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7일 일요일

사상,Thought, 思想 . Gedanke.

사상,Thought, 思想 . Gedanke.
사상이라는 용어가 처음 보이는 곳은 ≪주역≫의 계사전()이다. 즉, “역에 태극이 있으니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   )”라고 하여 팔괘가 태극·양의·사상의 단계를 거쳐 형성됨을 설명하였다.

인간들이 생활하면서 지니게 되는 세계관을 총칭해서 부르는 역동적인 개념.
여러 인연으로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의 네 가지 모습.
(1) 생상(生相). 여러 인연이 모여 생기는 모습.
(2) 주상(住相). 머무는 모습.
(3) 이상(異相). 변해 가는 모습.
(4) 멸상(滅相). 인연이 흩어져 소멸하는 모습.
일반적으로는 사고()의 내용을 말한다. 심리학, 논리학, 인식론(철학)에서는 사상을 사고작용과 대립시켜 사용하는데, 이때는 사고작용의 결과 생겨난 사고의 내용을 가리킨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하여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사고의 작용으로 나타나고, 사고작용은 어떤 내용을 낳는다. 그리고 이 내용에 체계와 통일이 주어질 때 이는 한 사상의 견해, 관념, 개념 등으로 표현된다. 한편 시대적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가 처해 있는 현실에 정당하게 대처하여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실천적 규준()을 사상이라고도 부른다.

이때의 사상은 각 시대의 개인ㆍ사회ㆍ민족ㆍ인류 속에 잠재하여 그 시대의 현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반을 지도하고 때에 따라서는 변혁까지 일으킨다. 여기에 이르면 사상은 단순한 사고의 내용이 아니라 ~설(), ~주의(), ~교() 등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사상은 이상()과 정의() 또는 선악()과 관련을 갖게 되고 예술적 미추()와 문화적 가치, 더 나아가서는 종교적 영혼ㆍ해탈ㆍ구제 등 고차적인 가치의 실현에까지 사용된다.
포괄하는 범위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공간적·시간적·범주적인 한정어를 덧붙여 구체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한국’사상은 ‘한국’이라는 공간 안에서 생겨난 사상이라는 뜻과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해온 사상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또한 한국의 철학·종교·정치·사회·경제 등 제범주를 포괄하는 사상이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철학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이후 서양철학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래되기 이전까지 철학과 종교는 엄격히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사상의 흐름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상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은 무속신앙이다. 이 신앙은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한국의 고유한 독자성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런 무속신앙의 터전 위에 외래사상인 유교·불교·도교 등이 유입되었는데 서기전 4세기경에 유교, 2세기 말에는 도교, 4세기 초에는 불교가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다. 고대에 전래된 외국사상들은 오랜 시대에 걸쳐 한국적 풍토에 맞게 변용, 발전되어 한국문화와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외래사상이 토착화되어 한국의 전통사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유교의 구실이 두드러졌고, 후기에 이를수록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고려 때에는 불교가 국교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신유학()으로서의 성리학이 관학()으로서 통치 이념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도교는 통치원리로서 체계화되기보다는 무속신앙과 함께 민간신앙으로서 일반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전통사상들은 대체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한민족의 의식 구조 속에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유학 내의 새로운 움직임과 천주교의 도입이었다. 이런 새로운 동향은 근대 지향의 판도를 마련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19세기 후반에는 개신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개신교는 근대 서구의 과학·기술 도입을 필연적으로 야기 시켰으며,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재편성에 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서구문화의 대규모 유입은 조선사회의 전부분에 걸쳐 충격적인 효과를 발생시켰는데, 당시 사상계에서는 과거의 전통사상을 새롭게 종합, 전개시키려는 신종교운동이 형성되게 되었다. 신종교운동은 여러 갈래의 다양한 성격을 띠며 발전되어갔으나 당시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대항해 강한 민족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용례

  •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께서 거처하던 어실 가운데 하나를 ‘정일집중’이라고 썼는데, 내가 그 곁에 잇달아 쓰기를, ‘이는 심법을 전수한 것이다.’고 하였다. 대저 요의 ‘정일집중’ 네 글자 위에 열 두 글자를 더한 것은, 비유하건대 양의가 사상이 되고 육십사괘에 이르는 것과 같다.” 하였다. ; 上曰 先朝所御室中 書以精一執中 子就其傍繼書曰 此傳授心法 蓋堯之四字之上 蓋以十二字者 譬若兩儀爲四象 而以至於六十四卦也 [영조실록 권제96, 9장 뒤쪽, 영조 36년 8월 18일(기축)]

오늘날에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전통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수많은 현대사상이 서로 자신의 설득력을 주장하고 있는 개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에서는 위에서 개관된 각각의 사상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무속신앙

