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3일 토요일

경국대전.經國大典.

경국대전, 經國大典.
조선시대의 기본법전. 
조선 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최고의 법전. 조선 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법전이다.
세조 때 최항, 노사신, 강희맹 등이 집필을 시작하여 성종 7년(1476년)에 완성하고, 16년(1485년)에 펴냈음.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 때 최항, 노사신, 강희맹 등이 만들기 시작해 성종 때 완성했다. 
조선 전기의 법전이며, 국가를 경영하는 큰 법전이라는 뜻이다. 1461년(세조 7년)부터 편찬하기 시작해 1485년(성종 16년)에 완성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전해져 오던 여러 법령들을 모아 집대성한 것으로 조선 통치 질서의 기본을 확립한 법전이다. 이전 · 호전 · 병전 · 형전 · 예전 · 공전의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건국 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원전()과 속전(),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해 만든 조선시대 두 번째 통일 법전. 
조선에서는 이보다 앞서 《경제육전》이 있었으나, 건국 초에 급히 만들어져 부족하거나 현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체계적이고 통일된 법전으로 만든 것이 《경국대전》이다.

조선은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1397년(태조 6) 《경제육전()》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 전에 왕조 수립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최항(김국광(한계희(노사신(강희맹(임원준()·홍응()·성임()·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먼저 〈호전()〉이 완성되고, 14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성종 때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어 1471년(성종 2) 시행하기로 한 3차, 14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1481년에는 다시 감교청()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시행하였다.
이듬해 7월에는 「형전()」을 완성해 공포, 시행했으며, 1466년에는 나머지 「이전()」·「예전()」·「병전()」·「공전()」도 완성하였다. 또 「호전」·「형전」도 함께 다시 전면적으로 검토해 1468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글고 세조는 신중을 기해 반행()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 뒤, 예종도 육전상정소를 설치해 원년 9월에 매듭지어 2년 1월 1일부터 반포하기로 결정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어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성종이 즉위하자, 곧 『경국대전』을 다시 수정해 드디어 1471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그중에도 누락된 조문이 있어 다시 개수해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했는데, 이것이 『갑오대전()』이다. 그 때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1481년 9월에 다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어,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적지 않게 개수해 1485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인데, 이것을 시행할 때에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으로 규정지었다.
그리하여 영세 불변의 조종성헌()으로서,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서 그 시대를 규율하게 되었다. 오늘날 온전히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을사대전』이며, 그 전의 것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을사대전』은 우리 나라에 전해오는 법전 중 가장 오래된 유일한 것이다.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다. 또 각 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해 규정하고, 조문도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건국 후 90여 년에 걸친 연마의 결정답게 명실상부한 훌륭한 법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면·사령() 등에 관한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제도·조세제도·녹봉·통화·부채·상업과 잡업·창고와 환곡()·조운()·어장()·염장()에 관한 규정을 비롯, 토지·가옥·노비·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제도에 해당하는 입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무과·잡과 등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및 외교·제례·상장()·묘지·관인(), 그리고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 상복 제도·봉사()·입후()·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수록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재판·공노비·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교량·도량형·식산()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법사상인 양법미의()에 대한 자신감과 실천 의지가 표명되어 있으며, 정치의 요체는 법치()에 있다고 서약, 선언한 창업주인 태조의 강력한 법치 의지가 계승, 발전된 조종성헌으로서, 법제사상 최대의 업적이다.
이 대전의 편찬, 시행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의 필연적 요청으로서의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라 할 수 있는 통치규범 체계가 확립되었다.
둘째, 여말선초의 살아 있는 현행 법령으로서 양법미의, 즉 타당성과 실효성있는 고유법()을 성문화하고 조종성헌화해 중국법의 급작스러운 무제한적 침투에 대해서 방파제가 되었다. 또 영구불변성이 부여되어 고유법의 유지, 계승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형전」 사천조()에 규정된 자녀 균분 상속법(), 「호전」 매매한조()에 규정된 토지·가옥·노비·우마의 매매에 관한 규정과 전택조()에 규정된 토지·가옥 등에 대한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관한 규정, 그리고 그들 사유권이 침해된 경우의 민사적 소송 절차에 관한 「형전」의 규정들이다. 이 규정들은 특히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었다.
셋째, 「형전」의 규정은 형벌법의 일반법으로서 계수된 『대명률()』에 대한 특별형사법이었다. 「형전」의 규정에는 조선적 특수 형법사상이 담겨 있어 『대명률』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이 대전이 시행된 뒤 『대전속록()』·『대전후속록()』·『수교집록()』 등과 같은 법령집과, 『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 등과 같은 법전이 편찬, 시행되어 이 조문이 실제로 개정되거나 폐지된 것이 적지 않았다.
그 기본이념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이 대전의 조문은 나중의 법전에서 삭제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제도사를 연구하는 데 기본 사료가 된다. 이 대전의 을사본은 편찬 당시 출판해 널리 반포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출판하였다.
이 밖에 193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판본을 고교(稿)해 활자로 인쇄, 간행한 것이 널리 퍼져 있다. 이어 1962년에는 법제처에서 『경국대전』 역주본을 내었고, 1985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역주 경국대전』을 출간해 한글 번역본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법령이 계속 마련되어 1492년의 《대전집록()》, 1555년(명종 10)의 《경국대전주해》, 1698년(숙종 24)의 《수교집록()》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1706년(숙종 32)의 《전록통고()》는 위의 법령집을 《경국대전》의 조문과 함께 묶은 것이다. 
반포 때에 이미 〈예전()〉의 의식절차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호전〉의 세입과 세출은 그 대장인 공안()과 횡간()에 의거하도록 규정되었다. 또 형벌법으로서 《대명률()》과 같은 중국법이 〈형전〉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되었다.


