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0일 금요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 목판.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1237~1248) 때 다시 새긴 것이다. 고려 후기, 1237~1248년 사이, 8,1258매,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 국보 제32호. 해인사 소장. (ⓒ문화재청) 
유형/ 시대/ 성격/ 소장처/ 제작시기·일시/ 수량/ 재질/ 크기/ (높이, 길이, 두께, 너비)소유자/ 관리자/ 문화재 지정번호/문화재 지정일/
유물
고려
세계기록유산,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치인리), 해인사
고려시대, 고종24~35년, 1237~1248년
81,258매
산벗나무, 돌배나무, 단풍나무
크기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 무게 3kg
해인사
해인사
국보 제32호
1962년 12월 20일
고려 고종(1237~1248)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판각(板刻)한 대장경판.
국보 제32호.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이 대장경 판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버리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 등이 중심이 되어 대장경을 다시 목판에 새긴 것이다.
이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이보다 앞서서 고려 현종 때 새긴 판을 ‘초조대장경판’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버려 다시 새겼기 때문에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해인사에 있고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판이라 하여 ‘해인사고려대장경판(海印寺高麗大藏經板)’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새긴 것이기 때문에 ‘고려대장도감판(高麗大藏都監板)’이라고도 한다. 이 때 최우의 참여가 큰 힘이 되었고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내용교정을 맡아 북송 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나라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를 바로 잡아 판각하였다.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위 그림)
대장경판을 새길 때의 배경은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 판각을 부처님에게 고하고 있다.
1237년(고종 24)에 쓴 이 기고문에 대장경 판각을 위하여 이미 담당관사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1237년에는 판각을 시작하여 첫해에 판각된 것이 2종 115권이었고, 1248년(고종 35)에 대장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겼음이 간행기록 조사에서 밝혀졌다.
이 대장경판은 1237~1248년까지 12년 동안 남해에서 1,496종의 경전을 6,561권 7만 8,500여 장의 목판에 새긴 것으로,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천함(天函)에서 동함(洞函)까지 639개 함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 경(經)인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600권)은 천함에서 시작하여 한 개 함에 10권씩 묶어 60번째인 내함(柰函)까지 60개 함에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한 개의 경도 분량이 많은 것은 여러 개 함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으나, 단권(單卷)의 경인 경우 여러 개의 경이 함께 한 개의 함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함별 편성을 보면 첫 번째 대반야경의 경우처럼 10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79번째의 경은 12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으며, 1255번째 『신집장경음의수함록』은 6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상함(傷函: 함의 순서[函順]로 160번)의 경우 한 개 함에 경전 29개를 수록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대장경판의 저본(底本)은 천함(天函: 경전 순서[經順]로 1번)에서 영함(英函: 경전 순서[經順]로 1087번)은 『개원석교목록(開元釋敎目錄)』에 수록된 경인데, 거란본에서 편입시킨 것 등 11개의 경전이 더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함(社函: 經順 1088) 이후는 부분적으로 「속개원석교록」, 「속정원석교록」 등의 목록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지만, 어떤 특정의 목록에 따라 편성한 것이 아니라, 간행 당시 수기 대사 등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내용을 추가하여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의 재질은 산벗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돌배나무, 단풍나무 등 조각에 용이한 나무들이 사용되었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이고, 무게는 3㎏ 정도이다. 각 판의 상하(上下)에는 대부분 계선이 있는데 단변(單邊)으로 되어 있고, 경판의 가운데에는 판심이 없는 무판심(無版心)으로 두루마리 형식의 권자본(卷子本)의 판식(版式)을 지녔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 목판.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1237~1248) 때 다시 새긴 것이다. 고려 후기, 1237~1248년 사이, 8,1258매,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 국보 제32호. 해인사 소장. (ⓒ문화재청)

경판은 양면 모두 경판의 보존을 위해 옻칠이 되어 있고, 경판의 양쪽에 마구리를 하고 있는데 경판과 잇는 네 귀퉁이에 금속판을 부착하였다. 양쪽 면에는 모두 경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 면에 23행 14자씩 새겨져 있지만, 경순(經順) 1255, 1403, 1496은 판심이 있고, 경순 1256은 행자수가 18행(소자는 36행)이며,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1257은 22행 13∼15자(소자는 44행 17자)이고, 1258은 21행 13∼14자(소자는 42행 16자)이며, 1259는 22행 13자로 전부 소자(小字)이고, 1260은 25행 16자이다.
