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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된장.soybean paste, ~醬
"된장"soybean paste, ~醬
정의"
우리 조상들의 단백질 공급식품이었답니다. 항암작용이 우수한 우리나라 대표 발효식품 된장. 이제 세계에서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콩을 삶아서 띄운 메주와 소금물을 옹기 독에 넣어 장기간 숙성시킨 다음에 우러난 간장을 떠내고 남은 건더기를 계속 숙성시켜 만든 발효식품으로서, ‘객귀(客鬼) 물리기’와 ‘동티잡이’, ‘액막이’ 등 측신의 노여움을 푸는 주술적인 의례 등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저장음식.
1. 메주로 장을 담가서 장물을 떠내고 남은 건더기로 만든 장.
2. 메주로 재래간장을 담근 뒤에 장물을 떠내고 남은 건더기를 숙성시켜 만든 전통의 발효식품. 된장은 ‘되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최근에는 콩에 밀이나 보리 등의 녹말성분을 섞어 Aspergillus oryzae로 발효시켜 만든 개량된장을 만들기도 한다. 토장국이나 된장찌개를 끓이는 것 외에 나물을 무치거나 양념을 하여 쌈을 싸기도 한다. 또한 된장에는 교취효과가 있어서 생선이나 닭요리에 사용하면 비린내를 없애 음식의 맛을 높일 수 있다.
장의 역사"
된장은 콩의 원산지인 고구려에서 발명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된장을 먹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신문왕이 혼인할 때(683년 2월) 납채품(納采品) 가운데 ‘장시(醬豉)’가 보인다. 장시는 된장에 해당하며 필수적인 부식이자 기본적인 일상북식이면서 또한 의례용 물품인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982년(성종 원년)에 최승로(崔承老)의 건의문과 1049년(문종 3) 개성에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구휼하는 데 된장을 배급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된장은 일반인이 평소에 먹은 음식이고, 계층과 상관없이 광범하게 먹던 음식임을 뜻한다.
조선시대에도 된장은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폭넓게 쓰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된장이 수없이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된장은 하사품, 구휼품, 야인(野人)들의 요구품이자 지급품, 귀화인과 유민(流民)의 정착 지원물품, 군사들의 기본 부식 등으로 쓰였다. 이로 보아 된장은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널리 먹은 부식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여러 조리서에는 된장의 종류와 담그는 법이 등장한다. 『산림경제(山林經濟)』 권2 ‘치선(治膳)’조에는 여러 종류의 장 담그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신앙적 측면에서 거론할 만한 것은 장 담그는 데 길일(吉日)과 꺼리는 날이 있다는 기록이다. “장 담그는 길일은 정묘일(丁卯日)이니 신일(辛日)은 꺼린다. 정월 우수(雨水)와 시월 입동(立冬)에 장을 담근다. 수일(水日)에 장을 담그면 가시[蛆]가 생긴다. 삼복 안 황도일(黃道日)에 콩을 담가 황도일에 쪄서 섞으면 벌레가 없다. 아낙네가 보는 것을 꺼린다. 삼복중에 장을 담그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해돋기 전과 해 진 뒤에 장을 담그면 파리가 안 꾄다. 그믐날 담 아래에서 얼굴을 북으로 돌리고 입 다문 채 말없이 장을 담그면 벌레가 안 꾄다. 초오(草烏:바곳 뿌리) 6~7개를 4푼쯤 잘라서 독에 드리우면 가시가 저절로 죽고 다시는 영영 생기지 않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내용은 일정하게 음양사상이나 주술성을 깔고 있다. 이는 그만큼 된장을 담그는 데 정성을 들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9세기 정학유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삼월령과 유월령에는 된장을 잘 담가서 맛을 잃지 않도록 살피고 정하게 관리하라고 하였다. 『산림경제』나 『농가월령가』의 기록은 된장이 얼마나 소중한 부식이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내용"
한번 담근 된장은 기본적으로 1년 동안 먹어야 하는 대표적인 부식이어서 된장이 정상적으로 잘 숙성되도록 하는 의례나 금기(禁忌)가 필요하였다. 가장 먼저 필요로 한 주술적 내용은 된장 담그는 날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된장은 대개 정월대보름부터 삼월삼짇날까지의 기간에 어떤 날을 정해서 담그는 것이 선호되었다. 전통적으로 일진에 말날, 돼지날, 닭날 등과 같은 덩치가 크고 털이 있는 동물의 날인 유모일(有毛日)이 선호되는 현상이 발견된다. 말은 된장이 ‘맑아져라’는 뜻, 닭은 된장이 ‘달아져라’는 뜻, 돼지날은 돼지의 “꿀꿀”거리는 소리에서 된장이 ‘꿀처럼 달아라’는 뜻을 담은 언어적 유감주술이다.
