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아일랜드.Ireland, Republic of Ireland

아일랜드.Ireland, Republic of Ireland. 정식 국가 명칭은 아일랜드공화국(Republic of Ireland)이며, 북대서양 북동부에 위치한 아일랜드섬은 외부로부터의 잦은 침입을 막아내고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32개 군 중에서 26개 군만이 아일랜드의 영토가 되었으며, 1937년 7월 1일 제정되고 1949년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아일랜드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아일랜드섬은 대서양과 아이리시해() 사이에 있으며, 영국 본토 그레이트브리튼섬과는 얕은 대륙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8세기말 침입한 노르웨이족을 1014년에 격퇴한 후, 12세기부터 700년간 이어져온 영국민의 지배에 저항한 결과 1921년 12월 6일 독립하였다. 

영국-아일랜드 전쟁에서 당시 아일랜드섬의 32개 중에서 6개 군은 영국령 북아일랜드로, 26개 군은 아일랜드자유국으로 분할되었다. 북아일랜드는 카톨릭교도가 많아 한동안 종교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전설 속 여신인 'Ériu(현대어로 에이레 Éire)'에 'land'가 합친 것이다. 행정구역은 26개 카운티(county)로 되어 있다.

게일어로는 에이레(Éire)라고 한다. 수도는 더블린(Dublin)이다. 아일랜드 인구는 458만 명(2011년 기준)이며, 수도 더블린 인구는 127만 명(2011년 기준)이다. 위치는 영국 서부(북위 51° 30'∼55° 30', 서경 5° 30'∼10° 30')에 있으며, 면적은 7만 282㎢로 한반도의 약 1/3, 남한의 약 82%이며, 기후는 온대성 해양기후이다. 주요민족은 켈트족(Celts)이며, 공용어는 게일어와 영어이지만 영국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가톨릭교 93%, 개신교 3.4%, 아일랜드교 2.8%, 유대교 0.06%이다.

아일랜드의 정치체제는 1937년에 채택한 공화제이며,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이다. 대통령은 임기가 7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2011년 현재 아일랜드의 대통령은 1997년 11월에 선출되어 2004년 11월 재선에 성공한 메리 매컬리스(Mary McAleese)이며, 행정수반인 총리는 엔다 케니(Enda Kenny)이고, 부총리는 이몬 길모어(Eamon Gilmore)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각각 5년이다. 하원은 166석으로 중선거구제를 통해서 선출되며, 공화당(Finna Fáil), 통일당(Fine Gael), 노동당(Labour Party), 진보민주당(Progressive Democrats), 민주좌익당(Democratic Left), 녹색당(Green Party), 무소속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60석으로 총리가 지명한 11명, 직능대표에서 선출된 43명, 대학교수 중에서 선출된 6명으로 구성된다.

2009년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 이하 약어)은 2천 213억 달러이며, 1인당 GDP는 4만 1, 416달러, GDP성장률은 -7.1%,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5%를 기록했다. 수출은 1천 141억 달러에 수입은 622억 달러로, 총 교역액은 1천 763억 달러이다.

한국과 아일랜드는 1983년 10월 4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주아일랜드대사관은 1987년 7월 10일에, 주한 아일랜드 공관은 1989년 9월에 개설되었다. 두 나라의 교역액은 2009년을 기준으로 수출이 4억 2,400만 달러에, 수입이 6억 4,500만 달러로 총 10억 6,900만 달러이다. 아일랜드의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는 2005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한국인은 ‘아시아의 아일랜드인’으로 묘사되곤 한다. 식민지의 한(), 강렬한 민족정신,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성, 노인을 공경하는 대가족 전통과 자녀교육열 등이 유사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떠드는 것이나 말싸움을 즐기는 것도 비슷하다. 아일랜드인들은 “자기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말을 한다”는 비난까지 들을 정도다. 서울대 교수 박지향은 『슬픈 아일랜드: 역사와 문학 속의 아일랜드』에서 두 나라의 공통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민족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순결하며 뛰어나다고 믿는 맹목적 애국심, 자신들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그리고 실제로 강대국 곁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 등 두 나라 간에는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닮은 구석이 많다. ······ 무엇보다도 두 민족에게는 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서가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후 동경대학 총장을 지낸 야나이하라 타다오가 ‘한국은 우리의 아일랜드’라고 말했던가 보다.”

