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4일 화요일

위만조선 , 衛滿朝鮮.

위만조선 滿鮮.


위만(衛滿)이 집권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의 고조선(古朝鮮).



이때 위만조선은 한의 대군과 맞서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강하였다.


이 당시의 부장품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것이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단검·창·도끼들이며, 또한 전차로 추측되는 거여구(輿)라는 점에서 이 당시에 고조선사회가 정복전쟁이 잦았고 지배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만 집권기에는 철기문화의 보급이 한층 진전되면서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정치적 통합도 한 단계 진전되어 나갔다.

이 당시 고조선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진척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노비제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조처를 보여주는 팔조금법()에서 대표적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위만조선의 사회구성은 노비·촌락의 일반민·귀족으로 대별됨을 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촌락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이 시기에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의 노비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이는 노예제 경영이 발달된 사회에서 보이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이나 큰 도시의 발달 등의 면모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촌락공동체의 일반민은 기본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지역의 경제발전 상태에 따라 그 존재 양태가 균일하지 않았고, 경제적 상태와 피수탈 정도에서 차이를 나타냈다.

위만조선은 사회발전에 따른 국가적 성장과 여러 사회구성원을 통치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사료에는 상()·대신()·장군()·비왕() 등의 관직을 지닌 관료들이 존재하였음이 보인다.

위만조선은 중앙에는 세습적 지위를 누리던 왕()을 정점으로 하여 그 밑에는 각 지역공동체에 상당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수장()들을 중앙 관직체계에 편입시켜, 문관직인 상직()과 무관직인 장군직()으로 편제하여 국가적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정치적 지배체제를 갖춘 고조선은 국가적 통치를 위해 일정 지역들을 지역적 구분을 두고 통치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결국 위만조선의 국가 형태는 최고 수장인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재지수장층의 누층적 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형태였다.

위만조선 단계에는 충분한 관직 및 통치체제는 발전되지 못하였다.
우세한 병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을 통해 광역의 영토를 가졌고, 정복지역에 대해 공납적 지배관계를 실현하는 국가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삼국 초기까지 이어지다가 4세기 이후 고대국가가 완성되면서 공동체적 제약을 극복하고 왕에 의한 전제적 고대국가가 완성되었다고 보인다.


위만이 세운 고대국가.
‘위씨조선()’·‘한씨조선()’이라고도 칭한다.『사기』조선전()과 『한서』조선전 등의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고대국가로, 서기전 194년에서 서기전 108년까지 존속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하다 실패하여 흉노로 도망하자 그 밑에 있던 위만은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패수(浿)를 건너 상하장()이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한다.

당시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시대로, 위만은 요동태수()로부터 변방을 방어하는 외신()의 직함을 받았다.
차츰 그는 진번조선()과 연()·제()의 유민들을 모아 왕 노릇을 하다가, 끝내는 준왕을 내몰고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때가 중국 한나라 혜제() 1년(서기전 194)이다.

위만이 연에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었다()”고 묘사되어 있고, 또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한 것으로 보아 위만은 조선인 계통의 자손으로 보인다.

위만은 중국어와 조선어에 능통하였고 주변 사정에 정통했으며, 주위의 진번 등을 복속시켜 영토의 확장을 꾀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능한 무장이며 정치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가계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와 태자 장()에 이르게 되며, 손자 우거왕대인 서기전 109년 한무제()의 침공으로 서기전 108년 망하게 되었다.

위만조선의 통치 기간은 위만에서 우거에 이르는 3대 87년간이 되는데, 위만조선은 왕권이 세습될 정도로 단단한 국가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의 국가적 기반은 우거왕대에 1년여 동안이나 한무제의 원정군과 대치하였던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우거왕대에 한무제의 침략을 받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주위의 예()나 변진()의 조공로 및 무역로를 차단한 데 있었다. 

위만조선은 지리상으로 한나라와 이들 나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군사력만 있다면 무역로에 대한 관리·통제가 가능하였으며, 이는 위만조선에게 상당한 중간 이익을 가져다 주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중간 이익에 대한 과욕은 한무제의 원정군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 결국 위만조선의 멸망을 야기하였다.

상하장을 근거로 하여 유민 집단과 망명인들을 통솔하고,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나간 위만조선은 그 성격상 정복국가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정복국가로 출발한 위만조선은 호전성을 띠었고 조공로·무역로의 차단도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위만조선이 정복국가였다는 사실은『후한서』동이전 예조()에 실린 “원삭() 1년(서기전 128) ‘예군() 남려()가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명을 데리고 요동으로 갔다”는 기사와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에 수록된 “조선상() 역계경(谿)이 우거에 반하여 2,000여 호의 백성을 데리고 진국()으로 망명하였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위만조선의 지배 계층과 토착 세력 간에는 알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와 같은 기록들이 이를 방증하여 준다.

