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아일랜드섬은 대서양과 아이리시해(海) 사이에 있으며, 영국 본토 그레이트브리튼섬과는 얕은 대륙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8세기말 침입한 노르웨이족을 1014년에 격퇴한 후, 12세기부터 700년간 이어져온 영국민의 지배에 저항한 결과 1921년 12월 6일 독립하였다.
영국-아일랜드 전쟁에서 당시 아일랜드섬의 32개 중에서 6개 군은 영국령 북아일랜드로, 26개 군은 아일랜드자유국으로 분할되었다. 북아일랜드는 카톨릭교도가 많아 한동안 종교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전설 속 여신인 'Ériu(현대어로 에이레 Éire)'에 'land'가 합친 것이다. 행정구역은 26개 카운티(county)로 되어 있다.
게일어로는 에이레(Éire)라고 한다. 수도는 더블린(Dublin)이다. 아일랜드 인구는 458만 명(2011년 기준)이며, 수도 더블린 인구는 127만 명(2011년 기준)이다. 위치는 영국 서부(북위 51° 30'∼55° 30', 서경 5° 30'∼10° 30')에 있으며, 면적은 7만 282㎢로 한반도의 약 1/3, 남한의 약 82%이며, 기후는 온대성 해양기후이다. 주요민족은 켈트족(Celts)이며, 공용어는 게일어와 영어이지만 영국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가톨릭교 93%, 개신교 3.4%, 아일랜드교 2.8%, 유대교 0.06%이다.
아일랜드의 정치체제는 1937년에 채택한 공화제이며,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이다. 대통령은 임기가 7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2011년 현재 아일랜드의 대통령은 1997년 11월에 선출되어 2004년 11월 재선에 성공한 메리 매컬리스(Mary McAleese)이며, 행정수반인 총리는 엔다 케니(Enda Kenny)이고, 부총리는 이몬 길모어(Eamon Gilmore)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각각 5년이다. 하원은 166석으로 중선거구제를 통해서 선출되며, 공화당(Finna Fáil), 통일당(Fine Gael), 노동당(Labour Party), 진보민주당(Progressive Democrats), 민주좌익당(Democratic Left), 녹색당(Green Party), 무소속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60석으로 총리가 지명한 11명, 직능대표에서 선출된 43명, 대학교수 중에서 선출된 6명으로 구성된다.
2009년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 이하 약어)은 2천 213억 달러이며, 1인당 GDP는 4만 1, 416달러, GDP성장률은 -7.1%,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5%를 기록했다. 수출은 1천 141억 달러에 수입은 622억 달러로, 총 교역액은 1천 763억 달러이다.
한국과 아일랜드는 1983년 10월 4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주아일랜드대사관은 1987년 7월 10일에, 주한 아일랜드 공관은 1989년 9월에 개설되었다. 두 나라의 교역액은 2009년을 기준으로 수출이 4억 2,400만 달러에, 수입이 6억 4,500만 달러로 총 10억 6,900만 달러이다. 아일랜드의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는 2005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아일랜드의 정치체제는 1937년에 채택한 공화제이며,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이다. 대통령은 임기가 7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2011년 현재 아일랜드의 대통령은 1997년 11월에 선출되어 2004년 11월 재선에 성공한 메리 매컬리스(Mary McAleese)이며, 행정수반인 총리는 엔다 케니(Enda Kenny)이고, 부총리는 이몬 길모어(Eamon Gilmore)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각각 5년이다. 하원은 166석으로 중선거구제를 통해서 선출되며, 공화당(Finna Fáil), 통일당(Fine Gael), 노동당(Labour Party), 진보민주당(Progressive Democrats), 민주좌익당(Democratic Left), 녹색당(Green Party), 무소속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60석으로 총리가 지명한 11명, 직능대표에서 선출된 43명, 대학교수 중에서 선출된 6명으로 구성된다.
2009년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 이하 약어)은 2천 213억 달러이며, 1인당 GDP는 4만 1, 416달러, GDP성장률은 -7.1%,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5%를 기록했다. 수출은 1천 141억 달러에 수입은 622억 달러로, 총 교역액은 1천 763억 달러이다.