일제는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발버둥쳤다. 백인들은 ‘인종주의’로 그런 효과를 얻었지만, 일본의 경우엔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얼핏 보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외양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도 한국과 아일랜드는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 박지향은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양상의 유사함을 넘어서는 차이를 발견해야 했다. 영국인들이 ‘하얀 검둥이’, ‘하얀 침팬지’의 이미지로서의 아일랜드인을 만들어 내었듯이 일본인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청해 보이고, 입은 열려 있고 눈에는 총기가 없으며 무언가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조선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옷을 잘 입은 아이누’, ‘두 발로 서서 걷는 원숭이’라고 비하해서 불렀으며, ‘더럽고, 게으르고, 무지하고 비위생적이고, 냄새나고, 심한 육체노동에는 적합하지만 복잡한 과제를 행할 능력은 없으며, 복종적이고, 따라서 어린애로 다루어져야 하는’ 열등 인간으로 간주하였다. 역사적으로 조선인은 ‘글러먹은 민족’이고 ‘놀기 좋아하고, 게으름이 습속이 되어 있고, 혐오스런 풍속 습관을 가진 민족’으로 진단되었다.”

최근 아일랜드와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건 이 나라가 세계적인 정보화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일보』 2000년 12월 20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지난 1970년대 경제위기를 맞았던 아일랜드는 1980년대 인플레이션이 16~17%까지 치솟고 매년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게 만들었던 불모의 땅. 하지만 10년 전 17.5%에 달했던 실업률은 최근 완전고용 수준인 3.8%까지 떨어졌다. 정부 주도의 강력한 개혁으로 세계 e비즈니스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지난해 총생산(GDP) 대비 해외자본 유입비가 20.2%로 스웨덴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해외 기업 직접투자를 늘리기 위해 추진한 완벽한 자본자유화, 경쟁력 있는 금융 및 물류, 통신인프라 구축 등이 결실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세계 10대 주요 소프트웨어업체 5개 사가 아일랜드에서 주력사업을 벌이고 1,200개의 세계적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면서 발생한 문제는 ‘구인난’. 연간 1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발생하는 가운데 전체 인구가 350만 명에 불과한 아일랜드로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오마에 겐이치는 2000년에 출간한 『보이지 않는 대륙』이라는 책에서 “앞으로 있을 국가 경제의 변화 속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국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아일랜드를 선택하겠다”며 아일랜드가 통신 네트워크와 원거리 통신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미국 보험회사들이 미국과 더블린 간의 ‘시차’를 이용하여 보험금 지급 청구 처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전담 지사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게 흥미롭다.

“미국 보험회사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갈 무렵 당일 접수한 보험금 지급 청구를 아일랜드 지사로 보냈다. 그러면 아일랜드에서는 미국이 잠든 사이에 처리 작업에 착수했다. 시차를 이용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발상이 성공을 거두자 2,500여 개의 미국 기업들이 더블린에 지사를 세워 회사 업무의 일부를 그곳에서 처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더블린에는 25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더블린 거주민의 14분의 1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1988년 1만 달러를 돌파한 아일랜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97년 2만 달러에 이어 2002년 3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15년 후 4만 달러를 내다보고 있다.

2004년 11월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111개 나라를 대상으로 실시한 “2005년에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인가” 조사에서 아일랜드는 1위를 차지했다. 2위에서 5위는 스위스,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호주 등이었다. 이 주간지는 “아일랜드는 안정된 가정과 공동체 생활과 같은 옛 세대의 가치관과 낮은 실업률, 정치적 자유와 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요인들을 결합하는 데 성공해 1위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아일랜드의 국토 면적은 7만 282㎢로 한국(남한)의 5분의 4인데, 계속 인구가 늘어 2004년 4월 현재 404만 명으로, 1871년(405만 명) 이후 13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 인구는 700만 명이었지만, 1840년대 감자 기근으로 10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은 살길을 찾아 아일랜드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인구는 계속 줄어 한때 300만 명을 밑돌기도 했다.

