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6일 토요일

네덜란드, Netherlands,

네덜란드, Netherlands,

네덜란드는 BC 50년경에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된 이래 16세기까지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 다양한 민족들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 왔다.

16세기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자, 오렌지공 윌리엄의 지휘하에 독립 투쟁을 전개하여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이후 네덜란드는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17세기에는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맞았으나, 점차 영국과의 경쟁에서 밀려났고 한때 프랑스에 점령당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침입을 받으며 약소국의 설움을 몸소 체험한 네덜란드는 1947년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네룩스 3국을 결성했고 선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하였다.

현재는 입헌 군주국으로서 정치적 안정과 높은 경제 수준을 누리며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

수도암스테르담|시간9월 16일 오후 02:50 (한국과 -7시간차)

언어네덜란드어면적약 4만1천㎢ 한반도의 0.188배인구약 1,713만명 세계 69위GDP약 9,023억5,500만 달러 세계 17위통화유로 EUR 환율정보국가번호31관련날씨 정보, 항공권 정보

정식 명칭은 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이며, 일명 Holland·화란(和蘭)이라고도 한다.

네덜란드의 국기,

서쪽과 북쪽이 북해와 접하며, 해안선은 약 451㎞에 달한다. 속령으로 카리브해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5개 섬으로 구성)와 아루마 섬이 있으며, 한때 인도네시아도 300년간 식민지로 있었으나 1950년 독립하였다.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 행정부 소재지는 헤이그(Hague, 네덜란드어 Den gaag)이며, 행정구역은 12개 주(provincie)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4만 1543㎢, 인구는 1694만 7904명(2015년 현재)이다.

주요 인종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이다. 공식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이 통용된다. 종교는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며, 특히 왕실의 종교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간척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고, 국토의 70%가 농목지로서 낙농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 현 EC)의 창립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화를 추진하여 선진공업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주로 석유화학·금속·철강·수송·조선·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2016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7625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827달러이다.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간에 의회 내의 의석 분포에 따른 비율로 배분하는 것이 원칙이며, 총리는 형식상 국왕이 임명한다. 의회는 임기 6년의 상원(75석) 및 임기 4년의 하원(150석) 양원으로 구성되며, 주요 정당으로는 노동당(PVDA), 기독민주당(CDA), 자유민주당(VVD), 민주66당(Democrats66), 녹색당, 사회당 등이 있다.

서기전 1세기 중엽 로마의 시저(Caesar, J.)가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현재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거했으며, 그 뒤 400년경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따라 로마인은 물러가고, 남부에는 프랑크족,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다. 6세기에는 대프랑크 왕국이 세워졌고, 9세기경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수개의 공국(公國)이 생겨났다.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家)의 필립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였고, 1515년부터는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그 뒤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자, 오렌지가 윌리엄공의 지휘하에 독립투쟁을 전개하여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17세기경 해양 및 식민지 경영국가로서 국세가 융성하여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에 진출하였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현재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패망시까지 점령당했으며, 1814년 윌리엄 1세의 통치하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의 통일왕국이 건설되었다.

1831년 벨기에가 독립한 뒤, 네덜란드는 윌리엄 2세의 자유헌법 제정과 50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등으로 근대 산업국가로 등장하였다. 1867년에는 룩셈부르크가 독립했으며, 제1·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정책을 택했으나, 독일군에 침략당하여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마샬(Marshall)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 복구했으며, 이후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서유럽연합(W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가담하였으며, 1945년 12월 유엔에 가입하였다. 전쟁 중인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창설하고,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EC, 현 EU)에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

1990년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는 유고 내전과 아프리카의 내전, 기근 등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 들어와 반외국인 감정이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은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증폭되었고, 2002년 마침내 네덜란드 사회를 뒤흔드는 폭풍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2002년 의회에서 통과된 난민 추방 중단 결의안은 난민에 대한 대규모 사면과 영주권 부여의 길을 터놓은 셈이며, 정부의 강경 정책에 의회가 제동을 건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1948년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율리아나(Julianace)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율리아나 여왕은 1980년 4월 현 베아트릭스(Beatrix) 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왕은 상징적 존재로서 모든 국사에 형식적·의례적 권한을 행사하며, 법령 또는 중용 국정관계 문서에 대한 서명권이 있으나 관계 각료의 부서(副署)가 있어야만 효력을 발생하므로 국왕은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와 관계를 맺은 것은 조선시대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Weltevree, J., 박연, 朴淵)가 표류, 귀화했던 것이 처음이다. 그 뒤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돌아간 하멜(Hamel, H.)은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하멜표류기』를 쓰기도 하였다. 1907년 이준(李儁) 열사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다가 분사(焚死)한 바 있다. 그의 유해는 1963년 서울로 이장되었으며, 유해가 있던 곳에 1977년 10월 묘비가 제막되었다.