한국의 무속신앙은 시베리아 일원에 걸쳐 퍼져있는 샤머니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공통적인 기반 위에 한국의 독자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민족의 신화적 사유를 이루고 원초적 잠재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이 신앙은 현재도 민간의 무속 중에 상당 부분 존속되고 있지만,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도교·불교 및 민간신앙 등과 접합, 동화되어 본래의 내용과 특성이 많이 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자화되어 기록된 신화 내용에서 그 본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다.
한국의 신화로서 대표적인 것들은 <단군신화>·<고주몽신화>·<박혁거세신화>·<석탈해신화>·<김알지신화>·<김수로왕신화> 등이다.
이 신화들의 내용은 한결같이 고대 한국의 국조()들의 탄생과 그들에 의한 건국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탄생이 천신()의 강림에 의한 것이며 단군의 고조선 건립시기가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였다는 것과 같은 줄거리이다.
이와 같이 중국과 비교하는 시각에서 한민족의 연원을 천신이나 초월적인 기원에 돌림으로써 한민족의 독자적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강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신화들은 국조의 탄생과 건국 과정에 주된 초점을 모으게 된 결과 우주의 창조나 신들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거의 표명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은 이 민족의 원초적 사고가 현세 치중과 인간 중심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원래 샤머니즘에서는 무당이 굿을 통해 초월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를 매개해 길흉화복을 예측하고 병도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무당은 신적인 세계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믿어짐으로써 고대사회에서는 제사장의 구실뿐만 아니라 통치권의 행사까지 주관해 제정일치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고대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단군’의 명칭은 무당에 해당하는 ‘단골’·‘당굴’의 음역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이사금’·‘거서간’·‘차차웅’이라는 칭호 역시 고대 한국에서는 무당의 의미로도 사용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무당에 의해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지배되던 시기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고대의 무속신앙은 일종의 통치 원리의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무속신앙이 지닌 사상적인 특징은 우선 자연신들을 숭상함으로써 다신론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천신() 이외에도 태양신과 풍신·우신·운신 등을 믿었다. 다만 시대가 내려올수록 자연신 중에서 천신이 가장 중요시되었는데,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의 제의들과 단군신화에서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특정 부족의 생존과 번영을 일정한 동물과 관련지어 숭상하는 토템사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 박혁거세신화의 말, 김알지신화의 닭 등이 그 예이다. 또한 모든 사물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사고가 무속신앙에 작용하고 있었는데, 수목숭배나 거석숭배는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고대 한국인들이 장례 때 큰 새의 날개를 사용하거나 죽은 사람의 물건을 무덤에 넣어주는 부장(), 아내나 하인을 함께 묻는 순장()을 행하였던 것은 모두 인간 영혼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이다.
무속신앙을 기초로 한 제정일치의 시대는 고대 삼한()이 자리잡을 무렵에 끝나고 제정 분화의 현상이 일어났다. 정치 권력을 장악한 부족장으로서의 ‘거수()’와 제사장인 ‘천군’이 따로 분립한다.
‘천군’으로 불리던 무당은 소도()라는 특정 지역을 관할하고 방울과 북을 매단 큰 나무를 세워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였다. 그 소도에 범죄자가 도망쳐 들어가더라도 부족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무속신앙에는 원래 신성 관념과 부정 관념()이 있는데, 부정 관념을 바탕으로 금기의 개념이 나타난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금기로부터 원초적인 윤리와 법의 개념이 대두되게 된다. 예를 들면 효의 원천이 되는 조상숭배라든가 팔조법()과 같은 불문율 등이 그러한 것이다.
조상숭배는 조상의 영혼에 대한 외경·공포에 바탕을 두고 생겨난 것으로 나중에 유교의 덕목을 받아들여 발전시키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팔조법은 현재 3조목만이 전해지고 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자는 곡물로 상환해야 하며 도적은 도둑질했던 집의 노비로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고조선에 감옥이 있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이런 법규가 실제로 상당히 구속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주목되어야 할 점은 무속신앙이 시조신앙()과 연결되어 한민족의 민족적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커다란 구실을 행하였다는 점이다. 사실 한민족의 시조신앙인 단군신앙이 역사적으로 부상한 것은 항상 민족의 위기가 닥치는 시기와 일치하였다. 위기 때마다 부각되어 민족의 단합에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무속신앙이 비록 역사의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각광받지는 못하였지만, 역사의 이면에서 민족문화의 발전에 숨은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음을 살펴볼 때 한국사상사에서 무속신앙이 차지하는 자리는 좀더 높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유교사상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유입된 것은 서기전 12세기경이라는 입장이 있다. 그 이유는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한국에 들어와 홍범구주()와 정전법() 등 유교적인 통치술을 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유교의 연원을 기자에 두는 이런 견해는 과거 한국의 유학자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왜냐하면 공자 이전에 벌써 한국의 유교는 중국보다 더 발달해 있었다는 주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의 많은 유학자들은 한국을 유교의 종주국이라고 믿었으며 그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자의 입국은 확실한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공자를 도외시한 유교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견해는 오늘날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대체로 합의되어 있는 유교의 전래시기는 서기전 4,3세기인데, 그 이유는 이 무렵 한국의 지명에 한자의 사용이 본격화되고 지식인들로 보이는 중국인들[]의 유입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기전 1세기경까지 유교가 수용되는 과정에 대해 적극적인 징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에서 ≪유기 ≫라는 사서를 쓰는 등 유교의 영향이 엿보이게 되었다.
3세기에는 ≪논어≫와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래했으며, 4세기 후반에는 교육 기관인 태학()의 건립을 계기로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유교의 초기 수용은 주로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등의 오경과 ≪사기≫·≪한서≫·≪후한서≫ 등의 삼사(), 그리고 ≪논어≫·≪효경≫·≪문선 ≫ 등을 통한 것이었다.
이런 기반 위에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다 같이 나름의 국사를 찬술하고 유교적인 예속화()를 도모하는 한편,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때 유교적 교육에 의해 충·효의 사상이 생활화하게 되었으며 이런 체제의 강화책은 당시의 부족연맹적 국가 형태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던 것이었다.
이런 경향은 더욱 적극화되어 6세기경에 이르면 유교적인 정치 이념이 민본()·위민()의 정신 아래 덕과 예로써 통치하는 것임을 설총() 같은 학자는 물론 진흥왕과 같은 통치자까지도 인식하게 되었다.
유교 이념의 확대와 충실한 실현을 위한 계속된 의지는 마침내 왕조나 사회 체제의 변혁에 대해 합리화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9세기 신라 말기의 유학자들이 당시의 골품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분위기를 형성해 왕건의 고려 건국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그 예이다.
10세기 후반의 한국 유교는 관료제를 뒷받침해주면서 중세사회의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최승로()와 김심언()과 같은 유학자들은 지방 관제의 확충과 군도()·신술()·이도()를 실현시키려 애썼으며, 과거제의 시행을 확립했고 관리의 부정부패 방지를 위해 감찰제의 시행을 이루었다.
통치의 기술 및 관리로서의 출세도구로 간주되던 11,12세기의 고려 유교는 국학 및 사학기관의 교육과 궁내대신의 강회()를 통해 높은 수준으로 연구, 발전되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부터 관료적인 한계와 폐단을 드러내어 사치스런 귀족문화의 풍조만을 조장하는 데 그칠 뿐 더 이상 강력한 사회사상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시대사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신유학으로서 그 역할을 행하게 되었다.
성리학은 11세기 말 12세기 초부터 사신들의 교류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13세기 말엽 주희()의 학설이 전해지는데, 이후 한국의 유학계는 정주계()의 독무대가 되어 육왕계() 심학()의 세력은 미약한 상태에 머무르고 만다.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통치 원리로 채택되어 조선이 멸망하는 20세기 초까지 도교·불교·무속신앙을 배격하면서 그 자체의 기본적 논리를 성리학자와 관리들을 통해 실현시켜나가려고 애썼다.
15,16세기에는 성리학적 이상주의에 철저한 일군의 학자들, 즉 사림파()가 대거 집권세력층에 가담하게 되어 성리학의 사회사상적 기능이 적극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학의 이론적인 탐구도 왕성하게 진행되었다. 조광조()의 이상 정치를 지향한 제반 개혁은 전자를 대표하며, 이황()과 이이()의 사단칠정론()과 같은 인성 연구()는 후자를 대표한다.
인성의 연구란 사단칠정에 대한 이기론적 해석을 의미한다.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의 발()’, ‘기()의 발()’ 혹은 더 복잡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 등에 대한 새로운 본체론적 탐구()로서 당시의 시대배경과 연결시켜 보면 군왕의 덕치()·예치()의 근거와 유교 윤리의 근거를 밝히는 작업이다.
이황은 8년의 세월에 걸쳐 기대승()과의 논쟁을 통해 연구를 심화시켰으며, 이 문제는 이이 이후에도 거의 2세기 동안 계속 논의의 초점이 되어 한국 성리학의 연구 수준은 중국보다 높이 고양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학설의 대립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학파의 성립이 이로 인해 형성되어 ‘퇴계학파’·‘율곡학파’ 혹은 ‘주리파()’·‘주기파()’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인성 연구는 18세기에 일어난 ‘인성·물성()의 동이()에 관한 논쟁’과 함께 한국의 성리학적 이론 탐구의 대표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원래 유교의 정치는 예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성리학을 통치 원리로 채택한 조선시대에는 예의 교육과 그 보급·실천이 정책적으로 매우 강화되었다. 15세기 이후 ≪가례 ≫·≪삼강행실록≫·≪소학≫ 등의 활발한 간행과 배포가 그 좋은 예이다.
더구나 내면적인 수행을 철저히 행하는 불교를 배척하고 그 대행의 구실까지 해야 했던 관계로 한국의 성리학은 심성 수양에 기초한 예의 실천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2세기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17,18세기에는 예의절대화 풍조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16세기의 인성에 대한 탐구도 예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욱이 17세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되어 그 안정이 시급히 요청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를 절대화하는 사고와 행동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예설()의 수집·정리·세목화의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일반 지식인들의 일상 생활은 물론 관리들의 당쟁까지도 예의 실천론을 중심적인 문제로 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성리학이 지닌 명분론적 사고의 산물로서 나타난 것인데, 한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강했으므로 특색으로 꼽히고 있다.
예를 절대시하는 사고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형식주의적인 사고이다. 그런 까닭에 17,18세기 성리학자들의 현실감각은 상당히 둔감하여 격동하는 사회에 대해 융통성있는 자세를 보이지 못하고 고식적인 태도만을 견지하였다.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며 이런 성리학 풍토에 비판을 가하며 대두한 것이 실학()인 것이다. 더욱이 이질적인 서구문화에 대해 양반 지배층의 의식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서구문화는 도덕을 갖추지 못한 야만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서구의 강력한 무력을 목도한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소극적인 쇄국만을 고집하였다.
이런 입장은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조선 말기의 성리학은 대체로 척외·수구를 통한 주권수호의 방향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일제의 침략 후 의병 전쟁에서도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불교사상

사서()의 기록에만 의하면, 불교가 한국에 처음 전래된 것은 소수림왕 2년인 372년이다. 중국의 승려인 순도()가 처음으로 고구려의 왕실에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불교가 유입되었다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해동고승전≫에는 지둔()이라는 중국 승려에게 고구려의 한 승려가 편지를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불교에서 인생 일기()의 네 가지 모습, 또는 만물의 변화하는 유위전변()의 모습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
① 일기()의 4상:
생()·노()·병()·사()를 말하는데, 과보()사상이라고도 한다.

② 유위()의 4상:
만물의 변화를 가리키는 4종의 상()이다. 유위는 무위()와 대비되는 것으로 인연의 제화합()에 의하여 생멸변화하는 여러 현상을 지칭한다. 이 유위 세계의 변천 과정을 생(:발생하는 것)·주(:존재하는 것)·이(:변화하는 것)·멸(:없어지는 것) 등 4가지 모습으로 분류한다. 이를 사유위상()이라고도 한다.

③ 지경()의 4상: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인상()·중생상()·수명상()이다. 《금강경》은 이들이 실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유()의 존재이며, 비록 ()이란 용어는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그 본질이 공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이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사제(:···)의 참모습을 관찰·수행하는 덕목으로 제시된 십육행상() 중 고제()의 관찰에 해당하는 4상을 말하기도 한다.