된장 담그는 날을 택일할 때는 ‘언제 담근 장맛이 좋다’라는 개인의 경험이 중요.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된장을 용날이나 삼짇날에 담가야 가장 맛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날에 담그면 맛이 있다는 뭔가의 기준이 있다는 점이다. 된장이 기온, 바람, 습도 등과 같은 자연조건에 반응하여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사람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힘이 작용하여 맛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택일된 날에 된장을 담그고 난 뒤에는 항아리에 금줄을 두른다. 왼새끼에 숯, 한지 쪽, 붉은 고추를 꽂아서 장독 주둥이에 감아두었다. 그리고 불씨가 살아있는 숯을 장독 안에 집어넣기도 하고 붉은 고추와 대추도 함께 넣었다. 버선본을 장독의 배 부근에 거꾸로 붙여두기도 했다. 거꾸로 붙이는 것은 장독 주둥이로 들어가는 불순한 요소와 잡된 벌레 등으로 인한 부정(不淨)을 발로 짓밟겠다는 강력한 주술적 의미이다. 한편 긍정적인 염원을 표시하여 장맛이 좋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 윤증(1629~1714) 고택에서는 장독에 버선본을 거꾸로 붙이고 장이 꿀처럼 달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꿀독’이라고 외쳤다는 것이 그 예이다.
된장독에 친 금줄에서 왼새끼와 흰색 한지는 장을 신성시한다는 의미이고, 붉은 것은 부정을 물리치는 힘, 숯은 정화력을 각각 상징한다. 된장 맛을 결정하는 데는 일정하게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믿었다. 장독에 금줄을 둘러서 초자연적인 힘 가운데 부정적인 힘을 물리치려고 했다. 담근 된장이 어느 정도 숙성되어 된장에서 간장을 분리하면 금줄을 걷어 낸다. 한편 된장을 담글 때 한지를 입에 물고 진행하는 금기(禁忌)와 같은 것이 있다. 이는 혹시라도 튀는 침을 막아서 된장을 탈 없이 정상적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보편적으로 된장 맛은 담그고 관리하는 솜씨에 따라서 집집마다 달랐다. 이로 인해 한 집의 된장 맛을 그 집의 여타 일까지 연관지어(확대해서) 보려는 태도와 인식이 형성되고 집집마다 전승되어 왔다. 구전으로(속언)“장이 단 집에 복이 많다.”“며느리가 잘 들어오면 장맛도 좋아진다.”“되는 집안에는 장맛도 달다.”, “장 맛 보고 딸 준다.”“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흉한 일이 생긴다.”는 언표들이 그것이다. 이들 표현은 기본적으로 장맛을 가지고 그 집의 가풍, 인심, 흥망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가치관의 발로이다.
된장을 담글 때 주부들은 향후 탈 없이 잘 익도록 신앙과도 같은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된장과 더불어 장에 대한 주부들의 정성과 염원은 장독대를 집안의 성역으로 여기고 장과 장독을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시는 신앙을 형성하게 되었다. 호남지방의 ‘철륭’ 또는 ‘철륭 할마이’와 중·남부지방의 ‘칠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영남지방에서는 ‘이월 할매’라고 하는 여성 신격이 장독대로 내려와서 머물다가 올라가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 신앙은 좁게는 장·장독과 관련되지만 넓게는 주부들이 담당하는 가족의 생명보전에 관한 주요 가사활동을 관장하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된다.
된장 그 자체는 전국적으로 전승되던 ‘객귀물리기’, ‘뜬귀신물리기’, ‘해물리기’, ‘푸레박질’ 거리제, 소삼신 의례, ‘동토잡이’, ‘액막이’, 측신의 노여움을 푸는 주술적인 의례 등에 널리 사용되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객귀물리기 의례에는 된장이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객귀물리기는 저승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귀신(객귀)을 물리치는 의례이다. 지역에 따라서 ‘객구 물리기’, ‘뜬귀신 물리기’, ‘잔밥 먹이기’, ‘물밥 천신’ 등으로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남의 집 음식을 먹고 이유 없이 아플 때 객귀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객귀물리기를 했다.
메주에 소금물을 알맞게 부어 익혀서 장물을 떠내지 않고 그냥 만들기도 한다. 된장은 간장과 함께 예로 부터 전해진 우리 나라의 조미식품(調味食品)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고 맛을 내는 데 기본이 되는 식품이다.
우리 나라에서 콩을 재배한 것은 초기철기시대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선사시대에 우리의 땅이었던 부여는 콩의 명산지였으므로, 콩으로 간장과 된장이 섞인 것과 같은 걸쭉한 장을 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메주를 쑤어 몇 가지 장을 담그고 맑은장도 떠서 썼을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고구려에서 장양(醬釀)을 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양은 장담그기·술빚기 등의 발효성 가공식품을 총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에서는 장담그기를 잘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된장[豉]은 ≪삼국사기≫의 신문왕 폐백 품목에 등장하며, ≪해동역사 海東繹史≫에도 발해에서 된장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된장은 구체적인 제조법이 적힌 문헌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중국의 농서 ≪제민요술 齊民要術≫에 수록된 장담그기의 기본방법은 밀을 쪄서 황곡이 번식되도록 띄워 말린 것에다 콩 끓인 것과 누룩가루·소금을 섞어서 담그는 것이다. 우리의 솜씨를 전수 받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장제조법도 이와 같으므로 우리 나라의 장도 같은 제법에 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도 구체적인 문헌을 찾을 수 없다. 그 시대의 중국 문헌인 ≪거가필용 居家必用≫에 황두(黃豆)와 여러가지 채소로 만드는 담두시(淡豆豉)·함시(鹹豉)가 있고, 밀가루에 밀기울을 섞어 반죽하여 둥글게 뭉쳐서 끈으로 매다는 우리 나라의 메주덩이와 비슷한 맥시(麥豉)라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담두시와 같은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숙성시켜 그 액즙은 장으로, 그 찌꺼기는 된장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장담그는 법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이 등장한다. ≪구황보유방 救荒補遺方≫에 기록된 된장류의 제조를 보면 미장(未醬)은 말장(末醬)으로도 수록되어 있다. 메주는 콩과 밀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그 재료비는 콩과 밀이 2 : 1로 오늘날의 메주와 크게 다르며, 오늘날의 콩으로 만드는 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콩으로 메주를 쑤는 법은 ≪증보산림경제 增補山林經濟≫에서 보이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된장제조법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에는 집에서 된장을 담그기도 하지만 공장에서 제조되어 시판되기도 한다.
