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가 1271년부터 1295년까지 동방을 여행한 체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기록한 여행기.
13세기 베네치아공화국 출신의 상인이었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27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면서 보고 겪었던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다. 책의 제목은 《Divisament dou Monde 세계의 기술(記述)》이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로 출간되었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으로 출간되었다. 책의 내용은 동방이라고 불렸던 아시아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나라를 대상으로 하였다.
마르코 폴로가 직접 여행하지 않았던 곳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마르코 폴로가 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서술되었다고 추측된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은 1269년에 시작되었으며 그가 15세가 되던 해, 동방무역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따라 세계여행에 나서게 되었다. 긴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베니스로 돌아온 이후 그의 행적에 관해서 전하는 기록은 불분명하며 1298년 베네치아공화국과 제노아공화국 사이에 벌어진 해전(海戰)에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혔으며, 이때부터 자신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약 3년간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루스티첼로(Rustichello)에게 자신의 경험을 구술하여 필기하도록 한 것이 《Divisamentdou Monde 세계의 기술(記述)》이라는 책이다. 하지만 이 또한 정확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며 현재까지 알려진 몇가지 설(說)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은 1269년 베니스를 출발하여 지중해를 지나 콘스탄티노플, 이란을 거쳐 1271년 호르무즈 해협에 도착했으며 배를 타고 동방으로 이동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육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은 1269년 베니스를 출발하여 지중해를 지나 콘스탄티노플, 이란을 거쳐 1271년 호르무즈 해협에 도착했으며 배를 타고 동방으로 이동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육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1275년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를 거쳐 원나라의 상도(上都)에 이르러 쿠빌라이(세조)를 알현하였고 관직을 하사받았다. 그는 원나라에 무려 17년간 머물게 되었는데 당시 원나라를 통치했던 쿠빌라이 카안이 그의 귀환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의 여러지역을 여행하면서 동방의 문물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특히 중국 양주에 머물면서 상당한 지위를 가진 관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고향 베니스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번번히 거절되었다.
천주(泉州) 항을 출발하여 남중국해 해로(海路)를 따라 수마트라 섬을 지났으며 인도양을 건넜고 페르시아만(灣)의 26개월 만에 호르무즈섬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아르군 왕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코카친 왕녀를 아르군의 아들 가잔(Ghazan)에게 인계한 다음 1295년에 베네치아로 귀국하였다.
그의 저술을 두고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일부의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그가 동방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저술한 내용 중 일부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중국의 기록 등과 비교에서 많은 부분이 사실과 일치하므로 그의 여행과 기록이 사실로 받아들이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저술을 두고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일부의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그가 동방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저술한 내용 중 일부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중국의 기록 등과 비교에서 많은 부분이 사실과 일치하므로 그의 여행과 기록이 사실로 받아들이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책의 내용 중 당시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중국·남해(南海) 등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고 정확하며, 거리와 동물, 식물 등 관찰한 기록이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다. 특히 중앙아시아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책의 내용이 매우 신기하고 과장된 면 때문에 처음에는 유럽인들이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르코 폴로를 허풍쟁이 떠벌이로 불렀다고 전한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여행을 함으로써 이 책에서 서술된 내용이 정확함을 알게 되었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계기가 되는 등, 지리상의 발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루스티첼로가 필기한 원본은 없어졌으나 원본을 윤색 ·가필 ·삭제한 많은 사본들이 만들어져 전해졌다. 여러 사본 중에서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인정되는 것은 14세기에 필사되어진 F본이 있다.
이 책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824년에 필사본을 그대로 출간하였다. 1928년 필사본 F본을 기초로 교정을 본 책이 다시 출간되었다.
다른 사본으로 라무지오 인쇄본으로 불리는 R본이 있다. 이 사본은 마르코 폴로가 원본 이후에 추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Z본으로 불리는 라틴어로 필사된 젤라다(Zelada) 본이 있다.
1934년 이 사본을 혼합하여 A.C.물과 P.펠리오의 공동편집으로 단일본이 되어 나왔다. 이외에도 약 80종의 필사 사본이 존재하며 활자로 인쇄된 사본이 약 280종이 있다.