한국과 아일랜드는 1983년 10월 4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주아일랜드대사관은 1987년 7월 10일에, 주한 아일랜드 공관은 1989년 9월에 개설되었다. 두 나라의 교역액은 2009년을 기준으로 수출이 4억 2,400만 달러에, 수입이 6억 4,500만 달러로 총 10억 6,900만 달러이다. 아일랜드의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는 2005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한국인은 ‘아시아의 아일랜드인’으로 묘사되곤 한다. 식민지의 한(恨), 강렬한 민족정신,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성, 노인을 공경하는 대가족 전통과 자녀교육열 등이 유사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떠드는 것이나 말싸움을 즐기는 것도 비슷하다. 아일랜드인들은 “자기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말을 한다”는 비난까지 들을 정도다. 서울대 교수 박지향은 『슬픈 아일랜드: 역사와 문학 속의 아일랜드』에서 두 나라의 공통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민족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순결하며 뛰어나다고 믿는 맹목적 애국심, 자신들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그리고 실제로 강대국 곁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 등 두 나라 간에는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닮은 구석이 많다. ······ 무엇보다도 두 민족에게는 한(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서가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후 동경대학 총장을 지낸 야나이하라 타다오가 ‘한국은 우리의 아일랜드’라고 말했던가 보다.”
일제는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발버둥쳤다. 백인들은 ‘인종주의’로 그런 효과를 얻었지만, 일본의 경우엔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얼핏 보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외양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도 한국과 아일랜드는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 박지향은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양상의 유사함을 넘어서는 차이를 발견해야 했다. 영국인들이 ‘하얀 검둥이’, ‘하얀 침팬지’의 이미지로서의 아일랜드인을 만들어 내었듯이 일본인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청해 보이고, 입은 열려 있고 눈에는 총기가 없으며 무언가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조선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옷을 잘 입은 아이누’, ‘두 발로 서서 걷는 원숭이’라고 비하해서 불렀으며, ‘더럽고, 게으르고, 무지하고 비위생적이고, 냄새나고, 심한 육체노동에는 적합하지만 복잡한 과제를 행할 능력은 없으며, 복종적이고, 따라서 어린애로 다루어져야 하는’ 열등 인간으로 간주하였다. 역사적으로 조선인은 ‘글러먹은 민족’이고 ‘놀기 좋아하고, 게으름이 습속이 되어 있고, 혐오스런 풍속 습관을 가진 민족’으로 진단되었다.”
최근 아일랜드와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건 이 나라가 세계적인 정보화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일보』 2000년 12월 20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지난 1970년대 경제위기를 맞았던 아일랜드는 1980년대 인플레이션이 16~17%까지 치솟고 매년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게 만들었던 불모의 땅. 하지만 10년 전 17.5%에 달했던 실업률은 최근 완전고용 수준인 3.8%까지 떨어졌다. 정부 주도의 강력한 개혁으로 세계 e비즈니스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지난해 총생산(GDP) 대비 해외자본 유입비가 20.2%로 스웨덴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해외 기업 직접투자를 늘리기 위해 추진한 완벽한 자본자유화, 경쟁력 있는 금융 및 물류, 통신인프라 구축 등이 결실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세계 10대 주요 소프트웨어업체 5개 사가 아일랜드에서 주력사업을 벌이고 1,200개의 세계적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면서 발생한 문제는 ‘구인난’. 연간 1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발생하는 가운데 전체 인구가 350만 명에 불과한 아일랜드로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오마에 겐이치는 2000년에 출간한 『보이지 않는 대륙』이라는 책에서 “앞으로 있을 국가 경제의 변화 속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국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아일랜드를 선택하겠다”며 아일랜드가 통신 네트워크와 원거리 통신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미국 보험회사들이 미국과 더블린 간의 ‘시차’를 이용하여 보험금 지급 청구 처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전담 지사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게 흥미롭다.
“미국 보험회사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갈 무렵 당일 접수한 보험금 지급 청구를 아일랜드 지사로 보냈다. 그러면 아일랜드에서는 미국이 잠든 사이에 처리 작업에 착수했다. 시차를 이용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발상이 성공을 거두자 2,500여 개의 미국 기업들이 더블린에 지사를 세워 회사 업무의 일부를 그곳에서 처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더블린에는 25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더블린 거주민의 14분의 1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1988년 1만 달러를 돌파한 아일랜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97년 2만 달러에 이어 2002년 3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15년 후 4만 달러를 내다보고 있다.
2004년 11월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111개 나라를 대상으로 실시한 “2005년에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인가” 조사에서 아일랜드는 1위를 차지했다. 2위에서 5위는 스위스,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호주 등이었다. 이 주간지는 “아일랜드는 안정된 가정과 공동체 생활과 같은 옛 세대의 가치관과 낮은 실업률, 정치적 자유와 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요인들을 결합하는 데 성공해 1위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아일랜드의 국토 면적은 7만 282㎢로 한국(남한)의 5분의 4인데, 계속 인구가 늘어 2004년 4월 현재 404만 명으로, 1871년(405만 명) 이후 13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 인구는 700만 명이었지만, 1840년대 감자 기근으로 10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은 살길을 찾아 아일랜드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인구는 계속 줄어 한때 300만 명을 밑돌기도 했다.
