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mountain, 山,
보통 육지에서 주변지면에 대하여 사면을 이루며 높게 돌출한 지형.
지리학적 의미로 육지의 표면이 주변의 지면보다 훨씬 높이 솟아 있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지형.
아무리 고도가 높더라도 대부분이 수평면으로 이루어진 지형은 대지(table land platform) 또는 고원(plateau high land)이라고 불러 산과 구별한다.
과거에는 언덕과 산을 같은 개념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은 고도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경향이다. 예를 들면, 영국의 경우는 높이 약 700m 이상의 상대적 기복(相對的起伏)을 가진 지형을 산으로 하고, 그 이하의 낮은 돌출부를 구릉이라 한다.
나라에 따라서는 그 구분이 애매하여 산의 침식 정도나 지형적 특성 등에 따라 높이와는 관계없이 ‘산’으로 칭하기도 한다.
산이 넓은 지역에 걸쳐 모여 있는 지형을 산지라 부르며, 이때 산이 선상(線狀) 혹은 대상(帶狀)으로 연속되어 있는 경우를 산맥, 또 몇 갈래의 산맥이나 산지가 복합되어 있는 거대한 지형을 산계(山系, cordillera)라 한다.
높이에 따라 형식적인 산지 분류를 할 때 1,000m 이하를 저산성산지(低山性山地), 3,000m 이하를 중산성산지(中山性山地), 3,000m를 넘는 것을 고산성산지(高山性山地)라 한다.
고산이라고 할 때는 이러한 높이 한계보다는 만년설(萬年雪)이 있어 설선(雪線) 이상의 높이가 있는 경우를 칭하기도 한다. 고산지대는 이러한 고산이 넓은 지역에 모여 있는 지대를 말한다. 또, 산지가 대지(臺地)의 형상일 때는 고원이라 부른다.
산은 조륙운동(造陸運動)·조산운동(造山運動)·화산작용 및 암판(plate)의 이동작용 등과 같은 지구 내부에서 일어나는 내인적 작용(內因的作用)과 풍화·침식·운반·퇴적 등 지각의 외부에서 작용하는 외인적 작용(外因的作用)의 결합으로 형성된다.
오랜 지질시대를 거쳐 서서히 일어나는 지반의 융기로 지표는 상당한 고도를 가지게 되며, 이때 작용하는 횡압력으로 습곡이나 단층작용이 일어나 지표는 일차적인 기복(起伏)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기복은 지하의 마그마가 분출되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전자는 습곡산지와 단층산지, 후자는 화산이라 한다.
일단 형성된 산지는 이러한 운동의 반복으로 복잡하게 되며, 동시에 하천·빙하(氷河)·바람·파랑(波浪)·지하수 등에 의한 침식·운반·퇴적작용을 받아 원래의 고도나 기복이 변형된 침식산지(侵蝕山地)로 된다. 한편, 오랜 침식과정에서 저평화된 평지상에 남아 있는 잔존산지(殘存山地)를 잔구(殘丘)라 한다.
· 우리나라 산의 특성 ·
한반도는 안정육괴(安定陸塊)로서 오래된 암석이 넓게 분포하여 중국의 화북 지방(華北地方)이나 만주 지방의 암석과 유사하다. 그러나 중생대 이후에 생성된 해성층(海成層)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 한반도의 지체구조는 오랜 지질시대에 형성된 이래 신생대에 이르러서 심한 조산운동이 없었다.
한반도의 주요한 구조선(構造線)과 산맥의 방향을 결정한 조산운동은 중생대 삼첩기(三疊紀) 중엽에 있었던 송림운동(松林運動)과 쥐라기 말기에 일어난 대보운동(大寶運動)이다. 송림운동은 주로 북부 지방에 활발하였으며 요동 방향의 산맥과 구조선은 이때 만들어졌다. 대보운동은 남부 반도부에 활발하였고 가장 격렬한 지각운동이었다.
이때 한반도 곳곳의 지층은 심한 교란을 받았으며 중남부의 넓은 지역에 걸쳐 화강암의 관입이 있어 오늘날 산지지형 형성에 주요한 작용을 하였다.
한반도의 주요한 산맥은 지질구조에 따라 한국방향산계·중국방향산계·요동방향산계로 나눌 수 있다. 한국방향산계는 한반도의 방향과 거의 일치하는 남북 방향 또는 북북서·남남동 방향의 구조선을 따라 형성된 것으로, 주로 단층구조의 산맥이다.
이 산계에 속하는 산맥으로는 태백산맥·낭림산맥·마천령산맥 등이 있으며, 오랜 침식으로 인하여 구조선의 식별은 어려우나 산맥의 방향과 하천의 유로(流路)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방향산계는 북북동·남남서 내지 북동·남서 방향의 산맥들로서, 주로 습곡구조로 되어 있다. 이 산계에 속하는 산맥들로는 소백산맥·노령산맥·차령산맥·광주산맥 및 마식령산맥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서울∼원산 간의 이른바 추가령곡(楸哥嶺谷)을 비롯하여, 예성강곡·금강곡·영산강곡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산맥들은 모두 중생대 말의 대보운동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오랜 침식과정을 거쳐 저산성산지로 되었기 때문에, 연속성이 약해 실제 야외 관찰로 산맥을 인식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요동방향의 산계는 동북동·서남서 방향으로 특히 추가령곡 이북의 북부 지방에 잘 발달되어 있다. 주로 습곡구조이며 장백산맥·강남산맥·적유령산맥·묘향산맥·언진산맥·멸악산맥·함경산맥 등의 산맥이 이에 속한다.
순천(順川)∼양덕(陽德) 간의 구조선, 평양∼곡산(谷山) 간의 구조선도 이에 속하며, 한반도에서 가장 복잡한 지체구조를 형성한다.
우리나라 산지는 전체적으로 동해측 사면(東海側斜面)이 급경사이고, 서쪽이나 북쪽이 완경사인 경동성지형(傾動性地形)이다.
이것은 동해안을 따라서 태백산맥과 함경산맥이 동쪽으로 치우쳐 주향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반대쪽 즉 태백산맥은 경기쪽, 함경산맥은 개마고원쪽을 향하여 완경사를 이루며 낮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지형적 특색은 중생대 말의 대보조산운동이 있은 이후 오랜 기간의 침식으로 전반적으로 저평화(低平化)되었던 한반도에 신생대 제3기 마이오세 이후 단층작용 및 지배사 융기운동(地背斜隆起運動)이 동해 쪽에 치우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전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악국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지는 융기량이 미약한 데다 오랜 지질시대를 거치는 동안 침식의 진전으로 인해 저산성의 산지를 이룬다. 최고봉인 백두산(2,744m)도 3,000m에 미치지 못하며, 1,500m 내외의 개마고원 및 1,000m 내외의 태백산지와 소백산지를 제외하면 500m 내외 및 그 이하의 저산성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구릉성의 저산지는 높은 산지가 장기간의 침식으로 낮아진 것이 아니라, 원래 기복량(起伏量)이 극히 적은 저기복의 지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지의 경사는 대단히 완만하여 골짜기의 폭이 넓고 얕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분수령이 극도로 낮아져서 통곡(通谷)을 이루는 곳이 많고 곡망(谷網)의 발달이 현저하여 수지상(樹枝狀)을 이룬다.