네덜란드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7개 회원국의 일원으로서 적극 활동했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지지해 온 주요 우방국이다. 6·25전쟁 참전국으로 강원도 횡성군에는 화란 참전용사비가 있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1961년 4월 4일 국교 수립에 합의하였다. 1968년 12월 주한 상주공관이 개설되고, 1969년 10월에는 네덜란드 주재 상주공관이 개설되었다.

양국은 1966년 4월에 특허 및 상표 협정, 1970년 4월에 사증 면제 협정, 1970년 6월에 항공 협정, 1974년 10월에 투자보장 협정, 1978년 10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79년 2월에 전대차관 협정, 1982년 12월에 경제기술협력 협정, 1995년 12월에 해운 협정, 2002년 7월에 사회보장 협정, 2003년 7월에 투자보장 협정, 2007년 7월에 세관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40억 24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제트유 및 등유·무선전화기·승용차 등이며, 수입액은 43억 4900만 달러로 주종목은 반도체제조용장비·반도체제조용장비부품·나프타·고철 등이다.

양국은 경제협력을 보다 원활히 하고 강화하기 위해 1975년 한·화 공동위원회, 1976년 한·화 민간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어 상호협의를 해 오고 있으며, 2007년 현재 경제단체로 KOTRA를 비롯하여 삼성전자·LG전자·한국타이어·외환은행 등 40여 개 상사들이 진출해 있다.

또한, 한·화란친선협회 및 화란한국전참전용사회·한국전참전화란해군용사회 등이 조직되어 있으며, 1976년 10월 우리나라의 횡성군과 네덜란드의 가스텔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07년 현재 네덜란드에는 719명의 교민 및 1,032명의 체류자가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에는 271명의 네덜란드 선수단이 참가한 바 있으며, 2002년에 개최된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경기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에 진출시켜 전국민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에 수교하였으나 교민이나 체류자는 없다.

북한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2014년 현재 672만 달러로 주종목은 기계공구류와 비금속제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수입액은 267만 달러로 기계류와 섬유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양측은 2001년 4월 무역 및 경제 협력에 관한 회담록, 북한지역 통과 가스 파이프라인 설치 양해각서 등을 교환하였다.

네덜란드 내의 한국 문화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문화사적 관계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랑드르 출신의 루브루크(Rubruck, W. van)은 프란치스코회 신부로서 그 첫 번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왕 루이 9세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사신으로 1253∼1255년 사이에 몽고제국의 영내를 다녀오고 우리나라를 까울레(Caule, 高麗)라 하여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까울레는 고려의 중국식 발음이다. 그에 따라 폴로(Polo, M.)도 카울레를 언급하였다.

우리나라를 다녀간 뒤 그 견문을 직접 책으로 소개한 사람은 하멜(Hamel, Hendrik)이다. 하멜은 네덜란드 배 데스페르베르호(DeSperwer號)가 1653년 제주도 해안에서 파선되자 표류하던 선원들과 제주도에 올라와 동료 7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13년간 살다 돌아갔다. 그 뒤 그는 『하멜표류기』를 1668년 로테르담에서 출간한 바 있는데, 그것은 곧 프랑스어·독일어·영어로 번역되었다. 편집과 번역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들어가기는 했으나, 이 책은 한국인과 문화를 처음으로 17세기 유럽인에게 소개한 공적이 있다.

비첸(Witsen, N.)이 1692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북부 및 동부 타타르인(Noord en Oost Tartaryen)』도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중요한 저서이다. 특히 1705년에 나온 그 재판본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관한 유럽인들의 기록과 하멜의 두 동료에게 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한글 어휘와 한국에 관한 값진 정보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독일인 지볼트(Siebold, K. T. E. von)가 이 방면에 큰 몫을 해냈다. 그는 의사로서 네덜란드를 위해 1823∼1829년 동안 일본의 데지마(出島:나가사키)에 머물면서 학교를 세워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그는 표류해서 그곳에 와 있던 한국인들을 여러 차례 면담하였고, 그에 앞서 한글의 자모(字母)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네덜란드 왕립학술원에 보낸 바 있다.

