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9일 수요일

금산과 보리암

금산과 보리암

신선의 섬, 일점선도()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남해섬이 간직한 최고의 경승지는 누가 뭐래도 금산()이다. 
금산은 해발 701m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조물주의 조각 작품 같은 기암괴석이 산의 이곳저곳을 꾸미고 그 주변에 울창한 난대림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금강산에 견주어 ‘소금강산’이라 불려왔다.
남해 금산
남해 금산금산 입구 주차장에서 바라본 금산 전경이다. 금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난대림이 울창하게 어우러져 예로부터 금강산에 견주어 소금강산이라 불렸다.
의젓하게 우뚝 서 있거나 바다 쪽을 지긋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갖가지 신비로운 이미지를 자아내는 바위들에 이름을 붙인 금산 38경도 좋지만, 산 정상께에 있는 보리암과 능선길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의 경치가 그만이다. 
바다에 깔리는 안개나 산중턱에 걸리는 구름 때문에 온전한 형체를 고스란히 보기는 어렵지만, 햇살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다양한 빛깔을 띠는 바다와 함께 그 위에 떠 있는 수많은 섬들이 그려내는 다도해 풍광의 적요로운 느낌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금산은 남해에서는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산과 보리암 답사는 복곡저수지 매표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보리암에 닿은 뒤 보리암과 금산을 둘러보고 상주해수욕장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가장 빠르고 쉽다.

‘비단 산’이라는 예쁜 이름의 금산은 본래 보광산이었다고 한다. 
이 보광산이 금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천운의 뜻을 품고서 백두산에 들어갔는데 산신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두번째로 지리산에 들어갔으나 산신이 받아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남해섬 보광산에 들어와 백일기도를 올리고서야 비로소 왕조 창업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보광산에 은혜를 갚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려 했지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한 신하가 “비단으로 산을 감싸기는 나라 경제가 허락하지 않고 영원한 기념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이름을 비단 산[]으로 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자, 태조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보광산의 이름을 금산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금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은 보리암()은 신라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 이름은 보광사였는데 현종 원년(1660) 절을 왕실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오래된 역사와 절경을 품고 있는 보리암이지만 비좁은 경내에는 이렇다 할 문화재가 없다. 
절 아래쪽 탑대에 고려 초기에 조성된 삼층석탑과 불기 2514년(1970)에 세운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보리암 전경남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보리암은 신라 때 원효대사가 처음 창건했다고 전한다. 양양의 낙산사, 강화의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 뒤로 우뚝 솟은 바위는 금산 38경의 하나인 대장봉이다.
삼층석탑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원효대사가 모셔와 이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 전해온다. 
전설과는 달리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단층기단 위에 놓인 탑신 세 층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상륜부에는 구슬 모양의 보주가 놓여 있다. 
삼층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다.
보리암 삼층석탑
보리암 삼층석탑원효대사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모셔와 세웠다고 전하지만, 전하는 말과는 달리 탑의 모습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삼층석탑과 한 영역에 어우러져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은 보리암의 근래 명물이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관음보살상, 강화도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함께 치성을 드리면 효험을 보는 3대 해수관음보살상으로 손꼽혀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탑대에 앉아 바다를 등지고 보리암 주변을 둘러보면 가장 높은 대장봉에서부터 왼편으로 형리암·농주암·화엄봉·일월봉·제석봉·상사바위 등이 차례로 보인다. 
삼불암은 탑대 오른편으로 건너다보이는 바위이다. 
극락전 아래쪽 대나무 숲길을 따라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가면 나오는 삼불암의 아래쪽에는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뒤 등극했다는 전설이 깃든 이태조기단이 있다.

보리암 뒤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금산 정상이다.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하늘 아래인 이곳엔, 우선 덩치 큰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망대라고도 불리는 봉수대이다.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변방에 적이 침입했음을 중앙에 알리는 군사 통신시설이다. 
평상시는 연기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가까이 접근하면 셋, 침공하면 넷, 접전시에는 다섯으로 긴급히 연락하였으며, 만약 봉수대에 불이 지펴지지 않거나 구름이나 바람 때문에 연기나 점화가 여의치 않으면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직접 뛰어가서 연락해야 했다.

