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8일 월요일

영조,英祖/ 연잉군, 延礽君.


1694(숙종 20)∼1776(영조 52). 조선 제21대 왕.
출생-사망1694 ~ 1776
재위기간1724년 ~ 1776년
가족관계왕비 정성왕후(), 정순왕후(), 아버지 숙종(), 어머니 화경숙빈() 최씨,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탕평정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조(, 1694~1776)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 왕위를 지켰던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그 자신 콤플렉스와 개인사적 불행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했으며 이전의 그 어느 왕보다도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재위 1724∼1776. 이름은 이금(), 자는 광숙(), 호는 양성헌(). 숙종의 세 아들(··)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이고,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이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측은 앞서 숙종 말년에 좌의정 이이명()의 독대에서 논의된 대로, 연잉군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착수하였다.
정언 이정소()의 세제책봉상소를 계기로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영중추부사 이이명()·판중추부사 조태채() 등 이른바 노론4대신의 요구와,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숙종의 제2계비인 )의 삼종혈맥()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삼종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에 걸치는 3대의 혈통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숙종의 유교()라고 하는데, 여기에 따르면, 임금인 경종 외에는 연잉군밖에 없는 셈이 된다.(이복동생인 연령군은 숙종 말에 죽었음.)
유봉휘()로 대표되는 소론 일부의 반발과 다른 후사를 물색하던 경종비 어씨()의 불만이 없지는 않았으나, 왕세제로 책봉된 명분은 당당하였다. 그런데 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이 병환중이어서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휴양하도록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소론은 왕권을 침해하는 불충이라 해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결국 대리청정론은 취소되고 김일경 등 소론 내 강경론자의 공격으로 노론세력이 일시에 정계에서 축출되어 소론정권이 들어섰다.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또 그들에 의해 왕세제의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에 고립된 상태를 면할 수 없었다. 뒤이어 노론이 경종에게 반역행위를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이른바 임인삼수옥()이 발생하여, 노론 4대신을 위시한 170여명의 노론계 신하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연잉군 역시 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처제인 서덕수()나 인척관계에 있는 백망()·정인중() 등이 고문 때문인지는 모르나 역모를 자백해 처형되고, 자신까지 피의자의 공초에 오르내리게 되어 역모에 관련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환관 박상검()·문유도() 등의 방해로 대궐출입이 막히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이에 왕세제 자리의 사퇴를 걸고 이를 문제화 해, 결국 집권소론으로 하여금 적대행위를 일삼는 환관·궁녀들을 처형하도록 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이후 보좌하는 동궁요속()이던 김동필()·조현명()·송인명()·박문수() 등과 대비 및 경종의 보호로, 불안한 속에서도 세제의 자리를 지켜 1724년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직후 영조는 장차의 탕평책 시행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붕당의 폐해를 들어 붕당타파를 천명하였다. 영조가 탕평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세제로 책봉된 뒤일 것이다.
노소론 사이의 정쟁이야 숙종 때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그 때는 자신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으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에서부터 노소론간의 당론이 충역론으로 확산되면서 자신이 바로 그 정치적 소용돌이의 핵심에 처하여 생명까지 위협받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즉위 직후 소론인 이광좌()·조태억()으로 영·좌의정을 삼고, 세제 책봉시 격렬하게 반대했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였다. 한편으로는 앞서 임인삼수옥 당시 자신을 모해하고 죄인으로 몰려고 했던 김일경 등 소론과격파()와 삼수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하였다.
이어 즉위 초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소론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지세력인 노론을 정계로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구성하면서 노론4대신을 위시하여 임인옥사에서 죽거나 처벌된 사람들의 죄를 모두 없애고 그 충절을 포상하는 을사처분(또는 )을 단행하였다.
자신이 의도했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정호()·민진원() 등의 노론당로자들이 을사처분과 환국에만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 소론에 대한 보복까지 요구하여 정국이 다시 노·소론 사이의 파쟁으로 흘러갔다. 1727년 갑자기 노론을 일시에 축출하고 이광좌를 수상으로 하는 소론정권을 형성(이를 이라 함)하면서 경종년간의 건저()·대리()를 역적의 행위로 규정하였다.
18세기 초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는 지난 세기 동안 누적된 붕당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해 있었다.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은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진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진검승부가 되었고 각 붕당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숙종년간 남인과 서인의 대결구도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한 이후, 서인 내부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들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숙종의 뒤를 이을 다음 왕과 관련하여 또다시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해서는 왕위마저도 쥐락펴락하고자 하는 신하들의 등쌀에 연잉군(훗날 영조)과 그의 배다른 형 왕세자(훗날 경종)는 서로 다른 당을 등에 업고 왕위를 둘러싼 경쟁을 하여야만 했다. 왕세자는 그의 어머니 장희빈과 운명을 같이 했던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연잉군은 남인에 대해 강경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던 노론이 밀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지지하는 신하들의 당색에 의해 정치적 색깔을 정해야만 했던 숙종의 두 아들은 불행한 이복형제였다. 왕세자는 아버지 숙종의 변덕스런 사랑으로 궁녀에서 왕비로 다시 희빈으로, 끝내는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부담감이 있었고 연잉군은 비록 세력이 큰 노론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왕세자의 어머니 장희빈을 제거한 노론은 보복이 두려워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왕세자가 14세 때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목도한 충격으로 심신이 허약해진 것을 노려 숙종으로부터 왕세자의 뒤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는 명을 이끌어냈다. 아무리 몸이 허약하다고 하나 아직 젊은 나이였던 경종에게 후사가 태어날 것을 바라지 않고 신하들이 선동하여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게 한 것은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였고, 한편으론 목숨을 건 모험이기도 하였다. 왕세제(다음 왕 자리를 이을 왕의 동생) 자리를 확보해 준 노론과 한배를 탄 연잉군에게도 이것은 운명을 건 승부수였다. 이대로 허약한 경종이 요절하여 자신이 왕위를 넘겨받거나, 혹시라도 후사를 본 경종의 손에 역적으로 몰려 죽거나의 기로에 선 것이다.
비록 심신이 허약하고, 드센 노론 세력에 위축된 경종이었지만 그도 왕은 왕이었다. 경종은 왕좌에 있었던 4년 동안, 소론과 손을 잡고 왕권에 도전하는 노론과 왕세제를 견제하였다. 경종 1년, 몇 차례 잡음 끝에 마침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여 다음을 도모할 기회를 얻은 노론은 더 나아가 허약한 경종을 압박, 왕세제의 대리청정으로 정권획득에 쐐기를 박으려 하였다. 그러나 현왕을 무시하는 이러한 성급하고 무리한 시도는 결국 경종을 분노하게 하였고 경종과 소론의 반격으로 노론은 4 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이 유배를 가는 신축옥사(1721)를 겪는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는 소론 측의 공격으로 4대신과 60여 명의 노론이 처형을 당하고 170여 명이 유배를 갔다. 이 임인옥사(1722)의 옥안에 왕세제 또한 경종시해 모의에 참가한 것으로 나와 그의 목숨도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도움으로 왕세제는 가까스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의 앞날은 불투명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세제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그의 이복 형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후사 없이 요절하고 만다. 경종의 죽음으로 오랜 세월 왕권을 향해 공을 들여온 왕세제는 마침내 1724년 조선의 2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영조이다.

