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0일 목요일

망부석 (望夫石)

망부석 (望夫石)  

절개 굳은 아내가 집을 떠난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 죽어서 되었다는 전설적인 돌,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명사
절개 굳은 아내가 집을 떠난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 죽어서 되었다는 전설적인 돌. 특히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치술령(鵄述嶺)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그대로 굳어져 된 바위가 유명하다.

망부석 설화 (望夫石 說話),
1, 옛날 옛적의 어느 어느 하루였다. 천궁의 천왕은 일가친척들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내려와 산천경개를 구경하였다. 점심때가 되자 지상의 지신은 풍성한 연회를 베풀고 천궁의 귀빈들을 모시였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간 후 지신은 공주를 불러다 술을 따르라고 분부하였다. 공주가 연회석에 나타나자 갑자기 더 환해진 듯하였다. 그가 얼마나 고운지 천궁의 선녀들도 무색하게 되었다.

천궁의 왕자는 지신의 딸을 보자마자 한눈에 정이 들었다. 공주의 자색에 매혹된 왕자는 은근히 공주만 주시하다보니 연회가 끝날 때까지 술도 몇 잔 들지 못하였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천궁의 귀빈들은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천왕이 먼저 용거()를 불러다가 타고 하늘로 오르자 그의 뒤를 따라 구름도 타고 무지개도 타고 바람도 잡아타면서 천궁의 귀빈들은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천궁으로 돌아간 왕자는 자나깨나 공주를 잊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자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천궁 밖에 나가서 백두산을 내려다보면서 얼없이 서있곤 하였다.

그러던 왕자는 천왕의 눈을 피해 가만히 백두산으로 내려왔다. 그가 백두산에 내려와 점심을 먹던 곳을 찾으니 웅장한 새 궁전이 우뚝 솟아있었다. 그사이에 지신은 천왕의 방문을 기념하여 연회를 베풀었던 자리에다 새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궁전 뜨락에서는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꽃차를 둘러싸고 춤을 추며 노래부르고 있었다. 한참 지나서였다. 공주는 꽃차에 홀로 올라가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고 시녀들은 손을 잡고 꽃차 주위를 빙빙 돌면서 노래를 불렀다. 공주가 휘젓는 팔은 백학이 나래치는 듯, 하느적거리는 허리는 봄바람을 맞은 실버들인 듯, 웃음을 머금은 얼굴은 이슬을 굴리는 함박꽃이런 듯...

넋을 잃고 바라보던 왕자는 바람신을 시켜서 공주와 꽃수레를 몽땅 소나무숲속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차에 앉은대로 소나무숲속으로 오게 된 공주는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서 서있었다. "공주께선 놀라지 마시고 머리를 들고 대상을 보시라." 낯선 사나이의 목소리인지라 공주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두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처들지 못하였다. "공주님, 어이하여 이 왕자를 잊었나이까. 한번 만나본 후 그대 생각이 절절하여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왔나이다. 오늘 무례하게 여기로 모셔왔으니 널리 양해하기를 바라나이다."

왕자의 정다운 목소리를 들은 공주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왕자의 눈에서는 불타는 연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금빛은빛이 반짝이는 옷을 입은 왕자는 어찌보면 미남같고 어찌 보면 천하에 당할 자 없는 장수 같았다. 공주의 가슴에는 이름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감정이 짜릿하게 파고들었다. 왕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주를 찾아오게 된 경과를 이야기하고 반석같은 연모의 정을 고백하였다.

"왕자님께서 어이 이런 말씀을 하시와요. 그대는 천궁의 사람이옵고 소저는 지상의 사람이와요. 배필이란 마음뿐인가 하오이다."

"이 왕자에겐 변신술이 있사온즉 낮이면 그대를 새로 만들고 밤이면 그대를 사람으로 만들어 저의 곁에 있게 하겠나이다."

"천왕과 황후께서 허락할리 만무하오니다. 아예 단념하심이 좋을 듯하오이다."

"그럴리 없나이다. 절대 그럴리 없나이다. 천황과 황후께 이미 여쭈었나이다."

왕자는 어여쁜 공주를 놓칠까봐 슬쩍 거짓말을 꾸며댔다. 그러자 공주는 부끄러워서 아미를 숙이었다. 왕자는 "후-"하고 공주를 불어서 새로 만들어가지고 하늘로 올라갔다. 황후는 왕자의 일에 다소 짐작이 있었지만 시침을 뚝 땄다. 그러다가 하루는 왕자에게 물었다. "네가 요즈음은 왜 새와 떨어질 줄 모르느냐? 그 새는 도대체 어디서 생긴거냐?" 왕자는 어머니를 기이었다. "예, 저 새는 백두산의 새인데 전일에 내려갔다가 하도 고와서 어깨에 앉혀왔사옵니다."

"그렇다면 그 새를 조롱에 가두어서 천궁의 안쪽문 위에 걸어놓아라." 가련한 공주는 이렇게 조롱 안에 갇혔다.