사서에 기록된 전래 연대는 어디까지나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전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의 공식적인 전래는 그 뒤 백제·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진다.
승려들이 공식 사신의 자격으로 왕실에 불교를 전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초기의 한국불교는 왕실의 종교로서 출발한다. 이는 불교가 일종의 왕권수호적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의 불교가 무속신앙과 결부되어 있던 부족 단위의 연맹체적 국가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상당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불교는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불교의 전래나 공인된 때를 전후해 제도의 개혁과 율령의 반포가 증가하는 한편 무속신앙의 세력들로부터 저항이 있었던 사실들은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체제 변화를 일으킴에 있어서 불교가 끼친 영향력은 유교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평가된다. 불교사상 자체가 유교와 비교할 때 정치·사회사상적 측면보다는 윤회설에 기초한 개인 수행과 극락왕생의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불교는 국가 체제의 수립보다는 불교적 윤리관과 또 다른 종교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더욱 이바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6,7세기에 이르러 매우 현저하였다. 백제에서는 겸익() 등의 노력으로 율종()의 연구가 크게 발달하였다.
신라에서는 원광()·자장() 등이 점찰보()·세속오계·포살의식()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교적 도덕의 실천을 고취시켰다. 또한 원효 등은 불교 대중화의 방법으로 아미타불 중심의 정토종신앙을 크게 일으켰다.
불교가 국교로 대접받던 고려조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화되어 계속적으로 개최되던 팔관회·연등회 등은 바로 불교적인 도덕의 연마와 기복신앙()이 표출된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 들어왔지만 중국·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승불교는 별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대승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6세기 초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7세기의 원효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랐다. 그의 <일심설 >과 <화쟁론 >은 ≪대승기신론 ≫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특징적인 입장으로, 불교내 모든 이론들을 유기적으로 종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런 통합적인 방법론적 태도는 이후의 학자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어 한국 불교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11세기 의천()과 12세기 후반 지눌()의 ‘선교합일()’사상이라든가,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불교 배척에 맞서 불교 옹호책으로 주장된 14,15세기의 기화()와 16세기의 휴정()의 <삼교유사론 > 혹은 <삼교회통론 > 등은 그런 특징들을 입증해주는 예들이다.
우리 나라 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민족국가의 유지에 크게 이바지하면서 민족문화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런 성격은 불교의 이상국가인 정토()가 바로 신라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불국토설()’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우리의 불교가 전래 초기부터 왕실과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불교가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호왕()은 곧 호국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의 이런 성격은 왕권의 강화 뿐만 아니라 고려조의 성립과도 같이 왕권의 교체도 가져오게 하였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삼국통일의 경우를 비롯해 소극적으로는 외침에 대한 승군의 수많은 항전을 불러일으켰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휴정·유정()·처영()·각성() 등이 주도한 승군의 전투야말로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또한 탑·사찰·불상 등의 국보급 불교예술품 중의 많은 수가 국가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팔만대장경≫도 고려 때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불교가 호국정신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존속과 민족문화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민족의식을 확고히 하는 데 불교가 상당한 구실을 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불교 본래의 무국적적인 보편적 성향과는 관계없이 우리 불교가 민족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일정한 몫을 하여왔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불교가 우리 나라의 전통사상으로서 간주되어 높이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교사상

도교가 언제 우리 나라에 유입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통치의 수단으로 도교를 도입한 것은 고구려 보장왕 2년인 643년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오두미교()가 고구려의 민간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7세기 전반기보다 훨씬 앞서 유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도가인 노장사상()도 4세기 막고해()장군이 자기의 시에 인용할 정도이므로 매우 일찍 전래되었다고 판단된다. 노장사상은 신라의 태학()에서 교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던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문·무의 관리를 포함해 지식인의 교양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노장사상은 조선조의 몇몇 유학자들에 의해 매우 깊이 연구되면서 비판적으로 수용되기도 하였다. 이이의 ≪순언 ≫, 박세당()의 ≪도덕경주해 ≫·≪남화경주해 ≫, 한원진()의 ≪장자변해 ≫, 서명응()의 ≪도덕경지귀 ≫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휴정의 ≪도가귀감 ≫은 불교의 입장에서 유교·도교와의 일치점을 찾아본 노장 연구서이다.
도교는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현세적 성향을 보이는 점이라든가 산천과 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숭상하는 점에서 무속신앙과 유사한 측면이 많아 예로부터 서로 동화, 화합하였다.
민간에서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풍수도참사상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찍이 고구려에서 도교를 도입했을 때도 도사()들이 풍수설에 의거해 평양성 등을 증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도교의 신앙이 역사적으로 가장 왕성했던 고려시대에서도 풍수설의 영향은 지대해 국내의 도로·관청건물·사찰·가옥·묘지 그리고 관복·승복에 이르기까지 풍수서인 ≪해동비록 ≫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정감록 ≫신앙도 역성혁명()으로서의 왕조의 변전()에 대한 주장으로 풍수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제도화된 도교의 성립도 이루어져 도관()의 설립과 도교의 제의인 초제()는 이미 고구려 때부터 행해졌으며, 고려시대에는 ‘천존()’·‘태일()’·‘태을()’의 신앙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특히, 고려 때에는 도교가 불교와 적극적으로 화합하여 개인과 국가의 양재초복()을 기원하는 구실을 수행하였다.
개인의 수련을 강조했던 도교가 출병()이나 가뭄극복을 위한 초제를 지내게 되어 불교와 함께 호국적인 성격을 띠면서 군왕과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복원궁()과 소격전(殿) 등의 도관이 새롭게 세워진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며 이곳에서 여러 가지 국가적 행사가 군왕의 참석 하에 행해졌다.
조선조의 성리학시대가 전개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와 같은 성리학자들의 강력한 배척으로 소격전은 철폐되었고, 왕실의 보호를 받던 도교도 뒷받침을 잃게 되어 점차 무속과 같은 민간신앙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조에서 도교가 성리학에 의해 배척받으면서 피지배층인 민중의 장생과 초복()을 위한 기능을 행사하게 되었던 까닭에 지배층의 사상적 성향과 매우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배층의 사상적 성향이 사대적이고 현란한 데 비해 도교는 보다 소박하고 주체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규원사화 ≫와 같은 도교적 역사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실학사상

여기에서 말하는 실학()이란 17세기 초에서 19세기 말 사이에 일어난 새로운 유학운동을 가리킨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들도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칭했으므로 때로 혼란이 야기되는데 어떤 학자들은 전기 실학과 후기 실학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실학’의 명칭을 사용했더라도 그 내용과 용법은 매우 다르다. 성리학은 노장사상과 불교를 비교의 대상으로 하여 노장과 불교사상의 출세간적() 은둔주의를 비실제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한편, 자신의 삼강오륜적 사회윤리 사상과 왕도적 통치술을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해 스스로 실학임을 자부하였다.
후기 실학의 경우는 바로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보다 실질적인 학문을 추구해야겠다는 의지를 표방하고 나온 것이다.
원래 성리학을 통치 원리로 삼았던 조선조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자체내의 모순과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농촌에서는 부농과 빈농의 차이가 격심하게 되어 농토를 잃은 농민의 수가 증가해갔고, 도시에서도 고리대금업 등의 팽창으로 상인 가운데 빈부의 차이가 심해졌다.
지배층 내에서도 권좌는 한정되어 있는 데 비해 양반의 수효는 급증해 권력 투쟁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집권층에서 탈락한 양반이 증대되었다. 여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차례 외침은 당시 사회를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당시는 각 방면에 걸쳐 전면적인 개혁이 요청되는 상황이었으나 지배층 및 성리학자들은 개인의 수양이나 사단칠정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탐구 또는 예설()의 집성과 세목화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주자학의 토대 위에서 명분주의와 형식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던 이런 사회적·사상적 분위기에 대해 일부의 학자들은 성리학의 비실제적 풍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결과 실학이라는 학문적 흐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 등의 정신을 역설하면서 그 실천을 위해 원시 유학의 현실적 태도 회복과 고증의 방법 등을 강조하였다.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점이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실학의 방법론적 특색 중 하나이다.
이러한 성격은 이수광()·유형원()·박세당()·양득중()·이익()·홍대용()·박지원()·정약용()·김정희()·최한기() 등의 업적에서 현저하게 확인된다.
이들 실학자들은 간혹 단독으로 학문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상당수가 일정한 학맥()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입장을 형성시켰다.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의 세 가지 구호는 각각 세 가지 주요유파의 경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경세치용학파는 이익을 대종으로 하면서 토지제도나 행정 기구와 같은 제도 개혁에 치중하였다. 이용후생학파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상품의 유통이나 생산 기구의 발전 등 기술면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실사구시학파는 경서·금석문·전고()의 고증을 위주로 하고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었다.
원래 실학은 기본 정신 중의 하나가 ‘박학정신()’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백과사전적인 저술을 많이 산출했고 매우 복합적인 학문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사장학()·고증학·경세학·의리학 등 다양한 분과학을 포괄하는 복합체의 구조를 띠면서도 실학이 하나의 통일적 학문 체계로 간주되는 까닭은 분과학적 분야들이 모두 성리학의 세계를 공소()한 것으로 여기고 성리학을 극복해 실제성 추구의 정신을 관철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세계가 전근대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면 실학의 세계는 근대적인 성향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각 분과학적 특성들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첫째, 고증의 정신은 추상적 관념의 유희를 배격하고 사실과의 일치여부를 중시하는 입장이므로 근대 과학적 태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둘째, 박지원의 ≪양반전≫·≪허생전≫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실학이 양반의 가식과 횡포를 폭로, 비판하면서 신분 차대와 직종 차별의 타파를 외쳤던 만큼 근대적인 인권과 평등 의식의 싹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 소수 양반 귀족의 사유지로 전락해가던 농토를 국가 공유 혹은 농민 소유로 환원시켜 농민을 도탄에서 구해내려는 일련의 전제 개혁론이나 정약용 등에 의해 환기된 맹자류의 혁명론은 물론, 국민의 의사에 의한 통치자의 선출론까지 언급하고 있는 실학의 주장들은 모두 근대 민주 의식에 접근하는 사상들이다.
넷째, 실질 내용보다 명분이나 형식을 중요시하던 성리학자들의 사고 방식을 비판하고 경험 위주의 인식론과 공리주의적 사회, 윤리관을 주장한 실학사상은 근대적 인간관과 자연관을 제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실학의 근대 지향적 사고 방식은 부분적·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심층적인 차원에서 마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는 한국에서의 근대적 사회로의 전환이 이미 자주적으로 준비되어나갔음을 입증해주는 증거인 것이다. 실학이 한국사상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주교사상