씻을 수 없는 상처 이인좌의 난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 더욱이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영조의 즉위로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소론 측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면서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영조의 어머니가 엄격하게 제대로 뽑힌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 수 없는 천한 무수리 신분인데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이유익, 심유현, 박필현 등 일부 소론 세력과 갑술환국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이인좌의 난은 무신년이 일어나 무신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규모가 삼남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살되었다.
이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는 결과를 낳았다.

탕탕평평의 탕평책을 펴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이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년간에 일어난 신축, 임인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 중에서 소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과격론자들을 내몰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운영을 해나갈 수 있는 탕평론자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 ‘홍범조()’의 ‘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 ; 치우치거나 무리지음이 없으면 왕도가 편하다.)이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노론과 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자(완론자)들만 등용하였다. 관직도 노론과 소론을 섞어서 배치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무조건 소론 중에서 임명하는, 이른바 쌍거호대()의 인사정책을 펴나갔다. 이는 이후 어느 정도 탕평책이 안정되자 점차로 당색을 초월해 재능이 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유재시용()으로 바뀌어갔다. 또 영조는 일반 유생들의 당론에 대한 상소를 금지 시키고 붕당 갈등의 중심이 된 이조전랑이 가진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사권을 철폐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노론의 치우친 영조의 절름발이 탕평책은 영조의 개인적 콤플렉스와 결합하여 결국 또 하나의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 그것이 바로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사건이다.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다
아무리 영조가 탕평책을 쓴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노론위주로 돌아가는 정치 상황은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일부 소론 층의 불만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소론에게 경종의 의문의 죽음과 영조의 출생에 대한 괴소문은 언제나 은밀한 가십거리였고 또 이것은 언제든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었다. 영조가 즉위하고 20년도 더 지난 1755년 나라의 정치를 비난하는 글이 나주에 붙었다. 이것이 나주 벽서 사건이다. 벽서를 붙인 자는 영조 즉위 초기 소론을 축출할 때 나주로 유배 간 윤지라는 자였는데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조의 왕세제 때의 일이 다시금 불거져 나왔다. 왕이 된 지 20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는 자신에 대한 괴소문에 가뜩이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는 격노했다. 그리고 영조의 이러한 격노를 이용해 노론은 눈엣가시같던 소론을 이 기회에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일소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왕세자(사도세자)였다. 당시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하고 있던 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분노와 소론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론의 의도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세자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노론은 당황했다. 소론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적인 세자의 태도에 앞날이 불안해진 노론은 세자가 왕위를 이을 경우 자신들에게 혹시나 돌아올지도 모를 불이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자의 태도 또한 문제가 있었다. 영조를 싸고도는 노론에 대항해 남인과 소론, 소북 등 중앙정계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세력들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에게 줄을 섬으로써 아버지 영조와 아들 세자 간에는 묘한 정치적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세자의 상식을 벗어난 과격한 행동들이 노론에게 꼬투리를 제공하였다. 정성왕후가 죽은 뒤 60대의 영조가 노론 강경노선인 경주 김씨 가문에서 새로 맞아들인 왕비 정순왕후는 세자의 입지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노론의 사주를 받은 정순왕후는 세자의 실행을 영조에게 과대 포장하여 무고함으로써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개인적 콤플렉스 탓인지 원래부터 편애가 심하였던 영조는 세자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고 세자 또한 궁내에서 칼을 휘둘러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 관서지역을 미행하는 등의 비정상적인 일들을 벌여 갈등의 골을 심화시켰다.
그 와중에 노론 측에서는 세자를 폐위하고자 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10조 목의 글을 영조에게 올렸다. 세자를 불러들인 영조는 분노 속에서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였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한여름,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붕당 간의 정쟁이 불러온 왕실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뒤 영조는 뒤늦게 이를 후회하고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고 노론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위를 사도세자의 장자 정조에게 물려줌으로써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회한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켰다.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장헌세자로 추존되었고 1899년 (광무3)에는 장조로 추존되었다.

