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7일 월요일

대마도, 한국 땅,

대마도, 한국 땅,

고려 창왕 1년(1389) 2월, 전선 100척이 박위의 지휘하에 대마도로 출정했다. 박위는 공민왕 때 왕을 호위하는 숙위병인 '우다치'에 임명된 후 김해부사, 상주부사, 영흥부사, 진주목사, 계림 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상주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했고, 김해부사로 재임했을 때 황산강(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당도한 왜선 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으로 전멸시켰다. 그후 창왕 즉위년(1388) 요동정벌 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가담해 회군공신에 올랐다.

대마도에 당도한 박위는 왜구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고려 백성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한 뒤 고려에 무사히 귀환했다. 이에 창왕은 박위를 칭송하는 교서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여러 해 동안 태평하여 군비가 차츰 해이해졌다. 그러므로 섬에 사는 왜적들이 함부로 노략질을 한지 이미 40여 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3면의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으나 국가는 다만 수세만 취하고 장수들은 아직도 가서 칠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대는 용기를 분발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험한 바다를 건너가 다년간 자라오던 화근을 전복하고 건물과 함선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포로되었던 우리 백성들을 고향에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로써 국가의 수치를 씻었으며 이로써 신민의 원수를 갚았도다. 

승전 보고가 처음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진실로 기뻤다. 이제 문하평리(門下評理) 서균형(徐鈞衡)을 보내 그대에게 의복, 안마(鞍馬), 은덩이 등 물건을 주노라.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위는 다만 집과 배를 불살랐을 뿐이고 실상 포로를 찾아온 일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원된 병력의 규모가 나와 있지 않고 자세한 전투 경과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1차 대마도 원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며, 박위가 백성 100여 인을 구출한 게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적선 3백 척과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을 볼 때 왜구의 피해가 컸음은 분명하다. 

거제도에서 본 대마도,

일본 후쿠오카 까지는 138Km이지만 부산까지는 49.5Km의 거리에 있어 맑은 날은 대마도 (쓰시마)의 서해안에서 한국의 산과 거리를 볼 수 있다,

  대마도 우리 땅.  독도가지고 버티는 것은 대마도를 빼앗길가 봐 전전긍긍하는 일본의 수작.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무식한 미국 실무자들 때문에 대마도가 일본 지배로 들어갔다.  이래저래 한국은 미국 때문에 피해가 많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친일파 정군들이  일본에게  침묵한 결과가  대마도를  내 준 것이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사용하던 지도,



  대마도, 독도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

 지도 한가운데 한일 사이에 노랗게 떠 있는 섬이 대마도인데, 조선땅으로 표기돼 있다.  


미국도 인정한 지도. 대마도는 한국땅.



대마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한 1734년 프랑스제작 지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고미술·지도 전시회에서 1864년 발행된 아시아 지도를 사게 됐다.

지도 하단에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현지 정찰과 측량으로 작성했다. 일본과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 의회의 지시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했다'고 나온다.

이 지도에는 대한해협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 남단에 있었다.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대마도는 우리 땅과 똑같이 무색이었다. 그게 첫 단서였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 어떤 섬이 소속됐는지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은가?

"페리 함대는 앞서 말한 '오가사와라'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을 했던 당사자다. 그때 일본이 하야시의 프랑스어판 지도를 제시해 협상에서 이겼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한 지도였다. 그러니 대마도가 어느 영토에 속하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지도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유추???

"1855년 영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일본 각 지방을 구역별로 번호를 매겨놓았다. 그 지도의 하단에 '대마도와 이끼섬은 일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1945년 국내에서 발행된 '조선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해놓았다."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미국 등 전승국 간에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체결했다. 이 문안에 '독도'와 '대마도'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도 날아갔던 셈이다.