아마티아 센은 1840년대의 기근은 결정적인 방향으로 아일랜드의 속성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이민을 야기시켰으며, 이러한 이민 행렬은 심지어 최악의 항해 조건 속에서도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840년대의 기근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아일랜드가 식량을 수입하기는커녕 부유한 영국에 식량을 수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에선 돈이 없으니까 식량이 있어도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티아 센은 기근이 심한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의 식량 수출은 아일랜드에게는 상당히 큰 고통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복잡한 불신을 지속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일랜드 기근 동안에 영국 재무성의 장관이었던 찰스 에드워드 트리벨리언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경제 정책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기근 확대의 부분적 원인으로 아일랜드인의 습관을 지적했다. 그런 원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감자만 먹는 아일랜드인들의 습관이었는데, 이런 습관은 한 가지 작물에만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기근의 원인에 대한 트리벨리언의 견해는 아일랜드인의 요리에 대한 분석도 결부되었다. ‘아일랜드 서부의 농민 계급 여성들 중에서 감자를 삶는 것 외의 요리 기술을 지닌 여성은 거의 없다.’ ······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의 단조로운 식단에 대해 비난한 것은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좋은 예를 보여 준다.”

아일랜드 인구의 95% 이상이 가톨릭이고 국민의 87%가 일요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아일랜드인들은 신앙심이 강하다. 종교 때문에 빚어진 영국과 아일랜드의 악연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16세기부터 아일랜드를 강력하게 통치하면서 신교도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여러 차례의 폭동이 발생했다. 1641년에 시작된 10년간의 폭동에선 60만 명이 죽었는데, 이때 무자비한 폭동 진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일기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아일랜드인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지금까지도 아일랜드인들이 크롬웰을 미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8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19세기에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했는데, 문제는 영국과의 끈을 버리려 하지 않는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이었다. 그래서 영국에 대항해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극적인 내전이 벌어졌고, 결국 1921년 남과 북의 분단으로 종결되었다. 남쪽은 자치령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인 1948년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변모한 반면, 북쪽은 아직도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다. (참고: 제4장 중 ‘영국 정체성’)

2004년 10월 14~15일에 열린 한국정치학회는 사회협약을 통한 ‘작지만 강한 나라’의 미래를 모색하는 학술회의에서 아일랜드에 주목했다. 아일랜드는 외세의 침략과 피식민지 경험 등 역사적 배경은 물론 강대국 경제에 대한 종속구조, 분권화·파편화된 노조운동, 계급정당이 아닌 포괄정당 중심의 정당 체제 등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1987년 노사정이 타결한 ‘국가재건협약’ 이래로 4개의 노사정 협약을 추가로 체결하는 동시에, ‘국가경제사회협의회’를 구성해 국가발전전략의 기본을 세워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내부 분열에 찌든 한국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강명세는 ‘대외적 취약성’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번영을 누리는 비결은 자신들의 국가 체제가 외적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국내적 합의를 통해 대처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국민적 합의의 대표격은 노사협력”이고, 이제 “노동 부문의 동의·참여를 통한 노동 시장의 개혁 없이는 경제의 질적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강명세는 “아일랜드의 기적은 집권세력의 인식의 전환이 만들어 낸 결과이며, 아일랜드 엘리트들이 시도한 발상의 전환을 한국이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일랜드는 80년대 중반까지 ‘노조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파업이 많았지만, 노사정 협약 덕분에 이젠 파업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며 여객선사인 아이리시 페리사 노조가 최근 파업을 했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됐을 정도라고 한다. 2005년 3월 21일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가 한국을 방문함에 따라 아일랜드식 사회협약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도 고조되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아일랜드인은 360여 명이다(아일랜드 거주 한국인은 500여 명). 이들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아직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더러 있어 서글프다”고 말한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조나단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은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계 아일랜드인이라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서 이중적 정체성 문제로 고심하였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예이츠는 이를 가리켜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고독’이라고 불렀다.