구릉지상에는 지질구조에 따른 차별풍화나 차별침식에 의하여 형성된 잔구가 곳곳에 발달되어 있다. 대표적 잔구로는 구월산(九月山, 954m)·천마산(天摩山, 762m)·북한산(北漢山, 836m)·남한산(南漢山, 460m)·관악산(冠岳山, 629m)·계룡산(鷄龍山, 845m)·금오산(金烏山, 976m) 등이 있다. 우리나라 산지의 또 다른 특성의 하나는 곳곳에 산정부(山頂部)가 평탄한 평탄면이 발달해 있는 점이다.
함경산맥의 압록강 사면을 향한 개마고원 일대와 태백산맥의 오대산·태백산·육백산 및 대관령 등지에는 평지에서 보는 것과 거의 같은 인상을 주는 저기복(低起伏)의 지형들이 산정에 다수 분포되어 있다. 이런 평탄면은 한반도가 저평했을 당시의 유물지형(遺物地形)으로 과거 지각변동 이전의 지형을 잘 나타내어 준다.
이 평탄면의 고도는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며, 때로는 고립된 산정에 부분적으로 남아 산성취락(山城聚落)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이 평탄면은 고도에 따라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과 저위평탄면(低位平坦面)으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학자에 따라 여러 면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평탄면의 고도가 세분되는 것은 한반도가 신생대 제3기에 비대칭적 요곡운동(墝曲運動)에 따른 융기운동을 간헐적으로 받았다는 증거로 설명될 수 있다.
이 밖에도 현재는 활동하지 않고 있지만 신생대 제3기 말부터 제4기에 걸쳐 화산활동이 있었으며, 이때 분출한 알칼리 조면암(粗面岩)과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이나 용암대지가 산지를 이루고 있다.
산의 분포를 위도별로 보면, 2,000m 이상의 고산은 북위 40°이북에 주로 분포하고 그 이남은 저산성산지로 되어 있다.
최고봉인 백두산은 2,744m로 일본의 후지산(富士山, 3,776m), 대만의 위산(玉山, 3,950m)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고도별 분포는 2,000m 이상이 전체 국토의 0.4%, 1,500∼2,000m가 4%, 1,000∼1,500m가 10%로 함경남도·함경북도에 주로 분포하며 총 면적의 30∼40%를 차지한다.
500∼1,000m의 산지는 한반도의 약 20%로 강원도와 평안북도 지방이 각각 40% 정도 차지하고, 200∼500m의 저산지는 전 국토의 40% 이상인데 그 중 충청북도가 약 75%, 경상북도가 약 65%, 경상남도와 황해도가 50%에 가깝다. 따라서 평균 고도는 함경남도가 956m로 가장 높고 경상남도가 269m, 충청남도가 100m로 가장 낮다.
한반도 전체의 평균 고도는 482m이나 아시아의 평균 고도 960m에 비하면 매우 낮은 편이다. 주요 산맥에 따른 높은 산이나 각 지역의 명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방향의 산계에 속하는 마천령산맥은 우리나라 종주산(宗主山)이자 비조(鼻祖)인 백두산(2,744m)에서 남쪽으로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남포태산(2,435m)·백사봉(白沙峰, 2,099m)을 지나 넓은 용암대지를 이룬다.
함경산맥과 마주치면서 산맥의 남단부에 잇는 칠보산(七寶山, 906m)을 거쳐 동해에 닿는다. 낭림산맥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경계를 이룬다.
주맥의 산들을 제외하면 이 산맥은 1,500m 내외의 산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낭림산맥은 압록강의 중강진(中江鎭)에서 남으로 뻗으면서 장진호(長津湖) 서쪽 소백산(小白山, 2,184m)에서 함경산맥과 마주친다.
강남산맥·적유령산맥·묘향산맥·언진산맥·멸악산맥 등이 이 산맥에서 갈라져 나가 서해로 굽이친다. 낭림산맥은 남쪽으로 영흥·문천·원산에까지 뻗어 태백산맥과 연결된다.
산맥 중에는 맹부산(猛扶山, 2,214m)·와갈봉(臥碣峰, 2,262m)·희색봉(稀塞峰, 2,185m)·소백산(2,184m)·낭림산(2,014m)·백산(白山, 1,724m)·병풍산(屛風山, 1,353m) 등이 솟아 있다.
아득령(牙得嶺, 1,479m)·검산령(劍山嶺, 1,127m) 등은 고개라기보다는 산 형태의 분수령을 이룬 것으로 동서의 분계(分界)가 되고 있다.
태백산맥은 원산의 남쪽에 있는 황룡산(黃龍山, 1,258m)에서 남하하여 부산의 다대포 부근까지 길이 500㎞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척추산맥이다.
북부에 세계적인 명산인 금강산(1,638m)을 비롯하여 설악산(1,708m)·오대산(1,563m)·태백산(1,549m) 등이 강원도에 분포하며, 또 일월산(日月山, 1,219m)·보현산(普賢山, 1,124m)·팔공산(八公山, 1,192m)·고헌산(高獻山, 1,033m)·신불산(神佛山, 1,209m) 등이 경상도에 자리하여 경승미를 자랑한다.
북부 태백산맥에는 금강산·설악산 등의 승경 이외에 응봉산(鷹鳳山, 1,271m)·향로봉(香爐峰, 1,293m)·방대산(芳臺山, 1,436m)·계방산(桂芳山, 1,577m)·황병산(黃柄山, 1,407m)·발왕산(發旺山, 1,577m)·가리왕산(加里旺山, 1,561m)·두타산(頭陀山, 1,351m)·대덕산(大德山, 1,307m)·함백산(咸白山, 1,561m) 및 청옥산(靑玉山, 1,404m) 등의 준령이 솟아 있다.
그 사이에는 철령(鐵嶺)을 비롯해서 수많은 영마루가 있고, 특히 단발령(斷髮嶺)·마패령(馬佩嶺)·진부령(珍富嶺)·한계령(寒溪嶺)·대관령(大關嶺)은 금강·삼방(三防)·설악 등의 명승을 낀 고개로서 유명하다.
태백산맥에는 주문진 소금강(小金剛), 오대산 지역, 두타산의 무릉계곡(武陵溪谷), 울진의 불영사계곡, 주왕산(周王山) 지역, 서라벌 경주 지역 등 명승 사적지와 석회암의 동굴이 산맥 곳곳에 있어 자연미를 더하여 준다.
요동방향에 속하는 함경산맥은 두류산(頭流山)을 중심으로 서남쪽의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과 동북쪽의 함경산맥으로 구별하기도 하며, 묘향산맥과 연결된 산맥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산맥은 우리나라 동북부의 이른바 한국 알프스라고도 불리는 개마고원을 달리면서, 최고봉인 관모산(冠帽山, 2,541m)을 중심으로 무산고원(茂山高原)의 준봉들을 거느리며 괘상봉(掛上峰, 2,136m)에 이르러 삼수갑산(三水甲山, 2,522m)의 2,000m가 넘는 72좌의 고산군을 이룬다.