밤이 되자 왕자는 공주를 박쥐로 둔갑시켜서 조롱에서 빠져나오게 하였다. 왕자의 침실로 돌아온 공주는 눈물을 머금고 하소연하였다. "천궁으로 올 때 양량친께서 응낙이 있었다고 하옵시고는 내가 갇히게 되어도 어이하여 말씀 한마디도 여쭈지 못하오이까?" 왕자는 성근하게 빌었다.

"내 그대를 사랑함은 일편단심이오이다. 급히 자시는 밥에 목이 멘다는데 그대는 너무 급히 서두르지 마오이다. 내일 내가 어머님께 청을 들겠으니 그리 아오이다." 하여 날이 희붐히 밝자 공주는 다시 박쥐로 변하여 조롱안에 들어갔고 조롱안에 들어간 후에는 또 새로 변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이러기도 며칠을 가지 못하였다. 황후는 왕자의 기미를 눈치 차리고 구멍이 더 작은 조롱에다 새를 가두게 하였다. 왕자는 새를 매미로 변신시켜서 조롱에서 빠져나오게 하였다.

"저도 그대를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오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연분은 절대 성사될 것 같지 못하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서라도 지상으로 돌려보내주옵소서." 공주는 참고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대는 너무 상심하지 마오이다. 내일은 황후가 일이 되도록 천왕께 여쭈겠다 하였나이다."

공주와 갈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 왕자는 이런 거짓말로 공주를 달래었다. 그는 황후가 시녀를 시켜서 은근히 조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밤이면 조롱속의 새가 없어진다는 시녀의 말을 들은 황후는 구멍이 더 작은 조롱에다 새를 가두라고 분부하였다. 밤이 되자 왕자는 공주를 골팽이로 둔갑시켜서 조롱을 빠져나오게 하였다. 왕자의 방으로 온 공주는 구슬프게 울었다.

"왕자님, 지상에 돌려보내주시지 않으려면 절 죽여주소이다. 더는 이렇게 살아갈 수 없나이다."

"그댄 상심하지 마옵소서. 내일이면 사랑의 신과 의논하고 그대를 나의 떳떳한 안해로 맞아들이겠나이다."

왕자가 아무리 구슬려도 공주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천궁의 왕자가 자기의 딸을 꾀여갔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듣게 된 지신은 천왕이 노여워할까봐 인차 사자를 띄워서 자기 딸을 돌려보내달라고 하였다. 천왕이 만조백관들을 불러다가 웬 일이냐고 물어보았으나 입을 여는 신하가 없었다. 이때 황후가 나서서 아들이 공주를 데려온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천왕은 왕자를 불러들이고 엄하게 꾸중하였다. "네가 만약 공주와 기어이 배필을 맺는다면 천왕의 왕위를 계승하려니 꿈도 꾸지 말어라." 그리고는 신하들에게 "당장 공주를 돌려보내거라."

공주를 잃어 버린 왕자의 가슴은 오리오리 찢기는 듯이 아팠다. 공주가 그리워 밥맛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속에서는 사랑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왕자는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오색구름을 잡아타고 다시 백두산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하였다. 백두산의 공주도 왕자가 그리운지라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시간 가는줄도 몰랐다. 이 일을 안 천왕은 왕자에게 여러번 충고하였지만 왕자는 그냥 귀밖으로 흘려버렸다.

천왕은 더는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사랑의 신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사랑이 굳어 버리게 그들의 심장을 돌심장으로 만들어 버려라. 9만년을 돌바위로 굳어지게 하라." 천왕의 엄한 령을 받은 사랑의 신은 왕자의 뒤를 슬그머니 따라서 백두산으로 날아 내려왔다. 왕자가 공주를 찾아서 궁전으로 갈 때 그들이 서로 마주오는 것을 보고 사랑의 신은 그들을 돌바위로 굳어지게 하였다. 백두산의 지하삼림 속에는 지금도 왕자와 공주의 망부석이 우뚝 솟아있다.

2, 절개 굳은 아내가 외지에 나간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하고 죽어 돌이 되었다는 설화. 망부석의 유래설화로, 아내가 죽어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자연석인 돌에서 기다려 그 돌에 망부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우의 설화도 이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설화는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 또는 金堤上)의 아내가 치술령에서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눌지왕 때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王弟)를 구해 온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일본에 건너가 또 다른 왕제를 구해 보낸 뒤 일본에서 신라의 신하임을 고집하다 죽는다.

그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망부석이 되고, 그 곳 주민은 부인을 칭송한다.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치(審)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다 죽은 세 딸은 술(述)이라는 새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고, 이들 모녀가 치술령신모(審述嶺神母)가 되었고 이에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모셨다는 기록도 있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이 돌로 변한다는 화석(化石) 모티프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돌’이라는 단어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찬양받을 만한 기념물이라는 뜻이 있다.

이러한 돌로 후에 인공으로 기념비를 세우거나 죽은 장소에 있던 자연석을 기념하는 대상물로 삼게 되면, 그 곳 주민은 망부석(기념비나 자연석)을 대할 때 훌륭한 부인을 대할 때와 같은 경건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줄이면 바로 사람이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화석(化石)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부인이 죽어 새가 되었다는 〈치술령망부석전설〉에서의 새의 의미는 일본에 건너간 뒤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새가 되어 훨훨 날아 바다를 건너가고 싶은, 살아서의 공간을 극복하려는 의지이다.