위만조선에 대한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위만과 손자 우거, 증손자 장()을 비롯한 왕족, 그리고 조선상 노인()과 한음(), 대신() 성기(), 장군 왕겹(), 이계상(谿) 삼() 등이 있다. 

이들은 위만조선에서 행정 및 군사를 담당하였던 고위 각료들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왕의 신분이 세습된 것과 마찬가지로 상류층 내에서는 신분의 세습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만조선에는 적어도 지배층인 상류층과 피지배층인 평민으로 구분되는 신분 계층이 존재하였으며, 신분제도는 적어도 상류층·평민과 노예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역계경·남려 등의 관련 기사를 통해 볼 때 당시 위만조선의 인구는 적어도 50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역계경·남려 등은 위만조선을 이루는 부족의 장이자 행정 관료로, 그 밑에 상당한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50만 명 이상의 인구를 지닌 고조선 사회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을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법령체계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고조선에는 기자()에 의하여 제정된「팔조금법()」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후 낙랑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60여 조로 늘어났고「낙랑계령()」도 제정되었다 한다.

『후한서』동이전 예조에도 비슷한 기사가 있는데, 이 무렵은 바로 낙랑군이 설치된 직후로 보이나 위만조선시대부터 이미 사회가 복잡하여지고 법이 많이 제정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율령을 옹호하기 위하여 군사력과 경찰력이 합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장군 왕겹의 존재, 조선군에 의한 요동동부도위() 섭하()의 피살, 왕검성을 중심으로 한나라 무제의 원정군에 1년여 동안이나 저항하였던 사실, 

위만조선의 멸망이 단지 군사력의 약세 때문이 아니라 내분에 의한 것이었다는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당시 조선의 군사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고학상으로 이미 철기시대 전기(초기 철기시대, 서기전 700∼1년)에 이른 위만조선에서는 철제 무기의 사용이 일반화되고 전차()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 미루어 보아 무기 제작을 위한 철광의 발견과 확보, 제련 등에 있어 직업의 전문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의 실연대는 서기전 194년에서 서기전 108년까지이므로 대개 청천강 이남의 서북 지방에서 나타나는 세형동검 관계 유물·유적들을 위만조선의 흔적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관련 묘제로는 돌무덤·움무덤과 독무덤을 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위만조선은 장거리 무역, 인구의 증가와 이에 따른 토지의 확장과 확보, 무력을 통한 인근 부족의 정복, 철제 무기의 사용과 이를 위한 제반 전문 장인의 존재, 말의 사육에 필요한 마장()과 조련사의 확보, 
잉여 식량의 확보, 율령 조직, 조공로·무역로의 통제에 따른 중간 이익,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징병 제도, 조세 등 일련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상호연관을 맺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위만조선은 직업적인 계층의 중앙 관료들로 구성된 정부를 갖추고 있었으며, 무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정의에 부합될 수 있을 만하다.

당시에 사용된 문자와 언어, 그리고 위만조선을 대표할 예술양식 등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고 있다. 
당시에는 아마도 한자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따금 출토되는 중국의 명도전()이나 오수전()·화천() 등은 위만조선과 중국과의 교역관계뿐만 아니라 문자사용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위만조선시대가 포함되는 초기 철기시대에 대한 연구성과가 축적되고, 이와 더불어 당시의 행정중심지였던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그에 따른 발굴이 수행된다면, 위만조선의 실체가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위만조선이 되면서 나라가 뒤집힙니다. 좋은 쪽으로 뒤집혀서요, 

고조선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왜냐, 철기가 본격화되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발전했겠어요. 

마치 휴대전화가 잘 안 터지는 지하철에서 와이파이를 잡으려고 애쓰다 지쳐서 LTE로 바꾼 뒤 느끼는 속도감이었을 겁니다. 
철로 뭘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바로 ‘농기구’였어요.     

위만조선이 되고, 철기가 본격화되다

위만조선이 되면서 나라가 뒤집힙니다. 
좋은 쪽으로 뒤집혀서요, 
고조선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철기가 본격화되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발전했겠어요. 
마치 휴대전화가 잘 안 터지는 지하철에서 와이파이를 잡으려고 애쓰다 지쳐서 LTE로 바꾼 뒤 느끼는 속도감이었을 겁니다. 
로 뭘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바로 ‘농기구’였어요. 