두류산(2,309m)·명당봉(明堂峰, 1,809m)·백암산(白巖山, 1,741m)·검덕산(檢德山, 2,150m)·희사봉(希沙峰, 2,117m)·북수백산(北水白山)·궤상봉(櫃床峰, 2,333m)·만탑산(萬塔山, 2,205m)·두운봉(頭雲峰, 2,487m) 등이 대표적인 산들이다.
강남산맥은 낭림산맥의 아득령에서 갈라져 압록강을 끼고 강계·초산으로 달리며 거문산(巨門山, 1,049m)·비래봉(飛來峰, 1,479m)이 솟아 있고 북서면은 단층의 급사면을 이루고 있다.
적유령산맥은 낭림산맥의 맹부산에서 갈라졌으며 백암산(白巖山, 1,823m)·숭정산(崇楨山, 1,994m)·천마산 등이 솟아 있다. 이 산맥은 강남산맥과 방향은 같으나 남쪽이 절벽을 이루고 일찍이 개화의 첫 물결이 밀려 왔으며 지하자원의 보고로도 이름이 높다. 묘향산맥은 명산 묘향산(1,909m)을 비롯해서 동룡굴의 명승이 있다.
언진산맥은 비교적 낮은 구릉성 산들인 재령산(載靈山, 1,184m)·하람산(霞嵐山, 1,486m)·백산(栢山, 1,240m)·언진산(彦眞山, 1,120m) 등을 이루며 대동강 유역의 낙랑준평원을 끼고 있다.
지맥은 구월산맥이라고도 부르는 구월산(九月山, 954m)이 있다. 멸악산맥은 황해도의 분수령격인 산맥으로서 함경·평안·강원·황해 4도의 교차점이 되는 곡산에서 서남으로 뻗어 있다.
멸악산(滅惡山, 815m)·입암산(立巖山, 1,107m)·장수산(長壽山, 747m)·수양산(首陽山, 899m) 등이 솟아 있다. 추가령구조곡의 북쪽에 있는 마식령산맥에는 명지덕산(明地德山, 911m)·동백년산(東百年山, 1,246m)·화개산(華蓋山, 1,187m) 등이 잔구를 이루며 분포하고 있다. 광주산맥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갈라져 서울 북쪽으로 뻗어 있다.
이 산맥 중에는 북한산(北漢山, 837m)·도봉산(道峰山, 710m)·수락산(水落山)·불암산(佛巖山)·관악산(冠岳山, 629m) 등이 수도권을 둘러싼 화강암의 원정형(圓頂型) 암봉을 이루며 솟아 있다.
광주산맥 북쪽 지역에는 화악산(華岳山, 1,468m)·명지산(明智山, 1,267m)·국망봉(國望峰, 1,176m)·현등산(懸燈山, 936m)·광덕산(廣德山, 1,046m)·명성산(鳴聲山, 922m)·용문산(龍門山, 1,157m) 등이 솟아 있다. 수도권 근교의 산과 이들 경기도의 산들이 어울려서 이 지역의 경관을 이룬다.
소백산맥은 태백산맥의 태백산 부근에서 서남으로 뻗어 문수산(文殊山, 1,206m)·소백산(小白山, 1,421m)·죽령(竹嶺)을 거쳐 도솔봉(兜率峰, 1,314m)·조령산(鳥嶺山, 1,106m)·주흘산(主吃山, 1,097m)·월악산(月岳山, 1,093m)·속리산(俗離山, 1,057m)·대덕산(大德山, 1,290m)·덕유산(德裕山, 1,594m) 및 백운산(1,279m) 등을 거친다.
수도산(修道山, 1,317m)·가야산(伽倻山, 1,430m)을 만들고, 다시 고흥반도로 뻗으면서, 지리산(1,915m), 월출산(月出山, 809m), 그리고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1,186m), 순천의 조계산(曹溪山, 887m)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두산화산대(白頭山火山帶)는 백두산에서 마천령산맥의 방향을 따라 칠보산의 괴봉(怪峰)을 만들었으며, 함경산맥과 마천령산맥이 교차하는 일대는 넓은 용암대지의 고원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에는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소연지봉(2,123m)·간백산(間白山, 2,164m)·소백산(2,174m) 등이 화산군을 이루고 있다.
이들 화산활동은 제3기에서 4기 초에 분출한 조면암으로 종상화산(鐘狀火山, tholoide)을 이루었다가 다시 현무암이 분출해서 경사도가 완만한 순상화산(楯狀火山, aspite)을 이루었다.
백두산·한라산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화산의 중앙부가 함몰해서 칼데라호(caldera湖)가 생겼다. 울릉도 북쪽 나리(羅里)칼데라와 백두산 천지, 제주 한라산의 백록담(白鹿潭)이 이에 해당한다.
백두산화산대는 울릉도·독도에서 남으로 내려와 제주 한라산을 분출, 형성시켰다. 한라산에는 360개의 기생화산이 분포하고 있는데 성판오름[城板岳]·삼의양오름·어승생오름 등이 대표적이다.
학설에 따라서는 제주의 한라산을 일본열도의 화산대 연장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지질구조와 분출시기 및 분출암으로 보아 백두산화산대의 일부로 단정하기도 한다.
자연을 보는 관점에서 우리 민족을 포함한 동양민족은 자연을 종교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보려고 하였으며, 서양민족은 과학적으로 또는 스포츠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많았다. 산은 미의 대상이고 이것을 구현함으로써 정신적 생활에 있어서의 정서함양은 물론이고, 나아가 숭산사상과 더불어 하나의 산수향(山水鄕)의 이상향(理想鄕)을 구현하는 뜻도 되었다.
유럽에서는 겨우 17세기초에 산수풍경은 ‘경관(
landscape)’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미술의 소재로 등장하니, 러스킨(
Ruskin, J.)의 《근대화가론(
近代畫家論)》에서 비로소 자연을 심미적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산천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아울러 활발한 등산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견주어보면, 우리 민족의 산천에 대한 심미적 인식은 이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음이 역력하다.
문학에 있어서는 초기의 신령을 위한 <
도솔가(
兜率歌)>나 제사적인
서사시가 그 시대의 산천에 대한 고대의 종교적 신앙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겠으나 그뒤 고구려의 가요, 신라의 향가, 그리고
백제 가요가 발생하게 되었고 고대의
구비문학은 차차 산을 심미적 대상으로 보는 초기적 운(
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려에 와서 시가(
詩歌) 속악(
俗樂) 31편에서 산천을 주제로 한 것을 찾아볼 수 있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가사문학에서 산의 미와 생활을 적극적으로 문학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송순(
宋純)의 <
면앙정가>,
백광홍(
白光弘)의 <
관서별곡<
關西別曲)> 등을 비롯하여 정철(
鄭澈)의 <
관동별곡(
關東別曲)> · <
성산별곡(
星山別曲)>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맹사성(
孟思誠)의 <
강호사시가(
江湖四時歌)>, 이황(
李滉)의 <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 이이(
李珥)의 <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 그리고
윤선도(
尹善道)의 <
산중신곡(
山中新曲)>, 정시한(
丁時翰)의 <산중일기(
山中日記)> 등은 우리나라 국문학 사상의 찬란한 금자탑이며 이들은 한결같이 산과 자연을 읊고 산천 속의 생활을 구가하던 명작이다.