아마티아 센은 1840년대의 기근은 결정적인 방향으로 아일랜드의 속성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이민을 야기시켰으며, 이러한 이민 행렬은 심지어 최악의 항해 조건 속에서도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840년대의 기근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아일랜드가 식량을 수입하기는커녕 부유한 영국에 식량을 수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에선 돈이 없으니까 식량이 있어도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티아 센은 기근이 심한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의 식량 수출은 아일랜드에게는 상당히 큰 고통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복잡한 불신을 지속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일랜드 기근 동안에 영국 재무성의 장관이었던 찰스 에드워드 트리벨리언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경제 정책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기근 확대의 부분적 원인으로 아일랜드인의 습관을 지적했다. 그런 원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감자만 먹는 아일랜드인들의 습관이었는데, 이런 습관은 한 가지 작물에만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기근의 원인에 대한 트리벨리언의 견해는 아일랜드인의 요리에 대한 분석도 결부되었다. ‘아일랜드 서부의 농민 계급 여성들 중에서 감자를 삶는 것 외의 요리 기술을 지닌 여성은 거의 없다.’ ······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의 단조로운 식단에 대해 비난한 것은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좋은 예를 보여 준다.”
아일랜드 인구의 95% 이상이 가톨릭이고 국민의 87%가 일요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아일랜드인들은 신앙심이 강하다. 종교 때문에 빚어진 영국과 아일랜드의 악연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16세기부터 아일랜드를 강력하게 통치하면서 신교도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여러 차례의 폭동이 발생했다. 1641년에 시작된 10년간의 폭동에선 60만 명이 죽었는데, 이때 무자비한 폭동 진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일기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아일랜드인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지금까지도 아일랜드인들이 크롬웰을 미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8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19세기에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했는데, 문제는 영국과의 끈을 버리려 하지 않는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이었다. 그래서 영국에 대항해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극적인 내전이 벌어졌고, 결국 1921년 남과 북의 분단으로 종결되었다. 남쪽은 자치령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인 1948년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변모한 반면, 북쪽은 아직도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다. (참고: 제4장 중 ‘영국 정체성’)
2004년 10월 14~15일에 열린 한국정치학회는 사회협약을 통한 ‘작지만 강한 나라’의 미래를 모색하는 학술회의에서 아일랜드에 주목했다. 아일랜드는 외세의 침략과 피식민지 경험 등 역사적 배경은 물론 강대국 경제에 대한 종속구조, 분권화·파편화된 노조운동, 계급정당이 아닌 포괄정당 중심의 정당 체제 등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1987년 노사정이 타결한 ‘국가재건협약’ 이래로 4개의 노사정 협약을 추가로 체결하는 동시에, ‘국가경제사회협의회’를 구성해 국가발전전략의 기본을 세워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내부 분열에 찌든 한국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강명세는 ‘대외적 취약성’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번영을 누리는 비결은 자신들의 국가 체제가 외적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국내적 합의를 통해 대처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국민적 합의의 대표격은 노사협력”이고, 이제 “노동 부문의 동의·참여를 통한 노동 시장의 개혁 없이는 경제의 질적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강명세는 “아일랜드의 기적은 집권세력의 인식의 전환이 만들어 낸 결과이며, 아일랜드 엘리트들이 시도한 발상의 전환을 한국이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일랜드는 80년대 중반까지 ‘노조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파업이 많았지만, 노사정 협약 덕분에 이젠 파업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며 여객선사인 아이리시 페리사 노조가 최근 파업을 했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됐을 정도라고 한다. 2005년 3월 21일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가 한국을 방문함에 따라 아일랜드식 사회협약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도 고조되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아일랜드인은 360여 명이다(아일랜드 거주 한국인은 500여 명). 이들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아직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더러 있어 서글프다”고 말한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조나단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은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계 아일랜드인이라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서 이중적 정체성 문제로 고심하였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예이츠는 이를 가리켜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고독’이라고 불렀다.