18세기 조선의 중흥기
영조는 조선왕조 임금 중 경연(임금이 신하들과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는 자리)을 가장 부지런히 한 임금이다. 왕이 중심이 되는 탕탕평평의 왕도정치를 펼치려면 임금이 신하들보다 한 수 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영조는 공부와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사치를 경계하였고 민생을 위해 많은 개혁조치를 단행해갔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에 대신해 바치던 납포의 양을 1필씩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주었으며, 잔인한 형벌제도를 고치고, 양반들이 사적으로 백성들을 징계하는 것을 금하였다. [속대전]을 편찬하여 [경국대전] 이후 변화한 세상에 발맞추어가지 못하는 법률을 재정비하였으며,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본정책을 펴 [농가집성] 등의 책을 널리 보급하는 등 민생안정에 힘을 썼다. 또한 청계천 등에 준천 사업을 벌여 홍수 때 범람을 막아 주거환경을 개선했으며, 신문고를 달고 궁성 밖 출입을 통해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듣고자 하였다. 영조 본인이 학문을 숭상하였기에, 학자들을 우대하고,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켜 이 시기 실학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학문 우대 정책에 힘입어 인쇄술이 개량되고 많은 책이 간행, 보급되어 학문과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영조는 개인사적으로는 콤플렉스와 지독한 불행에 시달린 인물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고통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현명하게 승화시켜 민생을 안정시킨 임금이었다. 영조 대에 마련된 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손자 정조는 더욱 큰 선정을 베풀 수 있게 되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의 시대를 보통 조선후기 중흥기라고도 부른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은 1728년의 무신란(, 혹은 의 )을 겪고 나서였다. 애초에 영조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은 영조가 왕세제로서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대체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으나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과격파()들은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김일경이 처형되고 을사환국으로 노론정권이 들어서서 일반 소론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들이 숙종 20년의 갑술환국 때 노론에 의해 명의죄인()으로 몰려 정계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 일부(흔히 이라 함)를 규합해 무신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정미환국으로 집권하고 있던 이광좌·오명항() 등의 소론정권에 의해 조기에 진압되었으나 당쟁의 폐해로 변란까지 겪게 된 영조로서는, 붕당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란 명분 하에, 노·소론에게 교대로 정권을 맡기는 환국형태가 아닌 탕평정국을 위한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그것이 조문명()·조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해 주장된, 권력구성에 노·소론을 안배해 함께 참여시킴으로서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조제(調)형태의 탕평책이었다. 이를 구체화하는 방법이 분등설()과 양치양해()·쌍거호대()였다.
분등설은 노소론간의 충역시비를 양시쌍비()논리에 의해 절충하여 양측 모두가 벼슬길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이며, 양치양해 역시 어느 한쪽을 죄주려면 반드시 다른 한쪽에 짝을 구하여 함께 벌함으로써 편파성을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쌍거호대란 인사정책으로, 예컨대 노론 홍치중()으로 영의정을 삼으면 소론 이태좌()로 좌의정을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맡기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에 의해 노·소론간에 충역시비가 상반되는 경종년간의 신축·임인옥사(흔히 라 함)를 절충해 1729년의 이른바 기유처분()을 내렸다. 소론계의 조문명·조현명, 송인명·서명균() 등과 노론계의 홍치중·김재로·조도빈() 등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파를 주축으로, 노·소론간의 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정국이 실현되었으며 이 바탕 위에서 영조의 왕권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영조를 위하다가 역적으로 몰린 노론 피화자의 신원요구를 언제까지나 묵살하기는 곤란하였고, 무엇보다도 영조 자신까지 혐의를 받고 있는 임인삼수옥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유처분 이후 정권에 참여한 소론의 동의와 양보를 얻어 조금씩 노론 피화자를 신원시켜 갔다. 마침내 1740년(영조 16) 노론4대신에 대한 완전한 신원과 신임옥사가 소론 과격파에 의해 조작된 무옥()임을 판정하는 경신처분을 단행하고, 뒤이어 이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신유대훈()을 반포하였다.
이제 영조는 숙종-경종-영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은 물론 소론과 나라 전체 사람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종전의 노·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벗어나 노·소론은 물론 남·북인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을 표방하고, 쌍거호대 대신 유재시용()의 인사정책을 취하여, 오광운()·채제공() 등의 남인과 남태제()·임개()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노론 명분 아래 추진되었으므로 흔히 노론 탕평이라 불리우는 이 시기의 탕평책 아래에서, 영조는 만년에 스스로 자신의 4대 사업으로 손꼽았던 이조낭관통청권()의 혁파, 한림회천법()의 회권법()으로의 전환, 균역법·산림()의 정치적 위상 격하(이상의 넷을 줄여서 ···이라 함)와 같은 개혁을 성사시켰다. 이 외에도 서원철폐나 노비신공의 반감, 군비와 군제의 정비 및 치세 후반기까지 계속되는 서적의 간행과 같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1755년(영조 31)의 을해옥사로 소론 내 과격파의 잔여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또 소론들 스스로 조태구·이광좌 등을 영조에 대한 불충이라 하여 죄안에 올리기를 청하며 자기들 당론의 잘못을 뉘우치는 소를 올림으로써, 노론 명분이 완전히 승리하였다. 이를 신임의리()라 하며, 향후 노론 집권의 기본명분이 된다. 또 이를 『천의소감()』이란 책자로 반포함으로써 한층 추진력을 갖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시기부터 집권세력 내부의 분열로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된다.
그 분열이란 노론 내에서 1749년(영조 25)이래 대리청정을 해온 왕세자(후일의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표면화된 것이다. 세자가 신임의리에 투철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김상로()·홍계희() 등과 세자를 보호하려는 홍봉한 등의 외척사이의 갈등이었다. 곧, 동당()·남당·중당()의 명목으로 성립하였으며, 정성왕후가 승하하여 정순왕후가 계비가 됨에 따라 친정 아버지인 김한구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이런 분열에 가세하고, 소론과 남인 일부가 이런 틈새를 이용해 정치력을 신장하려 꾀함으로써 전날의 노·소 대립처럼 살벌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노론 탕평은 이미 속으로 곪고 있었다.
1762년(영조 38)영조가 자신의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참변()을 일으킨 것은 이런 갈등속에서였다. 신임의리의 붕괴를 우려하는 노론 일부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서였건, 홍계희·김상로와 정순왕후 등의 궁중세력의 모함에 빠져서였건, 아니면 『한중록』의 서술처럼 이상 성격으로 인해 임금이 되기에 부적절한 인품이어서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간에 영조 개인으로서는 정치에서 또 한번의 고통과 좌절을 받게 된 셈이다.
나라의 근본()이라는 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한두 명의 동궁요속이 세자를 구원하려 했을 뿐, 어느 누구도 목숨을 내놓고 임금에게 충간해 신절()을 지킨 신하는 없었다.
이는 1689년(숙종 15)의 인현왕후 폐출 시 박태보·이세화의 죽음과 극히 대조적이다. 탕평이 사대부의 명절()을 무너뜨린다는 지적대로 영조에게 왕권의 안정은 가져다주었으나, 이제 군신관계는 이록(祿)을 매개로 할 뿐 전날의 사림정치에서 보는 의리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영조의 왕권은 점차 왕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외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임오화변 이후의 정국은 탕평이 여전히 표방되었지만 실은 홍봉한과 김한구를 각기 대표로 하는 두 갈래 척신세력의 노론·소론·남인·북인이 이해를 좇아 이합집산하는 형국을 보였다.
