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0일 화요일

동화사, 의 문화재,

동화사, 의 문화재,
대구 동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로 지금으로부터 1512년전에 창건됐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동화사 창건에는 두가지 주장이 있다.
동화사 사적비 桐華寺 寺跡碑 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 15년(493) 극달極達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 심지心地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 하여 동화사 桐華寺 라 이름을 고쳤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표 율사로부터 영심 永深대사에게 전해진 팔간자를 심지 대사가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바로 동화사 첨당 籤堂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동화사는 신라말인 934년 영조 靈照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보조 普照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홍진 弘眞국사에 의해 각각 중창 중건되었다.
보조국사는 호국불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동화사 중창에 크게 공헌하여 동화사와 염불암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또 고려 말기 대표적인 고승인 홍진 국사는 동화사를 하안소 下安所로 삼고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현재 해탈교 건너편에 국사를 기리는 부도가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 (1606) 유정 惟政사명대사, 숙종 3년(1677) 상숭 尙崇대사, 영조 8년(1732) 관허 冠虛, 운구 雲丘, 낙빈 洛濱, 청월 晴月 대사 등이 각각 중창 중건하였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상전, 봉서루, 심검당 등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조선조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다. 지난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문화재로는 제243호 -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보물 제244호 -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247호 -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보물 제831호 - 동화사 삼층석탑, 보물 제254호 - 동화사 당간지주 등이 있다.


파계사.

파계사는 동화사의 말사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사찰 가운데 하나로 804년(애장왕 5) 심지(心地)가 창건하고, 1605년(선조 38) 계관(戒寬)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玄應)이 삼창하였다.

이 절에는 영조(英祖)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은 농산(聾山)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고,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淑嬪) 최씨에게 현몽하였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租稅)를 받아 쓰라고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이는 지방 유림(儒林)의 행패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御衣)는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현존 당우로 2층누각인 진동루(鎭洞樓), 법당인 원통전(圓通殿), 적묵당(寂默堂) 등이 있고, 부속암자로 현니암(玄尼庵) ·성전암(聖殿庵) ·금당암(金堂庵) 등이 있는데, 성전암은 경북 3대 도량 중의 하나이다. 문화재로 보물 제1214호 파계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있다.

문화재,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

종    목  보물  제24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게 빚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나타나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구름무늬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이 불상에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다.
비만한 얼굴과 위축된 체구, 장식성이 강한 대좌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2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와 광배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4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처마는 곱게 뻗어 나가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6년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기구 일부를 도둑 맞았으나, 없어지지 않은 사리돌그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4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동화사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먼저 동쪽의 탑은 2단의 기단 대부분이 나중에 보수된 것이라서 돌을 다룬 수법과 끝맺음 처리 부분에서 조화를 잃어버리고 있다. 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따로 새겨 쌓아 올렸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의 두 면에 가운데에만 기둥 모양을 새기고, 반대쪽 면의 기둥 사잇돌을 밀어넣어 그 돌로 모서리기둥을 삼았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돌만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부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던 쇠꼬챙이가 솟아 있다. 1957년에 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그 속에서 조그만 탑 99개와 부처님의 사리를 담아두는 장치가 나왔다.

이 두 탑은 부분적으로 없어진 머리장식을 빼고는 조각의 양식이나 끝맺음 수법이 서로 비슷하고, 균형 또한 잘 이루어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기단과 탑신, 그리고 머리장식부의 세부적인 양식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화사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25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 동화사
시     대 통일신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두 기둥이 66㎝의 간격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기둥이 마주보는 부분과 앞뒷면은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을 뿐 아무 장식이 없고, 바깥면에는 모서리를 깎고 중심에는 세로로 능선을 조각하였다. 기둥의 꼭대기는 반원으로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둥의 앞면 중간부분 1m정도를 살짝 들어가게 새겼다. 이러한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자주 보이는 장식 수법이다. 기둥의 위와 아래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위는 네모난 모양이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다.

