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8일 금요일

사자성어.


樂善不倦 : 락선불권 - 선을 즐기는 사람은 권태로움이 있을 수 없다
自勝子强 : 자승자강 -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강한 자다
人一己百 : 인일기백 - 남이 한 번 할 때, 나는 백 번을 해서라도 따라간다
大道無門 : 대도무문 - 큰 도는 이름조차 없는 것이다
無言實踐 : 무언실천 - 모든 일은 말없이 실천하라
熟慮斷行 : 숙려단행 - 충분히 생각한 후 실행하라
仁者無憂 : 인자무우 - 어진 사람은 근심이 없다
百世淸風 : 백세청풍 - 대대로 맑은 가풍을 유지한다
自彊不息 : 자강불식 -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다
尊師愛生 : 존사애생 - 스승을 존경하고 학생을 사랑하라
知足常樂 : 지족상락 - 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다
眞光不輝 : 진광불휘 - 진실한 광채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正心誠意 : 정심성의 - 마음은 바르게 하고 뜻은 참되게 한다
長樂萬年 : 장락만년 - 즐거움이 오래도록 끝이 없다
接人春風 : 접인춘풍 -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라
知足者富 : 지족자부 - 자기 분수에 만족할 수 있는 자는 마음이 부자다
飽德醉義 : 포덕취의 - 덕에 배부르고 의리에 취한다
和氣致祥 : 화기치상 -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온 집안에 가득하다
惠愛爲心 : 혜애위심 - 은혜와 사랑을 근본된 마음으로 한다
浩然之氣 : 호연지기 -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당당한 기운
事必歸正 : 사필귀정 -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대로 돌아간다
三思一言 : 삼사일언 - 세 번 생각한 후에 말하라
無愧我心 : 무괴아심 -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無汗不成 : 무한불성 - 땀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이룰수 없다
開卷有得 : 개권유득 - 책을 펼치면 유익함이 있다
敎學相長 : 교학상장 -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다
百忍三省 : 백인삼성 - 많이 참고 많이 반성한다
愼思篤行 : 신사독행 - 신중히 생각하고 성실히 행한다
大志遠望 : 대지원망 - 뜻을 크게 가지고,희망을 원대하게
敬天愛人 : 경천애인 -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有志竟成 : 유지경성 - 뜻이 있으면 결국 이루리라
愛語和顔 : 애어화안 - 사랑스러운 말,온화한 얼굴 빛
慈顔愛語 : 자안애어 - 웃는 얼굴 사랑스런 말씨로
先公後私 : 선공후사 - 공적인 일이 사적인 일보다 우선한다
雪中松柏 : 설중송백 - 소나무와 잣나무는 눈 속에서도 변함이 없다
山高水長 : 산고수장 -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히
心淸思達 : 심청사달 - 마음이 맑으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
洗心和親 : 세심화친 - 마음을 씻어내고 화목하고 친하게
慈悲無敵 : 자비무적 - 자비한 마음을 가지면 적이 없다
正近邪遠 : 정근사원 - 바른 것은 가까이, 나쁜 것은 멀리
忍中有和 : 인중유화 - 참는 가운데 평화가 있다
初志一貫 : 초지일관 - 처음의 뜻을 끝까지
仁者無敵 : 인자무적 - 어질면 적이 없는 것이다
言行一致 : 언행일치 - 말과 행동이 일치함
弘益人間 : 홍익인간 - 널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仁義禮智 : 인의예지 - 어짐 정의 예절 지혜
孝悌忠信 : 효제충신 - 효도 우애 충성 믿음
博文約禮 : 박문약예 - 널리 배우고 간추려 실천함
存心守道 : 존심수도 - 마음을 간직하고 도를 지켜라
接化群生 : 접화군생 - 만나서 감화하며 함께 모여 살자
見得思義 : 견득사의 - 이득을 보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하라
見利思義 : 견리사의 - 이익을 보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하라
苦盡甘來 : 고진감래 - 고생 끝에 낙이 온다
公平無私 : 공평무사 -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다
克己復禮 : 극기복례 - 욕망을 억제하여 바른 행동을 한다
結者解之 : 결자해지 - 자기가 저지른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結草報恩 : 결초보은 - 죽어서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다
君家受福 : 군가수복 - 군자다운 집안이라야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勤儉和順 : 근검화순 - 부지런하고 검소하며,온화하고 유순함
氣山心海 : 기산심해 - 기운은 산과 같고, 마음은 넓은 바다와 같이
露積成海 : 노적성해 - 이슬방울 모여서 바다를 이룬다
訥言敏行 : 눌언민행 - 말은 조심하고, 행동은 바르게 하는 것
多情佛心 : 다정불심 - 다정다감한 마음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
斷機之敎 : 단기지교 - 도중에 중단함은 쓸모가 없음을 보여주는 맹자 어머니의 가르침
道不遠人 : 도불원인 - 도는 사람의 본성일 뿐, 먼 곳에 있지 않다
同心協力 : 동심협력 - 마음을 합하여 힘을 하나로 하여라
萬福雲興 : 만복운흥 - 만가지 복이 구름처럼 일어난다
非禮不動 : 비례부동 - 예의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행동하지 않는다
霜松常靑 : 상송상청 - 소나무는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安居危思 : 안거위사 - 편안할 때 재난에 대비하라
一念通天 : 일념통천 - 마음이 한결 같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
一忍長樂 : 일인장락 - 한 번 참으면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린다
溫故知新 : 온고지신 - 옛 것을 익힌 후, 새로운 지식을 찾는다
愚公移山 : 우공이산 - 어리석고 힘든 일이라도 차근차근히 실행하면 그 뜻을 이룬다.
有備無患 : 유비무환 -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뒷 걱정이 없다


양상군자(梁上君子)
梁 들보 량, 上 위 상, 君 군자 군, 子 아들 자 대들보 위의 군자. 곧 도둑을 가리키는 말

후한(진나라 멸망 후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전한(前漢, 기원전 206~서기 25) 또는 서한이라고 부르죠. 전한은 이후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여 신(9~25)을 세우자 도읍을 뤄양으로 옮기는데, 이때부터를 후한(後漢, 25~220) 또는 동한이라 부릅니다)의 선비 진식이 밤에 공부를 하는데 도둑이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진식은 집안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란 없다. 오직 어려운 상황을 맞아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기 대들보 위의 군자도 마찬가지니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도둑이 내려와 진식에게 절하였지요. 이에 진식이 선물을 내리며 “그대가 처음부터 도둑은 아니었네. 지금부터 반성하고 노력한다면 좋은 사람이 될 것이네.” 하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엄이도령(掩耳盜鈴)
掩 가릴 엄, 耳 귀 이, 盜 훔칠 도, 鈴 방울 령 자기 귀를 가린 후에 방울을 훔친다는 뜻으로, 나쁜 짓을 한 경우라면서 그 해악을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함을 비유한 말.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불구론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원래는 귀를 가리고 종을 훔친다는 ‘엄이도종(掩耳盜鐘)’이었는데 후에 종 대신 방울이란 글자를 쓰게 되었다. 진(晉)나라 명문가 범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큰 종이 있었다. 그런데 범씨 집안이 몰락하여 어수선하게 되자 도둑이 들어 그 종을 훔치려 하였다. 그러나 종이 너무 무거워 옮길 수 없을 것 같아 도둑은 조각을 내어 가져가려고 망치로 종을 내리쳤다. 그러자 ‘꽝’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도둑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겁이 나서 얼른 자기 귀를 막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듣지 않는다고 남도 모르는 줄 안다는 것은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독선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씨춘추》에서는 임금이 바른 말하는 신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비유로 위나라의 문왕 이야기를 들고 있다. 위나라 문왕이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신하들은 한결같이 왕의 칭찬만 늘어 놓았다. 그러나 임좌(任座)의 차례가 되자 그는 임금의 숨은 약점을 말했다. “전하께서 중산을 멸한 뒤에 아우를 그곳에 봉하지 않으시려고 태자를 봉하신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문왕이 불쾌한 표정을 짓자 임좌는 그곳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적황이 이렇게 말했다. “옛말에 임금이 어질어야 신하가 바른 말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방금 임좌가 바른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전하께서 밝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왕은 곧 다시 임좌를 부른 후 몸소 뜰 아래까지 나가 그를 맞아 올리고 상좌에 앉게 했다고 한다.


역자교지(易子敎之)
易 바꿀 역, 子 아들 자, 敎 가르칠 교, 之 갈 지 자식을 서로 바꾸어 가르친다는 뜻

《맹자》의 이루상(離婁上)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 이를 두고 공손추가 스승인 맹자에게 물었다. “군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바르게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노여움이 따르게 되고, 그러면 부자간의 정리가 상하게 된다. 자식은 속으로 아버지가 내게 바른 일을 하라고 가르치지만 아버지 역시 바르게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서로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 부자 사이에 서로 잘못한다고 책망하면 정리가 멀어지게 되고 그러면 불행한 일이 아닌가? ” 스승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친다는 말이다. 즉, 자기 자식을 직접 가르치면 부자지간에 서로 노여움이 생기고 감정이 상하게 되는 등 폐단이 많아지므로 다른 사람과 서로 자식을 바꾸어 가르친다는 뜻으로 쓰인다.


연목구어(緣木求魚
緣 인연 연, 木 나무 목, 求 구할 구, 魚 고기 어 나무에 올라 고기를 얻으려고 한다는 뜻으로,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아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하는 말.

주(周)의 신정왕 3년(BC 318), 맹자는 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다. 이미 50을 넘은 나이였다. 동쪽에 있는 제는 서쪽의 진(秦), 남쪽의 초(楚)와 더불어 전국 제후 가운데에서도 대국이었다.

선왕(宣王)도 재주있는 사람이어서, 맹자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가 아닌 부국강병이며, 외교상의 책모, 원교근공책, 합종책, 연횡책이었다. 선왕은 중국의 통일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맹자와 선왕은 이런 문답을 하였다.

"임금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신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이웃 나라 제후들과 원수를 맺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내게 대망(大望)이 있기 때문이오." "임금님의 대망이란 것에 대해서 말씀해 보십시오." 인의(仁義)의 왕도정치를 논하는 맹자에게 선왕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맹자는 낚시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의식(衣食)이오니까, 인생의 오락이오니까?" "아니오, 나의 욕망은 그런 것이 아니오." 선왕은 맹자의 교묘한 변술에 걸려들고 말았다. 맹자는 힘차게 논하였다.

"그러시다면 이미 다 알 수 있습니다. 영토를 확장하여 진과 초와 같은 대국으로 하여금 허리를 굽히게 하고, 중국 전토를 지배하여 사방의 오랑캐를 따르게 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방법 즉 일방적인 무력으로 그것을 얻으려 하는 것은 연목구어 같은 것으로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아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어렵습니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신을 다해도 결국은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망치는 큰 재난까지 입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옵니다."  "재난을 당하는 까닭을 가르쳐 주시오." 선왕은 귀가 솔깃하여 다가앉았다. 이렇게 맹자는 교묘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얻어, 인의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론을 당당히 설명해 갔다


와각지쟁(蝸角之爭)
蝸 달팽이 와, 角 뿔 각, 之 갈 지, 爭 다툴 쟁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아무 소용도 없는 싸움을 말한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혜왕(惠王)은 제(齊)나라 위왕(威王)과 동맹을 맺었으나 위왕이 그 맹약을 깨뜨리자 몹시 노하여 자객을 보내어 위왕을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의논했는데, 공손연(公孫衍)이 이견을 내놓았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하수인을 보내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입니다. 마땅히 군대를 보내 공격하는 것이 떳떳한 방법입니다.”

