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8일 토요일

선화공주, 善花公主.

선화공주, 善花公主.


《삼국유사》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공주이며,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비(妃).

진평왕의 셋째 딸로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이를 연모()한 서동(), 즉 후일의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서동요()》를 지어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소문을 신라의 서울인 금성()에 퍼뜨렸다.


서동설화()의 여주인공. 생몰년 미상으로 일명 선화공주().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로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가 미모의 공주라는 소문을 들은 백제의 서동은 신라의 수도로 몰래 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어 환심을 사는 한편 선화공주가 자신과 더불어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내용의 모략적인 동요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결과 선화공주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백제의 서동( ; 뒤의 무왕())이 연정()을 품고 가까이 하려고, 두 사람이 남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금성(, 경주())에 퍼뜨렸다. 

이에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다가 도중에서 서동에게 구출되어 결혼,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다 한다. 


일설에는 무왕()이 아니고 모대( ; 동성왕())라고도 한다.



공주는 귀양가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던 서동을 알게 되어 그를 따라가 서동이 평소에 묻어 놓은 막대한 황금을 꺼내어 보이자 이를 신라 왕궁에 보내어 부왕의 노여움을 풀고 또한 자신들의 결합을 정식으로 승인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주 부부가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금의 수송을 의논하였던 바, 법사가 신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금을 신라 왕궁으로 운반하였다. 

이로써 서동은 진평왕의 환심을 사게 되었을 뿐만아니라, 본국 사람들의 인심을 또한 얻게 되어 마침내 백제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무왕이라 한다. 




백제 30대 무왕의 원래 이름은 장이다. 

그는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연못가에 있는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이를 낳았다고 한다. 

어릴 때 부터 그는 마를 캐다 팔아서 살림을 도왔는데, 그래서 모두들 그를 서동(마 캐는 아이)이라고 불렀다. 

서동은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어려운 생활을 겪었지만, 지혜로웠고 마음씨가 착해 다른 사람들을 늘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서동은 신라의 진평왕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주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떠났다. 

신라궁으로 들어가 먼발치에서 선화공주를 바라보니, 첫눈에 반할만큼 아름다웠다. 

그녀에게 푹 빠진 서동은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겠다고 결심하고 궁리를 했다.

하지만 국적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데다 수중에 가진 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서동은 포기하지 않고, 한 가지 꾀를 냈다. 

서동은 서라벌의 마을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져온 마를 나눠주며, 자기가 지은 동요를 가르쳐주고 따라 부르게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동요는 순식간에 서라벌 곳곳으로 퍼졌고, 마침내 궁의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몹시 노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고 말았다.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양길에 나선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향하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사내가 나타나 공주님을 모시고 가겠다면서 말고삐를 잡았다. 

선화공주는 그가 노래의 주인공인 서동일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모른 채 동행하기로 했다.

선화공주는 서동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둘은 마침내 사랑을 이루고 장래를 약속했다.  

서동은 자신이 한 행동을 밝혔고, 선화공주는 정말로 노래의 내용이 맞았다면서 기뻐했다. 

서동은 선화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돌아왔다. 

공주는 가난한 서동의 살림을 보고는 어머니가 몰래 싸준 황금을 서동 앞에 내놓았다. 

선화공주는 “어머니가 주신 황금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답니다.”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이것이 황금인 줄 알게 된 서동은, 자기가 마를 캐는 산에 황금이 널렸다고 하면서, 황금을 캐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황금은 어느새 산처럼 쌓이게 됐고, 두 사람은 이것을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에게 보내기로 했다. 
너무나 무겁고 많은 황금을 몰래 보내기는 어려운 일인지라 두 사람은 신통력 있다고 소문난 지명법사를 찾아갔다. 

공주는 황금과 함께 부모님에게 쓴 편지를 법사에게 맡겼고, 법사는 이것을 신통력을 이용해 신라 궁궐로 보냈다. 

이것을 받은 진평왕은 몹시 놀랐으며, 서동의 지혜와 도량에 매우 감탄했다. 

두 사람의 혼인을 인정함을 물론이고, 항상 안부를 물으면서 가까이 지냈다. 

이 일은 순식간에 나라 안팎으로 전해졌고, 서동은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까지 올랐으니, 바로 백제 30대왕 무왕이었다.