시기가 많이 지남에 따라 후속 법전도 마련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고, 1785년(정조 9)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이 시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1865년(고종 2)에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제()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14~61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전()〉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


짧게는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길게는 고려 말부터 약 100년 간의 법률제정사업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 법전의 반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밑받침하는 통치규범의 확립을 의미하였다.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보다 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형전〉의 자녀균분상속법,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다.


당시 사회의 한계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왕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 한 예이다. 실제 정치운영에서는 점점 세밀한 규정들이 수립되어 국왕의 권한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지만, 조선 사회의 기본 정치이념에서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관리의 자격에 대해 천민이 아닐 것 이상의 신분적 제약을 정해놓지 않아 중세 신분제의 극복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지만, 노비에 대한 규정을 〈형전〉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노비제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죄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법률의 개폐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것을 반영한 법전이 출현하였지만, 이 법전의 기본체제와 이념은 큰 변화없이 이어졌다. 《대전회통》에는 비록 폐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경국대전》의 조항이 그 사실과 함께 모두 수록되었다.


사회운영의 질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법전의 시행 내용 또한 매우 큰 폭으로 달라져 갔다. 그것은 단순한 법질서의 혼란이 아니라 사회의 변동과 발전에 대한 체제의 적응 노력이었다. 
예를 들어 최고위 관서로 의정부가 있고 그곳의 3정승이 관료의 정상을 이룬다는 기본구조는 19세기 말까지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 전기 3정승과 의정부가 비교적 강력하게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한 반면,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변사()가 국정을 총괄하는 관서가 되었고 3정승이 그곳의 대표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때의 비변사는 고위관리의 회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좌기구로서 당시 지배층의 확산에 조응하여 좀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끌어모으고, 더욱 복잡해진 국가행정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물론 후기 법전인 《속대전》부터는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매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법제처가 1962년에 번역본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5년에 번역본과 주석서를 함께 간행하였다. 2007년 7월 13일 보물 제1521호로 지정되었다.
법이란 국가가 강제로 시행하는 사회 규범이야. 법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했어. 삼국 시대에는 율령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중국 당나라의 법률을 참고하여 만든 71조의 법률과 보조 법률이 있었지. 그러나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것은 관습법을 중심으로 지방관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관습법에 의존하다 보니 법이 상황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어. 여기에서 고려()의 정책()이나 법령()은 사흘 만에 바뀐다는 의미의 ‘고려 공사()는 3일’이라는 속담이 생기기도 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새 나라 조선에서는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위해 모두가 믿을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법치주의를 내세웠고, 특히 나라와 지방, 고을의 살림 모두를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관리가 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지. 이를 위해 나라에서는 통일 법전을 편찬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런 노력이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마무리되었다.
세조 때 만들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은 조선 건국 초기의 법전들을 모두 모아 만든 법전으로, 조선을 유교적 법치 국가로 만든 기본 법전이다.
육조에서 맡은 업무를 기준으로 분류한 법전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육전이 도대체 뭐냐고? 이젠 육전이 각각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한번 살펴볼까?

