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 3.
취모구자(吹毛求疵) :
털을 불어서 흠집을 찾아내다.
억지로 남의 잘못을 찾아내기 위하여 애를 쓴다는 의미다.
- 한비자(韓非子)의 <대체(大體)>
자신의 잘못에는 한없이 넓은 마음이지만
남의 티끌에는 조금도 용서도 없는 게 세상살이다.
주머니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으랴.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던가.
사람이 조금만 모여도 다른 사람과 내 처지를 비교하고
괜히 질투하는 것이 사람살이의 한 모습이다.
적당한 질투야 당연히 삶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되겠지만,
과도할 때는 서로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요상한 것이어서,
좋은 마음으로 볼 때면 무엇이든지 좋다가도
심술궂은 마음으로 보기 시작하면 무엇 하나 좋아 보이질 않는다.
아내가 좋으면 처갓집 말뚝도 좋아 보이다가도,
한 번 마음이 돌아서면 부부 사이도 졸지에 원수 사이로 바뀐다.
마음이 만드는 장난이다.
한비자는 대체 편에서
'터럭을 불어서 작은 흠집을 구하지 말 것이며,
더러운 때를 씻어서
어려운 것을 자세히 살피려 들지 말라'고 했다.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를 보면
상당 부분이 작은 오해 때문에 벌어진다.
오해가 원수를 낳는다.
내가 남의 잘못을 찾고 있을 때,
어쩌면 남도 내 잘못을 찾고 있지는 않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송양지인#[ 宋襄之仁 ]
宋 : 송나라 송, 襄 : 도울 양, 之 : 의 지, 仁 : 어질 인
송나라 양공의 인정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동정 또는 배려를 말한다.
춘추 시대 송(宋)나라의 임금 환공(桓公)이 중한 병이 들어서 드러눕자, 자연히 후계 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인 목이(目夷)는 측실에서 났고, 작은아들 자보(玆父)는 정실 출생이어서 당연히 후계의 자격이 있었다. 두 형제는 비록 신분 차이가 있을망정 우애가 깊었다.
“나라가 잘 되려면 군주가 어질고 유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형님이 아버님의 후사를 잇는 것이 타당합니다.”
자보는 이렇게 말하며 보위를 양보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그 말을 전해 들은 목이는 손사래를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우야말로 나보다 훨씬 똑똑할 뿐 아니라 어디까지나 적자(適者)가 아닌가. 예와 법에 어긋난 짓을 할 수야 없지.”
이윽고 환공이 죽자, 조정 논의의 결과에 따라 자보가 후계를 이어 양공(襄公)이라 했는데, 그는 이복형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오손도손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다. 그로부터 7년 후인 기원전 643년, 춘추 시대의 첫 패자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었다. 그 바람에 천하의 제후들은 가슴 속에 감추고 있던 야망의 꿈틀거림으로 슬금슬금 옆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당사자인 제나라 국내 사정은 치열한 후계 다툼으로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면 난들 패자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한 양공은 형에게 자기 심중을 털어놓고 의견을 구했다. 재상 목이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나라로서 맹주를 꿈꾸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 송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잘못되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릅니다. 재고하십시오.”
그러나 한번 야망이 불붙기 시작한 양공은 형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는 후계자 문제로 시끄러운 제나라에 쳐들어가 공자 소(昭)를 지원해 그를 임금에 앉혔고, 그 영향력을 십분 이용한 덕분에 얼마 후에는 송나라, 제나라, 초(楚)나라 삼국의 맹주가 되었다. 그렇지만 맹주라고 해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힘없는 주(周)나라가 ‘천자의 나라’ 행세를 하듯이 그것은 다만 형식상의 관계일 뿐이었고, 실제는 ‘힘’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이듬해 양공은 정(鄭)나라가 초나라와 맹약을 맺자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삼국의 엄연한 맹주인 나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화친하겠다고? 이건 그냥 둘 수 없다.”
양공은 이렇게 외치고 정나라를 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 그렇게 되자 초나라는 맹약의 조건이라든지 의리상 정나라를 돕지 않을 수 없어 구원군을 파견했고, 따라서 송나라군과 초나라군은 홍수(泓水) 강가에서 일대 격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돌입했다. 그곳에 먼저 가서 포진한 것은 정나라군이었는데, 뒤미처 초나라군이 도착하여 어수선한 가운데 진지 구축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양공은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타깝다 못한 목이가 양공에게 촉구했다.
“적의 병력은 우리보다 월등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공격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공은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오. 옛말에 ‘군자는 이미 상처 입은 자를 다시 다치게 하지 않으며, 머리가 반백인 자를 사로잡지 않는다’고 했소. 옛날 싸움의 양상을 보더라도 험한 지세를 이용해서 이기려는 약은 짓은 다들 하지 않았소이다. 과인이 비록 망한 나라의 후손이지만, 아직 정렬하지도 않은 적을 치려고 어찌 북을 울릴 수 있겠소?”
이렇게 터무니없는 여유를 부린 결과 정작 양쪽 군대가 치열한 전투에 돌입했을 때는 모든 조건이 양호한 초나라군에게 승리가 돌아갔고, 송나라군은 재기불능의 참패를 맛보았다. 양공 자신도 그 싸움에서 다리에 큰 상처를 입어, 그것이 낫지 않고 크게 도지는 바람에 이듬해 죽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기보다 ‘쓸데없는 인정’으로 여유를 부리다 패한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見之黯晦
볼견(見-0) 의지(丿-3) 어두울 암(黑-9) 흐릴 회(日-7)
대한민국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항만을 기반으로 하는 대표적인 상공업도시라 할 부산은 최근 30여 년 동안 제조업의 쇠퇴와 일자리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좀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고령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청년들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여차하면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북항재개발사업이 시민들에게 자못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런데 오페라하우스 건립 문제와 관련해서 불거진 논란과 처리 과정을 보면서 참으로 부산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자못 의문과 불안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 오페라하우스 공사를 재개한다면서 부산시는 ‘부산형 복합문화공간 건립’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를 들고나왔다. 나름대로 고심 끝에 찾아낸 단어겠지만, 도대체 ‘부산형’은 어떤 형이며 ‘복합문화공간’으로 무얼 하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작명소에 복채 몇 푼 던져주고 얻은 이름인가? 이미 갖고 있던 의문을 불식시키기는커녕 도리어 불안과 불신을 더 조장하고 있다.
노자는 “其未兆也, 易謀也”(기미조야, 이모야) 곧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꾀하기 쉽다”고 했고, 또 “治之於其未亂”(치지어기미란) 곧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고도 했다.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나 다름이 없으니 아직 治亂(치란)의 조짐이 나타나기 전이고, 비록 논란이 있더라도 어지러워진 것은 아니다.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하고 세밀하게 또 거시적인 안목으로 요모조모 따지고 다양한 의견도 수렴해 나가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겠다는 뜻에서 오거돈 시장도 ‘숙의 민주주의’ 운운했을 텐데, 도대체 숙의를 했는지, 했다면 누구와 했는지 의문이다.
‘문자’ ‘上德(상덕)’에 나온다. “見之明白, 處之如玉石; 見之黯晦, 必留其謀.”(견지명백, 처지여옥석; 견지암회, 필류기모)
“보아서 명백하면 옥석을 가리듯이 처리하고, 보아서 어렴풋하면 반드시 꾀한 일을 미룬다.” 명백하지 않고 어렴풋한 상태에서 일을 밀어붙인다는 것은 무능과 무책임을 드러내는 짓일 뿐이다.
물이선소이불위(勿以善小而不為)
[요약] (勿: 말 물. 以: 써 이. 善: 착할 선. 小: 작을 소. 而: 말 이를 이. 不: 아닐 불. 爲: 할 위)
착한 일이 작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아무리 착한 일이 작아도 꾸준히 실천하라는 말.
[출전] 《삼국연의(三國演義) 第085回》
[내용] 유비(劉備)가 의형제를 맺은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오(吳)나라를 쳐들어갔다. 초반에는 승승장구하다가 결국 패해 백제성(白帝城)에 있다가 임종(臨終)하게 되었다. 제갈량(諸葛亮)등을 불러 유언을 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태자 유선(劉禪)등에게 유언을 작성해 두었다.
선주가 붕어하자 문무관료들이 애통해하지 않는 이 없었다. 제갈량(諸葛亮)이 관리들과 황제의 관을 받들어 성도로 돌아왔다.
태자 유선(劉禪)이 성곽을 나와 선주의 영구를 영접했다. 영구를 정전(正殿) 안에 안치한다. 장례를 마치고 선주의 유조를 열어 읽으니 이렇다.
- 짐이 처음에는 이질(下痢)일 뿐이었다. 그 뒤 합병증이 와서 거의 치료가 불가능했다. 짐이 듣기로, 사람 나이 5십이면 요절(夭壽)이라 일컫지 않는다 했다. 이제 짐이 60이 넘었으니 죽은들 다시 무슨 여한이 있으리오. 다만 너희 형제를 걱정할 뿐이다. 힘쓰고 힘써라!(勉之!勉之!) 악한 일이 작더라도 해서는 안 되고(勿以惡小而為之), 선한 일이 작더라도 아니 해서는 안 된다(勿以善小而不為). 오직 현명하게 처신하고 덕을 쌓아야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 있다. 애비는 덕이 얕아서 본받을 만하지 않으니 내가 죽은 뒤 너희는 승상과 같이 일을 처리하고 부모처럼 섬기기를 태만히 하지 말고! 내 말을 잊지 말라! 너희 형제들은 거듭 문달 (聞達=명성이 높아짐)을 구하기를 간절히 당부하고 또 당부하노라! -
先主駕崩,文武官僚,無不哀傷,孔明率眾官奉梓宮還成都。太子劉禪出城迎接靈柩,安於正殿之內。舉哀行禮畢,開讀遺詔。詔曰:
朕初得疾,但下痢耳;後轉生雜病,殆不自濟。朕聞「人年五十,不稱夭壽」。今朕六十有餘,死復何恨。但以汝兄弟為念耳。勉之!勉之!勿以惡小而為之,勿以善小而不為。惟賢惟德可以服人;汝父德薄,不足效也,吾亡之後,汝與丞相從事,事之如父,勿怠!勿忘!汝兄弟更求聞達,至囑!至囑!
이하 경남일보 [고전쏙쏙 인성쑥쑥] 착한 것은 작아도 하고, 악한 것은 작아도 하지 말라
소열 황제가 죽음에 이르러 아들인 후주에게 조칙을 내립니다. ‘물이선소이불위(勿以善小而不爲)’하라고 합니다. ‘착한 것이 작더라도 아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명심보감 계선편 둘째 단락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니 하지 말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착한 것은 작더라도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물이악소이위지(勿以惡小而爲之)’하라고 합니다. ‘악한 것은 작더라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소열 황제는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를 말합니다. 유비는 재위에 올라 한나라의 정통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한(漢) 또는 촉한(蜀漢)이라 하였습니다. 아들인 후주는 유선을 말하며, 감부인이 북두칠성 꿈을 꾸어서 얻어 이름을 ‘아두’라 했고 남달리 영특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유선은 촉한을 지켜내지 못하고 위나라에 항복합니다. 칙서의 내용을 너무 잘 실천하여 나라조차도 지탱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명심보감을 배우는 사람들은 반문을 합니다.
조조는 의천검(倚天劍)을 싸움에서 지휘 할 때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차고 다녔습니다. 쇠붙이 베기를 진흙 베듯 하는 청홍검(靑紅劍)은 부하인 하후은에게 주어 그걸 차고 항상 자기의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양벌 싸움에서 하후은은 조자룡을 만나 죽게 되고 청홍검은 조자룡의 차지가 됩니다. 이때 아두를 업고 피란하던 미부인은 조자룡을 만나 아두를 넘겨주고는 마른 우물에 뛰어 들어 목숨을 끊고 맙니다.