무왕부부는 뒤에 사자사로 가던 중 용화산 밑 큰 못가에 나타난 미륵삼존()의 영험에 따라서 이곳에 미륵사()를 지으니,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이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설화는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의 창건 연기()가 되어 있는데, 한편 이에 대하여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이병도()는 진평왕과 무왕 때의 신라 · 백제 두 나라의 관계는 원수 사이이므로, 이 같은 혼인이 성립될 수 없으며, 이는 어쩌면 493년에 있었던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 비지()의 딸과의 통혼사실을 가지고 만들어진 설화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선화공주는 이벌찬() 비지의 딸이 되는 셈이다. 

일본 학자 세키노()는 미륵사의 창건을 7세기 후반으로 내려보는 처지에서, 삼국통일 직후에 신라가 고구려 부흥운동군의 중심인물이었던 고구려의 왕족 안승()을 회유하여 신라 쪽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이곳에 보덕국()을 만들어 그를 국왕으로 삼고 문무왕의 여동생을 그의 아내로 삼았던 사실을 주목한 바 있다. 

최근 미륵사의 창건을 7세기 초, 즉 무왕 때일 것으로 보려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어서 이 설화가 가지는 역사성이 뜻밖에 높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마을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자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귀양을 보냈다. 

귀양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그녀를 구출해주고 두사람은 백제로 건너가 결혼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동은 법왕의 아들로서 후에 무왕이 되었고, 따라서 선화공주는 그의 왕비가 되었다. 

선화공주는 무왕에게 청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미륵사(:왕흥사라고도 함.)를 창건하였고 무왕과 사이에서 아들 의자()를 낳아 태자로 삼았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화공주에 대한 것이지만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제24대 동성왕()이었다는 설과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신라의 왕족인 이찬() 비지()의 딸이라는 설이있다. 

익산미륵사에 근거하여 선화공주는 익산지역을 지배하였던 지방 토호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백제는 지방호족이 강력하여 무왕이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이에 부여를 떠나 익산으로 천도하고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무덤이 선화공주의 묘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여러차례 도굴되어 확인할 수는 없다.

의자왕 , 義慈王.

의자왕 , 義慈王.

성은 부여()이며, 이름[]은 의자()이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다. 
왕권을 튼튼히 하고 신라를 공격해 영토를 넓혔지만,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잃었다.

백제의 제30대 무왕(, 재위 600∼641)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왕비에 관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에는 657년(의자왕 17)에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식읍()을 지급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자녀가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효심과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해동이란 바다 건너 동쪽에 있는 나라(백제)를 뜻하고, 증자는 남달리 효심이 뛰어났던 공자의 제자 이름이다.

의자왕은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형제 사이에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지요.
해동증자는 효를 강조했던 중국의 사상가 증자에 빗대어 부른 말이랍니다.

641년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의자왕은 백제의 부흥을 위해 애썼다. 
그는 지나치게 힘이 커진 귀족들을 쫓아내 왕권을 튼튼히 했고, 신라를 공격해 영토를 넓혔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지키던 대야성을 함락했는가 하면,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와 당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공격했다.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 서쪽에 있는 7개의 성과 한강 유역에 있는 30여 개의 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잦은 전쟁과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귀족들과 갈등을 빚으며 위기를 맞았다.
자신에게 바른말을 한 신하인 성충을 감옥에서 굶겨 죽이기도 했다. 

660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왔고, 백강 전투와 황산벌 전투에서 패하면서 순식간에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웅진성으로 피했던 의자왕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고 얼마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의자왕’ 하면 흔히 삼천 궁녀를 떠올리고, 의자왕의 사치나 방탕이 백제를 멸망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라고 알려졌다. 
이는 승리한 신라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멸망 원인은 신라와 당의 연합 세력에 비해 국력이 약했다거나, 권력 다툼으로 인한 지배층의 분열 등 여러 요인이 꼽히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의 왕자로 효(), 태(), 융(), 연(), 풍(), 궁(), 충승(), 충지()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니혼쇼키()》에는 ‘풍’의 이름이 ‘풍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충승’이 그의 형제가 아니라 숙부라고 되어 있다.