약 10년 전에 서구의 한 학자가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다녀왔는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출판하여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사실 그러한 의문은 전부터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어 온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도 『동방견문록』이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저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쪽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가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나 다른 자료들을 모아서 쓴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고, 누군가가 '마르코 폴로'라는 허구의 인물을 설정하여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설사 마르코 폴로의 저작 여부에 대한 의혹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동방견문록』이 지닌 고전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씌어졌다고 해서 그 저술이 갖는 학문적 가치가 무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방견문록』은 서구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고전이라고 할 정도로 중세 이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몇 종의 다른 '동방견문록'들이 씌어졌다. 예를 들어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였던 카르피니의 『몽골 기행』이라든가 루브룩의 『여행기』, 작자 미상의 『맨더빌 여행기』 등이 있지만, 이들 모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의 견문록이 시대의 고금과 장소의 동서를 막론하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은, 마르코 폴로라는 한 개인에 대한 열광이 아니라 그 책 속에는 고갈되지 않는 어떤 불후의 가치를 지닌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700여 년 전 마르코 폴로의 족적을 따라 아시아를 횡단하며 오지의 풍물과 이국의 풍속을 경험하고, 그들의 체험을 글로 또는 사진으로 발표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의 어떤 면이 그들을 매료시켰을까? 『동방견문록』은 과연 어떤 책이며 그것이 지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도 『동방견문록』이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저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쪽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가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나 다른 자료들을 모아서 쓴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고, 누군가가 '마르코 폴로'라는 허구의 인물을 설정하여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설사 마르코 폴로의 저작 여부에 대한 의혹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동방견문록』이 지닌 고전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씌어졌다고 해서 그 저술이 갖는 학문적 가치가 무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방견문록』은 서구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고전이라고 할 정도로 중세 이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몇 종의 다른 '동방견문록'들이 씌어졌다. 예를 들어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였던 카르피니의 『몽골 기행』이라든가 루브룩의 『여행기』, 작자 미상의 『맨더빌 여행기』 등이 있지만, 이들 모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의 견문록이 시대의 고금과 장소의 동서를 막론하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은, 마르코 폴로라는 한 개인에 대한 열광이 아니라 그 책 속에는 고갈되지 않는 어떤 불후의 가치를 지닌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700여 년 전 마르코 폴로의 족적을 따라 아시아를 횡단하며 오지의 풍물과 이국의 풍속을 경험하고, 그들의 체험을 글로 또는 사진으로 발표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의 어떤 면이 그들을 매료시켰을까? 『동방견문록』은 과연 어떤 책이며 그것이 지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무엇인가?
원제는 『동방견문록』???
흔히 우리에게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을, 서구에서는 'Travels ofMarco Polo'라 하고, 중국에서는 『마가파라유기(馬可波羅游記)』 또는 『마가파라행기(馬可波羅行記)』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라는 제목은 일본에서의 용례를 그대로 채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책 어디에서도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후대 사람들이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사실 이 책의 원제목은 'Divisament dou Monde'이고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세계의 서술'이 된다.
'동방견문록'과 '세계의 서술'이라는 표현 사이에는 크게 두 가지 다른 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글의 내용이 지닌 특성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글이 다루는 범위의 문제이다. 즉, '동방견문록'이란 제목은 서구인이 '동방'을 여행하고 얻은 체험과 견문을 적은 여행기를 의미하지만, '세계의 서술'은 동·서방을 막론하고 세계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책을 세밀하게 읽어보면 사실 후자 쪽이 책의 내용에 훨씬 더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방견문록』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동양과 서양 또는 동방과 서방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마르코 폴로의 시대에는 우리가 지리적으로 '아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을 통칭하는 지리적 개념이나 용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서구 사회를 뭉뚱그려 '동양'이라고 부르는 사고 방식은 서구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여타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확대하면서 생겨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마치 서구인이 '동방' 또는 '동양'이라는 지역을 방문한 뒤 기록한 여행기라는 인상을 주기가 십상이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시아 여러 지방은 물론 아프리카와 시베리아와 러시아까지도 포함하고 있어, 그 범위는 사실상 서구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 전역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서구가 제외된 것은 『동방견문록』의 독자들에게 친숙하고 잘 알려진 지역이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견문록'이라고 하면 보통 어느 지역을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정리해서 기술한 일종의 '여행기'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이 책에는 그러한 '여행기'나 '견문록'에 보이는 개인의 감상이나 흥취가 극도로 억제되어 있고,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등에 대한 개인적이고 사적인 서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마르코 폴로가 이 책을 쓴 목적이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식으로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인들에게 낯선 세계 여러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과 설명을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방견문록』의 내용을 크게 나누어 보면 대체로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에 해당하는 '서편'에는 마르코 폴로가 여행을 떠나게 된 연유와 여정, 귀국한 뒤 제네바의 감옥에 갇혀 루스티첼로라는 작가를 만나게 되어 그에게 책을 구술하는 등의 배경적 설명이다.