네덜란드에 돌아간 뒤 그는 1831년 『일본기(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를 라이덴에서 독일어로 써 냈는데, 그 책의 다섯 장에는 우리나라의 관료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이 다루어져 있다. 이 자료집 편집에 조수로서 특히 한국관계 부분을 주로 담당한 호프만(Hoffmann, J. J.)은 뒷날 라이덴대학교의 첫 일본어학 교수가 되거니와, 여러 가지의 일본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단군으로부터 1637년까지의 한국사 개관, 일본의 대 한국 및 중국 관계 등을 서술하였다.

그 밖에 1920년 『하멜표류기』를 학문적으로 다룬 회틴크(Hoetink ,B.)와 1931∼1946년 에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교수로서 비교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어·중세어 및 현대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라데르(Rahder, J.)는 네덜란드에서의 한국학 성립을 위해 기여한 바 크다.

네덜란드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대개 외교관·상인 등에 의해 수집되었고, 일본 미술품 수집가가 곁들여 구입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들 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 소장하기도 하였다. 이들 가운데 라이덴 소재 국립민족학박물관과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 가장 두드러진다.

국립민족학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대략 1,500점에 달하는데, 세 사람의 소장품이 그 근간을 이룬다. 중국 베이징 주재 네덜란드 공사관의 서기관이자 통역관이었던 라인(Rhein, J.)이 그 중 한 사람으로, 36폭의 한국 풍속도 등을 수집하여 1889년 네덜란드 정부에 보냈다. 그 가운데 23점은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이고, 나머지 13폭은 석천(石泉)의 것이었다. 그것이 뒤에 이 박물관에 들어왔다. 다음은 지볼트의 수집품이다.

또 한 사람은 한말 전환국(典圜局)의 기사로 우리나라에서 근무한 크라우스(Kraus)의 수집품인데, 대한제국 당상관의 복식과 화폐를 포함하여 조선 말의 값진 유물이 상당수 거기에 들어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50점 남짓하다. 그것은 대부분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베스텐도르프(Westendorf)가 일본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것을 재구입한 것들로, 고려시대의 경함(經函)을 비롯하여 청자와 관음탱화·칠기 등 진귀한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암스테르담의 해양사박물관도 몇 폭의 풍속도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같은 도시의 알란트피어손(Alland Pierson) 박물관 등에 소수의 한국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막쿱의 데파그도자기 박물관, 로테르담의 지역 및 민족학박물관, 아르덴부르그의게멘텔리크 박물관 등이 약간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처음 개설한 사람은 포스(Vos, F.)이다. 그는 1946년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강사로 시작하여 1947∼1948년 학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어 및 한국역사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1958년 일본어 및 한국어학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로써 그는 서유럽 최초의 한국어학 전임교수가 된 것이다.

1961년에는 같은 대학교에 한국학 석사과정이 공식적으로 개설되었고, 그 8년 뒤인 1969년 일본학 및 한국학센터로 학과 명칭을 바꾸었다. 그 동안 이 학과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학 전공학자가 배출되었다. 헨토른(Henthorn, W. E.)은 1966년 「한국:몽고의 침공 Korea:The Mongol Invasio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발라벤(Walraven, B. C. A.)은 1985년에 「무가(巫歌)와 한국고전문학(Shaman Songs and Korean Literatur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스는 서유럽 최초의 한국학 교수로서, 유럽 다른 나라의 한국학 전공 박사 및 교수 자격시험의 공동 시험관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정년퇴임하였다. 이후 발라벤이 전임으로서 한국어·한국문학입문·한국문화 등의 강좌를 개설하고 올로프(Olof, A. M.)와 라머스 신(Lamer-hin, S.)이 한국어를 가르쳤다. 전공 학생이 5명, 부전공학생이 해마다 10명 정도에 이르고 있으며, 한국학 가운데에서 고전문학과 사상사 방면의 연구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묄렌호프(Moelenhoff)에서 1976년 이래 동양문고의 이름으로 동양고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내고 있는바, 거기에 한국 고전 관계의 것이 둘 포함된다. 즉, 1978년 포스에 의해 번역, 출판된 『둥근 사랑, 모난 사랑(Liefe road, liefe vierkant)』이라는 제목의 한국 시조선과 1980년 발라벤이 「홍길동전」·「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가」를 번역하여 펴낸 『활빈인活貧人(De redder der armen)』이 그것이다. 또 암스테르담의 열대연구소 지역연구 시리즈로서 판 덴 보른(Van den Boorn)이 쓴 『남한(Zuid-Korea)』도 특기할 만한 저서이다.

