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첩" 진주대첩, 晉州大捷.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에 진주성에서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난 곳으로 그만큼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진주는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이었으며 고려시대부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부산포를 시작으로 도성 한양까지 큰 저항없이 진격했던 왜군들은 점차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조선 의병들의 반격활동으로 후방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조선 의병활동의 중심에 진주성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한양으로 후퇴한 왜군은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고 호남지역으로 진출하여 안정적인 후방의 보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주성을 차지해야만 했다. 바닷길을 통해 호남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가로막혀 있었다. 따라서 조선과 왜군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에서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을 벌이게 된다. 제1차의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왜군들이 대패하였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1차에 비해 5배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왜군에게 진주성은 함락되고 만다. 당시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싸움이다.
진주성 싸움
1592년(선조 25) 9월 김해에서 출발한 왜군은 창원을 거쳐 10월 5일 진주성 외곽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남강과 주변의 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진주성은 천혜의 요새로 공략하기 쉬운 성채가 아니었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병들과 함부로 응대하지 않고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의 동생(長岡玄蕃之允)이 이광학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했다. 하지만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준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마에 총상을 입었으며 그해 11월 22일에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정유경, 김준민 등 군소 의병군들이 외곽에서 지원한 것이 아군에게 협공작전으로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의 동생(長岡玄蕃之允)이 이광학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했다. 하지만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준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마에 총상을 입었으며 그해 11월 22일에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정유경, 김준민 등 군소 의병군들이 외곽에서 지원한 것이 아군에게 협공작전으로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왜군은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위신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또한 북쪽으로 진군했던 왜군은 명나라가 개입하여 평양성에서 패배하자 일단 남쪽으로 후퇴하여 경상도와 호남지역을 장악하여 후방의 안정적인 보급과 확실한 교두보로 만든 다음 다시 북상하여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때문에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손에 넣는 것은 전략적인 중요성이 증대되어 반드시 진주성을 공략해야만 했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 9만 3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 휘하의 2400명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과 이계련(李繼璉), 태인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순천 의병장 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포진하였다. 진주성에 집결하여 수성을 맡은 병사는 약 6000~7000명의 병력과 약 6만 명의 일반민들이 있었다. 조선군의 전투력은 왜군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열세였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산발적으로 공격하던 왜군은 번번히 패퇴하였다. 성밖에 높은 토대를 쌓아 높은 곳에서 조총을 쏘면서 공격해오자 조선군의 사상자가 늘어났다. 황진과 이종인, 김천일, 김준민, 장윤 등이 분전하여 왜군의 파상공격을 거듭하여 막아내었지만,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고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어 호남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 휘하의 2400명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과 이계련(李繼璉), 태인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순천 의병장 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포진하였다. 진주성에 집결하여 수성을 맡은 병사는 약 6000~7000명의 병력과 약 6만 명의 일반민들이 있었다. 조선군의 전투력은 왜군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열세였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산발적으로 공격하던 왜군은 번번히 패퇴하였다. 성밖에 높은 토대를 쌓아 높은 곳에서 조총을 쏘면서 공격해오자 조선군의 사상자가 늘어났다. 황진과 이종인, 김천일, 김준민, 장윤 등이 분전하여 왜군의 파상공격을 거듭하여 막아내었지만,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고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어 호남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진주성은
유형 | 사건 |
---|---|
시대 | 조선 |
성격 | 전투 |
발생·시작 일시 | 1592년 10월 5일(1차), 1593년 6월 20일(2차) |
종결 일시 | 1592년 10월 11일(1차), 1593년 6월 29일(2차) |
관련장소 | 경상남도 진주 |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의 지리적인 중요성을 알고 쳐들어왔다. 하지만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은 이들을 물리쳐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사적 제118호. 둘레 약 4, 000m. 1592∼3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이 성을 포위하여 공격을 계속하였고, 김시민 김천일 등을 비롯한 진주성의 군관민들은 장렬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병사들은 포를 쏘거나 불화살을 날렸고, 백성들은 기어오르는 일본군에게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기름을 쏟아 부었다. 진주 대첩의 승리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이룬 것이었다.