계자가 대뜸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은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고 백성들은 몹시 불안할 뿐 아니라 비용 충당에 허덕이게 될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전쟁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자(華子)가 나서서 두 사람의 의견 모두를 신랄하게 공박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결론도 없이 논쟁만 지루하게 계속될 뿐이었다. 위왕이 몹시 짜증스러워하자, 혜시(惠施)가 말했다.

“대진인(戴晉人)이란 현인이 있습니다. 학문이 높을 뿐 아니라 사물의 이치에 매우 통달한 인물이므로, 그 사람을 초청해다 물으면 속시원한 대답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대진인이 조정에 불려와 혜왕을 만나게 되었다. 논란의 발단에 대해서 듣고 난 대진인은 매우 철학적인 방법으로 문제의 해결점을 풀어 나갔다.

“전하께선 달팽이란 미물을 아시겠지요?”
“알다마다요.”
“그 달팽이의 왼쪽 뿔에 촉씨(觸氏)라는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 만씨(蠻氏)라는 나라가 있는데, 양쪽이 영토 분쟁을 일으켜 격하게 싸우는 바람에 전사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 지 보름만에야 겨우 싸움이 멎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믿으시겠습니까?”
“원, 그런 터무니없는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그러시다면 이번에는 사실에 비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우주의 사방 위아래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오.”
“물론입니다. 우주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정신을 무한한 공간에 두어 노닐게 하면서 이 유한(有限)한 땅덩이를 내려다본다고 할 때, 나라 따위는 있을까 말까 한 아주 작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렇겠지요.”
“그 나라들 가운데 위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대량(大梁)이라는 서울이 있으며, 그 서울의 대궐 안에 전하가 계십니다. 또 한쪽에는 제나라가 있고 그 임금으로 위왕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무궁함에 비추어 볼 때 전하와 위왕이 전쟁하는 것이나 ‘달팽이 촉각 위의 촉씨와 만씨가 싸우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대진인은 거기까지만 말한 다음 자리를 떴고, 혜왕은 제나라와 전쟁할 생각을 버렸다.
 

요동지시(遼東之豕) 
 遼 멀 요, 東 동녁 동, 之 갈 지, 豕 돼지 시 요동 땅의 돼지. 남이 보기에는 대단찮은 물건을 대단히 귀한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태도. 견문이 좁고 오만한 탓에 하찮은 공을 득의양양하여 자랑함의 비유.


後漢(후한) 건국 직후, 漁陽太守(어양태수) 彭寵(팽총)이 논공 행사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자 大將軍(대장군) 朱浮(주부)는 그의 비리를 꾸짖는 글을 보냈다. “그대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옛날에 요동 사람이 그의 돼지가 대가리가 흰[白頭] 새끼를 낳자 이를 진귀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려고 河東(하동)까지 가 보니 그곳 돼지는 모두 대가리가 희므로 부끄러워 얼른 돌아갔다고 한다. 지금 조정에서 그대의 공을 논한다면 폐하[光武帝]의 개국에 공이 큰 군신 가운데 저 요동의 돼지에 불과함을 알 것이다.” 팽총은 처음에 후한을 세운 光武帝(광무제) 劉秀(유수)가 叛軍(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河北(하북)에 布陣(포진)하고 있을 때에 3,000여 보병을 이끌고 달려와 가세했다. 또 광무제가 옛 趙(조)나라의 도읍 邯鄲(한단)을 포위 공격했을 때에는 군량 보급의 重責(중책)을 맡아 차질 없이 완수하는 등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佐命之臣(좌명지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팽총은 스스로 燕王(연왕)이라 일컫고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2년 후 토벌당하고 말았다

 


와신상담(臥薪嘗膽)
 臥 누을 와, 薪 섶나무 신, 嘗 맛볼 상, 膽 쓸개 담 가시 많은 거친 나무 위에서 자고 쓰디쓴 쓸개를 먹는다는 뜻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디어 심신을 단련함을 비유하는 말.

『사기(史記)』의 「월세가(越世家)」와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인접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앙숙지간이었다. BC 496년, 오나라 왕인 합려(闔閭)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갔는데 월나라 왕 구천(勾賤)에게 크게 패하고 전투에서 월나라 장군 영고부(靈姑浮)에게 화살을 맞았다. 그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죽기 전에 아들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차는 아버지의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가시 많은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며 자신의 방을 드나드는 신하에게 이렇게 외치게 하였다. “부차야! 너는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夫差志復讎, 朝夕臥薪中, 出入使人呼曰: “夫差, 而忘越人之殺而父邪”) 부차는 복수를 맹세하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구천은 부차의 이러한 복수심을 알고 먼저 공격을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크게 패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포위당했고 결국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하였다. 부차가 용서해 준 덕분에 구천은 오나라에게 점령당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스스로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며 지난 치욕을 상기했다. 항상 쓸개를 곁에 매달아 두고 앉아서나 누워서나 쳐다보고 올려다보고, 음식을 먹을 때도 쓸개를 맛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 (吳旣赦越, 越王勾踐反國, 乃苦身焦思, 置膽於坐, 坐臥卽仰膽, 飮食亦嘗膽也. 曰: “女忘會稽之恥邪?”) 회계의 치욕을 잊지 않았던 구천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쳐들어갔고 이십여 년 만에 오나라 도읍을 점령하고 부차를 굴복시켰다. 부차를 사로잡아 귀양을 보냈으나 그가 깨끗이 자결함으로써 구천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실패를 맛보거나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굳은 의지를 의미한다. 마지막까지 목표를 향해 힘든 순간을 견뎌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로 많이 사용된다. 

유의어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 노력한다는 의미의 절치부심(切齒腐心), 발분망식(發憤忘食), 자강불식(自强不息) 등이 있다. 반의어로는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전하는 말로, 함부로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의미의 망자비박(妄自菲薄)이라는 성어가 있다



욕속부달(欲速不達) 
欲 하고잘 할 욕, 速 빠를 속, 不 아니 부, 達 통달할 달 마음만 급하다고 일이 잘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도는 뜻. 즉, 매사를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나가라는 말. 

우리 속담에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 매어 못 쓴다.’는 말이 있지요. 아무리 바쁘다고 실을 바늘귀에 매지 않고 중간쯤에 매어 꿰맬 수는 없으니까요. 모든 일에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빨리 하고자 욕심을 내다가는 오히려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제자 자하가 한 마을의 읍장이 되어 공자에게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지요. “빨리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이익에 눈을 주지 말아라. 서두르면 이루지 못할 것이요, 작은 이익을 보면 큰일을 이룰 수 없느니라.”



無執故無失 
- 없을 무(火-8)잡을 집(土-8)까닭 고(攴-5)잃을 실(大-2)

아무리 뜻이 고상하고 정의롭더라도 그 뜻이 고집과 집착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되는데, 大義名分(대의명분)이 분명할수록 더욱 固執不通(고집불통)인 경우가 많다. 스스로 내세운 대의와 명분에 사로잡히면 눈과 귀가 멀고 마음이 어두워진다. 귀와 눈이 밝은 것이 聰明(총명)인데, 귀와 눈이 멀어서야 무슨 일인들 해내겠는가? 대의로 일으킨 민란들이 왜 실패로 귀결되고 신선했던 혁명들이 왜 타락했겠는가?

‘문자’ ‘구수’편에 나온다. “夫目察秋毫之末者, 耳不聞雷霆爭聲, 耳調金玉之音者, 目不見太山之形. 故小有所志, 則大有所忘.”(부목찰추호지말자, 이불문뢰정쟁성, 이조금옥지음자, 목불견태산지형. 고소유소지, 칙대유소망) “무릇 눈으로 가을 터럭 끝을 살피다 보면 귀로는 우레가 치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일이 있고, 귀로 악기 소리를 헤아리다 보면 눈으로는 태산 같은 거대한 형체도 보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작은 데에 뜻을 두면 큰 데서 잊는 것이 있다.”

志(지)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려는 뜻이다. 뜻이 분명하고 확고할수록 그 방향과 목표에 대한 집중 또한 높다. 그러나 집중력이 높으면 그만큼 상황과 주변의 변화에 취약해진다. 위의 글이 그런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뜻이 善意(선의)나 好意(호의)일수록 변화에만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의나 호의라는 점을 내세워 다른 사람의 조언도 듣지 않으려 한다. 독불장군이 되는 것이다.

흔히 ‘臨時變通(임시변통)’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쓰는데, 이는 지조나 절개를 지나치게 중시한 데서 나온 그릇된 인식이다. 말하자면, 변통을 變節(변절)로 간주하는 인식이 임시변통을 부정적인 행위로 몰아간 것이다. 임시변통은 때에 따라서 알맞게 바꾸어 통하게 한다는 뜻으로, 臨機應變(임기응변)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전략이나 전술이라도 상황에 따라 운용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한다면 어찌 실패하지 않겠는가? 

‘문자’ ‘부언’에서 “聖人無執故無失”(성인무집고무실) 곧 “성인은 꽉 쥐지 않으므로 잃는 일도 없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화등선(羽化登仙)
羽 깃 우, 化 될 화, 登 오를 등, 仙 신선 선 껍질을 벗고 날개를 달아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도를 깨쳐 신선이 됨. 즉 세상의 혼란함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우화(羽化)는 원래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는데, 번잡한 세상 일에서 떠나 즐겁게 지내는 상태를 비유하는 말이며 또한 술에 취하여 도연(陶然)한 모습을 일컫기도 한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중 <전(前)적벽부>에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에서 비롯되었다
 
 월하빙인(月下氷人) 
月 달 월, 下 아래 하, 氷 얼음 빙, 人 사람 인 월하로(月下老)와 빙상인(氷上人)이 합쳐진 것으로, 결혼 중매인을 일컫는 말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위고(韋固)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한번은 여행 중에 하남성의 송성(宋城)이란 곳을 지나다가 ‘달빛 아래의 한 노인’을 만났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모퉁이에 기대앉아 한 손에 두툼한 책을 펴 들고 빨간 노끈을 든 다른 쪽 손으로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서 훑어보고 있었다.
위고는 호기심이 생겨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어 보았다.

“어르신께서 지금 읽고 계신 책은 어떤 책입니까?”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이 세상 혼사에 관한 책이라네. 여기 적혀 있는 남녀를 이 빨간 노끈으로 한번 매놓기만 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든 원수지간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맺어지게 되어 있지.”

귀가 솔깃해진 위고는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저한테 시집 올 사람은 과연 어디 있는지 한번 봐 주십시오.”
“그렇게 함세.”

노인은 선선히 대답하고 책장을 잠시 넘기더니 말했다.

“이 송성에 있군 그래. 성 북쪽 저잣거리의 채소 장수인 진(陳)이란 여인네가 키우고 있는 세 살짜리 계집애가 자네 배필일세.”

위고는 어이가 없어 픽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한 귀로 흘려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뒤 위고는 상주(相州)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좋게 본 태수가 사위로 삼겠다고 제의했다. 위고 역시 노총각으로서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닐 뿐더러 태수 정도의 후견인을 두는 것은 장래를 위해서도 행운이므로 두말 없이 승낙했다. 더군다나 태수의 딸은 17살 꽃다운 나이에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첫날밤 운우지락(雲雨之樂)의 시간이 지난 뒤 신부는 소곤소곤 자기 신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태수님의 양녀랍니다. 친아버님은 송성에서 벼슬을 하시다 돌아가셨다는데,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저는 진씨 성을 가진 유모한테 맡겨졌다더군요. 마음씨 착한 유모는 성 북쪽 저잣거리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어린 저를 길러 주셨답니다.”





