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도군,玄菟郡.
중국 한(漢)나라가 설치한 군(郡)으로서 한사군(漢四郡)의 하나.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킨 후, 그 옛 땅을 중심으로 낙랑군(樂浪郡)·진번군(眞番郡)·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고, 이듬해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다.
그로부터 25년 뒤인 서기전 82년에 임둔군·진번군이 폐지될 때 진번군의 일부를 흡수하였다.
서기전 75년에는 압록강 중류 지방에 있던 군치(郡治)가 요동(遼東) 혼하(渾河) 상류인 흥경(興京)·노성(老城) 부근으로 옮겨갔다.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에는 군치를 옮긴 이유를 이맥(夷貊)이 침범하기 때문이라고 했을 뿐 더 자세한 설명은 없다.
이는 서기전 1세기 전반 한의 고구려에 대한 대외정책이 강경책에서 유화책으로 전환했으며, 한인(漢人)의 압박정치에 대한 토착인의 반발이 심해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당시 한은 오환(烏桓)의 흥기에 대해 토벌 정책을 구사하면서 동시에 이맥(夷貊)에 대한 군사력을 강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맥에 대해서는 군현지배(郡縣支配)를 완화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압록강 중·상류의 주민집단은 이러한 정세변화를 적극 활용해 제1현도군을 무력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한은 현도군을 흥경·노성방면, 즉 지금의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으로 군치를 옮겨 제2현도군을 설치하고 압록강 중·상류 주민집단의 공격에 대비해 현도성을 축조하는 등 방어를 강화시켰다.
1세기 말경 후한(後漢)은 잇따른 자연재해와 외척(外戚)의 발호 등으로 인해 급격한 내부불안 상태에 빠졌으며 이에 따라 군사방어력이 약화되었다.
이를 틈타 고구려가 제2현도군에게 잦은 침공을 가하자 제2현도군은 다시 무순(撫順)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때 본래의 속현(屬縣)에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인 고현(高顯)·후성(侯城)·요양(遼陽) 등 3현을 분할, 귀속시키면서 제3현도군을 형성하였다.
후한 말에는 낙랑군과 함께 공손씨(公孫氏)의 통치를 받다가 다시 위(魏)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는 서진(西晉)에 속하게 되었다.
서진 말에 고구려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공략을 받아 315년에는 거의 전멸상태에 빠졌다.
제3현도군은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이 319년에 요동을 차지한 뒤 요동군과 더불어 지배되다가, 그 뒤 모용씨의 후연(後燕)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404년(광개토왕 14) 이전에 이미 요동군과 함께 완전히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됨으로써 소멸되었다.
현도군의 강역(疆域)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함경도 방면에 비정하는 옥저설(沃沮說)이다.
『삼국지』위지 동옥저전에 서기전 109년에 조선을 정벌하고 옥저성(沃沮城)으로 현도군을 삼았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둘째, 고구려설(高句麗說)이다. 후위(後魏)의 역도원(酈道元)의『수경주(水經注)』에 보이는 현도군치(玄菟郡治)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원고구려로 보고 요산(遼山)을 현도군 소재지로 본 것이다.
셋째, 옥저 및 고구려설이다. 청나라 말기 양수경(楊守敬)이 『회명헌고(晦明軒稿)』중에 수록한 「왕사탁한지석지박의(汪士鐸漢地釋地駁議)」에서 주장한 이래 자주 인용되었다.
넷째, 이병도(李丙燾)의 설로서, 현도군은 앞서 서기전 128년부터 서기전 126년까지 존속한 창해군(蒼海郡)이 설치되었던 예맥의 땅에 두었다는 것이다.
예맥이라는 명칭은 전한시대에는 주로 압록강의 상류·중류 지방 및 동가강(佟佳江)의 전 유역에 걸쳐 있었던 고구려족(高句麗族)을 지칭한 것으로, 현도군을 현도성이 있던 통구평야(通溝平野)에 비정하였다.
