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2일 금요일

다음: Daum)

다음: Daum)

대한민국의 포털 사이트이다. "한메일"(현재의 다음 메일)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웹 메일 서비스를 열었으며, 이 밖에도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다음 카페’, 뉴스 서비스 ‘다음 뉴스’ 등을 서비스하고 있다. 운영 업체는 본래 다음커뮤니케이션이었으나 2015년 합병한 뒤로 카카오에서 운영을 하고 있다.
다음의 인기는 제공하는 서비스의 범위뿐만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한국 최초의 웹 포털이기도합니다. 그것의 인기는 그 때 대중적인 전자 우편 서비스, daum.net 또는 hanmail.net 와 합병 할 때 시작되었다 합병 후, Daum은 포럼 서비스 Daum Cafe를 시작 하여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었습니다. 카페 와 인터넷 카페 (서양식 사용에서 언급 된 것과는 다른) 라는 용어 는 현재 한국어로 "인터넷 포럼"의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다음 은 자회사 '다음 다이렉트 자동차 보험 (Daum Direct Auto Insurance)'을 시작으로 온라인 직접 자동차 보험 을 시작했으며, 2008 년부터는 ERGO 보험 그룹 과 파트너 관계를 맺었습니다 .
다음은 2004 년 8 월 2 일에 라이코스 (Lycos) 를 9540 만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하고 10 월 6 일에 거래를 마감했습니다. 모바일, 소셜 네트워크 및 위치 기반 서비스에 초점을 맞춘 기업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다음은 8 월 2010 년 $ (36) 만 달러 Ybrant 디지털 , 인터넷 마케팅 에 본사를 둔이 회사 하이 데 라 바드, 인도 . 
2006 년, 그들은 시작 블로그 서비스 티스토리 '갈가리 찢어지다 및 회사'와 블로깅 플랫폼 개발 회사와 2007 년 7 월을, 다음은 서비스를 관리하기위한 모든 권한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또한 프리웨어 미디어 플레이어 인 PotPlayer를 개발하고 배포합니다 다음 커뮤니케이션은 프리웨어 미디어 플레이어 (Daum tvPot) 외에도 클라우드 서비스 (다음 클라우드), 다음 사전 (모바일 기기 적용), 다음 코믹스,지도 서비스 (다음 맵)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2009 년 3 월 현재 약 874 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일 방문면에서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웹 포털 서비스 제공 업체입니다. 

다음은 2014 년에 카카오와 합병하여 다음 카카오를 창립했습니다 . 

1995년 2월 : 박건희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공동 설립
1997년 5월 : 대한민국 최초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메일 오픈 (현재의 다음메일)
1999년 7월 : 포털 사이트 'Daum' 으로 재단장
1999년 11월 11일 : 코스닥 등록
2000년 1월 : 다음 검색 서비스 오픈
2000년 7월 : 다음 금융플라자 오픈
2001년 9월 : 다음세대재단 설립 주진수사진파일 메일
2002년 1월 : 미디어2.0 인수
2003년 1월 : 미디어다음 오픈
2004년 3월 : 제주도 이전 협약식 체결
2004년 7월 : 일본 / 미국 라이코스 인수
2004년 12월 : 인터넷전화업체 스카이프와 전략적 제휴
2005년 3월 : CJ인터넷과 검색, 게임 전략적 제휴
2006년 4월 : 석종훈 다음미디어 부문 대표, 각자 대표이사 선임
2007년 1월 : 다음 tv팟 오픈
2007년 5월 : 검색엔진 자체 개발
2007년 7월 : 티스토리 지분 100% 확보
2008년 11월 : 다음체 개발, 최초 무료 배포
2009년 1월 : 지도 서비스 스카이뷰, 로드뷰 정식 오픈
2009년 3월 : 최세훈 대표이사 취임
2009년 4월 : 모바일 다음 오픈
2009년 11월 : 슬로건을 "우리들의 UCC 세상, Daum" 에서 "생활이 바뀐다! Life On Daum" 으로 변경
2010년 6월 : 모바일 메신저 마이피플 런칭
2010년 8월 : 와이브랜트에 라이코스 매각
2010년 9월 : 인터넷 업계 최초 ‘지속가능성보고서’ 발간
2010년 12월 : 모바일 광고 플랫폼 Ad@m 출시
2011년 3월 : 온라인 손해보험사 에르고다음다이렉트의 보유지분 전량 124억원 처분
2011년 4월 : 사회공헌 통합사이트 희망해 오픈
2011년 7월 : 실내 로드뷰 서비스 스토어뷰 론칭
2011년 12월 : ㈜온네트 경영권 인수
2012년 4월 : 제주도 사옥 스페이스닷원(Space.1) 완공 및 본사 이전 완료
2012년 4월 : DaumTV+ 오픈
2012년 9월 : 2012대한민국지속가능성지수(KSI) 포털 부문 1위 선정
2012년 10월 : 제주 본사 건물 2012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
2012년 12월 : SK컴즈와 검색광고 제휴
2013년 3월 19일 : 다음 메일 앱 출시
2013년 5월 : 슬로건을 "생활이 바뀐다! Life On Daum" 에서 "Daum - 모으다 잇다 흔들다" 로 변경
2013년 6월 : 6년 연속 기업지배구조 최우수기업 선정
2013년 8월 : 모바일 전용 콘텐츠 스토리볼 출시
2013년 9월 11일 : 쏠메일·쏠캘린더 앱 출시
2013년 9월 : 스마트폰 런처 개발사 버즈피아 인수
2013년 11월 : 다음 지도 대통령 표창 수상
2014년 5월 : 카카오 - 다음커뮤니케이션 합병 발표
2015년 5월 19일 : 키즈짱 서비스 종료
2015년 9월 : 다음카카오 - 회사 명칭 카카오로 변경
2015년 10월 : 카카오 스페이스닷투, 한국건축가협회상 수상
2015년 11월 : 카카오뱅크, 인터넷 은행사업 예비인가 획득, 카카오 파머 출시 및'카카오택시 블랙' 출시
2015년 12월 : 카카오 택시 누적호출 5천만건 돌파

세무조사 논란

다음카카오는 2008년 5월, 2014년 5월, 2015년 6월 세무조사를 받았다. 2008의 광우병 촛불집회당시, 2014년의 세월호 참사 직후, 2015년의 메르스 사태 발생한 직후 진행된 특별세무조사라 정치적인 의도가 포함된 세무조사라는 논란이 있었다.
다음카카오는 정부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는 시기 마다 특별 세무조사를 받아 정부가 '포털 길들이기' 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 다음 메일(이전 이름: 한메일넷) : 1997년 5월 한국 최초로 선보인 무료 웹메일 서비스. 3,800만여 명의 회원들이 가입되어 있다.
  • 다음 마이피플 : 서비스 중단
  • 다음 마이 스티커 : 서비스 중단
  • 다음 클라우드 : 서비스 중단
  • 다음 주소록 : 다른 사람의 주소를 관리 할 수 있는 주소록 서비스
  • 다음 캘린더 : 서비스 중단
  • 쏠메일 : 안드로이드 OS에서 사용 가능한 다계정 메일 애플리케이션
  • 쏠캘린더 : 안드로이드 OS에서 사용 가능한 캘린더 애플리케이션. 구글 캘린더나 기본 캘린더 등과 자동으로 연동된다.