아일랜드는 유럽 국가들 중 민족적 자부심이 가장 강한 나라이며, 민족적 정체성 만들기에도 열성이다. 2005년 3월 29일 아일랜드 정부는 서부해안 지역을 시작으로 도로 표지와 공공 지도 등에서 영어를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일랜드의 고유 언어인 겔릭어를 쓰라는 것이지만, 정부와 국회 내에서 이뤄지는 토론 중 불과 1%만 겔릭어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라 ‘겔릭어 살리기 운동’의 길은 험난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잉글랜드.United Kingdom.3

잉글랜드.United Kingdom.

영국 브리튼섬의 켈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로마의 지배였다. 로마제국의 갈리아 지방 통치자로 프랑스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종족이 브리튼인의 지지를 받아 저항했기 때문에 이를 응징하고자 BC 55년과 BC 54년의 두 차례에 걸쳐 브리튼섬에 원정하였다. 

브리튼의 부족들은 연합하여 로마군에 대항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격파하고 템스강 주변의 일부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는 본국의 전쟁 때문에 3개월 만에 영국을 떠났으며, 로마인의 본격적인 공격은 약 1세기 후에야 이루어졌다.

랭커스터(Lancaster) ·맨체스터(Manchester) ·윈체스터(Winchester) ·체스터(Chester) ·레스터(Leicester) ·글로스터(Gloucester) ·우스터(Worcester) 등의 지명 어미 '스터(ster)'는 당시의 병영지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성곽, 이른바 Castra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인의 비극을 말해주는 이케니 부족의 여왕 보아디케아의 반란과 이에 따른 참패의 비화가 유명하다.

로마 제정시대에 들어와 클라우디우스는 43년 원정군을 일으켰고, 8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스코틀랜드까지 침공하였다. 그후 로마인은 타인 하구에서 솔웨이만까지 브리튼섬을 동서로 횡단하는 장성을 구축하였다. 

현재의 잉글랜드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약 4세기 동안 지배하였고, 런던이 상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의 유적은 여러 군데 남아있는데, 런던 등지의 성벽 일부와 바스에서 발굴된 온천이 특히 눈길을 끈다. 

카누트왕이 죽은 뒤 데인 왕조는 2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후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이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앵글로색슨 계통의 왕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1066년 에드워드가 죽은 뒤 의동생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공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영국으로 진격해 왔으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군을 격파, 윌리엄 1세(정복왕)가 되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말하는 노르만정복(Norman conquest)이다. 그는 대륙의 봉건제를 채택하였으며, 앵글로색슨인의 토지를 노르만 제후에게 봉지로서 나누어 주었다. 또 전 잉글랜드의 토지 ·인구 ·가옥 등을 기재한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을 작성하여 왕실 재정의 기초를 굳히고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시작하였다.

둠즈데이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날을 의미하는데 이 장부에 기재된 사항이 최종적 권위라는 뜻에서 그렇게 명명하였다. 후일 지주와 지배계급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봉건적 억압을 ‘노르만의 멍에’라 하여 저주하고, 옛날의 앵글로색슨 사회를 이상향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대립한 윌리엄 1세는 교회에 대한 국왕의 관리권을 주장하고 주법정과 교회법정을 분리하여 왕권을 신장시켰다. 교회재판권을 둘러싼 헨리 2세와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의 싸움, 또 후일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한 영국국교회 확립의 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헨리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조카 스티븐과 딸 앙주 백작부인 마틸다 사이에는 왕위계승권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스티븐이 죽은 후에는 결국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프랑스에서 와서 왕위에 올랐다. 이에 플랜태저넷(앙주)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세력을 회복한 제후를 누르고, 재판제도의 정비, 관료제와 용병제의 확립 등으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십자군으로 유명한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존왕, 이른바 실지왕은 헨리 2세 이래의 대륙 영토의 절반을 잃고 중과세를 부과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다. 이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에 러니미드에서 존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대헌장)에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에드워드 3세 때 주와 도시의 대표가 왕에게 청원서를 내면 이를 귀족과 고위성직자가 심의하는 관행이 생겨 상하 양원제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대륙령을 잃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왕이 지배하려고 하였고 웨일스는 곧 잉글랜드령이 되었다. 1313년 에드워드 2세군을 대파한 스코틀랜드는 독립이 유지되어 곧바로 편입되지 못하였다.