조자룡은 갑옷 끈을 풀어 가슴을 보호하는 쇠판인 엄심갑(掩心甲) 아래 아두를 품고 단단히 여미고 유비를 찾아 당양벌에서 청홍검을 휘두르며 적군을 헤쳐 갑니다. 조자룡이 장판교를 지나 유비를 만나 아두를 넘겨주자 “이 보잘것없는 것아, 너 때문에 하마터면 훌륭한 장수 하나를 잃을 뻔했구나” 하고 소리치며 아두를 땅에다 내던집니다.
아랫사람 아끼기를 자신의 자식보다도 끔찍이 여기는 유비의 인자한 성품을 본 조자룡은 감복하여 몸을 황급히 날려 땅에 떨어진 아두를 껴안고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평소 여러 사람에게 배려해주고, 베풀어 주고, 나누어주고, 손가락질 한번 받지 않았던 유비는 후주를 위하여 ‘착한 것은 작아도 하고, 악한 것은 작아도 하지 말라’고 칙령을 내립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말입니다.
生友死友
범거경과 장원백의 이야기.
원백이 병이 들었을 때다. 원백의 병이 깊어지자 같은 군에 살던 郅君章(질군장)과 殷子徵(은자징)이 아침저녁으로 와서 병세를 살폈다. 그러나 원백의 병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숨이 끊어지려 할 즈음에 원백은 이렇게 탄식했다. “恨不見吾死友!”(한불견오사우) “내 사우를 보지 못하는 게 한이로구나!”
그러자 자징이 말했다. “吾與君章盡心於子, 是非死友, 復欲誰求?”(오여군장진심어자, 시비사우, 부욕수구) “나와 군장은 그대에게 마음을 다했는데, 우리가 사우가 아니라면 또 누구를 찾고 싶은가?”
원백이 대답했다. “若二子者, 吾生友耳. 山陽范巨卿, 所謂死友也.”(약이자자, 오생우이. 산양범거경, 소위사우야) “그대 두 사람으로 말하자면 나의 생우일 뿐이네. 산양의 범거경이 이른바 사우일세.”
얼마 있다가 원백은 숨을 거두었다. 원백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말한 死友(사우)란 죽더라도 그 사귐이 변하지 않는 벗 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버리지 않는 벗을 이른다. 그렇다면 生友(생우)는 살 만할 때는 사귀지만 죽음 앞에서는 변할 수 있고 저버릴 수 있는 벗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군장과 자징은 생우는 되지만 사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원백은 느꼈던 모양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생우조차 없는 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문득 어릴 때 많이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어른들과 선생님들은 툭 하면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는 말들을 해주었다. 그런데 어린 내가 듣기에도 꽤 의아했던 말이다. 좋은 친구를 사귀라는 말뜻은 알겠는데, 하필이면 왜 그렇게 말을 할까?
누구나 좋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내가 좋은 친구가 아닌데도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좋은 친구는 좋든 나쁘든 가리지 않고 아무나 친구로 사귄단 말인가?
왜 “네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라”라고는 말해주지 않는 걸까? 내가 좋은 친구가 되는 일이 더 우선되고 긴요하며 좋은 친구를 사귀는 쉬운 길인데 말이다.
제궤의혈 [ 堤潰蟻穴 ]
堤:둑 제 潰:무너질 궤 蟻:개미 의 穴:구멍 혈
개미굴이 둑을 무너뜨린다'라는 뜻으로, 사소한 실수로 큰일을 망쳐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한비자(韓非子)》에서 유래되었다.
제궤의공(堤潰蟻孔) 또는 의혈제궤(蟻穴堤潰)라고도 한다. 《한비자》의 〈유로(喩老)〉편에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비롯되며,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라고 하였다. 또 "천 길이나 되는 둑도 땅강아지나 개미가 만든 구멍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백 척이나 되는 집도 굴뚝 틈새의 불티로 타 버린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예로 명의 편작(扁鵲)과 채(蔡)나라 환공(桓公)의 이야기를 들었다. 편작이 환공을 보고 살갗에 병이 있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심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환공은 자기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노라며 듣지 않았다. 열흘 뒤에 편작이 환공을 보고 근육에 병이 들었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심해질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채공은 역시 듣지 않았다.
다시 열흘 뒤에 찾아온 편작이 위장에 병이 들었다고 하였으나 환공은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또 열흘이 지나 편작은 환공을 찾아와서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다가 돌아갔다. 환공이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다. 편작은 "살갗에 든 병은 약을 바르면 고칠 수 있고, 근육에 든 병은 침석(鍼石)으로 고칠 수 있으며, 위장의 병은 화제(火齊)로 고칠 수 있으나, 골수까지 스며든 병은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환공은 5일 뒤에 갑자기 병이 도져 죽고 말았다.
목숨을 앗아가는 위급한 병도 대수롭지 않은 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제궤의혈은 사소한 실수로 큰 일을 망쳐 버리거나 작은 일을 소홀히 하여 큰 화를 불러옴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속담의 '개미구멍이 둑을 무너뜨린다' 또는 '개미구멍으로 공든 탑 무너진다'와 같은 말이다.
문사행저(聞斯行諸)
[요약] (聞: 들을 문. 斯: 이 사. 行: 갈 행. 諸: 어조사 저)
들었으면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까?
• 斯(사): ~하면. 조건에 따른 결과를 표시하는 접속사.
• 諸(저): 之乎(지호)와 같으며 之(지)는 聞(문) 즉 '들은 것'을 가리키는 인칭대사이고 乎(호)는 의문의 어기를 표시하는 어기조사이다.
[출전] 《논어(論語) 선진(先進)편》十一之 二一
[내용] 논어(論語) 선진(先進)편 21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로가 "옳은 일을 들으면 곧 그것을 행합니까?" 하고 여쭈었다.
공자께서 "부형이 계시는데 어떻게 옳은 일을 들었다고 곧 행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염유가 "옳은 일을 들으면 곧 그것을 행합니까?" 하고 여쭈었다.
공자께서 "옳은 일을 들으면 곧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공서화가 말했다. "유(자로)가 '옳은 일을 들으면 곧 그것을 행합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는 선생님께서 '부형이 계신다'라고 하시고, 구(염유)가 '옳은 일을 들으면 곧 행합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는 선생님께서 '옳은 일을 들으면 곧 행하여라'라고 하시니 제가 미혹스러워서 감히 그 까닭을 여쭈어보는 바입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염유)는 뒤로 물러서기 때문에 그를 전진시켰고, 유(자로)는 잘 나서서 남의 몫까지 하기 때문에 그를 후퇴시킨 것이다.“
• 兼人(겸인): 앞으로 나서서 남의 몫까지 다 할 정도로 적극적이라는 뜻이다.
子路問:「聞斯行諸?」子曰:「有父兄在,如之何其聞斯行之!」冉有問:「聞斯行諸?」子曰:「聞斯行之。」公西華曰:「由也問:『聞斯行諸?』子曰:『有父兄在。』求也問:『聞斯行諸?』子曰:『聞斯行之。』赤也惑,敢問。」子曰:「求也退,故進之;由也兼人,故退之。」
영남일보 [고전쏙쏙 인성쑥쑥] 옳은 말을 들으면 곧 행동해야 할까(聞斯行諸)의 글.
둘째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출생 날 병원 유리창 너머로 봤을 때와, 한 달 만에 집에서 아기를 보니 머리 크기가 많이 커졌습니다. 머리 크기 증가는 수초화(髓哨化. Mylineated)와 시냅스 밀도 증가라고 합니다. 수초화란 신경세포가 지방성 물질(미엘린)로 둘러싸이는 것인데 증가할수록 정보 전달 속도가 빨라진다고 합니다. 아동발달심리학자들은 수초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여섯 살, 첫째 손자가 유치원에서 귀가했습니다. 며늘애가 유치원 가방을 받아서 물병을 꺼내는가 싶더니 종이쪽지를 들고 유심히 살핍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훈아, 이 편지 누가 준 거니?” 하고 묻습니다. 손자는 “부끄러워!” 하고 그냥 웃기만 합니다. 며늘애가 건네준 쪽지엔 ‘재훈아 아나조 사랑해조 이수선이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수초화의 증가로 정보 전달 속도가 빨라진 것일까요? 며늘애가 웃으며 시부모의 눈치를 살피는 듯합니다.
시골 필자의 집은 동네 서당이었습니다. 동지가 가까운 이맘때쯤이면 할아버지가 매기는 학동들의 성적은 대부분 ‘통(通)’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점수는 ‘불(不)’입니다. 할아버지는 학동이 가끔 공부에 진도가 늦으면 “문리가 늦게 터지는 사람도 있어. 천 독 하면 문리가 터져” 하였습니다. 그러면 학동은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서당 교육은 지정의를 바탕으로 개별화된 공부를 합니다. 학동들 능력에 따라 문답을 합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 공서화와 함께 있었습니다. 자로가 문을 열고 들어와 “문사행저(聞斯行諸)” 하고 여쭈었습니다. 즉 “옳은 말을 들으면 곧 행할까요?”라는 뜻입니다. 공자는 “집에 부형이 있으니 먼저 여쭈어보고, 부형이 시키는 대로 행하여라”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곧이어 염유가 들어와 역시 “문사행저(聞斯行諸)” 하였습니다. “그래, 들은 대로 곧 행하라”고 공자는 대답하였습니다.
순간 공서화는 몹시 당황하여 “감히 묻습니다. 선생님의 대답이 두 사람에게 다릅니다. 어찌 그러하신지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공자는 “자로는 행함이 지나쳐서 물러나게 하였고, 염유는 행함에 항상 주저하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느니라” 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자로는 성격이 급하고 난폭한 무뢰한이었습니다. 남보다 앞서려는 용기와 적극성을 가진 돈키호테형 성격이었습니다. 이런 자로를 공자는 덕으로 훈도(薰陶)하였습니다. 차츰 자로는 스승을 헌신적으로 섬겼고, 공자도 자로를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반면 염유는 우유부단한 햄릿형 성격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동일한 질문에 공자는 개별화하여 지도하였습니다.
수초화로 정보 전달 속도가 빠른 손자가 쪽지를 가방에 넣고 온 것은 ‘문사행저(聞斯行諸)’입니다. 아이에겐 능력에 따른 지도가 필요합니다. 순간 “어떻게 할지 아이에게 물어봐” 하고 할머니가 며늘애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속담에 ‘아이 병엔 어미만 한 의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발달하는 아이들의 지도는 언제나 ‘책대로 공식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할 듯합니다.
타면자건 [ 唾面自乾 ]
唾 : 침 타 面 : 낯 면 自 : 스스로 자 乾 : 마를 건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것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으로, 처세에는 인내가 필요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이 말은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것으로, 남이 나의 낯에다 침을 뱉을 때 이를 바로 닦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다. 당(唐)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정권을 독차지하여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탄압책을 쓰는 한편, 유능한 신흥 관리를 많이 등용하고 명신을 적절히 등용하여 정치를 담당시켰기 때문에 천하는 그런 대로 태평했다.
그 무렵, 측천무후의 유능한 신하 중에 누사덕(婁師德)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온후하고 관인(寬仁)하여, 아무리 무례한 일을 당해도 그 자세에 흔들림이 없이 항상 똑같았다. 하루는 그의 아우가 대주자사(代州刺史)로 임명되어 부임하려고 할 때였다.
그는 동생을 불러 "우리 형제가 다같이 출세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만큼 남의 시샘도 크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거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샘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하면 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동생이 "비록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결코 상관하거나 화내지 않고 잠자코 닦겠습니다. 만사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응대하여 결코 형님에게 걱정이나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동생의 대답을 듣고 누사덕은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내가 염려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침을 뱉는다면 그것은 네게 뭔가 크게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침을 닦아버린다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어 그는 틀림없이 더 크게 화를 내게 될 것이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르게 되니, 그런 때는 웃으며 그냥 침을 받아 두는 게 제일이다."
여기서 타면자건(唾面自乾)이란 말이 나왔으며, 이는 처세에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 미덕인가를 말해 준다.