나머지 일곱 편은 세계 각지에 대한 설명으로, 먼저 제1편은 현재의 소아시아 반도에 해당하는 대·소 아르메니아와 투르크메니아에서 시작하여 이라크와 페르시아 지방을 포함하는 서아시아에 대한 기술이고, 제2편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미르를 넘어 타림 분지를 경유하는 중앙 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제3편은 몽골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의 수도인 상도(上都)1)와 대도(大都)의 모습 및 그의 통치 내용을 다루고, 제4편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의 제국에 체류하는 동안 체험했던, 당시 '키타이'라고 불리던 중국의 북부와 쓰촨성[四川省], 윈난성[雲南省]을 거쳐 미얀마에 이르는 지역을 설명하며, 제5편은 '만지'라고 부르던 중국의 남부를 포괄하고 있다.
제6편은 폴로 일가가 중국을 떠나 귀환하는 길에 보고 들은 인도양 각지에 관한 사정이고, 마지막으로 제7편에서는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북극 지방까지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설명하는 지역의 범위는, 북으로는 '암흑의 지방'이라고 부르는 극지대에서 남으로는 자바와 수마트라, 잔지바르3), 모가디슈에까지 이르고, 서로는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동으로는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으니, 사실상 유럽을 제외하고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를 포괄한 것이었다.
그는 이 광범위한 지역을 설명하면서 대체로 자신의 여행 경로에 맞추어 서술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 그 경로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중앙아시아의 하미[哈密]에서 중국 서북부의 감숙 지방을 거쳐 쿠빌라이가 있는 상도로 가는 여행로를 취했지만, 책에서의 서술 순서는 에치나를 지난 뒤 거기서 북상하여 과거 몽골인들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설명하고 이어 북으로 더 올라가 바이칼 호 부근의 바르구(Bargu) 지방에 대해서 기록한 뒤, 비로소 자신의 여정을 따라 다시 내몽골로 돌아와 거기에서 상도로 이어지는 지방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에치나를 서술한 직후, 직접 가보지도 않은 카라코룸과 바르구 등지를 삽입시킨 까닭은 에치나 부근에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서술'답게 여러 지역들을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각 도시와 지역에 대한 서술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마르코 폴로의 글에는 어느 도시에 대한 설명이든 거의 빼놓지 않고 들어가는 몇 가지 항목이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방위와 거리인데,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까지 어느 방향으로 '며칠 거리'에 있는가를 밝힌다. 그는 해가 있는 동안 말을 탄 채 달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30킬로미터 정도)를 '하룻거리'로 잡고, 방위는 동·서·남·북과 동북·동남·서남·서북의 8방위 체계를 사용하되 경우에 따라서는 '동쪽과 동북쪽 사이' 등의 표현으로 더 구체적인 방향을 명시했다.
둘째로 그는 주민들의 특징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는데, 종교적으로 기독·이슬람(사라센)·불교(우상 숭배자)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그들의 주식과 생업은 무엇인가, 또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는가,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예속되어 있는가 하는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그 지방에 특기할 만한 물산과 동식물을 적는다.
따라서 그의 글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무미건조할 정도로 기계적이어서 때로는 마치 '편람'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떠한 면이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고 지금까지 부동의 고전으로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 서구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찍이 밟아 본 적이 없는, 또는 밟아 보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전해 주지 못했던 세계의 다양한 지역과 주민들의 모습을 마치 눈앞에 파노라마를 펼치듯 생생하게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글에는 필자의 눈을 통해 여과되고 변색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웅장하게 드러내는 세계의 모습이 무대를 꽉 채우면서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묘사하는 경이로운 것들이 허구와 상상에 의해 날조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을 보지 않고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는 "들어도 믿기 힘들 정도이다"와 같은 말로 상대방의 의구심을 사전에 봉쇄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말하건대", "여러분들이 곧 듣게 되듯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말해 줄까?", "여러분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등등의 '대화식' 표현들을 끊임없이 삽입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주려고 한다.