이러한 산의 미를 시가의 소재로 하면서 운수(
雲水)의 행각(
行脚)을 즐기던 수많은 시선묵객들은 때로 현실에 항거도 하고 혹은 산이 은둔처로 되면서 이 나라 산천의 송가(
頌歌)를 남겼다.
장편가사에 있어서도
금강산 ·
묘향산 등의 명승을 읊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흔히 말하는 잡가나
판소리에도 적지 아니한 자연구송(
自然謳頌)의 시가를 볼 수가 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도 산천을 예술적인 심미의 정서로 삼고 있으며 수많은 작가 · 화가 · 서예가들이 대자연의 예술을 이상으로 삼고 현실과 조화를 구현시키고자 하고 있음은 옛날과 다름이 없다. 한편 산이 주는 움직이지 않는 확고함과 진실성의 느낌을 무한한 동경의 정념(
情念)으로 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서 도피하는 은일(
隱逸)의 행각은 충군애국(
忠君愛國)의 비분으로 풍월에 부치기도 하고 자연의 무한성에서 피번(
避煩)하려고 한 은일사상이 나오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말기 두문동(
杜門同)의 은일은 유교적 충절의 결실일 뿐 아니라 사대부가 산에 은신하여 변절을 거부하며 현실을 외면하던 산이 충절의 터였음도 증명된다.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산은 숭배의 대상으로 신성시되어 왔다. 산악숭배의 숭산사상(崇山思想)은 산에는 반드시 신령(神靈)이 있다고 믿는 일종의 원시신앙이었다.
중국의 오악(五嶽), 티베트의 카일라스산, 네팔의 히말라야, 그리스의 올림포스산, 바빌로니아의 에크르산, 유대인의 시나이산에 대한 신앙이 모두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산에 대한 애니미즘적(animism的)인 경향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거나 우리 생활에 일부로 남아 있다. 그 중에도 건국에 관한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발상(發祥)과 건국이 산에서부터 비롯했음을 말해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만들고, 후에 단군왕검을 낳아 조선(朝鮮)을 건국하여 다스리다가 뒤에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건국신화는 우리 민족의 발상지가 산이었고 산에서 생활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숭천숭산(崇天崇山)의 사상은 고대의 태양 숭배의 신관(神觀)과도 통하는 것으로, 태양에 접근하기 위해 높은 산정에 제단을 마련하고 태양을 숭앙하던 것이니, 산은 하늘에 이르는 신성한 것이 분명했다.
숭산사상은 산에 대한 신앙으로 전해왔다. 백제 때는 선사신기급산곡지신(先祀神祇及山谷之神)으로 숭앙하였고, 신라 때부터는 삼신산(三神山)·오악(五嶽)에 제를 지냈다.
삼신산은 중국 사기(史記)에도 나오는 해동삼신산(海東三神山)을 본떠서 봉래산(蓬萊山: 금강산)·방장산(方丈山: 지리산)·영주산(瀛洲山: 한라산)으로 정하였고, 오악은 동악에 토함산(吐含山), 서악에 계룡산, 북악에 태백산(太伯山), 중악에 부악(父岳), 남악에 지리산을 칭하였다.
고려 때는 사악신(四嶽神)으로 지리산·삼각산(북한산)·송악산(松嶽山)·비백산(鼻白山)을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치악산(雉岳山)·죽령산(竹嶺山)·주흘산(主吃山)·금성산(錦城山)·한라산·오관산(五冠山)·마니산(摩尼山)·감악산(紺岳山)·백두산 등에 제단을 만들고 나라의 제를 지냈다 한다.
조선 전기에 와서 오악은 동악이 금강산, 서악은 묘향산, 북악은 백두산, 남악은 지리산, 중악은 삼각산으로 삼았다. 또한, 오진(五鎭)을 설치해서 오대산을 동진(東鎭), 속리산을 남진, 백악산을 중진, 구월산을 서진, 장백산(長白山)을 북진으로 해서 산신제를 지내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이러한 삼신산과 오악에 대한 자연신제는 높은 곳, 즉 산에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한 것만이 아니라 태양신에 접근하려고 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신화의 현신(現神)은 하늘 또는 태양의 신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산마루 제단을 통해 은혜에 감사하며 제액초복을 기원한 것이다.
최남선(崔南善)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는 우리나라 고유 신앙의 하나로서 “밝은 뉘[光明世界]의 태양 숭배인 민족종교가 있어 후일에 가서는 ‘부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천도(天道)의 밝은 세상을 실현하는 고래(古來)의 민족교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부루는 하느님께 대제례를 드리고 국가와 민족의 대사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이 옛 신앙은 신라 중엽부터는 팔관회(八關會)라는 이름으로 행해졌고, 고려 시대에 와서는 불교와 더불어 더욱 성행하여 국가적 제전이 되었다. 이 팔관회 때 오악·명산·대천(大川)에 큰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아, 숭천·숭산사상이 고대인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최남선이 주장하는 밝은 뉘 또는 부루교는 화랑들의 정신 수련을 위해 명산·대천을 순례하는 바탕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산에 백(白)자가 붙어 있고 그 주봉(主峰) 이름이 부루와 같은 발음인 비로가 적용되어 비로봉으로 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백두산의 백(白) 이외도 불함(不咸)·태백(太白)·장백(長白)·백산(白山) 등은 빛[光]·하늘[天]·밝음[明]과 같은 뜻의 이름이다. 비단 백두산뿐만 아니라 묘향산의 옛 이름인 태백산(太白山)의 주봉이 비로봉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산 이름 중 장백산·태백산·소백산·간백산(間白山)·백운산·백악산·백덕산(白德山)·백화산(白華山)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비로봉이라는 이름만 하더라도 금강산·속리산·용문산·오대산·치악산·소백산·팔공산 등의 주봉이 비로봉으로 되어 있음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비로봉의 이름 유래가 부루교에서 나온 것인가, 불교와 연관된 것인가는 여러 의견이 있다.
이 밖에도 구월산의 주봉이 사황봉(思皇峰)이고 계룡산의 연천봉(連天峰), 지리산의 천왕봉(天王峰) 등이 다같이 천·황·왕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백이라는 뜻의 비로와 같은 뜻이라 한다.
천신과 인간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인 산과 봉은 밝은 뉘·밝안·박·발이 되고 또한 부루로 되었는데, 이것은 한문으로 백(白)과 같은 것이며 후세에 승려가 불교 경전 속에 있는 같은 발음의 문자를 빌려 쓴 것이 비로이다. 이는 결국 옛날 신정시대(神政時代)에 있어서 신앙에 의하여 생겨난 이름이 그 산 모양에 따라 그대로 전해온 것이다.