금산 봉수대
금산 정상에 있는 군사 통신시설로 망대라고도 부른다. 
금산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변방에 적이 침입했음을 알리는 역할을 했는데 맑은 날에 봉수대 위에 서면 남쪽 남해 바다는 물론 북쪽 지리산까지 사방이 한눈에 보인다.


봉수는 동서양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대략 수십 리마다 살피기 좋은 요지의 산꼭대기에 이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이 많고, 신속한 교통이나 통신제도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봉수는 매우 효과적인 통신수단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봉수는 더욱 발전되고 정비된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봉수에 관한 법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마련되었다. 
봉수가 폐지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이다.

조선시대 봉수망은 전국에 다섯 개가 있었으며, 국경지방의 연대에서 경봉수대인 서울 남산(목멱산) 봉수대까지는 7시간 정도(1시간당 약 110㎞)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세가 험악하고 지형이 고르지 못한 길로 뛰어가서 전하는 치보()가 1개월 정도 걸렸을 것으로 보면 봉수는 당시 퍽 신속한 통신수단이었던 셈이다.

금산 봉수대는 고려 명종 때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높이 3.5m 둘레 56m 폭 8m 되는 장방형의 돌담으로 작지 않은 규모이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금산 봉수대에서 피워올린 연기는 동쪽으로는 창선면 대방산 봉수대를 거쳐서 제2선인 진주로 연결되었으며, 서쪽으로는 남면 홍현리의 설흘산 봉수대를 거쳐 제5선인 여수 돌산도로, 북쪽으로는 이동면 원산 봉수대로 연결되었다. 
이 금산 봉수는 제2선인 동래 노선에 속하여 사천·진주·단성·합천·금산(추풍령)·영동·옥천·회덕·청주·진천·충주·죽산·용인·광주를 거쳐 서울 남산(목멱산)에 닿았다고 한다

금산에선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한려수도를 한눈에 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맑은 날 봉수대에서 보면 멀리 북쪽으로 지리산, 동으로 사천, 남으로 상주 쪽 남해 바다, 서쪽으로 여수까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봉수대에 망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 만하다.

봉수대 바로 아래쪽 등산 길목에는 유난히 큰 바위가 눈에 띈다. 
바위 가운데에 ‘ ’(홍문이 있으므로 금산에 오르다)이라는 글씨가 힘차게 각인돼 있다.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주세붕이 쓴 것이라 하며, 이 때문에 문장암이라 불린다.
문장암의 암각글씨
문장암의 암각글씨조선 중종 때 학자인 주세붕이 쓴 것이라 한다. 이 글씨 때문에 문장암이라 불린다.

보리암이라는 암자와 가까운 남해금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보리암전삼층석탑'이라 불리고 있는 3층 석탑으로,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더욱 유명해졌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아래층에 비해 폭이 크게 줄었다.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네 귀퉁이로 갈수록 두툼해지면서 위로 솟았다.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구슬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허태후(김수로의 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 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금산의 정상까지 오른 뒤 다시 보리암으로 해서 한려수도를 굽어보면서 등산길을 따라 하산하면 반달 모양의 포구를 이루는 상주해수욕장이 나온다. 
상주해수욕장은 금산을 배경으로 한 절경을 갖춘 남해 제일의 경승지이다. 
모래알이 곱고 수심이 얕으며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 가족 단위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하산길, 보리암 바로 아래에는 마치 두 눈이 크게 뚫린 해골 또는 쌍안경같이 생긴 쌍굴이 있다. 


보리암의 관문처럼 여겨지는 쌍홍문이다. 
절묘하게 생긴 쌍굴 안에 서면 상주해수욕장과 남해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는 세존도가 손끝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옛날 부처님이 금산에서 돌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로 나갈 때 쌍홍문의 오른쪽 굴로 나가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데, 세존도 한복판에는 마치 커다란 원을 그려 뚫은 듯한 해상동굴이 있다.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현: 상주면 상주리)에 있다. 
가천 암수바위가 있는 홍현리 가천마을에서 다시 앵강곡삼거리로 되돌아나와 오른쪽 상주·미조로 난 19번 국도를 따라 800m 가면 길 왼쪽에 보리암 표지판과 함께 금산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2.6㎞ 가면 복곡 제1주차장과 매표소에 닿고, 매표소를 지나 3.3㎞ 더 산을 오르면 제2주차장에 닿는다. 
제2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는 약 1㎞ 정도 걸어가야 한다. 
승용차는 제2주차장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제1주차장에 주차해야 하며 제2주차장까지는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 걸어 올라가야 한다.