이전()은 중앙 및 지방 관리들의 조직에 관한 법률이야. 요즘으로 치면 ‘행정안전부’에서 하는 일을 담고 있지. 호전()은 나라를 운영하는 돈과 관련된 법률이야. 호적, 토지 제도, 부세, 조운, 환곡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으며, 요즘의 ‘기획재정부’에서 하는 일을 담고 있어.
예전()은 과거, 의례, 외교, 친족, 제사 등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어. 요즘으로 치면 ‘교육과학기술부’와 ‘외교통상부’에서 하는 일을 담고 있지. 병전()은 무과, 군사 제도에 대한 규정으로 ‘국방부’, 형전()은 형벌, 재판, 노비에 대한 규정으로 ‘법무부’, 공전()은 도로, 교통, 도량형, 공장() 등에 대한 규정으로 ‘국토해양부’에 해당된다.
조선에는 중국의 법률을 따라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의 형벌이 있었어.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벌인 태형과 장형은 가벼운 죄를 범한 경우에 사용되었는데, 태형은 10~50대, 장형은 60~ 100대까지 집행했어.
도형은 비교적 무거운 죄를 지은 자를 관아에 붙잡아 두고 힘든 일을 시키는 것으로, 오늘날의 징역형과 비슷해. 유형은 매우 무거운 죄를 지은 자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 죽을 때까지 살게 하는 거야.

최고 형벌인 사형에는 교형과 참형이 있었어. 교형은 목을 매서 죽게 하는 방법으로 신체는 온전할 수 있었지만, 참형은 목을 베는 무거운 형벌이었어. 또한 반역자의 신체와 목을 모두 베어버리고 매장을 허용하지 않는 ‘능지처참’이라는 아주 가혹한 형벌도 있었다.
《경국대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본 규범을 담은 종합적인 법이다. 내용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 등 6개 분야로 나누어진다.
육전내용
이전
중앙 및 지방 관리들의 조직에 관한 법률
호전
나라를 운영하는 돈과 관련된 법률
예전
과거, 의례, 외교, 친족, 제사 등에 관한 법률
병전
무과, 군사 제도에 관한 법률
형전
형벌, 재판, 노비에 관한 법률
공전
도로, 교통, 도량형, 공장 등에 관한 법률
《경국대전》이 완성된 이후에 조선의 국가 정책은 ‘육전 체제’에 따라 시행되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조직인 의정부와 6조는 물론 지방의 각 고을에서도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이 법전을 따랐다. 물론 백성들도 집이나 땅을 사고팔 때, 재산을 상속할 때, 혼인할 때 등 일상생활에서 《경국대전》의 법을 따라야 했다.
《경국대전》은 조선 시대에 오랫동안 최고 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260여 년이 지난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많은 항목을 개정하거나 보충한 《속대전》이 만들어져, 《경국대전》과 함께 사용되었다. 《경국대전》은 조선 왕조가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법치주의를 따랐음을 보여 준다.
《경국대전》은 육전, 즉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으로 나뉘어 있는데, 국가 정책은 육전 체제를 따랐어. 조선 시대에 나라의 일은 보통 의정부에서 결정하고, 6조에서 판서를 중심으로 시행되는데, 그 모든 일의 기본을 《경국대전》에 따랐다. 그리고 지방을 8도로 나누고 관찰사 밑에 수령을 두어 고을을 다스리도록 했는데, 고을의 행정을 볼 때도 《경국대전》을 따랐다.
가정의 재산 상속을 비롯하여 토지나 집을 사고팔 때, 혼인을 할 때와 같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법도 《경국대전》을 따랐어. 이처럼 《경국대전》은 국가 전체의 통치 원칙에서부터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기본 규범을 담은 종합적인 법전으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법전의 역할을 했다.

보고 읽는 법전.
조선 왕조는 통치 규범을 보다 확실히 하는 성문화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미 조선 건국 직후에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편찬했고, 조준이 여러 조례를 모아 《경제육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서들의 결정판으로 드디어 《경국대전》이 편찬되었습니다. 
세종(1418~1450), 세조(1455~1468) 대를 거쳐 성종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지요. 《경국대전》은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조선 왕조 내내 기본 법전의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이 법전은 조선 왕조의 법제적 통치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 문화를 상징합니다.



"참고문헌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한국근대법사상사』(전봉덕, 박영사, 1981), 『한국가족법상의 제문제』(이희봉, 일신사, 1976),『한국법제사고』(박병호, 법문사, 1974), 「경국대전의 편찬과 대명률」(이성무, 『역사학보』 125, 1990), 「경국대전의 법사상적 성격」(박병호, 『진단학보』 48, 1979), 『李朝法典考』(麻生武龜, 1936), 경국대전주해대전통편대전회통서거정속대전수교집록경국대전 [經國大典] -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다 (한국사 개념사전), 경국대전 - 조선 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법전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경국대전 [經國大典]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보이는 법전, 읽는 법전 : 《경국대전》의 완성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경국대전 [經國大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월 22일 금요일

함무라비, Hammurapi.