부부의 만남이 산 몸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죽은 뒤에 새가 되어 소원을 푸는 것이니, ‘이 몸이 새가 된다면’ 하는 살았을 적의 소원이 죽어서 실현이 되었다는, 죽음을 초월한 부부의 사랑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새가 되어서라도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소원 때문에 딸도 새가 된 것이다.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의 치술령 아래에 이들 새가 살았다는 은을암(隱乙庵)과 위패를 모신 당(堂)이 있다. 오랜 기념정신은 망부석으로, 죽어서라도 만나겠다는 의지는 새로, 주민의 부인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은 산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정읍사공원에 있는 망부석은 아내가 장사를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곳을 기념한 돌이며 여기에 〈정읍사 井邑詞〉 노래와 이 노래를 이야기로 꾸민 전설이 있는데, 이것도 오랜 기념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경상북도 영일군의 〈망부산(望夫山)솔개재전설〉은 신라 말 경애왕 때 소정승(蘇政丞)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산에 올라가 기다리다 지쳐 죽어 산 이름이 망부산이 되었으며, 부인을 기념하는 뜻에서 사당인 망부사(望夫祠)를 짓고 같이 기다리던 개와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내용으로, 〈치술령망부석전설〉의 변형이라 하겠다.

다만 망부석이 망부산으로 규모가 커진 것이 다르다. 고기를 잡으러 갔거나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아내가 떨어져 죽었다는 서해안의 〈낙화암전설 落花巖傳說〉도 이 망부석설화의 변형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사건을 한 여인이 정절을 통해 고통 속에 소화하고 후세 주민은 이를 기리는 내용인 망부석설화는 한국인의 의식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3,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한 후 자신은 죽음을 당하는 설화이다.

그의 아내가 기다리다가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아내의 죽음 설화도 포함된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있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 보해(寶海:삼국사기에는卜好)를 구하러 변복을 하고 가서 왕의 추격을 무릅쓰고 같이 탈출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다음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왕제 미해(美海:삼국사기에는 未斯欣)를구하러 가서 신라를 도망해 왔다고 하며 왕의 신임을 얻은 후에 미해를 탈출시키고 자기는 붙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일본왕의 문초와 설득에도 "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어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라는 말로 계림사람임을 주장한 후에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운 채 불타 죽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에 차이가 있고, 왕제의 부하 이름이 '삼국유사'에는 보이지만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상 부사가 따라간 것을 밝힌 것도 되고, 박제상이 귀환 활동을 할 때 협조를 얻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귀국할 수 있게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왕을 설득하였더니 순순히 왕제를 풀어 주었다고 하여 박제상의 언변을
중시하였고, '삼국유사'는 야간 탈출을 하였다고 해서 담력과 지혜를 중시하였다. 두 기록 다 박제상이 집에 들르지 않고 즉시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부부나 가정의 정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박제상의 충성심을 드러내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함께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은 박제상의 사실(史實)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민간 설화 측면에서는 박제상 부인편을 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이 집을 떠나자 몸부림쳐 울었고 (그래서 망덕사 앞 모래탑을 장사(長沙)라고함),

만류를 뿌리치고 다리를 뻗고 울었고 (그래서 그곳을 伐知旨라함)

일본에 간 남편을 치술령에 올라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치술령 신모가 되었으며,그 사당이 지금까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설화적인 증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박제상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는데, 그곳의 주민은 아직도 부인의 정렬을 칭송하고 있다고 한다.


4, 정읍사의 상징,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여인의 석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듯, 먼 곳을 바라보며 가지런히 포개진 두 손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석상 왼편으로는 정읍사에 얽힌 슬픈 사랑 이야기가 동판의 그림과 함께 적혀있습니다.



섬세함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단순히 사랑하는 이들의 헤어짐이 아니라, 신분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랑과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앞에 스러져간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기다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기다림이란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의 꽃과 같다..

기다림의 미학이 담긴 정읍사 설화소설에서 발췌한 말,
누군가를 기다리다 죽는다니.. 괜시리 마음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희망을 놓치지 않고, 언제고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갖을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아름다운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요즘 세상 얘기는 아니겠지만요^^
한 쪽 벽 면에는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 있어도 천 년인들 잊으리까/
만 년인들 변하리까 기다리는 마음/ 임오실 길목에 세워 놓고 살아있어도 죽은 듯/
그리움 산이 되고 설움의 눈물/ 강이 되어 고단한 삶/ 찬서리 젖어 생전에 못다한 사랑/
죽어도 임의 품안에 잠들고 싶어/ 차가운 땅 속 시린발 묻고/ 먼 하늘 바라보며/ 선체로 돌이 되어 기다립니다./

영화,

망부석》은 한국에서 제작된 임권택 감독의 1963년 영화이다. 이경희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차태진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주연
조연
기타
  • 원작자: 이서구
  • 조명: 장기종
  • 미술: 박석인
외부 링크
분류
"the stone on which a faithful wife stood waiting for her husband until she perished/