하도낙서[ 河圖洛書 ]
고대 중국에서 예언이나 수리(數理)의 기본이 된 책.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합친 것으로, 《주역(周易)》의 기본이 되는 책이며, 전한(前漢)말에서 후한(後漢)시대에 이루어졌다. 《하도》는 복희씨(伏犧氏)가 황하에서 얻은 그림으로, 이것에 의해 복희는 역(易)의 팔괘(八卦)를 만들었다고 하며, 《낙서》는 하(夏)의 우(禹)가 낙수(洛水)에서 얻은 글로 이것에 의해 우(禹)는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으로서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복희씨 천하(天河)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그려진 무늬에서 하늘과 땅의 생명의 율동상을 깨닫고 이를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것이 《하도》이다. 하늘의 계시로 자연 속에 숨겨진 질서를 읽고, 이를 천지의 기본수인 1에서 10까지의 수로 체계화했다. 《낙서》는 《하도》와 음양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천지변화의 모습을 그려낸 또 하나의 계시문서이다. 《낙서》는 4,200년 전 우임금이 9년 홍수를 다스리던 중, 낙수에서 나온 커다란 거북의 등에 드리워진 여러 개의 점에서 천지 변화의 기틀을 깨닫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시신어민(示信於民)
[요약] (示: 보일 시. 信: 믿을 신. 於: 어조사 어. 民: 백성 민)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법을 정했으면 틀림없이 시행함을 백성에게 알려 믿음을 가게 해야 한다는 말.
[출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내용]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8년 2월 26일자 기사에 세종과 대신들이 정사를 논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대제학 변계량은 건의하기를,
“법을 세워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굳게 결속하여 국가의 주체를 유지하고, 영원히 정치가 잘 되며 오래도록 편안한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법이 실시되는 데 대하여, 백성이 반드시 원망하며 백성의 마음이 화하지 못하면, 곧 하늘의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재난이 생기며 괴변이 생기어 그칠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법을 실시하는 사람은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오래 계속될 수 있기를 강구해야 합니다. 법이 아무리 지극히 잘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실시함에 있어 그 방법을 얻지 못하면 또한 실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이르기를, ‘예로부터 정치를 마련하고 일을 실시함에 있어서 안팎으로 사람의 마음이 모두 옳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결코 성공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정말 옳은 말입니다. 지금 화폐의 법을 마련한 것은 본시 백성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실시함에 있어 조항이 지나친 것은 실로 의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백성의 필수품으로 식량이 없이는 하루라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근래에 흉년이 들어서 식량 때문에 백성들이 허덕이는 것이 과거보다 갑절이나 곤란한데, 이제 곧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화폐만 사용하여 매매하도록 하고 있으나, 백성은 옛 습관에 젖어서 돈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매매할 때에 자기가 사고 싶은 것을 제대로 사들이지 못하고, 각기 있는 물품을 갖고 와서, 몰래 서로 매매하여 국가의 금령을 범하는 자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개 한 집에는 한두 사람, 혹은 서너 사람, 혹은 다섯, 일곱 사람도 되는데, 이제 한 사람이 금령을 위반했기 때문에, 그의 가산을 전부 몰수하여 온 집안사람이 모두 굶게 되오니, 이것이 그 타당치 못한 것의 한 가지이며, 더구나 70세 이상 되었거나 병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속죄하게 해야 하는데, 이제 벌써 그의 가산을 몰수해 놓고 또 그 속죄금(贖罪金)을 징수한다면, 금령을 위반한 사람으로서 돈 한 푼이라도 얻어서 그 죄를 속(贖)하려 한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또 크게 타당치 못한 것의 한 가지입니다. 바라옵건대 백성들로 하여금 돈이나 또는 일반 물품을 가지고 마음대로 매매하게 하여 그 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다만 속죄금을 받을 때와 관청에서 사들이는 물품은 반드시 동전(銅錢)을 사용하게 하면, 돈을 사용하는 법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백성의 마음도 화하게 되어, 재변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내용을 보니 취지는 좋다마는, 법을 세우는 것은 백성에게 미더움을 나타내는 것인데, 어찌 백성이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하여 다시 변경하겠는가. 화폐의 법이 관청에서만 실시되고 민간에서는 실시되지 않는다면, 백성에게 미더움을 나타내는 것이 되지 못한다. 옛적에 세 발 장대[三丈之木]를 세워 놓고 백성에게 신용을 보인 일도 있었으니, 지금 화폐법의 실시도 그것을 그만둔다면 그만두어버리거니와, 만일 이를 사용한다면 어찌 이렇게 분분히 변경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上曰: "觀其辭旨, 意則美矣。 然立法, 所以示信於民也。 豈可以民之好惡, 而更改乎? 錢幣之法, 獨行於官府, 而不行於民間, 則非所以示信於民也。 古者立三丈之木, 以取信者有之。 今錢法之行, 可已則已, 如其用之, 何若是其紛更乎?"
영남일보[고전쏙쏙 인성쑥쑥] 믿음을 보여주는 것(示信)의 글.
울산에 살고 있는 아들집에 갔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 살 난 손자가 사용하는 방의 문이 굳게 잠겨있었습니다. 문엔 손자가 ‘비밀방’이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열쇠를 찾아 몰래 방문을 열어보았습니다. 여닫는 문 안쪽에 ‘각서’가 붙어 있었습니다. 과두체(體, 올챙이 모양)보다 더 삐뚤어진 글씨로 ‘혼냄 벌칙, 인형 뽑기 안합니다’의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아빠와 아들의 공동 각서를 손자가 쓴 듯합니다.
천자문에 ‘신사가복(信使可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일은 마땅히 되풀이 행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하는 말에 전혀 거짓이 없는 일을 ‘믿음(信)’이라 합니다. 성실함을 일컫기도 합니다.
세종실록에는 ‘시신(示信)’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이것은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종 7년에 엽전과 저화(楮貨, 쌀 한 되에 해당되는 종이 돈)에 대하여 논의하던 중 여러 신하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을 보여 주는 것 만한 것이 없다(莫如示信)’고 합니다. 세종은 즉위년에 저화를 보배로 여겨서 그것을 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저화는 관청에서만 통용되고 백성들은 불편하여 엽전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논의하던 세종은 저화를 가진 백성들이 근심하고 걱정할 것이라고 여겨 그들에게 엽전을 주고 저화를 거둬들이라고 합니다.
세종 8년에 대제학 변계량이 화폐법을 개정하여 민간과 관부에서 융통성 있게 운영하자고 건의합니다. 세종은 ‘그 말의 요지를 살펴보니 의도는 매우 좋다. 그러나 법을 세우는 것은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示信於民) 어찌 백성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다시 바꿀 수 있겠는가? 화폐의 법이 관부에서만 홀로 시행되고 민간에서는 시행되지 않는다면, 백성에게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非示信於民) 옛날에 삼장지목(三丈之木)을 세워 놓고 믿음을 얻었던 자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중국 진나라의 재상 상앙(商)은 백성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삼장목(三丈木)을 남문에 세웁니다. 이 삼장목을 북문에 옮기는 사람에게는 10금을 준다고 포고합니다. 그것을 옮기는 사람이 없자 상앙은 다시 50금으로 인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반신반의하면서 삼장목을 북문으로 옮겼습니다. 상앙은 저잣거리에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50금을 상으로 내렸습니다. 상앙은 변법을 만들어 효공시대에 진나라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공자도 ‘사람이 믿음이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큰 수레에 소의 멍에걸이가 없고, 작은 수레에 말의 멍에걸이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프레데릭 아미엘은 ‘믿음이란 거울과 같아 한 번 금이 가면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데미안에 ‘병아리도 알에서 깬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섯 살 손자가 알 속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줄()’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어미닭처럼 알의 바깥쪽에서 ‘탁(啄)’해야 합니다. ‘줄탁동시(啄同時)’는 함께해야 합니다. 어쩌면 손자의 각서도 자기 자신으로 부단히 가기 위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의 지혜일 듯합니다.
言者弗知
말할 언(言-0) 사람 자(老-5) 아닐 불(弓-2) 알지(矢-3)
자신이 느낀 점, 생각한 바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표현하기가 하도 어려워서 답답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는 공자가 말한 대로 말이나 글로는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감각적 경험이나 이성적 사유조차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런 감각과 이성으로도 포착하기 힘든 道(도)를 어찌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도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이가 있다면, 과연 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자는 “言之者弗知”(언지자불지) 곧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아예 못을 박았다. 노자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명칭을 바로 세우고 바르게 써야 한다며 正名(정명)을 강조했던 공자, 말과 글의 정확한 사용과 긍정적 효과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공자조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논어’ ‘陽貨(양화)’편에 다음 대화가 나온다.
공자가 말했다.
“予欲無言.”(여욕무언)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련다.”
그러자 언변이 뛰어난 제자 子貢(자공)이 여쭈었다.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자여불언, 즉소자하술언?) “스승께서 말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어떻게 이어가겠습니까?”
자공의 말인즉, 스승이 말로써 가르치고 일깨워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배우고 익힐 것이며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해줄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언변이 뛰어났던 만큼 자공은 말로써 얼마든지 표현하고 전수할 수 있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식의 축적과 전승이라는 점에서는 타당한 말이지만, 도 또는 진리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공자의 대답을 들어보자.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천하언재? 사시행언, 백물생언, 천하언재?)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돌고, 온갖 것이 생기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하늘, 네 계절, 온갖 것 모두 말이 없이 돌고 돌거나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을 껴안고 있는 도가 무슨 말을 하며, 그런 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가담항설 [ 街談巷說 ]
街 : 거리 가 談 : 말씀 담 巷 : 거리 항 說 : 말씀 설
길거리나 세상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나 뜬소문을 이르는 말.
가설항담(街說巷談)·가담항어(街談巷語)·가담항의(街談巷議)라고도 하며 도청도설(道聽塗說)과 비슷한 말이다. '거리의 말이나 이야기'라는 뜻으로 가(街)는 도시의 번화가, 항(巷)은 골목을 나타낸다. 거리의 뜬소문이라는 뜻의 가담과 항간에 떠도는 말이라는 뜻을 지닌 항설을 반복하여 강조한 성어로 길거리나 일반 민중들 사이에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을 말한다.
중국 후한 초기의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소설(小說)에 대한 설명 가운데 나오는 고사성어이다.
'소설은 패관으로부터 나왔으며 가담항설과 도청도설로 만들어졌다[小說者流 蓋出於稗官 街談巷說 道聽塗說之所造也].' 소설은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를 살피려고 임금이 하급관리인 패관에게 가담항설을 모아 기록하게 함으로써 생겨났다. 세상 이야기나 길거리의 뜬소문은 길에서 듣고 말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패관은 한(漢)나라 때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기록하여 정리해 상부에 보고 하는 일을 담당한 벼슬아치이다. 가담항설이나 도청도설을 모아 만들어진 소설은, 패관들이 소문과 풍설을 주제로 하여 자기 나름의 창의와 윤색을 덧붙여 설화문학(說話文學) 형태로 쓴 패관문학(稗官文學)이다.
#격화소양# [ 隔靴搔痒 ]
隔 : 사이뜰 격 靴 : 신 화 搔 : 긁을 소 痒 : 가려울 양
신발을 신은 채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뜻으로, 일을 하느라고 애는 무척 쓰되 정곡을 찌르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비유한 말이다.
격혜소양(隔鞋搔痒)·격화파양(隔靴爬痒)이라고도 한다. 불가에서 많이 쓰인 말로 《오등회원(五燈會元)》·《속경덕전등록(續景德傳燈錄)》·《무문관(無門關)》 등의 송(宋)·명(明)나라 때 지어진 불서(佛書)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명(明)나라 승려 원극거정(圓極居頂)이 지은 《속전등록(續傳燈錄)》에는 "당에 올라 비를 잡고 침상을 두드리니, 신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上堂更或拈帚敲牀 大似隔靴搔痒)"라는 구절이 있다.