≪구황보유방≫에 기록된 제조법을 보면 “콩 한말을 무르게 삶고 밀 다섯되를 볶아 함께 섞어서 메주를 쑤고 더운 온돌에서 띄워 황의(黃衣)가 입혀질 정도로 뜨면 말려서……”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재료의 비례는 오늘날의 일본메주를 연상하게 한다.
탄수화물이 강화된 메주의 재료 개념이 그대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메주로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메주를 쑤어 각형으로 빚어 띄워 말렸다가 장을 담그는 우리의 전형적인 방법이 일본의 고대에도 있었으므로 일본의 장제조의 원류는 우리 나라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증보산림경제≫에 기록된 제조법은 “콩을 물에 씻은 다음 하룻밤 물에 담갔다가 건져서 익힌 것을 절구에 찧어서 둥글게 메주모양으로 만든 다음 한 치 정도의 반월형으로 썰어 만든다. 메주를 띄울 때는 말밥통 모양으로 구덩이를 파고, 한 자 거리를 격한 자리에 사면으로 수도(水道)를 만든다. 발을 엮어 구덩이 중간에 깔고, 만들어진 메주를 하나 하나 보에 싸서 구덩이 위에 매달고 구덩이를 짚이나 풀로 덮어 비바람을 막으면서 그 속에서 띄운다.
메주에 옷이 입혀지기 시작하면 뒤집어 준다. 뜨는 동안 8∼9차 뒤집어 주고 다 뜨면 꺼내어 햇볕에 말린다.”라고 하였다.
땅을 파고 그 속에서 메주를 띄우는 법은 ≪제민요술≫의 콩메주띄우기와 같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이 방법은 오랜 전통을 지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방안에서 띄우는 법만 이어져 오고 있다.
≪규합총서 閨閤叢書≫에서는 집메주장 만드는 법을 “물 한 동이에 소금 두 되 칠 홉을 넣고 메주는 반 독이 못 되게 넣어 칠팔십 일간 익히니라.”라고 하였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집메주장은 간장과 된장을 따로 뜨지 않고 그냥 먹는 된장 단용장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요리법 朝鮮料理法≫·≪이조궁정요리통고 李朝宮廷料理通攷≫·≪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에서는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익혀 간장을 담근 뒤 메주를 건져서 소금을 뿌려 담근다고 하였다.
≪이조궁정요리통고≫에서는 메주에서 간장을 빼지 않고 된장만 담글 때는 소금물의 분량을 적게 붓고 익힌다고 하였고, ≪우리 나라 음식 만드는 법≫에서는 겨울철의 된장은 메주를 너무 띄우지 않고 적당히 띄워 말려서 메주가 겨우 잠길 만큼 물을 붓고 40일쯤 두었다가 만든다고 하였다. 이것은 간장을 빼지 않은 된장 단용장이라고 할 수 있다.
된장" 크게 메주와 소금물을 부어 익혀 간장을 떠내고 남은 건더기에 소금을 넣어 만드는 것과, 간장을 떠내지 않고 만드는 것이 있다. 청국장(전국장)·막장·담북장·빰장·빠개장·가루장·보리장 등도 된장 단용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장은 지역에 따라 독특한 제법을 형성하기도 한다.
청국장" 전국장이라고도 한다. 단기숙성으로 단시일내에 먹을 수 있게 만든다. 보통 콩을 삶아 60℃ 정도로 온도를 낮추어 나무상자나 소쿠리에 담아 볏짚을 덮고 따뜻한 곳에 덮어두어 45℃를 유지시키면서 2∼3일간 띄워 점질이 생기도록 한다. 잘 뜬 콩이 식기 전에 소금·마늘·고춧가루·파를 넣고 찧어서 단지에 담는다.
막장" 날메주를 가루로 빻아 소금물로 질척하게 말아 익히는 장으로, 중부 이북에서는 담그지 않고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특히 잘 담근다. 충청도에서는 보리밥에 메줏가루·고춧가루를 섞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담그고, 경상도에서는 콩과 멥쌀을 섞어 만든 메주로 담근다.
담북장" 메주를 곱게 빻아서 고춧가루를 섞고 물에 풀어서 하룻밤 동안 재웠다가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한다. 충청도에서는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두부의 순물에 풀고, 황해도에서는 보리밥을 죽처럼 쑤어서 메줏가루·고춧가루·소금을 섞어서 만든다.
빰장" 된장만을 목적으로 메주를 굵직하게 빻아서 소금물을 끓여서 식힌 물로 담근 장인데 경상도에서 담근다. 빠개장은 메줏가루에 콩 삶은 물, 고춧가루 및 소금을 섞어서 담근 장으로 충청도에서 담근다.