전투를 지휘한 김시민.
임진왜란 초기 일본은 승승장구하면서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가 평양성까지 점령했지만, 이순신의 수군에 패해 바닷길을 통한 병력 수송과 물자 보급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육지를 통해 전라도를 장악할 목적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진주성의 조선군은 성벽을 수리하고 해자를 깊이 파는 등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고, 성 밖에서는 의병 부대가 지원했다.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병사들은 포를 쏘거나 불화살을 날렸고, 백성들은 기어오르는 일본군에게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기름을 쏟아 부었다. 진주 대첩의 승리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이룬 것이었다.
전투를 지휘한 김시민.
임진왜란 초기 일본은 승승장구하면서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가 평양성까지 점령했지만, 이순신의 수군에 패해 바닷길을 통한 병력 수송과 물자 보급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육지를 통해 전라도를 장악할 목적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진주성의 조선군은 성벽을 수리하고 해자를 깊이 파는 등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고, 성 밖에서는 의병 부대가 지원했다.
1592년 10월 초, 하세가와와 나가오카 등이 이끄는 3만여 명의 일본군은 진주성을 총공격했다. 이들은 조총을 쏘면서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등 맹렬히 공격해 왔다. 진주 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수천 명의 조선군은 백성들과 힘을 합쳐 성을 방어했다. 이들은 활과 총통뿐 아니라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이용해 결사적으로 맞섰다. “성안에 기와와 돌, 초가지붕, 나무 등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김시민(金時敏)·김명원(金命元) 등이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두 차례의 큰 전투.
전투가 마무리될 즈음 김시민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죽었지만, 곤양 군수 이광악이 그를 대신해 전투를 지휘하여 혼란을 막았다. 결국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했고, 전라도는 일본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주성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창원·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러한 적군의 동태를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 명밖에 없었다.
10월 5일 적의 선봉 1,000여 기(騎)가 진주 동쪽 마현의 북봉에 출현하자, 김성일은 남녀노소까지 동원해 무장시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6일 적군은 3개 부대로 나누어 1대는 동문 밖 순천당(順天堂) 산 위에 진을 치고 성을 내려다보며, 1대는 개경원(開慶院)에서 동문을 지나 봉명루(鳳鳴樓) 앞에 진을 치고, 또 1대는 향교 뒷산에서 똑바로 순천당을 지나서 봉명루 앞에 있는 적군과 합세하였다. 왜군의 조총수들은 성 안으로 총포를 난사하였다. 그리고 초막을 짓고 밤에는 불을 피워 기세를 올렸다.
그날 밤 곽재우(郭再祐)는 심대승(沈大升)을 보내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향교 뒷산에 올라갔다. 그 곳에서 횃불을 들고 뿔피리를 불면서 적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7일 적은 하루 종일 총탄과 화살을 발사하였다. 8일에는 공격용 죽제(竹梯)와 3층이나 되는 누대(飛樓)를 만들어 침공해 왔다.
이에 김시민은 현자포(玄字砲)를 발사하고, 적이 성의 못[城濠]을 메우려고 모아 놓은 솔가지와 죽제를, 짚으로 묶은 화약에 불을 붙여 던져 불살랐다. 또 이동하는 적의 누대를 자루가 긴 도끼와 낫으로 부수면서 적을 무찔렀다.
고성의 임시현령 조응도(趙凝道)와 진주의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은 밤을 틈타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진현(晉峴)고개 위에 올라가 적을 위협하였다. 9일에는 성 밖에 머물러 있던 합천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과 정기룡(鄭起龍)·조경형(曺慶亨)이 왜군과 대결하였다.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임계영(任啓英)도 구원병 2,000여 명을 이끌고 와서 적을 견제하였다.
