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는 일정한 규격의 탁구대에서 작고 가벼운 공을 라켓으로 주고받으며 경쟁하는 경기로 좁은 장소에서 적은 인원이라도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라켓 스포츠이다.
운동 자체가 별로 과격하지 않아서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종목이다. 따라서 각급 학교의 정규 체육시간, 특별활동 시간에도 이용할 수 있으며, 직장인의 건강과 체력의 유지와 증진을 위하여도 이용할 수가 있으며 특히, 레크리에이션으로도 이용할 수 있어 이용 범위가 넓다.
탁구는 일정한 규격의 탁구대에서 작고 가벼운 공을 라켓으로 주고받으며 경쟁하는 경기로 좁은 장소에서 적은 인원이라도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라켓 스포츠이다.
역사
탁구는 그 역사나 기원이 정확하지 않은데, 중세 이탈리아의 '루식 필라리스'라는 놀이에서 변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15~16세기 경 프랑스 궁전에서 행해진 '라파움(Lapaum)'이란 놀이가 변하여 탁구가 되었다고도 한다.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여자팀. 오른쪽부터 이에리사, 박미라, 정현숙, 가운데 천영석 감독,
그 명칭도 일정하지 않아서 고시마, 프림프림, 와프와프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인도 등 영국 식민지에 살던 영국인들이 테니스에서 힌트를 얻어 더위를 피하여 실내에서 놀 수 있는 놀이로 변형시켰다는 것이 통설이다.
지금의 셀룰로이드 공은 1898년 영국의 JamesGibb이 고안했는데, 이를 취급하던 운동구 상점 함레 상회에서 공을 칠 때 나는 핑퐁 소리(그 당시 사용됐던 탁구대와 가죽으로 된 배트에 볼이 닿는 소리를 가지고 모방한 것임)를 따서 핑퐁이라는 상호를 붙였다고 한다.
그 후 명칭이 테이블 테니스(TableTennis)라고 고쳐지고 전 유럽에 보급되면서, 1900년 무렵에는 전 유럽에 탁구가 널리 보급되었다. 1902년 처음으로 영국에 탁구협회가 생기고, 1926년에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국제 탁구연맹이 발족하여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1927년 1월에 영국 런던에서 제1회 유럽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다.
파커형제의 탁구게임, 1903년,
한국의 역사
우리나라에 탁구가 도입된 것은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1924년 경성일일 신문사가 제1회 탁구 경기대회를 개최하게 되면서 급격한 보급이 시작되었으며 1926년 동 신문사가 주최한 제 2회 대회에는 300여 명의 남녀 선수가 참가하는 성황을 보였다.
우리의 손으로 첫 대회를 연 것은 YMCA가 1928년 2월에 YMCA체육관에서 제 1회 조선 탁구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되자 1945년 11월 조선 탁구 협회가 발족되고 전국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어 국제 진출의 기틀을 잡았다.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탁구 은메달 한국 유승민 선수,
1952년 제1회 아시아 탁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한 한국은 1956년 동경에서 열린 제23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여자 5위 남자 14위를 차지한 후 더욱 발전하여 1973년 4월에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 32회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정현숙이 주축이 된 여자 팀이 단체전에서 일본, 중국의 강호를 물리치며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여 탁구는 물론 구기 사상 최초로 세계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 이후로도 우리나라 탁구는 세계 최강의 전력을 유지하며 위상을 떨치고 있다.
2013년 세계탁구챔피온쉽, 프랑스, 남녀혼합복식 결승전, 한국의 이상수,박용석과 김효봉, 김종 선수
시설
경기장은 길이가 14m, 폭이 7m, 높이가 마루 위 5m이며 조명은 세계 선수권 및 올림픽 대회는 탁구대 위 1000룩스, 탁구대 외는 500룩스를 유지해야 한다.
탁구대 코트는 직사각형으로, 규격은 가로×세로가 152.5×274cm, 두께는 2.5cm, 높이는 바닥에서 76cm 위에 수평면상에 놓여진다.
탁구대 표면의 가장자리에는 너비 2cm의 흰 선을 긋는데, 274cm를 따라 코트 끝에 그어진 선을 사이드라인, 152.5cm를 따라 그어진 선을 엔드라인이라 한다.
복식 경기를 위해 탁구대 중앙에 그어진 너비 0.3cm의 중앙선을 센터라인이라 한다. 센터 라인은 하프 코트의 일부로 간주한다.