가루장" 보리쌀을 갈아 찐 것에 메줏가루를 버무려, 끓여 식힌 소금물을 부어 간을 맞춘 장으로 강원도에서 담근다. 보리장은 보리쌀을 삶아 띄운 다음 가루로 빻은 것과 콩메줏가루를 반반씩 섞어서 담근 장으로 제주도에서 담근다.
콩에는 단백질이 38%나 있고, 리놀산·리놀렌산 등의 불포화 지방산이 많이 함유된 지방이 18% 있어 영양상으로 우수하다. 이 콩을 이용하여 만든 된장도 영양이 풍부하다.
100g당 열량이 128cal, 단백질 12g, 지방 4.1g, 탄수화물 14.5g, 회분 17.9g, 칼슘 122㎎, 인 141㎎, 철분 5.1㎎이 함유되어 있고, 비타민 B1과 B2도 0.04㎎, 0.2㎎씩 함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영양이 풍부한 된장은 나물을 무치는 조미료나 토장국 끓이는 데 이용되고 장땡이와 같은 반찬을 만드는 데에도 이용된다. 뿐만 아니라 약으로도 이용되어 ≪동의보감 東醫寶鑑≫에서는 “두통한열(頭痛寒熱)을 다스리고 땀을 내게 한다.
따라서 감기 때 메주와 파를 섞어 먹거나 메주·형개(荊芥)·방풍(防風)·상엽(桑葉)을 함께 달여서 한 사발 마시고 이불을 덮고 있으면 열이 내리게 된다.”고 하였다. 또 “메주는 식체(食滯)를 지우고 천식(喘息)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기본 정보"
구입요령 : 가정에서 만들거나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을 유통기한 확인 후 구입하여 사용한다.
유사재료 : 고추장 (된장, 간장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양념 중 하나로, 고춧가루를 주원료로 찹쌀가루와 메줏가루, 소금, 물 등을 섞은 후 서늘한 곳에서 발효시켜 만든다.), 미소 (미소는 일본식 된장으로 콩에 보리나 쌀, 밀가루 등을 첨가함으로써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특징이 있다.)
보관온도 : 18~25℃
보관일 : 6일
보관법 : 꺼내 먹고 빈 공간 없이 꼭꼭 눌러주어야 맛이 변하지 않는다. 금방 먹을 분량은 덜어다 냉장 보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손질법 : 황국균을 쌀이나 보리와 같은 전분질에 섞어 배양시킨 다음 콩을 삶아 소금과 배합해서 된장을 담근다.
산지특성 및 기타정보 : 된장은 한국의 고유 발효 양념으로 같은 아시아인 일본의 된장과는 구별된다.
섭취 방법 정보"
섭취방법 : 한국 음식에 많이 들어간다. 국, 찌개, 나물무침, 퓨전 요리에 두루 사용한다.
궁합음식정보 : 부추 (부추에는 식이성 섬유가 풍부하고 된장에는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하여 서로 영양적 보완을 해준다.)
다이어트 : 염분이 많아 다이어트 시 주의해야 한다.
효능 : 뇌 건강, 변비 예방 (된장에는 납두균, 레시틴 등의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뇌를 건강하게 하고 섬유질이 풍부해 변비에 효과적이다.)
영양성분"
베타카로틴 0.00㎍ 니아신 1.60mg 나트륨 4,020.00mg 단백질 11.90g 당질 17.80g 레티놀 0.00㎍ 비타민 A 0.00㎍RE 비타민 B1 0.03mg 비타민 B2 0.10mg 비타민 B6 0.22mg 비타민 C 33.00mg 비타민 E 1.08mg 식이섬유 3.10g 아연 0.58mg 엽산 0.00㎍ 인 181.00mg 지질ㅡ 4.70g 철분 1.30mg 칼륨 403.00mg 칼슘 53.00mg 콜레스테롤 0.00mg 회분 12.20g 영양성분 :100g 기준.
우리나라 지방별 사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신덕2리 마을에서는 남의 집 음식을 얻어먹은 가족이 머리가 아프고 식욕이 없고 속이 매스꺼우면 객구가 들린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전승되는 몇 가지 방법으로 객구가 들린 것으로 진단되면 그날 반드시 캄캄한 저녁에 ‘객구밥’을 준비하여 객귀(객구)물리기를 한다. 솥에 물을 부어서 된장을 풀어 넣고 밥과 김치, 나물을 조금 넣고 고춧가루를 풀어 죽이나 국처럼 끓인다.
이것을 바가지에 담아서 식칼과 함께 들고 누워있는 환자 방에 들어가 칼로 바가지를 치기도 하면서 객구를 위협하는 말을 한다. “쒜! 쒜! 객구야 들어봐라, 김가 귀신아, 권가 귀신아, 최가 귀신아! 저 건너 ○○부잣집에 가서 얻어먹지 왜 여기 와서 이러냐? 한 바가지 거룩하게 차려줄 테니 먹고 썩 물러가거라”하고 위협적으로 말하면서 방안에서 식칼을 휘두른다. 이어서 환자에게 생콩 세 알을 씹어 바가지에 뱉으라 하고 식칼로 바가지에 담긴 객구밥물을 찍어서 환자 입에 흘려 넣는다. 식칼로 환자의 머리카락을 잘라 넣듯이 세 번 훑어 넣고는 환자에게 객구바가지에 침을 세 번 뱉게 한다. 그런 뒤에 환자가 누워 있는 방의 문고리에 가서 바가지에 담긴 국물을 식칼로 찍어서 문고리를 씻어 넣고는 마당쪽 방문을 확 열어젖히고 식칼을 마당으로 집어던진다.