  • 다음 카페 : 1999년에 개시한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이다. 카페 개설 수 1625만 개, 가입자 수 3천 4백만, 게시글 54억 개를 기록 중이다. 정치사상종교취미 등이 같은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는 서비스이다.
  • 다음 블로그 : 다음에서 직접 개설할 수 있는 서비스형 블로그. (티스토리는 별도 서비스)
  • 티스토리 : 태터 앤 컴퍼니와 합작하여 만들어진 태터툴즈 기반의 블로그 서비스. 태터 엔 컴퍼니가 구글코리아에 인수되면서 현재는 다음 커뮤니케이션이 지분 100%를 소유한다.
  • 쏠그룹 : 2014년 출시한 모바일 앱. 지인기반 모임을 만드는 SNS서비스다.



  • 다음 검색 : 다음 검색은 카페, 뉴스, 동영상 검색을 중심으로 한국의 검색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며, 2003년 3월 구글(웹 문서 검색)과 제휴를 체결하여 기능을 강화하였다. (2009년 5월에 구글 웹 문서 제휴계약 종료됨, 이후 자체 웹 검색 결과 노출함)
  • 다음 팁 : 질문의 의도에 가장 잘 맞는 답변을 채택하는 문답형 지식 서비스.
  • 다음 검색쇼 : 다음에서 새롭게 선보인 사용자 참여형 맞춤식 검색 서비스 "@+검색어"를 등록하여 검색결과 최상단에 원하는 문구 등을 나타낼 수 있다.
  • 다음 검색트렌드 : 인기 검색어의 순위를 주제별, 시기별, 성별, 세대별로 알아볼 수 있는 부가 검색 서비스이다.
  • 다음 디렉토리검색 : 서비스 중단
  • 다음 애드클릭스 : 검색어 기반의 사용자 설치형 온라인 광고 서비스로 구글의 애드센스와 유사하다. 현재는 블로그만을 대상으로 한다.
  • 다음 툴바 : 안랩의 백신인 V3 Lite와 결합되어 검색어 서제스트, 사전, 스크랩, 검색창 등의 다음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 도구 모음을 이용하면 검색통계가 디렉터리 검색, 검색 트렌드 등에 반영된다. 하지만 지금은 서비스가 종료된 상황이다.


  • 다음 뉴스
  • 다음 아고라 : 다음 아고라는 다음의 서비스 중 하나로 누리꾼들의 자발적인 토론의 장이 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회의 장소였던 아고라에서 유래되었다. 정치경제,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토론들이 오가고 있다.
  • 다음 view : 메타블로그와 유사한 형태의 블로그 뉴스 서비스로 블로그 뉴스에서 개편되었다. 타 메타블로그 서비스가 RSS를 기반으로 모든 블로그 포스트를 자동 수집하는 것과 달리 다음 view는 트랙백으로 선별적인 포스트를 송고 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14년에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 다음 tv팟 : 2006년 10월 런칭. UCC, 오디션, 노하우권투경기 등의 다양한 주제의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 다음 영화 : 영화 정보, 박스오피스, 영화 예매, 영화 이벤트 등을 제공.
  • 다음 뮤직 : 서비스 중단
  • 다음 만화속세상 : 단행본, 웹진 연재작품들을 유/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 다음 책 : 책정보검색, 가격비교 등이 가능하다.
  • 다음 스토리볼 : 모바일 컨텐츠로 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다음 지도 : 전국을 50cm급 고해상도 항공 사진으로 보여주는 ‘스카이뷰’ 및 실제 거리 모습을 파노라마 사진으로 촬영한 ‘로드뷰’ 서비스로 구성, 현재 '카카오 맵'으로 명칭 변경
    • 다음 쇼핑하우 : 서비스 중단
    • 다음 금융 : 증권, 재테크, 펀드, 보험, 대출, 카드 별로 정보를 제공
    • 다음 미즈넷 : 여성 커뮤니티 서비스, 육아, 요리, 패션뷰티 등의 정보를 제공
    • 다음 사전 : 백과사전(브리태니커,위키백과,문화원형), 영어사전(영영사전 포함), 한자, 중국어, 일어 사전을 제공한다. 2014년 기준으로 총 25종의 다국어 사전을 제공한다.
    • 다음 꿈나무 : 어린이를 위한 학습이나 게임 등을 제공한다.(삭제)
    • 다음 키즈짱 : 서비스 중단


    다음은 2004년 3월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시제주대학교와 본사 이전 실험에 대한 협약을 체결하고 이를 '즐거운 실험'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첫 이전 사업으로 같은 해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위치한 펜션을 개조해 인터넷지능화연구소(Net Intelligence Lab)로 사용하였다.[2] 그리고 2004년 6월 제주시 노형동 현대해상 사옥에 추가로 미디어다음을 운영하는 미디어본부가 이전하여 1차 이전을 완료하였다. 이후 제주시 오등동에 독자 사옥을 착공, 2006년 2월에 다음글로벌미디어센터(GMC)을 완공해 입주했다.
    2009년 12월 제주도에 조성중인 첨단과학단지 중 약 3만평을 구입하여 본사가 들어설 건물인 스페이스닷원(Space.1)을 착공하여 2012년4월에 완공, 본사 최종 이전을 완료하였다.
    2014년 4월에는 두번째 사옥인 스페이스닷투(Space.2)가 완공되었다.


    중국 주요 지역에서 다음 사이트 접속 차단.
    2019년 1월 27일 베이징 소식통 등에 따르면 인터넷 포털 다음 사이트는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 지역에서 다음 사이트 접속이 되지 않고 있다.