아일랜드는 유럽 국가들 중 민족적 자부심이 가장 강한 나라이며, 민족적 정체성 만들기에도 열성이다. 2005년 3월 29일 아일랜드 정부는 서부해안 지역을 시작으로 도로 표지와 공공 지도 등에서 영어를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일랜드의 고유 언어인 겔릭어를 쓰라는 것이지만, 정부와 국회 내에서 이뤄지는 토론 중 불과 1%만 겔릭어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라 ‘겔릭어 살리기 운동’의 길은 험난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자기 민족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순결하며 뛰어나다고 믿는 맹목적 애국심, 자신들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그리고 실제로 강대국 곁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 등 두 나라 간에는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닮은 구석이 많다. ······ 무엇보다도 두 민족에게는 한(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서가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후 동경대학 총장을 지낸 야나이하라 타다오가 ‘한국은 우리의 아일랜드’라고 말했던가 보다.”
일제는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발버둥쳤다. 백인들은 ‘인종주의’로 그런 효과를 얻었지만, 일본의 경우엔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얼핏 보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외양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도 한국과 아일랜드는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 박지향은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양상의 유사함을 넘어서는 차이를 발견해야 했다. 영국인들이 ‘하얀 검둥이’, ‘하얀 침팬지’의 이미지로서의 아일랜드인을 만들어 내었듯이 일본인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청해 보이고, 입은 열려 있고 눈에는 총기가 없으며 무언가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조선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옷을 잘 입은 아이누’, ‘두 발로 서서 걷는 원숭이’라고 비하해서 불렀으며, ‘더럽고, 게으르고, 무지하고 비위생적이고, 냄새나고, 심한 육체노동에는 적합하지만 복잡한 과제를 행할 능력은 없으며, 복종적이고, 따라서 어린애로 다루어져야 하는’ 열등 인간으로 간주하였다. 역사적으로 조선인은 ‘글러먹은 민족’이고 ‘놀기 좋아하고, 게으름이 습속이 되어 있고, 혐오스런 풍속 습관을 가진 민족’으로 진단되었다.”
최근 아일랜드와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건 이 나라가 세계적인 정보화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일보』 2000년 12월 20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지난 1970년대 경제위기를 맞았던 아일랜드는 1980년대 인플레이션이 16~17%까지 치솟고 매년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게 만들었던 불모의 땅. 하지만 10년 전 17.5%에 달했던 실업률은 최근 완전고용 수준인 3.8%까지 떨어졌다. 정부 주도의 강력한 개혁으로 세계 e비즈니스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지난해 총생산(GDP) 대비 해외자본 유입비가 20.2%로 스웨덴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해외 기업 직접투자를 늘리기 위해 추진한 완벽한 자본자유화, 경쟁력 있는 금융 및 물류, 통신인프라 구축 등이 결실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세계 10대 주요 소프트웨어업체 5개 사가 아일랜드에서 주력사업을 벌이고 1,200개의 세계적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면서 발생한 문제는 ‘구인난’. 연간 1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발생하는 가운데 전체 인구가 350만 명에 불과한 아일랜드로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오마에 겐이치는 2000년에 출간한 『보이지 않는 대륙』이라는 책에서 “앞으로 있을 국가 경제의 변화 속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국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아일랜드를 선택하겠다”며 아일랜드가 통신 네트워크와 원거리 통신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미국 보험회사들이 미국과 더블린 간의 ‘시차’를 이용하여 보험금 지급 청구 처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전담 지사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게 흥미롭다.
“미국 보험회사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갈 무렵 당일 접수한 보험금 지급 청구를 아일랜드 지사로 보냈다. 그러면 아일랜드에서는 미국이 잠든 사이에 처리 작업에 착수했다. 시차를 이용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발상이 성공을 거두자 2,500여 개의 미국 기업들이 더블린에 지사를 세워 회사 업무의 일부를 그곳에서 처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더블린에는 25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더블린 거주민의 14분의 1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1988년 1만 달러를 돌파한 아일랜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97년 2만 달러에 이어 2002년 3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15년 후 4만 달러를 내다보고 있다.
2004년 11월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111개 나라를 대상으로 실시한 “2005년에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인가” 조사에서 아일랜드는 1위를 차지했다. 2위에서 5위는 스위스,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호주 등이었다. 이 주간지는 “아일랜드는 안정된 가정과 공동체 생활과 같은 옛 세대의 가치관과 낮은 실업률, 정치적 자유와 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요인들을 결합하는 데 성공해 1위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아일랜드의 국토 면적은 7만 282㎢로 한국(남한)의 5분의 4인데, 계속 인구가 늘어 2004년 4월 현재 404만 명으로, 1871년(405만 명) 이후 13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 인구는 700만 명이었지만, 1840년대 감자 기근으로 10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은 살길을 찾아 아일랜드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인구는 계속 줄어 한때 300만 명을 밑돌기도 했다.