1393년(태조 2) 이조(吏曹)에서 명산에 신을 받들어 제를 지내기로 하여 송악의 성황(城隍)을 호국공(護國公)으로 삼고, 이령(利寧)·안변(安邊)·완산(完山)의 성황은 계국백(啓國伯)으로 삼았으며, 삼각산·백악·암이(暗異)·무등산·금성·계룡산·치악산 등 모든 산은 호국백(護國伯) 또는 호국신(護國神)으로 삼았다.
중요 제단으로는 백두산의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장백산신(長白山神)의 묘단(廟壇)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지리산에 남악사(南嶽祠), 덕유산에 산제당(山祭堂), 서울북악(北嶽)에 백악사(白嶽祠), 남산에 목멱신사(木覓神祠) 등이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명산에 사당이나 제단을 세워 사전(祠典)을 지내는 대사(大祠)·중사(中祠)·소사(小祠)를 두고 조정이나 고을 현감들이 나라 이름으로 제사를 올렸다 한다.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으로서뿐만 아니고 하나의 국사(國事)로도 산은 숭앙의 대상이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자기가 “온 산천의 음우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고 한 것도 곧 산천이 도와 대업을 이루었다는 산의 초자연적 신력(神力)을 믿고 있음이다.
이 밖에도 전국 500여 고을에 주산(主山)이니 진산(鎭山)이니 해서 제를 지낸다든가 여러 가지 자연현상과 이에 따른 경제활동의 성쇄를 신의 조화로 믿고 명산대천단(名山大川壇) 등을 두어 제사한 것 등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우리 민족의 신앙은 자연신(自然神)을 믿고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복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신단에 기원한 것이다.
이병도(李丙燾)는 우리나라 고대사회에는 삼산제(三山制)가 있었고, 이 삼산제는 고려 시대에 이르러 삼소제(三蘇制)로 발전되었으며, 삼소제는 신성한 산악이라는 뜻으로 국토의 진산이요, 수호신산(守護神山) 성지로 숭앙되었으며, 이것은 산악 숭배의 삼신사상에서 기원한 것이라 한다.
삼국시대의 삼산제의 유풍은 때마침 고려 시대를 풍미하던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과 결합하여 삼산·삼소는 비단 숭산뿐만 아니고, 실질적으로 길지(吉地)와 가지(佳地)를 택해 조궁(造宮)·천도(遷都)하는 기본이 되기도 했다. 특히, 고려 신종 때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라는 관청을 만들어 도참설을 근거로 토역의 기본을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숭산사상은 비단 원시신앙으로서만 아니라, 민간의 토착종교 내지는 민속적 신앙으로 깊은 뿌리를 박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래는 단군신화로부터 시작되어 부루교·삼산·삼소제·팔관회·진산·신산(神山) 외에도 신라 때부터 현저하게 나타나는 오악의 숭산사상 등, 결국 민간신앙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산신을 위함으로써 제액초복할 수 있다고 믿고, 고을의 평화와 안녕도 산이 지키고 그 해의 농사도 주관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즉, 산은 그들의 애니미즘의 대상이었고 외경하였으며 산은 민속적 신앙으로 전승되었다.
수호신으로서의 산신과 서낭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농작의 풍흉을 점치는 무속(巫俗)으로 산이 등장한다. 몽고의 사막 지방,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역과 같은 각박한 자연환경에서 오는 여러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풍수사상은 고전적 경제 지리적 욕구에서 차차 신앙처럼 굳어져, 좋은 집터, 살기 좋은 곳, 그리고 사후의 명당자리를 믿는 풍수도참사상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한결같이 산천을 태극오행(太極五行)으로 이해하려 하였고, 개인 생활에서부터 국사에 이르기까지 이에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민속적 전승에서 볼 수 있듯이 산은 길흉의 예언과 소원 성취의 근원으로 삼았다. 심매마니들의 산삼(山蔘)의 신조(神助)나 산신과 호랑이의 전설적인 민간 토착신앙의 대상은 으레 산이었고, 민담과 민요 속에도 이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민속놀이로서의 지신밟기는 산과 연유한 민속적 신앙으로 볼 수 있다. 즉, 산 그 자체를 신격시하여 숭앙하는 경우의 산악신앙과 아울러 산신(山神)에 대한 신앙은 수호신으로서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고, 농사의 풍작·기우(祈雨)·기설(祈雪)·안녕·질병까지도 좌우하는 것으로 믿었다. 또한, 괴력과 신통력이 있다고 하는 ‘산도깨비’는 전설적인 이야기로 설명되고 있다.
무속으로서의 성황은 진산이나 산신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대관령성황신제·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또한, 서낭신 역시 수호신으로 마을의 진산과 주산에 산신을 모시기도 하지만, 보통 고개나 큰 영(嶺)이나 재[峙]에 모신다.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나 향산제(香山祭)를 비롯한 지방의 향토 신사(神祠)는 여러 가지 이름의 향토제나 마을제로 불린다.
이러한 것들은 고유한 민간신앙인 숭산사상에 무속이 가미되어 각종 향토신제로 발전하였고 이들을 통해 마을을 지키고 질병이나 흉액을 막으며 마을의 발전을 빌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아직도 일부 향리(鄕里)에서는 토착신앙과 민속적인 유풍으로 지켜지고 있다.
생남하기를 원하는 여인들이 유교의 칠거지악(七去之惡)의 유풍(儒風)과 본능적인 소망에서 기자(祈子)를 발원하여, 산의 절벽이나 큰 바위에 기원을 드리는 풍속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서울 인왕산(仁旺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기자암(祈子巖)의 이름이 있는 곳이 이에 해당되고, 이것은 또한 자연신에 대한 민속적 신앙이며, 산천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명산에 빌면 발원(發願)이 성취된다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자연숭앙의 한 형태이다.
중국에서 비롯한 풍수지리설은 장풍(藏風)의 선악(善惡)과 득수(得水)의 길흉을 맞추는 하나의 술사적(術師的)인 풍수사(風水師)로 부르면서, 인간의 삶을 천지산천에 택하여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좋은 땅을 찾는 데 목적을 두었다.
자연의 길흉이 사람에게 미치게 되는 중화(中和)를 얻음으로써 주택의 길지를 얻고, 조상의 묘를 산의 명당자리에 씀으로써 자손의 발복(發福)과 번영을 이루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개인의 주택뿐만 아니라 크게는 한 나라 도읍의 결정에까지 작용하였다. 조선 태조가 왕도를 한양으로 정한 경위도 이러한 풍수도참설에 기인하였다는 기록은 잘 알려진 일이다.
『산법전서(山法全書)』에서도 볼 수 있는 감여설(堪輿說)은 이러한 것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관은 역시 그 근본은 산에 대한 외경과 숭앙사상에서 비롯된다고 하여도 틀림없다.