함무라비, Hammurapi.

바빌론 제 1왕조의 6대째 왕(재위 B.C. 1792~1750)이다. 라르사, 에슈눈나(⇒아스마르), 마리를 멸망시키고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했다. 수도 바빌론에서 건축 활동을 하고 『함무라피 법전』을 편찬시켰다. 
메소포타미아를 두번째로 통일하고 ‘함무라비 법전’등 문물을 정비한 군주다.
함무라비의 상은 『함무라피 법전비』(루브르 미술관)의 상부에 조각되어 있는데,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부노 수사에서 출토된 남성상 두부(루브르 박물관)도 아마 이 왕의 초상일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제1 왕조의 제 6대 왕(재위 B.C. 1792 ~ B.C. 1750). 주변국을 정복하고 통치하기 시작한 바빌론 제국의 첫 번째 황제로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 중 하나인 함무라비 법을 제정한 통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아누 신과 벨 신께서 나 함무라비를,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지엄한 군주로 임명하셨다. 그리고 이 땅을 정의로 다스리게 하셨다. 사악한 자와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없애도록,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샤마시 신과 같이 높은 곳에서 민중을 내려다보며, 온 세상에 빛을 비치리라. 인류를 복되게 하리라.” 기원전 1790년경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의 서문이다.

바빌론은 셈족(Semtite) 계통의 아모리인(Amorite)이 세운 메소포타미아 유역의 도시 국가에서 시작하였으며, ‘함무라비’라는 이름은 바빌론에서 사용하던 아카드어(Akkadian)로 아모리 혈통을 이어받은 적장자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B.C. 1792년에 함무라비가 선왕 신물발리트(Sinmuballit)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았을 당시 바빌론은 주로 농업에 의존하던 여러 도시국가들과 공존하고 있었으나, 여러 다른 문명들 보다 우월했으며, 국민들이 높은 문자해독률 보유하고 있었다. 함무라비의 선왕들은 중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군소 도시국가들을 바빌론 치하로 통합하고자 했다. 

함무라비가 왕권을 잡았을 때에는 이미 보르시파(Borsippa), 키슈(Kish), 시파르(Sippar) 등의 도시국가들이 중견 국가로 성장한 바빌론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주변에는 샴시 아다드(Shamsi-Adad), 라사(Larsa), 에슈눈나(Eshnunna), 엘람(Elam) 등의 강국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함무라비 치세 초기에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샴시 아다드 Ⅰ의 사망으로 샴시 아다드 제국이 분열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바빌론에게는 국력 강화의 기회가 되었다. 함무라비는 공공 사업을 벌여 성채를 높이고 성벽을 강화했으며, 사원의 규모를 확장했다. 

자그로스(Zagros) 산맥을 중심으로 중개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엘람(Elam) 왕국이  B.C. 1766년에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침공하여 바빌론을 비롯한 중소 왕국들을 공격하면서부터 바빌론은 혼란기를 겪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소 왕국들을 정복한 엘람에 맞서 함무라비는 라사(Larsa)왕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군사력이 약한 라사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엘람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후 함무라비는 엘람과의 전쟁에서 소극적 행동을 보인 라사를 공격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유프라테스 강 중류지역의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B.C. 1763년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합했다. 
 
바빌론 제국의 첫 황제가 된 함무라비는 남부의 풍요로운 농업지대로 왕령을 확대시키고 그 수리권()을 장악하면서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고, 그 대상으로 부역(군역()·납세를 요구하는 이르크 제도를 갖추어 왕국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함무라비의 정치이념은 태양신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신들을 섬기며, 신의 뜻에 따라 국가를 바로 세우고 풍요를 베풀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왕령지를 중심으로 관개망()의 유지와 확대에 힘씀으로써 농업생산력·수송력 상승을 꾀했고 수공업과 원격지무역을 육성, 고리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규제를 가하면서 여러 가지 보호를 통하여 부역 부담 능력 유지를 도모했다는 사실이 여러 행정기록과 법령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대략 지금의 이라크 국토에 해당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땅에는 메소포타미아(‘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이다) 문명이 꽃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땅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높이 성벽을 쌓은 도시들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이나 삼국 성립 전후의 한국처럼, 메소포타미아 남부에는 우르를 비롯하여 키시, 니푸르, 이신, 우르크, 라르사, 라가시, 에리두 등이 병립했고, 북부에는 아시리아와 마리라는 두 나라가 어깨를 겨루었다.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2330년경 한 차례 통일되었는데, 아카드의 사르곤 왕의 손으로 였다. 