이 밖에 네덜란드·한국협회가 정기적 모임을 갖고 한국학 전공의 국내외 학자와 외교관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영화감상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연구의 일환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한국 연구의 배경과 노력에 부응하여 1980년 4월에는 유럽한국학회의 제4차 학술대회가 라이덴대학교에서 개최된 바 있다.

한편,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라남도 강진군의 자매 결연 도시인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시립박물관 전시를 시작으로 80여일간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네덜란드 기후

네덜란드는 겨울 평균 기온 1~4℃, 여름 평균 기온 13~22℃로 온난 다습한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보통 비가 자주 오는 습한 날씨가 지속되는 편이며, 날씨의 변화가 심하니 겨울이 아니더라도 겉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겨울에도 눈보다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출처 ^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네덜란드 개황』(외교통상부, 2006)

[ 네덜란드』(산업연구원 편, 선진국국별편람, 1986)

[Korean Genre Paintings in the Netherlands and around the World(Walraven, B. C. A., Korea Journal Vol.23, No.1, 1983)

[Korean Studies in the Netherlands-Past and Present」(Vos, F., 『제1회 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제1회 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묄렌호프(Moelenhoff) #1976년 이래 동양문고의 이름 동양고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내고 #한국 고전 관계의 것이 둘 포함된다 #1978년 포스에 의해 번역 출판 #둥근 사랑 #모난 사랑 #Liefe road liefe vierkant #제목의 한국 시조선과 1980년 발라벤 #홍길동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변강쇠가 #번역하여 펴낸 활빈인活貧人(De redder der armen) #암스테르담의 열대연구소 지역연구 시리즈로서 판 덴 보른(Van den Boorn)이 쓴 『남한(Zuid-Korea)』도 특기할 만한 저서 #네덜란드·한국협회가 정기적 모임을 갖고 #한국학 전공의 국내외 학자와 외교관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영화감상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연구의 일환으로 손꼽을 수 있다 #한국 연구의 배경과 노력에 부응 #1980년 4월에는 유럽한국학회의 제4차 학술대회가 라이덴대학교에서 개최된 바 있다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라남도 강진군의 자매 결연 도시인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시립박물관 전시를 시작 #80여일간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50점 남짓하다 #대부분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베스텐도르프(Westendorf)가 일본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것을 재구입한 것들 #고려시대의 경함(經函)을 비롯하여 청자와 관음탱화·칠기 등 진귀한 유물로 구성 #암스테르담의 해양사박물관도 몇 폭의 풍속도를 소장 #같은 도시의 알란트피어손(Alland Pierson) 박물관 등에 소수의 한국 유물이 포함 #막쿱의 데파그도자기 박물관 #로테르담의 지역 및 민족학박물관 #아르덴부르그의게멘텔리크 박물관 등이 약간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 #네덜란드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처음 개설한 사람은 포스(Vos F) #1946년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강사로 시작하여 1947∼1948년 학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어 및 한국역사 강좌를 개설 #1958년 일본어 및 한국어학 교수로 임용 #서유럽 최초의 한국어학 전임교수가 된 것이다 #1961년에는 같은 대학교에 한국학 석사과정이 공식적으로 개설 #8년 뒤인 1969년 일본학 및 한국학센터로 학과 명칭을 바꾸었다 #학과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학 전공학자가 배출되었다 #헨토른(Henthorn W E)은 1966년 「한국:몽고의 침공 Korea:The Mongol Invasio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발라벤(Walraven B C A.) #1985년에 「무가(巫歌)와 한국고전문학(Shaman Songs and Korean Literatur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멜표류기』를 학문적으로 다룬 회틴크(Hoetink B) #1931∼1946년 에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교수로서 비교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어·중세어 및 현대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라데르 #Rahder J #네덜란드에서의 한국학 성립 #한·화란친선협회 #화란한국전참전용사회·한국전참전화란해군용사회 등이 조직되어 #1976년 10월 우리나라의 횡성군과 네덜란드의 가스텔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행사를 개최 #2007년 현재 네덜란드에는 719명의 교민 및 1032명의 체류자가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에는 271명의 네덜란드 선수단이 참가 #2002년에 개최된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경기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에 진출시켜 전국민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서기전 1세기 중엽 로마의 시저(Caesar J)가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현재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거 #400년경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따라 로마인은 물러가고 #남부에는 프랑크족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 #6세기에는 대프랑크 왕국이 세워졌고 #9세기경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수개의 공국(公國)이 생겨났다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家)의 필립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 #1515년부터는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 #오렌지가 윌리엄공의 지휘하에 독립투쟁을 전개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17세기경 해양 및 식민지 경영국가로서 #국세가 융성하여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에 진출하였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현재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패망시까지 점령당했으며 #1814년 윌리엄 1세의 통치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의 통일왕국이 건설 #1831년 벨기에가 독립 #네덜란드는 윌리엄 2세 #자유헌법 제정 #50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등 #근대 산업국가로 등장 #1867년에는 룩셈부르크가 독립 #제1·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정책을 택했으나 독일군에 침략당하여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수립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마샬(Marshall)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 복구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포기 #서유럽연합(W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가담 #1945년 12월 유엔에 가입 #전쟁 중인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창설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EC 현 EU)에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 #대외정책을 추구 #온난 다습한 해양성 기후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 #행정부 소재지는 헤이그(Hague #네덜란드어 Den gaag) #행정구역은 12개 주(provincie)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4만 1543㎢ #인구는 1694만 7904명(2015년 현재) #주요 인종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이다 #공식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이 통용 #종교는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며 #왕실의 종교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간척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고 #국토의 70%가 농목지로서 낙농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경제공동체(EEC, 현 EC)의 창립국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화를 추진하여 선진공업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석유화학·금속·철강·수송·조선·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2016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7625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827달러이다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