    2014년 10월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주)카카오와 합병하여 (주)다음카카오를 출범시킨 후, 2015년 10월 회사명을 (주)카카오로 바꾸었다. 
      포털 및 모바일 서비스 업체. 포털 사이트 ‘다음(daum.net)’과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운영하며, 2014년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이 (주)카카오와 합병해 출범한 회사다. 합병하기 전, 다음커뮤니케이션은 1997년 국내 최초 무료 웹메일인 ‘한메일’ 서비스를 시작했고, 2000년 ‘다음(daum) 검색’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포털 기업이 되었다. (주)카카오는 2010년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출시한 후, 스마트폰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성장한 회사다.
      (주)카카오의 모체는 1995년 2월 설립된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이다. 설립자는 인터넷 벤처 1세대로 불리는 연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의 이재웅. 그는 자본금 5,000만 원, 상근직원 3명으로 출발하여 1997년 국내 최초로 무료로 웹메일을 쓸 수 있는 ‘한메일(hanmail.net)’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과거 PC통신 중심이던 일반인들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인터넷으로 급속히 이전되기 시작했고, 2000년 ‘다음(daum.net)’ 검색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인터넷 포털 기업으로 변신했다. 2014년 10월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주)카카오와 합병하여 (주)다음카카오를 출범시킨 후, 2015년 10월 회사명을 (주)카카오로 바꾸었다.
      주) 카카오
      (주)카카오는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하면서 검색, 송금, 결제, 쇼핑, 동영상, 미디어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모바일 라이프 플랫폼’ 기업으로 전환했다.
      카카오는 모바일 메신저, 포털, 게임, 음악, 유료 콘텐츠, 모빌리티, 커머스, 결제(카카오페이) 등의 부문에서 서비스 사업을 한다.
      모바일 메신저 사업인 ‘카카오톡’은 메시지, 사진, 동영상 전송 외에 1:1대화 및 그룹 채팅, 음성통화(보이스톡), 친구 맺기, 게임, #검색, 송금, 스토어, 선물하기, TV 시청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 플랫폼이다.
      포털 사업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넷(www.daum.net)’의 운영을 통해 검색, 이메일, 뉴스, 사전, 쇼핑, 금융, 자동차, 스토리펀딩, 커뮤니티 등 인터넷 기반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온라인 광고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모바일 게임 사업은 (주)카카오게임즈에 통합돼 운영되고 있다. 음악사업은 자회사 (주)카카오엠을 통해 뮤직 플랫폼 멜론(Melon)을 운영한다.
      유료 콘텐츠 사업 중 주력 서비스는 ‘카카오페이지’이다. 카카오페이지는 만화, 소설,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고 있는 종합 콘텐츠 유통 플랫폼이다.
      모빌리티 사업은 자회사 (주)카카오모빌리티를 통해 서비스한다. 카카오모빌리티는 모빌리티 플랫폼인 ‘카카오T’를 운영하며 택시, 드라이버, 주차,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커머스 사업은 ‘카카오톡 선물하기’, ‘카카오 메이커스’ 등 쇼핑 관련 서비스와 (주)카카오IX가 운영하는 상설매장 ‘플래그십 스토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카카오는 신규사업으로 웹툰, 웹소설, 게임 퍼블리싱 등의 IP(지식재산권) 사업을 통해 일본 시장, 중국과 동남아시아 시장에 진출해 있다. 또 인공지능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설립한 (주)카카오브레인과 본사의 AI조직을 중심으로 AI 플랫폼 및 서비스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블록체인을 미래 핵심기술로 보고 블록체인 기술 및 서비스 자회사인 ‘그라운드X(Ground X)’를 일본에 설립했다. 현재 서비스 중인 카카오의 AI 플랫폼에는 인공지능 스피커(대화형 스마트홈 시스템) ‘카카오i’가 있다.
      2018년 3월 말 기준, (주)카카오는 총 80개사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다. 주요 자회사로는 뮤직플랫폼 멜론(Melon)을 운영하는 (주)카카오엠IP를 활용한 라이선싱 및 브랜드 스토어 사업체 (주)카카오IX, 위치기반 서비스 및 대리운전 서비스업체 (주)카카오모빌리티, 결제서비스 회사 (주)카카오페이, 게임 콘텐츠 개발업체 (주)카카오게임즈, 전자 상거래 관련 서비스 업체 (주)카카오메이커스, 투자회사 (주)카카오인베스트먼트, AI(인공지능) 전문 연구개발 회사 (주)카카오브레인,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주)카카오벤처스, 지도 서비스 콘텐츠 생산업체 (주)이미지온, 카카오의 주차 예약 O2O 서비스 관련 업체인 파킹스퀘어, 인터넷 서비스 운영업체 (주)링키지랩, 그리고 (주)키즈노트, (주)포도트리, (주)디케이비즈니스, (주)디케이테크인, (주)디케이서비스, (주)디케이차이나 등이 있다.
      1995년 설립된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2006년 설립된 (주)카카오가 2014년 10월 (주)다음카카오로 합병하였으며, 2015년 9월 (주)카카오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은 1995년 2월 20일 설립된 뒤 이듬해 부설 미디어연구소를 설립하고 병역특례업체로 지정되었다. 1997년 5월 국내 최초로 무료 이메일을 제공하는 한메일넷(hanmail.net) 서비스를 시작하였으며, 1999년 7월 한메일넷의 명칭을 '다음'으로 바꾸고 인터넷 포털사이트로 개편하였다. '다음'의 명칭에는 인터넷을 통해 차세대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선도해 나가겠다는 뜻과 다양한 소리[]를 조화롭게 내보자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같은 해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등록하고 코스닥에 상장하였다.