탁구 경기장의 규격,
네트는 그물 구조로 되어 있으며, 윗부분은 폭 1.5cm의 흰 천을 덮어 씌운다. 높이는 15.25cm로 탁구대 표면과 평행을 이루도록 팽팽하게 쳐야 하며, 네트 길이는 탁구대에서 돌출부를 포함하여 양 지주 봉까지 183cm이다.
지주는 직경 2.2cm이하의 원통형으로 양쪽 사이드라인에서 직각으로 각각 15.25cm 돌출시켜 세운다.
탁구대 규격,
용구
공은 구기 중에서 가장 작고(지름 3.72~3.82cm), 가벼우며(무게 2.40~2.53g), 가장 회전이 많고(100회/1초), 빠르며(상대 코트 도달 시간 0.2초), 불면 날아가고 손에 쥐면 감추어진다.
공은 천연 수지인 셀룰로이드로 만들었는데, 요즘은 합성수지로 된 플라스틱 제품도 많이 있다. 공을 돌려보았을 때 회전이 일정한 구체이어야 하며, 색깔은 흰색과 오렌지색이 있다.
탁구공은 구기 중에서 가장 작고(지름 3.75~3.82cm), 가벼우며(무게 2.4~3.82g), 가장 회전이 많고(100회/1초), 빠르다.
40mm 탁구용 공,
라켓은 다양한 탁구 기술의 습득이나 발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용구로서, 나무판에 고무가 부착되지 않은 나무 탁구채 자체를 말한다. 라켓은 크기, 모양, 무게에 제한이 없지만 반드시 목재이어야 한다.
러버는 라켓에 붙이는 고무판을 말하며, 여러 종류가 있으나 자신의 경기 스타일, 기술의 장·단점, 체력, 성격, 특성 등을 고려하여 선택한다.
색깔은 짙은 단일 색, 무광택이며, 양면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양면은 확실히 다른 색이어야 한다.
러버의 재료는 천연 또는 합성고무이며, 스펀지를 포함한 전체 러버 두께가 4mm를 초과할 수 없다.
러버는 라켓에 붙이는 고무판을 말하며 짙은 단일색, 무광택이며 양면은 확실히 다른색이어야 한다.
탁구 경기의 복장은 흰색, 노란색, 빨강색 등 어느 색상의 복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시합의 공 색깔에 따라 착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시합구가 노란색 공이면, 노란색 유니폼을 입을 수 없고, 흰색 공이면 흰색 옷을 입을 수 없다.
경기 방법
경기 방식에는 양편 1명씩 경기하는 단식과 2명씩 조를 이루는 복식이 있다.
복식은 같은 사람이 2회 계속해 칠 수 없으며, 반드시 교대로 쳐야 한다. 단체전에서 대표적인 것은 세계 선수권 방식이다.
남자 단체전은 3명이 3회씩 출전하는 5점 선취방식이고, 여자 단체전은 2∼4명으로 한 팀을 편성하는 4싱글스·1더블스의 3점 선취 방식이다.
서브
서비스는 자기 코트에 한 번 바운드시킨 뒤 상대방 코트에 넣는다. 서비스를 할 때는 라켓을 들지 않는 쪽 손바닥에 공을 얹고(이때 엄지손가락을 떼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붙인 채 곧게 편다) 공을 위쪽 45˚ 이내로 10cm 이상 올려 낙하해 라켓으로 친다.
손으로 공을 쥔 채 서비스를 하면 실점(失點)이 된다. 또한 공을 든 손이 코트 표면보다 위에 있도록 한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리시버)은 자기 코트에 공을 한 번 바운드한 뒤 타구하며, 직접 네트를 넘기거나 또는 우회시켜 상대방 코트에 넣는다.
서포트 바깥쪽이나 서포트 밑을 지나 직접 상대방 코트에 들어간 것도 유효 타구이다.
서비스든 리시브든 그 뒤의 타구이든 공이 네트를 넘지 않았거나 상대방 코트를 벗어났을 때는 친 쪽이 실점하며 공을 헛치는 것도 실점이 된다.
득점법은 상대방이 정규의 반구를 하지 못하였을 경우 자신의 득점이 된다. 득점은 1점씩이며, 먼저 11점에 이른 사람이 1게임을 얻는다. 10올(듀스)이 되었을 때는 먼저 2점을 따는 쪽이 1게임을 이기게 된다. 3게임 시합인 경우 2게임, 5게임시합은 3게임을 선취한 쪽이 승자가 된다.
서비스가 네트나 서포트에 닿고 들어갔을 경우에는 네트(노 카운트)이므로 서비스를 다시 한다.