노래
곡명: 망부석,
작사, 작곡, 가수, 김태곤,

망부석
음악이 필요한 순간, 멜론
www.melon.com
가사: 
간밤에 울던 제비 날이
밝아 찾아보니
처마 끝엔 빈둥지만이
구구 만리 머나먼 길
다시 오마 찾아가나
저 하늘에
가물 거리네
헤에야 날아라
헤야 꿈이여
그리운 내 님 계신곳에
푸른 하늘에
구름도 둥실둥실 떠가네
높고 높은 저 산 너머로
내 꿈마저 떠가라
두리둥실 떠가라
오매불망 내 님에게로
깊은밤 잠못 이뤄
창문열고 밖을보니
초생달만 외로이 떴네
멀리 떠난 내님 소식
그 언제나
오실텐가 가슴 졸여
기다려지네
헤에야 날아라
헤야 꿈이여
그리운 내 님 계신곳에
달아래 구름도
둥실둥실 떠가네
높고 높은 저 산 너머로
내 꿈마저 떠가라
두리둥실 떠가라
오매불망 내 님에게로
달아래 구름도
둥실둥실 떠가네
높고 높은 저 산 너머로
내 꿈마저 떠가라
두리둥실 떠가라
오매불망 내 님에게로/
악보/ 가사,
망부석 악보,

망부석
음악이 필요한 순간, 멜론
www.melon.com
망부석: 이찬원 
이찬원
앨범/ 사랑의 콜센타 PART9/ 발매 일2020.06.05/ 장르성인가요/ FLACFlac 16/24bit
좋아요 2,998  곡 다운   FLAC 다운/  

망부석/ 비석,
정읍사,
출처 ^ 참고자료
[망부석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백두산),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三國史記, 三國遺事, 嶺南의 傳說(柳增善, 螢雪出版社, 1971),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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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9일 수요일

탁구 [table tennis, 卓球]

탁구 [table tennis, 卓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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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는 일정한 규격의 탁구대에서 작고 가벼운 공을 라켓으로 주고받으며 경쟁하는 경기로 좁은 장소에서 적은 인원이라도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라켓 스포츠이다.
운동 자체가 별로 과격하지 않아서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종목이다. 따라서 각급 학교의 정규 체육시간, 특별활동 시간에도 이용할 수 있으며, 직장인의 건강과 체력의 유지와 증진을 위하여도 이용할 수가 있으며 특히, 레크리에이션으로도 이용할 수 있어 이용 범위가 넓다.
탁구는 일정한 규격의 탁구대에서 작고 가벼운 공을 라켓으로 주고받으며 경쟁하는 경기로 좁은 장소에서 적은 인원이라도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라켓 스포츠이다.
역사
탁구는 그 역사나 기원이 정확하지 않은데, 중세 이탈리아의 '루식 필라리스'라는 놀이에서 변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15~16세기 경 프랑스 궁전에서 행해진 '라파움(Lapaum)'이란 놀이가 변하여 탁구가 되었다고도 한다.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여자팀. 오른쪽부터 이에리사, 박미라, 정현숙, 가운데 천영석 감독,
그 명칭도 일정하지 않아서 고시마, 프림프림, 와프와프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인도 등 영국 식민지에 살던 영국인들이 테니스에서 힌트를 얻어 더위를 피하여 실내에서 놀 수 있는 놀이로 변형시켰다는 것이 통설이다.