금산 보리암으로 오르는 또 다른 길은, 앵강곡삼거리에서 상주·미조로 난 19번 국도를 따라 9.8㎞ 가면 길 왼쪽에 금산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2시간 30분쯤 산을 오르면 쌍홍문을 거쳐 보리암에 닿는다. 
앵강곡삼거리에서 복곡 제1주차장까지 가는 도중에는 숙식할 곳이 간간이 있다. 금산 입구 주차장 주변에도 숙식할 곳이 몇 곳 있다. 
남해읍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약 1시간 간격으로 상주·미조행 버스가 다니는데 복곡저수지 입구에서 내려 복곡 제1주차장까지 걸어가거나 더 가서 금산 입구 주차장에서 내린다.

남해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南海 菩提庵 木造觀音菩薩坐像 佛龕)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상주리 2065, 
보리암에 있는 불화이다. 
2015년 1월 15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575호로 지정되었다.


사유

남해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은 독립적인 관음보살상과 선재동자, 용왕이 협시한 불감형식의 작품이다. 현재 불감의 윗부분은 없어졌고 남아 있는 형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형식은 서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불감(1637-1644년)을 시작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 까지 유행하였다.
관음보살상은 통통한 뺨, 보발이 없는 점, 대칭적인 연판, 양 측면에 늘어진 옷자락 등에서 조선전기적 특징을 계승한 조선후기 17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용왕과 선재동자가 협시한 관음보살 삼존의 도상적 특징을 지닌 점과 사례가 적은 목조불감 형식, 17세기로 추정되는 제작시기 등 자료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불상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금산과 보리암 지도


금산과 보리암
금산과 보리암


**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보리암 , 菩提庵.

보리암 , 菩提庵.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尙州面) 상주리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있는 절.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시기


683년(신문왕 3)


창건자


원효


소재지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683년(신문왕 3) 원효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라 지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 보광전, 간성각,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고, 문화재로는 보리암전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74)이 있다. 


이외에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으며 그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관세음보살상은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1660년(현종 1) 왕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이라고 바꾸었다.




1901년과 1954년에 중수하였고, 1969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강원문화재자료 36), 강화군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금산에 있는 사찰로 683년(신문왕 3)에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에 감사하여 1660년(현종 1)에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다.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군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보리암에서 내려다보는 남해의 절경때문에 관광자원으로도 매우 훌륭한 사찰이다.




남해 보리암 해수관음상



남해 보리암 종각



남해 보리암 존광전



남해 보리암 만불전



남해 보리암 3층석탑



남해 보리암


남해 보리암 해수관음상 남해 보리암의 해수관음상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尙州面) 상주리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있는 절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강원문화재자료 36), 강화군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하동 동쪽에 자리한 남해(南海)는 본래 바다 가운데 있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함께 솔밭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 




이 고을은 하늘 남쪽에 있는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海産)의 풍족함과 토산(土産)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필수가 된다.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또한 기대할 수 있다.




정이오의 기문에 위와 같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남해는 뭍에서나 바다에서나 모든 물산이 풍부해서 왜구의 침략만 없다면 사람들이 살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해로 건너가는 노량 바다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진 것은 1598년이었다. 




11월 19일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 에 나아가 손수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려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날 그가 이끌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 150여 척은 왜선 500여 척을 불사르거나 바다 밑으로 가라앉혔다. 




이순신은 왜구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나이 54세였다.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의 시신은 노량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포에 며칠 동안 모셔졌다가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질 때까지 3개월가량 노량나루(지금의 충렬사)에 가매장되었다. 




그때부터 관음포는 ‘이(李) 충무공의 목숨이 이곳에서 떨어졌다’ 하여 이락포(李落浦)라 불렸고, 그 뒷산도 이락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의 시신이 묻혔던 자리에 빈 봉분을 만들고 충렬사를 지었으며, 1973년 사적 제233호로 지정하였다.