10일 사경(四更) 초에 적군은 2대로 나누어 1대는 북문 밖으로 쳐들어오고 1대는 동문을 공격해 왔다. 이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르면서, 그 뒤에 기병 1,000여 명이 조총을 난사하며 돌진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은 동문 옹성(甕城)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죽을 힘을 다해 활·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졌다. 끓는 물을 붓거나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과 목사의 군관 이눌(李訥)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3대첩(三大捷)의 하나로 큰 전과를 올린 싸움이다.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 간 계속되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화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경상남도 일대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한 것을 설욕하고, 강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다시 진주를 공격하였다. 이 때 명나라는 회담을 이유로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전라순찰사 권율(權慄) 등이 조정의 명으로 의령에 도착했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였다. 그러나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발분해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갔다.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먼저 와 있었고, 이어 의병장 강희열(姜希悅)이 도착하였다. 이 때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고, 성 안의 주민은 6만∼7만 명으로 적의 대군과 싸우기에는 전투력이 크게 부족하였다.
게다가 목사 서예원(徐禮元)은 명장접대차사원(明將接待差使員)으로 오랫동안 상주에 있다가 진주로 급히 돌아와 미처 조처를 취할 여유가 없었다. 김천일이 지휘를 담당하니 주객 간에 어색한 점이 많았다.
적은 6월 21일 진주성을 포위하고, 22일부터 본격적인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성 안에서는 부대를 편성해 구역을 나누어 성을 지켰다. 황진·이종인·장윤 등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응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25일 적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높은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 성을 내려다보면서 탄환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성 안에서도 주민들이 협조해 높은 언덕을 마주 만들어 거기서 현자포를 쏘아 적굴(敵窟)을 격파하면서 항전하였다.
26일 적은 나무궤짝에 생피(生皮)를 둘러 이것으로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자성(子城)을 헐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 위에서는 큰 돌을 굴리고 화살을 내리퍼부었다. 27일 적은 다시 철갑을 두른 채 쇠몽둥이로 성을 헐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종인이 뛰어난 완력으로 연달아 적 5명을 죽이니 적은 잠시 물러갔다.
적은 성의 밑뿌리를 파서 성을 무너뜨릴 심산이었고, 성 안에서는 이를 막는 데 사력을 다하였다. 적의 시체가 성 밖에 삼대[麻]처럼 깔려 있었지만, 적은 단념하지 않았다. 28일 큰비가 내려 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황진은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장수들은 동분서주하며 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29일 적은 소가죽을 여러 장 덮은 구갑차(龜甲車)를 앞세워 동문 성벽 밑에 접근하고 무너진 성벽으로 난입하였다. 이종인은 군사들과 함께 활을 버리고 창과 칼로써 처참한 백병전을 벌였다. 김천일·고종후·최경회 등은 촉석루(矗石樓)에서 북향재배한 뒤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이종인·김준민·이잠(李潛) 등은 성 안에 있는 남녀들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시가전[巷戰]을 폈으나 역부족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종인은 죽을 때 양쪽 겨드랑이에 적을 1명씩 끼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사하였다.
의비 논개(論介)가 촉석루에서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적은 비록 진주성을 함락시켰으나 그로 인한 손실도 막대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일본군은 1593년 6월 다시 7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했다(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부산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김천일 등이 이끄는 수천 명의 조선군은 이때에도 백성들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9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 끝에 진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군 병사와 지휘관들도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한반도 동남부의 거점으로 돌아갔다.