이처럼 격화소양은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헛수고만 하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고사성어이다. 같은 의미에서 《장자(莊子)》에 나온 말로 '온갖 애를 쓰나 아무런 보람이 없다'는 뜻의 노이무공(勞而無功), 도로무공(徒勞無功)이나 '머리가 가려운데 발뒤꿈치를 긁는다'는 뜻의 두양소근(頭痒搔跟), 슬양소배(膝痒搔背) 등의 고사성어가 있다. 반대말로는 본질을 파악하여 단번에 정곡을 찌름을 비유하는 말인 일침견혈(一針見血), 단도직입(單刀直入) 등이 있다.
작관십의(作官十宜)
[요약] (作: 지을 작. 官: 벼슬 관. 十: 열 십. 宜: 마땅할 의)
공직자가 지켜야할 10가지 도리.
[출전] 《선유문(善誘文)》
이하 조선일보 [정민의 世說新語] [499] 작관십의(作官十宜)의 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송나라 진록(陳錄)이 엮은 '선유문(善誘文)'에 공직자가 지녀야 할 열 가지 마음가짐을 적은 '작관십의(作官十宜)'란 글이 있다.
첫째는 '백성의안(百姓宜安)', 즉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위정자는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최우선 가치를 두어 다른 생각 없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는 '형벌의생(刑罰宜省)'이다. 법 집행의 엄정함을 보여주되 형벌은 백성의 편에 서서 덜어줄 것을 생각한다.
셋째는 '세렴의박(稅斂宜薄)'이다. 세금은 과도하게 거두지 않아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넷째는 '원억의찰(冤抑宜察)'이다. 혹여 백성이 억울하고 원통한 경우를 당하지는 않는지 꼼꼼히 살펴 세상과 정치에 대해 분노를 품지 않도록 배려한다.
다섯째는 '추호의간(追呼宜簡)'이다. 추호(追呼)는 아전이 들이닥쳐 세금을 독촉하고 요역(徭役)에 응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을 말한다. 행정명령은 가급적 간소화하는 것이 좋다.
여섯째는 '판결의심(判決宜審)'이다. 송사 판결은 공정한 잣대로 면밀히 살펴 양측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편을 가르거나 사정(私情)이 끼어들면 안 된다.
일곱째는 '용도의절(用度宜節)'이다. 재정은 한 푼이라도 더 절약하고 절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제 돈 아니라고 흥청망청 쓰거나 공연한 선심을 베풀어도 안 된다.
여덟째는 '흥작의근(興作宜謹)'이다. 기쁘고 좋은 일로 신이 나도 흥청대기보다 더욱더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아홉째는 '연회의계살(燕會宜戒殺)'이다. 잔치 모임에서는 살생을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다. 화락한 자리에 살기가 감돌면 화기(和氣)를 해친다.
열째는 '사환의예방(思患宜豫防)'이다. 우환이 걱정되면 미리 방비하는 것이 옳다. 일에 닥쳐 허둥대면 이미 늦다.
끝에 덧붙인 한마디. "이 열 가지 마땅함을 지키면 다스림의 도리는 끝난다(守此十宜, 治道盡矣)."
의심암귀#[ 疑心暗鬼 ]
疑 : 의심할 의, 心 : 마음 심, 暗 : 어두울 암, 鬼 : 귀신 귀
의심하게 되면 없던 귀신도 생긴다. 즉, 의혹을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해진다는 뜻이다. 또한 그릇된 선입견 때문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사람의 집에 말라 죽은 오동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이웃 사람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집 안에 말라 죽은 나무가 있으면 재수가 없다네. 그까짓 것 베어 버리지 않고 왜 여태 놔두나?”
기분이 찜찜해진 오동나무 주인은 얼른 그것을 베어 버렸다. 그러자 이웃 사람이 와서 보고 말했다.
“잘 베어 버렸군. 기왕 베었으니 나나 주지 그래. 땔감으로나 이용하게.”
그 말을 들은 오동나무 주인은 벌컥 화를 냈다.
“자네, 알고 보니 땔감 욕심이 나서 나한테 공연한 소리를 했구먼.”
이웃 사람이 오동나무 주인을 보고 한 소리는 스스럼없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오동나무 주인은 제풀에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음덕양보#[ 陰德陽報 ]
陰 : 응달 음 德 : 덕 덕 陽 : 볕 양 報 : 갚을 보
남이 모르게 덕행을 쌓은 사람은 훗날 그 보답을 버젓이 받는다는 뜻.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재상이던 손숙오(孫叔敖)의 고사가 대표적이 예다.
《일기고사(日記故事)》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손숙오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밖에서 놀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 죽여서 묻어 버렸다.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와 끼니를 거르면서 고민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손숙오가 울면서, “머리 둘 달린 뱀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들었습니다. 아까 그걸 보았습니다. 머지않아 나는 죽어 어머니 곁을 떠날 것입니다. 그것이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그 뱀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다. 손숙오가 “또 다른 사람이 볼까봐 죽여서 묻어 버렸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말을 다 들은 어머니는 “남모르게 덕행을 쌓은 사람은 그 보답을 받는다[陰德陽報]고 들었다. 네가 그런 마음으로 뱀을 죽인 것은 음덕이니, 그 보답으로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말대로 장성한 손숙오는 재상의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초나라 장왕(莊王) 때의 일이다. 손숙오의 고사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에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후로 발생할 희생을 자신으로 마감하겠다는 대아의 정신이 더욱 커보인다.
수우함광 守愚含光 -
無使名過實 守愚聖所藏 在涅貴不淄 曖曖內含光(무사명과실 수우성소장 재날귀불치 애애내함광)
명성이 실제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하나니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은 성인도 지닌 바였다. 검은 곳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음을 귀히 여기고 어둠에서도 속으로 빛을 지녀라.
후한의 문학가이자 서법가였던 최원(崔瑗)의 ‘좌우명(座右銘)’에 나오는 구절이다. 최원은 초서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최초로 초서 이론을 제창했다. 그는 젊은 날 형이 마을 사람에게 살해되자 칼로 복수한 뒤 오랜 세월 도망자 생활을 하다 사면받은 적이 있다. 게다가 나이 40이 넘어 관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법에 저촉돼 감옥에 갇힌 적도 있다. 물론 곧 석방됐지만, 이후에도 자신의 상관과 연좌돼 곤경에 처하는 등 삶이 순탄치 않았다.
이런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 마음 수양을 위해 자신의 책상머리 오른쪽에 붙여놓고 늘 마음에 새기던 글이 바로 ‘좌우명’이다. 어리석음을 지키라는 구는 속으로 지혜로워도 그것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노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검은 곳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는다는 구는 공자의 말이다. 이처럼 유가와 도가를 잘 섞어 빚어낸 그의 글은 후대 모든 좌우명의 원조가 됐다.
명성이 실제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하나니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은 성인도 지닌 바였다. 검은 곳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음을 귀히 여기고 어둠에서도 속으로 빛을 지녀라.
후한의 문학가이자 서법가였던 최원(崔瑗)의 ‘좌우명(座右銘)’에 나오는 구절이다. 최원은 초서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최초로 초서 이론을 제창했다. 그는 젊은 날 형이 마을 사람에게 살해되자 칼로 복수한 뒤 오랜 세월 도망자 생활을 하다 사면받은 적이 있다. 게다가 나이 40이 넘어 관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법에 저촉돼 감옥에 갇힌 적도 있다. 물론 곧 석방됐지만, 이후에도 자신의 상관과 연좌돼 곤경에 처하는 등 삶이 순탄치 않았다.
이런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 마음 수양을 위해 자신의 책상머리 오른쪽에 붙여놓고 늘 마음에 새기던 글이 바로 ‘좌우명’이다. 어리석음을 지키라는 구는 속으로 지혜로워도 그것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노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검은 곳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는다는 구는 공자의 말이다. 이처럼 유가와 도가를 잘 섞어 빚어낸 그의 글은 후대 모든 좌우명의 원조가 됐다.
예나 지금이나 명성을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명성이 실제를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때로는 화를 부르기도 한다. 어리석음을 지키라는 말은 지금의 감각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얕은 지식과 재주로 너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검은 물에서도 물들지 않고 어둠에서도 빛을 지니는 것은 거친 세파에도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렵지만 그래서 더욱 고귀하다. 2000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도 좌우명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상명대 교수
수우함광(守愚含光)
[요약] (守: 지킬 수. 愚: 어리석을 우. 含: 품을 함. 光: 빛 광)
어리석음을 지키고 빛을 품으라는 뜻으로, 천박한 지식과 재주로 너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굳게 지키는 라는 의미.
[출전] 《문선(文選). 후한(後漢)의 학자 최원(崔瑗) 좌우명(座右銘)》
[내용] 좌우명(座右銘)은 늘 자리 옆에 적어놓고 자기(自己)를 경계(警戒)하는 말인데 후한(後漢)의 학자 최원(崔瑗) 좌우명(座右銘)이 문선(文選)에 올라 좌우명의 시초가 되었다.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학자 최원(崔瑗, 78-143)
후한 탁군(涿郡) 안평(安平) 사람. 자는 자옥(子玉)이고, 최인(崔駰)의 아들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지만 학문에 뜻을 두고 매진하여 가규(賈逵)에게 배워 천문역산(天文曆算)에 정통했다. 경방(京房)의 『역전(易傳)』에도 밝았다. 순제(順帝) 때 무재(茂才)로 천거를 받아 40살이 넘어서야 급령현(汲縣令)을 지냈다. 이때 도전(稻田) 수백 경(頃)을 개간하여 주민들의 생활을 발전시켰다. 한안(漢安) 초에 제북상(濟北相)으로 옮겼다.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정위(廷尉)에 잡혀갔는데, 논변을 통해 억울함을 따져 석방되었다. 마융(馬融), 장형(張衡)과 절친했다. 저서에 『초서세(草書勢)』가 있다.
최원 [崔瑗]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최원이 쓴 좌우명은 다음과 같다.
無道人之短 無說己之長 施人愼勿念 受施愼勿忘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자기의 장점도 말하지 말라.
남에게 베푼 것은 생각하지 말고, 은혜를 받은 것은 잊지 말라.
世譽不足慕 惟仁爲紀綱 隱心而後動 謗議庸何傷
세상의 명예를 부러워 말고, 오직 어진 마음으로 근본을 삼아라.
마음속으로 헤아리고 행하며, 비방하는 말로 어찌 남을 상하게 하랴.
無使名過實 守愚聖所藏 在涅貴不淄 曖曖內含光
실제 이상으로 평가되지 않게 하며, 어리석음을 소중하게 지키고 간직하라. 진흙 속에서도 그에 물들지 않음을 귀하게 여기고, 어둑 속에서 광명을 지녀라.
柔弱生之徒 老氏戒剛彊 行行鄙夫志 悠悠故難量
부드럽고 연약함이 삶의 도반이니, 노자는 굳세고 강한 것을 경계했도다.
행동만 앞서는 것은 졸장부의 짓이니, 후일에 닥쳐 올 재앙을 가늠키 어렵다.
愼言節飮食 知足勝不祥 行之苟有恒 久久自芬芳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며, 만족함을 알면 불상사를 이겨낸다.
만일 이것들을 늘 지켜 나간다면, 삶이 저절로 영원히 향기로우리라.