이때 식칼이 대문쪽으로 향하면 객구가 나갔다고 판단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식칼을 방안으로 들고 와서 또 한번 위협적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객구야 썩! 물러가라”고 외친 다음 마당으로 식칼 던지기를 한다. 식칼 던지기는 대문쪽으로 칼끝이 향할 때까지 한다. 대문 쪽으로 칼끝이 향하면 대문 밖에 나가 객구밥을 확 뿌려서 쏟아버리고는 식칼로 열십자를 긋고 그 위에 바가지를 엎어 둔다. 이튿날 아침 일찍 나가서 식칼과 바가지를 들고 들어온다. 이렇게 하면 객구가 물러갔다고 여겼다. 이러한 방식은 다른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전승되어 왔다.
이월영등날에도 된장찌개를 끓여서 한 상을 차려 영등할머니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구미시 고아읍 원호1리에서는 음력 이월초하룻날 영등할마이가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면 영등할마이를 대접한다. 이때 밥, 청어, 된장찌개, 구운 김,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등과 함께 정지에 차린다.
전국적으로 거리제에서도 된장이 사용되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3리 서원마을의 거리제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세 갈림길에서 지낸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이면 정성을 들이는 사람으로 도로변이 붐빈다. 제를 지내려면 실과, 명태, 나물, 돈, 시루 등을 마련하고 별도로 짚 한 단 정도를 가지고 가서 고사를 지내는 곳 옆에 불을 피워 놓는다. 먼저 노중님네 소지를 올리고, 이어 식구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모두 올린 뒤 바가지에 된장, 콩, 물을 섞고 제물도 조금씩 떼어 넣는다. 바가지 안의 제물을 숟가락으로 저으면서 “못다 먹었다는 말 말고 거룩하게 다 먹어라.”라고 한다. 고사 축원이 끝나면 바가지에 담긴 것을 거리에 휙 내버린다.
막연한 액막이 주술에도 된장이 사용되었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학동리 갑동마을의 액막이는 운수가 나쁜 사람에게 액땜을 했다. 방법은 그 사람을 눕히고 소금과 된장, 세 가지 잡곡을 머리 위에서 세 번 돌린 뒤 그것을 여러 갈래의 길에 가져가서 버린다.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고내마을 종교직능자의 경우 측신에게 잘못하여 몸이 아파서 문점을 하러 왔다. 그때 ‘맥이’ 방법으로 변소에 도끼를 놓고 그 위에 동전을 올려놓은 후 밥 세 접시와 고춧가루, 소금, 된장 쑥 등을 넣은 접시 세 개를 따로 마련하여 낫 궁뎅이로 치면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떼었다.
제주 아라1동에서는 새집을 지어서 하는 성주풀이에도 된장이 사용되었다. 성주굿은 집을 지어서 이사를 들어갔거나 살다가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경우 하게 된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성주를 모시게 된 경우 성주를 모시면 모두 평안해진다고 한다. 성주굿을 할 때 도시락, 된장, 미역, 소금 등을 싸서 챙겨놓은 다음 성주풀이를 할 때 그것을 문 밖에 내어 놓는다.
집안에 물건을 잘못 들이거나 흙일을 해서 나는 탈을 동토(動土)라 한다. 동토잡이를 할 때에도 된장이 널리 사용되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오동동 마을에서는 매운 고추를 태워서 매운 냄새가 나면 동토가 나지 않은 것이고, 매운 냄새가 나지 않으면 동토가 난 것으로 믿었다. 동토가 난 것으로 진단되면 각성바지 세 집을 찾아가서 구정물(쌀뜨물)을 얻어온다. 거기에 된장, 소금, 고춧가루를 넣고 팔팔 끓여서 이것을 동토가 난 곳에 붓고 두드려가면서 주문을 외면 동토를 쉽게 잡을 수 있다. 마을마다 주문을 잘 외는 사람에게 부탁한다.
그런가하면 어미소가 새끼를 괴롭히면 소 삼신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소삼신을 달래는 주술적 의례를 할 때도 된장이 사용되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3리 서원마을에서는 어미 소가 새끼소에게 젖을 주지 않고 발로 차기도 하면 외양간 앞에 밥, 미역국, 된장을 놓고 함지박에 물을 담아 그 안에 바가지를 엎어놓은 다음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바가지를 두드리면서 경문을 읽었다.
다양한 민간의례에 된장이 사용된 까닭은 된장이 모든 사람에게 두루 식용된 기본적이고 평범한 부식이라는 데 있다. 제주도의 성주를 제외하면 객귀, 액운, 동토, 영등, 측신, 소 삼신, 거리신 등은 모두 잡귀잡신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 또는 이들을 추방하거나 위로하기 위한 의례에서는 평범한 부식인 된장을 이용한 것이다.