      2000년 3월 온라인 종합 쇼핑몰 '다음쇼핑'을 개설하였고, 4월부터 UMS 서비스와 모바일 서비스를 개시하였으며, 《포브스》로부터 세계 300대 유망 중소기업에 선정되었다. 2001년 정보통신부가 주관하는 정보문화상의 대통령상을, 2002년에는 다음쇼핑이 전자상거래 대상을 수상하였다. 2003년 다음쇼핑의 브랜드 명칭을 디앤샵(d&shop)으로 변경하였고, 벤처기업 대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일본 파워드컴 사와 합작법인 (주)타온을 설립하였고, 2005년에는 온켓을 인수하여 마켓 플레이스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에 사옥 다음글로벌미디어센터를 열었고, 한국정보보호진흥원으로부터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을 취득하였다. 같은 해 온라인 쇼핑 사업부문을 인적분할하였고, 이커머스(e-commerce) 사업부문을 인적분할하여 (주)다음커머스를 설립하였다. 2007년 자체 검색엔진을 개발하여 웹문서 검색 시범서비스를 시작하였고, 2008년 다음다이렉트자동차보험을 ERGO사에 매각하였다. 2009년 모바일 전용 페이지 '모바일다음'을 개설하였고, 2010년에는 디지털 영상 시스템 '디지털뷰'를 개설하였다. 2013년 1월 다음 검색광고 플랫폼을 독자 운영으로 전환하였다.
      (주)카카오는 2006년 (주)아이위랩으로 설립되었으며, 2010년 3월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출시하고 9월 사명을 카카오로 변경하였다. 2012년 3월 카카오스토리 서비스를 오픈하고, 7월 카카오 게임하기 서비스를 오픈하였다. 2013년 7월 카카오톡 1억 가입자를 돌파하였고, 9월 카카오그룹, 카카오뮤직 서비스를 오픈하였다. 2014년 4월 카카오 IX(구 카카오프렌즈) 팝업스토어를 오픈하였고, 5월 카카오게임 누적 가입자 5억을 돌파하였다.
      주요 사업은 국내 대표적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다음'의 운영을 통한 검색, 이메일 커뮤니티 등 다양한 인터넷 기반의 서비스 제공, 온라인 광고 상품 판매 등과 대표적 모바일 메신저인 '카카오톡' 운영 등이다. 국내 계열회사로는 (주)다음게임, (주)다음서비스, (주)다음핑거터치, 다이알로이드(주), (주)버즈피아, (주)온네트, 울트라캡숑(주), 이미지온(주), (주)티앤케이팩토리 등이 있으며, 해외 계열회사로는 베이징 카카오, 카카오 싱가포르, 카카오 재팬 등이 있다.
      본사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첨단로 242에 있으며, 판교오피스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역로 235 에이치스퀘어에 있다.
      • 1995년 02월 : (주)다음커뮤니케이션 설립
      • 1997년 05월 : 국내 최초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메일 오픈(현재의 Daum 메일)
      • 1999년 11월 : 코스닥시장에 주식 상장
      • 2000년 01월 : 다음 검색 서비스 오픈
      • 2000년 03월 : 온라인 쇼핑몰 ‘다음쇼핑’ 오픈
      • 2000년 07월 : ‘다음 금융플라자’ 오픈. 증권, 보험, 부동산 등 재테크 정보 서비스 개시
      • 2002년 01월 : 영화주간지 <필름2.0>을 발간하는 미디어2.0 인수
      • 2003년 01월 : 미디어다음 오픈
      • 2004년 08월 : 미국의 인터넷 포털 ‘라이코스’를 인수합병하고 일본시장에 진출
      • 2005년 02월 : 온켓을 인수하고 마켓 플레이스 사업에 진출
      • 2006년 03월 : 교보문고와 제휴해 도서 전문 검색 서비스 제공
      • 2007년 01월 : 다음 tv팟 오픈
      • 2009년 01월 : 지도 서비스 스카이뷰, 로드뷰 정식 오픈
      • 2009년 04월 : 모바일 다음 오픈
      • 2010년 03월 : (주)아이위랩이 ‘카카오톡’ 출시
      • 2010년 03월 : (주)아이위랩이 사명을 (주)카카오로 변경
      • 2010년 12월 : 모바일 광고 플랫폼 Ad@m(아담)을 출시
      • 2010년 08월 : 와이브랜트에 라이코스 매각
      • 2011년 05월 : ‘한메일’ 명칭을 ‘다음메일’로 통합하고 개방형 메일 기능을 추가
      • 2012년 04월 : 제주도 사옥 스페이스닷원(Space.1) 완공 및 본사 이전 완료
      • 2013년 08월 : 모바일 전용 콘텐츠 스토리볼 출시
      • 2013년 09월 : 스마트폰 런처 개발사 버즈피아 인수
      • 2014년 10월 : 다음과 카카오가 통합하여 ‘다음카카오’ 출범
      • 2015년 03월 : 기사와 승객을 쉽고 빠르게 연결하는 모바일앱 ‘카카오택시’ 출시
      • 2015년 05월 : (주)카카오프렌즈 설립
      • 2015년 06월 : ‘김기사’로 유명했던 내비게이션 업체 록앤올의 지분 100%를 626억 원에 인수
      • 2015년 10월 : 회사명을 다음카카오에서 ‘(주)카카오’로 변경
      • 2016년 03월 : 로엔엔터테인먼트(현, 카카오엠)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음악산업에 진출
      • 2017년 02월 : 인공지능사업을 위해 (주)카카오브레인을 설립
      • 2017년 04월 : (주)카카오페이 설립
      • 2017년 07월 : 국내 두 번째 인터넷 전문은행인 한국카카오은행(약칭 카카오뱅크)이 카카오뱅크 서비스를 시작(카카오는 10% 지분 참여)
      • 2017년 08월 : 카카오택시, 드라이버, 내비 등을 운영하는 (주)카카오모빌리티 출범
      • 2018년 03월 : 블록체인 관련 자회사 ‘Ground X’를 일본에 설립
      포털 및 모바일 인터넷 정보매개 서비스업체.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주)카카오가 (주)다음카카오로 합병한 후, 사명을 (주)카카오로 변경하였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메신저 '카카오톡' 등을 운영한다. 주요 사업은 온라인 광고 및 거래형 서비스이다.  카카오는 2008년 5월 미국에서 설립된 ‘아이위랩(Iwilab)’이며, 설립자는 한게임 창업주 김범수(현, 카카오 의장)이다. 설립 당시 홀딩컴퍼니였던 아이위랩은 2010년 3월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개발해 출시한 뒤, 같은 해 9월 (주)카카오로 사명을 바꾼 회사다.
      카카오.