식소사번[ 食少事煩 ]
食 : 먹을 식 少 : 적을 소 事 : 일 사 煩 : 번거로울 번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다, 즉 몸을 돌보지 않고 바쁘게 일한다는 뜻.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두번 째 출사표를 내고 위나라 공략에 나선 제갈 량이 사마 의와 대치하고 있을 때이다. 제갈 량은 속전속결하려고 했으나 사마 의는 제갈 량이 지치기만을 기다리며 지구전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사자들만 자주 오고 갔다. 하루는 사마 의가 촉의 사자에게 “공명은 하루 식사와 일처리를 어떻게 하시오?” 하고 물었다. 사자는 “승상께선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수 일을 처리하시며 식사는 아주 적게 하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마 의는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으니 어떻게 오래 지탱할 수 있겠소?(食少事煩 安能久平)”라고 말했다. 사자가 돌아와 사마 의의 말을 전하니 “그 말이 맞다. 나는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라고 제 갈량은 말했다. 결국 제갈 량은 병이 들어 54세의 나이로 오장원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만 많이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즈음에는 생기는 것도 없이 헛되이 바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信士市民
- 믿을 신(人-7) 선비 사(士-0) 저자 시(巾-2) 백성 민(氏-1)
장원백이 죽은 뒤에 범식은 꿈을 꾸었다.
문득 장원백이 검은 禮冠(예관)을 쓰고 갓끈을 드리운 채 짚신을 끌면서 나타나 자신을 부르며 말하는 것이었다.
“巨卿! 吾以某日死, 當以爾時葬, 永歸黃泉. 子未我忘, 豈能相及?”(거경! 오이모일사, 당이이시장, 영귀황천. 자미아망, 기능상급)
“거경! 나는 아무 날에 죽어서 아무 때에 장례를 치르고 황천으로 영영 돌아가게 되었네. 그대가 날 아직 잊지 않았다면, 제때 날 보러올 수 있겠는가?”
거경은 멍한 상태로 깨어나서는 슬피 울었다. 곧이어 옷을 갈아입고서 장례가 끝나기 전에 닿으려고 서둘러서 달려갔다. 거경이 채 이르기도 전에 喪禮(상례)는 끝이 났고 상여가 葬地(장지)를 향해 집을 떠났다.
그런데 장지를 눈앞에 두었을 때, 상여가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모친이 상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원백아, 혹시 바라는 거라도 있느냐?”
이윽고 멀리서 흰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소리쳐 울면서 오는 이가 있었다. 원백의 모친이 바라보더니, “저 사람은 필시 범거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거경이 이르러서는 상여를 두드리며 말했다. “行矣元伯! 死生路異, 永從此辭.”(행의원백! 사생로이, 영종차사) “이젠 가게나, 원백! 죽음과 삶의 길이 다르니, 이제 영원히 이별이라네.”
장례에 참석한 천여 명이 모두 눈물을 뿌렸다. 거경이 상여의 수레 줄을 잡고 이끄니, 그제야 상여가 앞으로 나아갔다. 거경은 무덤 주위에 나무를 심은 뒤에 떠났다.
범거경과 장원백은 선비였다. 비록 뛰어난 정치적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고 대단한 문장가도 아니었으나, 미더운 선비 곧 信士(신사)였다. 공자가 말한 君子儒(군자유)인 셈이다.
오늘날에도 선비는 많다.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모든 시민이 곧 선비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은 누구나 교육을 받고 공무원이 될 수 있으니, 그가 바로 선비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성패는 곧 미더운 선비로서 시민이 얼마나 많으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信士市民(신사시민)!
용자불구(勇者不懼)
[요약] (勇: 날랠 용. 者: 사람 자. 不: 아닐 불. 懼: 두려워할 구)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뜻으로, 참으로 용감한 사람은 도의(道義)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므로 어떠한 경우를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말.
[출전] 《논어(論語) 헌문(憲問) 第十四之三十》
[내용] 논어(論語) 헌문(憲問)편 30장에서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셋인데 나는 아직 행하지 못하고 있다. 즉,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공이 "선생님께서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라고 했다. (군자의 도에 대한 공자의 높은 요구 수준을 엿보게 하는 말이다.)
子曰:「君子道者三,我無能焉:仁者不憂,知者不惑,勇者不懼。」子貢曰:「夫子自道也!」
이하 경북일보 윤용섭의 5분 칼럼- 따라쓰는 논어(8)
知仁勇 (지인용) 지혜롭고, 어질며, 용감한 사람이 되라의 글.
윤용섭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
공자님의 가르침이 유학이며 이것이 거의 종교수준으로 존숭되면 유교가 된다. 일찍이 한나라의 무제는 동중서라는 대학자의 건의를 받아들여 춘추전국시대를 수놓은 제자백가 사상 가운데 유학을 국학으로 결정하고 태학을 세워 천하의 수재가 공자의 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래서 유학은 유교가 되었다.
유교의 1차적 목적은 인격의 완성인데, 어떤 상태를 인격의 완성이라 하는가 하면, 대체로 지인용智仁勇 세 가지의 덕성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혜롭고 어질면서 용기도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유교란 교육철학의 1차적 목표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덕성을 고르게 갖추기란 매우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이 어질기 힘들고 용감하기 어렵다. 어진 사람이 용기까지 겸하기도 어렵고 어진 사람이 지혜롭기도 어렵다. 용기가 넘치는 사람이 지혜롭거나 어질기 어렵고 이 모두를 갖추기는 더욱 어렵다. 혹은 지혜롭고 어질지만 용맹이 없을 수도 있다. 이처럼 세 덕성을 온전히 겸비하기 어렵다 하여 이 세 가지를 삼달덕三達德이라 부른다.
그러면 이 삼달덕의 성격은 어떠하며, 무슨 좋은 점이 있는가? 먼저, 지혜로운 자는 미혹하거나 의심이 없다. 항상 고요히 사물의 본질을 꿰고 있다. 다음, 어진 사람은 근심이 없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마음은 늘 평안하다. 인은 곧 사람의 집이니, 집안에 있으니 평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은 언제라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지인용 세 가지는 모두 사람을 평안하고 여유 있게 한다.
<자한편>
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一. 지혜로운 자는 미혹되지 않고
知者不惑 (지자불혹)
二.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으며
仁者不憂 (인자불우)
三. 용감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勇者不懼 (용자불구)
**인격의 완성이란 대체로 슬기로움과 어짐과 용기, ‘지인용(知仁勇)’ 세 가지의 덕성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어떤 때에도 통하는 세 가지 덕목이라 하여 ‘삼달덕(三達德)’이라고도 부른다.
‘강거목장(綱擧目張)’.
1450년 음력 2월, 세종이 사망했을 때 신하들이 한마디로 요약한 세종 정치의 비결이다.
국왕이 그물의 벼리(綱)를 들어 올리면 그물눈(目)이 저절로 펴졌다는 뜻이다. 중요 부분만 움직이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이 말은 모든 조직 운영자의 꿈이다. ‘그물의 벼리와 그물눈’의 비유는 ‘서경(書經)’에서 유래해 전통시대 지식인들이 애용하던 것으로, 통치술에 관심 많았던 한비자(韓非子)의 저술에서도 보인다. 예컨대 한비자는 “현명한 군주라면 관리를 움직이지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불이 났을 경우 휘하 관리에게 빨리 물동이 들고 달려가라고 하는 ‘일인지용(一人之用)’은 낮은 단계의 인재 쓰기이다. 그보다는 그에게 권한을 주어 많은 사람을 움직여 불을 끄게 해야 한다. 이른바 ‘조편사인(操鞭使人)’의 위임경영을 할 때 벼리 장악 능력이 높아진다.
그러면 어떻게 벼리 장악 능력을 높일 수 있을까? 세종이 ‘여러 가지 일을 종합해서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한 가지 원칙으로 만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세종실록에 기록된 그 비법의 하나는 임현사능(任賢使能) 이후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인재 쓰기이다. 세종은 임현사능, 즉 기획할 수 있는 안목과 관리능력을 가진 어진(賢) 인재에게 위임하고, 맡겨진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내는 유능한(能) 인재를 부리는 데 뛰어났다. 가령 국방 분야의 경우, 정흠지·김종서·이천 등 어진 인재에게는 지휘권과 인사권을 통째로 위임했다. 이에 비해 최윤덕·김윤수·장영실 등 유능한 인재에게는 구체적인 임무를 배당해 일을 성취하게 했다.
그러면 어떻게 벼리 장악 능력을 높일 수 있을까? 세종이 ‘여러 가지 일을 종합해서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한 가지 원칙으로 만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세종실록에 기록된 그 비법의 하나는 임현사능(任賢使能) 이후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인재 쓰기이다. 세종은 임현사능, 즉 기획할 수 있는 안목과 관리능력을 가진 어진(賢) 인재에게 위임하고, 맡겨진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내는 유능한(能) 인재를 부리는 데 뛰어났다. 가령 국방 분야의 경우, 정흠지·김종서·이천 등 어진 인재에게는 지휘권과 인사권을 통째로 위임했다. 이에 비해 최윤덕·김윤수·장영실 등 유능한 인재에게는 구체적인 임무를 배당해 일을 성취하게 했다.
그런데 어진 인재와 유능한 인재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상 주고 벌 내리는 데 엄정해야 한다. 전자(역할 구분)가 인재들로 하여금 신명 나게 일하도록 하는 필요조건이라면, 후자(신상필벌)는 충분조건이다. 세종은 ‘최윤덕 정승임명’이나 ‘신숙주 숙직사건’ 등에서 보듯이 일 잘한 인재들을 칭찬하고 그들에게 후한 상을 주곤 했지만, 잘못한 관리를 처벌하는 데도 엄격했다. 지방 발령을 꺼려 병들었다고 거짓말한 조극관을 전라도에 유배 보낸 일 등이 그 예다.
세종 정치의 두 번째 비법은 사필사고(事必師古)를 거쳐 제도를 밝게 정비하는(制度明備) 조직운영이다. 세종은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옛사람들이 성공하고 실패한 것을 거울삼고, 오늘날의 이롭고 해로운 점을 참작하게’ 했다. 그는 당시 논의되는 거의 모든 문제가 과거에 이미 논의되었으며, 추구하는 해결책까지 역사 속에 다 제시되어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세종실록에는 ‘계고(稽古)’ 즉 ‘옛일을 상고(詳考)하라’는 말이 빈번히 나오는데 세종은 제안된 정책의 시행조건이나 진법(陣法)의 유형, 그리고 인재 쓰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사례를 뽑아 검토하게 했다.
세종 정치의 두 번째 비법은 사필사고(事必師古)를 거쳐 제도를 밝게 정비하는(制度明備) 조직운영이다. 세종은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옛사람들이 성공하고 실패한 것을 거울삼고, 오늘날의 이롭고 해로운 점을 참작하게’ 했다. 그는 당시 논의되는 거의 모든 문제가 과거에 이미 논의되었으며, 추구하는 해결책까지 역사 속에 다 제시되어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세종실록에는 ‘계고(稽古)’ 즉 ‘옛일을 상고(詳考)하라’는 말이 빈번히 나오는데 세종은 제안된 정책의 시행조건이나 진법(陣法)의 유형, 그리고 인재 쓰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사례를 뽑아 검토하게 했다.
과거의 사례를 집대성하여 그것으로부터 성공한 조건과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려는 세종의 노력은 집현전이라는 싱크탱크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록에 숱하게 나오는 ‘집현전에 명하여 옛 사례를 아뢰게 하라’는 지시가 그것이다. 요약해보면, 유능한 사람을 골라내서 잘 부릴 수 있는 뛰어난(賢) 인재를 조직의 벼리에 해당하는 곳(nexus)에 배치하되, 그들로 하여금 선진적인 제도 안에서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한 것이 세종의 국가경영 비결이었다고 하겠다. 세종 재위 중반이 되면 ‘뛰어난 행정능력 소유자들과 무예 탁월자들이 모두 제자리에 나아가 일하고 싶어 했으며, 국왕이 비록 정무를 보지 않으셨으나 별로 적체된 일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강거목장의 효과라고 판단된다.
문제는 조직의 벼리에 해당하는 곳이 어디며, 그 자리에 누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하는 지도자의 안목과 능력이다. 세종은 도대체 그러한 안목과 능력을 어디에서 터득했을까? 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용인술과 역사 배우는 방법에 더욱 관심이 가는 요즘이다.