근대적인 사상적 조류로서 실학 이외에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천주교와 동학사상이다. 두 가지 사상이 모두 새로운 종교사상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천주교가 이질적 서양 문화권에서 들어온 외래종교 사상인 데 비해, 동학은 새롭게 전통을 해석하며 자생적으로 등장한 신종교 사상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천주교사상이 처음 한국에 알려진 것은 17세기 초기의 일이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가 1603년 중국에서 간행된 이후 사신들에 의해 전래되어 이수광·허균()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중기까지도 신앙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익과 그 문하의 안정복()·신후담() 등은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유학의 관점에서 비판을 가한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18세기 말엽에 이르게 되자 상황은 바뀌어 종교적인 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들이기도 한 권철신()·권일신()·이벽()이승훈()·정약전()·정약종()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천주교사상을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앙으로 내면화시키게 되었다. 특히 이승훈은 외교관인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서 예수회의 세례를 받았으며, 1784년 귀국 후 조선천주교회까지 창설하였다.
선교사의 포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천주교신앙을 수용해 교회를 조직, 전파했다는 사실은 천주교회사에 유례가 없었던 일로 한국 천주교의 현저한 특색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천주교는 유학자들의 비판과 관리들의 정책적 박해와 탄압에 견디어가면서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천주교와 유교는 신앙체계의 유형이 크게 달랐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가치관의 상위점이 양극적이었기 때문에 상호간의 세계관적 갈등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1785년(정조 9) 천주교는 이미 사교()로 규정되어 관계 서적의 수입마저 금지 당했고, 1791년에는 천주교신자인 윤지충()이 어머니의 상()에 신주()를 없애버림으로써 유교적 전례를 무시한 죄로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18세기 말 당시 천주교는 주로 남인계 학자들 중에 많은 신자를 두었기 때문에 남인이 득세할 경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정치적 이유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801년(순조 1)의 신유옥사와 1839년(헌종 5)의 기해옥사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도들의 종교적 열의는 역경 속에서도 계속되었고 외국인 신부들이 밀입국해 들어옴으로써 더욱 고조되어갔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 프랑스 신부인 모방(Maubant)·샤스탕(Chastan)·앵베르(Imbert) 등의 입국과 활동이 기억될 만한 것이었다.
1876년 조선이 마침내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자 천주교에 대한 정책도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1882년에는 척화비가 철거되었고, 1898년에는 공식적으로 선교가 공인되어 천주교사상의 활발한 전파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천주교가 큰 교세를 지니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우선 고대 이래로 이어져온 한민족의 경천적 습속을 들 수 있다. 무속이 지배하던 고대부터 상제()로서의 ‘하느님[]’을 숭배해온 습속은 새로이 들어온 천주()를 이질적인 것으로 수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천주교가 전해질 당시 조선사회에서 소외받던 계층이 많았다는 점도 고려될 만하다. 전래 초기의 신자들은 몰락한 남인계 학자, 출세가 한정된 서출()양반, 중인 계층의 의원, 역관을 비롯하여 사회적 차별 대우를 심하게 받던 부녀자·노비·농민들이었다. 소외 속에 새로운 생활 양식을 희구하던 이들에게 천주교는 하나의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힘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천주교가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특히 전통적 가치관으로부터의 일탈을 촉진해 당시 봉건적 여러 요소들을 불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밖에도 서구의 과학·기술에 접하게 함으로써 한국의 서구화·근대화의 문제가 제기되는 간접적 배경을 이루기도 하였다.

동학사상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사회 구조의 해체기로서 극도의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홍경래의 난’·‘진주민란’ 등 크고 작은 민란들이 계속해 발생했고, 삼정()의 문란은 농민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전염병까지 주기적으로 발생해 수십만의 인명을 앗아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질적인 천주교의 세력은 날로 확장되어갔으며 구미열강의 무장된 선박이 출몰하는 것은 조선사회 전체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구세제민()’의 기치 아래 등장한 것이 동학사상이었다.
1860년(철종 11)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서구문물의 ‘서학(西)’과 대결함을 의도하고 있었다. 즉 동학이라는 명칭 아래 무속신앙·불교·유교·도교 등의 요소를 자기 나름으로 포괄함으로써 동양의 전통적 가치관의 통일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정신적 기반 위에서 서학과 대결해 위기에 처한 종래의 동양적 전통을 유지하는 동시에 혼란한 현실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동학에는 여러 종교를 종합하려는 성향과 적극적인 현실 개혁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동학에서 종교의 종합화 경향은 치병을 위한 주문·부적, 그리고 산신제 등의 민간신앙적 요소와 도교적인 양기()의 방법, 불교적인 인성()의 자각, 유교적인 성경()의 태도 등의 강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동학에서 현실개혁의 태도는 후천개벽()·보국안민() 등의 기치가 혁명의 의지 속에 주장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동학의 현실개혁 의지가 혁명의 차원에까지 이르렀던 것은 전봉준()에 의해 주도된 ‘갑오농민전쟁’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동학의 사상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천주()’ 사상으로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성()·경()·신()의 태도가 매우 강조되고 ‘인내천사상()’과 연결되면서 인간 자체의 존중 사상[]까지 높여지게 된다.
근대 교조인 최시형()에 이르러 동학사상도 더욱 구체화되어 인존 정신이 부각되는데, “사람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 “인간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은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주장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인의 평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많은 학자들은 동학이 근대사회로의 진입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족종교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한민족의 자주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공로가 동학사상에 내재되어 있다.