중국을 통해 서(西)북한으로 도입된 철기문화()는 BC2세기경 남한에 유입되면서 서해안을 따라 확산된다. 
고조선을 통한 제한된 교류였지만,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생겨난 한사군() 중 특히 낙랑군()과 대방군()의 영향을 받아 활발한 전파가 이루어진다.


위만조선이 되면서 나라가 뒤집힙니다. 
좋은 쪽으로 뒤집혀서요, 
고조선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철기가 본격화되잖아요. 
얼마나 발전했겠어요. 

마치 휴대전화가 잘 안 터지는 지하철에서 와이파이를 잡으려고 애쓰다 지쳐서 LTE로 바꾼 뒤 느끼는 속도감이었을 겁니다. 

철로 만들 수 있다
바로 ‘농기구’였어요.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겠죠. 

한나라는 고조선이 있던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설치해놔요. 
그걸 일컬어 한 4군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경기도, 강원도 등 13개의 도로 이뤄져 있잖아요. 
중국은 이런 행정구역을 ○○군이라고 부른 거예요. 
한 4군은 한나라가 고조선 지역에 세운 4개의 군을 의미합니다.

고조선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또 독립운동의 나라 아닙니까. 
살벌하게 저항했어요. 
이런 저항을 무마시키기 위해 고조선인들의 행동을 금지하기 위한 법만 잔뜩 늘어나게 돼요. 

원래 고조선의 법이 몇 개냐면 달랑 8개였습니다. 
근데 이게 60개까지 늘어나요.
그만큼 사는 게 팍팍해졌단 얘기죠.


자연스럽게 상업도 발달하고 무역도 활발해집니다.


위만이 왕이 되고 중국에서 가져온 철기가 본격화되면서 고조선은 전성기를 맞는다. 
철제 농기구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 상업과 무역이 발달되었고 한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수수료를 챙겼다.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역사발전 단계상에서 후기()에 해당하며, 일반적으로 왕조의 개창자를 국명으로 칭하지 않는 점에서 '위만조선'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위만왕조'나 '위만집권기의 고조선'이라는 개념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요동 일대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하여 준왕()의 외신()으로 있었다. 

이후 차츰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제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혜제(:BC 195~BC 188) 때이다.

이처럼 위만왕조는 이전 준왕() 단계의 통치체제를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으로 하고, 위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때는 위만조선을 중국인 이주자들이 지배하는 식민지정권으로 생각하였다. 
이 점은 위만왕조 정치구조의 연구 결과 그것이 조선 독자의 체제를 갖추고 있고, 또한 지배세력의 주요 부분이 토착인이라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다. 

위만 집권시기는 고조선의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위만은 중국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외신()의 임무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지역을 침략하고, 진번과 임둔() 등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성해져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확장에 대한 불만과 고조선이 흉노()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은 마침내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끈질기게 저항하였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나타났다. 결국 BC 108년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이때 위만조선은 한의 대군과 맞서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강하였다. 

이 당시의 부장품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것이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단검·창·도끼들이며, 전차로 추측되는 거여구(輿)라는 점에서 이 당시에 고조선사회가 정복전쟁이 잦았고 지배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만 집권기에는 철기문화의 보급이 한층 진전되면서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정치적 통합도 한 단계 진전되어 나갔다.

이 당시 고조선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진척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노비제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조처를 보여주는 팔조금법()에서 대표적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위만조선의 사회구성은 노비·촌락의 일반민·귀족으로 대별됨을 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촌락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이 시기에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의 노비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이는 노예제 경영이 발달된 사회에서 보이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이나 큰 도시의 발달 등의 면모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촌락공동체의 일반민은 기본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지역의 경제발전 상태에 따라 그 존재 양태가 균일하지 않았고, 경제적 상태와 피수탈 정도에서 차이를 나타냈다.

위만조선은 사회발전에 따른 국가적 성장과 여러 사회구성원을 통치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사료에는 상()·대신()·장군()·비왕() 등의 관직을 지닌 관료들이 존재하였음이 보인다. 

위만조선은 중앙에는 세습적 지위를 누리던 왕()을 정점으로 하여 그 밑에는 각 지역공동체에 상당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수장()들을 중앙 관직체계에 편입시켜, 문관직인 상직()과 무관직인 장군직()으로 편제하여 국가적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정치적 지배체제를 갖춘 고조선은 국가적 통치를 위해 일정 지역들을 지역적 구분을 두고 통치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결국 위만조선의 국가 형태는 최고 수장인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재지수장층의 누층적 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형태였다. 