당간을 받치던 석재가 없어지고 전체의 형태가 경쾌한 맛은 없지만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이 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당간지주에서 둔중함이 엿보이고, 동화사의 창건시기가 신라 흥덕왕 7년(832)인 것임을 참작하면 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종 목  보물  제1505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5
시 대 조선시대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의 의좌상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를 들고 있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의승병 대장으로서의 기상이 넘쳐난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 다운 기백을 강조해주는데, 다른 사명당 영정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적이다.

기품 있으면서도 은은한 회백색의 색채와 간결하고 유려한 필선이 사용된 장삼,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나타낸 선홍색 가사의 조화는 바르고 단정한 사명당의 승려로서의 품위는 물론 승병대장으로서의 권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겠다. 좌측 하단의 묵서명에 “가경원년병진"이란 연호가 있어 1610년 입적한 이후 늦어도 1796년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 전해오는 10여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료이다.

규격(세로x가로) : 122.9 x 78.8cm 



동화사 대웅전

종 목  보물  제1563호
지 정 일 2008.04.28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5
시 대 조선시대

동화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후 8차례에 걸쳐서 새로 지었으며, 대웅전 또한 여러 차례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조선 후기인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대웅전은 이 절의 중심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문짝은 여러 가지 색으로 새긴 꽃잎을 장식해 놓은 소슬꽃살창을 달았다. 또한 기둥은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서 건물의 안정감과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다.



동화사 목조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

종 목  보물  제1607호
지 정 일 2009.02.23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5 동화사
시 대  고려중기~조선후기

대구 동화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중 약사여래의 복장 전적 7종이다. 대웅전은 1725년에 중창하여 1727년(영조 3)에 삼세불좌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고 조성과 동시에 복장불사가 이루어져 그 발원문이 각각 삼세불에서 수습되었다.

석가모니불에는 12종의 자료, 아미타불에는 6종이 복장되었으며, 약사불에 32종으로 가장 많이 복장되었다. 그 중 간기가 있는 것은 1417년(태종 17)부터 1725년(영조 1)사이의 것이고, 간행기록이 없는 것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 후기에 해당하며 약사불이 조성된 이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동화사 아미타회상도

종 목  보물  제1610호
지 정 일 2009.02.23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5 동화사
시 대 조선시대

이 불화는 1699년 대화원 의균을 비롯한 묘해 ·지영 ·상명 등이 참여해서 그린 아미타불화로서 불보살과 호법신중을 3폭에 나누어 그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 폭 모두 박락이 심하고 채색이 떨어져 나가긴 하였지만 가는 철선묘의 양감 있는 얼굴, 균형 잡힌 신체비례, 섬세한 인물표정, 담채색의 은은한 색조 등에서 의균의 뛰어난 필력과 색채 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불화는 화폭의 구성에서 본존을 중심으로 보살, 나한, 신중을 모두 한 폭에 그리는 일반적인 불화형식과 달리 아미타불과 팔대보살을 한 폭에, 나한과 범천·제석천, 사천왕 등 호법신을 각각 좌우 2폭으로 나누어 그림으로서 부처님의 설법장면과 수호신중을 구분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반에 걸쳐 팔공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대표적인 화사인 의균의 현존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불화라는 점에서 그의 초기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동구  용수동 산1
시 대 통일신라

대구 팔공산 중앙봉의 정상 가까운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크기의 마애약사불상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며, 탄력있고 우아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세련되고 단아하다. 둥근 어깨는 탄력있어 보이며, 허리는 잘록하게 표현되었다. 무릎에서 밖으로 내려뜨린 오른손과 무릎 위에 얹어 약 그릇을 들고 있는 왼손의 세련성 등은 이상적인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몸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로 얇은 편인데 옷주름은 자연스럽고도 규칙적이며, 가슴에서 옷깃이 한번 뒤집히는 등 8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가 표현되어 있으며 연꽃무늬와 덩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대좌는 위와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잎을 새겼으며, 이들을 받치고 있는 용 두 마리가 표현되어 있어 화려한 모습이다.

병고에 허덕이는 수많은 중생들의 돈독한 믿음을 받았던 이 약사불은 우아하고 화려한 사실주의 양식의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동화사 극락전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86.12.05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6
시 대 조선시대

동화사는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이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며, 통일신라 경순왕 8년(934)에 영조선사가 다시 지은 후에도 여러 차례 다시 지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실개천 건너편의 흙담 안에 있다. 숙종(재위 1674∼1720)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는 건물이다. 




