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陜川 海印寺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안리 가야산에 위치한 해인사(海印寺)의 창건 유래 전설.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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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원래 존재했던 가야산 해인사의 창건 유래는 구전되면서 그 생명력을 잃고, 해인사의 대장경판 조성담이 해인사 창건담으로 대체되어 구전되고 있다.
"신라 합천에 사는 이거인(李居仁)은 성품 좋은 이서(里胥)로 눈이 셋 달린 강아지[三目狗]를 주워 애지중지 키운다. 기른 지 3년째 되던 해 가을 삼목구가 갑자기 죽어 장례를 잘 치러 준다. 다시 2년 후 이거인은 갑자기 병이 들어 죽는다. 이거인은 저승에서 삼목귀왕(三目鬼王)을 만나는데, 삼목귀왕은 자신이 예전에 잘못을 저질러 3년 동안 이승의 축생계로 쫓겨났던 삼목구라고 한다.
삼목귀왕은 이거인에게 염라대왕을 만나거든 인간 세상에서 대장경을 조성하려 했지만 목숨이 다하여 이루지 못했다고 하라 한다. 이거인이 그 말을 따름으로써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와 보니, 실은 한바탕 꿈이었다. 꿈을 깬 이거인은 삼목귀왕이 시킨 대로 공덕문을 짓고 관인(官印)을 받아 기다렸다. 이듬해 신라의 공주 자매가 마마에 걸렸는데, 대장경 화주가 와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 임금의 명령에 따라 입궁한 이거인은 대단월(大壇越)로 대장경을 조성하여 그것을 해인사로 옮겼고, 공주들의 몸에 들었던 삼목귀왕이 떠나자 공주들의 병도 나았다. 이후 이거인 부부는 극락왕생했다.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그 밖에 주요 문화재로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도 있다.
불가에서는 부처님[佛], 경전[法], 스님[僧]을 세 가지 보물[三寶]이라 하고,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통도사를 불보(佛寶)사찰, 고려조 16대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僧寶)사찰, 그리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海印寺)를 법보(法寶)사찰이라 부른다. 그러나 원래부터 해인사에 팔만대장경판이 모셔진 것은 아니었다. 대장경판은 원래 경남 남해에서 새기고, 강화도에 옮겨져 선원사(禪源寺)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조선 태조 7년(1398)에 해인사로 옮겨왔다.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어 많은 학인(學人)들로 붐빈다. 말사(末寺)는 150여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藥水庵)·원당암 등이 있다.
해인사의 창건 연기(緣起)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900)로 중국에서 석덕[神琳]을 사사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해인사를 세웠다고 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설화 창작으로 이어진다.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943)에는 순응과 이정이 양나라 보지공(寶誌公)의 법을 전해 받고 돌아와 해인사를 창건했다고 했다.
왕후가 등창이 나 두 스님이 준 오색실로 병을 낫게 하는 모티프가 있는데, 이는 위 이야기와 유사하다. 그런데 1662년(현종 3)과 1874년(고종 11)에 쓰인 『가야산해인사고적』이나 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동국승니록(東國僧尼錄)』에는 이거인을 주인공으로 한 해인사 장경 연기를 더욱 흥미롭게 전하고 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실린 <해인사의 유래>라는 설화는 염라왕의 ‘해인(海印)’이라는 도장을 받아온 이 진사가 용의 득천을 돕고 해인사를 세운 것으로 변이되었다. 대장경이 판각된 인연을 담은 문헌 설화가 구전되면서 해인사 연기설화로 변이된 결과라 하겠다.
해인사가 자리하고 있는 가야산은 신라시대부터 국가적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악으로 정견모주(正見母主)를 산신(山神)으로 모셨고, 신라 말의 염세적 천재 최치원(崔致遠, 857∼?)이 이 산으로 들어와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현재 해인사 진입부에 국사단(國師壇)이라는 건물이 서 있는데, 가람을 수호하는 토지신을 모신 곳이다. 이는 가야산이 산악신앙, 지신신앙, 풍류도 등 토착신앙의 성지임을 알려주는 흔적들이다. 반면 가야산의 이름은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이룬 인도의 부다가야(Buddha Gaya)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대에 들어온 불교가 토착신앙들을 아울렀던 역사적 궤적을 보여준다.
해인사는 802년 의상의 증손뻘 제자인 순응(順應)에 의해 창건되어, 의상계 화엄종의 중요 사찰인 화엄십찰이 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 편에 섰던 '북악파'의 핵심으로, 930년 왕건의 복전(福田)이었던 희랑(希朗)대사가 크게 중창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조선 초 팔만대장경을 옮겨온 후 1488년 대적광전과 장경판전, 종루, 불이문(不二門)과 26동의 요사(寮舍)채 등을 중건함으로써 현재와 유사한 모습을 갖추었다.