육군참모총장,

육군참모총장,

9000평 관사, G90 제공받는 육군참모총장의 연봉은?

신임 남영신 육군참모총장 연봉과 혜택·예우는?

4성 장군은 우리나라에 7명 뿐, 연봉은 1억 4720만원
장관급 의전과 G90, 부지 3만2000㎡ 저택까지,


정부가 9월21일 학군(ROTC) 출신 남영신(58·학군23기) 지상작전사령관을 신임 육군참모총장에 내정했다. 


남 내정자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총장직을 도맡아 온 50년 넘은 관행을 깬 것이다. 대령이 장군이 되면 100가지 이상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별들 중에서도 최고 간부에 속한 육군참모총장 연봉은 얼마일까. 또 육군참모총장은 어떤 예우를 받을까.


◇대장 연봉 1억4720만원, 이등병 연봉의 30배

육군참모총장은 우리나라에 7명뿐인 대장 가운데 한명이다. 국방부가 2019년 발표한 ‘2019 국방통계 연보’를 보면 대장은. 연간 1억4700만원을 받는다.


현역 군인 중 최고연봉이다. 가장 낮은 계급인 이등병 연봉은 489만7200원. 이등병 30명이 받는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다.

남영신 육군참모총장 내정자가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장관급 의전, 제네시스 G90, 저택 같은 관사

대장은 국군의 최고 책임자인 국방부 장관에 버금가는 의전으로 대우 받는다.


군 예식령(대통령령)을 보면 대장 의전 순서는 국방부 장관 다음이다.


국방부 서열 2위인 국방부 차관보다 앞선다.


대장 중에서도 육군참모총장은 합동참모의장에 이어 현역 군인 중 두 번째로 의전 서열이 높다.


차량도 별도로 지급된다. 번호판 대신 성(星)판을 단 세단이다. 계급이 높을수록 차량 배기량도 높아진다.


대장은 배기량 3800cc급(G90), 중장은 3400cc급(k9), 소장은 2400cc급(그랜저), 준장은 2000cc(K5)를 사용한다.

대장 계급에게 지급되는 제네시스 G90 모델. 

대저택이라 부를만한 관사에 들어갈 수 있다.


관사 부지만 3만2000㎡, 건물은 1067㎡ 규모다.