지금의 셀룰로이드 공은 1898년 영국의 James Gibb이 고안했는데, 이를 취급하던 운동구 상점 함레 상회에서 공을 칠 때 나는 핑퐁 소리(그 당시 사용됐던 탁구대와 가죽으로 된 배트에 볼이 닿는 소리를 가지고 모방한 것임)를 따서 핑퐁이라는 상호를 붙였다고 한다.
그 후 명칭이 테이블 테니스(Table Tennis)라고 고쳐지고 전 유럽에 보급되면서, 1900년 무렵에는 전 유럽에 탁구가 널리 보급되었다. 1902년 처음으로 영국에 탁구협회가 생기고, 1926년에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국제 탁구연맹이 발족하여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1927년 1월에 영국 런던에서 제1회 유럽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다.
                                      파커형제의 탁구게임, 1903년,
한국의 역사
우리나라에 탁구가 도입된 것은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1924년 경성일일 신문사가 제1회 탁구 경기대회를 개최하게 되면서 급격한 보급이 시작되었으며 1926년 동 신문사가 주최한 제 2회 대회에는 300여 명의 남녀 선수가 참가하는 성황을 보였다.
우리의 손으로 첫 대회를 연 것은 YMCA가 1928년 2월에 YMCA체육관에서 제 1회 조선 탁구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되자 1945년 11월 조선 탁구 협회가 발족되고 전국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어 국제 진출의 기틀을 잡았다.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탁구 은메달 한국 유승민 선수,
1952년 제1회 아시아 탁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한 한국은 1956년 동경에서 열린 제23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여자 5위 남자 14위를 차지한 후 더욱 발전하여 1973년 4월에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 32회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정현숙이 주축이 된 여자 팀이 단체전에서 일본, 중국의 강호를 물리치며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여 탁구는 물론 구기 사상 최초로 세계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 이후로도 우리나라 탁구는 세계 최강의 전력을 유지하며 위상을 떨치고 있다.
2013년 세계탁구챔피온쉽, 프랑스, 남녀혼합복식 결승전, 한국의 이상수,박용석과 김효봉, 김종 선수
시설
경기장은 길이가 14m, 폭이 7m, 높이가 마루 위 5m이며 조명은 세계 선수권 및 올림픽 대회는 탁구대 위 1000룩스, 탁구대 외는 500룩스를 유지해야 한다.
탁구대 코트는 직사각형으로, 규격은 가로×세로가 152.5×274cm, 두께는 2.5cm, 높이는 바닥에서 76cm 위에 수평면상에 놓여진다.
탁구대 표면의 가장자리에는 너비 2cm의 흰 선을 긋는데, 274cm를 따라 코트 끝에 그어진 선을 사이드라인, 152.5cm를 따라 그어진 선을 엔드라인이라 한다.
복식 경기를 위해 탁구대 중앙에 그어진 너비 0.3cm의 중앙선을 센터라인이라 한다. 센터 라인은 하프 코트의 일부로 간주한다.
                                                      탁구 경기장의 규격,
네트는 그물 구조로 되어 있으며, 윗부분은 폭 1.5cm의 흰 천을 덮어 씌운다. 높이는 15.25cm로 탁구대 표면과 평행을 이루도록 팽팽하게 쳐야 하며, 네트 길이는 탁구대에서 돌출부를 포함하여 양 지주 봉까지 183cm이다.
지주는 직경 2.2cm이하의 원통형으로 양쪽 사이드라인에서 직각으로 각각 15.25cm 돌출시켜 세운다.
                                                   탁구대 규격,
용구
공은 구기 중에서 가장 작고(지름 3.72~3.82cm), 가벼우며(무게 2.40~2.53g), 가장 회전이 많고(100회/1초), 빠르며(상대 코트 도달 시간 0.2초), 불면 날아가고 손에 쥐면 감추어진다.
공은 천연 수지인 셀룰로이드로 만들었는데, 요즘은 합성수지로 된 플라스틱 제품도 많이 있다. 공을 돌려보았을 때 회전이 일정한 구체이어야 하며, 색깔은 흰색과 오렌지색이 있다.
탁구공은 구기 중에서 가장 작고(지름 3.75~3.82cm), 가벼우며(무게 2.4~3.82g), 가장 회전이 많고(100회/1초), 빠르다.
                                                 40mm 탁구용 공,
라켓은 다양한 탁구 기술의 습득이나 발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용구로서, 나무판에 고무가 부착되지 않은 나무 탁구채 자체를 말한다. 라켓은 크기, 모양, 무게에 제한이 없지만 반드시 목재이어야 한다.
러버는 라켓에 붙이는 고무판을 말하며, 여러 종류가 있으나 자신의 경기 스타일, 기술의 장·단점, 체력, 성격, 특성 등을 고려하여 선택한다.
색깔은 짙은 단일 색, 무광택이며, 양면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양면은 확실히 다른 색이어야 한다.
러버의 재료는 천연 또는 합성고무이며, 스펀지를 포함한 전체 러버 두께가 4mm를 초과할 수 없다.
러버는 라켓에 붙이는 고무판을 말하며 짙은 단일색, 무광택이며 양면은 확실히 다른색이어야 한다.
탁구 경기의 복장은 흰색, 노란색, 빨강색 등 어느 색상의 복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시합의 공 색깔에 따라 착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시합구가 노란색 공이면, 노란색 유니폼을 입을 수 없고, 흰색 공이면 흰색 옷을 입을 수 없다.
경기 방법
경기 방식에는 양편 1명씩 경기하는 단식과 2명씩 조를 이루는 복식이 있다.
복식은 같은 사람이 2회 계속해 칠 수 없으며, 반드시 교대로 쳐야 한다. 단체전에서 대표적인 것은 세계 선수권 방식이다.
남자 단체전은 3명이 3회씩 출전하는 5점 선취방식이고, 여자 단체전은 2∼4명으로 한 팀을 편성하는 4싱글스·1더블스의 3점 선취 방식이다.
서브의 종류
서브
서비스는 자기 코트에 한 번 바운드시킨 뒤 상대방 코트에 넣는다. 서비스를 할 때는 라켓을 들지 않는 쪽 손바닥에 공을 얹고(이때 엄지손가락을 떼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붙인 채 곧게 편다) 공을 위쪽 45˚ 이내로 10cm 이상 올려 낙하해 라켓으로 친다.
손으로 공을 쥔 채 서비스를 하면 실점()이 된다. 또한 공을 든 손이 코트 표면보다 위에 있도록 한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리시버)은 자기 코트에 공을 한 번 바운드한 뒤 타구하며, 직접 네트를 넘기거나 또는 우회시켜 상대방 코트에 넣는다.
서포트 바깥쪽이나 서포트 밑을 지나 직접 상대방 코트에 들어간 것도 유효 타구이다.
서비스든 리시브든 그 뒤의 타구이든 공이 네트를 넘지 않았거나 상대방 코트를 벗어났을 때는 친 쪽이 실점하며 공을 헛치는 것도 실점이 된다.
탁구 복식경기에서 서브방향,
득점법은 상대방이 정규의 반구를 하지 못하였을 경우 자신의 득점이 된다. 득점은 1점씩이며, 먼저 11점에 이른 사람이 1게임을 얻는다. 10올(듀스)이 되었을 때는 먼저 2점을 따는 쪽이 1게임을 이기게 된다. 3게임 시합인 경우 2게임, 5게임시합은 3게임을 선취한 쪽이 승자가 된다. 
서비스가 네트나 서포트에 닿고 들어갔을 경우에는 네트(노 카운트)이므로 서비스를 다시 한다.
상대방 코트 가장자리에 닿은 공도 유효하다.
팬홀더 그립
세이크핸드 그립
세계 수준의 탁구 선수들에게 게임이란 결국 스핀 싸움이다. 중국은 세계선수권이 처음 열린 1926년부터 1951년까지는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지 않았다. 중국의 첫 탁구 세계챔피언은 1959년 도르트문트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한 롱궈투안이었다. 이후 중국은 점차 세계 탁구의 강자가 되어갔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대적하기 어려운 탁구 공룡으로 진화했다.