대체로 영조 말기의 정국은 왕세손을 등에 업은 홍봉한 세력이 우세하였으나, 외척에 비판적인 일부 관료가 청명당()을 형성하여 이를 견제하고 여기에 김한구계의 척신이 연결되었으며, 다시 왕세손(후일의 )을 보호하는 세력과 이를 모해하려는 세력간의 암투가 벌어지는 속에 고령으로 이미 노쇠해 버린 영조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나마 승하하기 몇 달 전 홍인한 등 권세가의 방해를 물리치고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성사시킴으로써 세손의 즉위를 순조롭게 한 것이 영조의 마지막 영단이었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1725년영조는 압슬형()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형살()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1774년 사문()의 용형()도 엄금하였다. 그리고 남형()과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경제정책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서 1725년 각 도의 제언()을 수축, 한재에 대비하게 하였고,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세하도록 하는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수하게 해 탈세방지에 힘썼다.
1760년에는 서울의 주민 15만명과 역부() 5만명을 동원해 2개월간에 걸쳐 개천(, 즉 오늘날의 청계천)을 준설하게 하고, 이어 준천사()를 설치, 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서울시민의 골칫거리였던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하였다.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이었다. 단순한 감필()이 아니라 모두 1필역()으로 부담을 균일하게 함으로써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그리고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전()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양반이 위주인 지주층의 부담을 끌어내고,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피역자에게 선무군관()이란 명칭을 부여하여 군관포를 징수하였다. 또한 어염세·은여결세 등 그 동안 국가세입에 들지 않던 세금을 국고로 환수하게 하여,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가 얽힌 양역문제 해결에서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하였다. 이는 1750년 친히 홍화문()에 나가서 한성 시민을 만나서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는 의지를 보인 것과 함께 균역법이 갖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환곡분류법()을 엄수하게 하는 등 환곡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1763년에는 통신사(使)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한재시에 기민을 위한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익을 담당하였다.
신분에 따른 역()을 더욱 명백히 하고자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균역법의 시행은 물론,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하였다. 1730년에 양처() 소생은 모두 모역()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역(),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여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서얼차대()로 인한 사회참여의 불균등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1772년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통청법을 제정해 서얼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었다.
영조는 생전의 신념으로 이끌었던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서원·사우()의 사건() 또는 사향()을 금지시키면서, 1741년에는 이를 어긴 170여 개소의 서원·사우에 대한 훼철을 강행함으로써 서원남설에 철퇴를 가하였다. 숙종 때까지 매년 10여 개씩 늘던 남설의 경향이 일시에 그친 것은 그 과단성 있는 정책의 집행이 가져온 큰 효과였다.
1772년에는 과거시험도 탕평과()를 처음 시행하는 특례를 보였고, 같은 해에는 동색금혼패()를 집집의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군비와 관련해서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을 중지시키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며, 1729년에는 숙종 때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고, 이듬해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만들게 하여 군기()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1755년 조선 전기 이래 임금의 친위군으로 존속해오던 금군()을 정비해 용호영()으로 독립시켰으며,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서 만들도록 해, 임진왜란 때 떨쳤던 해군력을 계승, 더욱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북방 변방 및 요새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여 1727년 북관군병()에게 총을 복습하게 하였고,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며,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감란록()』을 반사()하고, 이듬해『숙묘보감()』을 편찬하게 했고,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세계인 『퇴도언행록(退)』을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수명()시킴과 동시에 여성을 위한 『여사서()』를 언역()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1742년에 『천문도()』·『오층륜도()』를 모성()시켰으며, 이듬해에는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하였고, 1754년『소학훈의()』·『속오례의()』를 편찬하게 하며, 『경국대전』을 수명한 뒤 새로이 제도적으로 바뀐 것을 반영해 『속대전』을 만들었다.
1747년『황단의궤()』를 편찬한 뒤 이듬해에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법을 선용하라는 취지로 만든 관리들의 필독서 『무원록()』을 필삭, 훈석을 가하게 하여 각 도에 반포하였다. 1749년『속병장도설()』, 1753년『누주통의()』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영조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는 『천의소감()』을 이룩하여, 이를 내외에 반포하였고 1747년에는 『삼국기지도()』·『팔도분도첩()』·『계주윤음()』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1765년『해동악장()』을 만들고, 『여지도서(輿)』를 인간()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읍지도 모으게 하였다. 한편, 177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영조는 스스로 여러 권의 책을 친제()하기도 하였다. 악서()의 전범()인 『악학궤범』의 서문과 스스로를 되돌아 본 『어제자성편()』을 지었다. 그리고 1754년에는 무신들을 위해 『위장필람()』을 저술, 이를 무신들에게 인반()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어제경세문답()』·『어제경세편()』·『백행원()』·『어제소학지남()』·『팔순유곤록()』·『어제조손동보()』·『어제효제권유문()』 등이 있다.
이 당시 재야에서 실학()이 확대되면서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간행하도록 했는데,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간행되었다.
신경준()의 『도로고()』도 1770년에 편찬되었다. 영조는 친히 호학하였기 때문에 신학풍에 대한 이해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함에서 오는 심적 갈등이 심한데다가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와, 심지어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마침내는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신란까지 겪었다.
이런 환경 탓인지는 모르나 영조는 때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성격장애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자녀에 따라 극단적인 애증을 나타낸 것이 이를 말하며, 이것이 결국 사도세자의 울화병을 유발하고 부자간의 갈등을 초래했다고도 말해진다.
조정의 인사문제에서도 자신의 감정기복에 따라 사소한 실언을 문제삼았다. 심지어는 삼상()을 일시에 파직시켰다가 다음날 바로 복직시키는 경우가 흔하였고,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런 인간적 결점이 몇 가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역경을 딛고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탕평에 의한 정국안정을 바탕으로 치세의 시기부터 현저해지는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의 해소를 통해 민심을 추스르며,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영주()였다.
1776년 83세로 승하하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이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연잉군 시절.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빈청에 나가 회의할 것을 청했다.