"우리는 '전승국' 신분이 아니어서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6·25전쟁 중이었다. 외교적 제약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를 염두에 두고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고 했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일본 에도시대 대학자 하야시 시헤이(1738~93)이 1785년에 지은 삼국통람도설은 조선, 오키나와, 북해도 3국에 대한 정치지리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지도중 주목할 부분은, 삼국접양지도와 조선팔도지도이다.


김일성 때문에 찾지 못한 대마도. 멍청한 김일성.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사흘 뒤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에 일본 총리가 일왕(日王)에게 '한국인이 실제 2000명쯤 거주하고 있다'는 대마도 상황까지 보고했다. 하지만 여섯 달 뒤 6·25가 발발했다.


일단 이번에 발견된 고지도부터 살펴보자. 2018년 8월 24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한일관계사 전문가인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2월11일 일본의 지도 학자 구보이 노리오 교수를 통해 고지도를 입수했다.

이 지도는 영국에서 활동하던 이태리인 지리학자 J.H.Kernot이 1790년 탐험에 나서면서  작성했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32, 세로 24센치로 소형 판본이며, 채식인쇄 기법을 사용했다. 지도 상단 중앙에 일본 수도 YEDO, 좌측 하단에 조선의 관리로 보이는 3명이 COREANS, 우측 하단에 거북선으로 보이는 STATE BARGE 라고 적힌 3장 삽화를 첨삭한 것이 특징이다.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 뿐만 아니라 대마도가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위 지도의 빨간색 원안에 표시된 곳이 대마도인데, 한국 해협 안에 포함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독도와 울릉도, 대마도는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색깔로 분류했는데, 모두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이 지도에는 독도를 일본식 발음인 ‘Dagelet(다제레트)’, 울릉도는 ‘Argonaut(아르고노우트)’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즉 J.H.Kernot가 이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것이 일본 자료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소장은 “당시 일본인들도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적잖이 발견됐다. 대마도는 일본 고지도나 고문서에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했던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에 발견된 지도는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에 의미가 있다. 또 세계인들도 오래전부터 대마도는 한국 땅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마도 고지도에 숨겨진 비밀, 그것은 바로 ‘대마도는 반드시 찾아와야 할 대한민국 영토’라는 것이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정치가.)이 조선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전도' 에는 독도와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표기하여 '일본 영토' 가 아닌 '침략 대상' 으로 명시하고 있다.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소속된 대마도(일본명 쓰시마). 그런데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의, 일본인이 작성한 고지도가 21년 전인 1996년 발견됐습니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이 나던 1592년 우리나라를 침략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신하들에게 명령해 만든 것으로 독도와 함께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명기돼 있습니다.

신라 때부터 우리 영토였던 것으로 알려진 대마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일본에 편입됐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인데요. 독도와 관련해 계속되는 일본의 망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려진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나오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무엇이  두려운지,  한국 사람들을 경계한다.   양심이  두려운거지,


대마도가 옛날 우리 고려의 땅 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문헌뿐 아니라 일본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일본 불교의 천태종 승려 현진(懸眞, 겡싱)의 저서 《사가묘략기》에 ‘대마도는 고려의 목(牧)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를 정벌할 때 병조판서 조 말생이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현 경주)에 예속되었으며 우리 땅이라는 문적(기록)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대마도는 고려에서 만호(萬戶)라는 지방관을 파견, 다스렸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사부 영정,

일본은 독도문제를 거론할 때 ‘대동여지도’를 들먹이지 않는다. 왜냐면 독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다가는 도리어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우산국(우산도와 울릉도)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계획을 세워 편입한 영토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은 여진족이며 우해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무 상자를 싣고 가 위협으로 굴복시켜 편입시키고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일대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주어야 할 땅이다. 실효적 지배보다는 역사적인 지배 상태다. 이에 비해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지만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 


부산에서 49.5㎞, 히타카쓰항까지 배 타는 시간은 1시간10분이다.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길이 약 82㎞, 폭 약 18㎞에 면적은 거제도 1.7배 크기인 섬이다.