이 헌장은 봉건제후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만, 런던 이하 자유시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유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적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 그의 아들 헨리 3세도 남은 대륙령을 상실하고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주대표 몽포르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항하였다. 또한 귀족들은 시민대표도 포함시킨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의회의 기원이며, 3명의 에드워드왕 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제국의 기초.
스튜어트 왕실은 명예 혁명으로 시민 계층 사이에 타협점을 찾았으나, 결국 하노버 가문에게 왕실을 넘겨 주게 되었다. 한편 하노버 왕조는 시민 계층과의 타협 수준을 넘어 공존을 향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발전은 왕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영국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모습들을 살펴볼 것이다.

영국의 절대왕정, 시민혁명.
장미전쟁에 참여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가신단()을 거느리는 귀족의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 향신()과 시민을 추밀원()에 기용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하여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 재정을 굳건히 하는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가 처형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에 양모가격의 등귀()에 따른 인클로저운동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밑에서 섭정()한 서머싯 공과 그의 실각 후 등장한 워릭 백작은 가톨릭을 따른다는 교지() 내용마저 신교로 바꿈으로써  헨리의 기존 사업을 더욱 철저히 추진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가톨릭으로 되돌아갔으며, 수장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가톨릭과 신교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치적 불안, 특히 몰수된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다.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1559) 신앙개조()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 공히 확립시켰다.  

가신단의 해체, 수도원령의 몰수, 인클로저운동 등으로 생긴 빈민대책으로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과 도제조례()를 제정하는 등 국내정책을 충실히 하는 한편, 식민사업도 추진하였으며, 러시아회사 ·레반트회사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설정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영국해군이 격파한 것도 이에 한몫하였다.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어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가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가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제임스가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대립하는 일은 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더욱 두드러졌다. 

공채()나 조세()는 의회의 찬성을 받아야 하며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이  1628년 의회에 의하여 통과되자 왕은 의회를 해산하였다. 왕은 재원 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다시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탁, 각지의 왕당파 지지를 얻어 다시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 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그가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을 존중하는 브레다 선언으로 맹세하게 하는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윽고 의회는 가톨릭 교도인 왕제()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가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 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이다.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국왕은 의회 내에 존재한다는 명예혁명이 성립되었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권리장전()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에 권리장전은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시민혁명의 결과는 이후 정치혁명의 토대를 마련하여 영국제국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정치혁명, 산업혁명

정치혁명 시대 말에 이르러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 아래 복위를 꾀하자 1690년부터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방안으로 1692년 국채 발행이 시작되었으며,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전비 재원· 화폐 개주()·무역차액· 법정이자율 등의 문제에 관하여 중상주의자들이 활발히 논의하였다. 윌리엄 치세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 에스파냐 계승 전쟁에 관여한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 지방, 지중해의 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다. 영국은 절대왕정 이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시켰다. 

운명을 같이 한 스코틀랜드와 합쳐 영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윌리엄과 앤 시대에 휘그당와 토리당은 교대로 정권을 잡았으나, 앤의 사후 독일의 하노버가에서 왕위를 계승한 조지 1세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치세는 휘그당의 전성기였다. 1721∼1742년의 월폴 정권과 1756∼1762년의 대()피트 정권이 이의 대표적인 경우다. 월폴은 책임내각제를 확립하였으며, 토리와도 협조하여 남해포말회사() 사건 후의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피트는 7년전쟁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였으며, 1763년의 강화로 캐나다, 미시시피 동쪽 지방을 영유하는 영국 제국의 길을 열었다. 1760∼1820년의 조지 3세 재위 기간에는 토리 정권이 집권하였다.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의 전분야가 크게 변하였다. J.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R.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S.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E.카트라이트의 역직기() 등이 잇따라 발명된 데다 J.와트의 개량 증기기관도 가세하여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이 달성되었다. 또한 새 기술은 제철·채탄에도 파급하였고, 나중에는 철도부설에까지 이르렀다. 

프랑스가 18세기 말의 정치혁명으로 염원한 사회를 영국이 경제혁명에 의해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 1846년의 곡물법 폐지, 1849년의 해운법 폐지 등은 모두 산업자본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이다. 