이 자리에 김우항, 송상기, 최석항은 명령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 김창집•이건명이 조태채, 민진원, 이홍술, 이관명, 이만성 등과 더불어 청대하니, 임금이 시민당에서 인견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춘추가 한창 젊으신데도 아직껏 저사가 없으시니, 신은 부끄럽게도 대신으로 있으면서 주야로 걱정이 됩니다. 다만 사리와 체면을 생각하여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대신의 말이 지당하니 누가 감히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니, 조태채가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이미 나왔으니 오래 끌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이건명은 말하기를 “자성의 하교에 이르시기를, ‘국사가 걱정이 되어 억지로 미음을 든다.’ 하셨으니, 비록 상중이라도 종사를 위한 염려가 깊으신 것입니다. 이 일은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므로 신 등이 감히 깊은 밤중에 소대를 청한 것이니, 원컨대 전하의 생각을 더하시어 빨리 계획을 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차례로 간청하고 진정이 끝나자, 김창집 이건명·조태채가 다시 청하여 마지않았다. 조영복이 말하기를,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의 대계를 위한 것이니, 청컨대 속히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종사의 무강한 복입니다.” 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위로 자전을 모시고 계시니, 자전께 들어가 사뢰어 직접 허락하는 자필을 받은 연후에야 받들어 행하실 것이니, 저희들은 편전의 문 밖에 나가서 기다릴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새벽에 임금이 낙선당에서 만날 것을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벌써 자성께 여쭈셨습니까?” 하니, 임금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꼭 자전의 수서가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책상 위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수서는 여기 있다.” 하니, 김창집이 받아서 뜯었다.