현대철학의 사조

한국에서 서구의 철학사상에 대해 간접적이나마 인식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천주교의 전래였다. 그 뒤 18,19세기 무렵부터 서구의 철학에 대해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세기 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철학을 유학의 관점에서 비판한 저술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철학고변 ≫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0세기 초부터는 근대적 고등 교육기관이 제도화되어 이를 통해 서구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의 상황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던 시기이므로 사상적 분위기도 민족주의적 정신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어나갔고, 단군신앙과 무속신앙의 연구도 활발하게 되어 최남선()·손진태()·이능화()의 업적이 서구사상의 연구와 병행해 등장하였다.
1933년 철학연구회가 조직된 뒤 1960년대까지 출간된 서구철학 관계 서적들은 대부분 서구철학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개설서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서구철학의 도입기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서구철학의 도입기가 이렇게 길어진 까닭은 장기간의 일제치하와 그 이후의 혼란과 악조건이 연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철학의 경향도 일본인들의 영향을 받아 주로 칸트·헤겔 등 독일철학에 경도된 것이었다.
1950년대에 이상은()·박희성()·박종홍()·손명현() 등은 각각 맹자·생명·부정()·자유의지 등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란 후의 분위기를 타고 조가경() 등이 실존철학의 연구를 크게 유행시켰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김태길() 등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을 널리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70년대 이후로는 김준섭()·이초식()·이명현() 등이 과학철학을 소개했고, 김여수()·소흥렬() 등은 언어철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쏟았다.
이와 같이 서구의 철학을 보급, 전개시키는 노력과 병행해서 동양의 전통철학을 현대적인 방법론 아래 연구하려는 노력이 1960년대 이상은·김경탁()·김용배() 등에 의해 행해졌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 유승국()·김충렬()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국의 전통철학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해온 연구의 경향은 오늘날의 한국 철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측면으로 1950년대의 현상윤()·권상로() 등에 의한 한국유교와 한국불교의 정리, 1960년대 이을호()의 다산경학연구(), 이기영()의 원효 연구, 1970년대 윤사순()·유정동()의 퇴계철학 연구 등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주역≫의 복희팔괘()와 64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음(――)과 양(─)이 처음 중첩되어 이루어지는 네 가지 형상, 또는 이 네 가지 형상이 상징하는 자연의 네 가지 원소 또는 그 변화 상태.
“역에 사상이 있음은, 보이고자 하는 것( )"이라고 하여 사상이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자연 현상을 상징함을 언명하였다.
이 두 가지 의미, 즉 팔괘 형성의 한 단계로서의 사상과 자연 현상의 상징으로서의 사상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은 “대연의 수는 오십인데 사십구만을 쓴다. 사십구를 둘로 나눔은 둘[]을 상징함이고, 하나를 걸음은 셋을 상징함이고, 넷으로 나눔은 사시()를 상징함이다…”라는 말이다.
설시()하여 괘를 구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서, 쉰 개의 시초() 중에서 하나를 제외한 마흔아홉 개를 임의로 둘로 나누고, 이것을 각각 넷으로 나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과정에서 처음부터 쓰이지 않는 하나의 시초를 태극, 마흔아홉 개를 둘로 나눔을 양의, 그리고 그것을 각각 넷으로 나눔을 사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넷으로 나눔은 사시를 상징한다”라는 말은 사상의 과정이 곧 자연 현상에 있어서의 사계절의 변화를 상징한다는 뜻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사상은 본래 점서()에 있어서 시초에 의한 점법에 나타나는 과정의 하나인데, 여기에 태극·양의·사상이라는 일종의 철학적 개념, 즉 존재의 근원과 자연 현상에 대비하는 사상()으로 발전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사상의 개념은 시대의 변천과 각 시대의 주도적 사상에 의해 변화, 발전되었다. 중국 한대의 상수학자()들은 월령()과 납갑법(), 오행설() 등에 의해 일종의 과학적, 자연 철학적인 해석을 했다.
우번()이 “사상은 사시()이다. 양의는 건곤()이다. 건괘의 이효와 오효가 곤괘로 가서 감()·이()·진()·태()를 이룬다. 진은 봄, 태는 가을, 감은 겨울, 이는 여름이며, 그래서 양의가 사상을 낳는다고 한다”라고 말한 것, 맹희()와 경방()이 괘기설()에 의해 사상을 사시로 보고 여기에 십간십이지(), 오행 등을 배합한 것, ≪건착도 ≫의 팔괘방위설() 등이 그것이다.
당나라의 공영달이 사상을 금()·목()·수()·화()라고 한 것도 오행설에 입각한 것이었다. 전국시대 이래의 오행설에서 탈피하여 사상에 대한 독창적인 자연 철학을 수립한 인물은 송대의 소옹()이다. 소옹은 철저히 ≪주역≫의 계사전을 계승, 발전시켰다.
계사전의 음양·동정()·강유()·천지()의 개념과 그 철학에 입각하여, “천은 동, 지는 정에서 생겨났고, 동과 정이 교차하여 천지의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전제하고, “동이 시작되어 양·동이 극하면 음이 발생하며 정이 시작되어 유·정이 극하면 강이 발생한다”고 하여, 동에서 천의 음양 운동이 발생하고 정에서 지의 강유 변화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동이 큰 것은 태양(), 동이 작은 것은 소양(), 정이 큰 것은 태음(), 정이 작은 것은 소음()이라 한다”고 하여 물질 운동의 상반된 양면인 동과 정, 그리고 운동의 정도를 태·소로 구별하였다. 일반적으로 사상을 태양·소양·태음·소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소옹은 지의 사상을 태강·소강·태유·소유라 하여, 천지의 변화를 각각 네 가지로 구별하고 여기에 구체적인 자연 현상을 분속시켰다. 즉, 태양은 해[]·더위[], 소양은 별[]·낮, 태음은 달[]·추위[], 소음은 별[]·밤이라고 하고, 태강은 불[]·바람, 소강은 돌[]·우레[], 태유는 물[]·비[], 소유는 흙[]·이슬[]이라고 하였다.
천의 해·달·별(과 )이 작용하여 더위·추위·밤·낮의 변화가 발생하고, 지의 물·불·돌·흙이 작용하여 비·바람·우레·이슬의 자연 현상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소옹은 사상에 의한 자연 현상의 분류를 하도()·낙서()의 선천·후천 도수에 배합하기도 하였다.
주희는 ≪역학계몽 ≫에서 소옹의 선천·후천 도수와 오행설을 결합하여 태양은 9, 소음은 8, 소양은 7, 태음은 6이라고 하였고, 각각 수·화·목·금에 배합하였다. 이와 같이 사상은 중국 철학사에 있어서 오행설과 역학의 상수론()에 의해 해석되어, 자연과 인간을 철학적·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주역≫에 대한 연구가 심화된 조선조에서도 사상에 대한 연구가 보인다. 서경덕()은 소옹의 학설을 계승하여 “천에는 사신( : ···)이 있고 ……일월성신은 천에서 상()을 이루고 수화토석은 지에서 질()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온천변 ≫·≪성음해 ≫에는 사상론에 입각한 철학적·과학적 사유가 잘 나타나 있다. 이황()은 ≪계몽전의 ≫에서 주희의 ≪역학계몽≫에 보이는 사상에 관해 더욱 심도 있는 설명을 하여 ≪황제내경≫의 운기론()과 ≪황극경세서≫의 이론 등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특히, 납갑()·비복()·점서 등에 대한 제가()의 이론을 도상화하여 분석한 점이 특징이다. 즉, 사상을 오행·월령·간지·점서·방위·하도·낙서 등에 배열하여 전국시대 이래의 모든 자연 철학을 총괄했는데, 이러한 연구는 장현광()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장현광의 문집인 ≪여헌선생문집 ≫의 성리설과 역학도설()은 이전의 모든 역설()을 총망라하여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주역≫의 상수학적 관심에서 일단 벗어나 고전의 본래적 의미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는 고증적 방법으로 사상을 연구한 학자로서 정약용()을 들 수 있다.
≪주역사전 ≫에서 “사상이란 사시의 상이다. 천이 밖에서(지를) 감싸고 일·월이 운행하고, 천·지·수·화의 기가 그 사이에서 항상 운동한다”, “사시는 십이벽괘()이다”, “(사상의) 사는 천·지·수·화가 체질이 각각 나뉘고 위차()에 차등이 있음이다. ……천과 화가 함께하여 뇌()와 풍()이 생겨나고, 지와 수가 어울려 산()과 택()이 이루어진다”라고 하여, 사상을 사계절의 변화와 팔괘를 생성하는 네 가지의 기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우번, 정현()이 사상을 남녀장소(), 수·화·목·금으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였다. 조선 말기의 의학자인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은 사람의 체질()을 사상으로 분류하여 치료한 독창적인 의서이다. 사상의 의학적 연구 성과라고 하겠다.
복희팔괘()와 64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음과 양이 처음 중첩되어 이루어지는 네 가지 형상, 또는 네가지 형상이 상징하는 자연의 네 가지 상태. 사상이란 용어가 처음 보이는 ≪주역≫ 계사전()에서는 ‘역()에 태극()이 있다.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사상은 8괘()를 낳는다.’라고 하였음. 여기서 양의는 음양(陰陽) 또는 천지()를 가리키는데, 이 양의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원리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 사상임. 음양의 작용으로 생겨나는 사상은 춘()•하(夏)•추()•동()의 사시(四時)수(水)•화()•목()•금(金)의 4원소(), 태음()•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 등으로 표현됨.
《주역》의 변화 원리인 음()과 양()을 짝지우면 4가지 형()이 생긴다. 그 상징적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사계()처럼 음양의 성쇠()를 나타내는 것이어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팔괘() 또는육십사괘()가 이루어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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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상』(윤사순·고익진 편, 열음사, 1984)
『한국유학사』(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한국종교사상사 』Ⅱ(금장태·류동식, 연세대학교출판부, 1986)
『한국실학사상연구』(금장태, 집문당, 1987)
『한국철학사』 상·중·하(한국철학회 편, 동명사, 1987)
  • 『주역정의(周易正義)』
  • 『황제내경(黃帝內經)』
  •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
  • 『화담집(花潭集)』
  • 『퇴계집(退溪集)』
  • 『여헌선생문집(旅軒先生文集)』
  • 『여유당전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음성듣기,  , Gedanke
음성듣기 ,  , Gedanke인간들이 생활하면서 지니게 되는 세계관을 총칭해서 부르는 역동적인 개념.