2017년 11월 25일 토요일
황충
황충은 남양(南陽, 지금의 허난성 난 양 사람으로 자는 한승(漢升)이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武將)으로 본래 유표(劉表; 142~208)의 부하로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는데, 후에 유비(劉備)에게 투항했다. 더불어 유비를 도와 익주(益州)의 유장(劉璋; ?~219)을 공격하기도 했다. 219년 황충은 정군산(定軍山)에서 조조(曹操)의 부하인 하후연(夏侯淵)을 참수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었고, 그 후에 후장군(後將軍), 관내후(關內侯)로 봉해졌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조운(趙雲)과 더불어 촉한의 ‘오호장군(五虎將軍)’으로 일컬어진다.<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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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武將)으로 본래 유표(劉表; 142~208)의 부하로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는데, 후에 유비(劉備)에게 투항했다. 더불어 유비를 도와 익주(益州)의 유장(劉璋; ?~219)을 공격하기도 했다. 219년 황충은 정군산(定軍山)에서 조조(曹操)의 부하인 하후연(夏侯淵)을 참수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었고, 그 후에 후장군(後將軍), 관내후(關內侯)로 봉해졌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조운(趙雲)과 더불어 촉한의 ‘오호장군(五虎將軍)’으로 일컬어진다.<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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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비의 군대로 편입되다
그러면 나관중은 어째서 황충의 죽음에 대해 이토록 대수술을 가했을까? 사서에 기재된 내용에 근거한다면 황충은 자연스레 천수를 다하고 죽은 것에 해당하며 자신의 안방에서 너무나 평범하게 세상을 하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나관중은 그런 평범한 사실만으로는 황충의 강직함을 표출하기가 부족하고 자극적인 내용이 되지 못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황충으로 하여금 사장(沙場)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도록 함으로써 영웅본색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관중이 황충의 죽음을 동오 정벌전쟁으로 처리한 장면은 깊은 의의와 함께 강렬한 비극적 색채를 발하고 있다.<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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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荊州,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자사 유표(劉表, 142~208)의 휘하에서 중랑장(中郎將)을 맡아, 유표의 조카인 유반(劉磐)과 더불어 장사(長沙, 지금의 후난성 창사시) 유현(攸縣)을 지켰다. 뒤에 조조(위 무제)가 형주를 침입했을 때에는 장사태수 한현(韓玄)의 수하에 있었다.
적벽대전 후에 유비가 형남사군(荊南四郡)을 정벌하였는데, 무릉(武陵, 지금의 후난성 창더(常德)시 우링구) 태수 김선(金旋), 장사태수 한현, 계양(桂陽, 지금의 후난성 천저우(郴州)시 구이양현) 태수 조범(趙範) 및 영릉(零陵, 지금의 허난성 상추(商丘)시 닝링현) 태수 유도(劉度)가 투항했다. 황충 역시 한현을 따라 투항하여 유비의 군대로 편입되어 촉(蜀)나라로 들어갔다.
뒤에 유비와 유장(劉璋, ?~219)의 화의가 깨지자 황충은 가맹관(葭萌關)에서 성도(成都, 지금의 쓰촨(四川)성 청두)로 진격하였는데, 작전 시에 솔선수범을 보였다. 익주(益州, 지금의 쓰촨성과 한중(漢中) 분지 일대)가 평정된 후에 토로장군(討虜將軍)에 봉해졌다.
2. 촉한의 오호장군 중 일인이 되다
219년 유비가 한중(漢中, 지금의 산시(陝西)성 한중시)을 공격할 때 황충은 정군산 전투에서 조조의 대장인 하후연, 조앙(趙昂, ?~219)을 참수하고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에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었을 때 황충을 후장군(後將軍), 관내후(關內侯)로 봉했다. 이때 제갈량이 이렇게 말했다.
“황충의 명성은 여태까지 관우, 마초에 미치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들과 같은 등급이 되었다. 마초와 장비는 부근에 있으면서 친히 그의 공로를 목격했으니 승복할 수 있는데, 관우는 먼 곳에 이 소식을 듣고서 반드시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황충의 등급을 높여줄 것을 결심하고 관우에게 양해를 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관우는 전장군(前將軍), 마초는 좌장군(左將軍), 장비는 우장군(右將軍), 황충은 후장군(後將軍)으로 봉해져 동급이 되었다. 조운과 함께 이들을 촉한의 ‘오호장군(五虎將軍)’이라 부른다.
220년에 황충이 병사하자, 그해 9월에 강후(剛侯)로 추증되었다. 아들로 황서(黄叙)가 있었는데 일찍이 죽어 후손이 끊어졌다.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 부하였으며, 장사태수(長沙太守)로 임명된 한현(韓玄) 휘하의 장수로 장사를 지켰다. 관우(關羽)가 장사성(長沙城)을 공격해와 그와 싸움을 벌였으나 서로 1번씩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이후 위연과 함께 유비를 찾아가 부하 장수가 되었는데 유비 휘하의 관우, 장비(張飛), 마초(馬超), 조운(趙雲)과 함께 오호대장군으로 불렸다. 유비가 익주를 얻을 때 공적을 세웠으며 한중 쟁탈전에서는 적장 하후연(夏侯淵)을 죽이며 맹활약하였고 후장군에 올랐다. 사망 후 강후(剛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국에서 '노익장(老益壯)'의 대명사로 일컫는다.