세계 수준의 탁구 선수들에게 게임이란 결국 스핀 싸움이다. 중국은 세계선수권이 처음 열린 1926년부터 1951년까지는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지 않았다. 중국의 첫 탁구 세계챔피언은 1959년 도르트문트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한 롱궈투안이었다. 이후 중국은 점차 세계 탁구의 강자가 되어갔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대적하기 어려운 탁구 공룡으로 진화했다.
중국 탁구가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하게 경쟁팀을 견제하고 연구했는지 대표적인 예가 1975년 세계선수권 여자 단체전이다. 1973년 대회에서 정현숙, 이에리사가 주축이 된 한국 여자팀이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 우승을 했다. 1975년 대회에서도 한국의 낙승이 예상됐지만 오산이었다. 중국이 이를 갈고 설욕을 준비했던 것이다.
중국의 거신아이가 당시로선 생소한 이질러버(롱핌플러버)를 들고 나왔다. 거신아이는 한국과의 경기에서만 이질러버를 썼다. 처음 보는 스핀이 사방에서 들어오자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후 이질러버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키워드가 됐다.
1980년대 중국은 스카이서브를 선보이기도 했다. 상대 선수의 타이밍을 뺏기 위한 전략이었다.
2000년대 들어 탁구에서는 수비와 백핸드에 취약한 펜홀더 그립이 서서히 밀리고 유럽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셰이크핸드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류궈량-마린-왕하오까지 이어지는 이면타법을 내놓았다. 이면타법은 펜홀더 전형이면서 셰이크핸드처럼 라켓 양쪽에 러버를 붙이고 특별한 손목 스냅 기술로 백핸드를 자유자재로 하는 전법이다. 펜홀더의 강력한 공격은 유지하면서 약점을 보완하는 기술이었다.
이런 기술들은 강팀을 견제하기 위한 변칙이었다. 이질러버나 스카이서브는 요즘 탁구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이면타법도 찾기 어렵다. 펜홀더 전형은 현재 톱랭커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중국의 판젠동, 마롱 등은 빠르고 힘 있는 정석 기술로 ‘닥공’ 스타일의 탁구를 한다. 티모 볼(독일)은 유럽 선수지만 중국이나 아시아의 기술을 많이 흡수하고 받아들인 선수다. 중국 탁구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탁구는 그 안에서 더 뛰어난 기술, 더 기발한 신기술을 만들어내며 진화해왔다.
변칙이 정석을 결국 이길 수 없는 것이 맞지만, 중국이 그때그때 상식을 넘어서는 발상까지 하면서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를 했는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중국은 스스로 “우리는 탁구 기술에 관한 모든 분야를 다 연구했다”고 큰소리를 친다.
견제해도 소용 없었다
ITTF의 규정 역시 중국을 견제하는 쪽으로 변해왔다. 규정 변화가 꼭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중국 특유의 기술과 스피드 보다 유럽 스타일의 파워풀한 탁구가 유리한 쪽으로 바뀐 게 사실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공의 크기가 커졌다. 기존의 직경 38밀리미터에서 40밀리미터로 바뀐 것이다. 공의 스피드가 종전보다 떨어졌다.
2008년에는 휘발성유기용매제(VOC) 성분이 포함된 스피드 글루 사용이 금지됐다. 글루는 라켓에 러버를 붙일 때 쓰는 접착제를 가리키는데, 스피드 글루를 쓰면 공의 반발력이 커지기 때문에 이 규정이 생긴 이후 반발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파워가 더 중요해졌다.
2014년에는 공의 재질을 셀룰라이드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꿨다. 다소 유연성이 있는 셀룰라이드 공(공이 찌그러졌을 때 끓는 물에 넣으면 복원되는 성질이 있다. 플라스틱 공은 그렇지 않음)에 비해 플라스틱 공은 딱딱해서 반발력과 스핀에서 손해를 보게 됐다. 종전보다 공이 덜 튀기고 같은 스핀을 먹여도 실제로는 덜 먹는다. 유럽식 ‘힘의 탁구’가 유리해지는 조건이었다. ITTF는 스피드 글루와 셀룰라이드 공을 금지시킨 이유에 대해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숨이 가쁠 정도로 규정이 계속 변했지만 정작 중국 탁구의 경쟁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2000년 이후 올림픽 탁구 금메달은 한국의 유승민(2004년 아테네 남자 단식 금)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에게 돌아갔다.