다섯째, 혼하(渾河)유역에서 집안(輯安)·강계(江界)를 거쳐 함흥(咸興)까지 연장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일본학자 와다(和田淸)는 현도군을 옮기기 전부터 흥경(興京)·노성·무순(撫順) 등지에도 역시 현치(縣治) 정도는 있었을 것이라 하였다.
처음 현도군은 뒤의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을 중심으로 남만주와 반도의 동해안에 걸쳐 분포된 교통로적인 성격을 가졌으리라 하였다.
어떤 견해든 압록강 중·상류 일대가 제1현도군의 관할 범위에 속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압록강 중류지역인 집안(集安) 국내성지(國內城址) 아래층의 토축(土築) 성벽을 비롯해 환인(桓仁) 하고성지(下古城址), 통화(通化) 적백송고성(赤柏松古城) 등 한대 토성지(土城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현도군이나 속현의 치소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교통로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넓은 충적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것은 한이 일찍부터 성장한 유력한 정치세력들이 존재하는 교통로 상의 요지에 군현의 치소를 설치하여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도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근에는 현도군은 물론 한사군 모두가 한반도와는 관계없이 요하(遼河) 서쪽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서기전 75년 군치를 흥경·노성방면으로 옮긴 후의 현도군의 규모는『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보이는 고구려·상은태(上殷台)·서개마(西蓋馬) 등 3현에 불과하나, 최초의 속현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같은 책에 기재된 호구(戶口)수는 4만 5,006호(戶), 22만 1,845명이다.
현도군 설치 당시의 속현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 군치는 국내 환도(國內丸都) 지방의 고구려현에 두었고, BC 82년에 임둔군을 폐합하여 이를 영유하였다.
BC 75년경 그 관하의 본주민(예맥)이 한족(漢族)의 지배에 항쟁을 일으켜 국내 환도지방에 있던 군치 고구려현을 요동의 새내(塞內)인 혼하(渾河:蘇子河) 상류의 흥경(興京) ·노성(老城)에 옮기고, 앞서 병합한 임둔군의 고지(古地)는 낙랑군에 귀속시켰다.
현도군의 속현은 고구려 ·상은대(上殷臺) ·서개마(西蓋馬)의 3현에 4만 5006호(戶), 22만 명으로 《한서》에 나타났고, 나머지 현도군의 고지는 본주민에 돌아가 이 지역은 여러 부락으로 나뉘어 얼마 동안 자치를 계속하다가 여기에서 고구려가 일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하게 되었다.
고구려 태조왕 때에 이르러 현도군은 증강한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제2의 군치(신고구려현)를 다시 무순(撫順)지방으로 옮기고, 107년에는 요동군의 고현(高顯) ·후성(候城) ·요양(遼陽)의 3현을 편입시켰고, 그 후 다시 망평현(望平縣)을 병합하여 모두 7현을 관할하였다.
현도군은 낙랑군과 더불어 184년 요동태수가 된 공손 탁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238년 공손씨가 3대만에 망하자 위(魏)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후에 다시 서진(西晉)에 속하게 되었다.
《진서(晉書)》 지리지에는 이 당시의 현도군은 ‘통현(統縣) 3, 호(戶) 3,200’이라 하여 그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이전의 7현 중 서변(西邊)의 고구려 ·망평 ·고현 등 3현만 남고, 동변(東邊)의 상은대 ·서개마 ·요양 ·후성 등 4현은 이미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간 듯 제외되어 있다.
319년 이후 현도군은 요동군과 더불어 모용씨(慕容氏)의 연(燕)나라 치하에 들어갔다가 광개토왕 때 고구려가 쟁취함으로써 한사군의 마지막 국가가 되었다.
군현제, 郡縣制.
기원전 221년 진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었다. 군 아래 다수의 현을 설치하고, 중앙으로부터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군에는 군수, 군위, 감어사, 현에는 현령, 현위, 현승이 있었는데, 중앙 정부와 비슷하게 민정, 군사, 감찰의 3권을 나누었다.
이로써 중앙 집권 체제의 기초가 다져졌다.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누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제도. 왕의 권력이 지방까지 미치는 중앙 집권적 제도이다.
우리나라도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군현 제도가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