“人事가 萬事”…유능한 인재에 권한 위임 후 반드시 신상필벌 |
십보방초[ 十步芳草 ]
十:열 십 步:걸음 보 芳:꽃다울 방 草:풀 초
열 걸음의 짧은 거리에도 아름다운 꽃과 풀이 있다'라는 뜻으로, 인재는 도처에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 등에서 유래되었다.
《설원》은 고대 중국의 제후나 선현들의 일화와 우화 등을 수록한 교훈적인 설화집이다. 이 책의 〈담총(談叢)〉편에 "열 걸음도 안 되는 작은 연못일지라도 반드시 향기로운 풀이 있고, 열 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도 반드시 충성스러운 선비가 있다(十步之澤, 必有芳草, 十室之邑 必有忠士)"라고 하였다.
왕부(王符)가 지은 《잠부론(潛夫論)》의 〈실공(實貢)〉편에는 "무릇 열 걸음의 짧은 거리에도 반드시 풀이 무성하고, 열 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도 반드시 준수한 선비가 있다(夫十步之間, 必有茂草, 十室之邑, 必有俊士)"라는 구절이 있다.
또 《수서(隋書)》의 〈양제기(煬帝紀)〉편에도 "이제 우주가 하나로 통일되고, 문장과 궤범도 통일되었으니, 열 걸음 안에 반드시 향기로운 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찌 세상에 빼어난 인재가 없으리오(方今宇宙平一, 文軌攸同, 十步之內, 必有芳草, 四海之中, 豈無奇秀)"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십보방초는 도처에 인재가 있음 또는 세상에는 훌륭한 사람이 많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초화계흔(招禍啓釁)[요약] (招: 부를 초. 禍: 재화 화. 啓: 열 계. 釁: 피 바를, 흠 흔)
(말은) 화를 부르고, (행동은) 흠 만든다는 뜻으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
[출전] 《윤기(尹愭) 무명자집(無名子集) 문고 제4책》
[내용]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윤기[尹愭. 1741(영조 17)∼1826(순조 26)의 무명자집(無名子集) 문고 제4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식들을 깨우치고 스스로도 반성하며 (여기에 기록한 것은 오로지 해를 피하여 몸을 온전히 지키기를 주지(主旨)로 삼았다) 〔警兒輩 又以自省 此錄專以保身避害爲主意〕
저기 저 새들 보면 낌새 살펴 날고 앉네. 하물며 사람이 화(禍)가 자초할까를 생각 않으랴? 명철하게 처신하여 자기 몸 지키라는 경전의 가르침이 전해져 내려오니 고결한 행동과 겸손한 말 당부하신 성인 말씀 어찌 나를 기만한 것이리오(相彼鳥矣,色擧翔集。矧伊人矣,不思自及?明哲保身,經有訓垂。危行言孫,聖豈我欺)?
내 보니 사람들은 누구든지 권력 탐해 모르누나, 깊은 함정 권력 속에 있는 줄을. 내 보니 사람들은 누구든지 권세 좇아 모르누나, 향기로운 미끼 권세 속에 있는 줄을. 탐하는 그 순간엔 어찌하여 두려워할 줄 모르고 붙좇는 그 순간엔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我觀夫人,莫不貪權,不知深穽,乃在乎權;我觀夫人,莫不趨勢,不知香餌,乃在乎勢。方其貪也,胡不懼兮?方其趨也,胡不悟兮?).
뜻대로 되어갈 땐 수(數)가 높다 여기지만 실패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네(得意之時,謂巧過人;覆敗之後,悔無及焉。).
입〔口〕은 화를 부르고 행동은 흔단(釁端)을 여니 명심하고 명심하여 경계하고 조심하라(惟口招禍,惟動啓釁,念茲在茲,必戒必愼)。
..... 말에 대한 경계는 예로부터 서적에 거듭거듭 실렸을 뿐만이 아니니, 지금 다시 췌언(贅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닥치는 환란이 대체로 다 여기에서 나오니, 말을 조심하지 못하면 크게는 패가망신하며 작게는 창피를 당하고 미움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한번 입에서 나갔다 하면 말〔馬〕을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고 손으로 가릴 수도 없으며 바닷물로 씻어낼 수도 없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누군들 말조심해야 함을 모르겠으며 누군들 함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이 결국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늘 잊지 않고 생각하여 말하기 전에 재삼 생각하고 내뱉으려다가 도로 거두어들인다면 말해야 할 때는 말하고 말하지 말아야 할 때는 말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차츰 때에 맞게 말하는 경지에 이르러 허물도 없고 후회도 없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
......惟口之戒,自古載籍不翅申複,今不必更事架疊。而大抵人之患害皆從這裏出來,苟不能愼是樞機,則大而亡身覆宗,小而貽羞見憎。一脫於口,而駟莫能追,手莫能掩,海莫能洗,眞可畏也。
然人亦孰不知言之當愼,孰不欲口之必緘?而卒不能然者何也?以此心之不能存故也。苟能念念不忘,臨言而三思,欲發而還收,則可以當言而言,不當言而不言,馴致於時然後言,无咎无悔矣,豈不美哉?....
一口二言
한일(一-0) 입구(口-0) 두이(二-0) 말언(言-0)
한국인도 關係(관계)를 중시하지만, 중국인에게 관계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반드시 ‘꽌시(關系)’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沒有關系辦不成事”(몰유관계판불성사, ‘메이여우꽌시 반부청쉬’) 즉 “꽌시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까지 말할 정도니, 중국에서 관계는 일과 삶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꽌시를 형성하고 단단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信(신)이다. 요컨대, 중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긴요한 덕목은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꽌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믿음은 곧 말의 믿음이다. 그 말이 진심을 담은 것이고 그 말대로 행동할 것임을 명명백백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그토록 중시되는 것은 그만큼 믿을 만한 말을 하는 사람, 곧 믿을 사람이 적다는 뜻이기도 하다.
믿을 만한 말이 적다는 것, 믿음을 주는 이가 드물다는 것은 곧 무슨 말이든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결코 불신이나 불화를 조장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날마다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툭하면 公言(공언)하는 정치가들의 空言(공언)을 신물이 나다 못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지 않았는가. “一口二言, 二父之子”(일구이언, 이부지자) 곧 “한 입으로 두말하면 두 애비의 자식”이라느니 “男兒一言重千金”(남아일언중천금) 즉 “사내의 한마디 말은 천금의 무게가 있다”느니 늘어놓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맵시를 내기 위해 머리와 옷을 꾸미는 일은 해도 飾言(식언)을 해서는 안 되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 먹더라도 食言(식언)만큼은 해서는 안 되는데, 말을 꾸미고 입 밖에 낸 말을 도로 삼키는 일을 사람들은 예사로 한다. 내뱉기 쉬운 게 말이지만, 가벼워서는 안 되는 게 또한 말이다. 말의 무게는 사람의 무게인지라, 말이 가볍다는 것은 곧 사람이 가볍다는 뜻이다. 사람이 가볍다는 것은 마음이 얄팍하거나 생각이 얕거나 행동이 허술하다는 뜻이다.
기려멱려 騎驢覓驢
채근담(菜根譚) 후집(後集) <전집 225장, 후집 134장>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다.
後-071.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다.<騎驢覓驢:기려멱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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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071.
纔就筏(재취벌)하여 便思舍筏(변사사벌)하면
方是無事道人(방시무사도인)이나
若騎驢(약기려)하여 又復覓驢(우부멱려)하면
終爲不了禪師(종위불료선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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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을 타자 곧 뗏목을 버릴 것을 생각하면
이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지만
만일 나귀를 타고 있으면서 또 다시 나귀를 찾는다면
끝내 깨닫지 못하는 선사가 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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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纔(재) : 비로소. ~에서야.
○ 筏(벌) : 뗏목.
○ 便思舍筏(변사사벌) : 곧 뗏목을 버릴 것을 생각함. 강을 건너면 뗏목이 소용없으니 뗏목을 버린다는 뜻.
○ 方(방) : 바야흐로. 장차.
○ 無事道人(무사도인) : 불교에서는 깨달은 이들의 경지를 표현할 때 쓰는 말로 '일없는 한가로운 도인(無事閑道人)'을 말하며 눈앞의 어떤 현상에 집착하여 정신을 빼앗기는 일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 騎驢又復覓驢(기려우복멱려) : 騎驢覓驢(기려멱려).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다는 뜻으로 부처를 구하려면 자기의 마음 가운데서 구하면 될 것을 마음 안에 부처를 두고서 마음 밖에서 찾는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求心内佛,却心外法). <傳燈錄(전등록)> 覓은 찾을 ‘멱’. 驢는 당나귀 ‘려(여)’.
○ 不了禪師(불료선사) : 진리를 깨닫지 못한 승려.
올해는 돼지해다. 인간과 돼지의 깊은 관계는 한자 가(家)가 잘 보여준다. 지붕(宀) 아래 돼지(豕)를 키우면 사람이 사는 집이니 “돼지가 없으면 집이 아니다(居無豕 不成家)”라 했다.
돼지를 뜻하는 한자도 많다. 십이지(十二支) 중 돼지는 해(亥)다. 시(豕)와 마찬가지로 모양을 본뜬 상형자다. 글자가 비슷해 해석을 틀리면 ‘노어해시(魯魚亥豕)’라고 말했다. “글자를 세 번 베껴 쓰면 물고기(魚)가 노나라(魯)로, 황제(帝)가 호랑이(虎)로 바뀐다(書三寫 魚成魯 帝成虎)”는 『포박자(抱朴子)』에서 나온 성어다.
저(猪)는 멧돼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세 가지 털 색깔로 무리 지어 사는 돼지(豕而三毛叢居者)”로 풀이했다. 돈(豚)은 작은 돼지(小豕)다.
체(彘)는 큰 돼지다. 저와 돈을 섞어 쓰는 중국에 유독 체는 쓰지 않는다. 한(漢)을 세운 유방(劉邦)의 부인 여후(呂后)와 척부인(戚夫人)의 악연 때문이다. 척부인이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한 데 앙심을 품은 여후는 유방이 죽자 척부인을 ‘인체(人彘)’로 만들었다. 산 채로 팔다리를 자르고 귀에 청동을 붓고 혀를 잘랐다. 말 그대로 ‘사람 돼지’를 만든 잔혹한 형벌이다. 이후 중국인은 돼지 체(彘) 사용을 꺼렸다.
중국의 돼지 사랑은 각별하다. 속담이 여럿 전한다.
돼지를 뜻하는 한자도 많다. 십이지(十二支) 중 돼지는 해(亥)다. 시(豕)와 마찬가지로 모양을 본뜬 상형자다. 글자가 비슷해 해석을 틀리면 ‘노어해시(魯魚亥豕)’라고 말했다. “글자를 세 번 베껴 쓰면 물고기(魚)가 노나라(魯)로, 황제(帝)가 호랑이(虎)로 바뀐다(書三寫 魚成魯 帝成虎)”는 『포박자(抱朴子)』에서 나온 성어다.
저(猪)는 멧돼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세 가지 털 색깔로 무리 지어 사는 돼지(豕而三毛叢居者)”로 풀이했다. 돈(豚)은 작은 돼지(小豕)다.
체(彘)는 큰 돼지다. 저와 돈을 섞어 쓰는 중국에 유독 체는 쓰지 않는다. 한(漢)을 세운 유방(劉邦)의 부인 여후(呂后)와 척부인(戚夫人)의 악연 때문이다. 척부인이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한 데 앙심을 품은 여후는 유방이 죽자 척부인을 ‘인체(人彘)’로 만들었다. 산 채로 팔다리를 자르고 귀에 청동을 붓고 혀를 잘랐다. 말 그대로 ‘사람 돼지’를 만든 잔혹한 형벌이다. 이후 중국인은 돼지 체(彘) 사용을 꺼렸다.
중국의 돼지 사랑은 각별하다. 속담이 여럿 전한다.