물론 군부대와 마찬가지로 보안을 위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다만, 2017년 벌어진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의 공관병 갑질 파문 여파로 군 기본 수행원이었던 당번병, 공관병, 조리병 등이 관사에서 사라졌다.


◇전역 이후, 심지어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혜택들

은퇴 후에는 두둑한 군인연금을 받는다.


대장으로 은퇴하면 2018년 기준, 매달 평균 484만원을 연금으로 받을 수 있다.


중장은 460만원, 소장은 418만원, 준장은 385만원으로 차이가 크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사후 쉴 자리도 생긴다. 장군이었다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대통령, 국회의장과 함께 잠들게 되는 것이다.

눈 내린 국립대전현충원의 전경이다. 

◇별 달기, 하늘의 별 따기

수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대장이 아니라 장군 진급만 봐도 최소 27년을 복무해야 기회가 생긴다.


여기에 국방부는 국방개혁 2.0의 일환으로 비전투 분야 장군 직위를 감축 계획도 밝혔다.


장군 및 대장 진급으로 각종 혜택을 누리기는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출처 ^ 참고문헌,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

[제네시스 홈페이지 캡처

[KBS 뉴스 캡처,


#국방부 #국방개혁 #장군 #대장 진급 #각종 혜택을 누리기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 #별 달기 #하늘의 별 따기 #군부대와 마찬가지로 보안을 위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2017년 벌어진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의 공관병 갑질 파문 여파 #군 기본 수행원 #당번병 #공관병 #조리병 #관사 #전역 이후 #심지어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혜택들 #은퇴 후에는 두둑한 군인연금 #장관급 의전 #제네시스 G90 #저택 같은 관사 #대장은 국군의 최고 책임자인 국방부 장관에 버금가는 의전으로 대우 받는다 #군 예식령(대통령령)을 보면 대장 의전 순서는 국방부 장관 다음이다 #국방부 서열 2위인 국방부 차관보다 앞선다 #대장 중에서도 육군참모총장은 합동참모의장에 이어 현역 군인 중 두 번째로 의전 서열이 높다

2020년 9월 24일 목요일

뉴질랜드 New Zealand

 뉴질랜드 New Zealand

수도웰링턴|시간9월 17일 오후 04:20 (한국과 3시간차)

언어마오리어, 영어 면적 약 26만㎢ 한반도의 1.212배인구약 482만명 세계 125위GDP약 2,046억7,100만 달러 세계 52위통화뉴질랜드 달러 NZD 환율정보국가번호64관련날씨 정보항공권 정보  


뉴질랜드는 10세기경 폴리네시아 문화를 계승한 마오리족에 의해서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서양인으로는 네덜란드의 항해사 타스만이 1642년 최초로 발견하였다.


1769년 영국인 선장 쿡이 탐험하였으며, 1840년 마오리족 대표와 영국 대표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7년 9월 26일 독립하여 영국의 자치령이 되었다가 1931년에 영연방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성문헌법이 없는 국가로, 국가 원수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Elizabety Ⅱ)이며, 임기 5년의 총독이 영국 여왕을 대리하지만 실권은 2008년 11월에 취임한 키(John Key) 총리에게 있다.


외교정책의 기조는 중도우파로,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미국·영국·영연방제국 등과의 유대 강화와 일본·아세안 등 아시아국가와의 협력 증진에 힘쓰고 있다. 또한, 중국·베트남 등을 승인하여 공산권과도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수도는 웰링턴이다. 국토는 2개의 주요 섬과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다수 국민이 유럽계이고,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다. 종교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가 많다. 단원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국이다.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이고 총독이 대표한다.  


뉴질랜드의 문화는 유럽풍이 강하면서도 마오리족의 전통 문화와 예술을 되살린 복합적 요소를 갖는다.


남태평양의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 약 1,920㎞ 지점에 위치한 두 개의 큰 섬과 그 부속도서로 구성된 나라로 해안선의 길이는 15134㎞이다.


영연방의 하나로, 면적은 26만 7710㎢, 인구는 443만 8393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웰링턴(Wellington)이다. 자치령 및 해외 영토로 남태평양의 쿡(Cook)·니우(Niue)·토클로(Tokelau) 등의 섬이 있다.