남해는 고려 때부터 유배지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초기에 안평대군, 한석봉, 양사언과 함께 4대 서예가로 알려진 자암(自菴) 김구는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를 와서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을 남겼고(화전은 남해의 옛 이름), 조선 영조 때 사람인 유의양은 1년 남짓한 유배 기간에 한글로 남해의 풍물을 묘사한 『남해견문록(南海見聞錄)』을 남겼다.




무학산과 마산


남해에서 1킬로미터쯤 배를 타고 건너면 닿는 자그마한 섬 노도로 유배를 왔던 사람이 서포 김만중이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자이자 김집의 손자인 그는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김만중은 이듬해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헌납(獻納), 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고, 이때 『서포만필』을 지었다.




김만중은 “사람의 마음은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이 절주(節奏, 리듬)를 가지면 문학 작품이 된다”라고 하면서 조선 사대부들의 중국 문화 추종과 한문학 모방을 질타하였다.




우리나라 시문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므로 설사 십분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하는 짓이다. 




일반 백성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아아” 하면서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다고 하지만, 만일 진실과 거짓을 따진다면 참으로 학사, 대부의 이른바 시(詩)니, 부(賦)니 하는 것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그는 이듬해에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 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에 속하였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 초에 시작된 예송논쟁에 뒤이어 경신환국, 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김만중은 많은 시문과 잡록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의 소설을 지었다. 




『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쓰인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노도와 가까운 양아리의 두모와 두모리 사이에 있는 바위를 서불제라고 부른다. 




앞면에 화상문자(畵象文字, 한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문자)로 글을 새겨놓았는데, 전설에 진시황에게서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서복(서불)이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가던 중 이곳 명지를 지나다가 자신의 자취를 후세에 알리고자 기록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가 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화상문자라고 하며, 고고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73년에 남해군 설천면 모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노량해협을 잇는 남해대교가 완공되면서 남해군은 섬 아닌 섬이 되었다. 




남해군에 자리한 금산에 보리암이 있다.     



푸른 바다와 수많은 돌들이 섞이고 섞여 조화를 이루는 금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사천시에 속한 삼천포에 이른다. 




3번 국도가 시작되는 삼천포는 사람들에게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속담으로 더 알려졌지만, 한번 가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빠져 다시 가고 또 가는 곳이다.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싱싱한 회를 맛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삼천포는 남해를 잇는 다리의 개통으로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형승」조에 “남쪽 끝의 요충이다. 굽어보면 기름진 들녘이 펼쳐지며 여러 산봉우리가 아름답다. 




이구산(尼邱山)이 우뚝 솟아 있으며 사수(泗水)가 가로질러 흐른다. 




와룡산이 웅장하게 서려 있고 드넓은 바다가 아득히 펼쳐진다”라고 쓰여 있는 사천은 와룡산, 봉암산, 향노봉 등의 산들이 연달아 있고 향노봉 자락에 운흥사라는 옛 절을 안고 있다. 








사천군 곤명면 조장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숨지거나 다친 역사적 상처가 남아 있다.




이곳 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와룡산 자락에 다솔사(多率寺)라는 큰 절이 있다.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여기기 쉬운 다솔사는 한자 이름대로라면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소나무 숲과 측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다솔사로 가는 길은 한적하지만,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 길처럼 운치가 있다. 




이 절은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창건한 뒤 영악사라고 하였는데, 성덕왕 5년에 다솔사라 고쳤고,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스님이 영봉사라고 고쳤다가,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다시 다솔사라고 고쳤다. 

1326년에 나옹스님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 효익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숙종 때 복원하였다.








다솔사

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와룡산 자락에 다솔사(多率寺)라는 큰 절이 있다. 


한자 이름대로라면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재건한 것이다. 


현존하는 절 건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와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 요사채 등 10여 채가 있다. 




대양루(大陽樓)는 1749년(영조 25)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지붕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다. 


1978년 2월 8일에 대웅전 삼존불상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할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나와 적멸보궁으로 증개축한 후 불사리를 그 곳에 모셨다. 


적멸보궁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의 모습인 와불상을 모셨다.




응진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고 스님인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수도하였던 곳이고, 소설가 김동리가 머물면서 소설 『등신불』을 쓴 곳이기도 하며, 또한 김법린, 최범술, 김범부 등이 은거하며 독립 운동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다솔사 근처에서는 차나무(죽로차)가 재배되는데,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명차다.