우리나라에서 대찰과 사원은 으레 명산에 자리 잡고 불자(佛者)의 좌선(坐禪)의 터로 대찰이 있는 곳은 보통 명산을 끼고 있으며 입산(入山)이 불교에 귀의하는 뜻도 되었으니, 이 풍수설은 개인과 국사(國事)뿐만 아니라 종교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민간 종교인 도교(道敎)가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풍수설과 신선사상(神仙思想)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가운데 삼국시대 신라 화랑도의 생활양식 중에서 ‘유오산수 무원불지(遊娛山水無遠不至)’는 그들의 정신수양과 심신단련의 방법으로 명산대천의 승지를 찾아 청유(淸遊)하였는데, 그들을 원화(源花)·국선(國仙)·선랑(仙郎)·화랑(花郎)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이것은 도교의 무위자연사상(無爲自然思想)과 결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남선은 이 화랑도의 연유를 부루·붉은 뉘의 우리나라의 고유 민간신앙에서 변전(變傳)되었고, 부루교에서 성지순례(聖地巡禮) 행사로 하는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는 행위와 국토에 대한 바른 인식의 필요성이 화랑도들의 생활과 수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화랑도가 부루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사실보다는 화랑도가 산천을 순례하며 심신을 연마하기 위하여 관동의 여러 승지와 지리산·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을 찾았다는 기록은, 산천이 주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영향을 크게 감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화랑도가 바탕이 되어 후에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벌써 이 시대에 우리나라는 산의 미(美)를 인식하고, 산이 주는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을 인식하여 이들의 정신수양이나 신체단련의 터전으로 산천을 가까이하였다는 데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일찍이 산천이 주는 뜻을 깨달았다고 생각된다.
비록, 화랑도정신을 우리나라 고유의 무사도로 길이 계승, 발전시키지 못한 점은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산천이 주는 의미를 보다 일찍 깨닫고 나아가 어느 외국보다 이를 신앙적 대상만이 아닌 예술적 대상으로, 또는 심미적 대상으로 산을 가까이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을 포함한 동양 민족은 일찍이 자연을 종교적으로 보고 예술적으로 보려고 하였으며, 서양 민족은 과학적으로, 스포츠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많았다. 미술에 있어서 산수화는 중국의 당·송 시대에서부터 발달하여 고려 때는 벌써 산천이 산수화의 소재가 되고 있었음을 본다.
이 산수화의 예로는 고려 시대의 것이라 하는 착색산수도(着色山水圖)나 산수화를 넣은 접부채라든가, 인종 때 이령(李寧)의 「산수누대도(山水樓臺圖)」, 명종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공민왕의 「산수도(山水圖)」 등을 들 수 있으니, 이 밖에 기록에 있는 것들도 상당히 있다.
조선 시대에는 안견(安堅)·최경(崔涇)·강희안(姜希顔)의 3대가를 비롯하여 중기의 조속(趙涑)과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강세황(姜世晃), 김홍도(金弘道)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산수화의 대가들이 있다.
산은 미의 대상이고 이것을 구현함으로써 정신적 생활에 있어서의 정서함양은 물론이고, 나아가 숭산사상과 더불어 하나의 산수향(山水鄕)의 이상향(理想鄕)을 구현하는 뜻도 되었다. 유럽에서는 겨우 17세기 초 산수풍경이 ‘경관(landscape)’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미술의 소재로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러스킨(Ruskin,J.)의 『근대화가론(近代畫家論)』에서 비로소 자연을 심미적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산천을 과학적으로 구명하고 아울러 활발한 등산 운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견주어보면, 우리 민족의 산천에 대한 심미적 인식은 이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음이 역력하다.
문학에 있어서는 초기의 신령을 위한 「도솔가(兜率歌)」나 제사적인 서사시가 그 시대의 산천에 대한 고대의 종교적 신앙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뒤 고구려의 가요, 신라의 향가, 그리고 백제 가요가 발생하게 되었다. 고대의 구비문학은 차차 산을 심미적 대상으로 보는 초기적 운(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려에 와서 시가(詩歌) 속악(俗樂) 31편에서 산천을 주제로 한 것을 찾아볼 수 있고, 조선 시대에 와서는 가사문학에서 산의 미와 생활을 적극적인 문학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 등을 비롯하여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그리고 윤선도(尹善道)의 「산중신곡(山中新曲)」,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山中日記)」 등은 우리나라 국문학 사상의 찬란한 금자탑이며, 이들은 한결같이 산과 자연을 읊고 산천 속의 생활을 구가하던 명작이다.
이러한 산의 미를 시가의 소재로 하면서 운수(雲水)의 행각(行脚)을 즐기던 수많은 시선묵객들은 때로 현실에 항거도 하고, 혹은 산에 은둔하면서 이 나라 산천의 송가(頌歌)를 남겼다.
장편 가사에 있어서도 금강산·묘향산 등의 명승을 읊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흔히 말하는 잡가나 판소리에도 적지 않은 자연구송(自然謳頌)의 시가를 볼 수가 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도 산천을 예술적인 심미의 정서로 삼고 있으며, 수많은 작가·화가·서예가들이 대자연의 예술을 이상으로 삼고 현실과 조화를 구현시키고자 하고 있음은 옛날과 다름이 없다. 한편, 산이 주는 움직이지 않는 확고함과 진실성의 느낌을 무한한 동경의 정념(情念)으로 삼기도 하였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서 도피하는 은일(隱逸)의 행각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비분으로 풍월에 부치기도 하고, 자연의 무한성에서 번잡함을 피하려고 한 은일사상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 두문동(杜門洞)의 은일은 유교적 충절의 결실일 뿐 아니라, 사대부가 산에 은신하여 변절을 거부하며 현실을 외면하던, 산이 충절의 터였음도 증명된다.
국토의 약 70% 이상이 산지인 데다 구릉성의 야산이 많기 때문에,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산은 그 지역 주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쳐 왔다. 계절풍기후와 산간지의 소기후학적인 특성 및 지세와 같은 자연적 조건뿐만 아니라, 풍수사상과 같은 지리적 가치관도 작용하여 취락의 입지가 결정되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 관찬지리지(官撰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모든 읍취락(邑聚落)의 산촌조에 반드시 진산을 명기하고 있다.
진산은 취락의 후면(북측)에 위치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그 취락을 보호하거나 상징하며, 멀리서도 취락을 대표할 수 있는 수려하고 장엄한 산세의 산으로 이루어진다.
그 밖에도 진산은 보행인이나 취락 외부인들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의 구실을 수행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풍수사상에서 취락 입지에 가장 양호한 곳으로 소위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들고 있다.
배산은 겨울에 차가운 북서계절풍을 막아 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연료와 음료수 및 각종 산채(山菜)와 약초·목재·야생동물 등을 제공하여 준다.
남향의 산록지대는 일조량이 많은 데다 야간에 기온역전현상(氣溫逆轉現象)으로 곡지나 분지저(盆地底)보다 기온이 오히려 높은 산록의 온난대가 형성되기 때문에 취락 입지나 토지 이용에 유리하다. 산지에 있는 촌락을 산촌(山村)이라 한다.