成而弗居 
- 이룰 성(戈-3)말 이을 이(而-0)아닐 불(弓-2)머물 거(尸-5)

만물은 일어나지만 다스리려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하면서도 뻗대지 않는다. 다스리지 않고 뻗대지 않는다는 것은 흐름을 따르고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면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이룸 또는 이루어짐도 한때의 현상일 따름이어서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래서 만물은 “成而弗居”(성이불거) 곧 “이루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果實樹(과실수)를 보라. 사람의 손길이 닿았든 닿지 않았든 간에 좋은 땅에서 비바람을 잘 견디고 빛을 담뿍 받은 나무라면 때맞게 과실을 맺는다. 그 과실은 새가 날아와서 쪼기도 하고 인간이 따서 가져가기도 한다. 가지에 걸려 있는 과실도 점점 물러지고 끝내 썩어서 떨어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과실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나무는 과실을 맺더라도 애써 붙잡아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계절이 한 번 돌면 다시 새잎을 내고 새로 열매를 맺는다. 이를 두고 노자는 “夫唯弗居也, 是以弗去也”(부유불거야, 시이불거야) 곧 “결코 머물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떠나지도 않는다”고 표현했다.

가지에 열매가 맺힌 채로 있다면, 계절이 몇 차례 돌고 돌아도 새로 열매가 맺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맺힌 열매도 가지에 매달린 채 썩어가고 새로 열매도 맺지 못한다면, 그 과실수가 과실수이겠는가? 탐스러운 과실, 먹음직스런 열매를 맺어서 과실수라는 이름과 존재 가치를 얻었는데, 과실을 새로 맺지 못한다면 과실수라는 이름도 무색해지고 존재 가치도 사라진다. 과실수로 머물러 있으려다 과실수라는 이름을 저버리고 과실수의 세계에서 떠나버리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과실수를 비롯한 나무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새끼를 낳아 길러도 때가 되면 홀로 서도록 내버려 둔다. 내 배에서 나온 것이니 언제까지나 내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나무가 잎들을 떨구고 앙상해지는 것도, 스스로 날 수 있고 달릴 수 있게 되면 어미가 새끼를 떠나보내는 것도 모두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왜 인간은 이 이치를 외면하는 것일까? 정말 모르는 것일까? 

得時無怠 
- 얻을 득(彳-8)때 시(日-6)없을 무(火-8)게으를 태(心-5)

조선의 건국에 鄭道傳(정도전, 1342∼1398)이 있었다면, 진시황의 제국에는 李斯(이사, 기원전?∼기원전 208)가 있었다. 이사는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고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에서 혁신을 이루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는 등 법률과 제도를 밝히기도 했고, 焚書(분서)로써 사상을 통제하고 천하 곳곳에 離宮(이궁)을 짓고 북방에 만리장성을 쌓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진 제국의 승상으로서 핵심 두뇌 역할을 했던, 참으로 대단한 지략가요 정치가, 행정가였다.

이사가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본래 楚(초)나라 출신으로, 군에서 하급 관리로 있었다. 어느 날 뒷간에서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을 보면 놀라는 쥐와, 곳간에서 곡식을 먹으며 사람을 보아도 안중에 두지 않는 쥐를 보고서는 “사람이 잘 되고 못 되는 것도 환경에 달렸을 뿐이다”라며 곧바로 하급 관리 노릇을 그만두고 떠나 荀卿(순경) 곧 荀子(순자)를 찾아갔다.

3년 동안 제왕의 통치술을 배운 뒤에 이사는 순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斯聞得時無怠. 今萬乘方爭時, 遊者主事. 今秦王欲呑天下, 稱帝而治. 此布衣馳騖之時而遊說者之秋也. 處卑賤之位而計不爲者, 此禽鹿視肉, 人面而能彊行者耳.”(사문득시무태. 금만승방쟁시, 유자주사. 금진왕욕탄천하, 칭제이치. 차포의치무지시이유세자지추야. 처비천지위이계불위자, 차금록시육, 인면이능강행자이)
“저는 때를 얻으면 꾸물대지 말라고 들었습니다. 이제 만승의 제후들이 바야흐로 다투는 때여서 유세가들이 정치를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또 진나라 왕은 천하를 집어삼키려고 帝(제)를 일컬으며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는 벼슬이 없는 선비가 능력을 펼칠 때이며 유세가의 시대가 온 것을 뜻합니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 계책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쳐다본다고 해서 억지로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도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때가 변하면 할 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닫고 행동함으로써 이사의 삶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위편삼절(韋編三絶) 
韋 다룸가죽 위, 編 엮을 편, 三 석 삼, 絶 끊을 절 한 책을 되풀이해 읽어 철한 곳이 헤진 걸 다시 고쳐 매어 읽음. 즉 독서를 열심히 함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공자에 대한 다음 기록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공자는 만년에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단(彖)》, 《계(系)》, 《상(象)》, 《설괘(說卦)》, 《문언(文言)》편을 정리하였다. 《주역》을 읽으면서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孔子晚而喜 《易》, 序 《彖》, 《系》, 《象》, 《說卦》, 《文言》. 讀《易》, 韋编三绝.)”
《주역》은 유교 경전 중 하나로 우주의 원리와 자연의 이치를 점성(占星)으로 설명하고 풀이한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春秋時代)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으로, 대신 대나무 조각을 가죽 끈으로 엮어서 만들었던 죽간(竹簡)이라는 형태의 책을 사용하였다. 공자는 이 책의 심오한 우주철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았다. 몇 번을 반복하였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읽다보니 책을 묶었던 끈을 새 것으로 바꾼 것이 여러 번이었다. 이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도 공자는 "내가 몇 년 더 살 수 있다면 《주역》의 내용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을 텐데(假我數年, 若是, 我于《易》則彬彬矣)."라며 아쉬워했다.

이처럼 위편삼절은 공부에 몰두하는 자세, 학문에 대한 열의를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다. 비슷한 뜻으로 소뿔에 책을 걸고 소를 타고 가면서도 공부한다는 뜻의 우각괘서(牛角掛書),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른다는 뜻으로 지독하게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을 묘사한 현량자고(懸梁刺股)라는 성어가 있다



읍참마속(泣斬馬謖) 
泣 울 읍, 斬 벨 참, 馬 말 마, 謖 일어날 속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공정함을 지키기 위해서 사사로운 정을 버린다는 말.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할 무렵의 일입니다. 제갈량의 공격을 받은 조예는 명장 사마의를 보내 방비토록 하였습니다. 사마의의 명성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제갈량은 누구를 보내 그를 막을 것인지 고민합니다. 이에 제갈량의 친구이자 참모인 마량의 아우 마속이 자신이 나아가 사마의의 군사를 방어하겠다고 자원합니다. 마속 또한 뛰어난 장수였으나 사마의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긴 제갈량은 주저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속은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겠다며 거듭 자원합니다. 결국 제갈량은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권유하며 전략을 내립니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전략을 세웠다가 대패하고 말지요.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으며 마속의 목을 벨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격한 군율이 살아 있음을 전군에 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알고 나니 슬픈 고사성어죠. 누참마속(淚斬馬謖)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누(淚)는 ‘눈물 흘리다, 눈물’이란 의미를 갖습니다


일이관지(一以貫之)
一 한 일, 以 써 이, 貫 꿸 관, 之 갈 지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는 뜻

일이관지란 말은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과 〈이인편(里仁篇)〉에서 공자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먼저 위령공편에, 공자가 말하였다.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모두 기억하는 줄로 아느냐?" 자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아닌가요?" 공자가 "아니다. 나는 하나로 꿸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일관지도(一貫之道)이다.  

그러나 이 말을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제자 가운데 증자(曾子)뿐이었다. 그것은 〈이인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공자가 말하였다.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옳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이 물었다. "무엇을 이르신 것인가?"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충은 중(中)과 심(心)의 합체어로서 글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속에 있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인(仁)이며 성(性)인데, 남을 나처럼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인이라 하고 살려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성이라 한다.  

그리고 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과 같이 생각하는 일이다. 속에 있는 마음인 충이 밖으로 나타날 때는 서로 나타난다. 즉, 일이관지는 공자의 사상과 행동이 하나의 원리로 통일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인이며, 증자가 충서로 해석한 것은 충성과 용서가 곧 인을 달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한 번에 끝까지'라는 뜻으로 변형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 예로는 '초지일관(初志一貫)'이나 '일관(一貫)되다' 등이 있다. 


자가당착(自家撞着)
自 스스로 자, 家 집 가, 撞 칠 당, 着 붙을 착 자기가 한 말이나 글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뜻으로, 특히 말과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을 때를 말함.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 
스스로 싸우기도 하고 붙기도 한다면 도대체 어떤 게 진실일까요? 그래서 모순된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가(家)는 무생물인 집을 뜻하기도 하지만 생명체인 사람 또는 전문가를 뜻하기도 하지요. 당(撞)은 ‘치다, 두드리다, 부딪치다’와 같은 의미를 갖는데, 당구(撞球)에 쓰입니다. 그런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뜻의 대표적인 표현은 역시 모순(矛盾)입니다
 


전거복철(前車覆轍)
前 앞 전, 車 수레 거, 覆 뒤집힐 복, 轍 바퀴자국 철 앞 수레가 엎어지게 되는 바퀴자국이란 뜻으로 앞의 실패를 거울로 삼으라는 의미

앞 사람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성의 글이다. 전한(前漢) 말의 유향(劉向)이 편집한 《설원(說苑)》의 〈선설편(善說篇)〉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춘추전국시대 위(魏)나라의 문후(文侯)가 중신들과 함께 주연을 열었다. 취흥(醉興)이 도도해지자 문후는, “술을 마시기만 하면 재미가 없다. 어디 맛보지 아니하고 마시는 자는 벌주로 큰 잔의 술을 주기로 하자.”고 하였다. 모두 그 말에 찬성하였다. 그런데 말을 꺼낸 문후가 맨 먼저 그 규약을 어겼다. 주연을 주관하는 관리였던 공손불인(公孫不仁)이 큰 술잔을 문후에게 내밀었다. 문후는 슬쩍 보고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한 신하가 불인에게, “불인, 그만하라. 임금께서는 지금 너무 취하셨다.”고 하였다. 그러자 불인이 말하였다. “속담에, ‘앞에 가던 수레의 뒤집어진 바퀴자국은 뒤에 가는 수레의 경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전례(前例)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입니다. 신하나 임금되기가 모두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 임금께서 법을 만들고, 그 법이 지켜지지 않는 전례를 만드시면 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이 잔을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문후는 곧 수긍하고 깨끗이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 후 공손불인을 중히 여겨 오래 중용하였다고 한다. ‘전거복철 후차지계(前車覆轍 後車之戒)’로 쓰이며, 이와 유사한 말로는 답복철(踏覆轍), 답복거지철(踏覆車之轍), 전철(前轍) 등이 있다.

  


조명시리(朝鳴市利)
朝 아침 조, 鳴 울 명, 市 저자 시, 利 날카로울 리  명성은 조정에서, 이익은 시장에서 다투라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격에 맞는 곳에서 하라는 말.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전한다.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출병을 앞두고 재상 장의(張儀)와 중신 사마조(司馬錯)가 격론을 벌였다. 특히 사마조는 촉(蜀) 땅을 정벌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도 쌓일 것’이라는 ‘일거양득(一擧兩得)론’을 내세워 촉으로의 출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횡가(縱橫家)인 재상 장의는 중원(中原)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며 혜문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먼저 위(魏), 초(楚) 두 나라와 동맹을 맺고, 한(韓)의 삼천(三川) 지방으로 출병한 다음 주(周)나라의 외곽을 위협합니다. 이렇게 하면 주나라는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보물인 구정(九鼎)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내놓을 것입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서 천하를 호령하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패업(覇業)입니다. 변경의 촉을 정벌한들 군사와 백성만 피폐하게 할 뿐 무슨 명리(名利)가 있겠습니까? 듣건대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에서 다툰다’고 합니다. 즉 삼천 지방은 천하의 저자이고, 주 황실(皇室)은 천하의 조정입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이것을 취하려 하지 않고 하찮은 오랑캐의 땅, 촉을 다투려 하십니다. 혹 패업을 잊으신 것은 아닙니까?  