    제공처 정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사상 [思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송광사, 1

    천년의 고찰, 송광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종남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867년(경문왕 7)에 체징()이 창건하였다.
    그 뒤 폐허화되었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영천()의 물을 마신 뒤, 영천으로 인하여 뒷날에 큰 절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여 샘 주위에 돌을 쌓아두었다가 제자를 시켜 뒷날 그 자리에 절을 중창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광해군 14)에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등이 이극룡()의 시주를 얻어서 중창하였다. 중창 후 벽암()을 초빙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전국에서 수 천인이 모여서 시주하였다.
    이로써 1636년(인조 14)에 각성()이 약사전과 칠성각을 중창하기까지 계속 큰 불사를 벌여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 대웅전은 2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절 남쪽 3㎞ 지점에 있는 만수교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뒤 1813년(순조 13)정준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대웅전을 단층으로 개축하였다.
    1814년 약사전을 중수하였고, 1934년극인()이 나한전을 중수하였다. 199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다수의 복장() 유물이 나왔다. 1996년 포교당을 지었고, 1998년 지장전과 오층석탑을 세웠다. 1999년에는 석조 미륵대불입상을 봉안하고 첨성각과 옛 명부전을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오백나한전·약사전·관음전·삼성각·십자각·천왕문·금강문·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1243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1857년(철종 8)에 제봉()이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 팔작지붕이며, 조선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벽과 천장에는 선이 매우 활달하여 생동감을 가지게 하는 19세기 작품 비천()이 그려져 있다. 
    십자각은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십자각이라는 이름은 건물의 평면구성이 자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12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2층 누각형태를 갖춘 건물로서 고건축물 중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이다. 이 십자각 내에는 1716년(숙종 42)에 주조한 범종·법고()·목어() 등이 있다.
    일주문은 원래 만수교 앞에 있던 것을 1814년(순조 14)에 조계교()가 있었던 곳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극인()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절 입구 동쪽에는 벽암·호일()·자수()·유문()·자찰()·서봉(西)·성심()·한계() 등 고승 20인의 부도가 있다. 또, 1636년에 신익성()이 찬한 송광사개창비를 비롯하여 목각칠층다보탑판()·조계교비·석조() 등이 있다.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천 년 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완주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년)에 구산선문의 개산조인 보조체징선사가 개창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백련사였으며, 현재의 일주문이 3㎞ 밖으로 서 있던 대찰이었으나 역사의 변천 속에 거의 폐찰이 된 것을 1600년대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발원하여 그의 법손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의 아픔을 부처님의 가호로서 치유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창한 호국원찰이 되었다.

    이렇듯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호국원찰이어서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대웅전, 나한전, 지장전의 불상이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특히 대웅전의 불상은 KAL기 폭파사건, 12·12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사건, 강릉 잠수함 출몰 때 그러했으며 1997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려 IMF 한파를 예견하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꾸어 불렀는데,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승보사찰 송광사와 한자()까지 같다. 순천 송광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이면 진입로부터 약 2㎞에 걸쳐 펼쳐지는 벚꽃이 장관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금강문(천왕문()·종루()가 차례로 나오고, 종루 옆의 대웅전을 지나면 뒤쪽에 나한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 배치가 자연스러워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대웅전 안에 있는 소조삼불좌상()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은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유명한데, 국제통화기금(IMF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에도 땀을 흘렸다고 한다.

    전국 4대 지장 기도 도량답게 최대 크기의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나한전의 석가여래와 500의 나한상은 대웅전과 함께 많은 이들의 참배처가 되고 있으며 평지 가람으로 노약자도 편히 찾을 수 있다. 대형주차장과 식당이 준비되어 있고, 봄철 벚꽃 터널의 아름다움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대웅전, 삼세불상, ‘아()’자형 종각, 사천왕상 등 4점의 보물 문화재와 8점의 유형 문화재 등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찰이다.

    ‘송광사’ 하면 누구나 얼른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곳은 전북 완주군의 종남산() 송광사이다. 물론 두 절은 전혀 별개의 사찰이다. 하지만 아무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글은 물론 한자로도 ‘’라고 같게 표기하고 있으니 필시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는 짐작쯤은 아무라도 해봄 직하다. 송광사의 역사를 기록한 「송광사개창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옛날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장차 절을 경영하고자 했다. 마침내 사방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승평부(, 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 골짜기로 옮겨가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 뒷날 의발()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길 “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 했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도량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정성을 다해 모연()하니 뭇 사람들이 그림자 좇듯 하였다. 이에 천계()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고르고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바위를 깎아 가람()을 이룩하였다.
    결국 보조스님과 인연이 닿아 있어 그 뜻을 받들다보니 절 이름까지도 같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울러 우리는 이 비문 내용을 통해서 송광사가 조선 후기에 창건되었음도 알 수 있다. 비의 이름 자체가 ‘개창비’인 데다 그것을 건립한 해도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이니 이 사실에 착오가 있을 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한데 절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전혀 엉뚱하다.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 가지산문의 제3조 보조 체징( , 804~880)선사가 송광사를 창건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체징스님의 할아버지뻘 되는 가지산문 개창자 도의선사를 창건주로 꼽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은 아무런 문헌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유물이나 유적 또한 현재로선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아마 체징스님과 지눌스님의 호가 같고, 여기에 자기 절의 역사를 가능한 한 올려보려는 생각이 더해져 이와 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수만 평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이른바 평지사찰이다. 평지사찰로서의 특징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일주문 앞에 서기만 해도 금세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이들 각 건물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가 열어놓은 대웅전 어간문 안의 어둠 속으로 수렴된다(다만 현재는 1998년 완공한 대웅전 앞 석탑이 대웅전 어간 일부를 가리고 있다). 엄정성을 읽을 수 있는 정연한 구조이다. 산지사찰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입방식이요, 가람배치이다. 당연히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이 십분 고려된 것이겠지만, 옛 백제지역 사찰들이 보여주는 평지성의 면면한 전통을 여기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끝이다. 천왕문을 넘어서는 순간 어딘가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우리를 덮친다. 날이 선 엄정성이 절 전체로 파급, 확장되는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대웅전의 앞뒤로 흩어져 있는 전각들-십자각, 지장전, 관음전, 첨성각, 오백나한전, 약사전, 삼성각 등-은 너른 대지 위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말 그대로 ‘흩어져’ 있는 모양새이고, 하나의 점 혹은 파편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저 낱낱의 건물이 고립분산적으로 독립해 있을 뿐 건물들 상호간에 어떠한 유기적 연관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건축이 생활을 담는 그릇일진대 과연 이런 건축 구조와 수행공동체를 지향하는 불가의 생활방식이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적이 의심스럽다.

    송광사 건축의 이러한 분산성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조선 후기에 창건된 탓인지 유감스럽게도 송광사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십자각을 제외하곤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강하게 비끄러맬 만한 것이 없다. 말하자면 어느 건물도 이렇다 할 구조의 미 또는 공예적 장식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셈이다. 이럴 경우 그 약점을 보완, 수정하여 강점으로 환치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집합성이다. 
    별볼일 없는 것들이 기능적으로 결합될 때 생겨나는 힘, 그것은 이를테면 군집의 미, 집체의 미, 그리고 조화의 미일 텐데, 송광사 건축은 애석하게도 이런 미덕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산지가람이라면 덜 드러났을 고립성, 분산성이라는 구조적 결함이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훨씬 강하게 노출되어 그 황량함이 두드러진다.

    송광사의 가람배치가 창건 때부터 지금과 같았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을 설정하고 그 선 위에 가지런하게 건물들을 배치한 점으로 본다면 그밖의 건물들도 어떤 원칙과 조형 원리에 입각해서 위치가 정해졌을 법하다. 물론 추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야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아무튼 지금의 송광사는 건물군이 보여주는 짜임새에서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고, 최근에는 이런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쓴 편액이 인상적이던 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더 크게 새로 지으면서 집을 오른쪽 뒤편으로 훨씬 물려 앉히는 바람에 다른 건물과의 연계성을 더 떨어뜨린 점이라든지, 건축적 고려 없이 마당 가운데 세우면서 중심축을 벗어난 석탑이라든지, 국적 불명의 쌍석등을 난립시키는 따위가 모두 그런 경우이다. 요즘 사람들의 즉흥성과 안목 없음을 탓할밖에 별 도리가 없으니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대개 이상과 같은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송광사를 돌아본다면 공연한 실망을 덜 수 있음은 물론 소소한 재미와 소득이 없지는 않을 터이다.
    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 일주문은 다포계 맞배지붕 양식이다. 조선시대 다포계 건물의 경우 대체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공포의 생김새가 나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하여 공포뿐만 아니라 서까래와 덧서까래, 창방 뺄목 대신 고개를 내민 용머리, 문의 앞뒤로 덧댄 보조기둥 따위들이 모두 유난히 가늘어 일주문의 인상을 섬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섬약함 때문인지 일주문의 또 다른 인상은 일종의 가벼움이다. 어딘가 모르게 진득하게 땅에 몸 붙이고 있는 자세가 아니라 쉽게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기둥이 의식되지 않고 포작에 받쳐진 지붕만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송광사 일주문
    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로 기둥이나 여러 부재들이 유난히 가늘어 섬약해보이는데, 그 때문에 포작에 받쳐진 지붕이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절집처럼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여기 사천왕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이다. 흔히 이곳 사천왕상을 소개하면서 뛰어난 사실성과 세부 묘사의 성실성을 언급하지만, 글쎄 그게 다른 천왕상들과 뚜렷이 드러날 만큼 차이가 큰지는 모르겠다. 흙을 이겨서 4m가 넘는 신상을 조성하면서 이 정도 성실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이 사천왕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제작연대가 분명하다는 점 때문이라 해야 솔직하리라. 오른손으로는 당()을 잡고 왼손 위에는 보탑()을 올려놓은 서방 광목천왕()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뒷면 끝자락에 “”(순치기축육년칠월일필)이라는 먹글씨가 남아 있어 1649년에 이들 사천왕상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조선시대 소조 사천왕상의 기준작을 얻게 된 셈이고, 이 점이 송광사 사천왕상이 갖는 의의라 하겠다. 1997년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사천왕상
    흙으로 빚어 만든 4m가 넘는 거대한 사천왕상이다. 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서방 광목천왕의 보관 뒤쪽에 1649년에 조성했다는 연대가 남아 있어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준작이 되고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소재 송광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천왕상.