이 산촌은 산간지에서 산지 농업이나 임산물을 토대로 살아가는 것 외에도 산간지대의 광산자원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광산취락이나, 높은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교통로의 입구에 생겨난 영취락(嶺聚落), 방어에 유리한 산정(山頂)에 산성을 구축한 산성취락(山城聚落), 명산 사찰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하촌(寺下村) 등이 있다. 과거 삼림의 개척과 산지의 개발은 화전의 방법을 이용하였다.
이것은 전통 사회에서 자연환경에 적응된 가장 손쉬운 농업 방법이었기 때문에, 개마고원 지역이나 태백·소백산맥의 고산지의 개척은 화전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화전의 역사는 이미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부터이지만, 인구 증가나 삼림 정책에 따라 면적이 확대, 축소되어 왔다. 화전민이 급증하고 산지 개척이 활발해진 것은 사회적인 혼란이 심하였던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초, 6·25사변 직후였다.
최근에는 화전민의 정착 사업이 실시되고 삼림 정책이 강화되면서 화전민은 없어지게 되었다. 반면에, 산업화·도시화와 더불어 편리한 교통을 이용한 고랭지농업의 발달과 소득 수준 향상에 따른 관광·산간 행락 시설의 건설로 산은 새로운 방향으로 주민 생활에 기여하고 있다.
산은 취락 지역의 경계가 되고 크게는 지역과 지역 사이의 격리의 구실을 한다. 지역 사이의 경계는 산릉을 연결하는 능선이나 산맥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계들은 지역 사이의 격리 성향을 강화시켜 풍토의 이질성 내지 지역성을 형성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대산맥을 경계로 지역 구분의 기본 틀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산지의 이러한 격리 기능 때문이다.
이들 산맥들에는 영(嶺)·재[峙]·고개들이 있어 지역 사이의 교류를 하게 한다. 또한 오늘날 중요 교통로들도 이들을 통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156년(신라 아달라왕 3) 계림령로(鷄林嶺路)가 개통되었고 2년 후인 158년 죽령(竹嶺)이 개척되었다 한다. 이러한 영로(嶺路)는 교통로의 역할뿐만 아니라 방비와 안전의 요새가 되기도 하였다.
조령(鳥嶺)의 관문과 철령(鐵嶺)의 관문 그리고 삼방관(三防關) 등과 같이, 관문이나 관방(關防)이 중요 고개마다 설치되어 성책과 산성문(山城門)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 와서 찰방(察訪)과 역승(驛丞)을 연결하는 산로(山路)는 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밖에도 높은 산정부는 통신 수단으로써 봉수(烽燧, 烽火)로 이용되었다. 봉수가 조직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1149년(고려 예종 3) 봉수식을 사용한 때부터였다.
봉수는 주로 국방상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변경의 비상사태를 중앙 또는 기지에 알리는 것이었다. 봉수대의 설치 방법은 매 30리마다 제일 높은 곳에 봉수대를 두되, 만약 산이 서로 막혀 불편할 때는 이수(里數)에 제한 없이 조망이 가능한 곳에 두었다.
전국의 봉수 계통을 보면 직봉(直烽)이라는 5개 주요 선이 있어, 이들 5직봉은 모두 서울 남산인 목멱산(木覓山)의 봉화대로 집중되었다.
산은 또한 그 지세와 위치에 따라 요새로 이용된다. 역사적으로 외적을 무찌르기 위해 산천의 지세를 천연의 이점으로 하여, 겨레와 나라를 지키며 국난을 극복한 경우가 많다.
산이 적극적인 방패가 되고 산의 험준함과 영재[嶺峙]가 가지는 공수의 이점을 잘 살려 외침을 물리치고 겨레를 지킨 예는 많다.
산정에 봉화대를 설치하여 외환이나 나라의 위급을 도성에 알리는 일 역시 산천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형을 이용하여 산성을 쌓아 침략에 대비하거나, 산과 영재의 요지를 관방이나 진보(鎭堡)로 삼아 군사를 주둔시켜 국방의 요새로 삼기도 하였다. 특히, 산성은 축성을 함으로써 효과적인 국방의 요새가 되었다.
산성의 축성은 국경의 설정이 되기도 하였고, 취락 근방에 설치하는 정책으로 도시국가·성읍국가의 방책으로 삼기도 하였다. 최초의 것은 서기 전 2세기의 평양성이었으며 이것은 산을 이용한 취락 보호의 성책이었다.
산성은 산마루와 정상을 연결하여 쌓았으며, 대체로 배후와 좌우에 험한 산릉이 둘러싸여 있고 안에 계류나 물터 혹은 샘이 있는 산지를 골라 성루(城壘)를 쌓고, 골짜기의 좁은 출구에 성문을 세운 것이다.
주요한 산성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산성·용강산성·봉산산성 및 온달성(溫達城)과 백제의 북한산성, 서울광나루의 아차산성(阿嵯山城), 부여의 성흥산성(聖興山城) 등이 있다.
또한 신라의 산성으로는 금오산의 남산성(南山城),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 보은오정산(烏頂山)의 삼년산성(三年山城) 등이 있다. 고려 시대는 동북방 변경 수비를 위한 9성의 축성이 있었고, 치악산의 치악성이 유명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도성의 축성 및 금오산성·화왕산성·북한산성을 비롯한 전국의 산성들을 보수하기도 하고 신축하기도 하였다.
산은 임산자원·광산자원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경관이 빼어난 자연경관과 어울려 관광자원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산지 자원의 이용은 산지 생태계의 균형 속에서만 영속적인 이용이 가능할 것이다.
지나친 남용이나 잘못된 이용은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와 오히려 자원의 고갈은 물론, 인간생활에 부적당한 환경으로 변모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산의 개발은 산의 보존이라는 범주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산지가 65% 이상인 우리나라는 임상(林相)으로 볼 때 기후의 남북성에 따라 북부는 냉대림, 중부는 온대림, 남부는 난대림이 분포하고, 제주도는 고도에 따른 난대·온대·냉대림 등 수직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남한의 임야 면적은 1996년 현재 644만 8000ha이다. 임야 비율을 보면 침엽수림이 284만 6000㏊로 44% 활엽수림이 167만 4000㏊로 26%, 혼합림이 172만 7000㏊로 27% 그리고 죽림이 8000㏊로 0.1%, 무림목지가 19만 3000㏊로 3%이다. 주요 임업 지역은 다음과 같다.
먼저 냉대림 지역은 북위 41° 이북, 즉 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 지역인 강계·자성·후창·장진·갑산·풍산·삼수·혜산·무산 등 9개 군에 걸친 북부 고원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우리나라 제일의 대삼림지대를 이루고 있다.
수종으로는 압록강 유역에는 낙엽송(落葉松)을 비롯한 침엽수가 약 70%, 단목(檀木) 등의 활엽수가 약 30% 비율로 분포되어 있다.