경순 1255의 녹함(祿函)에서 1261의 무함(茂函)까지는 일반 경전들과는 판식을 달리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각 권말에는 간행 기록(刊記)이 새겨져 있는데, 예외 없이 ‘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 되어 있다.
대장경의 판각 연도를 분석해보면, 연도별 판각 양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해마다 일정량의 판각계획에 의하여 판각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장판각의 순서에 있어서도 뒤로 오면서 상당히 경순이 바뀌어 판각되었다.
또한 같은 경에 있어서도 권순 별로 판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도 판하본(板下本) 작성에서부터 초벌새김·재벌새김·마무리새김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러한 작업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각수(刻手)의 능력 및 판각작업의 진행속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2권 이상으로 구성된 경은 경별(經別)로 차례로 판각된 것이 아니라, 권별로 판각되었는데, 권별의 간기에 나타난 그 해에 판각된 것이다.
대장경 판각은 실제로 12년 동안 모두 마쳤지만, 『고려사』에 나오는 16년이라는 기간은 판각기간이 아니라,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한 사전 준비 과정을 합친 기간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해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전담하도록 하였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경판을 새기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총괄한 것은 대장도감이고, 산지에서 나무를 베어 진을 빼고 판각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다듬고 판하본 작성 등과 실제로 현장에서 판각한 것은 분사대장도감에서 했던 것이다.
그리고 1248년(고종 35)은 실제의 정장 판각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대장목록』 1종만을 판각한 해이고, 대장경판을 판각하고 난 뒤의 뒷마무리 작업은 권별 판각을 완료한 뒤 바로 뒤따라 처리하여 판가(板架)에 순서대로 진열하였을 것이므로, 간기에 나타난 1248년을 대장경판 판각작업의 완료 연도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판각완료 연도인 1248년을 하한연도로 볼 수 있으며, 일의 시작은 적어도 1233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대장경판은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만이 아니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경은 모두 72종 504권에 이르고 있다. 판각연도는 1243년(계묘)에서 1247년(정미)까지 5년간 판각한 것이다.
이 분사대장도감이 무슨 목적으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직접 판각을 시작한 연도는 1243년(고종 30)이며, 또한 504권의 분사판(分司板) 가운데 473권의 경은 1243∼1244년의 2년 동안 판각되어, 결국 분사도감에서의 판각이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의 판각량으로 분사대장도감이 판각기능 면에서만 설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통나무를 잘라 각수가 판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연판(鍊板) 작업 및 판하본(板下本) 작업까지의 업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사대장도감에서 판하본 작업과 연판 작업 등 판각을 위한 준비기능을 가지고 대장도감의 일익을 담당하였다면, 적어도 1242년(고종 29)까지 이들 준비작업을 완료하고, 1243년부터 판각기능으로 돌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간기가 보이는 경들도 모두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것만이 아니라, 권별로 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것과 섞여 있는 점에서 보면,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였던 것이다.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72종의 경판 가운데 전체가 분사판인 것은 43종이고, 나머지 간기가 없는 경우 8종을 제외한 21종은 대장도감과 섞여 판각된 것이었다. 여기서 보면 대장도감이나 분사대장도감은 멀리 떨어진 장소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전을 그것도 서로 권수를 섞어가면서 판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같은 경전의 경판에 새겨진 각수를 통해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분사대장도감이나 대장도감은 같은 장소임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그 장소는 남해군으로 파악되었다.
그동안 대장도감은 강화 선원사에 설치되었고, 선원사에서 대장경판을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선원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願刹)로 1245년(고종 32)에 완공되었는데, 이때 대장경판은 이미 90%이상 판각을 완료하였으므로 대장경판각과 관계가 없었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태조 7년 5월 병진의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이라는 기사)을 잘못 이해하여 생긴 오류였다. 『고려사』[지(志)권 제32, 식화(食貨)1, 후원년 3월조(後元年 3月條)]에도 ‘백미 삼백석을 대장도감과 선원사에 나누어 주라’는 기록이 있어 대장도감이 선원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을 알 수 있고, 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한 것이 분명하다.