동화사 부도군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
지 정 일 1986.12.05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1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동화사 뒷편으로는 산 중턱에서 기슭에 이르기까지 부도밭이 펼쳐져 있는데, 모두 10기에 이르는 부도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어 자리잡고 있다. 모두 이 절에서 수행한 역대 승려들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제1호 성암당 해정대사탑-조선 헌종 5년(1839)에 세운 것으로, 네모난 바닥돌과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제2호 제월당 대사탑-네모난 바닥돌 위로, 둥근 기단을 마련하고, 타원형의 탑몸돌 위로 4각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제3호 기성당 대사탑-영조 40년(1764)에 세운 것으로, 연꽃을 조각한 기단 위에 타원형의 탑몸돌과 4각의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제4호 성임당축존대사탑-숙종 26년(1700)에 세운 탑이다. 바위를 바닥돌로 삼고, 둥근 기단을 올린 후 종모양의 탑신을 쌓았다.

제5호 고운당 부도-숙종 2년(1676)에 만든 것으로, 4각의 바닥돌과 둥근 기단 위에 위가 뭉툭하게 잘린 종모양의 탑몸돌이 놓여 있다.

제6호 함우당 부도-숙종 46년(1720)에 세운 탑이다. 바닥돌과 기단에는 큼직한 연꽃무늬를 두르고, 8각의 지붕돌에는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다.

제7호 이름이 밝혀지지 않음-세운 시기는 알 수 없다. 4각의 바닥돌 위에 꽃무늬를 새긴 둥근 기단을 두고, 타원형의 탑몸돌 위로 4각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제8호 상봉 정원대사탑-숙종 35년(1709)에 세운 것으로, 큼직한 연꽃을 새긴 기단 위로 둥근 탑몸돌과 4각의 지붕돌을 올려 놓았다.

제9호 계영당 극린대사탑-숙종 18년(1692)에 세웠다. 기단의 가운데돌에 특이한 무늬가 있으며, 8각의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머리장식은 파손되었다.

제10호 고한당 부도-세운 연대는 알 수 없다. 4각의 바닥돌 위로 8각의 기단을 두고, 타원형의 탑몸돌에 8각의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대부분의 부도들이 둥글거나 네모난 돌기단 위로, 아래위가 잘린 계란모양의 탑몸돌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에 연꽃을 새겨두었을 뿐 거의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탑몸돌에 승려의 이름을 새겨두긴 하였으나 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은 드물다. 주로 17∼19세기초 사이에 세운 것들로,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부도양식을 잘 보여준다.




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1
시 대 통일신라

대구 팔공산 기슭의 동화사에 있는 불상으로 윗쪽이 뾰족한 삼각의 자연 암반 서쪽면과 남쪽면에 선으로 여래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서쪽면에 새겨진 높이 4m의 여래상은 연꽃이 새겨진 화려한 대좌 위에 앉아있다. 얼굴은 네모나며,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다. 대좌의 높이에 비해 양 무릎이 넓게 표현되어 균형은 잡히지 않고 있으나 비교적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신체는 복부아래에만 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비록 선으로 새겼지만 대좌의 정교한 수법이 주목된다.

높이 4.5m인 남쪽면의 보살상은 옷이 길게 흘러내려 양 무릎이 노출되지 않고 있다. 부채꼴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코와 입 사이가 짧아서 기형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오른손은 복부에 평행으로 들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꽃줄기를 잡고 있다.

선으로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윤곽을 나타내고 있는 이 두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1
시 대 고려시대

동화사에 딸린 암자인 염불암 안마당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청석탑이란 벼루를 만들던 점판암을 이용해 만든 탑인데, 이 탑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닥돌 이외에는 모두 이 재질의 돌이 쓰였다.

탑은 3단의 바닥돌 위에 쌓아 놓았는데, 세울 당시에는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들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10개의 지붕돌만이 포개진 상태이다. 지붕돌은 파손이 심하여 곳곳에 작은 돌을 괴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안쓰럽다. 지붕돌은 밑면에 2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 느린 경사가 흐른다. 또한 두께가 얇고, 네 귀퉁이에서 곡선을 그리듯 한껏 들려 있어 경쾌한 멋을 이끌어낸다.