중국 톈진(天津)과 허베이(河北)에서는 정월 3일 종이를 오린 돼지 전지(剪紙)를 창에 붙였다. ‘비저공문(肥猪拱門)’ 풍속이다. 살진 돼지가 문을 열 듯 뜻밖에 재물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저팔계는 인삼과를 먹고도 맛을 전혀 모른다(猪八戒吃人参果 全不知滋味)”는 헐후어(歇后語·중국 속담)는 『서유기』에서 나왔다. 사람을 닮은 불로장생의 과일의 진가를 모르는 저팔계를 말한다. ‘돼지 목에 진주’란 뜻이다.
“사람은 이름을 날리는 게 두렵고 돼지는 살찌는 게 두렵다(人怕出名 猪怕壯)”는 말도 있다. 청(淸)의 소설가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紅樓夢)』이 출처다.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에도 돼지가 등장한다. 1945년 4월 옌안(延安) 7차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다. 마오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훔치지 말고, 꾸미지 말고, 허풍떨지 말라(不偸·不裝·不吹)”고 강조했다. 특히 거짓 꾸밈을 경계해 “돼지코에 파 뿌리를 꽂고 코끼리인 척하는(猪鼻子里插葱 裝象)” 행태를 금했다.
마오의 삼불론(三不論)은 이후 형식주의를 배격할 때 종종 인용한다. “남의 글을 자기 것인 양 표절하지 말아야 한다.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른다 해야지 코에 파를 꽂은 돼지가 되지 말라. 하나는 하나, 둘은 둘일 뿐 과장은 안 된다”고 역설했다. 경제 실상을 다루는 공직자가 새겨야 할 문구다.
“저팔계는 인삼과를 먹고도 맛을 전혀 모른다(猪八戒吃人参果 全不知滋味)”는 헐후어(歇后語·중국 속담)는 『서유기』에서 나왔다. 사람을 닮은 불로장생의 과일의 진가를 모르는 저팔계를 말한다. ‘돼지 목에 진주’란 뜻이다.
“사람은 이름을 날리는 게 두렵고 돼지는 살찌는 게 두렵다(人怕出名 猪怕壯)”는 말도 있다. 청(淸)의 소설가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紅樓夢)』이 출처다.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에도 돼지가 등장한다. 1945년 4월 옌안(延安) 7차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다. 마오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훔치지 말고, 꾸미지 말고, 허풍떨지 말라(不偸·不裝·不吹)”고 강조했다. 특히 거짓 꾸밈을 경계해 “돼지코에 파 뿌리를 꽂고 코끼리인 척하는(猪鼻子里插葱 裝象)” 행태를 금했다.
마오의 삼불론(三不論)은 이후 형식주의를 배격할 때 종종 인용한다. “남의 글을 자기 것인 양 표절하지 말아야 한다.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른다 해야지 코에 파를 꽂은 돼지가 되지 말라. 하나는 하나, 둘은 둘일 뿐 과장은 안 된다”고 역설했다. 경제 실상을 다루는 공직자가 새겨야 할 문구다.
서자여사 逝者如斯
[漢字, 세상을 말하다] 逝者如斯<서자여사>
“흐르는 시간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네(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공자(孔子)가 시냇가에서 말했다는 『논어(論語)』 자한(子罕)편 구절이다. 문장가 소식(蘇軾)도 ‘적벽부(赤壁賦)’에서 “떠난 사람은 이와 같다”며 서자여사(逝者如斯)를 읊었다.
올 한 해에도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다. 1924년생 두 거물이 동과 서에서 한 달 터울로 떠났다. 필명 진융(金庸)으로 익숙한 무협소설가 겸 신문인 자량융(査良鏞)과 조지 HW 부시 41대 전 미국 대통령이다. 둘은 생전에 자식을 먼저 보냈다. 자량융의 장남 자촨샤(査傳俠)는 1979년 미국 유학 중 목숨을 끊었다. 훗날 『의천도룡기』 후기에 “장취산이 목숨을 끊는 모습을 본 장삼풍의 비통함과 사손이장무기의 부고를 들었을 때의 상심을 너무 가벼이 적었다. 인생은 실로 그렇지 않은데 내가 당시 몰랐을 뿐”이라고 했다. 아들을 보낸 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찾아 불경에 심취했다. “한바탕 떠들썩한 뒤 조용히 떠날 뿐(大閙一場 悄然離去).” 이후 인생 물음에 자량융의 답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 역시 딸 로빈을 네 살 때 백혈병으로 보냈다. 부인과 함께 구름 위에서 딸을 만나는 추모 만평이 세계인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그는 2012년 삭발을 했다. 백혈병 투병 중인 재직시절 경호원의 아들을 위해서다.
자량융은 소설가보다 신문쟁이였다. 1946년 항저우의 ‘동남일보(東南日報)’를 시작으로 92년 홍콩 ‘명보(明報)’를 매각할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사설 7000여 편, 국제칼럼 ‘명창소찰(明窗小札)’, 연재 무협소설까지 매일 3건을 출고했다. 2008년 인터뷰에서 “찰스 스콧 영국 가디언 편집장의 ‘의견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가 나의 신조”라던 언론인이다. 문장론도 흥미롭다. “신문은 섹션”이라며 ‘명보부간(明報副刊)’을 창간하며 ‘오자진언(五字眞言)’을 내놨다. 단(短), 문장은 짧고 간결해야 한다. 경전 인용과 어려운 문자는 피했다. 취(趣), 신기하고 재미있으며 가볍고 활달해야 한다. 근(近), 시간과 공간이 가까우면서 새롭고 문화적으로도 독자와 친근해야 한다. 물(物), 말에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言之有物). 많건 적건 얻는 바가 있어야 한다. 도(圖), 그림이다. 사진·삽화는 물론 생동감 넘치는 글도 광의의 그림이다.
“신기함과 재미가 우선, 사실이 웅변을 이긴다. 한탄 조는 금물, 자화자찬은 내다 버려라(新奇有趣首先 事實勝于雄辯 不喜長吁短嘆 自吹吹人投籃)”는 ‘24자결(廿四字訣)’도 덧붙였다.
자량융은 홍콩·대만·중국, 양안삼지(两岸三地)는 물론 세계 화교의 자랑이었다. 남북과 해외 한민족 고루 사랑받는 작가를 찾기 어려운 우리에겐 부러운 인물이었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올 한 해에도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다. 1924년생 두 거물이 동과 서에서 한 달 터울로 떠났다. 필명 진융(金庸)으로 익숙한 무협소설가 겸 신문인 자량융(査良鏞)과 조지 HW 부시 41대 전 미국 대통령이다. 둘은 생전에 자식을 먼저 보냈다. 자량융의 장남 자촨샤(査傳俠)는 1979년 미국 유학 중 목숨을 끊었다. 훗날 『의천도룡기』 후기에 “장취산이 목숨을 끊는 모습을 본 장삼풍의 비통함과 사손이장무기의 부고를 들었을 때의 상심을 너무 가벼이 적었다. 인생은 실로 그렇지 않은데 내가 당시 몰랐을 뿐”이라고 했다. 아들을 보낸 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찾아 불경에 심취했다. “한바탕 떠들썩한 뒤 조용히 떠날 뿐(大閙一場 悄然離去).” 이후 인생 물음에 자량융의 답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 역시 딸 로빈을 네 살 때 백혈병으로 보냈다. 부인과 함께 구름 위에서 딸을 만나는 추모 만평이 세계인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그는 2012년 삭발을 했다. 백혈병 투병 중인 재직시절 경호원의 아들을 위해서다.
자량융은 소설가보다 신문쟁이였다. 1946년 항저우의 ‘동남일보(東南日報)’를 시작으로 92년 홍콩 ‘명보(明報)’를 매각할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사설 7000여 편, 국제칼럼 ‘명창소찰(明窗小札)’, 연재 무협소설까지 매일 3건을 출고했다. 2008년 인터뷰에서 “찰스 스콧 영국 가디언 편집장의 ‘의견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가 나의 신조”라던 언론인이다. 문장론도 흥미롭다. “신문은 섹션”이라며 ‘명보부간(明報副刊)’을 창간하며 ‘오자진언(五字眞言)’을 내놨다. 단(短), 문장은 짧고 간결해야 한다. 경전 인용과 어려운 문자는 피했다. 취(趣), 신기하고 재미있으며 가볍고 활달해야 한다. 근(近), 시간과 공간이 가까우면서 새롭고 문화적으로도 독자와 친근해야 한다. 물(物), 말에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言之有物). 많건 적건 얻는 바가 있어야 한다. 도(圖), 그림이다. 사진·삽화는 물론 생동감 넘치는 글도 광의의 그림이다.
“신기함과 재미가 우선, 사실이 웅변을 이긴다. 한탄 조는 금물, 자화자찬은 내다 버려라(新奇有趣首先 事實勝于雄辯 不喜長吁短嘆 自吹吹人投籃)”는 ‘24자결(廿四字訣)’도 덧붙였다.
자량융은 홍콩·대만·중국, 양안삼지(两岸三地)는 물론 세계 화교의 자랑이었다. 남북과 해외 한민족 고루 사랑받는 작가를 찾기 어려운 우리에겐 부러운 인물이었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打落水狗<타락수구>
정당한 대결, 영어 페어플레이의 순화어다.
뜻이 마음에 들었는지 중국에 의역 대신 ‘페이-어-보-라이(費厄潑賴·비액발뢰)’라는 말까지 생겼다.
번역가로 활약한 루쉰(魯迅)의 친동생 저우쭤런(周作人)이 1925년 만들었다.
문학동인지 『어사(語絲)』에 “‘페어플레이’에 있어 우리는 어떤 서양신사나 학자와도 경쟁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고 했다.
유머의 수필가 린위탕(林語堂)이 동감했다. “중국에 ‘플레이’ 정신은 드물다.
유머의 수필가 린위탕(林語堂)이 동감했다. “중국에 ‘플레이’ 정신은 드물다.
하물며 ‘페어’는 말할 것도 없다”며 “우물에 빠진 사람에 돌 던지지(下井投石·하정투석) 않을 정도면 페어”라고 했다.
루쉰의 명 구절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打落水狗·타락수구)”가 이때 나왔다.
루쉰의 명 구절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打落水狗·타락수구)”가 이때 나왔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글로 동생과 린위탕을 논박했다.
『논어(論語)』의 “남이 내게 잘못해도 따지지 않는다(犯而不校·범이불교)”는 관용의 도[恕道·서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곧음의 도[直道·직도]이다. 중국에 흔한 것은 삐뚤어진 도[枉道·왕도]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되레 개에게 물린다. 루쉰의 논리는 거침이 없었다.
루쉰의 글은 최근 미·중 정세에도 적용된다. 그는 “중국은 나라 사정이 특별해 외국의 평등·자유 등을 적용할 수 없다”며 “일률적으로 페어플레이를 적용해 남이 당신에게 페어하지 않은데 당신만 그에게 페어하면 손해”라고 했다. 지금은 ‘내 편은 돕고 다른 파는 토벌할(黨同伐異·당동벌이)’ 때라고 했다. 미국이 관세 몽둥이로 때리자 중국은 자유무역을 외친다. 타락수구와 비액발뢰가 역설적으로 뒤집힌다.
루쉰의 결론은 개혁이었다. “반(反)개혁가들의 개혁가에 대한 악랄한 박해는 한 번도 미뤄진 적이 없으며, 수단의 악랄함 역시 이미 극에 달했다.” 린위탕도 동조했다. 물에 빠진 발발이(叭兒狗)를 막대로 때리는 루쉰을 손수 그렸다. ‘타락수구론’을 따라 북양 군벌을 비판했다.
한반도에도 최근 물에 빠진 발발이가 여럿 보인다. 비액(費厄·fair)할지 때릴지는 양식 있는 민의(民意)가 결정할 터다.
『논어(論語)』의 “남이 내게 잘못해도 따지지 않는다(犯而不校·범이불교)”는 관용의 도[恕道·서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곧음의 도[直道·직도]이다. 중국에 흔한 것은 삐뚤어진 도[枉道·왕도]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되레 개에게 물린다. 루쉰의 논리는 거침이 없었다.