이 대장경 판각은 이를 인출(印出)하여 널리 유포시키고자 함이 목적이었으므로 판각을 완료하고 난 뒤 인출(印出) 사업이 바로 잇달아 있었다. 『고려사』에는 고종이 1251년 9월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대장경판을 새기고 난 뒤 처음으로 전질(全帙)을 인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고려말의 명신인 이색(李穡)이 아버지의 유지(遺旨)를 받아 1381년에 인출하여 신륵사에 새로 세운 장경각에 봉안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3년(태조 2) 왕명으로 인경(印經)하여 연복사(演福寺) 5층탑에 봉안하였고, 1458년(세조 4) 왕이 신미(信眉) 등에게 명하여 50부를 인출하게 하여 전국의 큰 사찰에 봉안하였고, 1500년(연산군 6)에도 인출되었다.
1865년(고종 2) 2부를 인출하여 월정사와 설악산 신흥사에 각각 한 부씩 봉안하였고, 1898년에도 인출하였으며, 1899년 상궁 최씨(崔氏)의 발원으로 4부를 인출하여 해인사·통도사·송광사 등 삼보사찰에 한 부씩 봉안하고, 나머지 한 부는 13도의 각 사찰에 골고루 나누어 봉안하였다. 이러한 인출은 소요되는 인력과 물적 자원이 적지 않으므로 국가의 힘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밖에도 해인사대장경은 승려들의 불교연구를 위하여, 또 경전신앙[經信仰]의 차원에서, 그리고 일본에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도 상당수가 인출되었다.
조선 초기의 일본과의 교류는 고려대장경 교류라 할 정도로 일본은 끊임없이 요구하여 가져갔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왜구의 창궐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왜구에 잡혀갔던 포로와 대장경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인출한 대장경의 고판본(古版本)은 거의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915년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경도(京都) 센유지(泉涌寺)에 봉안하고자 인출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그 뒤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도서관에 기증되었으나, 1923년 동경대지진 때 불에 타버렸다. 이때 인출된 또 한 부는 지금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1935년에는 만주국 황제를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인출하여 선물로 보낸 일이 있는데, 만주국 붕괴와 더불어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동국대학교 전신이던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 비치하고자 한 부를 인출하였는데,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뒤 동국대학교에서는 해인사 대장경판의 보존과 보급을 위하여 1953년에 시작하여 1976년까지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였다. 모두 48권(목록 1권 포함)으로,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세계 각 국의 유명도서관에 보냈다.
평가,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인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과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는 데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發願)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을 두어 만든 것이다.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판가는 천지현황(天地玄黃) 등의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로 함(函)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배치하고, 권차(卷次)와 정수(丁數)의 순으로 가장(架藏)하였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로 양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均齊)를 지니게 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으로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 소나무, 후박나무 등의 목재를 썼고, 무게는 3∼4kg 가량으로 현재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천지(天地)의 계선만 있고, 각 행의 계선은 없이 한쪽 길이 1.8cm의 글자가 23행, 각 행에 14자씩 새겨 있는데, 그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강화 서문(江華西門) 밖 대장경판고에 두었고, 그 후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UNESCO 지정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기록유산 명
기록연도
1
1997.10
2
1997.10
3
2001.09
4
2001.09
5
2007.06
6
2007.06
7
2009.07
8
2011.05
9
2011.05
10
2013.06
11
2013.06
12
2015.10
13
2015.10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한국서지학 연구』(삼성출판사, 1991)
  • [고려대장경해제』(동국대학교, 1978)
  • [한국고인쇄기술사』(탐구당, 1973)
  • [고려대장경판의 연구』(『백성욱박사송수기념불교학논문집』, 1959)
  • [대장도감과 고려대장경판」(『한국사』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 [대장도감의 판각성격과 선원사 문제」(『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 1992)
  • [해인사대장경판에 대한 재고찰」(『한국학보』33, 일지사, 198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네이버 지식백과] 해인사 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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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9일 목요일

해인사, 2

해인사, 2