그의 글이 지니고 있는 힘은 마르코 폴로가 직접 본 것이건 아니면 들은 것이든 간에, 당시 유럽 사람들로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경이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고, 그것들은 모두 "아무런 거짓이 없는 올바르고 참된 것"이며 그가 "직접 보거나 진실이라고 들은 갖가지 경이를 글로 쓰게 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죄악이 될 것"이라고까지 단언했던 마르코 폴로의 확신에서 나오고 있다.
사실, 당대에도 그의 이야기를 믿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고 '허풍쟁이' 마르코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임종의 자리에서 친구들이 마르코 폴로에게 글 속에 기술한 거짓을 모두 철회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웃으면서, "아직 나는 내가 본 것의 반도 다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는 일화는 당대인들의 온갖 회의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나머지 일곱 편은 세계 각지에 대한 설명으로, 먼저 제1편은 현재의 소아시아 반도에 해당하는 대·소 아르메니아와 투르크메니아에서 시작하여 이라크와 페르시아 지방을 포함하는 서아시아에 대한 기술이고, 제2편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미르를 넘어 타림 분지를 경유하는 중앙 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제3편은 몽골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의 수도인 상도(上都)1)와 대도(大都)의 모습 및 그의 통치 내용을 다루고, 제4편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의 제국에 체류하는 동안 체험했던, 당시 '키타이'라고 불리던 중국의 북부와 쓰촨성[四川省], 윈난성[雲南省]을 거쳐 미얀마에 이르는 지역을 설명하며, 제5편은 '만지'라고 부르던 중국의 남부를 포괄하고 있다.
제6편은 폴로 일가가 중국을 떠나 귀환하는 길에 보고 들은 인도양 각지에 관한 사정이고, 마지막으로 제7편에서는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북극 지방까지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설명하는 지역의 범위는, 북으로는 '암흑의 지방'이라고 부르는 극지대에서 남으로는 자바와 수마트라, 잔지바르3), 모가디슈에까지 이르고, 서로는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동으로는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으니, 사실상 유럽을 제외하고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를 포괄한 것이었다.
그는 이 광범위한 지역을 설명하면서 대체로 자신의 여행 경로에 맞추어 서술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 그 경로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중앙아시아의 하미[哈密]에서 중국 서북부의 감숙 지방을 거쳐 쿠빌라이가 있는 상도로 가는 여행로를 취했지만, 책에서의 서술 순서는 에치나를 지난 뒤 거기서 북상하여 과거 몽골인들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설명하고 이어 북으로 더 올라가 바이칼 호 부근의 바르구(Bargu) 지방에 대해서 기록한 뒤, 비로소 자신의 여정을 따라 다시 내몽골로 돌아와 거기에서 상도로 이어지는 지방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에치나를 서술한 직후, 직접 가보지도 않은 카라코룸과 바르구 등지를 삽입시킨 까닭은 에치나 부근에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서술'답게 여러 지역들을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각 도시와 지역에 대한 서술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마르코 폴로의 글에는 어느 도시에 대한 설명이든 거의 빼놓지 않고 들어가는 몇 가지 항목이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방위와 거리인데,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까지 어느 방향으로 '며칠 거리'에 있는가를 밝힌다. 그는 해가 있는 동안 말을 탄 채 달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30킬로미터 정도)를 '하룻거리'로 잡고, 방위는 동·서·남·북과 동북·동남·서남·서북의 8방위 체계를 사용하되 경우에 따라서는 '동쪽과 동북쪽 사이' 등의 표현으로 더 구체적인 방향을 명시했다.
둘째로 그는 주민들의 특징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는데, 종교적으로 기독·이슬람(사라센)·불교(우상 숭배자)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그들의 주식과 생업은 무엇인가, 또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는가,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예속되어 있는가 하는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그 지방에 특기할 만한 물산과 동식물을 적는다.