제주보다 가까운 섬 대마도,

1)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와 조선말까지 대마도는 한국의 경상도 계림(신라)의 부속 도서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이었다.

2) 대마도 원주민들의 혈액 DNA가 한국인과는 100% 동일하여도 일본인들과는 30%가 같지 않다.

3) 대마도를 지배 했던 소씨(蘇)는 진주가 본관인 한국 성씨이다.

4) 삼국시대에는 진도라는 우리의 영토로 불리었다.

5) 신라 때 볼모로 잡혀갔던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된 신라 국사 박제상 공의 순국비가 있다.

6) 고려 창왕(1389년) 때 박위 장군의 지휘로 왜구의 소굴로 변한 대마도를 완전히 소탕하고 대마도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고려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7) 그 후 조선 태조(1396년) 2차 정벌, 세종(1419년) 이종무 장군의 3차 정벌 후 대마도 도주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서약서도 있다.

8)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해 만든 지도(팔도전도, 1592년이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9)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 나선 군사들에게 내린 하교문, 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과 조선과 대마도를 부자관계로 비유한 퇴계 이황 선생, 순암 안정복 선생의 동사외전, 동사강목, 정약용의 비어고에도 한국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조선 왕조 500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11) 1750년 영조 때 해동지도의 대동총도의 설명문,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는 문구나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울릉도, 독도,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고 1855년 영국지도, 1865년 미국 지도 등 국내의 많은 역사 기록문에 명백히 표기되어 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하라! 대마도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무력 강점했지만 의병들이 격퇴한 전적비가 남아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촉구한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아래 표시된 부분은 하루빨리 우리가 복원해야하는, 조상이 물려준 우리의 영토이다.

대마도는 한국땅,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좋은 정보입니다.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 영토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과거 양국 간의 교류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습니다.

다만 대마도는 현재 일본의 영토입니다. 하지만 최근 이 섬이 한국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19년 12월 8일 일본의 유명 언론 매체 산케이 신문에서 보도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현재 한국인들이 대마도에 수많은 땅들을 매입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도하며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표현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고령화와 과소화가 진행되는 대마도에서 

일본인이 없어지고 틀림없이 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대마도 땅 매입 소식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른바 한국의 큰 손들이 대마도의 많은 영도를 사들여서 호텔과 민박 등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부동산 열풍이 부는 이유는 대마도가 관광지로서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지기 전인 2018년 대마도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무려 40만 명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접근하기 쉬운 지리적 위치와 일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많이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마도에 대해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근거가 존재했습니다.

1592년 일본인이 제작한 조선 팔도총도에 대마도는 경상도에 속한 섬으로 그려졌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1830년에도 일본이 만든 조선국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기에 이 섬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 좋은 정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한 대한민국 땅 독도입니다.


한일 감정으로... 문제는 세계에서 보는 시각이 한국으로 그간 식민지 생활, 그들의 만행으로 잘못됨은 바로 잡히고 반전 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수수방관 하에 적당한 대응으로 잠자는 사자 건드려 봐야 이로워질게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무엇이 두려운가요?

내조국 내가 지킨다고 발언하는대 어느 국민이 머라하겠소 ! ??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능사는 아닐듯...?

이권 그만 챙기고 나라 위한 발언 한번 해보세요 ....정치인님 ????

일본 측과 대화도 간단합니다 ?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한다면?
  대마도도 일본도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한국땅,  

대마도 [大馬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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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6일 일요일

''한국, 라면 ·김치,' 날개 달았다,

 

''한국, 라면 ·김치,' 날개 달았다,

코로나 속 김치·라면 주도로 농식품 8월 누적 수출, 지구촌 라면 열풍에…


라면,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요?

중국인들이 먹던 납면(拉麵)으로부터 라면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중국의 란저우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즐겨먹던 국수 중 하나였던 ‘납면’은 중국어로 [라미엔]이라고 발음됩니다.