사르곤에 이어 통일제국을 세울 사람은 샤마시아다드밖에 없다는 말이 나돌았으나, 1762년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못 이룰 꿈이 되고 말았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꾸준히 힘을 비축해 온 함무라비가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무력과 가혹한 통치술로 한때 전 메소포타미아를 무릎 꿇렸지만, 힘으로만 오래 지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가 죽기 직전에 제국은 반란으로 들끓고 있었으며, 그 후 채 2대를 지나지 않아 메소포타미아는 분열시대로 되돌아갔다.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중간쯤에 있던 바빌론의 왕자로 태어났다. 구체적인 생애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1792년경 부왕 신무발리트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 같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군주들은 조금만 힘이 있으면 이웃나라를 침략했고,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함무라비도 재위 7년경 우르크와 이신을 정복하며 일찌감치 전쟁터에 뛰어들었으나, 그 뒤로는 정복한 도시들의 체제를 정비하고 도시들을 하나로 잇는 운하와 도로를 닦는 등, 오랫동안 내치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사이에 두각을 나타낸 군주는 아시리아의 샤마시아다드였다. 그는 숙적 마리를 꺾기 위해 남쪽의 함무라비와 손을 잡고 전력을 집중, 마침내 마리를 정복하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손에 넣었다. 
28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이러한 함무라비의 정치 이념이 반영된 것으로, 범죄의 처벌에 대해 엄격한 것이 특징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12개의 석판에 당시 바빌론의 시민들이 사용하던 아카드어(Akkadian)로 쓰여 있으며, 바빌론 제국의 식자율이 매우 높았으므로 모든 시민들이 법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철학에 따라 제정된 이 법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잔인하게 보일 수 있으나, 이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해야 했던 함무라비의 법치주의 이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함무라비 법이 새겨진 석판은 1901년에 발굴되었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법치를 통해 제국을 통치하려던 함무라비의 정치적 이상은 끝내 달성되지 못했으며, 그가 죽은 뒤 왕국 내에서는 점차 사회적 모순이 축적되었고 왕국은 쇠퇴해 갔다.

가장 힘든 상대는 남부의 대국, 라르사였다. 라르사는 남쪽에서 북으로 치고 올라갔고, 바빌론은 중부를 장악하고 남쪽까지 세력을 뻗치려 했다. 그런데 동쪽에서 이란계의 엘람이 공격해 오면서 두 나라는 손을 잡고 엘람에 맞섰다. 그리고 마침내 엘람을 무찌른 뒤, 함무라비는 여세를 몰아 라르사로 돌진한다. 


라르사 왕 림신을 사로잡음으로써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북부로 눈을 돌린 그는 샤마시아다드 사후 다시 독립한 마리를 먼저 무너뜨렸고, 다음에는 아시리아의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전 1751년, 수바르투라는 작은 나라를 정복하는 것으로 통일대업은 끝났다. 메소포타미아는 함무라비 왕 아래 다시금 하나의 나라가 된 것이다.
함무라비는 사르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다짐했다. 그는 통일제국을 유지하려면 힘도 중요하지만 제도의 정비와 사상적 통일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사르곤 시대에는 여러 도시들의 자치권이 폭넓게 인정되던 것이, 재정권과 사법권을 빼앗아 중앙에 귀속시켰다. 공평한 세금과 병역 제도 마련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한편으로 언어의 통일도 꾀하여 아카드어를 국어로 삼고, 종교적으로도 바빌론의 지방신이던 마르두크의 위상을 높여 수메르의 엔릴, 아시리아의 아슈르와 동일화, ‘벨-마르두크’라는 이름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체의 최고신으로서 숭배를 받도록 했다.

넓은 제국에서 발생하는 법률문제는 무수한데, 그것을 모두 바빌론의 왕이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각지에 지방법정을 세워 왕을 대리하여 판결을 할 사법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제국 어디서나 왕이 직접 재판하는 것과 같게끔 해줄 법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래서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진다.
모두 282조로 이루어진 함무라비 법전이 씌어진 비문은 1901년에 프랑스의 고고학자 드모르강이 발굴했는데, 그 후 오랫동안 ‘세계 최초의 법전’이라는 명예를 누렸다. 