해인사 장경판전, (고려각판),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있는 조선전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건물. 경판고. 국보. 해인사는 법보의 사찰이라고 불린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海印寺) 장경판전(藏經板殿)은 13세기에 제작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목판 보관용 건축물이다. 주불전 뒤 언덕 위에 세워진 단층 목조건물로 15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부터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지어졌고 창건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장경 자체도 인류의 중요한 기록유산이지만 판전 또한 매우 아름답고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장경판전은 두 개의 긴 중심 건물 사이에 작은 두 개의 건물이 하나의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건물 자체는 장식적 의장이 적어 간결, 소박하며 조선 초기의 목구조 형식을 보여 준다.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제52호.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고려대장경의 판전으로서 유명할 뿐 아니라 같은 양식과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어 건물 자체도 특수하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다. 해인사 경내에는 많은 법당이 있으나 대부분 근세에 건립된 것이고 이 장경판고만이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건물에 사용되었던 와당(瓦當) 또는 평와(平瓦)에 나타나 있는 ‘弘治元年(홍치원년)’이라는 각명(刻名)으로 건립연대를 1488년(성종 19)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은 큼직한 부재를 간단한 방식으로 가구하였고 세부 역시 간결하여 판고에 요구되는 기능을 충족시킬 목적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적인 의장을 가하지 않았다. 즉 각종 형태의 평초석(平礎石) 위에 배흘림이 큰 원주(圓柱)를 세워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올리고, 그 위에 대들보 끝을 얹어 그것이 직접 주심도리를 받치며 그 밑에 간단한 초공(草工: 도리가 좌우로 구르지 않게 고정하는 부재)이 있다.
마룻보 끝은 대들보 위에 놓인 동자주(童子柱: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 위에 놓여 있고, 마룻보 중앙에도 역시 같은 양식의 동자주가 있어 마룻도리를 받친다. 이 동자주들은 모두 하부에는 간단한 초공을 거꾸로 한 것 같은 받침을 가지며, 신부(身部)는 짧은 방주(方柱)로 두부에는 포작(包作)을 가졌다. 이 포작의 첨차(檐遮)는 보 밑을 받치는 쪽은 초공모양으로 되었고, 도리 밑 장여[長舌]를 받치고 있는 쪽은 다포집 양식의 첨차와 소로[小累] 같은 모양으로 되었다.
국가/ 위치/ 좌표/ 등재연도/ 등재기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
N35 47 60, E128 5 60
1995년
(1), (2)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판전에는 현재 8만여 개의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건물 원형과 기능이 그대로 유지, 보존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몇 차례에 걸쳐 건물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나 모두 유지관리 차원의 부분적 수리였다. 건물의 전반적인 배치에서 건축적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변형이나 파손 없이 창건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해인사 전체가 유산의 경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장경판전은 해인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해인사는 부처의 가르침인 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어 삼보사찰(三寶寺刹) 가운데 하나인 법보사찰(法寶寺刹)로 불린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목판은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기 위해 부처에게 기원하는 뜻으로 새겨진 것이다. 세계의 불교 연구가들은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글자들의 뛰어난 정확성과 우수한 문화적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중국의 불교 연구가들은 중국 불경을 연구하는 데 팔만대장경을 참고하기도 했다. 섬세하게 새겨진 한자들 역시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더해 주는데, 글자를 새긴 방식이 일관된다는 점에서 한 사람이 작업한 결과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뛰어난 역사성과 함께 사상, 종교, 역사적 사건, 개인적 경험들이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문화유산이 된다. 한국의 역사적인 불교 사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우수한 세 곳을 삼보사찰이라 하는데, 한국 최대 규모의 사찰인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보고(寶庫)라는 점 때문에 법보사찰로 알려져 있다.
‘법보’는 불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부처의 가르침들을 뜻하는 용어이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이 보관된 해인사는 한국의 불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불교 신자와 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순례지다. 해인사에는 현재 500여 명의 승려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팔만대장경을 보전하면서 수행 생활을 하고 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목판을 보관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간판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간판전, 합천 해인사에서 간행한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경판고 건물. 조선 전기 1488년(추정),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 2동, 맞배 지붕, 1488년경, 국보 제52호.