따라서 그의 글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무미건조할 정도로 기계적이어서 때로는 마치 '편람'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떠한 면이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고 지금까지 부동의 고전으로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 서구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찍이 밟아 본 적이 없는, 또는 밟아 보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전해 주지 못했던 세계의 다양한 지역과 주민들의 모습을 마치 눈앞에 파노라마를 펼치듯 생생하게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글에는 필자의 눈을 통해 여과되고 변색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웅장하게 드러내는 세계의 모습이 무대를 꽉 채우면서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묘사하는 경이로운 것들이 허구와 상상에 의해 날조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을 보지 않고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는 "들어도 믿기 힘들 정도이다"와 같은 말로 상대방의 의구심을 사전에 봉쇄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말하건대", "여러분들이 곧 듣게 되듯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말해 줄까?", "여러분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등등의 '대화식' 표현들을 끊임없이 삽입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주려고 한다.
그의 글이 지니고 있는 힘은 마르코 폴로가 직접 본 것이건 아니면 들은 것이든 간에, 당시 유럽 사람들로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경이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고, 그것들은 모두 "아무런 거짓이 없는 올바르고 참된 것"이며 그가 "직접 보거나 진실이라고 들은 갖가지 경이를 글로 쓰게 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죄악이 될 것"이라고까지 단언했던 마르코 폴로의 확신에서 나오고 있다.
사실, 당대에도 그의 이야기를 믿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고 '허풍쟁이' 마르코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임종의 자리에서 친구들이 마르코 폴로에게 글 속에 기술한 거짓을 모두 철회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웃으면서, "아직 나는 내가 본 것의 반도 다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는 일화는 당대인들의 온갖 회의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시(무)대는 몽골제국, 주인공은 쿠빌라이,,,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책의 저자인 마르코 폴로가 과연 실존의 인물인가, 또는 설령 그가 실존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중국을 다녀온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글을 읽다보면 그같은 의구심을 들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들은, 만약 폴로가 중국을 다녀온 것이 사실이라면, 한자(漢字)나 차(茶) 또는 전족(纏足)이나 만리장성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고 온 사람의 글 속에 에펠탑이나 샹송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그의 여행 자체를 거짓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양주(揚州)라는 도시를 3년 동안 통치했다고 했는데, 중국의 어떠한 자료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폴로의 글 가운데 보이는 명백한 자기 모순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자기가 주선해서 제작한 투석기로 몽골군이 중국 남부의 요새 샹양(襄陽)을 함락시켰다고 적었는데, 이 도시는 이미 마르코 폴로가 도착하기 전에 함락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동방견문록』이 마르코 폴로의 저작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당시 서구인들에게는 신비와 미지의 세계였던 동방을 다녀온 뒤,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면서 과장과 허풍을 즐겼던 그는 '밀리오네' 즉 '백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즉, 그가 입만 열면 '백만' 운운하면서 떠벌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실은 남이 가 보지 않은 곳을 다녀온 뒤 친지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침소봉대하고 자신의 역할도 과장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설령 『동방견문록』에 상당한 과장과 약간의 자기모순이 보이는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많은 부분이 당시의 상황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체계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이처럼 광범위한 세계의 여러 사정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살았던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이라는 독특한 시대적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몽골의 시대'였다.
그는 양주(揚州)라는 도시를 3년 동안 통치했다고 했는데, 중국의 어떠한 자료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폴로의 글 가운데 보이는 명백한 자기 모순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자기가 주선해서 제작한 투석기로 몽골군이 중국 남부의 요새 샹양(襄陽)을 함락시켰다고 적었는데, 이 도시는 이미 마르코 폴로가 도착하기 전에 함락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동방견문록』이 마르코 폴로의 저작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당시 서구인들에게는 신비와 미지의 세계였던 동방을 다녀온 뒤,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면서 과장과 허풍을 즐겼던 그는 '밀리오네' 즉 '백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즉, 그가 입만 열면 '백만' 운운하면서 떠벌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실은 남이 가 보지 않은 곳을 다녀온 뒤 친지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침소봉대하고 자신의 역할도 과장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설령 『동방견문록』에 상당한 과장과 약간의 자기모순이 보이는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많은 부분이 당시의 상황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체계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이처럼 광범위한 세계의 여러 사정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살았던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이라는 독특한 시대적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몽골의 시대'였다.
몽골 제국은 1206년 초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에 의해 창건된 이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정복 전쟁이 계속되어, 쿠빌라이 칸의 치세(1260~1294)에 해당하는 13세기 후반에는 최고 절정기에 이르게 되었다.
제국의 영토는, 서쪽으로 러시아에서 동쪽으로는 태평양 연안까지, 북으로는 시베리아에서 남으로는 인도양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서부 유럽과 인도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 거의 전부를 포괄하게 된 것이다.