1947년에 그보다 150년 이상 앞선 리피트-이시타르 법전이 발견되고, 그 법전의 서문에는 다시 70년 전쯤의 빌랄라마 법전을 참조했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최초의 법전이라는 명예는 현존하지는 않는 빌랄라마 법전에게 돌아갔는데, 다시 1952년에 기원전 2050년 경의 우르남무 법전이 발견됨으로써 최초 법전의 순위는 또 바뀌었다.
함무라비 법전보다 오래된 법전은 앞으로도 또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법전이 중요한 까닭은 이것이 이전 법전들과는 다른 메소포타미아 통일제국의 법전이며, 이전 법전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정신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하면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 원칙’을 떠올린다. 그런데 조문을 잘 들여다보면 반드시 가해자에게 같은 손해가 가해지는 건 아니다. 자유민이 다른 자유민의 눈을 멀게 했으면 그의 눈을 뽑는 처벌을 내리지만, 한 단계 낮은 평민이 피해자라면 벌금만 내면 된다. 노예를 그렇게 했다면 벌금 액수가 줄어든다(그리고 벌금을 받는 상대는 그 노예의 주인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의 사람을 해쳤다면 반대로 처벌이 갈수록 엄중해진다. 

사람의 신분에 따라 처벌이 불공평하다. 아울러 우리가 보기에는 지나칠 만큼 처벌이 엄중하다. 총 246조(36개 조는 훼손되어 읽을 수가 없다) 중에서 32개 조가 사형을 규정하며, 그 외에도 손을 자르거나 귀를 도려내는 등 잔혹한 벌칙이 많다. 이렇게 보면 “법전의 조상 어쩌고 하더니, 악법의 조상이로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이 법전은 ‘정의’라고 할 만했다. 그때까지는 신분보다 권력이나 재산에 따라 법이 들쑥날쑥 해지는 일이 보통이었다. 가령 권력자의 노예가 자유민을 때렸어도 그 자유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은 그가 누구의 노예이든 자유민을 때렸으면 중벌을 받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반대로 권력자가 피해를 입었을 때 가해자에게 무제한적인 보복을 가하는 일도 막았다.

함무라비의 통일 왕조도 그의 죽음 이후로는 오래 버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통치체제의 잘못보다는 이민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이란고원에서 넘어온 카사이트족은 동북부를 점령하고 독립 왕국을 세웠으며, 남부에서도 수메르가 독립했다. 
1600년경에는 히타이트족의 침입에 바빌론이 함락되고, 제국이 멸망해 버린다. 이후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민족과 나라가 뒤섞인 항쟁을 거쳐, 1350년경부터 힘을 기르기 시작한 아시리아에 의해 통일된다. 

함무라비의 통일제국은 이처럼 사라졌으나, 그의 유산은 오래 남았다. 이후의 여러 왕조는 그가 이룩한 체제를 모방했으며, 함무라비 법전을 그대로 적용해 쓰기도 했다. 강하지만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인자한 왕이라는 이미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고, 바빌론도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로 남았으니,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음은 함무라비의 통일이 정치적으로는 끊어졌어도 문화적으로는 지속되었다는 증거이리라.

신분제 자체가 현대인의 눈으로는 불공평한 체제이지만, 당시에는 실제 권력이나 부와 관계없이 신분에 따른 원칙과 상식이 통할 수 있다면 충분히 공평하고, 정의로운 일이었다. 
강력한 처벌이 많은 까닭은 범인을 교도소에 가두고 교화한다는 개념이 없던 당시로서는 실질적인 처벌 방법이 신체형과 벌금형에 그쳤고, 엄격한 처벌을 해야 범죄가 예방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법전들에 비하면 함무라비 법전은 많이 너그러운 편이었다. 고아나 과부,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규정을 많이 마련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함무라비는 이 법전이 태양신이자 정의의 신인 샤마시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었다. 여러 나라의 각양각색의 법률들을 꼼꼼히 살피고는 이를 잘 정리하고 배합하여 법률상의 통일을 이룩한 자체가 뜻있는 일이었으리라.

법전이 새겨진 비석
282개의 판례법이 새겨져 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문헌. 
함무라비 [Hammurabi] - 메소포타미아를 두번째로 통일하고 ‘함무라비 법전’등 문물을 정비한 군주 (인물세계사, 함규진)
함무라비 [Hammurabi] (두산백과) 
함무라비 [Hammurapi]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