다솔사에 딸린 보안암은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석굴 암자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굴의 외형은 판상의 사암질 활석을 단층식으로 쌓아올린 분묘 형태이며, 평면은 방형이다. 




석굴 입구에는 미륵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목조전실을 지나서 2미터 정도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석실이 나온다. 






중앙에 장대석을 대좌로 하여 결가부좌한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본존의 뒤쪽 좌우에는 각 8구의 석조나한좌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석굴은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주 석굴암과 군위 삼존석굴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삼천포대교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과 모개섬 사이에 놓여 삼천포와 남해를 잇는 삼천포대교. 다리를 건너다보면 다도해가 그림처럼 눈앞으로 펼쳐져 보인다.




곤양군 금양면에 속하였던 노량리는 남해군 설천면에 인접한 바다의 목인데, 노들 또는 노량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동군 금양면에 편입되었다가 금남면에 속하게 된 노량은 400여 년 전에 이루어진 마을로, 한양에서 이곳으로 귀양 오는 선비들에게는 노량 앞바다의 물결이 마치 이슬방울이 모여서 다리(교량)를 이룬 것처럼 보여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해서 ‘노량’이라 부르게 되었다.




석상 있는 옛터엔 봄풀만 무성한데,


와룡산 빛이 아직도 수심을 머금었네.




김영원의 시 한 편이 서려 있는 사천 옆으로 고성이 있다.








복곡저수지 안쪽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안쪽에서 보리암 올라가는 마을버스(셔틀버스)를 탄다. 


보리암 약 1km 전까지 올라간다. 


버스에서 내려 넓은 길을 걷는다. 


어느 정도 걸으면서 길 왼쪽으로 시야가 트인다. 


바다와 섬은 물론 초록의 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 길을 걸어 도착한 보리암은 절벽에 둥지를 튼 제비집 같다.


 이미지 1


금산 절벽에 있는 암자 보리암

보리암이 있는 산이 금산이다. 


금산이라고 불리기 전 이름이 보광산이었다.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이름 없는 산에 보광사라는 절을 지으며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했다. 


칠백여 년이 지난 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무렵 보광산에서 새 나라를 열기 위한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그는 새 나라의 문이 열리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했다. 


그의 뜻대로 새 나라를 세웠지만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산 이름에 ‘비단 금’자를 넣어 금산이라고 바꾸어 부르게 됐던 것이다. 


일설에는 금산이라는 이름은 1600년대 중후반부터 쓰기 시작했고 그 무렵 보리암이라는 이름도 생겼다고 전해진다.


보리암 전 3층석탑

금산의 절벽에 자리잡은 보리암은 절이 위치한 곳 자체도 볼만하지만 절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좋다. 


하나 보리암 전 3층석탑을 봐야 한다. 


이 탑은 683년에 원효대사가 금산에 절을 지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탑의 양식이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탑의 재질 또한 화강암이기 때문에 전설의 신빙성은 희박하다.


보리암 창건설 중 또 다른 하나는 보조국사 지눌이 지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보리암과 탑이 있는 곳 등 풍경 하나는 볼만 하다. 


암자와 탑을 구경하고 다시 암자를 지나 금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한다.




금산 정상 아래 바위군락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 보리암 지붕과 저 멀리 상주해수욕장이 한 눈에 보인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다. 


나무계단길도 있고 바위와 돌로 된 구간도 있다. 


오르막이 가파르지만 정상까지 약 300~400m 정도 거리이므로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걸으면 된다. 


정상은 해발 701m인데 정상 부근에 거대한 바위군락이 있다. 


정상부근 거대한 바위에는 한자로 된 글이 적혀 있다. 


큰 바위 두 개가 작은 틈을 두고 서 있는데 그곳이 금산 정상으로 오르는 문 같았다.


낭떠러지 같은 바위 위에 오르니 보리암 기와가 눈 아래 밟힌다. 


숲과 기와지붕은 언제나 봐도 ‘조화’라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이루는 환상의 궁합이다. 




절집 뒤로 벼락같은 바위가 서 있어 게으른 수행자의 어깨를 죽비로 후려치는 것 같다.