폴로 일가의 여행은 1260년 베네치아를 출발함으로써 시작되어 1295년 귀향함으로써 막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쿠빌라이의 치세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으니, 『동방견문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마르코 폴로의 놀라운 기록은 바로 쿠빌라이 칸 치세의 몽골 제국과 그 주변 세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자 이 위대한 시대가 남긴 지워지지 않는 기념물인 것이다.
폴로 일가의 여행은 1260년 베네치아를 출발함으로써 시작되어 1295년 귀향함으로써 막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쿠빌라이의 치세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으니, 『동방견문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마르코 폴로의 놀라운 기록은 바로 쿠빌라이 칸 치세의 몽골 제국과 그 주변 세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자 이 위대한 시대가 남긴 지워지지 않는 기념물인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바로 쿠빌라이가 살던 13세기 후반의 몽골 제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탄생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 한 장 한 장마다 이 시대의 모습이 배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글을 읽는 누구나 전편에 드리운 몽골 제국의 그림자가 얼마나 큰지 느끼게 될 것이다.
베네치아를 떠난 폴로 일행은 얼마 후에 곧 몽골 제국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조그만 지역으로 위축되어 버린 비잔틴 제국의 경계 너머가 모두 몽골 제국의 천하였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의 마르코가 베네치아의 집을 떠나 마흔한 살의 나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이 몽골 제국의 세계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었다.
베네치아를 떠난 폴로 일행은 얼마 후에 곧 몽골 제국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조그만 지역으로 위축되어 버린 비잔틴 제국의 경계 너머가 모두 몽골 제국의 천하였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의 마르코가 베네치아의 집을 떠나 마흔한 살의 나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이 몽골 제국의 세계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었다.
귀향길에 오른 그는 동남아시아와 수마트라·자바 등지의 수많은 섬과 해안을 거치면서 대(大)칸의 종주권이 그곳까지 미치고 있음을 확인했고, 믈라카 해협 너머에 있는 실론 섬이나 동아프리카 연안까지도 대칸의 사신들의 발길이 미치고 있음을 보았다. 따라서 마르코 폴로에게 몽골 제국은 단순히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였고, 『동방견문록』은 그 '세계의 서술'이었던 것이다.
『동방견문록』의 원본은?
현존하는 사본의 숫자만해도 거의 120종에 이르지만, 그 어느 것도 원본은 아니다. 아직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 유럽에서는 『동방견문록』이 처음 만들어진 후 계속 필사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추가·삭제·수정되어서, 현존하는 사본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래도 원본에 가장 가까운 사본은 14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필사된 것으로 '프랑스 지리학회본'(F본)으로 알려져 있다.
『동방견문록』은 정확한 제목???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세계의 서술(Description of the World)』이다. 책의 내용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기 보다는 서구를 제외한 세계 각지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도 이 책을 단순히 여행기로 생각하여 'Travels'라 불렀고, 일본에서 이를 다시 『동방견문록』이라고 옮김으로써 책의 원래 성격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르코 폴로의 머릿 속에는 지금과 같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관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과연 중국에 갔는가?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동방견문록』에는 중국의 한자, 차(茶), 전족 등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허구로 판명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안에는 그가 실제로 중국에 가지 않았다면 도저히 쓸 수 없는 정확하고 자세한 기록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아직도 다수의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를 역사적 실존인물이며 중국을 다녀왔고 『동방견문록』의 저자로 보고 있다.
원 세조 통치 하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였다. 그래서 서방 각국의 사신, 상인, 여행가들이 중국으로 왔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마르코 폴로였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숙부 마페오 폴로는 베네치아의 상인으로 늘 외국으로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한번은 보하라에서 쿠빌라이의 사신을 만났다.
호기심이 생긴 사신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도(上都,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다륜현 서부)로 갔다. 유럽의 상인들이 왔다는 말을 들은 쿠빌라이는 그들을 행궁으로 불러들여 접대를 했다. 그들에게서 유럽의 정황들을 듣게 된 쿠빌라이는 돌아가면 로마 교황에게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전해 달라고 했다. 그들 형제는 중국을 떠난 지 3년 만에 베네치아에 도착했는데 니콜로 폴로의 아내는 죽고 열다섯 살 된 마르코 폴로만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숙부한테서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마르코 폴로는 자신도 중국에 가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어린 아들을 홀로 집에 남겨두고 가기가 꺼림칙했던 아버지는 같이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 니콜로 형제는 교황을 알현한 후에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중국으로 갔다.