출처 ^ 참고문헌,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탁구 메달 수 : 4개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탁구 종목
[남자 | 여자 : 단식, 단체전
[탁구 [table tennis] (스포츠 백과, 2008., 대한체육회)
[스포츠 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탁구 (올림픽 종목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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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기원은 1870년대 일본 요코하마 중화거리, 고베 난킨마치 등의 중국요리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설과 1922년 삿포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돼지뼈, 닭고기, 야채, 멸치 등으로 우려낸 국물에 수프로 양념을 하여 삶은 중화면(中華麵)과 함께 먹는 것이 대체적이다.
라면이 많은 인기를 끌자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라면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일전쟁 때 중국인들이 전쟁 비상식량인 건면을 식용유지로 튀겨서 보관하기 쉽도록 포장하고 별도의 수프를 가미하여 먹은 것을 인스턴트라면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인스턴트라면이 처음 출시된 것은 1958년으로 산시쇼쿠산(サンシㅡ殖産:현재 닛신식품)에서 생산한 '치킨라멘(チキンラㅡメン)'이 시작이었다.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가 면을 기름으로 튀기는 것을 보고 라면을 만드는 방법을 착안하였다.
인스턴트라면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1960년경으로, 현재 여러 식품회사에서는 각각 특색 있는 제품들을 만들어 시판한다. 라면은 건조식품이므로 수분이 많은 식품에 비해 단위 중량당 영양분이 많으며, 튀긴 식품이므로 지방이 많아 120g당 500kcal의 열량을 내는 고(高)칼로리 식품이다. 인스턴트 라면은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생산하며 제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라면을 좋아한다. 세계 최대 라면 소비국은 중국이지만 1인당 라면 소비량으로 따지면 한국이 최고다. 한 사람이 1년에 68개를 먹는다고 하니까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라면을 먹는 셈이다.
라면이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것이 1963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됐다.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개발된 해로 따지면 55년이다. 라면, 이 위대한 음식은?
반백 년 라면의 역사는 시련에서 출발한다. 그 탄생사는 전쟁의 고통, 그 혼란에 내동댕이쳐진 개인의 눈물, 그리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라면의 역사는 고난 극복의 궤적이며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땀과 눈물이 모두 스며 있다.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법,
① 배합공정:소맥분과 배합수를 혼합하여 반죽을 만든다. ② 면대형성:롤러로 압연하여 면대를 만든다. ③ 제면공정:제면기로 국수 모양을 만들고,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조절하여 라면 특유의 꼬불꼬불한 형태로 만든다. ④ 증숙공정:스팀 박스를 통과시키면서 α화(호화)시킨다. ⑤ 성형공정: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납형 케이스에 넣는다. ⑥ 유탕공정:150℃ 정도에서 튀기고 수분을 휘발시킨다. ⑦ 냉각공정:상온으로 냉각시킨다. ⑧ 수프제조공정:주원료를 고압처리하여 진공농축, 진공건조시킨 다음 각 원료를 혼합하여 포장한다. ⑨ 포장공정:수프를 첨부하여 완제품으로 포장한다.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박정희 대통령은 제작비 문제로 사용하지 못한 고춧가루를 투입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쌀을 아끼기 위한 혼분식 장려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후 캠페인과 정책은 시너지를 이루며 라면 붐을 일으킨다.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과 다른 맵고 짠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라면의 탄생이었다. 중량 100g, 가격 10원에 출시된 삼양라면을 통해 삼양사는 6년간 매출액 면에서 300배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삼양의 성공이 시발점이 되어 롯데공업(농심), 조선일보, 동방유량, 럭키LG, 빙그레, 오뚜기, 야쿠르트 등도 라면 산업에 진출하게 된다. 라면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라면을 대체 식품이라기보다 기호식품으로 인식하게 되고,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오히려 쌀의 소비가 늘어나 혼분식 장려 정책은 역효과를 거두었다는 아이러니한 일화가 있다.
한국. ‘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라면의 붐은 1989년 면을 공업용 쇠기름으로 튀겼다는 보도로 촉발된 ‘우지파동’에 의해 위기를 맞이한다. 삼양과 오뚜기는 폐업 직전까지 몰리고 비단 특정 회사만이 아닌 라면 전체에 신뢰를 잃은 소비자 때문에 라면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라면 파동은 기업들이 라면의 고급화ㆍ다양화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 220개 종의 라인업과 세계 최고의 판매량을 이루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라면은 분명 중국을 통해 일본으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납면과 라멘과 라면은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해야 할 만큼 분화된 상태로, 그것의 계보를 따진다는 것도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들기 시작한 한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라는 점, 그리고 라면의 시초였던 중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입국이라는 점을 그 계보와 나란히 놓고 본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간식이면서 주식 같은 음식. 라면의 매력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세계 최고다. 국민 1인당 5일에 한 번, 1년에 80번 출출한 배를 채워준다. ‘신라면’의 경우 1986년 출시된 이후 2009년 11월까지 누적 판매 183억 개를 기록했다. 이 라면 봉지를 일렬로 놓으면 에베레스트 산 1만 8000개 높이와 맞먹는다. 세계라면협회(IRMA)에 따르면 국내 라면시장은 2010년 말 현재 1조 9500억 원 수준에 이른다.