          업종포털 및 인터넷 정보매개 서비스업
          주요 품목광고 플랫폼, 콘텐츠 플랫폼
          소재지별 기업 종류한국기업
          그룹사카카오그룹
          설립자이재웅
          설립일1995년 2월 16일
          기업 유형외부감사법인, 유가증권시장상장법인
          상장일1999년 11월 9일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첨단로 242
           (영평동)



      통계


      (단위: 백만원)
      연간 통계
      구분2009년2010년2011년2012년
      상시종업원수
      921
      1,123
      1,307
      1,402
      매출액
      244,556
      345,510
      418,718
      428,094
      영업이익
      44,541
      97,907
      108,125
      107,390
      당기순이익
      31,096
      111,717
      105,288
      77,938
      자산총계
      297,486
      442,596
      515,333
      568,130
      자본금
      6,529
      6,681
      6,777
      6,802
      자본총계
      209,570
      351,292
      417,257
      483,535
      부채총계
      87,915
      91,304
      98,075
      84,594
      현금흐름_영업활동
      55,667
      105,306
      135,096
      127,871


      1995년 설립된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2006년 설립된 (주)카카오가 2014년 10월 (주)다음카카오로 합병하였으며, 2015년 9월 (주)카카오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주)카카오의 전신은 2008년 5월 미국에서 설립된 ‘아이위랩(Iwilab)’이며, 설립자는 한게임 창업주 김범수(현, 카카오 의장)이다. 설립 당시 홀딩컴퍼니였던 아이위랩은 2010년 3월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개발해 출시한 뒤, 같은 해 9월 (주)카카오로 사명을 바꾼 회사다.

      (주)카카오는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하면서 검색, 송금, 결제, 쇼핑, 동영상, 미디어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모바일 라이프 플랫폼’ 기업으로 전환했다.
      카카오는 모바일 메신저, 포털, 게임, 음악, 유료 콘텐츠, 모빌리티, 커머스, 결제(카카오페이) 등의 부문에서 서비스 사업을 한다.
      모바일 메신저 사업인 ‘카카오톡’은 메시지, 사진, 동영상 전송 외에 1:1대화 및 그룹 채팅, 음성통화(보이스톡), 친구 맺기, 게임, #검색, 송금, 스토어, 선물하기, TV 시청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 플랫폼이다.
      포털 사업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넷(www.daum.net)’의 운영을 통해 검색, 이메일, 뉴스, 사전, 쇼핑, 금융, 자동차, 스토리펀딩, 커뮤니티 등 인터넷 기반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온라인 광고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모바일 게임 사업은 (주)카카오게임즈에 통합돼 운영되고 있다. 음악사업은 자회사 (주)카카오엠을 통해 뮤직 플랫폼 멜론(Melon)을 운영한다.
      유료 콘텐츠 사업 중 주력 서비스는 ‘카카오페이지’이다. 카카오페이지는 만화, 소설,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고 있는 종합 콘텐츠 유통 플랫폼이다.
      모빌리티 사업은 자회사 (주)카카오모빌리티를 통해 서비스한다. 카카오모빌리티는 모빌리티 플랫폼인 ‘카카오T’를 운영하며 택시, 드라이버, 주차,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커머스 사업은 ‘카카오톡 선물하기’, ‘카카오 메이커스’ 등 쇼핑 관련 서비스와 (주)카카오IX가 운영하는 상설매장 ‘플래그십 스토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카카오는 신규사업으로 웹툰, 웹소설, 게임 퍼블리싱 등의 IP(지식재산권) 사업을 통해 일본 시장, 중국과 동남아시아 시장에 진출해 있다. 또 인공지능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설립한 (주)카카오브레인과 본사의 AI조직을 중심으로 AI 플랫폼 및 서비스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블록체인을 미래 핵심기술로 보고 블록체인 기술 및 서비스 자회사인 ‘그라운드X(Ground X)’를 일본에 설립했다. 현재 서비스 중인 카카오의 AI 플랫폼에는 인공지능 스피커(대화형 스마트홈 시스템) ‘카카오i’가 있다.
      2018년 3월 말 기준, (주)카카오는 총 80개사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다. 주요 자회사로는 뮤직플랫폼 멜론(Melon)을 운영하는 (주)카카오엠IP를 활용한 라이선싱 및 브랜드 스토어 사업체 (주)카카오IX, 위치기반 서비스 및 대리운전 서비스업체 (주)카카오모빌리티, 결제서비스 회사 (주)카카오페이, 게임 콘텐츠 개발업체 (주)카카오게임즈, 전자 상거래 관련 서비스 업체 (주)카카오메이커스, 투자회사 (주)카카오인베스트먼트, AI(인공지능) 전문 연구개발 회사 (주)카카오브레인,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주)카카오벤처스, 지도 서비스 콘텐츠 생산업체 (주)이미지온, 카카오의 주차 예약 O2O 서비스 관련 업체인 파킹스퀘어, 인터넷 서비스 운영업체 (주)링키지랩, 그리고 (주)키즈노트, (주)포도트리, (주)디케이비즈니스, (주)디케이테크인, (주)디케이서비스, (주)디케이차이나 등이 있다.
      • 1995년 02월 : (주)다음커뮤니케이션 설립
      • 1997년 05월 : 국내 최초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메일 오픈(현재의 Daum 메일)
      • 1999년 11월 : 코스닥시장에 주식 상장
      • 2000년 01월 : 다음 검색 서비스 오픈
      • 2000년 03월 : 온라인 쇼핑몰 ‘다음쇼핑’ 오픈
      • 2000년 07월 : ‘다음 금융플라자’ 오픈. 증권, 보험, 부동산 등 재테크 정보 서비스 개시
      • 2002년 01월 : 영화주간지 <필름2.0>을 발간하는 미디어2.0 인수
      • 2003년 01월 : 미디어다음 오픈
      • 2004년 08월 : 미국의 인터넷 포털 ‘라이코스’를 인수합병하고 일본시장에 진출
      • 2005년 02월 : 온켓을 인수하고 마켓 플레이스 사업에 진출
      • 2006년 03월 : 교보문고와 제휴해 도서 전문 검색 서비스 제공
      • 2007년 01월 : 다음 tv팟 오픈
      • 2009년 01월 : 지도 서비스 스카이뷰, 로드뷰 정식 오픈
      • 2009년 04월 : 모바일 다음 오픈
      • 2010년 03월 : (주)아이위랩이 ‘카카오톡’ 출시
      • 2010년 03월 : (주)아이위랩이 사명을 (주)카카오로 변경
      • 2010년 12월 : 모바일 광고 플랫폼 Ad@m(아담)을 출시
      • 2010년 08월 : 와이브랜트에 라이코스 매각
      • 2011년 05월 : ‘한메일’ 명칭을 ‘다음메일’로 통합하고 개방형 메일 기능을 추가
      • 2012년 04월 : 제주도 사옥 스페이스닷원(Space.1) 완공 및 본사 이전 완료
      • 2013년 08월 : 모바일 전용 콘텐츠 스토리볼 출시
      • 2013년 09월 : 스마트폰 런처 개발사 버즈피아 인수
      • 2014년 10월 : 다음과 카카오가 통합하여 ‘다음카카오’ 출범
      • 2015년 03월 : 기사와 승객을 쉽고 빠르게 연결하는 모바일앱 ‘카카오택시’ 출시
      • 2015년 05월 : (주)카카오프렌즈 설립
      • 2015년 06월 : ‘김기사’로 유명했던 내비게이션 업체 록앤올의 지분 100%를 626억 원에 인수
      • 2015년 10월 : 회사명을 다음카카오에서 ‘(주)카카오’로 변경
      • 2016년 03월 : 로엔엔터테인먼트(현, 카카오엠)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음악산업에 진출
      • 2017년 02월 : 인공지능사업을 위해 (주)카카오브레인을 설립
      • 2017년 04월 : (주)카카오페이 설립
      • 2017년 07월 : 국내 두 번째 인터넷 전문은행인 한국카카오은행(약칭 카카오뱅크)이 카카오뱅크 서비스를 시작(카카오는 10% 지분 참여)
      • 2017년 08월 : 카카오택시, 드라이버, 내비 등을 운영하는 (주)카카오모빌리티 출범
      • 2018년 03월 : 블록체인 관련 자회사 ‘Ground X’를 일본에 설립. 
      티스토리, Tistory. 
      티스토리
      (Tistory)
      Tistory logo.png
      주소Tistory.com
      영리여부O
      사이트 종류태터툴즈 기반 서비스형 블로그
      회원 가입--초대권 배부 가입제-- 누구나 가입 가능
      사용 언어한국어
      소유자다음
      제작자태터앤컴퍼니(TNC) / 다음
      시작일2006년 5월
      현재 상태정상 운영중
       대한민국의 가입형/설치형 블로그 서비스다. 2006년 5월다음과 태터앤컴퍼니(TNC)가 함께 공동운영을 시작했으나, 서비스 시작 1년 2개월 만인 2007년7월 10일에 모든 서비스의 운영권이 다음으로 이전되었다.  티스토리는 태터툴즈라는 설치형 블로그 프로그램을 서비스형 블로그에 옮겨둔 것이다. 서버를 직접 설정하고, 아파치 웹 서버, MySQL, PHP등에 적응하기 어려운 일반 사용자를 대상으로 태터툴즈의 소스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서, 네이버 블로그, 다음 블로그처럼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가입형 블로그
      티스토리는 위지위그(화면에 나타난 것을 그대로 HTML로 바꿔주는 기능으로, 위지윅이라고도 함)을 사용하여 HTML을 다룰줄 모르더라도 글, 댓글, 엮인글(트랙백) 등의 기능을 이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가입형 블로그의 측면도 존재한다.
      설치형 블로그
      다른 블로그 서비스와는 다르게 티스토리는 스킨을 이루는 HTML 편집, 리퍼러 로그, 방문자 기록 등을 사용할 수 있어 덜 자유로운 네이버나 다음 블로그에 질린 사람들이나, HTML 프로그래밍을 다룰줄 아는 고급 사용자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기존 태터툴즈에서 제공했던 스킨, 플러그인등 외부 프로그램 제작이 가능하다. 단, 성능상의 이유로 플러그인 기능은 사용자가 자유로이 추가/수정할 수 없으며, 서비스운영자들이 선별 탑재-연동하고 있다.
      초대장
      티스토리의 경우에는 다른 블로그 서비스와 달리 기존의 블로그 운영자가 새 사람들을 초대하는 초대장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러한 초대장을 얻기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한 편이다.초대장은 이메일을 통해 가입 링크가 발송되는 방식이며, 일단 가입이 되면 글이나 방문자수, 댓글수의 실적에 따라 초대장이 발급되어 또 새로운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다.
      그러나 2018년 하반기 초대장이 12년만에 폐지되었다