중국 탁구가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하게 경쟁팀을 견제하고 연구했는지 대표적인 예가 1975년 세계선수권 여자 단체전이다. 1973년 대회에서 정현숙, 이에리사가 주축이 된 한국 여자팀이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 우승을 했다. 1975년 대회에서도 한국의 낙승이 예상됐지만 오산이었다. 중국이 이를 갈고 설욕을 준비했던 것이다.
중국의 거신아이가 당시로선 생소한 이질러버(롱핌플러버)를 들고 나왔다. 거신아이는 한국과의 경기에서만 이질러버를 썼다. 처음 보는 스핀이 사방에서 들어오자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후 이질러버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키워드가 됐다.
1980년대 중국은 스카이서브를 선보이기도 했다. 상대 선수의 타이밍을 뺏기 위한 전략이었다.

2000년대 들어 탁구에서는 수비와 백핸드에 취약한 펜홀더 그립이 서서히 밀리고 유럽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셰이크핸드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류궈량-마린-왕하오까지 이어지는 이면타법을 내놓았다. 이면타법은 펜홀더 전형이면서 셰이크핸드처럼 라켓 양쪽에 러버를 붙이고 특별한 손목 스냅 기술로 백핸드를 자유자재로 하는 전법이다. 펜홀더의 강력한 공격은 유지하면서 약점을 보완하는 기술이었다.

이런 기술들은 강팀을 견제하기 위한 변칙이었다. 이질러버나 스카이서브는 요즘 탁구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이면타법도 찾기 어렵다. 펜홀더 전형은 현재 톱랭커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중국의 판젠동, 마롱 등은 빠르고 힘 있는 정석 기술로 ‘닥공’ 스타일의 탁구를 한다. 티모 볼(독일)은 유럽 선수지만 중국이나 아시아의 기술을 많이 흡수하고 받아들인 선수다. 중국 탁구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탁구는 그 안에서 더 뛰어난 기술, 더 기발한 신기술을 만들어내며 진화해왔다.
변칙이 정석을 결국 이길 수 없는 것이 맞지만, 중국이 그때그때 상식을 넘어서는 발상까지 하면서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를 했는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중국은 스스로 “우리는 탁구 기술에 관한 모든 분야를 다 연구했다”고 큰소리를 친다.

견제해도 소용 없었다

ITTF의 규정 역시 중국을 견제하는 쪽으로 변해왔다. 규정 변화가 꼭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중국 특유의 기술과 스피드 보다 유럽 스타일의 파워풀한 탁구가 유리한 쪽으로 바뀐 게 사실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공의 크기가 커졌다. 기존의 직경 38밀리미터에서 40밀리미터로 바뀐 것이다. 공의 스피드가 종전보다 떨어졌다.
2008년에는 휘발성유기용매제(VOC) 성분이 포함된 스피드 글루 사용이 금지됐다. 글루는 라켓에 러버를 붙일 때 쓰는 접착제를 가리키는데, 스피드 글루를 쓰면 공의 반발력이 커지기 때문에 이 규정이 생긴 이후 반발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파워가 더 중요해졌다.
2014년에는 공의 재질을 셀룰라이드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꿨다. 다소 유연성이 있는 셀룰라이드 공(공이 찌그러졌을 때 끓는 물에 넣으면 복원되는 성질이 있다. 플라스틱 공은 그렇지 않음)에 비해 플라스틱 공은 딱딱해서 반발력과 스핀에서 손해를 보게 됐다. 종전보다 공이 덜 튀기고 같은 스핀을 먹여도 실제로는 덜 먹는다. 유럽식 ‘힘의 탁구’가 유리해지는 조건이었다. ITTF는 스피드 글루와 셀룰라이드 공을 금지시킨 이유에 대해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숨이 가쁠 정도로 규정이 계속 변했지만 정작 중국 탁구의 경쟁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2000년 이후 올림픽 탁구 금메달은 한국의 유승민(2004년 아테네 남자 단식 금)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에게 돌아갔다.
출처 ^ 참고문헌,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탁구 메달 수 : 4개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탁구 종목
[남자 | 여자 : 단식, 단체전
[탁구 [table tennis] (스포츠 백과, 2008., 대한체육회)
[스포츠 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탁구 (올림픽 종목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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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7일 월요일