두만강 유역에는 침엽수가 약 76%, 활엽수가 약 24%의 비율로서 수해(樹海)를 이룬다. 벌채된 원목은 뗏목이나 혜산선(惠山線)·백무선(白茂線) 등의 삼림철도를 통하여 길주·성진·신의주·만포진(滿浦鎭) 및 회령 등지로 운반되어 제재·펄프 등의 원료로 이용된다.
온대림 지역은 대체로 북위 35°∼41° 사이의 북동 및 북서 두 지방의 동서 양안 이남 지역에서 전라남도 및 경상남도를 제외한 지역이다.
일찍부터 농경이 잘 발달된 곳이기 때문에 고유의 천연림은 거의 없고, 다만 함경산맥 동쪽 사면과 태백산맥의 삼림이 중요하다.
이 지역은 활엽수가 우세하고 이들은 재질이 경질(硬質)이기 때문에 방망이·차륜재(車輪材)·목재·도량형기(度量衡器) 등의 재료로 사용되었으나, 요즈음은 건축재, 철도의 침목, 가구용 목재 및 코르크 등의 원료로도 많이 이용되며, 또한 광산용 갱목(坑木)으로도 쓰인다.
난대림 지역은 북위 35° 이남의 지역으로, 특히 울릉도나 남해안 연안 지방에 발달해 있어 울창한 경관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임산물은 목재 중심이나 주로 주요 삼림 지역이 북부 지방에 편재해 있어, 필요한 목재의 대부분은 수입에 의존하고 국내의 삼림은 벌채를 가능하면 억제하는 실정이다.
목재 이외의 주요 부산물인 밤·호도·은행·갈저(葛苧)·표고·송이·떡갈잎·산채류·약초류 등은 식용 또는 수출 임산물로써 외화를 획득하고 있으며, 그 밖에 굴참나무 수피(樹皮)·송지(松脂) 등은 수입 대체물로 증산이 요망되고 있다.
산은 지형이나 지질적 특성에 따라 각종 동력·광물자원을 제공하여 준다. 우리나라의 주요 동력자원인 석탄과 수력은 바로 산지의 지질·지형적 특성에 의해 그 분포가 나타난다.
비교적 풍부히 매장되어 있는 무연탄은 고생대의 평안계지층(平安系地層)이 잘 발달된 북한의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고, 남한에서는 강원도 남부의 태백산 주변 지역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그 외에는 전라남도의 화순, 경상북도의 문경, 충청남도의 성주 등지에 약간 매장되어 있을 뿐이다. 이 밖에도 갈탄은 신생대의 제3기층이 비교적 발달된 함경북도의 아오지를 중심으로 한 탄전지대에 매장되어 있고, 평안남도의 안주, 황해의 봉산 등지에 다소 매장되어 있으며, 남한에서는 영일만 부근에 약간 매장되어 있다.
수력은 산지의 경사와 유수량에 의해 조건지어지지만, 우리나라는 지형적 기복이 크지 않은데다 경사가 완만하여 포장수력량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한쪽이 급경사인 경동성지형을 이용한 유역변경식(流域變更式)이나 수로식(水路式)을 이용한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발전량이나 포장수력량은 급증하였다.
최근에는 곡지의 협부를 막아 거대한 다목적댐을 축조함으로 산지 내에 거대한 인공호수가 수없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산지에 매장되어 있는 광물자원은 매우 많다.
매장 광물이 210여 종이나 되고, 유용광물(有用鑛物)이 140여 종이 되며 세계적으로 산출이 드문 중석(重石: 텅스텐)·수연(水鉛: 몰리브덴) 및 안티몬과 같은 희귀광물도 산출되어, 이른바 ‘광물의 표본실’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매장량은 대체로 적다. 지질적으로 고생대지층과 화강암이나 화강편마암계의 암석이 넓게 분포하여 금·은·연·아연·철·중석·흑연·마그네사이트·운모·규사·고령토·석회석 등이 비교적 많이 매장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사계절이 분명한 온대권에 위치하고 있어서 계절에 따른 산의 자연은 매우 아름답다.
비록, 산의 높이는 설선(雪線) 아래이나 수목과 계류는 지질과 지형적 특성으로 곳곳이 가경이다. 여기에 5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곳곳에 산재해 있는 사적·고적 등의 문화재가 어울려 관광지를 이루고 있다.
전국의 제1강산이 지역에 따라 자랑되고 산은 심미의 대상에서 적극적인 탐승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의 명산인 금강산을 중국 사람들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도 하였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금강산을 비롯한 4대 명산에 대해 평하기를,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 즉 수려하되 장대하지 않고, 지리산은 장하되 수려하지 못하며, 구월산은 장하지도 수려하지도 않고, 묘향산이 장하고 또한 수려하다고 하였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12명산으로 금강산·설악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칠보산·묘향산·가야산·청량산(淸凉山)을 꼽았다.
최남선은 북한산·백두산·원산(圓山)·낭림산·두류산(頭流山)·분수령(강원도 평강의 서북)·금강산·오대산·태백산·속리산·장안산(長安山)·지리산 등 8도의 조종(祖宗)이 되는 산을 들어 12명산·12종산(宗山)이라 하였다.
이러한 명산이나 경승지들을 종합적으로 이용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1967년 3월 법률 제1909호로 <공원법>이 공포되었다. 국립공원 제1호로는 지리산이 지정되었고, 경주와 토함산·계룡산·설악산·속리산·한라산·내장산·가야산·덕유산·오대산·주왕산·북한산·치악산·월악산·소백산·월출산 등이 차례로 지정되었다.
이들 지역에는 빼어난 산악경관과 8경(八景)·9곡(九曲)으로 불리는 계곡과 유적·유물 등의 문화재가 조화되어 있으며, 여기에 폭포·영(嶺)·산성·사찰·천연기념물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도립공원으로서의 산은 금오산·남한산성·모악산·무등산·덕산의가야산·칠갑산·대둔산·마이산·가지산·조계산·두륜산·선운산·팔공산·문경새재·청량산·연화산 등이 지정되었다.
이렇듯 산은 관광자원으로서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보호 보존이 요구되는 자연 문화재로서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지인 우리나라는 산지의 종합적이고도 합리적인 개발과 이용이 필요하다. 인구의 증가나 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라 산의 이용이나 개발은 더욱 늘어갈 것이다.
산지가 가지는 자연적·문화적·경제적 자원을 관광자원의 입장에서 개발 이용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국립·도립 공원을 지정하였으며, 지나친 이용에 따른 훼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계는 인간의 지나친 남용이나 오용으로 인하여 그 일부 또는 전체가 파괴될 수 있으며, 그때는 산이 가지는 무한한 재생산력은 단절되고 주민 생활에 무익한 것으로 변모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산지의 적극적인 개발과 생태계의 변모를 최소화하는 산지의 보전이 병행되어야 한다.
산은 또 등산·스포츠·산악훈련장 등으로 개발하여 국민의 기상이나 정서함양에 이용하며 각종 자연 생태의 교육장으로도 개발되고 있다. 자연으로서의 산은 자연환경과 조화를 가지는 독특한 산지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