피봉 안에는 종이 두 장이 들었는데, 한 장에는 ‘연잉군’이라는 세 글자가 써 있었고 한 장은 언문 교서였는데, 이르기를, “효종 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 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소?

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심이 옳을 것이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읽어 보고는 울었다. 이건명이 사관에게 언문 교서를 번역해서 승정원에 내리게 하고, 승지에게 전지를 쓰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조영복이 임금님 앞에서 전지를 썼는데, 전지에 이르기를, “연잉군을 저사로 삼는다.” 하였다.
이어 예조 당상관을 불러 거행할 것을 청하고, 여러 신하들은 물러갔다. 임금은 평소에 병이 많아 후사를 두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국세가 위태로웠다. 혈맥으로는 다만 주상과 아우 한 분이 있으니 천명과 인심의 스스로 귀착되는 바가 왕세자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이제 종사의 대계가 이미 정해졌으니 명명이 한 번 내려지자 온 나라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일 대신들은 조정에 모여 의논을 꺼내려 하지 않았고, 또 교외에 있는 동료 대신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다만 4, 5인의 조정에 있던 동료와 함께 깊은 밤중에 청대하여 이루어 졌다.
휘() 금(). 자 광숙(). 숙종이 양성()이라는 헌호()를 내렸다. 숙종의 2남으로 어머니는 화경숙빈() 최씨.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  )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04년(숙종 30) 10세 때 맞은 군수 서종제()의 딸이 첫 왕비 정성왕후()이고, 1757년(영조 33) 왕후의 승하로 1759년에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았다.
1721년 왕세제 책봉은 경종이 숙종을 이어 즉위한 그 해에 정언 이정소()가 왕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그를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먼저발의하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중추판사 조태채(), 중추부영사 이이명() 등 이른바 노론 4대신들이 인원왕후() 김대비(숙종의 계비)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소론측은 우의정 조태구()를 필두로 시기상조론을 펴 반대했으나 노론의 뜻대로 책봉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노론이 대리청정으로까지 몰아가자 소론이 역공의 명분을 얻어 이 일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보냈다(신축옥사).
이듬해 1722년에 소론은 기세를 모아 영수 김일경() 등이 남인 목호룡()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여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치죄하였다(임인옥사). 옥안()에는 왕세제도 혐의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여 왕세제가 김대비에게 사위()도 불사하겠다고 호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나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여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당습()의 폐해를 하교()하는 한편,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 과격파를 축출, 노론을 불러들이는 조치를 내렸다(을사처분). 그러나 노론 내 강경파인 준론자()들이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자 1727년에 이들을 축출하였다.
이 무렵 그는 붕당이 아니라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정국을 주도하여야 요 ·순의 시대처럼 탕탕평평의 치세가 실현될 수 있다는 왕정관을 명백히 표시하면서 이에 따르는 자들만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29년에는 노론 ·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 즉 완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기유처분). 이 때는 노론 ·소론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이른바 쌍거호대()의 인사정책을 폈으나 점차 유재시용(), 즉 능력 위주로 전환해 가면서 왕권을 지지하는 탕평세력을 구축해 갔다.
1728년에 소론 ·남인 등의 일부 과격한 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하는 반란(이인좌의 난)을 일으킨 것이 이러한 새로운 체제 확립의 결단을 더 앞당겨 주었으며 탕평정국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1741년에 이조전랑() 통청법()을 혁파하였다. 이조전랑이 삼사()의 언관들의 인사권을 장악한 제도는 언관들의 언론권을 대신들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시키면서 활성화하는 의도 아래 시작되어 붕당정치의 맥점을 이루던 것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자파 세력강화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어 붕당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혁파조치가 불가피하였다.
탕평론은 요 ·순 임금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 스스로 수기치인()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야 하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조는 학식있는 신하들과 강론하는 자리인 경연()을 재위 52년간 무려 3,458회를 열었다. 연평균 66회에 달하는 이 횟수는 조선일대에 최다 기록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특히 《소학()》과 《대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1758년에 성균관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학》에 〈어제서()〉를 붙였다. 1746년에 《자성편()》을 지은 것을 비롯해 《정훈()》(1749) 《대훈()》(1755) 《경세문답()》(1762) 《경세편()》(1764) 《표의록()》(1764) 《백행록()》(1765) 등 후세 왕들을 위해 왕자가 걸어야 할 길을 밝히는 저술들을 다수 남겼다.
