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4일 토요일

맹자. 孟子, Mencius.

맹자. 孟子, Mencius.

맹자의 이름은 가(), 자()는 자여(輿), 자거(), 자거() 등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생몰 연도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공자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라는 맹자 자신의 말과, 맹자가 만난 제후들의 재위 연대를 고려할 때 그 활동 시기는 전국 시대 중엽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생몰 연도에 관해서는 기원전 372~289년 설과 기원전 385~304년 설이 있다. 
맹자가 태어난 곳은 당시 노나라와 인접한 추()라는 소국이었다. 
‘성인이 살았던 곳과 가깝다’는 맹자 자신의 말대로, 오늘날 중국 산둥성 쩌우()현에 있는 맹자묘는 취푸()현에 있는 공묘, 공부, 공림 등에서 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맹자순경열전’에 따르면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제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후한 시대 조기()의 [맹자제사]()에 따르면 맹자는 직접 자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연대적으로는 앞의 [사기]의 설이 보다 타당하다.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직지교 이야기는 전한 시대 유향이 편찬한 [열녀전]에 나오는데, 이야기 자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에 가깝다. 
맹자의 어머니가 현모()로서 맹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맹자가 어머니의 장례를 유달리 각별하게 마음 써서 지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군주들에게 설파하는 유세()를 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얼마 동안 유세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양나라 혜왕과 양왕, 제나라 선왕, 송나라 언왕, 추나라 목공, 등나라 문공 등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분명하다. 

맹자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 
말년의 그는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전념했다. 
사마천은 [사기] ‘맹자순경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국들은 합종연횡을 통한 싸움에 힘쓰고, 전쟁만을 능사로 여기고 있었다. 
맹자는 요순()과 하․은․주 삼대의 성왕들의 덕치를 주장하고 다녔으므로, 그의 주장은 찾아간 나라들의 실정과 부합될 수 없었다. 
물러나 만장 등 제자들과 함께 시()와 서()를 정리하고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천술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능한 방법은 『논어』나 『맹자』에 실려 있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즉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이나, 목격했거나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참고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공자는 대략 기원전 551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으며 맹자는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로 분류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기원전 770년은 주() 왕실이 견융()이라는 종족에게 쫓겨 수도를 동쪽인 낙양()으로 옮긴 해이다. 
그 전까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봉건국가들이 위성처럼 분립해 있었으며 이들은 혈연과 제사와 군사에 의해 주 왕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즈음을 전후해서 이러한 봉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는 패자()들의 시대였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목만은 존중하면서 실상은 무력으로 다른 제후들을 정복했고 그럼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차례로 천하를 제패했던 제()나라의 환공(), 송()나라의 양공(), 진()나라의 문공(), 진()나라의 목공(), 초()나라의 장왕()은 5패로 불린다. 
춘추시대만 해도 ― 제후국들은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지만 ― 패자들은 근왕()의 기치를 내걸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제후들도 더 이상 근왕의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17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들은 동맹과 연맹의 결성, 외교적․군사적 전쟁을 통해 7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전국칠웅()이라 불리는 한()․위()․조()․연()․제()․초()․진()이 이들이다. 
이들은 천하를 제패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했다.

공자는 주 왕실 중심의 봉건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생각했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눈에서 보면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정치적 혼란기였을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전국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는 정책도 시도되었으며, 한편에서는 상인의 세력이 커져서 상인으로서 부에 의해 진의 재상까지 된 여불위() 같은 사람도 등장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제자백가()의 시대였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에 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으며, 사상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다채로운 논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법가, 도가, 농가, 종횡가, 명가, 음양가, 잡가 등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왕성한 사상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맹자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해갔다.
맹선생의 성은 맹()이며 이름은 가()이다. 
추()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맹자는 인의()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일이 년 뒤에 혜()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송(, 하남성 상구현), 설(, 산동성 등현 서남쪽)을 거쳐 일차로 추에 돌아온 뒤, 다시 문공()의 초대를 받아 등(, 산동성 등현)으로 갔다. 
역시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노(산동성 곡부현)를 거쳐 고향인 추로 돌아왔다.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이었다. 
제후들의 현실적 관심과 맞아떨어질 여지가 없었던 맹자의 이론은 어느 제후에게도 채택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 되었을 때라고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그리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7편이다.

[맹자]에는 ‘은 사람이 거해야 할 편안한 집이고, 는 사람이 걸어야 할 바른 길이다’(이루상)라는 대목이 나온다. 
‘왜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양혜왕상)라는 대목도 나온다. 

[논어]에서는 인()도 의()도 지(), 용(), 신() 등의 다른 여러 덕목들과 사실상 동렬의 것으로 등장한다. 
인과 의를 대비시키거나 합쳐서 말하는 경우는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인은 유교에서 최상의 덕목으로 일컬어진다. 