절집 앞은 푸른 숲의 바다다. 


수행 정진의 끝에 이르는 해탈의 바다가 저 숲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숲이 끝나는 곳에서 사람 사는 마을이 낮게 엎드려 있다. 


상주해수욕장이 있는 바닷가 마을이다. 


해수욕장 앞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다. 


안개인지 연무인지 모를 것들이 ‘섬 기슭’을 둘러싸고 있다. 


안개의 바다에 뜬 환상의 섬, 섬들은 그렇게 바다에 놓여 있었다.


드디어 정상이다. 




정상에는 돌로 망대를 쌓아 놓았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또 달랐다. 


지나왔던 길이 초록숲 사이에 실처럼 이어진다. 


초록빛 숲의 바다가 끝나면서 진짜 바다가 시작된다. 


바다에는 섬들이 떠 있다. 




그 모든 풍경이 한 데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한다.




남해 금산


남해 금산은 보리암이 있어 더 유명하다. 


보리암 약 1km 전까지 마을버스(셔틀버스)가 운행한다.(1000원) 


버스에서 내려 넓은 길을 따라 보리암까지 갔다가 보리암을 보고 정상(망대)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마을버스(셔틀버스) 내린 곳으로 가서 마을버스(셔틀버스)를 타고 아래 주차장까지 내려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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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_남해 금산은 보리암이 있어 더 유명하다. 보리암 약 1km 전까지 마을버스(셔틀버스)가 운행한다.(1000원) 버스에서 내려 넓은 길을 따라 보리암까지 갔다가 보리암을 보고 정상(망대)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마을버스(셔틀버스) 내린 곳으로 가서 마을버스(셔틀버스)를 타고 아래 주차장까지 내려가면 된다.바위산_금산은 바위산이다. 산 능선 바위가 아찔해 보인다.금산의 바위 절벽_마침 새 한 마리가 바위산을 맴돌고 있었다.바다와 섬_마을버스(셔틀버스) 내린 곳에서 보리암까지 가는 길 왼쪽 편으로 바다와 섬들이 보인다. 저 아래 상주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녹색의 바다_숲은 녹색의 바다를 이루고 그 숲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바다가 시작 된다.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진다.보리암_암자가 절벽에 붙어 있는 제비집 같다는 생각도 든다.보리암 전 삼층석탑_683년 원효대사가 금산에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탑의 양식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탑에 얽힌 이야기의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다음 이미지목지역정보


가는 길


자가용


호남고속도로를 통해 남해고속도로로 오는 사람은 하동ic에서 남해 쪽으로 빠져 남해대교를 건넌다. 


대전통영고속도로 쪽으로 오면 남해고속도로 사천ic로 나와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넌다. 


이동면소재지를 지나 신전삼거리에서 좌회전 한 뒤 약 700m~800m 정도 가다가 복곡저수지 쪽으로 좌회전해서 저수지를 지나 더 들어가면 된다.


저수지 부근에 있는 주차장이 제1주차장이고 보리암 전 약 1km 정도에 있는 주차장이 제2주차장인데 제2주차장이 성수기 등 다양한 이유로 만차가 됐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가용도 제2주차장까지 올라갈 수 있다.


대중교통


서울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해까지 가는 버스가 08:00, 09:00, 10:10, 11:30, 13:00, 14:10, 15:10, 16:40, 18:00, 19:30에 출발.

(차시간은 변경될 수 있으니 확인 필수)


서울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진주 행 버스를 탄 뒤 진주에서 남해 가는 차를 갈아타면 된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진주까지 가는 버스는 오전 6시부터 15분~30분 간격으로 1대씩 있으며 22:10, 23:10, 23:35, 00:10시에

(차시간은 변경될 수 있으니 확인 필수) 심야버스도 운행한다. 


진주에서 남해 가는 시외버스는 하루에 약 30대 정도 있다.


남해에서 금산 보리암까지 가려면 복곡저수지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복곡저수지에서 내린다.(오전 8시 오후 5시 10분 두 대 밖에 없다.) 


상주․미조행 군내버스를 타고 복곡저수지 입구 삼거리에서 내려(차 탈 때 복곡저수지 입구 삼거리 하차 여부를 물어보고 내려달라고 한다.) 