산업자본의 발전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이 불가피하였다. 1799년의 단결금지법, 1819년의 피털루사건 후에 있었던 6법 등의 입법에 의한 탄압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고 노동조합의 결성도 이루어져 1834년에는 전국노동조합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농촌에서도 제2차 인클로저 운동, 비료 개량, 탈곡기의 보급 등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동안 농촌에서 탈곡기 파괴 운동, 도시에서 방직기 파괴 운동 등이 일어났으나 이러한 저항도 자본주의의 진전을 막지 못하였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J.벤담의 정치학, A.스미스, D.리카도의 경제학 등 자유주의 사상이 중상주의를 대신한 새시대의 요청에 따라 등장하였다. 매년선거·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을 벌였는데, 

그 결과 1867년과 1884년에 선거법이 개정되어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다. 조지 3세 시대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에 이어졌고 1837~1901년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 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는 한편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다. 특히 수에즈운하의 매입과 이집트의 보호령화 등에 의해 영국 제국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영국의 왕위계승.

프랑스는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죽은 뒤 발루아 왕조로 바뀌었는데, 이를 빌미로 하여 영국은 카페가의 혈통을 가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133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전쟁의 발단이다. 백년전쟁은 왕위계승전인 동시에 과거에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앙주령을 회복하고 최대의 양모시장인 플랑드르 지방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전쟁의 전반에는 영국군이 유리하여 한때는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승리하지 못하여 마침내 칼레 외의 모든 대륙령을 상실한 상태로 전쟁이 끝났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2년 뒤에는 국내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1455년부터 30년간 내전이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랭커스터공이 장남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즉위, 헨리 4세로서 랭커스터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파와 에드워드 3세의 막내아들의 손자 요크공 리처드를 옹립하는 요크파가 대립한 것이다. 이 전쟁은 양가의 문장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렀다. 

리처드가 전사하였지만 요크파가 승리하자 헨리 6세는 망명하고, 에드워드 4세가 요크왕조를 열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 때, 왕이 어린 것을 틈타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왕과 그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는데,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웨일스의 튜더가의 헨리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여 헨리 7세가 되고,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그동안, 노르만 때문에 앵글로색슨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노화된 농민의 지위는 14세기에 들어서부터 차츰 향상되었고, 농민의 계층문화가 진행되었다. 

1348∼49년의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인구의 1/4 이상이 사망하자 살아 남은 농민의 지위가 문제였다. 영주계급은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억압을 강화하였지만 농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와트 타일러 등이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실패했으나 농민의 감소로 나타난 부역의 폐지와 지대의 인하, 영주직영지의 대출 등이 부득이하여 장원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14세기에 영국의 무역은 양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머천트 스테이플러스가 일종의 상인 길드로서 무역독점권을 가지고 왕실재정의 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테이플러스의 규제에서 벗어난 모험상인의 활약이 뚜렷해졌으며, 15세기에 들어서자 모험상인회사가 등장하여, 모직물 무역의 독점권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설립된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서 영국은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국제정치에서의 주도권은 미국과 소련에 빼앗겨,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던 때와는 물론 상대적 지위가 떨어진 제1차 세계대전 후와 비교하여도 국제 사회 내에서의 지위가 크게 하락하였다. 영국은 미국을 지도자로 하는 대()사회주의권을 구성하는 동시에, 구()영국경제권에 대한 미국자본의 침투를 막아야 했으며, 또 미·소 양국에 대한 독자적 세력형성을 위하여 이루어진 EEC(European Economic Community:유럽경제공동체)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외교정책의 수립과 집행에서 노동당, 보수당의 양대 정당이 기본적으로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영국 외교의 오랜 전통이다. 일시적으로 노동당과 보수당이 1956년 수에즈 사건을 둘러싸고 대립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비슷한 외교정책이 계승되고 있다. 특히 전쟁 이후 정체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부흥을 이룩한 서독·프랑스·이탈리아의 경제가 중심이 된 경제적 광역주의(), 즉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대하여 양당의 정부가 각각 동일한 태도를 취하였다. 