해인사 장경판전은 중요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 예술, 과학, 산업 등의 발전을 보여주는 특색 있는 문화유산이다. 장경판전은 조선 초기의 전통 목조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미적인 면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배치, 규모, 목판 보존을 위한 기능성 면에서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경판전은 자연 환기가 되고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게끔 각별하게 설계되어 기후 조건에 잘 적응한다. 귀중한 목판들은 500여 년 동안이나 설치류, 벌레 등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역사,
해인사는 한국의 아름다운 산의 중 하나인 가야산(1,430m)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인 802년에 지어진 후 수차례 복구와 확장을 겪었다. 그러나 그 거친 산세 덕분에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겪어 왔던 숱한 전쟁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장경판고(藏經板庫)는 팔만대장경이 새겨진 8만 개의 목판들을 보관하는 네 군데의 보관소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왕조의 성종이 통치하던 1481년에 왕비가 복구를 명했고, 1488년에 복구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보관소들 중의 하나인 수다라장(修多羅藏)은 1622년에 복구되었고, 또 다른 주 보관소인 법보전은 1624년(1964년 복구 작업 중에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알려짐)에 복구되었다. 보관소들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남아 원래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간판전, 합천 해인사에서 간행한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경판고 건물. 조선 전기 1488년(추정),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 2동, 맞배 지붕, 1488년경, 국보 제52호.
해인사 장경판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의 집성인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이 대장경은 고려 현종 재위(1010~1031) 당시에 새겨진 최초의 팔만대장경(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목판을 교체하기 위해 새겨졌으며, 몽골과 거란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첫 목판들은 몽골이 침략한 1232년에 만들어졌다. 기나긴 항전이 시작된 그해에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옮아가, 1237년에 2종 113권으로 시작된 작업은 12년 후에 완료되어 목차만 3권에 달하는 1,496종 6,568권의 대장경이 탄생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한자로 새겨진 현존하는 대장경들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대장경 제작을 담당했던 수기대사(守其大師)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 당시에 볼 수 있는 모든 불교 경전들을 철저히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교정하고 누락된 한자들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정 작업은 30권에 달하는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북송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대장경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에 실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1251년에는 제작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에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침 때문에 1398년에 현재의 보관소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해인사 장경판전" 중요한 문화재, 보호법에 의거 각각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해인사 전역과 가야산 일대 역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보호법과 경상남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보존 ^ 관리,
해인사 장경판과 장경판전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각각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해인사 전역과 가야산 일대 역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보호법과 경상남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는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한편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은 자연공원법에 따라 국립공원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장경판전과 대장경판 보존을 위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와 유지 관리 및 주변 지역 현상 변경과 관련해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다. 경상남도는 해인사 보존을 위한 예산 지원을 담당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보존 관리 및 정비 사업은 합천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합천군은 해인사의 보존 관리에 직접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현장에서는 해인사가 대장경판의 보존 관리를 책임지며, 홈페이지를 통해 대장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산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유산의 보존은 물리적 환경에 대한 보존 관리와 함께 기록유산으로서의 장경판의 가치에 주목해 이루어지며,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로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담당한다. 해인사 장경판전과 대장경판의 보존에 있어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물과 경판의 화재 위험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장경판전 감시인을 배치해 24시간 동안 판전 등 사찰 경내를 경비하고, 낙뢰 방지를 위한 피뢰침을 설치하는 한편 화재가 일어났을 때 사찰의 자체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형 소방 펌프차를 배치하였다. 현재 판전 내부는 적정한 온도 및 습도 유지를 위해 관람객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보안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보안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경판고.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 국보 제52호.
등재,
기준 (1) :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대장경 목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이다. 효과적인 건물 배치와 창호 계획을 고려하는 동시에 경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방식을 활용함으로써 대장경판을 오랜 기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자연통풍과 적절한 온도 및 습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었다. 건물 안에 있는 판가 역시 실내온도와 습도가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과학적 방법은 600년이 넘도록 변형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의 보존 상태에서 그 효과가 입증된다.