일본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0년대 중국사람들이 일본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납면을 노점판매하면서 일본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라멘’이 초기에는 중화요리로 구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라멘’은 지금의 인스턴트 라면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먹는 라면의 형태는 일본 닛신식품이 1958년 8월25일 '치킨라면(チキンラㅡメン)'을 대량생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라면, 어떻게 ?

지금의 인스턴트 라면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닛신식품을 설립한 안도 모모후쿠입니다.


그는 한 선술집에서 뜨거운 기름에 반죽을 입힌 어묵이 튀겨질 때 밀가루 속의 수분이 급속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라면의 원리를 생각해 냈다고 합니다. ‘국수를 튀긴 후 건조시키면 오래 보관할 수 있고, 그걸 다시 뜨거운 물에 넣으면 원래 상태로 풀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라면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이 건면을 튀겨서 휴대하고 다녔는데 이러한 점을 미리 알고 라면을 개발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초기 라면의 진화,

1958년 「라면 탄생」

1958년 닛신식품의 “치킨라면”이 최초로 출시되었습니다. 현재처럼 스프가 따로있지 않고 면 자체에 양념이 반죽되어 있는 형태였습니다.

 

1961년 「분말스프 개발」

1961년 일본 명성식품은 양념을 건조•분말화하여 현재와 같이 별도 포장한 스프 형태로 라면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건더기 스프가 대중화 되면서 라면의 맛과 품질이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62년 「건면 출시」

1960년대, 일본 각 제조사에서는 기름에 튀기지 않고 열풍으로 건조시킨 건면을 개발했습니다. 건면의 등장으로 건조기술이 발전하고 건면에 어울리는 액상스프, 포장재와 설비 개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1971년 「용기면의 등장」

뜨거운 물을 부어 먹을 수 있는 「용기면」이 개발되었습니다. 닛신식품의 안도모모후쿠 사장이 회의석상에서 미국 바이어가 종이컵에 라면을 부수어 포크로 먹던 모습에서 착안하였다고 합니다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라면! 라면의 세계화!

라면은 현재 일본과 한국, 중국 이외에도 말레이시아, 인도, 호주,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미국, 영국 등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식품이 되었습니다.


세계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라면을 소비하는 나라는 중국으로 연간 462억 개의 라면을 먹는다고 합니다.


중국 다음으로 인도네시아, 일본, 베트남, 인도,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는 35억 개로 6위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1인당 라면 연간 소비량은 73개로 수십 년간 독보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 100여개국 이상에 라면을 수출하는 라면 강국으로 전세계 어디에서도 한국의 라면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 라면의 브랜드 인지도는 90% 이상이고, 러시아에서는 88올림픽 이후 한국의 용기 라면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심지어 라면 종주국인 일본에서도 신라면과 같은 한국의 라면이 인기를 얻고 있을 정도입니다.

 

전 세계가 '집콕' 하니???!

올들어 코로나로 수출 부진이 심각한 상황이지만 아이스크림이나 라면 같은 식품들은, 날개 돋친듯이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거리 두기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 식품을 많이 사먹은 영향 인데요.


올들어 사상 최대 수출 기록 까지 갈아 치우고 있습니다.


유튜브에는 한국 식품을 소개하는 영상이 넘쳐납니다.


라면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국수를 증기로 익히고 기름에 튀겨서 말린 즉석식품. 가루수프를 따로 넣는다,.

먼저,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멜론이나 수박맛 아이스크림.


"Oh yeah, oh yeah, This is so good."


물고기 모양 아이스크림을 처음 맛 본 외국인은 한국 사람과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꼬리부터 먹을래요." "저는 입부터…"


독창적인 소재나 모양에 부드러운 맛이 특징인 한국 아이스크림은 외국인들 입맛도 사로잡아, 올해 수출액은 4천 7백만 달러.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 넘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가장 잘 팔렸는데, 올들어 8월까지 수출액이 지난 한해 전체 수출액보다 29%나 많았습니다.