1960년 1월 영국은 오스트리아·덴마크·노르웨이·포르투갈·스위스·스웨덴 등과 함께 공업제품의 역내 자유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유럽자유무역연합(European Free TradeAssociation:EFTA)을 결성하여 EEC에 대항하였다. 가맹국가 간의 무역량은 연평균 약 6%의 증가를 보였고, 7년 후에는 공업제품의 무역할당과 관세의 폐지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EEC와 달리 지역적으로 인접국이 아닌데다 경제통합의 필연성도 EEC만큼 크지 않고, 또한 모든 가맹국이 EEC 국가와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EFTA는 처음부터 EEC에 비해 더 큰 어려운 문제를 안게 되었다. 

1961년 맥밀런 보수당 정부는 EEC 가맹을 신청했으나 1963년에 프랑스가 이를 거부하였다. 1964년 이래 윌슨 노동당 정부도 EEC 참가를 기본 외교방침의 하나로 삼았다. 프랑스가 영국의 EEC 참가를 거부한 이유는 영국과 영국연방 국가의 특례관계에 따라 연방국가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싼 가격으로 역내에 유입되면 프랑스의 주요 산업인 농업이 타격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연방국가와의 관계단절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태도와 연방국가의 압력 사이에 끼여 EEC 가맹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윌슨 정부도 연방국가의 기본적 이익유지를 외교방침으로 밝혔기 때문에 가맹문제가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영국의 대영국연방국가 수출은 1954년 이후 11년 동안 48%에서 35%로 감소하고, 반대로 대 서유럽 수출은 28%에서 38%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윌슨 정부를 뒤이은 히스 보수당 정부도 유럽공동체(EC:1967년 EEC ·ECSC ·Euratom이 통합) 가맹교섭을 속행하였으며, 덴마크·노르웨이·아일랜드 3개국과 영국을 포함한 ‘확대 EC’를 1973년 1월에 발족시키겠다는 합의가 EC가맹국과의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는 영국이 유럽과 영연방 중 경제적으로는 유럽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연방 여러 나라로부터의 특례 수입에 의존해온 1차상품 가격이 상승하였으며, 연방국가는 영국 외의 국가와 관계를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은 중국의 공산혁명 이후 재빨리 공산당 정부를 승인하여 외교관계를 맺고 현대화 지원 등 경제협력에 적극 나섰다. 또한 1984년 12월 영국은 중국과 홍콩반환협정에 정식 조인하여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미국·일본 등 태평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모색한 것은 그 일례이다. 연방문제뿐만 아니라 영국은 경제적·외교적·군사적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지만, EC 가맹으로 이 점에 관한 궤도 수정도 부득이하였다. 그러나 원래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강경한 대(소련 태도 및 중공 불승인정책과는 입장을 달리한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취했다. 

1954년의 월남휴전협정 때에는 소련과 공동의장국을 구성하고, 1957년에는 소련과 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또 인도 독립 때에는 영국연방에 대한 공화제 가입을 인정함으로써 연방제도가 전후의 새 국제 정세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열어두었다. 그후에도 전쟁 전의 구제국주의 정책을 버리고 여러 속령의 독립을 촉진하면서 이들 신흥국과의 새로운 우호관계 수립 방침을 취해온 것은 전통적인 현실주의 외교 노선의 표현이었다. 

맥밀런이 소련에 직접 찾아가 미·소간 데탕트의 발단을 만든  외교 실적도 두드러진다.  1992년 11월에는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영국을 방문하고 1766년 이후 처음으로 영·러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990년대 들어와 영연방국가, 미국 및 유럽 국가와의 유대강화 및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을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았다. 

전임 총리 대처는 1990년 10월 로마에서 열린 EC 정상회담에서 다른 11개 회원국이 합의하여 만든 유럽중앙은행 창설(1994년 1월 1일 개설 목표)에 반대하는 등 유럽 연합에 대해 반대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후임 총리 메이저가1993년 유럽통합조약 비준법안을 통과시켰다.
 