기준 (2) : 고려 시대의 국가사업으로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그 내용의 완전성과 정확성, 판각 기술의 예술성과 기술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전 세계 불교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는다.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과 연관해 이해해야 하며 건축적, 과학적 측면에서 목판의 장기적 보존을 위해 15세기에 고안된 탁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이곳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서쪽에도 작은 규모의 동·서 판전이 있다. 건물은 큼직한 부재를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조선 세조 4년(1458) 확장·재건한 후 성종 19년(1488) 다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당하지 않아 옛모습을 남기고 있는데,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을 중수하고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1964년 해체수리시 상량문과 광해군 어의가 발견되어 보존하고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전 전경,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전 전경: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경판고.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장경판전은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경판고 건물이다. 중정을 사이로 둔 장방형의 두 건물은 장경판전이며, 사이에 보이는 전면 2칸의 작은 건물은 해인사에서 간행한 서적의 목판을 보관한 사간판전이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성종 12년(1481)에 보수를 시작하여 7년 뒤인 1488년에 마쳤다고 하는데 지금의 대장경판전의 모습은 그때 형태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 국보 제52호.
고려대장경의 판전으로서 같은 양식과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어 특수하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라고 한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조선 전기 1488년(추정), 장경판전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의 건물 2동(사간판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 1488년경, 국보 제52호).]
종목/ 소재지/
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큰스님의 문집 및 불교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목판이다. 이 고려각판은 현재 해인사 동·서 사간판고에 봉안되어 있는 경판 가운데 모두 54종 2,835매에 이르고 있는데, 이중 28종 2,725매가 국보 제206호로, 26종 110매가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국보 제206호의 고려각판은 고려 숙종 3년(1098)의 간기가 있는 화엄경을 비롯하여 충정왕 원년(1349)에 간행된 화엄경약신중까지 고려시대의 목판들이다. 이 가운데 화엄경과 시왕경의 변상도 등 한국 전통 판화 자료와 원효, 의상, 대각국사의 문집 등 한국 고승들의 저술은 한국 불교 역사 및 사상의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 전반에 걸쳐 귀중한 자료로 부각되어 있는 목판으로 해인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인 것이다.
평가,
이 해인사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이라는 고려인의 호국염원이 담긴 신앙심의 결정체를 보관하고 있어, 풍수지리를 활용해 습도와 풍향 등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과학적 건축물로서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해인사 고려각판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네이버 지식백과]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陜川海印寺藏經板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게티이미지 코리아
[해인사 장경판전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문화유산채널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국보 사원건축(예경산업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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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8일 수요일

해인사,[海印寺], 1

해인사,[寺], 1

석조여래입상,[ 石造如來立像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여래입상.
유형/ 시대/ 성격/ 건립시기·연도/ 소재지/ 소유자/ 관리자/ 문화재/ 지정번호/문화재/ 지정일/
유적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불상
9세기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85 (치인리), 해인사
해인사
해인사
보물 제264호
1963년 01월 21일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伽倻山:1,430m) 남서쪽에 있는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9)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세웠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해인사에 있는 여래입상의 높이는 2.1m, 재료는 화강석이다. 이 불상은 목이 절단되고 어깨와 두 팔이 모두 깨졌으며, 발도 없어졌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도 결실되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肉髻)가 매우 낮고 갸름한 얼굴은 머리와 함께 긴 타원형이다. 눈, 코, 입은 거의 마멸되었는데 코가 짧고 입은 작은 편이다. 왜소한 불신(佛身)에 비해 머리가 크고 어깨는 좁은 편이며 두 팔은 몸에 밀착하여 붙였고 몸은 많이 깨어졌는데 굴곡이 드러나지 않아 석주(石柱) 같은 느낌이 든다. 오른손은 팔꿈치를 꺾어 가슴으로 올린 것 같고 왼손은 그냥 내린 듯하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옷무늬는 특이한데 상체의 양쪽에서 비스듬하게 난 선이 중심에서 만나 날카로운 'V'자 모양을 이루는 옷주름은 허리부분에서 'U'자 모양으로 바뀌어 양쪽 다리에 물결무늬를 형성하였다.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 본 저작물은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저작물로, 해당 저작물은 문화재청 누리집(홈페이지)(http://www.heritage.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하지만, 평판적이고 형식화한 조각 수법 등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보물 제264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다. 불상은 2.1m의 크기이며, 광배(光背 : 붓다의 몸에서 나온 빛의 표현)와 대좌가 결실되었고 무릎 아랫부분이 잘려 나간 상태이다. 목도 부러졌으며, 전체적으로 박락이 심한 편으로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불상 조성에 관한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으로, 원래는 상당히 입체감이 있었던 불상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나 불상이 갖추어야 할 종교성은 충분히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불상은 낮고 편평한 육계(肉髻 : 정수리 위에 솟아 나온 부분)와 후덕하게 보이는 양 볼과 턱, 어깨까지 닿아 있는 귀 등에서 원만한 상호(相好 : 얼굴)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머리의 앞면보다 옆면의 폭이 상대적으로 길어진 조형이다.