위만조선 단계에는 충분한 관직 및 통치체제는 발전되지 못하였다. 
우세한 병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을 통해 광역의 영토를 가졌고, 정복지역에 대해 공납적 지배관계를 실현하는 국가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삼국 초기까지 이어지다가 4세기 이후 고대국가가 완성되면서 공동체적 제약을 극복하고 왕에 의한 전제적 고대국가가 완성되었다고 보인다.


한나라에게 공격당하며 지배층의 내분으로 멸망한다.




『전한서()』 「조선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연()나라 때부터 진번()과 조선()[안사고()는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하여 차지하였다.”라고 하였다.]을 침략하여 차지하고 이곳에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요동군 변방에 이 땅을 예속시켰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해서 쌓고 패수(浿)를 경계로 삼아[안사고는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라고 하였다.] 연나라에 예속시켰다.

연나라의 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滿)이 망명하면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빠져 나온 후,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장()에 머물렀다. 
위만은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와 옛날의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들을 예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이기()는 “지명이다.”라고 하였고, 신찬()은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에 도읍하였다. 
위만이 군사력으로 주변의 조그만 읍들을 공략하여 항복시키자,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되었다. 
이리하여 영토가 사방 수천 리나 되었다.

  [  ]       浿[ 浿] 
 滿   浿    [    浿]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안사고는 “손자의 이름이 우거이다.”라고 하였다.]에 이르렀을 때였다. 
당시 진번과 진국()이 국서를 올려 한나라 천자를 뵙고자 하였지만 우거가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안사고는 “진은 진한()이다.”라고 하였다.] 원봉()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에서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까지 명을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길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던 조선의 비왕() 장()[안사고는 “섭하를 호송한 자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을 찔러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들어간 후, 드디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한나라 천자는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로 임명하였다. 
조선은 섭하에게 원한을 품고 습격하여 그를 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에서 발해()를 건너게 하니 병사가 5만 명이었다. 
좌장군() 순체()는 요동으로 나와 우거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우거도 군사를 내어 험준한 곳에서 이를 막았다. 
누선장군이 제()의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왕검성에 먼저 도착하였다. 우거가 성을 지키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즉시 나아가 공격하자 누선은 패하여 도망쳤다. 
양복은 군사를 잃고 산 속으로 달아나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좌장군 순체는 조선의 패수 서쪽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수가 불리하게 되자, 곧 위산()을 보내어 군사의 위용으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자가 만여 명이나 되는 병력으로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고 할 때였다. 

사자(위산)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의심하여서, ‘태자는 이미 항복했으니 당연히 무기를 지니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자신을 속일지 모른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위산이 천자에게 이 일을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의 목을 베어 죽였다.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대로 전진하여 왕검성에 이르러서는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와서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성을 굳게 지켰기 때문에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오래도록 승부를 결정짓지 못하자, 예전의 제남태수()로 있던 공손수()를 보내어 정벌하게 하고,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공손수는 조선에 이르러 누선장군 양복을 묶어 놓고 그의 군사를 합쳐 좌장군의 군사와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재상인 노인()과 한도(), 이계(谿)의 재상인 삼()과 장군 왕겹()[안사고는 “이계는 지명으로 모두 네 명이다.”라고 하였다.]은 서로 의논한 끝에 항복하려 하였지만 왕은 이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한도와 왕겹과 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여름에 이계의 재상인 삼이 사람을 시켜 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우거의 대신 성기()가 또 한나라에 대항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 노인의 아들 최()를 시켜 조선의 백성들을 타이르게 하여 성기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ㆍ임둔()ㆍ낙랑()ㆍ현도()의 4군을 두었다.”




[ ]   [ ]  使   浿 使 [ ]   
                  浿西 
 使     浿使    使 浿 
  浿  西    
 使 便     
 谿 [ 谿  ]    
 谿 使   使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역사발전 단계상에서 후기()에 해당하며, 일반적으로 왕조의 개창자를 국명으로 칭하지 않는 점에서 '위만조선'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위만왕조'나 '위만집권기의 고조선'이라는 개념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요동 일대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하여 준왕()의 외신()으로 있었다. 이후 차츰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제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혜제(:BC 195~BC 188) 때이다. 이처럼 위만왕조는 이전 준왕() 단계의 통치체제를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으로 하고, 위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때는 위만조선을 중국인 이주자들이 지배하는 식민지정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점은 위만왕조 정치구조의 연구 결과 그것이 조선 독자의 체제를 갖추고 있고, 또한 지배세력의 주요 부분이 토착인이라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다. 위만 집권시기는 고조선의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위만은 중국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외신()의 임무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지역을 침략하고, 진번과 임둔() 등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성해져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확장에 대한 불만과 고조선이 흉노()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은 마침내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끈질기게 저항하였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나타났다. 결국 BC 108년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