이같은 장의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혜문왕은 사마조의 의견을 좇아 촉을 정벌하는 영토의 확장에 주력하였다. 이와 유사한 말로 ‘적시적지(適時適地)’라는 말이 있다. 때와 장소가 알맞다는 뜻이다.

 
박문약례(博文約禮)
[요약] (넓을 박글월 문요약할 약예법 례)
글을 널리 배우고배운 글을 예법으로 요약하라는 뜻.

공자가 말씀하셨다.
문헌과 서적을 광범하게 학습하고예로서 조정통솔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論語 顏淵第十二 
子曰:「博學以文約之以禮亦可以弗畔矣夫!」
*重出見雍也篇) 
  
또한 자한편에도 나온다.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게 느껴지고뚫어 볼수록 더욱 견고하게 느껴진다앞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홀연히 뒤에 있다선생님께서 한 발 한 발 잘 인도해주셔서 넓은 지식으로 나를 풍부하게 해 주셨고엄숙한 예로 나를 규제해 주셨고나로 하여금 그만 두려 해도 할 수 없도록 하셨다나의 재능을 충분히 발굴해 주셨고우뚝하게 서 있는 듯하셨다비록 계속 따라서 전진하려고 해도 어떻게 달려갈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論語/子罕第九之十一
顏淵喟然歎曰:「仰之彌高鑽之彌堅瞻之在前忽焉在後夫子循循然善誘人博我以文約我以禮欲罷不能既竭吾才如有所立卓爾雖欲從之末由也已!」 
  


   

조삼모사(朝三暮四)
朝 아침 조, 三 석 삼, 暮 저물 모, 四 넉 사 원숭이에게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의 도토리를 줌.
즉 잔 술수를 이용해 상대방을 현혹시키는 모습.

송나라에 원숭이를 좋아하여 키우는 저공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원숭이 먹이인 도토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요. 이에 저공은 원숭이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저공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원숭이들은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는군요.


중원축록(中原逐鹿) 
中 가운데 중, 原 근원 원, 逐 쫓을 축, 鹿 사슴 록중원의 사슴을 쫓는다는 뜻으로, 제위를 두고 다툼을 비유하는 말.

《사기(史記)》 〈회음후열전편(淮陰侯列傳篇)〉에 나온다.  

한(漢)나라 고조(高祖) 11년, 조(趙)나라의 재상이었던 진희가 대(代) 땅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러자 고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다. 이 틈을 이용하여 진희와 내통하던 회음후 한신(韓信)이 장안(長安)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사전에 누설되어 여후(呂后)와 재상 소하(蕭何)에 의해 진압되었다.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고조가 여후에게 물었다. "한신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였소?" "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분하다고 하였습니다." 괴통은 고조가 항우(項羽)와 천하를 다툴 때, 제나라의 옛 땅을 평정한 한신에게 독립을 권했던 언변가(言辯家)였다. 고조의 앞으로 끌려 나온 괴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 한신이 나의 말을 들었으면, 오늘날 폐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조가 격노하여 괴통을 삶아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괴통이 억울하다며 큰 소리로 말하였다. "신은 전혀 삶겨 죽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진(秦)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中原]가 어지러워지자 각지의 영웅 호걸들이 일어났습니다. 진나라가 사슴[鹿:제위]을 잃음으로써 천하가 모두 이것을 쫓았습니다[逐]. 그 중 키 크고 발빠른 걸물(傑物:고조 유방을 가리킴)이 이것을 잡았습니다.  
옛날 도척의 개가 요(堯)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 요가 악인이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란 원래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입니다. 당시 신은 오직 한신만 알고 폐하를 몰랐기 때문에 짖었던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폐하처럼 천하를 노린 자는 많았습니다. 모두 힘이 모자라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천하가 평정된 지금 난세에 폐하와 마찬가지로 천하를 노렸다 해서 삶아 죽이려 하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옵니다." 이에 고조는 말을 잊고, 괴통을 그냥 놓아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원축록이란 말은 제위를 두고 다툼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이것은 정권을 다투거나, 어떤 지위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는 의미로 확대되어 쓰인다. 유사어로는 축록장리(逐鹿場裡), 각축(角逐) 등이 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天 하늘 천, 衣 옷 의, 無 없을 무, 縫 꿰멜 봉 천사들이 입는 옷은 꿰맨 곳이 없음.
즉 문장이나 사물에 아무런 흠이나 결점이 없이 완전함을 가리킴.

옷이란 게 마름질을 해서 꿰매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물론 옛날 로마인들이 휘휘 둘러 입은 토가는 예외지만. 그런데 꿰맨 곳이 없는 옷이라니 틀림없이 하늘에서나 입는 옷일 것입니다. 바로 이에 비유한 것으로, 문장이나 작품이 어느 한 곳 흠이 없는 완벽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천려일실(千慮一失)
千 일천 천, 慮 생각할 려, 一 하나 일, 失 잃을 실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 가지 실책이란 뜻으로, 아무리 지혜롭다 하더라도 생각을 많이 하다보면 하나쯤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한(漢)나라가 천하통일의 길로 나아갈 무렵, 한신(韓信)이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명에 따라 조(趙)나라에 쳐들어갔을 때 이야기다. 

한신은 조나라 장수들 가운데 지(知)와 덕(德)을 겸비한 이좌거(李左車)만은 꼭 살려서 귀순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적장 이좌거를 사로잡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드디어 사활을 건 일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는 한나라군의 승리였다. 그리고 이좌거는 포박되어 한신 앞에 끌려나왔다. 한신은 황급히 손수 포박을 풀어 주고 주연을 베풀어 그를 상석에 앉혀 극진히 예우했다. 그러면서 통일 과업의 마지막 장애가 되는 연(燕)나라와 제(齊)나라를 공략할 방법을 넌지시 물었다. 

“미안하지만, 패한 장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법입니다.” 

이좌거는 이렇게 말하며 대답을 피했다. 그러나 한신이 거듭 같은 질문을 하자, 마지못한 듯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런데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생각이 많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실수가 있고[智者千慮 必有一失(지자천려 필유일실)]’, 어리석은 사람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득책(得策)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패장이 지금부터 말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도 득책이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 후 이좌거는 한신의 참모로서 크게 활약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狐 여우 호, 假 거짓 가, 虎 범 호, 威 위엄 위여우가 호랑이의 힘을 빌어 위세를 부려 준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업고 위세를 부림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00년 무렵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가리킵니다. 수많은 제후들이 살아남고 나아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온갖 계략을 짜내던 시대입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가 탄생한 것도 그때죠. 그러다 보니 온갖 인물의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그 와중에 수많은 고사성어가 탄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고사성어의 대부분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특히 기원전 400년 무렵 이후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온갖 모략과 계략, 병법과 정략이 출현합니다. 진나라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이사, 말더듬이로 태어나 불후의 명작을 남긴 한비자, 진시황 암살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최후를 맞은 자객 형가,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한 맹자와 순자, 연횡책을 주장한 장의와 합종책을 주장한 소진 등 수많은 영웅호걸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의 활약상은 중국 고전 《전국책》과 《사기》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한번 읽어보시죠. 
호가호위도 이때 만들어진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입니다. 언젠가 선왕이 말했습니다. 
“내 듣자하니, 북방 오랑캐들이 우리 나라 재상 소해휼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그러자 대신 강을이 말했습니다. 
“북방 오랑캐들이 어찌 한 나라의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우가 호랑이에게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호랑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의 명을 받고 파견되어 온 사신으로 백수의 제왕에 임명되었다. 그런데도 네가 나를 잡아먹는다면 이는 천제(天帝)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앞장설 테니 너는 뒤를 따라오며 모든 짐승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을 확인하라.’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여우를 앞장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러자 과연 여우가 눈에 띄기만 하면 모든 짐승들이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앞장선 여우 때문이 아니라 뒤에 오는 자신 때문인지를 호랑이 자신도 몰랐던 겁니다. 지금 초나라는 그 땅이 사방 오천 리에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오랑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재상 소해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대왕의 나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찌 여우를 호랑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호사다마(好事多魔) 
 好 좋을 호, 事 일 사, 多 많을 다 魔 마귀 마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라는 뜻으로, 좋은 일에는 방해가 많이 따른다거나 좋은 일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호사다마(好事多磨), 호사다방(好事多妨)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가장 먼저 금(金)나라 때 동해원(董解元)이 지은 《서상(西廂)》의 다음 구절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참으로 이른바 좋은 시기는 얻기 어렵고, 좋은 일을 이루려면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眞所謂佳期難得, 好事多磨)."

또 중국 청(淸)나라 때 조설근(曹雪芹)이 지은 《홍루몽(紅樓夢)》에 "그런 홍진 세상에 즐거운 일들이 있지만 영원히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또 '미중부족 호사다마(美中不足 好事多魔 : 옥에도 티가 있고, 좋은 일에는 탈도 많다)'라는 여덟 글자는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순식간에 또 즐거움이 다하고 슬픈 일이 생기며, 사람은 물정에 따라 바뀌지 않는 법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말은 '좋은 일에는 방해가 되는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늘 경계하라'는 뜻이다. 같은 의미로 '좋은 일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호몽부장(好夢不長)이라는 말도 있다. 또는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난다 해도 방심하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에서 '세상 일은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알 수 없다'는 뜻의 새옹지마(塞翁之馬)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호접지몽(胡蝶之夢)
胡 턱밑살 호, 蝶 나비 접, 之 갈 지, 夢 꿈 몽 나비가 된 꿈이라는 뜻으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또는 인생의 무상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호접지몽(胡蝶之夢)’은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기는데,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약해서 ‘호접몽(胡蝶夢)’이라고도 한다.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불안한 시대를 살았던 그는 인간의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되었고, 그 자유를 추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 결과 물(物)의 시비(是非)·선악(善惡)·미추(美醜)·빈부(貧富)·화복(禍福) 등을 구분짓는 일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만물은 결국 하나의 세계로 귀결된다[物我一體]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하였다. 호접지몽이라는 고사에 이러한 생각이 비유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장자》의 〈제물론편(齊物論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되어 있었다.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 별개의 것이건만 그 구별이 애매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사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구별,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라는 경지,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다만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이처럼 피아(彼我)의 구별을 잊는 것,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해 호접지몽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해서 쓰이기도 한다.



顚沛匪虧 (전패비휴)顚 엎드러질 전沛 자빠질 패匪 아닐 비虧 이지러질 휴엎드려지고 자빠져도 이지러지지 않으니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다.아주 급한 때라도 꿋꿋이 선비는 체모를 지켜야 하고, 엎어지고 자빠지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 출전 : 천자문(千字文) > 엎어지고 자빠지는 걸 전패라고도 하는데, 논어 이인편에 이 말이 나온다. "군자는 밥 먹기를 끝내는 동안에도 인자함을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아주 급한 때라도 꿋꿋이 인자해야 하고, 엎어지고 자빠지더라도 또한 그래야 한다."


棄大取小 (기대취소)棄 버릴 기大 큰 대取 취할 취小 작을 소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한다는 의미이다.이익과 손실의 차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다.