1592. 임진 왜란 때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2차례의 큰 전투. 1592년 3만 명의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해 오자, 진주 목사 김시민은 끝까지 성루에 올라 많은 적을 사살하고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후퇴하던 왜군이 설욕하기 위해 다시 진격해 오자, 관군과 의병은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충청도 목천현 백전동(栢田洞)[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잣밭] 출신으로, 25세 되던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다. 훈련원에 부임한 후 무기가 녹슬고 군인들의 기강이 해이하여 유사시에 제대로 쓸 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훈련원의 행정실무를 지위하는 판관이 되었을 때 병조 판서에게 두 번이나 이에 대해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과감하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훈련원에서 물러나 고향인 잣밭으로 내려와 생활하던 중 1583년(선조 16)에 니탕개(尼蕩介)의 난이 발발하였다. 니탕개는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女眞人)으로 변방 6진에 출입하면서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후대를 받아온 인물이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우참찬 겸 황해도 도순찰사였던 정언신(鄭彦信)을 진압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정언신은 이순신·신립·이억기·김시민·원균 등 당시 쟁쟁한 무관들을 막하 장수로 거느리고 출정하여 적군을 두만강 너머까지 추격하여 근거지를 소탕하는 등 반란을 진압하였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김시민은 다시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종5품직 군기시 판관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전해인 1591년에는 진주 판관으로 부임하여 진주 목사를 보좌해 행정 실무를 담당하면서 군정 등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시 활약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신병을 핑계 삼아 지리산으로 피신했던 목사 이경(李璥)이 사망하자 김시민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의해 진주 목사를 대행하게 되었다. 이후 진주성을 지키며 매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김시민의 공이 인정되어 정식 진주 목사로 승진하였다. 1592년 9월에는 진해의 왜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아 몽진 중인 선조에게 압송한 전과로 비변사의 장계에 의하여 통정대부가 되었다. 10월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오자 3,800여 명의 관민(官民)을 이끌고 적장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이끄는 3만의 군대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의병장 곽재우·최경회 등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며 승리를 도왔다.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막아낸 후 성안을 순회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적군이 쏜 탄환을 왼쪽 이마에 맞았고, 며칠 뒤인 10월 18일에 사망하였다. 전사하기 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忠愍祠)에 김시민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6월 25일에 김시민을 선무공신 2등과 상락군에 봉하였으며, 10월 29일에는 영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관작과 품계를 2등급 올려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도록 하였고, 반당 6명·노비 9명·구사 4명·전지 80결·은자 7냥·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1709년(숙종 35) 6월 16일에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고 영의정에 추증하는 한편, 1711년(숙종 37)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4일에는 박문수 어사의 진언에 따라 동래 부사 송상헌의 사당에서 김시민을 우선 함께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김시민의 추모 행사는 과거 진주·천안·괴산 등지에서 행해졌으나, 1868년(고종 5) 9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각지의 사당이 훼철된 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 후 부분적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생지인 천안에는 과거 김시민을 비롯하여 아버지 김충갑, 숙부 김제갑(金悌甲) 등을 함께 모셨던 충열사(忠烈祠)가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 추모 사당 및 생가 복원이 되지 않아 김시민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다만 2000년 7월 19일에 설립된 민간단체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 사업회’가 매년 김시민의 출생일인 양력 9월 23일에 탄신 기념 행사를 개최하는 등 추모 행사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경삼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가 있다.
1709년(숙종 35) 6월 16일에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고 영의정에 추증하는 한편, 1711년(숙종 37)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4일에는 박문수 어사의 진언에 따라 동래 부사 송상헌의 사당에서 김시민을 우선 함께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김시민의 추모 행사는 과거 진주·천안·괴산 등지에서 행해졌으나, 1868년(고종 5) 9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각지의 사당이 훼철된 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 후 부분적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생지인 천안에는 과거 김시민을 비롯하여 아버지 김충갑, 숙부 김제갑(金悌甲) 등을 함께 모셨던 충열사(忠烈祠)가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 추모 사당 및 생가 복원이 되지 않아 김시민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다만 2000년 7월 19일에 설립된 민간단체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 사업회’가 매년 김시민의 출생일인 양력 9월 23일에 탄신 기념 행사를 개최하는 등 추모 행사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경삼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가 있다.
조선 중기의 무장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해, 1591년(선조 24년)에는 진주 통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을 맞아 진주를 방어했다(진주 대첩). 그의 지휘로 조선은 3천여 명의 병력으로 3만의 왜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김시민은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끝내 순국했다.
1554년(명종 9)년 충청도 목천현(木川, 現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지평(持平)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무관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이다. 어려서부터 무사적 기질이 강하였고 활도 잘 쏘았다.