맹자가 유교에 미친 많은 영향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의()의 가치와 의미를 중시하여 높였다는 점이다.
사실상 맹자로 인해 유교에서 의가 인에 못지않은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의의 중요성은 맹자 시대의 전반적인 사상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맹자의 논적인 고자()는 이른바 인내의외(), 즉 인은 내면적인 것이고 의는 밖으로 드러난 외면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장자] 내편과 [묵자]의 십론 가운데에도 인과 의를 대비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나온다. 
인과 의를 나란히 일컬어 ‘인의’로 말한 것은 맹자가 처음이다. 
맹자를 인의의 제창자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맹자의 사상과 학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왕도론과 성선설이라고 하지만, 인의야말로 그 둘을 뒷받침하고 연결 짓는 축에 해당한다. 

인의의 정치를 행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는 것이 왕도론이며, 인의의 마음을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게 성선설이다. 
요컨대 맹자의 정치론과 인간론에서 공히 중추를 이루는 것이 인의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의’에서 인과 의의 뜻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때에 따라서는 일종의 가족 도덕에 한정되어 각각 효()와 제()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으나, 대체로 인은 연민이나 친애()를 뜻하고 의는 정의나 도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인의’는 그 자체로 도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인간의 도덕적 각성과 수양을 요구하는 성선설

성선설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도덕적 소질을 갖추고 있다는 주장이다. 

자공은 스승 공자에 대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성()과 천도()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좀처럼 듣지 못했다’라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공자의 제자 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맹자 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성행했다.

[맹자] ‘고자상편’에는 성선()의 입장을 취하는 맹자와, 인간의 본성은 본래부터 선과 불선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고자() 사이의 한 발치 양보도 없는 논쟁이 실려 있다. 
‘고자상편’에 실린 맹자의 제자 공도자()의 말에 따르면, 맹자의 성선설, 고자의 성무선무불선()설, 인간 본성에는 선악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어 본성을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설, 본성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설 등이 있었다.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관한 맹자의 주장은 인간의 마음이 인의예지() 각각의 실마리에 해당하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선설은 논리적 논변이나 구조를 갖춘 학설이라기보다는 맹자의 신념을 밝힌 것에 가깝다. 
성선을 주장하는 맹자의 의도는 결국 각 개인에 대해 도덕적 각성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부단하게 수양할 것을 요구하는 데 있다. 
맹자를 가리켜 유학에서 ‘마음의 본래 이치를 밝혀 도덕 수양을 하는 학문’ 즉 심학()의 사실상의 제창자로 일컫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맹자의 민본주의와 혁명사상 그리고 왕도() 정치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 임금이 걸을 쫒아내고 무왕이 주를 정벌했다는 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그렇다고 답하자 선왕이 다시 물었다.

“신하된 자가 자기 임금을 살해해도 괜찮은 겁니까?”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인()을 해치는 자를 흉포하다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학하다 하는 데, 흉포하고 잔학한 인간은 한 평민에 지나지 않기에, 한 평민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불인하고 불의한 군주는 민심을 잃게 되는데, 민심이야말로 하늘이 맡긴 사명이자 소임, 즉 천명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민심을 잃어 천명이 떠나간 군주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천명이 떠나버린 군주를 몰아내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 

여기에서 맹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을 엿볼 수 있다. 

맹자는 ‘백성이 귀중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대단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민본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표현 01

힘으로 인()을 가장하는 것은 패도이다. 

패도를 칭하려면 반드시 큰 나라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 왕도를 펴는 데는 큰 나라여야 할 필요가 없다.…힘으로 남을 복종시킨다면 그것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며 힘이 모자라서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킨다면 그것은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정말로 복종하는 것이다.


02
"실력을 믿고 정벌의 명분으로 인의()의 이름을 빌리는 이를 패()제후라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국력이 강대해야 한다. 
덕으로 인의를 행하는 이는 천하를 귀복시킬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데는 반드시 강대국일 필요는 없다. 
실력으로 복종시키는 이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덕으로 복종시키는 이는 사람들이 기뻐서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맹자] 공손추상

무력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패도가 횡행하던 시대에 맹자는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의()을 실천하는 정치, 이른바 왕도 정치를 꿈꾸었다. 

앞서 인용한 사마천의 기록, 즉 ‘요순과 하․은․주 삼대의 성왕들의 덕치를 주장하고 다녔으므로, 그의 주장은 찾아간 나라들의 실정과 부합될 수 없었다’는 기록은, 맹자의 왕도 정치 이상이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정을 알려준다. 

그가 꿈꾼 ‘왕도 정치의 군주와 나라’는 이후 유교의 역사를 통해 모든 유학자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이상이 되었고, 때로는 패악한 군주를 비판하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연보

기원전 372년 : 중국 추(산동성)에서 출생

기원전 320년 : 양나라에 가서 혜왕을 만남

기원전 319년 : 혜왕 사망

기원전 318년 : 양왕의 사람됨에 실망해서 양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감

기원전 315년 : 모친 사망, 노에서 장사 치름

기원전 312년 : 제나라를 떠남

기원전 311년 : 송에 체류. 송경?을 만남.

기원전 307년 : 설을 거쳐 추로 돌아감. 의 에게 초대 받음

기원전 305년 : 등나라에 1~2년 체류 후, 노를 거쳐 추도 돌아감. 이후 교육에 전념

기원전 289년 :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