영조는 스스로 검약 ·절제의 생활로 일관하는 한편, 재위중에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요 ·순의 치세를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탕평정치는 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여러 가지 폐단들을 고치는 개혁적 조치들을 많이 단행했다. 먼저 양반관리, 사족들이 백성들에 대해 사형()을 많이 행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형정을 쇄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다. 1725년에 압슬형(), 1732년에 낙형()을 각각 폐지하고, 1740년에는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금지하였다. 1743년에 《수교집록()》을 속편하고 이듬해에 이를 발전시켜 《속대전()》을 《속오례의()》와 함께 편찬한 것은 왕조의 법치체계 전반을 재정비하는 의미를 가졌다.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34년에 농정의 기본방향을 잡기 위해 세종조에 민을 이끌어 농사에 힘쓰게 한 성의를 관리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농가집성()》을 대량 인쇄하여 보급하고, 1748년에는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를 편찬하고, 1750년 7월에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양역 변통의 논의를 종결지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양역(군역)조의 납포량을 일률적으로 1필을 감하고 어염세 ·결전세() 등을 부과해 결손을 채우게 했다. 1774년에 노비 신공()을 전면 혁파한 것도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었다.
영조의 삼대 치적으로는 탕평 ·균역 외에 준천(), 즉 청계천()을 준설한 것이 꼽힌다.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을 오랫동안 준설하지 않아 홍수 때 범람이 잦아 1760년에 준천사()를 세우고, 수만금을 출연하여 인부를 사서 흙을 파내는 대역사를 진행시켰다. 1773년 6월에는 개천의 양변을 돌로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변란시 도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난하지 않고 도성민과 함께 지킨다는 전략을 새로 세워 1745년에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이 도성을 분담하여 보수 관리하게 하고 1751년 9월에 수성윤음()을 내려 도성의 5부 방민이 유사시 삼군문 지휘 아래 방어할 구역을 분담하여 실제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왕조 초기의 오위()제도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1742년에 《병장도설()》을 편찬한 이래, 5군영의 병권을 병조판서 아래로 귀일시켜 왕권을 뒷받침하도록 하는 체제를 꾀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 재위 25년째 이 후 50여 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1773년에는 경희궁 건명문()에 신문고를 달게 하였다. 같은 해 2월 세손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1740년에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운 것을 비롯해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크게 벌였으며 1771년 10월에는 왕조의 시조묘가 없는 사실을 깨닫고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를 건립하게 했다.
1770년 정월 편집청()을 설치하여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상위고() 편찬 단계에서(4월) 세종조의 측우기 만드는 법을 터득하여 호조에 명해 양궐 및 서운관에 만들어 설치하게 하는 한편, 양도() ·팔도에 분송하여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의 척촌()을 재서 보고하게 했다. 학교고()를 편찬하는 순서(6월)에서는 주() ·부() ·군() ·학에 6현()을 함께 배향하게 하고, 형고()를 만드는 순서에서는 포도청에서의 난장()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편찬사업의 목적이 정사의 개선에 있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탕평정책으로 붕당의 대립과 벌열의 발호를 크게 억제하였으나 꺼지지 않은 불씨들이 있었다. 1755년에 을사처분()으로 귀양간 윤지() 등이 나주 괘서사건을 일으켜 정국이 소용돌이쳤으며, 1762년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경종1년 8월 20일조(신축)>
1714년(숙종 40) 화원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 “ (초봉연잉군 고호양성헌)”이라 적혀 있어, 영조가 왕이 되기 이전에 제작된 연잉군 시절의 도사본()임을 알 수 있다. 1745년(영조 21)경희궁 태령전(殿)에 봉안되어 있다가 정조가 즉위한 후 이곳을 혼전(殿)으로 삼았기 때문에 1778년(정조 2년) 3월창덕궁 선원전(殿)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491호로 지정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면의 오른쪽 ⅓ 정도가 불에 타 그슬린 상태이지만 다행히 용안이 완전하고 원본이라는 점에서 귀중하다. 사모()에 녹포단령()을 착용하고 정장관복차림에 공수() 자세로 앉아 있는 좌안8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사모의 높이가 상당히 높고 양옆으로 각()이 길게 뻗힌 점, 녹포의 형태 또한 양 어깨 부분이 협소하고 긴 소매가 밑으로 늘어진 형태에서 숙종 말년 초상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의자에는 호피를 깔고 있고 족좌대에는 화문석이 깔려 있으며, 별도의 배경은 없다. 안색은 엷은 갈색인데, 윤곽선의 농담을 조절하여 자연스러움을 살렸으며, 돌출 부위와 그렇지 않은 부분은 선염의 농도를 조절하여 입체감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전체적으로 수법이 정교하게 조화되지 못하여 마치 소묘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18세기 초 정장 관복 형식의 초상화의 형식을 대표하는 기준작이 되며, 당대인들에게 가품()이라고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현재 전주경기전(殿)의 태조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철종어진과 익종어진 등 어진이 극소수만 남아 있는 실정을 감안하면 비록 연잉군 시절의 초상이라 할지라도 제작연대와 작자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어진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아울러 숙종 연간의 대표적인 어용화가였던 진재해의 작품 연구에 있어서도 기준작이 된다.