      티스토리는 태터툴즈의 첫머리 글자인 T와 히스토리의 History의 합성어이다.[2] 초기 기획멤버들의 의기투합으로 만들어진 이름으로서, 태터툴즈를 기반으로, 개인의 역사를 담는 서비스형 블로그를 만든다는 의미로 선정된 이름이다.

      2006년

      • 5월 25일 - 다음과 TNC, 닫힌 시험판(클로즈드 베타테스트) 시작. 초대권을 발부받은 200명으로 시작.
      • 6월 27일 - 독립 도메인 기능, 백업기능 지원 시작.
      • 7월 27일 - 태터툴즈 기반 서비스형 블로그 '이노리'(innori)와 통합
      • 12월 7일 - 오픈 베타 시작. 제2세대 블로그 마케팅 시작

      2007년

      • 2월 27일 - BlogAPI, CallBack 플러그인 추가
      • 5월 2일 - '태터 데스크' 베타 테스트 시작 (100명)
      • 5월 12일 - '태터 데스크' 베타 테스트 종료
      • 5월 18일 - '태터 데스크' 정식 서비스 시작
      • 5월 25일 - Tistory.com 서비스 오픈 1주년
      • 7월 10일 - 서비스 운영권이 다음에게 모두 이관됨
      • 8월 16일 - Daum 블로거뉴스 플러그인 오픈
      • 8월 28일 - '스킨 위자드' 베타 테스트 시작 (100명)
      • 9월 4일 - '스킨 위자드' 베타 테스트 종료
      • 9월 19일 - '나의 과거글 불러오기' 플러그인 추가
      • 9월 21일 - 백일장 이벤트 실시
      • 11월 8일 - 정식 서비스 시작, 사용자 전용 포럼, 스킨위자드 정식오픈
      • 12월 - 티스토리 커피차 프로모션 - IT 기업편

      2008년

      • 1월 9일 - 스팟플렉스 발행/통계 플러그인 오픈
      • 1월 24일 - anyBGM 플러그인 서비스 종료
      • 1월 28일 - Daum검색창 플러그인 오픈
      • 1월 31일 - 책DB첨부 플러그인 오픈
      • 3월 7일 - 이미지 업로더 다음 플래시 업로더로 교체, 멀티 사진 첨부,간단 편집 등이 어도비 플래시로 구현
      • 3월 14일 - 발행 플러그인 제작 가이드 배포 시작
      • 3월 20일 -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제한적 본인확인제 (부분 실명제) 시작
      • 6월 2일 - MSN 메신저 위젯 오픈
      • 6월 2일 - 2차 티스토리 커피차 프로모션 - 대학교편