『삼국지연의』 제83회에선 황충의 죽음에 얽힌 줄거리가 전개된다. 장무 2년(서기222년) 봄, 노장 황충은 동오 정벌의 기치를 든 유비를 따라 나선다. 이릉(彝陵) 전투에 출전한 그는 용기백배하여 동오의 장군 사적(史迹)을 베어 죽이고 선봉장 반장을 물리친다. 하지만 다음날 전투에서 매복하고 있던 오군의 복병에 의해 위기를 맞이한다. 혈로를 뚫으려 동분서주하던 황충은 오장 마충의 화살에 어깨 죽지를 관통 당한다. 겨우 함정을 벗어났지만 연로하고 혈기가 쇠약한데다 화살 맞은 상처의 통증이 지나쳐서 마침내 진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향년 75세였다. 유비는 그의 관을 성도로 옮겨서 고이 안장한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에 근거하면 그 시기와 장소가 다르니 결코 오나라 정벌전에서 죽은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지ㆍ황충전』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황충은 건안 24년(서기219년) 정군산에서 하후연의 목을 벴는데, 이 해에 선주가 한중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음 해인 서기 220년에 세상을 떴는데, 강후(剛侯)로 추시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삼국지ㆍ선주전』에 근거하면 유비는 건안 26년(서기221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개국 연호를 장무로 고쳐 그 해를 장무 원년으로 하였다. 그리고는 그 해 가을인 7월에 대군을 거느리고 동오를 치러갔다고 되어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충이 장무 2년(서기222년)에 죽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상 사서에 기재되어 있는 황충이 죽은 연대와는 2년이란 시차가 있다. 당시 유비는 아직 동오 정벌전에 나서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 황충도 당연히 동오를 정벌하는 과정 중 이릉 땅에서 죽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청나라 때의 『성도현지(成都縣志)』 등의 내용에, ‘청나라 도광(道光)1) 연간에 어느 농부가 성도 서쪽 근교에서 구덩이를 파다가 불에 탄 흔적이 있는 황강후(黃剛侯)란 글자가 새겨진 벽돌과 ‘황강후공 휘충 자한승지묘(黃剛侯公諱忠字漢升之基)’란 묘비를 발굴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곳에다 황충의 묘를 중수(重修)하고 황충의 소상(塑像)을 모신 사당을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발견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유비는 한중왕에 즉위한 후, 위연을 남겨 한중을 진수하도록 하였다. 그때 기타 장령들은 모두 유비를 따라 성도로 돌아갔는데, 노장 황충이 성도에서 죽어 성도에다 장사를 지냈다. 그래서 동오 정벌전에서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상당히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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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오호장 중 삼호장, 즉 관우, 장비, 황충의 죽음이 모두가 동오와의 불화나 전쟁과 관계가 있는데, 이로써 제갈량이 주창한 연오항조(聯吳抗曹)의 책략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촉한의 사업도 크게 손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이릉 대전에서 참패하고 돌아온 유비마저 우울병에 빠져 세상을 하직하게 된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근거하면 마초는 장무 2년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촉한의 장수라곤 연로한 조운만이 남게 된다. 후기에는 점점 더 촉 중의 대장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요화를 선봉장으로 삼는 등 더 이상 방도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때부터 촉한의 원기는 크게 손상을 입게 되니, 비록 제갈량이 있는 힘을 다하여 동분서주하지만 소멸해가는 국가의 명운을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 된다. 그래서 나관중은 황충의 죽음을 통하여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는 숨은 이치를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 제73회에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후 문무백관들에게 그 공훈에 따라 벼슬을 내리고 작위를 봉하는 장면이 나온다.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을 오호대장에 봉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촉한(蜀漢)의 오호장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결코 유비가 오호장을 봉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하다면 오호장은 누가 봉했단 말인가? 그것은 삼국 이야기를 부연한 민간예인들이 봉한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ㆍ촉서(蜀書)』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을 합하여 하나의 전기로 만들었는데, 그 제목을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이라 명명했다. 이 제명이 바로 삼국 이야기를 부연하던 예인들이 오호장이라고 부르게 된 출발점으로 보인다.
『삼국지』 기록을 근거로 하면, 건안24년(서기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 관우에게는 전장군(前將軍)을 배수하고, 장비에게는 우장군(右將軍)을, 마초에게는 좌장군(左將軍)을, 황충에게는 후장군(後將軍)을 배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조운은 그들과 동등한 서열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오호장이라는 말을 언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오호장이란 명칭이 생겨날 수 있었던가? 『삼국지ㆍ조운전』에서 이르기를, ‘성도가 이미 평정되자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진수는 조운을 오호장군의 제일 끝에 두었으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운은 나관중의 손에 의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가장 이상적인 장령이 되었고 그의 위치도 마초와 황충의 앞에 서게 되었다.
오호장이란 명칭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은 『삼국지평화』 하권이다. 유비가 익주를 얻은 부분에서 계속되는 내용으로 ‘유황숙이 오호장을 봉했다. 관우는 수정후(壽亭侯)에 봉하고, 장비는 서장후(西長侯)에, 마초는 정원후(定遠侯)에, 황충은 정란후(定亂侯)에, 조운은 입국후(立國侯)에 봉했다.’고 하였다. 이 내용에서도 조운은 아직 그 서열이 오호장의 맨 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삼국지평화』에서 장군을 봉한 시기는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이니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바로잡았다.