라면, 1

라면, 1

라면의 기원은 1870년대 일본 요코하마 중화거리, 고베 난킨마치 등의 중국요리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설과 1922년 삿포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돼지뼈, 닭고기, 야채, 멸치 등으로 우려낸 국물에 수프로 양념을 하여 삶은 중화면()과 함께 먹는 것이 대체적이다.  

라면이 많은 인기를 끌자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라면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일전쟁 때 중국인들이 전쟁 비상식량인 건면을 식용유지로 튀겨서 보관하기 쉽도록 포장하고 별도의 수프를 가미하여 먹은 것을 인스턴트라면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인스턴트라면이 처음 출시된 것은 1958년으로 산시쇼쿠산(サンシㅡ:현재 닛신식품)에서 생산한 '치킨라멘(チキンラㅡメン)'이 시작이었다.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가 면을 기름으로 튀기는 것을 보고 라면을 만드는 방법을 착안하였다.
 
인스턴트라면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1960년경으로, 현재 여러 식품회사에서는 각각 특색 있는 제품들을 만들어 시판한다. 라면은 건조식품이므로 수분이 많은 식품에 비해 단위 중량당 영양분이 많으며, 튀긴 식품이므로 지방이 많아 120g당 500kcal의 열량을 내는 고()칼로리 식품이다. 인스턴트 라면은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생산하며 제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라면을 좋아한다. 세계 최대 라면 소비국은 중국이지만 1인당 라면 소비량으로 따지면 한국이 최고다. 한 사람이 1년에 68개를 먹는다고 하니까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라면을 먹는 셈이다.

라면이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것이 1963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됐다.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개발된 해로 따지면 55년이다. 라면, 이 위대한 음식은?

반백 년 라면의 역사는 시련에서 출발한다. 그 탄생사는 전쟁의 고통, 그 혼란에 내동댕이쳐진 개인의 눈물, 그리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라면의 역사는 고난 극복의 궤적이며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땀과 눈물이 모두 스며 있다.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법,

① 배합공정:소맥분과 배합수를 혼합하여 반죽을 만든다.
② 면대형성:롤러로 압연하여 면대를 만든다.
③ 제면공정:제면기로 국수 모양을 만들고,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조절하여 라면 특유의 꼬불꼬불한 형태로 만든다.
④ 증숙공정:스팀 박스를 통과시키면서 α화(호화)시킨다.
⑤ 성형공정: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납형 케이스에 넣는다.
⑥ 유탕공정:150℃ 정도에서 튀기고 수분을 휘발시킨다.
⑦ 냉각공정:상온으로 냉각시킨다.
⑧ 수프제조공정:주원료를 고압처리하여 진공농축, 진공건조시킨 다음 각 원료를 혼합하여 포장한다.
⑨ 포장공정:수프를 첨부하여 완제품으로 포장한다.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박정희 대통령은 제작비 문제로 사용하지 못한 고춧가루를 투입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쌀을 아끼기 위한 혼분식 장려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후 캠페인과 정책은 시너지를 이루며 라면 붐을 일으킨다.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과 다른 맵고 짠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라면의 탄생이었다. 중량 100g, 가격 10원에 출시된 삼양라면을 통해 삼양사는 6년간 매출액 면에서 300배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삼양의 성공이 시발점이 되어 롯데공업(농심), 조선일보, 동방유량, 럭키LG, 빙그레, 오뚜기, 야쿠르트 등도 라면 산업에 진출하게 된다. 라면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라면을 대체 식품이라기보다 기호식품으로 인식하게 되고,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오히려 쌀의 소비가 늘어나 혼분식 장려 정책은 역효과를 거두었다는 아이러니한 일화가 있다.

 

한국. ‘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라면의 붐은 1989년 면을 공업용 쇠기름으로 튀겼다는 보도로 촉발된 ‘우지파동’에 의해 위기를 맞이한다. 삼양과 오뚜기는 폐업 직전까지 몰리고 비단 특정 회사만이 아닌 라면 전체에 신뢰를 잃은 소비자 때문에 라면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라면 파동은 기업들이 라면의 고급화ㆍ다양화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 220개 종의 라인업과 세계 최고의 판매량을 이루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라면은 분명 중국을 통해 일본으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납면과 라멘과 라면은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해야 할 만큼 분화된 상태로, 그것의 계보를 따진다는 것도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들기 시작한 한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라는 점, 그리고 라면의 시초였던 중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입국이라는 점을 그 계보와 나란히 놓고 본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라면, 국수를 증숙시킨 후 기름에 튀겨서 만든 유탕면에 분말 수프를 별첨한 인스턴트 식품. 휴대용식품으로 많이 사용 된다.
라면 국수를 증숙시킨 뒤 기름에 튀겨서 만든 유탕면에 분말 또는 액상스프를 별첨하여 만든 즉석식품의 하나.,