지붕돌의 비례는 그리 아름답지 않으나, 넓다란 바닥돌 위에 세워 놓은 작은 규모의 탑으로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청석탑이 널리 유행하던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동화사 보조국사 진영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3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5
시 대 조선시대

연대가 미상이나 제작기법 등을 참작할떼 순치 년간으로 추정된다. 이 진영은 고졸하고 단아한 조선중기 초상화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 명작으로 평가된다.




동화사 수마제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16호
지 정 일 1986.12.05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6
시 대 조선시대

동화사는 493년 극달이 ‘유가사’라 하며 세웠고, 통일신라 흥덕왕 7년(832)에 왕사였던 심지가 고쳐 지으면서 ‘동화사’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지은 것으로 전하는 수마제전은 극락전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건물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천장이고, 건물 안쪽에는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중·후기 공포 양식의 소박한 기법과 짜임새를 잘 간직하고 있다. 


부도암 부도

종 목  문화재자료  제34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124-1
시 대 조선시대

부도암은 동화사에서 팔공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암자 동쪽으로 멀찍이 떨어진 산 기슭에 이 부도가 놓여 있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신을 화장한 후 나오는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인 이 부도는 현재 무너진 상태로 있는데, 3단을 이루는 기단과 탑몸돌,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서, 원형을 이루는 맨 아래와 윗부분에는 연꽃을 새겨 두고, 8각을 이루는 가운데에는 모서리마다 배흘림 모양의 기둥을 본떠 새겨 놓았다. 탑몸돌 역시 여덟 모서리가 기단에서 보이던 얕은 배흘림의 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을 뚜렷이 표현해 놓았고, 각 선이 미끄러지는 끄트머리에 덩쿨무늬를 한 꽃조각을 돌출되게 조각하였다.

8각을 이루는 모습의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에서부터 유행하던 것이나, 이 부도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록 꼭대기의 머리장식도 사라지고 무너져 있긴 하나, 각 부분들은 대체로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동화사 대웅전 삼장탱

종 목  문화재자료  제37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5
시 대 조선시대




동화사 죽암당대선사 선찰진영

종 목  문화재자료  제39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학동 35
시 대 조선시대



동화사에 있는 문화재
1.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2.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
3.동화사 당간지주
4.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
5.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 불좌상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동화사는 신라말인 934년 영조 靈照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보조 普照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홍진 弘眞국사에 의해 각각 중창 중건되었다.

보조국사는 호국불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동화사 중창에 크게 공헌하여 동화사와 염불암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또 고려 말기 대표적인 고승인 홍진 국사는 동화사를 하안소 下安所로 삼고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현재 해탈교 건너편에 국사를 기리는 부도가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 (1606) 유정 惟政사명대사, 숙종 3년(1677) 상숭 尙崇대사, 영조 8년(1732) 관허 冠虛, 운구 雲丘, 낙빈 洛濱, 청월 晴月 대사 등이 각각 중창 중건하였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상전, 봉서루, 심검당 등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조선조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다. 지난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표 율사로부터 영심 永深대사에게 전해진 팔간자를 심지 대사가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바로 동화사 첨당 籤堂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동화사 사적비 桐華寺 寺跡碑 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 15년(493) 극달極達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 심지心地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 하여 동화사 桐華寺 라 이름을 고쳤다고 전하고있읍니다,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이루어 졌는데 동화사는 신라말인 934년 영조 靈照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보조 普照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홍진 弘眞국사에 의해 각각 중창 중건되었다고도합니다,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동화사는 신라말인 934년 영조 靈照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보조 普照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홍진 弘眞국사에 의해 각각 중창 중건되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상전, 봉서루, 심검당 등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조선조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다. 지난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읍니다,