春秋筆法
봄 춘(日-5)가을 추(禾-4)붓 필(竹-6)법 법(水-5)

동아시아의 통치와 정치에서 중시된 것이 名分(명분)이다. 명분이란 그 지위나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장자’ ‘천하’편에서는 “易以道陰陽, 春秋以道名分”(역이도음양, 춘추이도명분) 곧 “주역은 음양을 말하고, 춘추는 명분을 말한다”고 했는데, ‘춘추’는 공자가 편찬했다고 하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연대기다. 魯(노)의 隱公(은공) 元年(원년, 기원전 722년)에서 哀公(애공) 14년(기원전 481년)까지 12代(대) 242년 동안의 역사를 編年體(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춘추’를 바탕으로 이즈음의 역사 시대를 ‘춘추시대’라 부른다.

‘춘추’는 노나라 군주의 행적이나 그와 관련된 정치적인 일을 아주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어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는 저자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大義(대의)와 명분을 밝혀서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통치자나 정치가의 행위가 명분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즉 그의 지위나 신분에 걸맞은 행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엄정하고도 준엄하게 기록했다. 이를 흔히 ‘春秋筆法(춘추필법)’이라 한다.

이런 춘추필법은 공자의 正名(정명)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논어’ ‘顔淵(안연)’편을 보면,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군군, 신신, 부부, 자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다.”
사람마다 맡은 직분이 있고, 그 직분에는 부여된 명칭이 있다. 君(군)과 臣(신), 父(부)와 子(자) 따위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여된 명칭으로서, 그 명칭에는 그에 걸맞은 직분이 따른다. 군주가 군주로서 할 일을 하고 아비가 아비로서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직분을 다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명분이 서고, 명분이 서야 올바로 다스려진다.

‘관자’ ‘幼官國(유관국)’에서도 “定府官, 明名分”(정부관, 명명분) 곧 “관직을 정하고 명분을 밝힌다”고 했는데, 명분을 밝히고 세우는 것이 곧 정치였다는 뜻이다. 
고전학자    


화호유구(畵虎類狗)
畵 그림 화, 虎 범 호, 類 무리 류, 狗 개 구호랑이 그림을 그리려다가 실패하여 개를 닮은 그림이 되었다는 뜻으로, 서투른 솜씨고 녹록치 않은 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잘못되어야 하거나 중도에 흐지부지하여 이루지 못하여 웃음거리가 해도 된다는 말.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 됨.
자신의 능력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큰 욕심을 부리면 결국 우스운 결과만 가져온다는 뜻이죠. 화룡유구(畵龍類狗)도 같은 뜻입니다.


환골탈태(煥骨奪胎)
 煥 불꽃 환, 骨 뼈 골, 奪 빼앗을 탈, 胎 아이밸 태 뼈를 바꾸고 태(태아)를 빼앗는다는 뜻으로, 시와 문장에서 옛 사람의 뜻을 활용하되 새로운 의미를 미루어 만들어내는 것을 비유하는 말 또는 사람의 용모나 됨됨이가 전과 다른 새로운 모습이 되었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환골탈태(換骨脫胎), 탈태환골(脫胎換骨), 탈태환골(奪胎換骨)이라고도 한다. 중국 남송(南宋)의 승려 혜홍(惠洪)은 《냉재야화(冷齋夜話)》라는 시 비평서에서 소동파(蘇東坡)와 황정견(黃庭堅)을 최고의 시인으로 꼽으면서 황정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그 뜻은 바꾸지 않으면서 그 말만 새로 만드는 것을 환골법이라 하고, 그 뜻에 깊이 파고 들어서 그대로 형용하는 것을 탈태법이라 한다(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窺入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

환골탈태는 원래 신령스러운 영약인 금단(金丹)을 먹어서 보통사람의 뼈와 태아를 바꾸어 신선이 된다는 도가(道家)의 전설에서 온 말이다. 황정견은 시문을 짓는 데 있어 예전 사람의 법칙을 본받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창작해내는 것을 주장하여 ‘환골·탈태법’이라고 하였다. 이는 황정견을 필두로 한 송나라 때 시가(詩歌) 유파인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중요 시론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전하여 환골탈태란 선대 문인들의 시상이나 시구의 의미를 차용하여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하는 것을 말하며, 사람의 용모나 됨됨이가 전과 다른 새로운 모습이 되었을 때를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精德立中 덕을 촘촘하게 닦고 중도를 세운다(精德立中)찧을 정덕 덕  세울 립(立-0)가운데 중)

“虎死留皮, 人死留名”(호사류피, 인사류명) 즉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런데 범은 죽으면 반드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는다고 해도 반드시 이름을 남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 이름에 걸맞은 행위나 행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질이나 실상이 없다면, 아무리 간절하게 바라더라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 이로써 생각해 보면, 실질이나 실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이 있음이 분명하다. 실질이나 실상이 없으면서 이름을 드날린다면, 그것은 虛名(허명)이다. 허명임이 드러나는 순간, 그 이름은 가뭇없이 사라지거나 惡名(악명)으로 전환된다.

‘관자’ ‘法法(법법)’에 나온다. “政者, 正也. 正也者, 所以正定萬物之命也. 是故聖人精德立中以生正, 明正以治國.”(정자, 정야. 정야자, 소이정정만물지명야. 시고성인정덕립중이생정, 명정이치국) “정치는 바로잡음이다. 바로잡는다는 것은 만물의 이름을 바로잡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덕성을 촘촘하게 닦고 중도를 세워 ‘바름’이 나오게 하고 그 ‘바름’을 밝혀서 나라를 다스렸다.”

이 구절에서 ‘萬物之命(만물지명)’의 命(명)은 名(명)과 통용되는 글자다. 명령은 말이나 글, 곧 이름으로 내리는 것이니 괴이할 것은 없다. 이는 동서고금에서 공유하는 사유다. 기독교의 하느님 야훼가 모세에게 十誡命(십계명)을 계시할 때도 돌판에 새겨서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하느님이 계시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돌판에 새겨진 그 글이 권위를 부여하고 권력도 주었다. 말과 글, 이름은 그만큼 힘을 갖는다. 
그러나 ‘관자’에서 말했듯이 만물의 이름을 바로잡는 것은 正(정)이라는 실질이다. 그리고 그 正(정)은 덕성을 촘촘하게 닦고 중도를 세운다는 ‘精德立中(정덕립중)’에서 시작된다.

이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충실하게 해야 즉 실질을 갖추어야 그 말과 글이 올바르고 힘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통치나 정치도 말과 글로써 이루어지지만, 알맹이가 없는 말이나 글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민중이 따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不從所言국제신문 |  입력 : 2018-10-04 19:42:06  말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不從所言)아닐 불(一-3)따를 종(-8)바 소(戶-4)말 언(言-0)

흔히 나잇값을 하라고 한다. 나이에 걸맞은 마음가짐과 언행을 갖추라는 뜻이다.

유가에서 어른을 존중하라고 가르치지만, 어른답지 못한 어른은 결코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도 가르쳤다. 그럼에도 예나 이제나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 ‘나이’를 거들먹거리면서 어린 사람들에게 예의를 운운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중국 南朝(남조)의 宋(송)나라 사람 劉義慶(유의경, 403∼444년)이 편찬한 ‘世說新語(세설신어)’에 다음 이야기가 실려 있다. 
後漢(후한) 말의 孔融(공융, 153∼208년)은 공자의 20대 손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뛰어난 문인이었다. 그가 열 살 때 일이다. 부친을 따라 낙양에 갔다. 당시 河南尹(하남윤) 李膺(이응)은 명성이 자자하여 많은 빈객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공융은 그 사람됨이 궁금해서 그 집을 찾아갔다. 문지기에게 이응과는 친척 사이라고 말하고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이응이 물었다. “자네와 나는 어떤 친척 관계인고?”

공융이 대답했다. “옛날에 우리 조상 仲尼(중니, 공자)께서 댁의 조상 李伯陽(이백양, 노자)님을 스승으로 존경하셨습니다. 그런즉 저와 댁은 대대로 친척인 셈입니다.”

이 대답에 이응과 빈객 모두 경탄하며 공융을 기특하게 여겼다. 太中大夫(태중대부) 陳韙(진위)가 뒤늦게 왔는데, 어떤 사람이 이 이야기를 하자 진위가 말했다. “小時了了, 大未必佳.”(소시료료, 대미필가) “어렸을 때 똑똑하더라도 커서 반드시 훌륭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오.”

그러자 어린 공융이 대답했다. 
“想君小時必當了了.”(상군소시필당료료) “제 생각에 어르신께서는 어렸을 때 분명히 똑똑하셨을 겁니다.”
예의란 본디 인생을 더 산 어른이나 지위가 높은 윗사람이 먼저 차리는 것이다. 진위는 나잇값도 지윗값도 못 했다.

‘관자’ ‘법법’에 나온다. “凡民從上也, 不從口之所言, 從情之所好者也.”(범민종상야, 불종구지소언, 종정지소호자야) 
“무릇 민중이 군주를 따르는 것은 그 입이 말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다.”


호중천지 (壺中天地)
壺,병 호/中,가운데 중/天,하늘 천/地,땅 지항아리 속의 하늘이라는 뜻으로, 별천지(別天地)·별세계·선경(仙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또는 술에 취하여 세속을 잊어버리는 즐거움이나 장소가 극히 협소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한대(漢代)의 선인(仙人)인 호공(壺公)이 하나의 항아리를 집으로 삼고 술을 즐기며 세속을 잊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호천(壺天)·호중천(壺中天)·호중천지(壺中天地)·일호지천(一壺之天)이라고도 한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후한 시대에 비장방(費長房)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남현(汝南縣)의 시장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비장방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시장 한 모퉁이에서 영약(靈藥)을 파는 약장수 할아버지가 한 분 있었는데, 이 할아버지는 언제나 가게 앞에 항아리를 하나 놓아 두고는, 시장이 파하면 얼른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시장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비장방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그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를 항아리 속으로 안내했다. 항아리 속에는 훌륭한 옥으로 만든 화려한 저택이 장엄하게 솟아 있고, 그 저택 안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고 나서, 다시 항아리 밖으로 나왔다. 이 약장수 할아버지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유배된 선인(仙人)인 호공이었다. 뒤에 호공이 용서를 받아 천계(天界)로 돌아갈 때, 비장방도 그를 따라갔는데 선술(仙術)을 익히는 데 실패하여 지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비롯하여 ‘호중지천’은 별천지·별세계·선경을 의미하게 되었다. 항아리의 입구가 좁은 데에 연유하여 장소가 극히 협소함을 이르는 말로도 사용된다.<두산백과>  


견토지쟁 [犬兎之爭]
 犬 개 견 兎 토끼 토 之 갈 지 爭 다툴 쟁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말로, 쓸데없는 다툼이라는 뜻

《전국책(戰國策)》 〈제책편(齊策篇)〉에 전국시대 제(齊)나라 왕에게 중용(重用)된 순우곤(淳于髡)은 원래 해학(諧謔)과 변론의 재능이 뛰어난 세객(說客)이었다. 제나라 왕이 위(魏)나라를 치려고 하자 순우곤은 이렇게 진언했다.

한자로(韓子盧)라는 매우 발빠른 명견(名犬)과 동곽준(東郭逡)이라는 썩 재빠른 토끼가 있었습니다. 개가 토끼를 뒤쫓았습니다. 그들은 수십 리에 이르는 산기슭을 세 바퀴나 돌고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다섯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쫓기는 토끼도 쫓는 개도 힘이 다하여 그 자리에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것을 발견한 전부(田父:농부)는 힘들이지 않고 횡재[田父之功;전부지공]를 하였습니다. 지금 제나라와 위나라는 오랫동안 대치하느라 백성들이나 병사들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서쪽의 진(秦)나라나 남쪽의 초(楚)나라가 이를 기화로 '전부지공(田父之功)'을 거두려 하지 않을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위나라를 치려던 계획을 버리고 오로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썼다.