아버지와 숙부한테서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마르코 폴로는 자신도 중국에 가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어린 아들을 홀로 집에 남겨두고 가기가 꺼림칙했던 아버지는 같이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 니콜로 형제는 교황을 알현한 후에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중국으로 갔다.
그들은 3년 뒤인 1275년에 중국에 도착했는데, 그때 황제가 되어 있던 쿠빌라이는 그들 형제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먼 곳까지 보내어 그들을 영접하고 상도까지 호위해 오게 했다.
니콜로 형제는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황궁으로 들어갔는데, 세조는 함께 있는 소년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폐하의 노복이자 저의 아들입니다.”
니콜로 형제는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황궁으로 들어갔는데, 세조는 함께 있는 소년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폐하의 노복이자 저의 아들입니다.”
세조는 영특하게 생긴 마르코 폴로를 보고 “잘 왔다. 잘 왔어.” 하며 기뻐했다. 그날 저녁 세조는 특별히 황궁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으며 이후 그들에게 조정 일을 보게 했다. 총명한 마르코 폴로는 몽골어와 한어를 아주 빨리 배웠고, 세조는 마르코 폴로를 각별히 총애했다.
얼마 후 세조가 그를 운남에 보내어 일을 보게 하자,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세태와 풍속을 관찰했으며 상도에 돌아오자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세조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세조는 그 말을 듣고 마르코 폴로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얼마 후 세조가 그를 운남에 보내어 일을 보게 하자,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세태와 풍속을 관찰했으며 상도에 돌아오자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세조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세조는 그 말을 듣고 마르코 폴로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17년이나 살았는데, 그동안 세조는 그를 전국 각지로 보내서 시찰을 하게 하고 사신의 신분으로 외국에도 다녀오게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이 그리워진 세 유럽인은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세조에게 여러 번 청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를 총애하는 세조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그들이 하도 졸라대자 마지못해 허락했다.
조국으로 돌아간 마르코 폴로는 사람들에게 동방과 중국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들을 루스티첼로가 받아 써서 펴낸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여행기에서 마르코 폴로는 중국의 저명한 도시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중국의 부유함과 문명을 찬양했다. 이 책이 출판됨으로써 중국 문명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과 흥미가 증폭되었다.
그 후 중국과 유럽, 중국과 아랍 간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 아랍의 천문학, 수학, 의학 등이 중국에 전파되었으며 중국의 3대 발명인 나침반, 화약, 인쇄술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다른 발명인 종이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유럽에 전해졌다.
조국으로 돌아간 마르코 폴로는 사람들에게 동방과 중국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들을 루스티첼로가 받아 써서 펴낸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여행기에서 마르코 폴로는 중국의 저명한 도시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중국의 부유함과 문명을 찬양했다. 이 책이 출판됨으로써 중국 문명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과 흥미가 증폭되었다.
그 후 중국과 유럽, 중국과 아랍 간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 아랍의 천문학, 수학, 의학 등이 중국에 전파되었으며 중국의 3대 발명인 나침반, 화약, 인쇄술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다른 발명인 종이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유럽에 전해졌다.
예) 중국과 서역의 접촉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송나라와 원나라 때에 이르러 더한층 발전했다. 이 철판(鐵板)은 중국과 아라비아의 교류를 보여준다.
비문은 각 나라에서 원나라에 보화를 공물로 바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공물 중에는 마노(瑪瑙), 유리, 안식향(安息香), 산호, 금은 기명 등이 있었다.
원나라는 송나라가 발전시킨 해상 무역을 승계 발전시켰는데, 동쪽에 있는 필리핀에서 인도네시아 열도를 지나 페르시아 만과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에까지 이르렀다. 해상에서 배의 위치를 정할 때 쓰던 나침반 그릇이다.
문명교류의 문헌적 전거로서의 여행문학서(여행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가문 출신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동방교역을 목적으로 나섰다가 우연히 원(元) 세조 쿠빌라이 칸의 교황청 파견 특사가 되어 복명(復命)차 원으로 돌아가는 부친과 숙부를 따라 1271년 여름, 17세의 나이에 고향 베네치아를 떠난다. 근 4년간의 고행 끝에 1275년 5월 원 제국의 상도(上都)에 도착하였다.