가람 전체는 크게 3단으로 나뉘는데, 아랫단은 일주문(一柱門)-봉황문(鳳凰門)-불이문이 연달아 배열된 진입부이다.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경사진 한 줄기 길의 양 옆에 의도적으로 심은 키 큰 소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벽을 이루고 그 끝에는 봉황문이 위치한다. 봉황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국사단이 있고, 그 왼쪽 위로 불이문(해탈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중첩된다. 3개의 문과 그 사이 공간들은 매우 흡인력 있게 구성되어 최고의 진입공간을 이룬다.
중간단은 구광루(九光樓)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승방들이 배치된 구역이다. 강당인 구광루는 정면 7칸의 긴 건물로, 예전에는 아래층의 동쪽 두 번째 칸을 통해 중심 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중심 마당에는 육중한 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석탑은 마당의 정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구광루 밑을 통과하면 마당의 동쪽 모서리에 서게 되는데, 이때 동쪽으로 치우친 석탑이 오히려 대적광전의 중앙에 놓인 듯 보인다. 그러나 1990년대 중창불사 때 구광루의 누하 출입을 막아버렸고, 구광루의 기단과 건물의 격식이 변화되어 이처럼 치밀한 공간 계획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화엄종 최고의 부처는 비로자나불이고, 비로자나불을 모신 주불전을 대적광전이라고 부른다. 해인사 대적광전은 원래 2층 전각이었으나 1917년 단층으로 재건하였다. 때문에 내부에 모신 거대한 불상에 비해 천장이 낮아 공간이 답답해 보인다. 대적광전 서쪽으로는 나한전 등 보살전들이 산재하여 예불공간을 이룬다.
가장 뒤편의 높은 단은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영역이다. 정면 15칸의 긴 건물들이 남쪽과 북쪽에 나란히 놓이고, 그 사이의 동쪽과 서쪽에 정면 2칸의 작은 건물들이 세워져 일곽을 이룬다. 남쪽 창고를 수다라장이라고 하고, 북쪽 건물을 법보전(法寶殿)이라 부르는데 이 두 건물에는 팔만대장경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동서쪽 작은 창고에는 해인사에서 자체 제작한 판본들을 보관하고 있다.
경판전은 보물 중의 보물인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이기 때문에 통풍과 환기가 가장 중요하다. 환기창의 모양과 크기를 각 면마다 달리한 까닭도 내부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고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내부 바닥은 흙바닥 아래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섞어 다져 습도를 조절하고 해충을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동·서 판고 건물은 아예 벽면 전체를 살창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경판들을 오랜 세월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실제 실내 환경을 측정한 결과, 내부 온도는 외부에 비해 0.5∼2도 정도 낮게 유지되며, 습도 역시 5~10% 정도 낮게 유지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경판전은 경판들을 보관하는 내부 판가들을 건물 구조체와 일체화하는 방법을 취해 구조적 안전도 꾀하고 있다.
해인사 연기설화(緣起說話)는 사찰 창건과 고려대장경 판각이라는 두 가지 설화가 문헌과 구비를 넘나들며 전해진 것이다. 이 가운데 해인사의 대장경이 판각된 이야기 관련 설화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삼목구와 ‘이거인’이라는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우면서 명부와 인간계 어디나 팔만대장경이 담은 불법의 가없는 법력이 미친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해인사 연기설화는 엄격하게 따진다면 해인사 장경 연기설화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리고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실린 작품은 명부와 이승을 오가는 환상적, 전기적 성격의 서사 전개와 불교적 의미화를 적절하게 수행하면서 소설적 면모까지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전경:
1) 합천 해인사 중정. 중앙의 삼층석탑과 석등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요사, 우측에는 구광루가 자리하고 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9세기 초창, 석탑과 석등을 제외한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중창.
2)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대적광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3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에 있는 절. 보물 제1300호. 해인사의 산내암자로서 창건연대 및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으나,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홍제암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와 부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의 서편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1610년(광해군 2)에 입적하자, 광해군이 비를 세우게 했다고 한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의 탑. 보물 제1301호.
참조항목,
가야면, 가야산국립공원, 가야산 해인사 일원, 청곡사, 희랑,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해인사 대장경판,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영산회상도, 해인사 석등, 해인사 삼층석탑(정중탑), 해인사 사명대사 승탑 및 석장비, 해인사 홍제암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doopedia.co.kr
[출처 : 관조스님]
[합천 해인사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건축, 2004...,)
[한국의 미 산책 ]
[대한민국 구석구석]
[게티이미지 코리아]
[대한민국 여행사전]
[사찰문헌설화에 나타난 소설담론성 연구(어문연구43, 어문연구학회, 2003년)
[東國僧尼錄
[가야산해인사지(지관,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2)
[한국 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1-1,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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