 간어제초 ( 間於齊楚)
 間 사이 간 於 어조사 어 齊 가지런할 제 楚 초나라 초약자가 강자 사이에 끼어 괴로움을 당함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국시대에는 강력한 일곱 나라가 패권을 다투었는데 이들을 전국 7웅이라고 합니다. 제(齊), 초(楚), 연(燕), 진(秦), 한(韓), 위(魏), 조(趙)가 그들이지요.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있던 등나라는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맹자가 등나라에 머물게 되자 등나라 군주 문공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약소국으로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누구를 섬겨야 편안하겠습니까?” 
그러자 맹자가 대답했습니다. 
“이는 제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기어이 말하라고 하신다면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성을 높이 쌓은 후 그 밑에는 연못을 깊게 파고 백성과 더불어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십시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뜨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조선시대에는 기생조차도 이런 시조를 지었습니다. 

제(齊)도 대국이요 초(楚)도 대국이라 
조그만 등(滕)국이 간어제초(間於齊楚) 하였으니 
두어라 이 다 좋으니 사제사초(事齊事楚) 하리라 
내용은 그만두고라도 이런 표현을 이용해 이런 노래를 지었다니 공부만 하는 요즘 사람들이 얼굴을 못 들겠는데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생하느니 나는 두 나라 모두 섬기겠노라” 하는 노래인데, 외교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지만 기생에게는 두 남자를 섬기는 것이 가능한 일이죠
 
공자천주 [孔子穿珠]
 孔 구멍 공 子 아들 자 穿 뚫을 천 珠 구슬 주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 

이 고사는 송(宋)나라의 목암선경(睦庵善卿)이 편찬한 《조정사원(祖庭事苑)》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공자는 전에 어떤 사람에게 진기한 구슬을 얻었는데, 이 구슬의 구멍이 아홉구비나 되었다. 그는 이것을 실로 꿰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문득 바느질을 하는 아낙네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이 있던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던 아낙네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난 그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찬찬히 꿀[蜜]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공자는 그 아낙의 말대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렇지"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는 나무 아래에 왔다갔다 하는 개미를 한 마리 붙잡아 그 허리에 실을 묶고는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넣고, 반대편 구멍에는 꿀을 발라 놓았다. 그 개미는 꿀 냄새를 맡고 이쪽 구멍에서 저쪽 구멍으로 나왔다. 이리하여 구슬에 실을 꿸 수 있게 되었다.  

공자는 배우는 일에 있어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와 같은 언행을 두고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도 한다. 그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라고 하여 세 사람이 어떤 일을 같이 할 때에는 선악간(善惡間)에 반드시 스승으로서 배울 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라 하였다.






견강부회 [牽强附會]
牽 : 끌 견 强 : 굳셀 강 附 : 붙을 부 會 : 모을 회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자기 주장의 조건에 맞도록 함을 비유하는 한자어. 



전혀 가당치도 않은 말이나 주장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건이나 이치에 맞추려고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도리나 이치와는 상관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면서 합당하다고 우기는 꼴이니,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킬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에는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있는데, 제 논에 물 대기라는 뜻으로,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한다는 말이다. 또 '수석침류(漱石枕流)'는 돌로 양치질을 하고 흐르는 물로 베개를 삼는다는 뜻이니, 가당치도 않게 억지를 부린다는 말이요, '추주어륙(推舟於陸)'은 배를 밀어 육지에 댄다는 뜻이니, 역시 되지 않을 일에 억지를 쓴다는 말이다. 

그밖에 '영서연설(郢書燕說)'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는 영 땅의 사람이 쓴 편지를 연나라 사람이 잘못 해석하고도, 자신이 해석한 내용대로 연나라를 다스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우리말에 '채반이 용수가 되게 우긴다'는 속담이 있으니, 가당치도 않은 의견을 끝까지 주장한다는 말이요, '홍두깨로 소를 몬다'는 속담 역시 무리한 일을 억지로 한다는 뜻으로, '견강부회'와 통한다.



견금여석 (見金如石 )
[볼 견/쇠 금/같을 여/돌 석]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풀이되며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을 뜻함


최 영 장군이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항상 그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최영은 항상 이 네 자로 띠에 새겨놓고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서 잃지를 않았다.최영은 비단 조각에 ‘見金如石’(견금여석)이라 써서 지니고 다녔다. 최영은 宰相(재상)의 班列(반열)까지 올랐으나 살림살이는 일반 百姓(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나는 평생 貪慾(탐욕)을 부린 일이 없다. 내 말이 사실이라면 나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遺言(유언)했을 만큼 자기 管理(관리)에 徹底(철저)하였다. 

삼마태수 (三馬太守)
三 석 삼 馬 말 마 太 클 태 守 지킬 수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청백리를 이르는 말


 조선 중종 때 송흠(宋欽)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수령으로 부임할 적에 거창한 행차 대신 자신이 타는 말 1필과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을 각각 1필씩 전체 말 세 필만 거느렸다. 이후 검소한 행차를 한 송흠은 삼마태수라고 불림



  비육지탄 [髀肉之嘆]
 髀넓적다리 비 肉 고기 육 之 갈 지 嘆 탄식할 탄보람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 것을 한탄함을 비유한 말.
원래, 할 일이 없어 가만히 놀고 먹기 때문에 넓적다리에 살만 찜을 한탄한다는 뜻이다.


중국 삼국시대 유비(劉備)가 한 말이다.  

유비는 한때 신야(新野)라는 작은 성에서 4년간 할 일 없이 지냈는데, 어느 날 유표의 초대를 받아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우연히 변소에 갔다가 자기 넓적다리에 유난히 살이 찐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그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연유를 캐묻자 유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언제나 몸이 말안장을 떠나지 않아 넓적다리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말을 타는 일이 없어 넓적다리에 다시 살이 붙었습니다. 세월은 사정없이 달려서 머지않아 늙음이 닥쳐올 텐데 아무런 공업(功業)도 이룬 것이 없어 그것을 슬퍼하였던 것입니다(吾常軍不離鞍 髀肉皆消 今不復騎 髀裏肉生 日月若馳 老將至矣 而功業不建 是以悲耳). 비육지탄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석위호 [射石爲虎]
射 쏠 사 石 돌 석 爲 하 위 虎 범 호 돌을 범인 줄 알고 쏘았더니 돌에 화살이 꽂혔다는 뜻
속뜻 : 성심을 다하면 아니 될 일도 이룰 수 있음


 -李廣(이광)은 弓術(궁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적이 가까이 있어도 명중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쏘지를 않았지만 일단 쏘았다 하면 활시의 소리와 동시에 적이 쓰러졌다.그런 그가 하루는 사냥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보고 화살을 쏘아 명중 시켰는데 화살촉이 깊숙히 박혔지만 가까이 가 자세히 보니 돌이었다고 한다

사불급설 [駟不及舌]
駟 사마 사 不 아닐 불 及 미칠 급 舌 혀 설 네 마리 말이 끄는 빠른 수레도 사람의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
속뜻 : 소문은 빨리 퍼지므로 말조심하라는 말


《논어(論語)》의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말이며, 위(衛)나라 대부 극자성(棘子成)과 언변과 이재(理財)에 뛰어난 자공(子貢)과의 대화에서 유래한다. 극자성이 자공에게 "군자는 그 바탕만 세우면 그만이지 무슨 까닭으로 문이 필요한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자공이 "안타깝습니다. 당신의 말은 군자답지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 미치지 못합니다. 문이 질과 같고 질이 문과 같으면, 그것은 마치 호랑이 가죽과 표범 가죽을 개 가죽이나 양 가죽과 같다고 보는 이치와 같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말한 사불급설은 극자성이 실언한 것이니 말을 조심해서 하라는 뜻이다.  

한국 속담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가 있다. 잘못 쓴 글은 지우면 그만이지만 말이란 한 번 내뱉으면 주어 담을 수 없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불급설과 비슷한 글은 여러 문헌에도 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다. 입을 막고 혀를 감추면 어디에 있든지 몸이 편안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비슷한 말로 언비천리(言飛千里: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뜻), 윤언여한(綸言如汗:땀이 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 임금의 조칙은 한번 반포되면 취소할 수 없으니 신중을 기하라는 것을 비유한 말), 호령여한(號令如汗:땀이 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 한 번 내린 명령은 취소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 이속우원(耳屬于垣:담에도 귀가 달려 있으니 말을 삼가라는 뜻), 장유이(牆有耳:담장에 귀가 있다는 말로, 말을 조심하라는 뜻), 악사천리(惡事千里:나쁜 소문은 세상에 빨리 퍼진다는 뜻) 등이 있다.


 
망운지정 [望雲之情]
望 바랄 망 雲 구름 운 之 갈 지 情 뜻 정구름을 바라보는 뜻속뜻 : 자식이 객지에서 고향에 계신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

《당서(唐書)》에 보이는 내용이다. 당(唐)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은 고종(高宗) 때 대리승(大理丞)이 되어 1년 동안 1만 7000명을 올바르게 재판하였다. 그뒤 강남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어서는 음란하거나 민심을 미혹하는 사당 1,700개소를 없애고 예주자사(豫州刺使)로 있을 때에는 무고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2,000명을 구제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후일 내준신(來俊臣)의 모함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병주(幷州)의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그의 부모는 하양(河陽)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적인걸이 타이항산[太行山]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니 한 조각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저 구름 아래 살고 계시겠지." 그리고는 흰구름을 쳐다보면서 부모님을 생각하고(望雲之情) 비탄에 잠겼다.

망운지정이란 이렇게 타향에서 자신도 신고를 겪지만 고향의 부모를 그리는 자식의 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후일 그의 평판이 높다는 말을 들은 측천무후는 다시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였고, 재상이 된 후 그는 장간지(張柬之)·요승(姚乘) 등을 추천하여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아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었다. 어느 날 측천무후가 상서랑(尙書郞)으로 합당한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자, 서슴없이 아들 광사(光嗣)를 추천하는 등 일 처리에 사사로움이 없었다 한다.






의문의려 [倚門倚閭]
倚:기댈 의 門:문 문 倚:기댈 의 閭:이문 려'문에 기대어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밖에 나간 자녀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다. 

의문지망(倚門之望)·의문이망(倚門而望)·의려지망(倚閭之望)·의려지정(倚閭之情)이라고도 한다. 중국 주(周)나라 때 행정구역으로 스물다섯 집을 리(里)라 하였는데, 리마다 세운 문, 곧 이문(里門)을 려(閭)라고 한다.

중국 춘추시대 때 왕손가(王孫賈)는 15세에 제(齊)나라 민왕을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 왕손가의 어머니는 자식을 몹시 사랑하여 그가 입조(入朝)하여 집에 늦게 돌아올 때면 문 앞에 기대 서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BC 284년에 연(燕)나라가 제나라의 도성 임치(臨淄)를 급습하여 민왕은 황급히 피신하였다. 왕손가는 민왕이 피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뒤쫓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가 "연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는데, 너는 어찌하여 왕을 보호하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왕손가는 "저는 왕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몹시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아침에 나가 늦게 돌아올 때면 나는 대문에 기대 네가 돌아오는지 바라보았고, 네가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마을 문 앞에 기대 서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女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 너는 지금 왕을 섬기는 몸으로 왕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냐."

이에 왕손가가 다시 민왕의 행방을 알아보니, 이미 초(楚)나라의 장군 요치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왕손가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요치를 주살하였다. 이 고사(故事)는 《전국책》의 〈제책(齊策)〉 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의문의려는 이제나저제나 밖에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간절한 심정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가인박명 (佳人薄命)


문유십기(文有十忌)
[요약] (文: 글월 문. 有: 있을 유. 十: 열 십. 忌: 꺼릴 기)
글을 쓸 때 기피하는 열 가지라는 뜻으로, 글을 쓸 때 써서는 안 되는 열 가지 글을 의미함.