의자왕()은 632년(무왕 33) 태자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용감하고 대담했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에게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고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641년(무왕 42) 봄에 부왕인 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의자왕의 출생연도는 확인되지 않지만 1920년 중국 뤄양[]의 북망()에서 발견된 ‘부여융묘지석()’에는 그의 넷째아들인 융이 682년에 6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기준으로 추산하면 의자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적어도 40세는 넘은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 소리를 들었고,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이던 의자왕(?~660, 재위 641~660)이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는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대로 음란과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났던 것인가.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서동요’로 널리 알려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로맨스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했다.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인가?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이유가 외가가 적국인 신라이기 때문이고, 유난히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한 것이 그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서는 진평왕의 딸로 천명과 덕만 두 명의 이름만 기록했을 뿐 선화공주의 존재에 대해 언급해놓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선화공주라는 인물은 존재했으나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 지역 유력한 호족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 존재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된 것은 632년(무왕 33년)의 일이다. 
정확한 출생년도가 전하지 않지만 아들의 나이로 추정해보건대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에 대한 내부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견제 속에서 무사히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행실을 반듯하게 해 좋은 평판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백제 멸망에 얽힌 이야기.

의자왕(641~660)은 백제 제31대 왕이며 의자왕과 같은 부여씨인 성충·윤충 형제는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의 문신이자 무장이다.

의자왕은 즉위 초 신라의 40여개 성을 공략하는 등 의욕적인 대외활동과 왕권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점차 주색에 빠져 정사가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변방의 일은 윤충장군이, 조정은 상좌평인 성충이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라는 의자왕의 말에서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그때를 노리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유신이다. 
그는 백제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 성충과 윤충 형제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유신은 백제의 좌평 임간을 포섭하여 신라 출신 미녀를 의자왕의 후궁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한다.


어느 날 신라 출신 후궁이 의자왕에게 “어젯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상한 점괘를 내려주었습니다. 
충신 두 명을 죽이지 않으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하니 그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왕은 이 말을 가볍게 들었으나, 얼마 뒤 좌평 임간이 “요즘 나라 사람들의 인심이 온통 상좌평 성충과 대장군 윤충 형제에게로 쏠려 있습니다. 
상좌평은 국정을 총괄하고 있고 대장군은 병권을 쥐고 있으니 이들 형제가 언제든지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왕은 먼저 변방을 지키던 윤충을 파직시켰다. 
윤충은 분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았다.

성충은 이에 아랑곳없이 “대왕께서는 근래 유흥이 잦으십니다. 
지금 신라군은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정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등 계속 왕에게 직언을 했다. 

성충으로서는 나라를 생각해 용기있게 건넨 발언이었으나 의자왕은 더 이상 그런 성충의 직언을 듣고 싶지 않아 불충죄로 그를 감옥에 가두고, 그를 옹호하던 흥수마저 귀양보내버렸다. 

성충은 “살아서 내 두 눈으로 백제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단식을 하며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법이니, 신이 감히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육군은 탄현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를 넘어오기 전에 막아야만 할 것입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죽고 말았다.


이로부터 4년 뒤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맞았는데,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는 기벌포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탄현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의자왕은 신하들과 논의를 했으나 뾰족한 방법 없어서 귀양간 흥수에게 사신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흥수는 성충과 같은 의견을 말했으나 신하들은 “죄인의 몸으로 바른 소리를 할 리가 없다”면서 묵살되고 말았다.


당나라 수군이 기벌포를 넘어 사비성을 공격해 들어오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황산벌의 계백장군이 졌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이를 들은 의자왕은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라고 후회하며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도망쳤다. 

결국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 항복을 하고, 8월 2일 사비성에서 “행주()의 예”를 행했다. 
이 행사는 백제왕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멀리서 온 당나라군과 신라군에게 사죄하며 술을 따라 올리는 행사였다.

“행주의 예”가 끝난 뒤 의자왕과 왕자들을 비롯한 인질 천 여 명은 당으로 끌려갔으며, 의자왕은 당나라에 압송된 지 며칠 만에 병으로 죽어 당나라에 묻혔다.

[삼국사기]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그때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까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당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흠잡을 데 없는 평판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했다는 인물이다.

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세한 내막은 전하지 않지만 태자 책봉이 늦었던 원인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국내를 순무하며 죄수의 정상을 기록하여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진 뒤, 외부적으로는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바로 다음달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뜨렸다.