영조의 탕평책 - 싸우기만 하는 붕당 정치!
끼리끼리 모여서 하는 붕당 정치'
조선 후기에는 정치하는 사람들 간에 서로 무리를 지으며 편이 갈라지기 시작했어. 그런 정치 무리를 ‘붕당’이라고 해. 처음에는 붕당에 속한 사람들도 다른 편을 서로 인정해 주며 사이좋게 정치를 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상대 당에 대한 올바른 비판은 사라지고, 점차 모함3)이나 부정적인 비판으로 바뀌면서 붕당 간의 정치적 싸움이 치열해지기 시작했어.

영조의 강력한 탕평책
영조 임금은 신하들끼리 편을 갈라 자기들만의 이익을 좇는 상황이 왕권을 약하게 만들고 조선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붕당 간의 싸움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을 실시하기로 했지.
즉, 모든 당이 싸우지 않고 정치에 골고루 참여할 수 있도록 ‘탕평책’을 실시하기로 한 거야. 영조가 워낙 강하게 탕평책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각 붕당에 속한 신하들은 영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여러 당파 중 능력 있는 인물들이 골고루 뽑혀서 영조의 명령에 따라 여러 개혁 정치를 이루어 냈지.
영조가 탕평책에 관한 회의를 하는 도중 청포묵에 여러 가지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 나와서 이것을 탕평채라고 불렀대.
여러 당을 골고루 섞어 공평하게 정치를 하겠다는 영조의 생각과 의미가 통하는 음식이지.

젊은 학자를 모아서 새로운 개혁을 해 보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딛고 일어선 개혁 정치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영조의 대를 이을 사람으로 사도 세자의 아들이 정해지지. 그가 바로 정조 임금이야. 당파 싸움에 휘말린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지켜 본 정조는 임금이 되자마자 할아버지 영조의 정책이었던 탕평책을 더욱 열심히 실시했어.

정조는 왕권이 강해야 신하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펴게 돼. 세자 시절 자신을 미워하던 당에 의해 몇 차례 죽을 고비까지 넘긴 정조는 우선 왕의 직속 부대인 ‘장용영’이라는 군대를 만들었어.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이라는 정치 기구를 마련해 정조가 실행하고자 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세력을 키워나갔지.

이것을 바탕으로 나라 살림 또한 윤택하게 만들고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제 정책을 실시했어. 우선 농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애썼지. 또 광산도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 시기에는 조선의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됐어. 문화적으로도 신경을 많이 써서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규장전운》 등 수많은 책을 내기도 했어.
이와 같은 정조의 노력 덕에 정조가 통치하던 시대에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백성들의 살림도 전보다 많이 나아졌어. 또 문화도 크게 발달했지.

정조와 화성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를 늘 그리워했던 효자 정조는 사도 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그 지역 일대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했어.
그 뒷면에는 정조의 정치적인 의도도 깔려 있었어.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면 권력이 집중된 한양을 떠나 수도를 옮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거지. 또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정조의 정통성에 약점이 되었거든.
수원으로 묘를 옮긴 후 정조는 그곳에 계획 도시인 화성을 세우고 아버지 묘에 성묘를 하기 위해 거의 매년 수원에 행차를 했어. 이런 정조의 모습은 백성들에게도 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고 해. 지금도 그때 임금이 행차하던 모습과 절차를 그려 놓은 그림이 〈화성행차도〉로 남아 있어.

수원의 ‘지지대 고개’가 정조와 연관이?
지금의 수원에서 의왕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보면 ‘지지대 고개’라는 곳이 있어. 그런데 이 고개가 정조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니? 지지대 고개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에게 성묘하고 돌아가는 길목에 있어. 바로 이곳이 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이 보이는 마지막 고개였다고 해. 이 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아버지의 무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천천히 가라고 명령을 내렸대. 그래서 훗날 이곳을 더딜 지()자를 써서 ‘지지대 고개’라고 불렀어. 고개 이름에서도 정조의 애절한 효성을 느낄 수 있지?

정조대왕실록 / 탕탕평평실',
정조대왕실록 권36 16년 임자 11월조의 탕탕평평실 부분. 탕평책은 조선 후기 영정조대에 당쟁을 막기 위하여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려한 정책을 말한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당의통략(黨議通略)』
  • 『균역사실(均役事實)』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반원계보(磻源系譜)』
  • 『영조·장조 문집』(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18세기 노론과 일당전제의 성립과정: 신임사화와 천의소감의 논리를 중심으로」(이은순, 『역사학보』110, 1986)
  •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정만조, 『역사학보』111, 1986)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중록(閑中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사(大東史)』
  • 「탕평론과 정국의 변화」(박광용, 『한국사론』10, 1984)
  •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정만조, 『진단학보』56, 1983)
  • 「임란이후의 양역과 균역법의 성립」(차문섭, 『사학연구』10·11, 1961)
  • 영조 [英祖] (두산백과)
  • 영조 [英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연잉군 [延礽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탕평책 - 인재를 고루 뽑아 탕탕평평 (한국사 개념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