명나라 원황(袁黃·1533~1606)이 글쓰기에서 꺼리는 열 가지를 꼽아 '문유십기(文有十忌)'를 썼다. '독서보(讀書譜)'에 나온다.

첫째는 두건기(頭巾氣)다. 속유(俗儒)나 늙은 서생이 진부한 이야기를 배설하듯 내뱉은 글이다.
둘째는 학당기(學堂氣)다. 엉터리 선생의 글을 학생이 흉내 낸 격의 글이다. 뜻이 용렬하고 견문은 조잡하다.
셋째는 훈고기(訓誥氣)다. 남의 글을 끌어다가 제 말인 양 쓰거나, 버릇처럼 따지고 들어 가르치려고만 들면 못쓴다.
넷째는 파자기(婆子氣)다. 글은 핵심을 곧장 찔러, 툭 터져 시원스러워야지, 했던 말 자꾸 하고 안 해도 될 얘기를 섞으면 노파심 많은 할머니 글이 되고 만다.
다섯째는 규각기(閨閣氣)다. 규방의 아녀자처럼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바르며 분칠을 해서 교태를 부려 분 냄새만 물씬한 글을 말한다.
여섯째는 걸아기(乞兒氣)다. 거지 동냥하듯 궁상을 떨며, 부잣집을 찾아가 먹다 남은 국이라도 달라는 격의 글이다.
일곱째는 무부기(武夫氣)다. 바탕 공부가 아예 없어 돈후한 기상을 찾기가 어렵고 화를 벌컥 내어 말이나 행동을 우악스럽게 하는 울뚝밸만 있다. 무기를 들고 치고받거나, 공연히 성을 내며 무례하게 군다. 글 가운데 가장 천한 글이다.
여덟째는 시정기(市井氣)다. 글은 우아해야지 속되면 못쓴다. 해맑아야지 지저분하면 안 된다. 거짓을 꾸며 진짜로 파는 것은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잗다란 이익에 눈이 멀어 말에 맛이 없고, 그 면목조차 가증스럽다.
아홉째는 예서기(隷胥氣)다. 아전처럼 윗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에게 군림하며, 이리저리 눈치 보고 움츠러들어, 빈말뿐이고 알맹이가 없다.
열째는 야호기(野狐氣)다. 글에는 바르고 참된 맥락이 있어야 한다. 자칫 삿된 길로 빠져들면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해서 혹세무민하게 된다. 사람을 홀리는 들 여우같은 글이 되고 만다.

저도 모를 말 하지 말고, 흉내 내지 말며, 가르치려 들지 말라. 쓸데없는 말, 꾸미는 말을 버리고, 글로 궁상을 떨어도 안 된다. 멋대로 떠들고 속되거나 굽신 대는 글, 남 속이는 글도 안 된다. 사람이 발라야 글이 바르다. 꾸미고 속이는 순간 글은 무너진다.



망극득모(亡戟得矛)
[요약] (잃을 망창 극얻을 득창 모
(=갈래진 창)을 잃고 모(=끝이 꼬부라진 긴 창)를 얻었다는 뜻으로손익이 서로 맞물려 별 손해가 없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내용이 성어는 여씨춘추(呂氏春秋이속(離俗)편에 나오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BC589년 안(산동 제남.濟南땅에서 진()나라와 제()나라가 격돌했다이 싸움에서 평아현의 한 여자(餘子=병사)가 그만 극()을 빼앗기고 모()를 주워 돌아가는데 마음이 영 편치 못했다.
그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을 잃어버리고 모()를 얻었는데 (부대로)돌아가도 될 까요?” 
길 가던 사람이 말했다
극도 역시 무기고 모도 역시 무기이니무기를 잃고 무기를 얻었는데 어찌 돌아가지 못하겠소?” 
여자(餘子)는 돌아가긴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러다가 고당(高唐)을 지키는 대부 숙무손을 만나자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오늘 전투를 하면서 극을 잃고 모를 얻었는데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숙무손이 대답했다
모는 극이 아니고 극은 모가 아니다극을 잃고 모를 얻었으니 어찌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겠는가.” 
평아의 여자(餘子)는 
돌아가 싸워야겠구나.”라고 말하고 급히 달려 돌아가 싸우다 죽었다.(齊晉相與戰平阿之餘子亡戟得矛却而去不自快謂路之人曰亡戟得矛可以歸乎路之人曰戟亦兵也矛亦兵也亡兵得兵何爲不可以歸去行心猶不自快遇高唐之孤叔無孫當其馬前曰今者戰亡戟得矛可以歸乎叔無孫曰矛非戟也戟非矛也亡戟得矛豈亢責哉平阿之餘子曰還反戰趨尙及之遂戰而死.)
  
*‘여자(餘子)’는 정식으로 복무하는 정졸(正卒이외의 자제를 말한다고대의 군제에 의하면 한 가정에서 한 사람만 정졸로 복무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이졸(羡卒)이라고 하였는데이 이졸을 여자라 했다극은 끝의 날이 두세 갈래인 창이고모는 끝의 날이 하나인 장창이다.
  


명경지수 [明鏡止水]
明 : 밝을 명 鏡 : 거울 경 止 : 그칠 지 水 : 물 수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뜻
속뜻 : 사념이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

장자(莊子)》 덕충부편(德充符篇)에 나오는 말이다. 노(魯)나라에 죄를 지어 다리를 잘린 왕태(王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따라 배우는 사람이 공자의 제자 수와 같았다. 공자의 제자가 그에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까닭을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은 흘러가는 물에는 비춰 볼 수가 없고 고요한 물에 비춰 보아야 한다. 오직 고요한 것만이 고요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
물론 《장자》의 다른 부분과 같이 장자 자신이 공자의 말을 빌려 하는 형식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신도가(申徒嘉)는 형벌을 받아 다리를 잘린 사람으로 정자산(鄭子産)과 함께 같은 스승을 모시고 있었다. 정자산이 신도가에게 말하였다. "내가 먼저 나가거든 자네가 머물러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머물러 있음세." 이튿날 같은 방에 자리를 함께 하고 있을 때 정자산은 또 신도가에게 말하였다. "내가 먼저 나가거든 자네가 머물러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머물러 있기로 하세. 지금 내가 나가려고 하는데, 자네는 머물러 있겠는가, 나가겠는가. 또 자네는 집정(執政) 하는 나를 보고도 피하지 않으니 자네도 집정하는 나와 같단 말인가?" 이에 신도가가 말하였다. "선생님 문하에서 집정이란 세속적 지위가 문제가 되는가? 자네는 자기가 집정임을 내세워 사람을 무시하고 있네. 듣건대 거울이 밝으면 먼지가 끼지 못하고, 먼지가 끼면 거울이 밝지 못하네. 어진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어진다고 하네(鑑明則塵垢不止 止則不明也 久與賢人處 則無過). 세상에는 잘못을 변명하는 사람은 많으나 제 잘못을 인정하면서 그로 인해 받는 죄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네" 하며 정자산을 꾸짖었다.

이와 같이 명경지수란 본래 무위(無爲)의 경지를 가리켰으나 후일 그 뜻이 변하여 순진무구한 깨끗한 마음을 가리키게 되었다.


독서망양 [讀書亡羊]
讀 : 읽을 독 書 : 글 서 亡 : 잃을 망 羊 : 양 양책을 읽다가 양을 잃어버린다는 뜻
속뜻 : 다른 일에 정신이 뺏겨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는 비유.

《장자(莊子)》 변무편(騈拇篇)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내종과 계집종 둘이 함께 양을 지키고 있다가 둘다 그만 양을 놓치고 말았다. 사내종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죽간을 끼고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계집종은 주사위를 가지고 놀다가 양을 잃었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이 한 일은 같지 않지만, 양을 잃었다는 결과는 똑같다(臧與穀二人相與牧羊 而俱亡其羊 問臧奚事 則挾策讀書 問穀奚事 則博塞以遊 二人者事業不同 其於亡洋均也).

학문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책을 읽다가 양을 잃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윗글의 경우는 다르다. 종은 양을 돌보는 일이 바로 그의 본분이다. 그런데 가당치 않게 독서를 하다가 양을 잃었다. 여기서 독서망양이 한눈을 팔다가 자기 본분을 잊는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아직도 독서망양은 큰 일을 하다가 다른 일을 잊는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편에서 장자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다. 그는 좋은 일을 하다가 양을 잃었건 나쁜 일을 하다가 양을 잃었건 그 결과는 같다는 데 초점을 두고, 결국은 군자니 소인이니 하는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윗글 아래 이어지는 다음 내용을 보면 장자의 의도가 확실하다.

백이(伯夷)는 그 명예 때문에 수양산(首陽山) 아래서 죽었고, 도척(盜跖)은 이익 때문에 동릉(東陵) 위에서 죽었다. 어째서 백이는 반드시 옳고 도척은 반드시 그르다고 하는 것일까. 인의를 따라 죽는다면 세상에서는 군자라 하고, 이익을 따라 죽는다면 세상에서는 소인이라 한다. 목숨을 해치고 천성을 버린 점에서는 백이나 도척이 다를 바 없는데 어찌 군자와 소인이라는 차별을 그 사이에 둘 수 있겠는가. 독서망양은 또한 지엽말단에 매달려 실체를 잃는다는 뜻의 다기망양(多岐亡羊)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명주애일빈일소(明主愛一嚬一笑

[요약
(밝을 명:주인 주사랑 애.한 일. 찡그릴 빈.웃을 소)
현명한 군주는 얼굴을 한 번 찡그리거나 웃는 것도 아낀다는 뜻으로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감정이나 표정을 마음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줄임말]
 일빈일소(一嚬一笑)

  
[내용
이 성어는 한비자(韓非子내저설 상(內儲說上)에 나오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전국시대 때()나라의 소후(昭侯)가 시자(侍者)에게 낡은 바지를 보관해 두라고 하자 시자가 말했다
임금께서는 어질지 못하시군요낡은 바지를 좌우의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고 장롱에 넣어 두다니요.” 
그러자 소후가 말했다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현명한 군주는 한 번 찡그리거나 한 번 웃는 것도 아낀다고 들었다찡그릴 때는 찡그리는 목적이 있고웃을 때는 웃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옷을 내리는 일이 어찌 찡그리고 웃는 것과 같겠느냐옷을 내리는 일은 찡그리고 웃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나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기 위해 보관하고 주지 않는 것이다.”
(韓昭侯使人藏弊袴侍者曰君亦不仁矣弊袴不以賜左右而藏之昭侯曰非子之所知也吾聞明主之愛一嚬一笑嚬有爲嚬而笑有爲笑今夫袴豈特嚬笑哉袴之與嚬笑相去遠矣吾必待有功者故收藏之未有予也.)
  