아마티아 센은 1840년대의 기근은 결정적인 방향으로 아일랜드의 속성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이민을 야기시켰으며, 이러한 이민 행렬은 심지어 최악의 항해 조건 속에서도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840년대의 기근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아일랜드가 식량을 수입하기는커녕 부유한 영국에 식량을 수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에선 돈이 없으니까 식량이 있어도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티아 센은 기근이 심한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의 식량 수출은 아일랜드에게는 상당히 큰 고통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복잡한 불신을 지속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일랜드 기근 동안에 영국 재무성의 장관이었던 찰스 에드워드 트리벨리언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경제 정책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기근 확대의 부분적 원인으로 아일랜드인의 습관을 지적했다. 그런 원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감자만 먹는 아일랜드인들의 습관이었는데, 이런 습관은 한 가지 작물에만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기근의 원인에 대한 트리벨리언의 견해는 아일랜드인의 요리에 대한 분석도 결부되었다. ‘아일랜드 서부의 농민 계급 여성들 중에서 감자를 삶는 것 외의 요리 기술을 지닌 여성은 거의 없다.’ ······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의 단조로운 식단에 대해 비난한 것은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좋은 예를 보여 준다.”
아일랜드 인구의 95% 이상이 가톨릭이고 국민의 87%가 일요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아일랜드인들은 신앙심이 강하다. 종교 때문에 빚어진 영국과 아일랜드의 악연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16세기부터 아일랜드를 강력하게 통치하면서 신교도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여러 차례의 폭동이 발생했다. 1641년에 시작된 10년간의 폭동에선 60만 명이 죽었는데, 이때 무자비한 폭동 진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일기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아일랜드인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지금까지도 아일랜드인들이 크롬웰을 미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8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19세기에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했는데, 문제는 영국과의 끈을 버리려 하지 않는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이었다. 그래서 영국에 대항해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극적인 내전이 벌어졌고, 결국 1921년 남과 북의 분단으로 종결되었다. 남쪽은 자치령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인 1948년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변모한 반면, 북쪽은 아직도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다. (참고: 제4장 중 ‘영국 정체성’)
2004년 10월 14~15일에 열린 한국정치학회는 사회협약을 통한 ‘작지만 강한 나라’의 미래를 모색하는 학술회의에서 아일랜드에 주목했다. 아일랜드는 외세의 침략과 피식민지 경험 등 역사적 배경은 물론 강대국 경제에 대한 종속구조, 분권화·파편화된 노조운동, 계급정당이 아닌 포괄정당 중심의 정당 체제 등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1987년 노사정이 타결한 ‘국가재건협약’ 이래로 4개의 노사정 협약을 추가로 체결하는 동시에, ‘국가경제사회협의회’를 구성해 국가발전전략의 기본을 세워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내부 분열에 찌든 한국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강명세는 ‘대외적 취약성’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번영을 누리는 비결은 자신들의 국가 체제가 외적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국내적 합의를 통해 대처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국민적 합의의 대표격은 노사협력”이고, 이제 “노동 부문의 동의·참여를 통한 노동 시장의 개혁 없이는 경제의 질적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강명세는 “아일랜드의 기적은 집권세력의 인식의 전환이 만들어 낸 결과이며, 아일랜드 엘리트들이 시도한 발상의 전환을 한국이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일랜드는 80년대 중반까지 ‘노조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파업이 많았지만, 노사정 협약 덕분에 이젠 파업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며 여객선사인 아이리시 페리사 노조가 최근 파업을 했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됐을 정도라고 한다. 2005년 3월 21일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가 한국을 방문함에 따라 아일랜드식 사회협약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도 고조되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아일랜드인은 360여 명이다(아일랜드 거주 한국인은 500여 명). 이들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아직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더러 있어 서글프다”고 말한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조나단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은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계 아일랜드인이라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서 이중적 정체성 문제로 고심하였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예이츠는 이를 가리켜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고독’이라고 불렀다.
아일랜드는 유럽 국가들 중 민족적 자부심이 가장 강한 나라이며, 민족적 정체성 만들기에도 열성이다. 2005년 3월 29일 아일랜드 정부는 서부해안 지역을 시작으로 도로 표지와 공공 지도 등에서 영어를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일랜드의 고유 언어인 겔릭어를 쓰라는 것이지만, 정부와 국회 내에서 이뤄지는 토론 중 불과 1%만 겔릭어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라 ‘겔릭어 살리기 운동’의 길은 험난할 것으로 전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