무과급제
무과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절 가족의 반대에도 25세 때(1578)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判官)을 제수받았다. 1583년 여진 출신 니탕개(尼湯介)가 두만강을 넘어 쳐들어 오자 황해도 순찰사 정언신의 지휘하에서 신립, 이순신 등과 함께 공을 세웠고,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재임하다 병기 및 군사훈련에 관하여 토론하다 건의사항이 채택되지 않자 병조판서와 갈등을 빚고 사직하였다. 그 후 다시 훈련원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복관되었다. 당파와 이해관계를 갖지 않아 정치적으로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진주성 수성
1591년(선조 24) 진주통판(晋州通判)으로 천거되었고 진주성을 지켰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1592) 방비태세를 갖추도록 조치했고 5월 진주목사 이경(李璥)이 달아나자 임시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6~7월에는 사천, 고성, 진해에 주둔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 공로로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다(8월). 9월에는 적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10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를 제수받았다. 10월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그는 3,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가 이끄는 2만의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 전쟁 중에 염초(焰硝) 및 총통(銃筒) 등을 제조하여 활용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최경회 등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도움을 받아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장군이 진주성 안에서의 전체적인 지위를 이끌었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맞아 적의 세력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성 내부를 순찰하던 중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을 이마에 맞아 부상을 당해 치료를 하였으나,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1592).
영의정에 추증
그가 사망하기 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망한 다음이었다. 1604년(선조 37) 선무(宣武)공신 2등에 올랐고(1604), 1709(숙종 35)에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 추봉되고 영의정이 추증(追贈)되었다. 진주성(晋州城)에 사당을 짓고 창열사(彰烈祠)의 사액을 내려(1607, 선조 40) 김시민을 중심으로 전몰자 제신을 배향(配享)토록 하였다.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려졌다(1711). 최근에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그의 선무공신첩을 국민의 성의를 모아 다시 사서 국내로 들여와 보관하고 있다.
김시민 교서
김시민을 선무공신으로 임명하고 진주성 방어의 찬양과, 자손에게 벼슬을 내리고 죄를 지어도 사면해준다는 등의 내용이 쓰여져 있다. 이순신, 권 율, 원 균 등 18명의 선무공신 명단과 함께 끝 부분에는 국새인 시명지보가 찍혀 있다.
괴산 충민사(忠愍祠)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에 있는 김시민과 김제갑을 제향한 사당.
괴산 충민사(忠愍祠)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전투(晋州戰鬪)에서 순절한 진주목사(晋州牧使)충무공 김시민(金時敏, 1554~1592)과 그의 종숙(從叔)으로서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순절한 충숙공 김제갑(金悌甲, 1525~1592)을 모신 사당이다. 1976년 12월 21일에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김시민은 본래 1652년(효종 3)에 진주 충민사(忠愍祠)가 건립되면서 제향되었고 1667년(현종 8)에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경에 훼철되었다. 그 뒤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되었는데 1976년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다. 1978년 정화사업 때 그의 묘소를 충청북도 중원군 살미면 무릉리에서 손자 대부터 거주한 현재의 괴산읍 능촌리로 이장하면서 묘소 아래에 새로이 충민사를 짓고 단독으로 제향하였다.
김시민은 본관이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고,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 병마절도사(嶺南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다. 그 후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었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제갑은 본관이 안동,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이다.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부인 이씨도 순절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역에는 외삼문으로 효충문(效忠門)이 있고, 안으로 들어서서 왼편에 현대에 건립한 신도비 2기가 있는데 왼쪽은 제액(題額)이 ‘김충무공 신도비명(金忠武公神道碑銘)’으로 김시민의 것이다. 1974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권용직(權容稷)이 지었고, 글씨는 김사달(金思達)이 썼다. 오른쪽은 제액이 ‘의재김선생신도비(毅齋金先生神道碑)’로 김제갑의 것이다. 1976년에 건립되었는데 권용직이 지었고, 12대손 김상형(金相馨)이 글씨를 썼다. 오른편에는 ‘김시민장군 유적정화기념비(金時敏將軍遺蹟淨化紀念碑)’가 있어 현대의 묘역 정비 내력을 이해할 수 있다. 이어 내삼문인 선무문(宣武門)이 있고 그 안에 사당인 충민사가 있다. 이는 정면 3칸과 옆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그 뒤편에 묘소가 있다. 묘역 전체의 오른쪽에는 구사당도 함께 있다.