복곡저수지까지 약 2.5km 정도 걸어야 한다.


복곡저수지 주차장 안쪽에서 보리암 가는 마을버스(셔틀버스)를 타고 보리암 전 약 1km 지점에 있는 종점에서 내린다. 

1인당 1000원이다.






먹을거리남해에는 멸치가 유명하다. 


지족마을 창선교 부근이나 미조항 일대에서 멸치회나 멸치쌈밥을 하는 집이 있다. 


미조항 부근에는 갈치요리를 하는 집도 많다..






숙박남면 쪽이라면 다랭이마을 안에 있는 민박집을 권한다. 


모텔이나 호텔 같은 곳은 아니지만 옛날 한옥의 운치도 즐길 수 있다. 


말만 잘 하면 부엌에서 조리도 할 수 있다.


삼동면에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이 있다. 


산림청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예약해야 한다. 


전화예약은 안 된다. 


매주 화요일은 쉰다.


(7~8월 제외). 문의 055-867-7881.






주변볼거리상주해수욕장 - 금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다보면 상주해수욕장이 보인다. 은빛 고운 모래와 넓은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 : 봄, 가을


주소 :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총소요시간 : 1시간


총거리 : 왕복 2.4km


준비물 : 물 한병, 편안한 신발.


요금 : 복곡저수지 주차장 주차요금 4000원, 보리암 입장료 1000원, 복곡저수지 주차장에서 보리암 약 1km 전에 있는 주차장까지 운행하는 마을버스 1000원.


봄철 산불조심기간 2월 1일~4월 30일에는 금산 등산로 일부 구간이 통제 되니 문의 후 산행 요망.






문의 : 한려해상국립공원 055-863-3522




산길을 걸으면서 남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길이다. 


숲이 만든 초록색 물결도 보기 좋고 멀리 바다와 섬이 만들어 내는 풍경도 멋지다. 


셔틀버스를 타고 보리암 1km 정도 전까지 올라갈 수 있다. 


보리암을 돌아보고 정상(망대)에 올라 경치를 구경한 다음 다시 셔틀버스 내린 곳으로 돌아가는 코스다. 


보리암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에 오르막이 있지만 구간이 짧다.






남해를 굽어보는 산


종목


명승 제39호


명칭


남해 금산 (南海 錦山)


분류


자연유산 / 명승 / 자연명승


지정(등록)일


2008년 5월 2일


소재지


경남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91, 등 (상주리)


면적


559,782m2(지정구역)


관리자(단체)




『남해 금산』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사찰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금산은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자웅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南嶽)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산’ 혹은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산이 작은 봉래산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명산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이라는 점에서 유람객에게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남산은 다도해에서 유일한 큰 체적의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 성격이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판을 보는 듯하며 대규모의 낙엽수림이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아낸다.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다갔다는 서불의 이야기가 담긴 ‘서불과차암’과 춘·추분 때만 볼 수 있다는 노인성(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 老人星 또는 壽星)과 관련된 전설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며, 전국의 3대 기도도량인 보리암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명승지이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 2일 명승 제39호로 승격되었다. 


높이는 681m이다. 


원래는 신라의 원효(元曉)가 이 산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세웠던 데서 보광산이라 하였는데, 고려 후기 이성계(李成桂)가 이 산에서 100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한 그 영험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 해서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기암괴석들로 뒤덮여 있다. 


주봉(主峰)인 망대를 중심으로 왼쪽에 문장봉·대장봉·형사암, 오른쪽에 삼불암·천구암 등의 암봉(巖峰)이 솟아 있다.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비롯하여, 삼사기단(三師祈壇)·쌍룡문(雙龍門)·문장암(文章岩)·사자암(獅子岩)·촉대봉(燭臺峰)·향로봉(香爐峰) 음성굴(音聲窟) 등 금산 38경을 이루는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그리고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와의 절묘한 조화는 명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산 정상에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기도처의 하나이자 쌍계사의 말사(末寺)인 보리암이 있고 그 밑에는 1977년에 해수관음보살상이 바다를 향해 세워졌다.


이동면 복곡 입구에서 금산 8부 능선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인근에 상주해수욕장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상기내용은 차이가 있을수있으니 관할 관광과 에 문의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