문제는 대야성의 성주 품석이 김춘추의 사위이고, 이 싸움의 와중에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죽었다는 데 있었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 

그러고는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며 벽제 멸망에 온 힘을 쏟기로 결심했다고 전한다.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한다. 
비록 당이 김춘추의 설득에 신라와 군사 연합을 맺었지만, 이전까지 백제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을 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재위 3년인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했다. 
당항성은 신라와 당나라의 해로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였다. 
당항성이 공격 당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고, 그것을 안 의자왕은 곧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듬해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등 국제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의 군사를 징벌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 신라의 일곱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탁월했다. 
의자왕 집권 전반기 백제와 신라는 곳곳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분명 백제에게 있었다.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의 치세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해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듬해 왕이 궁인들과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657년(의자왕 17년)에는 왕이 아들 마흔한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기 식읍을 내려주기도 했다. 

이렇듯 의자왕의 치세가 흐트러진 이유에 대해서는, 은고라는 여인이 의자왕의 마음과 함께 권력을 거머쥐면서 벌어진 전횡이라는 주장도 있고, 권력 기반을 다진 의자왕이 외형적으로 안정된 왕권에 안심하여 긴장감이 풀어진 데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이 무렵의 기록들에서는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다든가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든가 하는 흉흉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법, 신라에게는 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필요했고 특히나 백제 말의 역사는 그렇게 각색되었을 것이다. 

의자왕의 왕권강화에 귀족층들이 반발하고 이로 인해 백제 지배층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하고, 성충이 투옥되고, 좌평 흥수가 귀양간 것이 모두 그 즈음의 일이다.


백제가 이러한 분열을 겪고 있을 무렵 나당연합군이 침입했다. 
13만 대군을 이끈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물도에 정박했고,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백제의 동부 전선을 빠른 속도로 돌파했다.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공격에 백제의 조정은 대책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에 맞서게 했다. 
백제군은 열 배가 되는 적들과 만나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후 당나라 군사까지 사비성에 들이닥치자 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 변읍으로 달아났다.

이때 달아난 곳이 웅진성이었고, 이곳은 선왕인 무왕 때 임시 수도로 쓰이기도 했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게다가 가까이 임존성이 있어 두 성이 서로 지원하며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듯하다. 
실제로 임존성은 백제 멸망 후 부흥 세력들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3년간이나 지켜낸 성이기도 하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들어가 지방군을 모으고 적들이 차지한 사비성을 되찾으려 했을 것이다. 
웅진성으로 들어간 지 닷새 만에, 특별히 적들이 공격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의자왕은 항복을 하고 만다. 
그 닷새 동안 웅진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8년 의자왕의 마지막에 대한 단서를 주는 유물 하나가 발견되어 역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 북망산에서 예식진이라는 사람의 무덤과 묘비가 출토된 것이다. 
그는 당나라 좌위위 대장군에 오른 사람으로 백제 웅진 출신이라고 묘비에 기록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좌평을 지냈던 백제의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인데 우리 역사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구당서] ‘소정방’ 편에서 다시 그 이름을 찾아냈다.
 ”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려와서 항복했다.
여기서 예식은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당나라에 항복한 주체가 의자왕이 아니라 예식이라는 말이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전하는 백제 멸망 과정과도 이어진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




이 두 기록은 의자왕이 스스로 당나라에게 항복했던 것이 아니라,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했음을 증언한다. 

의자왕이 예식진이 지키고 있는 웅진성으로 들어왔는데,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에 항복했다는 말이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은 뒤, 태자 효, 왕자 융∙연 및 대신과 장병, 그리고 백성 1만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700년 역사의 백제는 이렇게 무너지고, 의자왕은 망국의 주범이 되었다.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기는 어렵지만, 의자왕은 유독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가 전하지 않고, 백제와 적대관계였던 신라에 흡수 통합된 뒤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모습이기에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왜곡의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중기 시인이었던 민제인의 [백마강부]라는 시에서 ‘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을 처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문인들이 문학적 상징어로 이해해야 한다. 
이후 지금까지 대중가요에 삼천궁녀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수십 곡 불리면서 의자왕은 3,000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왕으로 왜곡되었다. 
삼천궁녀는 방탕했던 호색 군자라는 의자왕의 이미지를 완성시킨 후대인들의 상상력일 뿐...



의자왕 본문 이미지 1

 의자왕 [義慈王]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