[강연호/관세청 통관기획과장] "북미지역에서 BTS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 문화의 확산, 그리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이동제한이 확대되면서, 아이스크림 등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양식품 삼양라면 120g

 

삼양식품 매운맛 삼양라면 120g

 

한국의 각종 라면들,

라면 역시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습니다.


올들어 8월까지 수출액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36% 증가한 4억 5백만 달러.


전체 식품군 가운데 수출 1위 품목인 라면은, 아예 해외 현지법인을 세워 직접 판매도 하는데, 한 기업의 올해 해외법인 판매액은 수출액의 3배에 달했습니다.


[천재하/라면업체 과장] "연초 짜파구리 열풍에 이어서 코로나19로 '집콕'이 늘어나면서 올해 상반기 전년 대비 30%가 증가한 사상 최대 해외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미국 등에서도 집밥을 많이 해먹으면서 김치 수출도 40% 늘었고, 된장·고추장 같은 소스류 수출도 24%나 증가했습니다.


"한국 문화가 인지도가 높아지고, 한국 식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고요. 처음 입맛을 들이기가 힘들지, 이제 문이 열려버리면 수요는 계속적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풀무원이 미국 진출 23년 만에 처음 흑자를 냈고, 해외 판매 비중이 높은 오리온도 최대 실적을 달성하는 등, 코로나로 인한 수출 부진 속에서도 한국식품 'K-푸드'는 약진하고 있습니다. 


한 대형마트의 라면 판매대,

코로나 속 김치·라면 주도로 농식품 8월 누적 수출, 지구촌 라면 열풍에…8월 누계 농식품 수출액 49억달러,

1~8월 농식품 수출액 48억4567만달러…전년 동기비 4.9% 증가,

라면 수출만 4억500만달러…김치·고추장·삼계탕도 해외서 인기농림축산식품부는 8월말 누계 기준 농식품 수출액(잠정)이 전년 동기 대비 4.9% 증가한 48억4567만달러(약 5조7600억원)를 기록했다고 3일 밝혔다.


우리나라 수출이 부진한 상황에서도 김치와 라면 판매가 늘면서 농식품 수출은 지난해보다 5% 가까이 늘어났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8월까지 누적 농식품 수출액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4.9% 증가한 48억4567만달러 잠정 집계됐다고 3일 밝혔다.

김치는 지난해 동기보다 40.3% 증가한 9800만달러를 수출했다. 미국과 호주로의 수출이 각각 69.1%와 76.4% 뛰었고 일본 수출도 29.3% 증가했다.

코로나19로 건강·발효 식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순식물성 재료로만 만든 '비건 김치' 등을 통해 새로운 수요층을 공략하면서 수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라면 수출액은 36.7% 증가한 4억500만달러를 기록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오래 보관할 수 있고 가정 내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인기를 끌면서 미국·일본·중국 등 주요국으로 수출이 늘었다. 라면 수출은 전체 농식품 수출액의 8.4%에 달했다.

가정에서 요리에서 쓰이는 고추장 등 장류와 즉석밥, 떡볶이 등이 해외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소스류·쌀가공식품의 수출도 호조세를 보였다.

고추장 수출액은 3320만달러로 지난해보다 35.6%, 쌀가공식품 수출액은 8500만달러로 21.7% 증가했다.

닭고기는 홍콩·미국에서 여름철 보양식품으로 간편식 삼계탕이 잘 팔렸고 베트남에서는 닭가슴살이 인기를 끌어 수출액이 5000만달러를 넘어섰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연말까지는 하반기 출하가 집중되는 포도·배·딸기·파프리카 등 과실·과채류 신선농산물 수출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농식품부는 올해 1~8월 농식품 수출액을 집계한 결과 이 같이 나타났다며, 품목별로 김치(9790만달러, 40.3%↑), 라면(4억540만달러, 36.7%↑), 소스류(2억90만달러, 23.5%↑), 닭고기(5020만달러, 24.2%↑), 쌀가공식품(8500만달러, 21.7%↑) 등의 수출이 크게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김치는 코로나19로 인해 건강·발효 식품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전년 동기대비 40.3% 증가한 9800만달러를 수출했다.