    내용

    높이 4.2m. 보물 제1255호. 이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성을 지닌 조각상이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1649(인조 27)년 이전에 완성된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후에 행해진 일련의 사찰 재건 사업에서 당시 팔도 도총섭()이었던 벽암각성 대사()가 주도한 장인 계열을 중심으로 제작하였던 승주 송광사, 화엄사와 더불어 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세 사찰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벽암 문도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점에서 사천왕의 호국·호법 정신과 맞닿아 있다.
    이 상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이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재질이 소조이기 때문인지 얼굴의 주름살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활달한 몸의 움직임과 함께 분노상이 잘 드러난 얼굴 표정은 이 작품의 우수성을 대변하고 있다. 4위() 모두 한쪽 다리는 악귀가 받들고 있고 다른 한쪽 다리는 수직으로 내리고 있다.
    1994년 10월 사천왕상 개채 보수 작업 중에 보탑을 든 사천왕상의 보관 끈 뒷면과, 왼손에 받쳐 든 보탑의 밑바닥에서 묵서의 명문이 발견되었고, 여러 점의 복장품들이 나왔다.
    보관 끈에는 “?(순치을축년시월일필금산화면주조?위?”라고 씌어 있었다. 송광사 개창비에는 숭정() 병자()년에 법당과 동서 재료()를 완성하고 단청을 시채()하였으며 천왕전은 여인()이라는 승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1636년과 1649년 사이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보탑 밑바닥에는 건륭() 51년(1786)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복장품으로는 용, 보주를 든 사천왕상을 제외한 3위()의 천왕상의 등 부분 속에서 법화경과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류와 후령통 등이 나왔다. 경전류로는 정강() 정미()년(1129)과 천계() 8년(1443)에 제작된 귀중한 목판본이 포함되어 있다.



    천왕문을 넘어서면 중정이고 그 너머 정면으로 대웅전이 우람하다. 대웅전은 송광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절이 창건될 무렵 처음 지어졌고, 1857년 중건되었다. 꽤 큰 건물이다. 외관에 걸맞게 기둥이 튼실하고 훤칠하다. 그런데 어쩐지 처마가 깊지 않아 집 전체의 조화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다. 제대로 조화가 맞았더라면 장중한 맛을 한껏 드러냈으련만 도리어 점잖은 도포 차림에 양태 좁은 갓을 쓴 것마냥 어딘지 어색하다. 
    처음 세울 때는 2층이었으나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고쳐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건물 각 부분의 비례가 적정치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물리고 그 위로 공포를 올려 다포집 전형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 집의 특색은 그 아래에 있다. 즉 정면의 창방과 상방 사이 공간을 벽면으로 처리하고 각각의 칸을 균등하게 셋으로 나눈 다음 칸칸이 벽화를 채운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 보통은 여기에 빗살무늬 교창을 둔다.
    송광사 대웅전
    송광사 대웅전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규모가 매우 크고 튼실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천장의 꾸밈새가 다채롭다. 천장은 가운데 3칸은 우물반자를 치고 나머지 외진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보개를 씌웠으며,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갖은 물고기·게·거북 혹은 자라 따위 바다짐승 등 온갖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개중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바삐 줄지어 가는 자라,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젓는 거북도 눈에 띈다. 빗천장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의 비천도 20여 장면이 천장화()로 그려져 있다. 19세기 중건 당시에 완성된 것들로 생각되는데, 비교적 색채도 선명하고 활달한 동세가 구김살없이 표현되어 눈을 즐겁게 한다.

    법당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불상이 되겠다. 중앙에 석가, 동쪽에 약사, 서쪽에 아미타여래가 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흙으로 만든 이 불상들은 각각의 높이가 5.5, 5.2, 5.2m나 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소조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분들은 그 크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법당 안이 그들먹하다. 때문에 불상과 천장 사이의 공간은 여유롭지 못하고, 수미단과 앞면 기둥열의 간격이 좁아 예배 공간은 옹색하며, 수미단조차 3단이 아닌 2단으로 낮추어 만드는 편법을 구사하고 있다. 공간 활용이 이렇게 비합리적임을 무릅써가며 이만큼 불상을 크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지 의아스럽다. 혹 법당이 2층이었을 때에는 그런대로 집과 어울렸을까? 모를 일이다.

    "송광사 소조삼존불
    각각의 높이가 5m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조삼존불이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불상에서 땀이 흐른다고 전한다.
    근년 도난사건이 빌미가 되어 삼존불의 복장유물()이 수습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세 불상에 똑같은 내용으로 납입된 「불상조성기」()이다. 그 가운데 “이 불상을 만드는 공덕으로 주상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은 천년토록 다함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또한 환국하시기를 ······ 원하옵니다”( 殿殿     ··· )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함도 이들 불상 제작 배경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서글픈 장면 하나가 일견 세상과 무관한 듯한 불상에조차 화인()처럼 남은 것이다. 또 조성기 첫머리에 불상을 만든 때를 밝히면서 ‘’과 ‘’(1641)이라고 명()과 청()의 연호를 나란히 기록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는 혼란기에 명, 청 양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약소국 조선의 딱한 처지도 손금보듯 읽어낼 수 있다. 대웅전 삼존불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가감없이 고스란히 간직한 불상이라 하겠다.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전패(殿) 또는 원패()라고 불리는, 조각이 아름다운 목패() 세 개가 서 있다. 왕,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패이다. 셋 모두 크기가 2m가 넘어 전패치고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화염을 날리며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전체를 뒤덮고 있는 앞면은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인다. 뒷면에는 인조 때 만들었다는 것과 정조 때인 1792년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먹글씨가 남아 있다. 크기로나 새긴 솜씨로나 또 만들어진 연대가 드러난 점으로나 눈여겨봄직한 유물이다.