마르코는 원조(元朝) 칸의 배려하에 16년간 중국에 체류하다가 1291년 칸의 특명을 받고 중국을 떠난 후 역시 4년간의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떠난 지 24년 만인 1295년에 마침내 귀향하였다. 마르코의 여행은 중국 체재 16년과 육 · 해로의 왕복 여정 8년을 합쳐 총 24년간의 기나긴 세월이었다.
귀향한 다음해인 1296년에 발발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해전에서 마르코는 제노바군에게 체포되었다. 그가 감방에서 동방여행에 관해 구술한 것을 요수(僚囚, 함께 갇힌 동료)인 이야기 작가 루스티치아노(Rusticiano)가 필록(筆錄)하였다가 1298년에 책으로 엮어 간행한 것이 『동방견문록』이다.
『동방견문록』은 서문과 본문의 2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은 폴로 일행 3명이 두 차례에 걸쳐 동방으로 여행한 과정을 개괄적으로 서술한다.
마르코는 원조(元朝) 칸의 배려하에 16년간 중국에 체류하다가 1291년 칸의 특명을 받고 중국을 떠난 후 역시 4년간의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떠난 지 24년 만인 1295년에 마침내 귀향하였다. 마르코의 여행은 중국 체재 16년과 육 · 해로의 왕복 여정 8년을 합쳐 총 24년간의 기나긴 세월이었다.
귀향한 다음해인 1296년에 발발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해전에서 마르코는 제노바군에게 체포되었다. 그가 감방에서 동방여행에 관해 구술한 것을 요수(僚囚, 함께 갇힌 동료)인 이야기 작가 루스티치아노(Rusticiano)가 필록(筆錄)하였다가 1298년에 책으로 엮어 간행한 것이 『동방견문록』이다.
『동방견문록』은 서문과 본문의 2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은 폴로 일행 3명이 두 차례에 걸쳐 동방으로 여행한 과정을 개괄적으로 서술한다.
본문은 크게 4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첫부분은 폴로 일행이 소아르메니아에서 원제국의 상도에 이르는 도중의 견문을,
둘째 부분은 몽골의 칸과 궁정 · 도성 · 치적 등과 마르코의 중국 각지 여행담을,
넷째 부분은 몽골 여러 부족들간의 전쟁과 아시아 대륙 북부 지역의 개황을 각각 다루고 있다.
이 여행기는 200여 나라 · 지역 · 도시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중요한 곳에 관해서는 그곳의 기후 · 물산 · 상업 · 문화 · 종교 · 풍속 · 정치사건 등을 일일이 상술하고 있다.
이 책은 본래 중세 프랑스어 · 이탈리아어 혼성어로 씌었으며, 적지 않은 방언도 섞여 있었다.
이 여행기는 200여 나라 · 지역 · 도시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중요한 곳에 관해서는 그곳의 기후 · 물산 · 상업 · 문화 · 종교 · 풍속 · 정치사건 등을 일일이 상술하고 있다.
이 책은 본래 중세 프랑스어 · 이탈리아어 혼성어로 씌었으며, 적지 않은 방언도 섞여 있었다.
원본은 소실되었으나 널리 전해진 필사본은 약 140종에 이른다.
그중 스페인 토론토 교회도서관에 소장된 젤라다(Zelada) 라틴어 필사본이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고,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의 필사본(1116)은 원문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이며, 1477년 뉘른베르크에서 출간된 독일어 역본은 최초의 간본(刊本)이다.
1970년대 말까지 출판된 각종 언어의 간본은 무려 120여 종에 달하는데, 이러한 간본의 서명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다.
『세계의 기술』(Description of the World),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 각하의 동방 각국 기사(奇事)에 관한 서(書)』 『베네치아 시민 마르코 폴로의 생활』 『기서(奇書)』 『백만(百萬)』 등 여러가지 서명이 있으나, 보통 『마르코 폴로 여행기』라고 통칭한다.
『세계의 기술』(Description of the World),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 각하의 동방 각국 기사(奇事)에 관한 서(書)』 『베네치아 시민 마르코 폴로의 생활』 『기서(奇書)』 『백만(百萬)』 등 여러가지 서명이 있으나, 보통 『마르코 폴로 여행기』라고 통칭한다.
일본어와 한국어로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란 제목으로 번역 ·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