.

고대사회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 집단의 큰 일을 결정하는 데 신의()를 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던 것과 같이 모든 종교가 생활의 중심에 있었고, 신에게 제사하는 일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신에게 제사하는 일은 그 집단의 장()이 주재()하여, 이 제사장이 정치의 수장()을 거의 겸하였다.

최남선()은, 한국의 단군()은 무당의 다른 이름인 ‘당굴’의 사음()이고, ‘당굴’은 몽골어 ‘tengri( ·)’와 공통된 말이며, 마한()의 여러 소국의 신읍()의 장()인 천군()도 이와 같은 말이라 하여 신정사회()에 있어 군장()의 직능이 제주()인 무당[]의 직사()를 겸하였던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제정일치의 사회형태 내지 국가형태는 부여 ·고구려에서 전부족이 참여하는 거대한 집단행사였던 제천의식()에서 볼 수 있다. 

제도적으로는 신라 선덕왕 이래 고구려 ·고려 ·조선에서 사(:)와 직(:)을 받드는 사직단을 국가에서 세워 국왕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제사를 지낸 데서 그 유례를 볼 수 있는데, 이로써 ‘사직()’은 국가 자체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고대 국가의 권력 형태로 제사와 정치를 같은 인물이 담당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지도자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천지신명과 소통할 수 있는 제사장의 역할까지 겸했던 것이다. 

제사와 정치를 모두 담당하며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고조선의 단군도 그러한 형태로 보고 있다. 

‘단’은 제사를 지내는 제단, 혹은 큰 박달나무(숭배의 대상)를 의미하고 ‘군’은 임금을 뜻한다. 
삼한은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정 분리 사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통 제정일치 사회가 더 발달된 단계로 파악된다.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새()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이 즉위할 무렵 진()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 노관()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는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 남려()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역계경(谿)은 강화()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이계상(谿) 삼(), 장군() 왕겹()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 성기()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