자가용 이용시
   • 출발→ 고속도로→ 팔공산IC→ 불로동(직진)→ 공산터널(직진)→백안삼거리(좌회전)→ 청소년수련원(직진)→ 동화사
대중교통 이용시
   • 동대구역→ 10분정도 도보이동→ 파티마병원→ 급행1번이용(45분소요)→ 동화사,
   • 서부정류장→ 지하철1호선(안심방향)→ 아양교역 하차→급행1번(35분소요)→동화사,
   • 북부정류장→ 시내버스이용 구)한일국장 도착→ 급행1번(1시간소요)→ 동화사,

2019년 12월 9일 월요일

심지대사,

심지대사,
심지왕사 스님




   속성 김(金).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의 아들. 15세에 출가, 승려가 되어 스승을 따라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공산(公山:현 대구광역시 팔공산)에 있다가 영심(永深)이 진표사(眞表師)의 계법(戒法)을 이어받고 속리산(俗離山)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을 때 석가를 받드는 그의 지극한 정성이 영심에게 인정되어 정계(正戒)를 받았다.
   영심이 그에게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봉행하라”며 간자(簡子)를 주었다. 간자를 받들고 공산에 돌아와 동화사(桐華寺)를 짓고 그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옛날 팔공산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표현이겠으나 오늘날에도 절은 많다. 산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기왓장이나 주춧돌이 어느 정도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심지계조(心地繼租)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 심지는 신라 제 41대 헌덕왕(憲德王, ?∼826, 신라 제41대왕. 재위 809∼826)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15세에 머리를 깍고 스승를 따라 불도에 부지런했다. 중악(中惡)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의 심공(深公)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를 전해받아서 과증법회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례를 허락 받지 못했다. 이에 땅에 앉아서 신도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칠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가 서 있는 사방 열 자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법당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심지는 거짓으로 병을 칭탁하여 들어가지 않고 예배를 했다
   마침내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니 이는 마치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선계산(仙溪山, 전북 변산반도에 있는 산)에서 수도하던 중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이 매일 와서 위로했다.
   법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 두 개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지고 돌아가서 심공에게 아뢰니, 영심(永心)이 말하기를 " 간자는 함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 하고 조사해 보니 함은 봉해 둔 대로 있는데 열고 보니 간자가 없었다. 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이 다시 돌아와 아뢰니 심공이 말하기를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 하고 간자를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엎드려 공순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불타의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 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던져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바람에 날아간다. 이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현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간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골라 장상 드리려네.
노래를 다 부르고, 간자를 숲속 샘에서 찾았다.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의 동화사 첨당(籤堂)이라고 한다.
   심지왕사 스님의 삼국유사에 있는 다른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이 그렇듯이 일종의 설화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좌우간 진표율사가 선계산 토굴에서 미륵불에게 손수 얻었다는 불골간자는 동화사에 전래된 것만은 동화사 사적기 등을 봐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심지가 영심으로부터 전수받아 팔공산 상봉에서 그것을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었다는 첨당(籤堂)이 곧 동화사의 원터가 되는데, 이를 두고 간송미술관장인 최완수(명찰순례 저자 ; 대원사)씨는 지금의 금당암 극락전 북쪽 수마제전 근처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최관장은 그 이유로 극락전 앞에서 팔공산을 바라보면 주봉이 극락전과 일직선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심지 스님의 입산 시기가 좀 복잡한 데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비록 15세에 중악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아버지 헌덕왕이나 심지의 출생연도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 14년(527)이나, 그보다 앞의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동화사를 창건하였다는 내용에 대하여는 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재창은 일설에는 혜공왕 2년(782)으로, 다른 기록 즉, 동화사 사적기에는 흥덕왕 7년(832)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시차가 있으나 심지의 생존 연대를 감안,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원래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로 부르다가 흥덕왕7년(832)에 심지왕사가 중창할 깨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오동나무 꽃이 피어 동화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팔간자를 봉안했기 때문에 공산이던 산 이름도 팔자를 더하여 팔공산으로 불렀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에 신라 왕자인 심지가 팔공산에 입산하여 불도를 닦으며 수도한 행적을 한번 더듬어 보자.
   일설에는 신라의 서울 경주를 벗어난 심지가 맨 처음 팔공산으로 들어온 것이 지금의 영천, 즉 대한불교 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 중암암(中岩庵)이라고 하나, 심지 스님이 직접 창건 또는 중창을 했다는 사찰과 암자에 대한 자료를 분석해 보니 중암암 입산설은 사실과 다름이 발견됐다.
   물론 이제 와서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또한 따져서 무슨 실익이 있으랴만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료라도 한번 정리해 볼까 하여 뽑아 본 결과는 표와 같다.
   이 자료를 보면 심지 스님의 팔공산 입산은 중암암이 아니고 파계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후 스님께서는 동화사를 중창하시고 중암암, 묘봉암, 환성사를 차례로 창건하신 것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창건 또는 중창한 절이 서로 가깝게 있는 것도 아니고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있을 뿐 아니라, 기계의 힘도 빌릴 수 없었을 당시 이 험한 팔공산을 어떻게 오르내리며 절을 지었을까 하는 의문인데, 스님들의 절 창건 또는 중건이라는 것이 직접 돌과 흙을 운반해서 짓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지휘, 감독한 사실도 창건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빠를 것으로 생각된다.