종족구성은 앵글로색슨계 위주의 백인이 69.6%, 마오리(Maori) 원주민이 14.5%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다. 종교는 개신교 52%, 가톨릭교 15%, 힌두교 등 기타 33% 등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업적 농업과 축산업이 주요 산업이며,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999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342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입헌군주제의 의원내각제로서, 의회는 임기 3년의 단원제(120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국민당(NP), 노동당(LP), 뉴질랜드 제일당(NZF), 소비자납세자당(ACTNZ) 등이 있다.


스트레일리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1,600km 떨어져 있으며 남위 33~53°사이(남북 길이 1,600km), 서경 162~173°사이(동서 길이 450km)에 있다. 폭 32km의 쿡 해협을 끼고 있는 2개의 주요 섬인 노스·사우스 섬과 기타 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스 섬과 사우스 섬은 남부의 산들과 북부의 구릉지대로 양분된다. 대다수 국민이 유럽계이고, 약 10%를 차지하는 마오리족과 태평양 도서군 원주민·화교들이 소수 집단을 이룬다.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다. 종교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가 많지만 불교·힌두교 신자도 있다.


화폐단위는 뉴질랜드달러(New Zealand dollar/NZ$)이다.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동떨어져 있어서 사회적·문화적·경제적으로 특징 있는 발전을 이룩했다. 뉴질랜드 경제는 농업·중소기업·서비스업에 기반을 둔 선진적 시장경제이다. 농업은 특히 목양업이 발달했다. 단원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국이다.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이고 총독이 대표한다.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AD 1000년경부터이다. 1642년 네덜란드 항해가 아벨 타스만에 의해 주요 섬들이 처음 발견되었고, 1769년 제임스 쿡 선장은 이 섬들의 지도를 만들었다. 1840년 영국 직할식민지가 된 이 지역에서는 1860년대 내내 마오리족 원주민과 점령자들 간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1865년 수도를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옮겼고, 1907년 뉴질랜드 자치령의 지위를 얻었다.


뉴질랜드는 1919~62년 서사모아를 위임통치했고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70년대 초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EEC) 가입은 뉴질랜드 경제에 인플레이션 급등과 실업의 증가라는 악영향을 미쳤다. 뉴질랜드 정부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출시장을 확대하고 경제를 다각화했다. 또한 뉴질랜드는 외교관계에서도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고, 핵무기 확산 반대 입장을 강하게 견지했다. 문맹률은 거의 0%다.


뉴질랜드의 문화적 환경은 유럽 풍이 강하면서도 마오리족의 전통 문화와 예술을 되살린 복합적 요소를 갖는다. 20세기 후반 이후 마오리족의 사회·경제적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뉴질랜드 정치 발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과의 관계

뉴질랜드는 1949년 7월 우리나라를 승인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 중에는 육군과 해군 5,350명을 파병하였고, 사상자는 120명에 달하였다.


뉴질랜드군은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는데, 영연방군이 치른 가장 큰 격전은 1951년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국군의 제1차 춘계공세를 맞아 경기도 가평에서 벌인 가평전투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9월 가평에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등 영연방 4개국의 6·25참전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뉴질랜드의 한국전참전용사회는 가평전투를 기념하여 1976년 이래 매년 가평북중학교 학생 1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4월 25일을 현충일로 정하고 있어 가평전투는 양국 국민에게 더욱 의의가 깊다.


1962년 3월 26일에는 양국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1971년 6월에는 주한 뉴질랜드대사관이, 같은 해 7월에는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다. 뉴질랜드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유엔에서의 한국안 공동제안국 및 중심그룹회원으로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왔다.


양국은 1967년 4월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78년 3월에는 어업 협정, 1978년 12월에는 국제운송소득면제 협정, 1981년 11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3년 8월에는 항공 협정, 1984년 8월에는 사증면제협정, 1999년 5월에는 취업관광사증 협정, 2002년 4월에는 범죄인 인도조약, 2005년 11월에는 영상산업분야 공동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2006년 12월에는 정보통신협력 약정을 체결하였다.


합작투자로는 한·뉴펄프합작회사가 설립되어 1978년 10월부터 생산에 들어갔는데, 뉴질랜드는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한·뉴육우시범목장에 육우 206두를 지원하고 기술자를 파견한 바 있다. 또한, 평택시범낙농목장 개발에도 종우와 낙농기계를 제공하고 전문가를 파견하였다.


