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8일 토요일

낙화암 , 落花岩. Nakhwaam. 백화정 , 百花亭.

낙화암 , 落岩.  Nakhwaam.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바위.


충남 부여군 부여읍 백마강변의 부소산에 있는 바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자 궁녀 3,000 명이 백마강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고 한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의 백제고기()에 따르면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백마강() 바위 위에서 투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다시 그곳 군수 홍한표()가 백화정()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위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백제 의자왕 때 당나라 군사가 침략했을 때 이곳에서 3,000 궁녀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는 바위로 꽃이 떨어진 바위라 하여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한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후궁이 궁녀로 와전되었고 이후 궁녀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이 많은 영주()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 등의 영주와 명신()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은 4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바위는 벼랑으로 되었고, 그 아래에 백마강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달아나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였다. 
이곡의 시에 "청구() 정기 모여 황하()에 응하니, 온왕()이 동명()의 집에 태어났네. 
부소산() 아래로 옮겨 나라 세우니 견고한 성곽이 하루아침에 와해되고, 천척 높은 바위 낙화()로 이름짓다."라고 노래하였다. 

『여지도서』에는 "낙화암은 관아의 북쪽 1리에 있다.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자, 
궁녀들이 급히 달아나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에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뜻으로 낙화암이라고 이름 했다."라고 적혀있다. 
『해동지도』(부여)의 현내면에 고란사, 부소산, 백마강과 함께 그 이름과 형세가 기록되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고을 북서쪽에 낙화암이 묘사되어 있다. 낙화암은 백마강 가에 묘사된 절경의 산지에 위치해 있으며 고란사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 앞을 흐르는 백마강에는 조룡대와 구암진()이 나타난다. 
낙화암은 반월성(), 대왕포(), 고란사, 삼충사() 등과 함께 8경에 속한다고 지도의 아래쪽 여백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현내면 고적명소에 낙화암이 있는데 부소산 뒤에 있으며, 백제 시대 궁녀들이 나라가 망한 것을 탄식하며 이 바위에 올라 강에 몸을 던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 [落花巖, Nakhwaam]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국토지리정보원)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백화정 , 百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扶餘邑) 쌍북리 금강(백마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부여군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부여 부소산성() 북쪽 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육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당시 궁녀 3천여 명이 이곳 절벽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백화정은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가 세운 것이다.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해 두었으며,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화무늬를 그려 놓았다.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주소: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대: 근대(1929)

용도: 기타건축-정자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백마강()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다시 그곳 군수 홍한표()가 백화정()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백화정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부여군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여 부소산성() 북쪽 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육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은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가 세운 것이다.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해 두었으며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화무늬를 그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