간식이면서 주식 같은 음식. 라면의 매력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세계 최고다. 국민 1인당 5일에 한 번, 1년에 80번 출출한 배를 채워준다. ‘신라면’의 경우 1986년 출시된 이후 2009년 11월까지 누적 판매 183억 개를 기록했다. 이 라면 봉지를 일렬로 놓으면 에베레스트 산 1만 8000개 높이와 맞먹는다. 세계라면협회(IRMA)에 따르면 국내 라면시장은 2010년 말 현재 1조 9500억 원 수준에 이른다.

간편식의 대명사인 라면. 값싸고 조리하기 쉬워 ‘제2의 식량’으로도 불린다. 다양한 요리와 잘 어울려 라면 조리법도 무궁무진하다. 라면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cm. 한 봉지에 보통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가 총 길이는 약 50m이다. 라면은 꼬불꼬불한 면발이 뭉쳐져 사각형이나 원형으로 돼 있다.

면발은 왜 꼬불꼬불한 걸까. 작은 봉지에 넣으려면 긴 면발보다 최대한 꼬불꼬불 뭉쳐 있는 면이 나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꼬불꼬불하면 면이 잘 부서지지 않는다. 조리 시간이 단축되고 면이 더 쫄깃쫄깃해 맛도 더 좋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 잘 튀겨진다.

라면에는 방부제가 첨가돼 좋지 않다는 것은 오해다. 라면의 경우 면의 수분 함량이 10% 이하(대부분은 4~8% 정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미생물이 번식하기 어렵다.

라면은 중국의 납면(, 중국 발음 라미엔)이 일본으로 전해져 라멘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라면이 됐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이다.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길게 뽑아낸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타자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라미엔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청일전쟁 후 중국인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전해졌다. 중국식 라미엔에 일본 맛이 더해져 일본식 라멘이 됐다.

라면은 1958년 8월 25일 안도 모모후쿠(, 1910~2007)가 개발했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심각한 식량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도가 설립한 닛신식품()이 국수 면발에 간단한 양념 국물을 섞은 아지스케면()을 ‘끓는 물에 2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시판한 것이 라면의 시초다. 제품명은 치킨라멘. 뒤이어 1959년 에스코크, 1960년 묘조식품()이 가세했다.

당시 라면은 아지스케면으로 면 자체에 양념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 쉽게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묘조식품은 이 점을 보완해 1961년 현재와 같은 분말스프를 첨가한 라면을 첫 생산했다. 이것이 오늘날 라면의 모태가 됐다.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 산업은 급성장했다. 1971년에는 컵라면까지 등장하면서 조리와 휴대의 간편함을 극대화했다.

우리나라 라면시장의 절대강자는 농심()이다. 1985년 라면시장 1위에 오른 후, 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농심라면의 원조는 롯데라면이다. 롯데라면은 1965년 처음 선보였다.

당시 신춘호() 회장이 이끄는 롯데공업(농심의 전신)이 롯데라면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삼양라면과 함께 인기를 끌다 1974년 농심라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따지고 보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원조가 롯데라면인 셈이다.

1963년도 최초의 삼양라면 ⓒ삼양식품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농심이 아니다. 1호 라면은 삼양()라면이다. 삼양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처음 나왔다. 삼양라면의 탄생은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의 착안에서 비롯됐다. 그는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돌며 시장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5만 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1963년, 드디어 우리나라 토종 1호 라면이 탄생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중량 100g에 10원.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그러나 초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밥과 국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라면이 한 끼 식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식품도 생소했다. 라면의 ‘면’을 무슨 섬유나 실의 명칭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삼양라면 초기 광고 ⓒ삼양식품,

1965년 때맞춰 나온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라면은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6년 연 240만 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 개로 늘어났고, 몇 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300배에 이르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나라의 총 수출액이 3000만 달러였는데, 이 중 9%에 해당하는 270만 달러가 삼양라면을 판 것이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1989년 11월에 ‘우지()라면’ 파동이 일어나면서 삼양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지, 즉 공업용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라면 판매와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1000여 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삼양라면은 법정 투쟁에 나서 1997년 8월, 무려 7년 9개월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상처는 씻을 수 없을 만큼 컸다. 결국 절대강자의 위상을 잃어버린 후 한동안 고객들의 외면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신요코하마라면박물관,

출처 ^ 참고문헌,

[삼양라면

[농심라면

[네이버 지식백과] 라면 -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사물의 민낯, 2012.., 갈릴레오 SNC)

[게티이미지 코리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물의 민낯

[발명상식사전

[SERICEO - 잡동사니 해부학

[doopedia.co.kr

[우리나라 농심이 라면을 처음 만들었다??? (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 2010..,)

[https://happyday-2100.tistory.com/726 [살맛 나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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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happyday-2100.tistory.com/727 [살맛 나는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