  심지왕사 스님의  또 다른 이야기

   신라 왕자였던 심지 스님은 영산인 이 팔공산에 들어와 서쪽에는 파계사, 북쪽에는 중암암, 묘봉암, 동쪽에는 환성사, 남쪽에는 동화사를 배치하여 오늘날 불교성지의 기틀을 닦으셨다.
   속세와 인연을 끊게 된 동기도 어쩌면 아버지인 헌덕왕이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데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동화문을 막 들어서 얼마를 가면 큰 절 못 미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으니 비로암이다. 이 암자 단아한 모습의 3층 석탑이 있고,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심지 스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각기 보물 제247호 제24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심지 스님을 파계사, 동화사에서는 왕사라고 하는데, 왕사 제도가 고려때부터 시행된 사실을 감안하면 표현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스님이 처음 입산했다는 중암암과 필자가 조사한 바 가장 먼저 창건한 절로 알려진 파계사에는 다 같이 경관이 수려할뿐더러 재미있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중암암은 벼랑에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기도 하지만 큰 자연석문을 지나서 자리잡고 잇기 때문에 일명 '돌구멍절'이라고 한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이 오동나무, 심지대사(心地大師)나무 ' 

삼지대사는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의 아들로서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불교에 정진하였으며, 팔공산에 있다가
영심스님(永深)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 받아 속리산에서 법회를 연다는 소식에 찾아가 영심스님에게 간자(簡子)를 받아왔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이 오동나무는 동화사 중창과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계사 등을 창건하여
팔공산을 불국토(佛國土)로 만들고자 한 대사(大師)를 기리기 위하여 '심지대사(心地大師)나무' 라 이름 지었다

관음전(좌) 중암난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대웅전 주련의
금강경 사구게)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꿈이요
환상이요 몰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동화사 대웅전(桐華寺 大雄殿)
초창연대는 알수 없고 신라시대 대 창건된 이후 오늘날까지 8번 중창되었는데 지금의 대웅전은
1727년(영조 3)에서 1732(영조 8)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둥과 기둥사이에 지붕을 받치는 여러개 포가 놓인 다포식 건축이며 내부 불단 위에 삼세불상인
석가모니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
축대 양쪽 아래는 한쌍의 괘불대와 노주과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위로 닫집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으며 특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대웅전 정면 문짝에 새겨진 꽃살문!
이는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다는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공하지 않은 아름드리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자연미와 함께 건물의 안정감도 살펴볼 수 있다 (보물 제1563호로 지정)

유래1
대구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명산인 팔공산은 신라 말기에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자
고려 태조 왕건은 정병 5천명을 거느리고 신라를 구원하려다가 도리어 이곳에서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하여 전세가 매우 불리해졌고.