라면은 장기보관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토대로 가정 내 간편식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미국·일본·중국 등에서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수출액은 전년 동기대비 36.7% 증가한 4억500만달러다. 이는 전체 수출액(48억4567만달러)의 8.4%에 해당한다. 농식품부는 "라면은 올해 들어 수출 증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침체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가별 전략 품목을 선정하고 비대면·온라인 마케팅을 적극 추진하여 김치(40.3%↑), 라면(36.7↑), 소스류(23.5↑), 닭고기(24.2↑), 쌀가공식품(21.7↑) 등의 수출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김치는 코로나19로 인해 건강·발효 식품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비건 김치 등 새로운 수요층을 적극 공략하여 전년 동기대비 40.3% 증가한 980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하였다.


라면은 장기보관 및 가정 내 간편식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미국·일본·중국 등 주요 수출대상국에서 큰 폭으로 증가하여 전년 동기대비 36.7% 증가한 4억 5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말레이시아 신세계푸드.>

이는 전체 수출액 48억 4570만 달러의 8.4%에 해당하는 것으로 올해 수출 증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스류·쌀가공식품의 성장도 눈에 띄는데 가정에서 요리에 활용되는 고추장 등 장류의 소비 증가, 즉석밥과 떡볶이의 인기가 수출 증가로 이어졌다.

닭고기는 계절적 수요로 홍콩·미국에서 보양 식품으로 간편식 삼계탕과 베트남에서 닭가슴살 등의 인기에 힘입어 5천만 달러 어치를 수출하였다.


아울러 소스류·쌀 가공식품 역시 즉석밥, 떡볶이는 물론 가정에서 요리에 활용되는 고추장 등 장류의 인기가 오르면서 수출액이 증가했다. 닭고기는 홍콩·미국에서 간편식 삼계탕 수요가 증가했으며 베트남에서 닭가슴살 인기가 오르면서 5000만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김종구 농식품부 식품산업정책관은 "국가별 전략 품목을 선정하고, 민간과 정부가 협력해 온라인 비대면 사업을 적극 추진한 결과 농식품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면서,,,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운 수출 여건 속에서도 농식품 수출이 호조를 보이는 것은 국가별 전략 품목을 선정하고 민간과 정부가 협력하여 온라인 비대면 사업을 적극 추진한 결과로 판단된다"며 "연말까지는 하반기에 출하가 집중되는 포도·배·딸기·파프리카 등 과실·과채류 신선농산물에 대한 수출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수출 여건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치와 라면 수출이 크게 늘면서 농식품 수출 증가세를 견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들어 지난달까지 농식품 수출액은 48억 4567만 달러로 전년 동기대비 4.9% 증가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라면 ???

인스턴트 라면, 호평을 받다/ 한국인의 1인당 라면 소비량, 세계 1위/ 2009년 우리나라, 라면 종주국이 되다/ 한ㆍ중ㆍ일, 라면의 시초를 두고 논쟁하다/ 1870년 일본에 라멘으로 알려지게 된 배경/ 라멘, 일본의 전통 음식이 아니다/ 라멘에서 인스턴트 라면으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 일본 라면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 안도 모모후쿠/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 닛싱 치킨 라멘/ 1971년 ‘컵 누들’이라는 최초의 컵라면 개발/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전중윤 회장, 인스턴트 라면으로 식량 자급 문제를 해결하겠다/ 삼양라면, 1980년대에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한국식 라면이 만들어진 계기/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라면 -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사물의 민낯, 2012. 4.., 갈릴레오 S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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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happyday-2100.tistory.com/725 [살맛 나는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