창렬사
경남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지 안에 있는 사당으로, 김시민,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임진왜란 때 진주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순절한 39명의 신위가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전공을 새긴 석비. 성균관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의 전공을 새긴 석비.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는 임진왜란 때에 김시민의 전공을 새긴 석비로, 진주 전성각적비(晉州全城却敵碑)라고도 부른다. 1972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다. 1591년(선조 24)에 진주판관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을 대신하여 목사직을 역임하였다.
김시민[1554~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년(광해군 11)에 진주 지역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세워졌다.
유래
성여신의 문집인 『부사집(浮査集)』에는 ‘진주목사김공전성각적비명(晋州牧使金公全城却敵碑銘)’으로 되어 있어서 ‘진주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불린다.
김시민장군 전공비
경남 진주시 본성동. 경남유형문화재 제1호. 임진왜란 때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진주성 내에 있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석비의 형태로 받침대 위에 비신을 세웠다. 전체 높이는 277㎝, 너비는 99㎝이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故牧使金侯時敏全城却敵碑銘(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명)”이며, 성균관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嗚呼 急病攘夷 忠所激也 死守不去 義所決也 出奇却敵 勇所奮也 能是三者 而轟轟烈烈 至今耀人耳目者 故牧使金侯是也…(오호 급병양이 충소격야 사수불거 의소결야 출기각적 용소분야 능시삼자 이첩첩렬렬 지금휘인이목자 고목사김후시야: 아! 위급한 병중에서도 오랑캐를 물리치신 것은 충성심이 솟구쳤던 때문이요, 죽음으로써 지키며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의로움에 의해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드날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능히 하시니 소리 드높고 성대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귀와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이는 돌아가신 목사 김후이시다.)”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진주성 내에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비의 뒤편에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
1592년 10월 진주성 1차전투에서 진주판관 성수경(成守慶),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함창현감 강덕룡(姜德龍), 의령의병장 곽재우(郭再祐), 거창의병장 김면(金沔), 합천의병장 정인홍(鄭仁弘) 등 경상우도 관군과 의병을 연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비는 현재 진주성 내의 충민사(忠愍祠) 경내에 팔작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 안에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진주 주민의 열망에 따라 1619년(광해군 11) 세운 것이다. 성균관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1천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10만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으로 2만명의 적을 격퇴하였다고 하였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량 1기. 높이 277㎝, 너비 99㎝이다. 진주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 3대대첩의 하나인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 김시민(金時敏)의 전공을 기록하기 위하여 1619년(조선 광해군 11) 7월에 세운 비이다.
문화재 안내"
이 비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것이다.
비문에는 1천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 장군은 적은 군사로서,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함으로써 왜병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 11년(1619)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1천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 장군은 적은 군사로서,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함으로써 왜병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 11년(1619)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당시 김시민은 진주목사로서 판관(判官) 성수경(成守慶),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000명도 되지 않은 병력으로 10만 군대를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적은 군사를 이끌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死守)함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여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 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석비의 형태로 현재 진주성 내에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참고문헌
- 『학봉집(鶴峯集)』
- 『난중잡록』
- 『용사일기(龍蛇日記)』
- 『부사집(浮査集)』
- 『진주금석문총람』(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 『진주의 문화유산』(진주문화원, 1998)
- 『조야첨재(朝野僉載)』
- 『선조중흥지(宣祖中興誌)』
-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은봉야사별록(隱峯野史別錄)』
- 『징비록』
-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 『모리수원기(毛利秀元記)』
- 『흑전장정기(黑田長政記)』
- 『괴산군지』(괴산군지편찬위원회, 2013)
- 『인물지』(충청북도, 1987)
- 『문화재지』(충청북도, 1982)
- [괴산군청(goesan.go.kr)
- 진주전투 [晉州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주 대첩 - 임진왜란 때 진주성의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물리친 싸움
- 진주 대첩 (Basic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 과학상식, 2007. 2. 20.)
- 김시민 [金時敏]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6. 11. 15.)
- 김시민 [金時敏] (두산백과)
- 김시민 [金時 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괴산충민사 [槐山忠愍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