군주가 얼굴빛에 감정을 드러내면 신하들이 그 마음과 생각을 읽어 내어 그에 맞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의 정치가 혼란해질 수 있다
따라서 군주는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옥석혼효 [玉石混淆]
玉 : 구슬 옥  石 : 돌 석  混 : 섞일 혼  淆 : 뒤섞일 효옥과 돌이 함께 뒤섞여 있다는 뜻
속뜻 :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섞여 있음

출전(出典)은 《포박자(抱朴子)》 외편 상박(外編 尙博)이다. 동진(東晉)시대 도가 계열의 철학자인 갈홍(葛洪)은 《포박자》의 저자인데, 이 책으로 인해 도교가 하나의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책의 상박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이 도의 큰 바다라고 한다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은 이것을 보충하는 냇물의 흐름이다. 방법은 달라도 도를 닦는 데는 다름이 없다. 옛사람들은 재능을 얻기 어려움을 탄식하여 곤륜산(崑崙山:중국 전설상의 산)의 옥이 아니라 해서 야광주(夜光珠)를 버리거나 성인의 글이 아니라 해서 수양이 되는 말은 버리지 않았다. 또 천박한 시부를 감상하는가 하면 뜻깊은 제자백가의 책을 하찮게 여기며 유익한 금언(金言)을 하찮게 생각한다. 그래서 참과 거짓이 뒤바뀌고(眞爲顚倒) 옥과 돌이 뒤섞이며(玉石混淆) 아악(雅樂)도 속악(俗樂)과 같은 것으로 보고 아름다운 것도 누더기로 보니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갈홍은 이렇듯 쉽고 편안한 것만을 찾는 세태를 한탄하며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천박한 글에 사람들의 마음이 휩쓸리는 것을 애석해 했다.



속수지례 [束脩之禮]
束 : 묶을 속 脩 : 육포 수 之 : 어조사 지 澧 : 예도 례묶은 육포의 예절이라는 말
속뜻 ;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춘다는 뜻.


《논어》술이(述而)편에 나오는 말이다.  

자왈(子曰;공자가 말하기를)  
자행속수지이상 오미상무회언(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 

속수(束脩)는 열 조각의 마른 고기로, 예물 가운데 가장 약소한 것이다. 공자는 모든 가르침은 예(禮)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가장 작은 선물인 속수 이상의 예물을 가지고 오도록 함으로써 제자의 예를 지키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속수지례란 제자가 되기 위하여 스승을 처음 뵈올 때에 드리는 예물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필부지용(匹夫之勇)
匹 필 필, 夫 지아비 부, 之 갈 지, 勇 날쌜 용소인이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대드는 용기. 즉 앞뒤 분별없이 마구 행동해야 하는 것

《맹자(孟子)》의 〈양혜왕(梁惠王)〉 하편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 방법이 있는가’를 물었다. 맹자가 대답하기를 “오직 인자(仁者)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는데,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이 갈(葛)나라를 섬기고 주문왕(周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혜 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는데, 주태왕(주문왕의 아버지)이 훈육을 섬겼고, 구천(勾踐)이 오(吳)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대국의 입장에서 소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즐거워하는 자이고, 소국의 입장에서 대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을 즐거워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 나라를 보전합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에 보전한다.’ 하였습니다.” 

제나라의 선왕은 맹자의 말을 듣고 “그런데 과인이 병통이 있으니, 과인은 용기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 선왕은 작은 나라를 받들기보다는 작은 나라를 합병하여 나라를 키우고 싶었고, 큰 나라와 싸워 이김으로써 제후의 맹주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자 맹자가 이렇게 말했다. “왕께서는 소용(小勇)을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칼을 어루만지고 눈을 부라려, 너 같은 자는 나의 적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필부의 용기[匹夫之勇]’로 기껏해야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청컨대 왕은 부디 좀더 큰 용기를 가지십시오.”  

맹자는 용기를 좋아하는 선왕의 마음을 근거로 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행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남에게 지기 싫어하여 덤비는 것은 작은 용기로서 혈기에 차서 남을 제압하려는 것에 불과하지만, 맹자가 말하는 ‘큰 용기’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고 일어서는 매우 훌륭한 것으로 왕도정치를 실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여기에서 ‘필부지용’이란 말이 유래하였으며, ‘혈기에서 오는 소인의 용기’라는 뜻의 ‘소인지용(小人之勇)’과 같은 말이다.




궁이후공(窮而後工)
[요약] (다할 궁말이를 이뒤 후공교 공)
곤궁한 후에 글이 교묘해 진다는 뜻으로문인이 여러 가지 곤란을 겪은 뒤에 그 감정이 좋은 글을 쓰는 결과를 얻는다는 의미.

내 들으니 시인 중에는 출세한 사람은 적고 대개 곤궁하게 살았다고 하는데어찌하여 그렇게 된 것인가대개 세상에 전해지는 시는 상당수가 옛날 곤궁했던 사람들의 문장에서 나온 것이다무릇 선비가 자신이 가진 것을 온축했다가도 세상에 그것을 펼치지 못하면 산자락이나 물가의 밖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를 좋아하여 벌레나 물고기풀과 나무구름과 바람새와 짐승의 무리들을 보고 때로 그 기괴함을 찾기도 한다그러나 마음속에는 슬픈 생각과 울분을 느끼는 심정이 응어리져 있어서 참을 수 없는 번민이 글을 통해 나타나 쫓겨난 신하나 외로운 과부가 탄식하는 것을 말하거나 인정상 말하기 어려운 바를 묘사하기도 한다그러니 시인은 곤궁해질수록 더욱 작품은 공교로워지는 것이다그런즉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곤궁해진 다음에야 시가 공교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予聞世謂詩人少達而多窮 夫豈然哉 蓋世所傳詩者 多出于古窮人之辭也 凡士之蘊其所有 而不得施于世者 多喜自放于山巓水涯之外 見蟲魚草木風雲鳥獸之狀類 往往探其奇怪 內有憂思感憤之鬱積 其興于怨刺 以道羈臣寡婦之所嘆 而寫人情之難言 蓋愈窮則愈工 然則非詩之能窮人 殆窮者而後工也)”
  
여기서 말하는 궁은 단순히 경제적인 빈궁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생활하면서 난관이 많아 뜻을 이루지 못하여 이로 말미암아 터져 나오는 평안하지 못한 감정을 말한다때문에 궁이후공이 담고 있는 의미는 생애를 통해 이런저런 곤란을 겪으면서 싹터 오른 감정이 곧 좋은 시를 쓰는 결과를 빚는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구양수는 이런 생각을 다른 글인 설간숙공문집서薛簡肅公文集序에서도 토로하였다.
  
뜻을 잃은 사람에게 이르러서는 외롭게 머물면서 고생스럽게 살다보니 마음은 괴롭고 생각은 위태로워 생각은 극도로 정밀해지기 마련이다아울러 감격하고 발분한 것들이 세상에 쓰일 바가 없어진 것들은 모두 문장 속에 담겨지게 된다때문에 말하기를곤궁한 사람의 말은 공교로워지기가 쉽다는 것이다.(至于失志之人 窮居隱約 苦心危慮 而極于精思 與其所感激發憤 惟無所施于世者 皆一寓于文辭 故曰 窮者之言易工也)
  
구양수가 주장한 시는 곤궁해진 뒤에야 공교로워진다는 논리는 사마천司馬遷(145?-86?)이 말한 발분해서 글을 지었다發憤著書는 논리나 한유韓愈(768-824)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울린다不平則鳴는 생각을 계승한 것이다그는 궁이후공의 논지를 펼치긴 했지만, “시인은 출세하지 못하고 대개 곤궁하다는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았다때문에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곤궁해진 다음에야 공교로워질 것이다는 단서를 달았던 것인데이 역시 사마천과 한유의 관점을 보충하고 발전시킨 견해였다.(발분설發憤說/불평즉명不平則鳴 참조)[출처궁이후공(窮而後工)|작성자 소정묘




궁이불궁(窮而不窮)
[요약] (다할 궁말 이를 이아닐 불다할 궁)
궁하지만 궁하지 않다는 뜻으로()를 잃지 않으면 궁하지 않게 된다는 말.
[출전팽여양(彭汝讓)의 '목궤용담(木几冗談)
  
[내용이하 [정민의 世說新語] [486] 궁이불궁(窮而不窮)의 글.
조선일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궁한데 궁한 것은 탐욕 때문이다궁하지만 궁하지 않은 것은 의리에서 궁하지 않아서다궁하지 않은데도 궁한 것은 어리석음 탓이다궁하지 않은데 궁하지 않은 것은 예의에 궁하지 않아서다이 때문에 군자는 가난해도 의리를 알고부유해도 예법을 안다(窮而窮者窮于貪窮而不窮者不窮于義不窮而窮者窮于蠢不窮而不窮者不窮于禮是故君子貧而知義富而知禮)." 명나라 사람 팽여양(彭汝讓)이 '목궤용담(木几冗談)'에서 한 말이다.
  
궁함을 헤어나지 못함은 탐욕을 억제하지 못해서다노력하지 않고 일확천금만 꿈꾼다의리를 붙들면 물질이 궁해도 정신은 허물어지는 법이 없다잘살면서 늘 궁하다 느끼는 것은 내면의 허기 탓이다넉넉하면서도 구김살이 없는 것은 예()를 지녔기 때문이다사람은 빈부를 떠나 예의의 바탕을 지녀야 한다.
  
예의를 잃고 보면 가난한 사람은 천하게 되고부유한 사람은 상스럽게 된다예의를 간직하니 가진 것이 없어도 남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재물이 많아도 사람이 격이 있어 보인다예의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다빈천은 자꾸 위쪽으로 넘으려 하고부귀는 아래쪽으로 넘으려 든다넘으려다 못 넘으니 원망이 쌓이고넘지 말아야 할 것을 넘는 사이에 교만해진다.
  
한 대목 더. "행실이 깨끗한 사람은 저자에 들어가서도 문을 닫아걸고행실이 탁한 사람은 문을 닫아걸고서도 저자로 들어간다(行潔者入市而闔戶濁行者闔戶而入市)." 내 몸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고내 마음이 있는 곳이 더 중요하다복잡한 도회 안에서도 내면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면 닫힌 방 안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깊은 방 안에 도사려 앉아 있더라도 욕망이 들끓으면 저잣거리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나 같다.
  
이 말을 받아 이덕무는 "글을 읽는다면서 시정의 마음을 지닌 것은시정에 있으면서 능히 글을 읽음만 못하다(讀書而有市井之心不如市井而能讀書也)"라 하고또 "문 나서면 온통 욕일 뿐이요책을 열면 부끄러움 아님이 없네(出門都是辱開卷無非羞)"라 했다투덜대기만 하고 부끄러움을 잊은 세상이다안으로 향하는 눈길이 필요하다책을 더 읽어야 한다.  




지어지앙(池魚之殃) 
池 못 지, 魚 물고기 어, 之 갈 지, 殃 재앙 앙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이라는 뜻으로, 뜻밖의 횡액을 당함을 비유하는 말

《여씨춘추(呂氏春秋)》〈필기편(必己篇)〉에 전한다.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에 사마(司馬) 벼슬의 환(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매우 진귀한 보석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었다. 처벌을 받을 것 같자, 보석을 가지고 도망쳤다. 그의 보석 이야기를 들은 왕이 욕심이 생겨 수중에 넣고 싶어하였다. 왕은 측근의 환관에게 속히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환관이 어렵게 환을 찾아내자, "그 보석은 내가 도망칠 때 궁궐 앞 연못에 던져버렸다"라고 하였다. 환관이 그대로 보고하자, 왕은 당장 그물로 연못의 바닥을 훑게 하였다. 보석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었다. 그러나 보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물을 모두 퍼내는 바람에 애꿎은 물고기들만 말라 죽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보석과 물고기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물고기만 영문도 모른 채 떼죽음당했을 뿐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초(楚)나라의 원숭이와 성문의 화재 이야기가 있다. 초나라 왕궁에서 원숭이를 기르다가 놓쳤다. 원숭이를 잡기 위해 달아난 산에다 불을 놓아 나무를 모두 태워버렸다. 또 초나라 왕궁 성문에 불이 났다. 사람들이 성문 옆의 연못에서 물을 퍼내어 불을 껐다. 이 때문에 연못의 물이 말라버려 물고기들이 다 죽었다. 모두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남 때문에 뜻밖의 재앙을 당한 경우이다.

우리 속담의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다"는 것과 통할 법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