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 , Gija Josun, 箕子朝鮮.
단군조선에 이어 서기전 1100년경에 건국한 초기국가.
한국 고대사회의 기원을 이루는 고조선의 하나로서, 서기전 195년위만(衛滿)에게 멸망될 때까지 900여 년 간 존속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유래
기자조선의 명칭이 ‘기자(箕子)’라는 중국 역사상의 인물과 ‘조선(朝鮮)’이라는 한국 역사상의 지역이 복합됨으로써 이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진(秦)나라 이전의 문헌인『죽서기년(竹書紀年)』·『상서(尙書)』·『논어(論語)』등에는 기자가 은(殷)나라 말기의 현인(賢人)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한(漢)나라 이후의 문헌인『상서대전(尙書大傳)』은전(殷傳),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등에서 기자는 은나라의 충신으로서 은나라의 멸망을 전후해 조선으로 망명해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周)나라는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했다고 함으로써 비로소 기자와 조선이 연결되었다.
기자동래(箕子東來)의 사실은 부인되거나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의 기록인『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단군조선과 구분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으며,『제왕운기』에서는 후조선(後朝鮮)으로 표현해 기자에 대한 강조가 보이지 않는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 왕조기는 왕도정치의 구현과 사대관계의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명예스러운 일이었다고 이해해 기자동래설이 긍정적으로 수용되었고, 고려 숙종 때 평양에 축조한 기자릉(箕子陵)에 대한 제사도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하였다.
기자조선에 관한 연구 동향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기자와 기자조선은 별개의 존재로서 근대 이후의 역사 연구에서는 재고(再考)의 대상이 되었다.
기자는 은나라 말기의 현인으로서 실재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기자와 결합된 이른바 기자조선의 실체는 새롭게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의 교통 사정, 군신간의 의리, 범금팔조(犯禁八條)의 성격, 그리고 기자릉의 허위성 등을 통해 기자동래설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이른바 기자조선의 대두를 토착 사회 내에서의 세력 교체로 보고, 춘추(春秋)에서 전국(戰國)으로 연결되는 시기에 한반도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씨조선(韓氏朝鮮)이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기자의 동래는 부인하나 기자를 조상신으로 섬기는 기자족(箕子族)의 평양 지역 이동설이 제기되어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동이족(東夷族)의 일파인 기자족은 산서성(山西省) 태곡현(太谷縣) 일대에서 기국(箕國)을 세워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존재했는데 은(殷)·주(周) 교체, 춘추전국 같은 중국에서의 정치적 격동으로 말미암아 난하(灤河) 하류 지역으로 이동해 기자조선을 세웠고, 다시 요서(遼西)·요동(遼東)을 경유해 평양 지역으로 파상적인 이동을 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기자조선은 중국사의 인식 대상으로서의 소국인 기자국일 뿐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기자는 은나라 왕실의 근친으로서 기자가 봉해진 기국은 하남성(河南省) 적구현(適丘縣) 지역으로 은·주 교체기에 난하 하류 지역으로 이동했고, 진나라 통일 이후 난하 중·하류 동부 연안으로 다시 이동해 고조선과 접해 있었다고 보았다.
이 기자국을 위만이 멸망시킨 것으로 파악해 한국사의 인식 대상인 고조선과 무관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1973년 중국 요령성 객좌현(喀左縣) 북동촌(北洞村)에서 출토된 청동기의 ‘기후(侯)’ 명문을 기자동래 및 기자조선의 고고학적 증거로 보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객좌의 ‘기후’명 청동기는 기자 집단의 이주 내지 건국과 관련된 유물이 아니라, 서주(西周) 초기 북경 일대에 위치한 연국(燕國)이 객좌지역에 단기간 진출하였다가 남긴 연국 청동기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조선은 자료의 해석 방향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자조선과 같은 정치적 사회의 재구성에는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고고학 자료와 인류학 이론을 이용함으로써 합리적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인 카라스크 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서기전 13세기경에 시작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성격은 무늬없는토기〔無文土器〕·고인돌·돌널무덤〔石棺墓〕, 그리고 비파형동검·세형동검·청동거울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비파형동검 등 청동 유물의 성격은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기원 및 분포 지역과 관련해 주목되는 유물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대릉하(大凌河) 중심의 요령(遼寧) 지방으로부터 한반도일대에 걸쳐 분포해, 선주민의 신석기 문화뿐만 아니라 중국의 청동기문화와도 이질성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 주체인 주민 구성의 성격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써,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양식 생산 단계로 진입한 예맥족(濊貊族)이 선주민인 양식 채집 단계의 고아시아족을 흡수, 동화함으로써 나타난 주민과 문화의 교체 결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서기전 7∼6세기를 전후해 시작된 철기문화는 위만조선이 건국되던 서기전 2세기경에는 다양한 철제 무기와 농기구가 확대, 보급되어 전쟁수행 능력과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이것으로 보면 문헌 자료상 기자조선이 존재했던 서기전 12∼2세기의 기간은 바로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 계기적 발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주체는 양식 생산 단계에 있던 예맥족이었다.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설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이 기간 동안의 문화 복합체는 주민 구성에 따라 예맥조선(濊貊朝鮮)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정치 발전 단계상의 위치는 왕(王)·대부(大夫)·박사(博士) 같은 정치 조직과 범금팔조(犯禁八條) 같은 관습법의 존재로 볼 때 초기국가(初期國家, pristine state)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기자조선(예맥조선)의 문화가 비파형동검을 중심으로 한 청동기문화라는 사실은 대체로 공감되고 있지만, 비파형동검의 기원지 문제에 대해서는 요동설, 요서설 등으로 나뉘어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최근 비파형동검의 기원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지역 북부와 남부 러시아의 일원에서 전개되었던 훼도롭(Fedrov) 문화(종래 안드로노보 문화)의 파인형(波刃形) 청동검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한 새로운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자조선(예맥조선)의 문화 성격에 대해 기존 농경문화의 기반 위에 비파형동검과 함께 유입된 유목문화가 동화된 반농반목(半農半牧)적 사회 단계라고 보는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箕氏)가 아니라 한씨라고 할 수 있다.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한인(韓人)이 단군조선을 이어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