이 때 왕건의 부하장수인 신숭겸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견훤의 군사와 싸우다 전사하였을 뿐 아니라
김락, 복지겸, 홍유인등 8명의 부하장수도 전사하였는데, 그 틈을 타서 왕건은 겨우 목숨을 보전케
되었다고 한다.
팔공산이라는 이름은 이들 8명이 순절한 곳이므로 붙여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유래2
통일신라 때 호국 성신으로 숭배되는 오악이란 산이 있었다
동쪽으로 (토함산 동악)     서쪽으로 (계룡산 서악)
남쪽으로 (지리산 남악)     북쪽으로 (태백산 북악)
신라의 중심 (팔공산 중악)
오악의 산은 통일 신라를 지켜주는 성신으로 숭배 되며서 그 한가운데 자리한 팔공산은  통일신라 성신의 중심 산이었다
신라 왕실 차원에서도 팔공산(중악)은 신라의 상징적인 산으로 관리가 되었고 발전이 되며서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팔공산 (중악) 전체가 마치 거대한 호국불교의 도량처가 되어 있었다 (삼국유사)

이후 통일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개국이 되고 이때부터 팔공산이라 불렀다는 몇가지 설이 전해 내려온다

1. 8 고을에 걸친 산이다
2. 8 성인이 득도한 산이다
3. 8 간지가  보관 되어 있었던 산이다
4. 8 공신이 전사한 산이다

첫번째 조선초기 이후 팔공산에 걸친 고을로  해안. 신령. 부계. 팔거. 하양 등이었고
두번째 설은 신라 원효대사 제자 8명이 천성산에서 팔공산으로 입산 수도하여 세사람은 삼성암 에서 다섯사람은 오도암에서 수도 끝에 8 성인으로 득도 했다는 설 세번째는 그당시 심지 대사가 속리산에 가서 진표 율사가 미륵 보살로부터 받은 8간지를 가져와  동화사에 보관 했다고 하여 팔공산이다고 불렀다는 설 등을 볼때 
이 세가지 설은 시기적으로도 맞지가 않고 객관적 소명이 부족하고 큰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마지막 네번째 설이 팔공산 으로 불린 가장 가까운 정설로  들려진다

후삼국 통일 전쟁때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공산 (지금의 지묘동) 전투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왕건이 포위가 되어 생사 기로에 놓이자 8장수들이 지혜를 모아 신숭겸이  왕건의 옷과 바꾸어 입고 8장수가 함게 적진으로 돌진 하자  변장한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견훤의 군사들이 신숭겸을 쫏자 반대편에서  퇴로가 열리고 그길로 왕건은  도주에 성공 하여 천신만고 끝에 개성에 돌아 간다 이후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고려를 개국하여 왕이 된다
왕건은 고려의 왕으로서 공산 전투장을 다시 찻는다 자신을 살리고 장렬히 전사한 8 장수를 고려개국  8공신으로 추앙하고 신숭겸이 순절한 자리에 무덤을 다시 만들고 지묘사라는 사찰을 세워 이들의 충절을 기리게 하였다(지묘동 신숭겸 유적 참조)
지금도 매년 가을에 지묘동 신숭겸 무덤과 유적지에서 신숭겸 장군을 추모하는 고려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왕건이 공산전투서 살아남아 도주길의 지역명 야사들이 생생히 전해 내려온다
공산전투장에서 8장수들이 지혜를 모아 퇴로를 열었다고 하여 지혜를 모은 그 전투장을 지묘동으로 불렀고 퇴로가 열려 가장 먼저 피신 한곳이 지금의 파군재 삼거리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동상 뒷쪽에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로 처음 피신하여 왕이 살았다고 하여 왕산이다
왕산에서 파군재 삼거리로 내려와 단숨에 한동네에 도착하니 노인들은 다 전쟁터에  동원이 되어 없었고 어린 아이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어 불로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로동을 지나  또 한동네에 접어 들어 이제 겨우 위험을 피해 찌프린 얼굴을 활짝 폈다고 하여 해안동이라 불렀고 다시 평강동 쪽으로 도주하다 큰바위가 있어 그 바위위에 잠시 혼자 쉬워 갔다고하여 바위 이름을 독좌암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다시 평강동을 거쳐 초례봉을 넘어서 한마을로 접어 더는데 날은 어두운데 중천에 떠있는 달이  도주의 길을 비쳤다고 하여 그 고을을 반야월 이라고 불렀고 여기서 다시 밝은 달빛 아래로 도주하여  도착한 고을에서야  이제 겨우 살았다고 안심을 하였다고 하여 안심이라는 지역등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불리며서 야사로 전해져 내려오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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