    그동안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던 대웅전은 1996년 보물 제1243호로 등급이 승격되었고, 삼존불상과 그 복장유물은 1997년 보물 제1274호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절 건물 가운데 범종, 목어, 운판, 법고의 네 가지 법구(), 곧 사물()이 비치된 곳이 범종각 혹은 범종루이다. 엄격히 구분한다면 종각은 단층, 종루는 누각 형태의 2층을 가리킨다. 
    송광사에는 대웅전의 남서쪽, 현재는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의 비스듬한 앞쪽에 범종루가 있다. 우리 전통건축에서는 아주 드문 십자형 평면을 채택하여, 누마루를 경계로 아래위 동일선상에 12개씩의 누하주와 누상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짜올린 대단히 독특한 외관을 뽐내는 건물이다.
    바닥이 지면과 별 차이가 없는 누각 아래층은 주춧돌과 기둥을 제외하면 거칠 것 없이 열린 구조이고, 그 서북쪽 귀가 만나는 곳에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걸렸다. 사물이 걸려 있는 누각은 면마다 돌아가며 간결한 계자난간을 돌렸다. 
    누마루의 중심을 이루는 4개의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고 솟아오르는 용을 그려넣어 돋보이게 장식을 하였다. 기둥 위로는 창방을 건너질렀는데, 대들보 없는 이 건물에서 그 구실을 겸하고 있다. 평방 위로 짜올린 공포는 가냘프게 휘어올라간 앙서형의 살미, 두께가 얄팍한 첨차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매우 섬약하다. 
    서까래와 덧서까래도 가늘고 길어 연약해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울림은 전혀 다르다. 기둥 사이의 간격이 2.5m, 따라서 한 면의 길이가 7.5m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집에 귀공포가 여덟 군데나 놓이고 기둥 사이마다 주간포를 짜올렸으니 처마밑은 공포로 빼곡하여 섬세하고 현란하며 화사하다. 
    공포를 구성하는 낱낱 부재가 가볍다보니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느낌도 가뿐하고, 산뜻하고, 날렵하다. 마치 범상한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고된 훈련 끝에 부르는 화려한 합창 같고, 보잘것없는 풀꽃들이 가득 모여 이룬 커다란 군락 같다. 밀집한 공포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한 본보기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종루는 1857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함께 중창된 것으로 전해온다. 종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6년 ‘완주 송광사 종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244호로 승격되었다. 십자형 평면으로 말미암아 십자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대웅전을 옆으로 비껴 절의 동북쪽 귀퉁이로 빠져나가면 절의 내력이 적힌 ‘송광사개창비’를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내쳐 걸으면 긴 돌각담에 둘러싸인 이 절의 부도밭이 나온다. 송광사개창비는 절의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 세워졌다. 거북받침,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거북받침은 화강암, 몸돌과 지붕돌은 대리석 통돌이다.
    비머리의 앞면에는 ‘’(전주부송광사개창지비), 뒷면에는 ‘’(사호선종대가람사)라고 전서()로 제액()하였고, 그 아래로 앞뒷면에 글씨가 빽빽하다. 글을 짓고 전서를 쓴 사람은 선조의 부마였던 동양위 신익성( , 1588~1644)이고, 글씨는 선조의 여덟째아들 의창군 광( )이 썼다. 이미 대웅전 삼존불의 조성 경위에서 우리는 송광사와 왕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음을 짐작한 바 있지만, 국가에서 ‘선종대가람’이란 이름을 내리고 왕실과 가까운 사람들이 비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런 점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송광사 개창비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에 세워진 비로 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고려 보조스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사찰 건립의 배경과 과정, 둘째는 벽암 각성( , 1575~1660)스님이 창건에 깊이 관여한 사실과 그분의 면모 및 고려 말의 태고 보우( )스님으로부터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법맥()의 상세한 계통, 그리고 셋째는 벽암스님의 문도, 창건에 동참한 시주자와 기술자, 비석 제작에 참여한 장인의 명단이 그것이다. 
    특히 벽암스님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는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면서 3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한 승병장이기도 하다. 
    스님은 송광사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서, 무주 적상산성에서 사고()를 지키던 중 대중들의 요청이 계기가 되어 대웅전 삼존불의 조성을 비롯한 갖가지 송광사 불사에 참여한다. 그의 지위나 직책으로 보아 송광사와 왕실을 연결하는 매개자였으며 불사의 주도자 또는 후견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 비문 속의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전법()의 계보는 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돌각담이 정겨운 부도밭은 너무 넓은 탓인지 아늑한 맛은 없다. 뒷줄에 열둘, 가운데 둘, 그리고 앞줄에 둘 해서 모두 열여섯 기의 부도와 두 개의 비가 세 줄로 나란히 서 있다. 부도들은 모두 석종형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고, 다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여러 점 눈에 띈다. 푸근한 맛은 없지만 세월을 벗하며 서 있는 부도들이 맑은 바람 속에서 해바라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송광사는 진입부의 정연함과 중심부의 산만함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 사찰이다. 진입부에서 가졌던 기대와 긴장이 중심부에서 여지없이 풀려버리는 그런 곳이다. 건물과 건물이 짜임새 있게 맞물려 돌아가야 거기에 생활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음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절이다. 설사 여러 점의 유물이나 유적이 가치 있고 볼 만하더라도 그것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못하면 그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없음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송광사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에 위치한 송광사의 조선시대 누각.
    보물 제1244호. 완주 송광사 종루는 종을 달아 놓은 십자형의 2층 누각이다.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평면인데 비하여 십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는 창덕궁 부용정과 수원 방화수류정이 십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나 다른 건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구조이다. 십자형은 내부 공간구성이 어려울 뿐 아니라 지붕을 구성할 때도 회첨이 많이 생겨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 종루는 기단 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워 완전한 십자형 누각을 구성하였다. 누하주()는 굵은 나무를 민흘림을 주어 8각으로 치목하였고 그 위에 다시 원기둥을 세워 2층 누각을 지지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외벌대로 돌렸는데 부분적으로 유실된 상태이며 서측의 기단은 흙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2층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처리되었으며, 기둥 위에 창방을 걸고 그 위에 평방을 서로 반턱맞춤으로 결구하여 공포를 배치하였다.
    평면은 중앙에 범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4칸에는 법고, 목어, 운판을 매달아 기본 불구()를 갖추었다. 나머지 한 칸은 승강계단이 설치된 입구이다. 주간은 모두 8.15자[]로 일정하며 마루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다.
    공포는 다포계 구조이다. 내외 3출목의 공포를 주상과 주간에 1구씩 짜올려 빈틈없이 공포가 처마 밑을 받치고 있다. 출목간의 순각판은 내·외부 모두 생략되고 오제공 상단에 도리와 직각방향으로 널을 깔아 처리했다. 내부의 초가지에는 연봉, 연화, 봉두가 조각되었으며 회첨귀한대 내부 제공은 모두 교두형으로 처리되었다. 
    특히 내부에서는 짜 올라간 공포로 별도의 천장 없이 천개식() 구성을 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붕은 평면형에 맞추어 십자형 팔작지붕을 구성하고 직교하는 용마루의 중앙 교차점에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와는 신재로 교체되어있는 상태이며 용머리기와 및 망와는 일부가 옛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모로단청, 내부는 모로단청과 긋기단청이 혼용되었다. 벽이 없는 건물로 벽화는 없다.
    이 건물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공포대가 크고, 중첩되는 살미선과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선 그리고 계자난간 등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다. 공포는 화려하지만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와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해 섬약해 보인다. 대웅전 공포와 비교해 볼 때 장식적 수법은 덜하지만 쇠서의 앙각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여 대웅전이 중건되던 시기에 같이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 종루는 독특한 평면과 화려한 공포, 날아갈 듯한 추녀선들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은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일한 십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다. 전주객사 앞에서 다시 충경로 사거리로 나와 왼쪽 전주 시내로 난 1번 국도를 따라 1.3㎞ 가면 진북광장 오거리가 나온다. 진북광장 오거리에서 다시 오른쪽 모래내·전주역 방면으로 난 길을 따라 1.7㎞ 가면 안골광장 사거리가 나오고, 안골광장 사거리에서 앞으로 계속 난 길을 따라 1.2㎞ 가면 우아교차로가 나온다. 
    우아교차로에서 앞으로 계속 난 26번 국도를 따라 진안 방면으로 5.3㎞ 가면 황운교차로에 닿는다. 황운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2.6㎞ 가면 마수교를 앞두고 길 왼쪽에 송광사·위봉사 표지판과 함께 741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741번 지방도로를 따라 2.5㎞ 가면 길 오른쪽 앞에 한마당슈퍼가 있는 사거리가 나온다. 
    한마당슈퍼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작은 다리를 건너면 송광사에 닿는다. 대형버스는 한마당슈퍼 앞 사거리 100m 정도 못미처 왼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면 송광사 앞까지 갈 수 있다. 송광사 주차장은 대형버스도 여러 대 주차할 수 있다. 송광사 주변에는 숙식할 곳은 있으나 그리 마땅치 않다.
    송광사 입구 마수교에서 진안으로 계속 이어진 26번 국도를 따라 약 3.5㎞ 가면 화심온천에 닿는다. 화심온천은 중탄산나트륨이 함유된 알카리성 온천으로 피부미용, 신경통, 관절염 등에 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화심온천에서는 숙식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순두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화심순두부는 순수한 국산 콩에 재래식 제조방법으로 만드는데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어서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두부의 명소이다.
    전주 시내 모래내 사거리에서 송광사로는 14-1, 37, 38, 106, 106-1번 시내버스가 약 30분 간격으로 다닌다.송광사 입구 마수교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2.5㎞ 구간에는 길 양옆으로 해묵은 벚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 길은 봄에는 만개한 벚꽃들로 온통 흰 터널이 되며, 가을에는 붉은 벚나무 단풍 터널이 되어 장관을 이룬다.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문헌

    •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倉碑)」(노명신, 『불교학보』 3.4합집, 1966)
    • 「조선후기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노명신, 『미술사학연구』 202, 한국미술사학회, 1994)
    •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노명신, 『불교미술연구-송광사 특집호』 5, 동국대학교불교미술문화재연구소, 1999)
    • 『전통사찰총서』8(사찰문화연구원, 1997)
    • 『전통의 고장 완주』(완주군, 1982)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8)
    • 송광사 [松廣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송광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 송광사 [松廣寺] (두산백과)
    • 완주 송광사 종루 [完州松廣寺鍾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完州松廣寺塑造四天王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