루쉰의 글은 최근 미·중 정세에도 적용된다. 그는 “중국은 나라 사정이 특별해 외국의 평등·자유 등을 적용할 수 없다”며 “일률적으로 페어플레이를 적용해 남이 당신에게 페어하지 않은데 당신만 그에게 페어하면 손해”라고 했다. 지금은 ‘내 편은 돕고 다른 파는 토벌할(黨同伐異·당동벌이)’ 때라고 했다. 미국이 관세 몽둥이로 때리자 중국은 자유무역을 외친다. 타락수구와 비액발뢰가 역설적으로 뒤집힌다.
루쉰의 결론은 개혁이었다. “반(反)개혁가들의 개혁가에 대한 악랄한 박해는 한 번도 미뤄진 적이 없으며, 수단의 악랄함 역시 이미 극에 달했다.” 린위탕도 동조했다. 물에 빠진 발발이(叭兒狗)를 막대로 때리는 루쉰을 손수 그렸다. ‘타락수구론’을 따라 북양 군벌을 비판했다.
한반도에도 최근 물에 빠진 발발이가 여럿 보인다. 비액(費厄·fair)할지 때릴지는 양식 있는 민의(民意)가 결정할 터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속이원장(屬耳垣墻)
[요약] (屬: 엮을 속. 耳: 귀 이. 垣: 담 원. 墻: 담 장)
담장 속에도 (남의)귀가 있다는 말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방하지 말라는 뜻.
[출전] 《천자문(千字文)》
[내용] 이 성어는 천자문(千字文)에 나오는 말로 다음과 같다.
(사람은) 언행을 쉽게(輶) 바꾸는(易) 바(攸)를 두려워해야(畏) 하고
말을 할 때도 담장(垣墻)에 다른 사람의 귀(耳)가 붙어있는(屬) 것처럼 생각하여 조심해야 한다. (易輶攸畏 屬耳垣墻)
속담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누가 보거나 듣거나 알아도 아무 문제없을 떳떳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좋은데,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하 경기신문 [근당의古典]無易由言 耳屬于垣(무이유언 이속우원)의 글.
문제가 될 만한 말은 함부로 하지 말라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의 화근은 입에서 생긴다.’(一切衆生 禍從口生)라 하였다. 고전에 입과 혀는 재앙과 근심의 문이요, 몸을 망치게 하는 도끼와 같다(口舌者 禍患之門 滅身之斧). 입은 사람을 해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자르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할 것이니라. 말을 가볍고 쉽게 하지 말 것이니, 대체로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그 혀를 잡아주거나, 막아주려는 자가 없다. 그러니 말을 뱉으려 하지 말고, 말로써 구차해지기 전에 입 열기를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뿐 아니라, 길가의 담벼락에도 귀가 달려 있다는 말이 천자문에도 나온다. ‘쉽고 가볍게 보이는 것이 두려워해야 할 바이니 귀를 담장에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易輶攸畏 屬耳垣墻)라고. 소인배들이나 일반 시민들이 담벼락에 귀를 붙여 놓고 있으니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언제 어느 누구의 귀를 통해 돌고 돌아 재앙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로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 다’는 우리의 속담도 있다.
회남자 주술훈(淮南子 主術訓)에 ‘눈으로 아무 것이나 마구 보면 음탕한 마음이 생겨날 수 있고(目妄視則淫), 귀로 아무 말이나 마구 듣다보면 미혹에 빠지며(耳妄聽則惑), 입으로 마구 지껄이게 되면 화를 입는다(口妄言則亂)’란 말도 있어 우리는 재산을 아끼고 지키듯 입을 굳게 지켜서 민망함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상대방의 말이 달콤하면 그 뱃속에는 칼이 있을 수 있다(口有蜜腹有劍).
근당 梁澤東(한국서예박물관장)
정승 아들과 천자의 딸
옛날에 한 정승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승의 아들은 아무리 공부를 시켜도 한자를 전혀 몰라서 선생을 붙여도 도망갈 정도였다. 하루는 정승이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선생을 구하러 시골로 내려갔다. 마침 시골에 가난한 선생이 한 사람 있는데 학생들에게 공양을 받아 열댓 명을 가르치고 있었다. 정승은 이 선생이다 싶어 선생에게 10년간 아들을 가르쳐 주면 가족들을 먹여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선생은 가난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자고 하고 정승을 따라 나섰다. 정승은 선생님이 구해지자 후원에 연못을 크게 파고 그 가운데 서당을 하나 지어 아들과 선생님만 들여보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정승의 부인은 매일같이 아들이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고 빌었고 아침, 저녁도 직접 가져다주었다. 정승은 선생의 집에 돈을 계속 부쳐주고 아들이 공부를 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선생님이 노력을 해도 아들은 삼 년을 배운 것이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이렇게 네 자였고, 약속했던 십년 동안 간신히 천자문 한 권을 뗐다. 약속한 십년이 지나자 정승은 잔치를 준비하고 선생을 불렀다. 선생은 잔치에 가기 전에 제자를 붙들고 “스승과 제자는 원래 매질을 해야 하는데 십년 동안 매질 한번 못해봤으니 마지막으로 종아리나 한번 맞아봐라.”하고서는 제자의 종아리를 때렸다. 그러자 제자는 기절 하였다가 잠시 후에 일어났는데, 꿈에 용왕님을 보았다고 하였다.
제자는 꿈에서 용왕님이 제자에게 사서삼경을 읽어보라고 하였는데 모르는 글자가 없었다는 얘기를 했다. 선생이 깜짝 놀라 사서삼경을 주며 읽어보라고 하였는데 정말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십년 동안 천자문을 설명하면서 다른 글자도 같이 한 두자씩 설명을 했는데 제자가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둘은 기쁜 마음으로 잔치에 갔다. 한 편 중국에서는 천자의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자기의 남편은 자신이 천자문 시험을 봐서 뽑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험을 봤는데 중국에 있던 모든 사람이 떨어졌다. 천자의 딸은 조선에도 시험을 보러 와 달라고 연락했고, 정승의 아들은 그 연락을 받고 바로 중국으로 가서 시험에 응했다.
정승의 아들이 중국에 도착하자 천자의 딸은 방안을 둘러보고 문자를 쓰라고 했다. 정승의 아들은 “도사금수(圖寫禽獸, 새와 짐승을 그림으로 그려서 썼구나.).”라고 문자를 썼다. 그러나 그것을 본 천자의 딸은 나가라고 했다. 정승의 아들은 화가 번쩍 나서 얼른 집 밖으로 나왔는데 비가 쏟아졌다. 가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천자문으로 문장을 쓴 사람은 그 사람 하나라 천자의 딸은 이상한 마음이 들어 시녀를 시켜 더 쓰실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화채선령(畵綵仙靈)하올 것을 도사금수(圖寫禽獸)하였다가, 운등치우(雲騰致雨)하는 날에 속이원장(屬耳垣墻) 하는구나.(신선에 비교될 것을 새와 짐승을 그렸다고 하였다가, 구름이 나고 비가 오는 날에 담 쪽에 귀를 붙이고 서있구나)”라고 써 시녀를 통해 천자의 딸에게 보냈다. 천자의 딸이 보니 천자문의 글자로 만든 문장이라 마음에 들어 혼인을 하게 되었다. 결국 정승의 아들은 천자의 사위가 된 것이다.
水落石出
水:물 수 落:떨어질 락 石:돌 석 出:날 출
물이 빠지고 나니 돌이 드러난다'라는 뜻으로, 어떤 일의 흑막(黑幕)이 걷히고 진상이 드러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후적벽부(後赤壁賦)〉에서 유래되었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시행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한 소동파는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로 좌천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는데, 적벽(赤壁)을 찾아 2수의 부(賦)를 지었다. 이 적벽은 삼국시대의 적벽대전으로 알려진 곳이 아니라 이름만 같은 곳이었지만, 소동파는 적벽대전을 생각하며 〈적벽부〉를 지었다. 〈후적벽부〉는 〈적벽부〉를 지은 지 3개월 뒤인 음력 10월에 지었다.
늦가을이 되어 다시 찾은 적벽의 경관은 이전과는 또 달랐다. 그리하여 소동파는 "흐르는 강물 소리, 깎아지른 천 길 절벽. 우뚝 솟은 산과 작은 달, 물이 빠져 드러난 바위. 해와 달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고 이리도 강산을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江流有聲, 斷岸千尺, 山高月小, 水落石出. 曾日月之幾何, 而江山不可復識矣)"라고 묘사하였다.
이처럼 수락석출은 본래 물가의 경치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나중에는 물이 줄어들어 돌이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일의 흑막이 걷히고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수서양단[ 首鼠兩端 ]
首 : 머리 수 鼠 : 쥐 서 兩 : 두 량 端 : 끝 단
머리만 내놓은 쥐가 주위를 살핀다는 뜻으로,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 또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기회만 엿보는 태도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에 유래하는 말이다.
서한(西漢)시대에 위기후(魏其侯)와 무안후(武安侯)라는 귀족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황실의 외척으로 위기후 두영(竇嬰)은 5대 황제인 문제(文帝)의 처조카였고, 무안후 전분(田蚡)은 6대 황제인 경제(景帝)의 처남이었다. 문제의 재위 기간에는 위기후가 나이도 훨씬 많고 지위도 높았기에 무안후는 위기후를 예우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죽고 경제가 왕위에 오른 후, 황제의 처남인 전분의 신분은 위기후보다 높아졌고 무안후라는 작호까지 받아 막강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경제가 죽고 무제(武帝) 재위 때, 승상 무안후가 연나라 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잔치를 열었다. 위기후는 무안후를 달갑지 않아하던 그의 친구 관부(灌夫) 장군을 억지로 데리고 가 참석하였다. 술자리가 무르익고 무안후가 일어나 축배를 들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엎드리며 공경을 표했다. 이어서 위기후가 건배를 하자 몇 명만 정식으로 인사 할뿐 대부분이 형식적으로 대강 자세를 취했다. 이에 기분이 언짢아진 관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사람들에게 술을 따르면서 무안후에까지 나아갔다. 술을 받은 무안후는 마시지도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관부는 더욱 화가 났으나 참고 이어서 임여후(臨汝侯)에게 잔을 건넸다. 하필 그때 임여후가 옆에 있던 장수 정불식(程不識)과 귓속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미처 잔을 제대로 받지 못해 관부를 무시한 것처럼 되고 말았다. 속으로 참고 있던 관부는 임여후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화가 난 무안후는 관부를 잡아 가둬두었고 관부가 이 자리를 모욕한 행태와 더불어 이전에 있었던 일까지 들춰내 무제에게 고했다. 원치 않던 관부를 일부러 데려갔던 위기후는 온 힘을 다해 관부를 구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황제를 찾아가 관부가 몹시 취해서 저지른 일인데 무안후가 다른 일을 가지고 죄를 씌워 벌하려 하는 것이라 고하며 무안후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막고자 하였다. 양쪽의 얘기만 듣고는 시비를 가릴 수 없었기에 무제는 여러 중신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그 누구도 나서서 어느 쪽이 잘못했다고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위기후와 무안후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그 역시 그 역시 대답을 회피하며 얼버무렸다. 믿었던 한안국에게도 신통한 답을 듣지 못한 무제는 조회를 끝내버렸고, 이번 기회로 관부와 위기후의 위세를 완전히 꺾어버리려고 했던 무안후는 궁궐 바깥문에서 한안국을 불러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당신과 함께 늙은이(위기후)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공은 어째서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이쪽저쪽 살피는 쥐새끼처럼 처신했던 거요?(與長孺共一老秃翁,何爲首鼠两端)"
이 고사에서 유래하여 수서양단은 구멍에서 목을 내밀고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쥐처럼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양 또는 두 마음 먹고 기회를 살피는 모습을 뜻한다. 같은 의미로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곁눈질한다는 뜻의 좌고우면(左顧右眄)이 있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