1997년 발족한 토니 블레어 정권은 유럽연합(European Union:EU)의 확대, 심화에 공조하면서 세계 지역분쟁에 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2001년 9월의 미국 세계무역센터 폭발테러사건 이후 미국과 함께 군사행동, 외교활동, 인도 지원 분야 등에서 국제 테러와의 전쟁 및 아프가니스탄 부흥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2007년 1월 기준으로 영국은 최근까지 미국과 함께 이라크 군사시설에 대한 군사공격을 수시로 가하고 있다. 그러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별개로 유럽연합 산하 독자적인 방위군 창설에 관심이 많은 유럽국가들이 미국의 NATO에 대한 주도권을 거부할 경우 영국의 입장은 상당히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초의 수상 월폴.
휘그당을 이끌던 제임스 스탠호프(James Stanhope)와 타운센드(Lord Townshend) 경은 토리당의 세력이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휘그당을 단결시키지 못했다. 특히 스탠호프가 이끄는 휘그당은 국왕의 귀족 서임권을 제한하려고 상원 내 휘그당 출신의 귀족 수를 과반수 이상으로 늘리려고 시도했으나 월폴에 의해 저지당했다. 월폴은 당시 휘그당 소속이면서 추밀원장으로 왕을 보필하고 있었다.

1720년 정부가 일으킨 증권 붐을 타고 커진 남해 회사가 파산함으로써 많은 정계와 재계 인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 '남해의 물거품(South Sea Bubble)' 사건에 의해 타운센드를 추종하는 세력들도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이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던 월폴은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어 조지 1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이제 정권은 당권 중심에서 인물 중심으로 그 판도가 바뀌게 되었다.

영국(이제부터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그리고 일부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의 정치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란 호칭에서 '영국'이란 호칭으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봄)의 역사상 초대 수상이라고 할 수 있는 월폴은 20여 년 간 조지 1세와 2세 두 왕을 모시면서 수상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를 정립시켜 놓았다.

폴은 외교 문제를 처남인 타운센드 경에게 맡기고 자신은 국내 문제에만 주력했는데, 다행히 외교적으로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의 국내 통치가 한층 돋보였다. 그는, 첫째 조세를 감면하고, 둘째 성공회와 토리당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고, 셋째 당쟁 때문에 일어났던 과거의 잔인한 모습들을 배격하면서 국내 정치를 펼쳐 나갔다. 덕분에 조지 1세 시절이 평화롭게 안착되면서 하노버 왕조의 첫 단추가 잘 끼워지게 되었다.

조지 1세를 계승한 조지 2세(1727~1760년)는 월폴을 더욱 애지중지했다. 또 거기에다 월폴을 지지했던 왕비 캐롤라인의 말을 누구보다 왕이 잘 들었기에 월폴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져 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확고한 위치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엉뚱하게도 상업적 국수주의가 고개를 들게 됨으로써 일어났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남미 대륙에서 노예 무역의 독점권을 가진 영국은 이 이권을 이용하여 노예 대신에 여러 가지 상품을 밀무역했다. 그러던 중 레베카라는 상선을 가지고 장사하던 젠킨스라는 선장이 에스파냐 군인의 검문을 받다가 반항하여 귀가 잘리는 '젠킨스의 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이 영국 의회에 알려졌는데, 의회는 이에 대해 '영국에 대한 에스파냐의 도전'이라 하였고, 더욱이 월폴에 반대 입장에 서 있던 토리당의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st Earl of Chatham)는 '가만히 있는 것은 굴욕적인 것'이라며 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소리들 때문에 평화를 주장하던 월폴은 자신의 노선을 깨뜨리고 1739년 에스파냐와 '젠킨스 귀' 전쟁을 시작했는데, 당시 전쟁의 필요성을 소리 높이 외치던 의회는 이 전쟁에서 총체적 지지를 선뜻 허락치 않음으로써 월폴은 의회에 농간당한 꼴이 되었다. 그 결과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이로써 1742년 그가 오랫동안 지켜 오던 수상직을 사임하고 옥스퍼드 백작을 서임받아 상원에 진출했다.

월폴의 초대 수상 시기가 마감되었으나, 20여 년이라는 그의 재임 기간 때문에 영국 정계 내에서 수상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월폴 이후의 차기 수상들은 평화를 부르짖으며 자국의 발전에만 신경썼던 월폴 때와는 달리 점차 대륙 문제나 식민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