      블로그는 포털 사이트에서 운영하는 것과 전문 블로그 사이트에서 운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즉,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곳에서 블로그를 운영하기도 하며, ‘이글루스’나 ‘티스토리’와 같이 블로그를 전문으로 운영하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블로그 사이트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네이버 블로그 - https://section.blog.naver.com
      * 다음 블로그 - http://blog.daum.net
      * 이글루스 - http://www.egloos.com
      * 티스토리 - http://www.tistory.com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사람을 블로거라고 하며, 이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글을 보고 있어 영향력이 큰 사람을 파워블로거라고도 합니다.
      ## "자세한사항은 다음홈페이지참조하시기바랍니다"































    요약포털 및 모바일 서비스 업체. 포털 사이트 ‘다음(daum.net)’과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운영하며, 2014년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이 (주)카카오와 합병해 출범한 회사다. 합병하기 전, 다음커뮤니케이션은 1997년 국내 최초 무료 웹메일인 ‘한메일’ 서비스를 시작했고, 2000년 ‘다음(daum) 검색’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포털 기업이 되었다. (주)카카오는 2010년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출시한 후, 스마트폰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성장한 회사다.



    2019년 2월 21일 목요일

    노량해전, 露梁海戰.

    노량해전 , 露梁海戰.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조선 선조 31년(1598년)에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왜병과 대결한 마지막 해전.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명나라 장군 진린()과 더불어 싸웠으며, 승리와 함께 전사함.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이다.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끝났고, 이순신도 이때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 소식을 듣고 철군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진린()과 함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하는 왜군에게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나가[西]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한 후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왜군의 철수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 가운데서 마지막 전투이다. 1598년에는 4차례의 전투가 있었는데, 절이도전투(, 7월19일), 예교와 유도전투(9월 15일~10월 4일), 장도해전(, 9월 20일~10월 9일) 등 일본군이 철수하기 위한 전초전이 있었고 이러한 전투가 연장된 것이 바로 노량해전이다. 특히 예교에는 고니시 유키나카(西)가 지휘하는 일본군 15,000여 명이었는데, <초서체일기()>에 의하면 아군이 예교의 적군을 장도 뒤에서 10월 2일부터 나흘 동안 맹공격을 했으나, 불행히도 사선() 25척, 호선() 77척, 비해선() 17척, 잔선 9척 등 모두 128척을 가진 명나라 수군은 그 중 39척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 수군도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문(), 강진현감 송상보() 등 5명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고, 사도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 2명은 전사하였다. 수병도 29명이 전사하였다.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난 8월 18일 횡사하였으므로, 철수하려 했다. <선조실록()>(권 103, 선조 31년 8월 19일(임신())에 의하면 “경상우수사 이순신()의 비밀 장계()가 왔다.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7월 초에 병사했으므로, 흉적()이 장차 철수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카 등 왜군들은 빨리 철수할 것을 바라고 있었고, 이순신은 석 달이 지난 11월 8일 예교성에 있는 왜적들이 10일 안으로 탈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명나라 유정()에게서 받았다. 이순신은 도망가는 왜적을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을 비장한 각오로 11월 9일 고금도()를 떠나, 11월 11일 다시 유도에 도착하여 예교에 있는 왜적이 도망갈 길을 차단하였다. 이틀 뒤 왜적선 10여 척이 근처의 장도에 나타났다가, 이순신 함대의 추격을 피해 예교 가까운 포구인 신성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군은 종일 예교 앞에서 왜적을 유인하기도 하고, 바짝 압박을 가하기도 하면서 해상 봉쇄선을 장도까지 확장하였다.

    한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왜군은 부하 8명을 통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에게 돼지와 술 등 뇌물을 바치고 도망갈 길을 터 달라며 교섭을 시작했다. 진린은 손쉬운 전공을 세우려는 탐욕을 가졌음직 하나 이순신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그들의 의도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노량해전의 시작
    1598년 11월 17일 저녁, 예교성에 갇힌 왜군은 횃불 신호로 남해 등지에 있는 그들의 아군에게 알리었다. 이에 호응하는 횃불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고성에 있는 다치바나(), 사천에 있는 시마즈(), 남해에 있는 무네() 등이 모두 노량 바다로 집결하여 고니시를 구출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갈 최후의 전투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이순신 역시 최후의 결전을 할 요량이었다. 이순신은 18일 밤 자정이 되자, 문득 대야에 깨끗한 물을 떠와 손을 씻었다. 혼자 갑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이 원수 놈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이충무공전서()> 권() 9 부록() 31쪽「행록())

    아무튼 이순신은 왜적선이 무수하게 이동한다는 정보에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여 11월 18일 밤 10시에 출항, 노량 앞 바다로 이동하였으며, 11월 18일 밤부터11월 19일까지 이틀 간 밤을 새가며 싸웠다. 11월 19일 새벽 2시쯤 아군 연합 함대는 왜적의 선단이 몰려오는 노량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군이 새벽 4시 노량을 거쳐 관음포() 앞 바다에서 이르자, 이순신은 요격전()을 벌였다. 우리 수군은 전선 83척, 수군이 1만 7,000여 명이고, 명나라 수군은 전선 63척, 수군 2,600명이었다.