머리에 비해 좁아 보이는 어깨, 장방형의 돌을 간략하게 다듬은 듯한 불신(佛身 : 불상의 몸)의 모습, V자 형태의 딱딱한 법의(法衣 : 불상의 옷) 주름 등에서 불상이 형식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인(手印 : 손 자세)은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으며, 왼손을 옆으로 내려 뜨렸다. 박락이 심하여 법의의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통견(通肩 :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서 V자 문양이 배꼽까지 내려오다가 W자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통일신라시대 718년에 조성된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이 조성된 후,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유행했던 것이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은 불두(佛頭 : 불상의 머리)의 모습과 허리를 강조하는 등 통일신라시대 8세기의 불상 조형을 계승하고 있지만, 머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어깨, 선각(線刻)화 되어 가는 법의 주름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9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간취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상호의 원만한 표정이나 법의의 주름 형식 등을 계승하고 있으나, 머리에 비해 좁아진 어깨, 경직화되고 간략화된 법의 주름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의 양식을 계승한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수도 경주(慶州)에서 유행했던 양식이 9세기에 지방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광배와 대좌를 잃은 이 불상은 목이 절단되는 등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하지만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계통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육계가 낮은 소발의 머리에 갸름한 얼굴로 코가 짧고 입이 작다. 머리에 비해 왜소한 불신은 각진 좁은 어깨, 몸에 밀착된 두 팔, 허리 등의 몸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은 네모진 신체는 마치 석주와도 같다.
여기에 새겨진 넓은 띠주름식의 법의는 V자로 흐르다가 허리 부근에 U자형으로 바뀌어 두 다리에 물결무늬를 형성한 점 등은 당시 유행하던 통일신라 말 석불상들에 나타나던 특징을 따른 예라 하겠다. 이처럼 이 불상은 평판적이며 경직된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 신라 말 내지 고려 초의 석불상인 것이다.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이 석불입상은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목이 절단되고 어깨와 두 팔이 모두 깨졌으며 발도 없어졌다.

민머리에는 작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많이 닳고 손상되었다. 머리에 비하여 왜소해진 몸은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마치 돌기둥 같은 느낌이 든다. 좁아지고 각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양쪽에서 비스듬히 흐른 선이 중심에서 만나 날카로운 V자형을 이루다가, 허리 부근에서 U자형으로 바뀌어 두 다리 사이로 흐르고 있다. 오른손은 팔꿈치를 꺾어 가슴 앞으로 들었고, 왼손은 내렸는데 두 팔은 몸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이다.
거대한 바위를 다듬어 불상을 고부조하고 발 아래 대좌를 마련한 이 불상은 머리 뒤에 원형두광을 얕게 새기고, 나머지 부분을 신광으로 처리한 석주형의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얼굴과 두 손을 정교하게 조각한 반면 불신은 마치 석주에 새긴 듯 옷주름 등을 간략하게 처리했다. 육계가 높직한 소발의 머리, 꼬리가 올라간 눈, 융기된 인중이 뚜렷한 비만한 얼굴, 건장하나 평편적인 가슴에 보이는 승각기, 당당한 왼쪽 어깨에 나타난 고리장식 등은 9세기 초로 추정되는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국보 제28호)과 비교되는 당대의 걸작품이라 하겠다.
이 불상은 신체 비례의 불균형, 평면적이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해인사 석조여래입상 [海印寺石造如來立像] (두산백과)
[한국의 사찰문화재­경상남도Ⅰ』(문화재청․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 2009)
[국보』(증보 상)(박성래, 예경산업사, 1990)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陜川海印寺石造如來立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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