또 『삼국지평화』에서는 다섯 장군이 후(侯)가 되었다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다섯 사람이 제후에 봉해진 시기가 실제 역사상의 시기와 틀리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봉해진 제후의 명칭도 역사적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수정후는 한수정후의 잘못된 기록으로 관우는 한 번도 수정후가 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장비는 마땅히 서향후(西鄉侯)라야 하는데 서장후라 하였고, 마초는 시향후(漦鄉侯)라야 하는데 정원후로, 황충은 관내후(關內侯)라야 옳은데 정란후라 하였으며, 조운은 영창정후(永昌亭侯)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입국후라 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게나 짜 맞추어 놓은 『삼국지평화』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유비가 다섯 장수를 오호장에 봉했다는 내용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호장의 중심어인 호(虎)라는 글자는 다섯 장군의 위엄과 용맹을 높이 드러내 주는 말이다. 오호장이란 명칭은 촉한에만 있을 뿐, 조위나 손오에는 찾아볼 수도 없으니 나관중의 촉한 존중 사상을 여실히 나타낸 경우이다. 삼국 이야기를 즐기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오호장이란 합칭(合稱)을 기꺼이 받이들였다.
『수호전』 제71회에서는 『삼국지연의』를 본받아 송강(宋江)이 ‘마군오호장(馬軍五虎將)’ 다섯 명을 봉한다. 즉 ‘대도 관승, 표자두 임충(林沖), 벽력화 진명(秦明), 쌍편 호연작(呼延灼), 쌍창장 동평(董平)’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오호장의 우두머리인 관승도 청룡언월도를 사용하고 있고, 적마(赤馬)를 타며, 붉은 얼굴에 아름다운 수염까지 흩날리니, 이는 분명 관우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게 아닐 수 없다. 나관중이 연출한 오호장은 오늘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오호장이란 말만 들었다 하면 누구나 관장조마황(關張趙馬黃)의 용맹무쌍한 형상을 저절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문학적 형상의 오호장은 이미 광대한 민중들의 우상이 되었으니, 비록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문학적 수법으로는 크게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결코 유비가 오호장을 봉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하다면 오호장은 누가 봉했단 말인가? 그것은 삼국 이야기를 부연한 민간예인들이 봉한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ㆍ촉서(蜀書)』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을 합하여 하나의 전기로 만들었는데, 그 제목을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이라 명명했다. 이 제명이 바로 삼국 이야기를 부연하던 예인들이 오호장이라고 부르게 된 출발점으로 보인다.
『삼국지』 기록을 근거로 하면, 건안24년(서기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 관우에게는 전장군(前將軍)을 배수하고, 장비에게는 우장군(右將軍)을, 마초에게는 좌장군(左將軍)을, 황충에게는 후장군(後將軍)을 배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조운은 그들과 동등한 서열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오호장이라는 말을 언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오호장이란 명칭이 생겨날 수 있었던가? 『삼국지ㆍ조운전』에서 이르기를, ‘성도가 이미 평정되자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진수는 조운을 오호장군의 제일 끝에 두었으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운은 나관중의 손에 의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가장 이상적인 장령이 되었고 그의 위치도 마초와 황충의 앞에 서게 되었다.
오호장이란 명칭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은 『삼국지평화』 하권이다. 유비가 익주를 얻은 부분에서 계속되는 내용으로 ‘유황숙이 오호장을 봉했다. 관우는 수정후(壽亭侯)에 봉하고, 장비는 서장후(西長侯)에, 마초는 정원후(定遠侯)에, 황충은 정란후(定亂侯)에, 조운은 입국후(立國侯)에 봉했다.’고 하였다. 이 내용에서도 조운은 아직 그 서열이 오호장의 맨 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삼국지평화』에서 장군을 봉한 시기는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이니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바로잡았다.
또 『삼국지평화』에서는 다섯 장군이 후(侯)가 되었다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다섯 사람이 제후에 봉해진 시기가 실제 역사상의 시기와 틀리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봉해진 제후의 명칭도 역사적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수정후는 한수정후의 잘못된 기록으로 관우는 한 번도 수정후가 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장비는 마땅히 서향후(西鄉侯)라야 하는데 서장후라 하였고, 마초는 시향후(漦鄉侯)라야 하는데 정원후로, 황충은 관내후(關內侯)라야 옳은데 정란후라 하였으며, 조운은 영창정후(永昌亭侯)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입국후라 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게나 짜 맞추어 놓은 『삼국지평화』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유비가 다섯 장수를 오호장에 봉했다는 내용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호장의 중심어인 호(虎)라는 글자는 다섯 장군의 위엄과 용맹을 높이 드러내 주는 말이다. 오호장이란 명칭은 촉한에만 있을 뿐, 조위나 손오에는 찾아볼 수도 없으니 나관중의 촉한 존중 사상을 여실히 나타낸 경우이다. 삼국 이야기를 즐기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오호장이란 합칭(合稱)을 기꺼이 받이들였다.
『수호전』 제71회에서는 『삼국지연의』를 본받아 송강(宋江)이 ‘마군오호장(馬軍五虎將)’ 다섯 명을 봉한다. 즉 ‘대도 관승, 표자두 임충(林沖), 벽력화 진명(秦明), 쌍편 호연작(呼延灼), 쌍창장 동평(董平)’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오호장의 우두머리인 관승도 청룡언월도를 사용하고 있고, 적마(赤馬)를 타며, 붉은 얼굴에 아름다운 수염까지 흩날리니, 이는 분명 관우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게 아닐 수 없다. 나관중이 연출한 오호장은 오늘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오호장이란 말만 들었다 하면 누구나 관장조마황(關張趙馬黃)의 용맹무쌍한 형상을 저절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문학적 형상의 오호장은 이미 광대한 민중들의 우상이 되었으니, 비록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문학적 수법으로는 크게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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