1982년부터 한국의 승용차가 뉴질랜드에 연간 200∼300대씩 수출되었으며, 뉴질랜드의 중개상을 통하여 남태평양 도서국에도 진출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뉴질랜드 수출액은 12억 6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석유제품·자동차·어류·무선통신기기 등이며, 수입액은 12억 2000만 달러로 목재류·축산가공품·육류 등이다.


양국간의 친선단체로는 뉴질랜드 한국전참전협회를 비롯하여, 1975년 6월에 창립된 한·뉴협회, 1978년 6월에 창립된 한·뉴의원친선협회, 그리고 1978년 9월에 창립된 한·뉴경제인협회 등이 있고, 재뉴질랜드 교민회도 구성되어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53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오양·동원·대왕수산 등 수산업체가 진출해 있고, 2만 3877명의 한국민 교민과 9095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 3월 26일 뉴질랜드와 수교하였으며, 2006년 현재 외교업무는 주 한국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출처 ^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뉴질랜드』(산업연구원 편, 선진국국별편람, 1986)

[New Zealand in the Making -A Study of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Johnbell Condliffe,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63)


#뉴질랜드 #뉴질랜드여행 #한국과의 관계 #뉴질랜드는 1949년 7월 우리나라를 승인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 중에는 육군과 해군 5350명을 파병하였고 사상자는 120명에 달하였다 #뉴질랜드군은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참전 #영연방군이 치른 가장 큰 격전은 1951년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국군의 제1차 춘계공세를 맞아 경기도 가평에서 벌인 가평전투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9월 가평에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등 영연방 4개국의 6·25참전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뉴질랜드의 한국전참전용사회는 가평전투를 기념하여 1976년 이래 매년 가평북중학교 학생 1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4월 25일을 현충일로 정하고 있어 가평전투는 양국 국민에게 더욱 의의가 깊다 #1962년 3월 26일에는 양국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 #1971년 6월에는 주한 뉴질랜드대사관이 같은 해 7월에는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다 #뉴질랜드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유엔에서의 한국안 공동제안국 및 중심그룹회원으로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왔다 #양국은 1967년 4월 무역 경제협력 협정을 체결 #1978년 3월에는 어업 협정 #1978년 12월에는 국제운송소득면제 협정 #1981년 11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3년 8월에는 항공 협정 #1984년 8월에는 사증면제협정 #1999년 5월에는 취업관광사증 협정 #2002년 4월에는 범죄인 인도조약 #2005년 11월에는 영상산업분야 공동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2006년 12월에는 정보통신협력 약정을 체결 #합작투자로는 한·뉴펄프합작회사가 설립되어 1978년 10월부터 생산 #뉴질랜드는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한·뉴육우시범목장에 육우 206두를 지원하고 기술자를 파견한 바 있다 #평택 시범 낙농목장 개발에도 종우와 낙농기계를 제공하고 전문가를 파견 #1982년부터 한국의 승용차가 뉴질랜드에 연간 200∼300대씩 수출 #뉴질랜드의 중개상을 통하여 남태평양 도서국에도 진출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뉴질랜드 수출액은 12억 6000만 달러 #주종목은 석유제품·자동차·어류·무선통신기기 #수입액은 12억 2000만 달러로 목재류·축산가공품·육류 #양국간의 친선단체로는 뉴질랜드 한국전참전협회 #1975년 6월에 창립된 한·뉴협회 #1978년 6월에 창립된 한·뉴의원친선협회 #1978년 9월에 창립된 한·뉴경제인협회 #재뉴질랜드 교민회도 구성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53명의 선수단이 참가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오양·동원·대왕수산 등 수산업체가 진출해 있고, 2만 3877명의 한국민 교민과 9095명의 체류자가 있다 #북한은 2001년 3월 26일 뉴질랜드와 수교하였으며, 2006년 현재 외교업무는 주 한국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1962년 3월 26일에는 양국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 #1971년 6월에는 주한 뉴질랜드대사관이 같은 해 7월에는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다 #뉴질랜드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유엔에서의 한국안 공동제안국 및 중심그룹회원으로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왔다 #양국은 1967년 4월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78년 3월에는 어업 협정 #1978년 12월에는 국제운송소득면제 협정 #1981년 11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3년 8월에는 항공 협정 #1984년 8월에는 사증면제협정 #1999년 5월에는 취업관광사증 협정 #2002년 4월에는 범죄인 인도조약 #2005년 11월에는 영상산업분야 공동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2006년 12월에는 정보통신협력 약정을 체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