    왜적의 병력은 대선 500여 척, 수군 6만여 명이었다.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27일 도체찰사 이덕형의 장계)에 의하면 “적선이 3백여 척”이라고 하였지만, <이충무공전서()>권 9 부록 1「행록」과 <선묘중흥지()>에는 “적선이 5백여 척”이라 하였으며,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24일)에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군문 형개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적선 100척을 나포하고 200척을 불태웠으며, 참수 500급, 생포 180여 명, 익사자는 아직 물위에 떠오르지 않아 알 수 없으며, 이총병(이순신)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날 새벽 아군은 적들이 모르게 비밀리에 전진하였다. <명사()>에서 본 노량 관음포 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1598년 11월 가토 기요마사()가 배를 내어 먼저 달아났다. 마귀()는 드디어 도산(), 유포()에 들어갔고, 유정()은 예교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석만자가 수군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려 하자, 진린이 이를 맞아 쳐부수어 패배시켰다. 여러 곳의 왜군이 돛을 달고 모두 돌아갔다. 왜가 조선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다. 중앙의 조선과 그 속국들은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관백()이 죽고서야 전쟁이 비로소 종식되었다.”라고 되어 있다.(<명사()>(권320「열전()」제208 외국() 1 조선) 여기서는 진린의 역할로 왜적선을 패배시킨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순신의 역할이 가장 핵심이 됨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순신의 전사와 해전의 마무리
    마지막 전장()은 도산(), 유포(), 예교()가 있는 곳이다. 이 최후의 전쟁은 이순신이 순국하였으므로 이순신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행록()>, <행장()>, <비문()>, <실록()> 및 모든 사료()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날 새벽 조() 명() 연합 함대는 좌우로 편을 갈라 행진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포구와 섬들마다 복병을 배치하여 적을 대비하도록 해가며 진군했다. 사천에 웅거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왜적들은 500여 척을 이끌고, 경상도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 사이에 있는 광주양()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들은 대적선의 항로 전방인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배치되었고, 명나라 수군은 죽도 북쪽에 매복하였다. 왜적선이 노량 수로를 지나 관음포 앞바다로 다가왔을 때, 우리 수군들은 좌우에서 번개처럼 나타나 일시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적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갈팡질팡하다가는 이윽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우리 수군에게 대항해 왔다. 그러자 우리 수군들은 적선에 근접하여 불붙는 땔감()을 마구 던져 적의 배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적들은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관음포()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왜적선들은 이 바다에서 싸우다가 남해 관음포로 쫓겨 들어갔다. 거기엔 밖에서 보면 마치 툭 트인 바다요, 수로 같이 보이지만, 돌아서기만 하면 바다가 막혀 달아날 길이 없는 곳이다. 왜적선들은 다시 돌아서서 대항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앞장서서 전군을 지휘했다. 북을 힘차게 치게 했다. 쥐새끼도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돌아서서 고양이에게 달려들 듯이, 왜적선은 이순신의 배를 목표로 겹겹이 에워싸며 최후 발악으로 달려들었다. 이순신은 자못 위험해졌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본 진린은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해냈다. 이 때 진린의 배가 적선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적의 장수 세 명이 층각선()에 앉아 전투를 지휘 독려하고 있는 것을 보고 총과 화살을 그쪽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여 그 중 한 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을 본 적들은 자기 장수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 진린의 배에서 포위망을 풀고 그 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에 진린은 위급함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순신과 진린은 다시 힘을 다하여 호준포를 쏘아 적선을 계속 깨뜨렸다.

    아군은 오전 10시경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의 명에 따라 죽음을 극비에 붙이고 곡도 하지 않았으며, 변함없이 독전기를 흔들며 지휘하였다. 유형( : 해남현감)과 송희립( : 이순신 전속부관)도 적탄에 맞았으나 잠시 기절했을 뿐, 다시 일어나 상처를 싸매고 싸웠다고 한다. 정오에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적선 200여 척을 불태웠다. 적병은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포로로 잡히거나 목 베여 죽는 등 대부분 전사하였다. 시마즈 등은 겨우 50척을 거두어 도망쳤다. <선묘중흥지()>(권)에 의하면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틈을 타서 묘도( : 여천군 삼일면 묘도)의 서쪽 해협을 통과하여 몰래 남쪽 외양()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우리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은 쉬지 않았다. 이순신의 지휘 하에서 깨진 적선의 수만도 200여 척에 달하고 있었다. 적들은 패전의 빛이 짙어지자 관음포 앞을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칠 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적선 1척도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이순신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달아나는 적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북을 더 힘차게 두들기게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바로 이때였다.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맞히고 겨드랑이를 관통하여 나갔다.
    고니시는 경남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남해의 소시라노부[調]에게 구원을 청하여 전선 500여 척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적선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였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使이영남(), 낙안군수(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西)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 등지의 시마쓰()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가리포첨사(使)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11월 19일 새벽(4시경)이 되자 조.명 연합 수군은 왜 적선에 대하여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요격을 하였다. 노량. 관음포에서 왜 수군과 조.명 연합수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조. 명 연합 수군은 1598년 11월18일 밤에 명량 앞 바다에서 왜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노량 앞 바다에 방어진을 쳤다.
    노량해전에서 적선 200 여 척을 당파 또는 분멸했다. 왜선 50 여 척과 소서행장은 도망해 갔다. 조선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로써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하였던 왜군은 조선 땅에서 패전을 거듭한 나머지 모두 도망가 버렸고 임진왜란 전쟁은 이렇게 하여 끝났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西)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 등지의 시마쓰()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거나 부서지고 패잔선 50여척이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가리포첨사(使)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해전의 복원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배‘, ’충무공이순신전집‘, ’정한록’, ‘조선역수군사’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노량해전 본문 이미지 2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 있는 나루터.
    현재 남해대교가 놓여 있는 부근 일대를 말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하동군 금남면과 남해군 설천면 사이를 잇는 나루터로 발달한 곳이며, 국립공원인 한려수도의 일부를 이루면서 여객선과 어선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삼대첩지()의 하나로 알려진 곳으로서 1598년(선조 31) 이순신()이 명나라 진린()과 함께 퇴각하려는 적을 필사적으로 쫓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다. 7년간 끌어온 싸움이 사실상 이곳에서 끝이 났다. 여기에 이순신을 추모하여 세운 충렬사()가 있다.

    노량나루, - , Noryangnaru.
    경상남도 남해군의 북쪽 설천면에 있는 나루이다. 약 400년 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니 현의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노량이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여지도서』에 "현의 북쪽 38리에 있다."라고 수록되어있다. 『남해현읍지』에는 "현의 북쪽 37리에 있으며 곤양과 인접하여 경계를 이루며 진선() 1척이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해동지도』에 충렬사와 함께 바닷가에 노량진으로 기재되어 있다.

    조선 중엽 노량원은 곤양방면의 나루터로 노량진이라 불렀다. 남해현으로 귀양 오는 선비들이 바다를 건너는데 이슬방울처럼 작은 도선이 다리 역할을 한다 해서 노량이라 이름 한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일설에는 도선을 내리자마자 뒤돌아보니 다리는 이슬방울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데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사이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1973년에 개통되었다. 충렬사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며 남해대교가 건설되면서 관광지로 더욱 유명한 곳이 되었다. 
    옛지명은 한동군 소속하에있었다.

    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징비록(懲毖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선묘중흥지(宣廟中興志)』

    『日本戰史朝鮮役』(香月鍈一, 財團法人偕行社, 1924)

    노량 [露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노량해전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배),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노량나루 [露梁-, Noryangnaru]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