간편식의 대명사인 라면. 값싸고 조리하기 쉬워 ‘제2의 식량’으로도 불린다. 다양한 요리와 잘 어울려 라면 조리법도 무궁무진하다. 라면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cm. 한 봉지에 보통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가 총 길이는 약 50m이다. 라면은 꼬불꼬불한 면발이 뭉쳐져 사각형이나 원형으로 돼 있다.
면발은 왜 꼬불꼬불한 걸까. 작은 봉지에 넣으려면 긴 면발보다 최대한 꼬불꼬불 뭉쳐 있는 면이 나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꼬불꼬불하면 면이 잘 부서지지 않는다. 조리 시간이 단축되고 면이 더 쫄깃쫄깃해 맛도 더 좋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 잘 튀겨진다.
라면에는 방부제가 첨가돼 좋지 않다는 것은 오해다. 라면의 경우 면의 수분 함량이 10% 이하(대부분은 4~8% 정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미생물이 번식하기 어렵다.
라면은 중국의 납면(拉麵, 중국 발음 라미엔)이 일본으로 전해져 라멘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라면이 됐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이다.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길게 뽑아낸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타자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라미엔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청일전쟁 후 중국인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전해졌다. 중국식 라미엔에 일본 맛이 더해져 일본식 라멘이 됐다.
라면은 1958년 8월 25일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1910~2007)가 개발했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심각한 식량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도가 설립한 닛신식품(日淸食品)이 국수 면발에 간단한 양념 국물을 섞은 아지스케면(味附麵)을 ‘끓는 물에 2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시판한 것이 라면의 시초다. 제품명은 치킨라멘. 뒤이어 1959년 에스코크, 1960년 묘조식품(明星食品)이 가세했다.
당시 라면은 아지스케면으로 면 자체에 양념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 쉽게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묘조식품은 이 점을 보완해 1961년 현재와 같은 분말스프를 첨가한 라면을 첫 생산했다. 이것이 오늘날 라면의 모태가 됐다.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 산업은 급성장했다. 1971년에는 컵라면까지 등장하면서 조리와 휴대의 간편함을 극대화했다.
우리나라 라면시장의 절대강자는 농심(農心)이다. 1985년 라면시장 1위에 오른 후, 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농심라면의 원조는 롯데라면이다. 롯데라면은 1965년 처음 선보였다.
당시 신춘호(辛春浩) 회장이 이끄는 롯데공업(농심의 전신)이 롯데라면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삼양라면과 함께 인기를 끌다 1974년 농심라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따지고 보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원조가 롯데라면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농심이 아니다. 1호 라면은 삼양(三養)라면이다. 삼양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처음 나왔다. 삼양라면의 탄생은 전중윤(全仲潤) 삼양식품 회장의 착안에서 비롯됐다. 그는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돌며 시장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5만 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1963년, 드디어 우리나라 토종 1호 라면이 탄생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중량 100g에 10원.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그러나 초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밥과 국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라면이 한 끼 식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식품도 생소했다. 라면의 ‘면’을 무슨 섬유나 실의 명칭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1965년 때맞춰 나온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라면은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6년 연 240만 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 개로 늘어났고, 몇 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300배에 이르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나라의 총 수출액이 3000만 달러였는데, 이 중 9%에 해당하는 270만 달러가 삼양라면을 판 것이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1989년 11월에 ‘우지(牛脂)라면’ 파동이 일어나면서 삼양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지, 즉 공업용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라면 판매와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1000여 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삼양라면은 법정 투쟁에 나서 1997년 8월, 무려 7년 9개월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상처는 씻을 수 없을 만큼 컸다. 결국 절대강자의 위상을 잃어버린 후 한동안 고객들의 외면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출처 ^ 참고문헌,
[삼양라면
[농심라면
[네이버 지식백과] 라면 -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사물의 민낯, 2012.., 갈릴레오 SNC)
#라면 #한국식 라면 #삼양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삼양라면 #농심라면 #인스턴트 라면 #북미지역에서 BTS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 문화의 확산 #삼양공업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 #국수를 증숙시킨 뒤 기름으로 튀긴 꼬불꼬불한 유탕면과 국물을 만드는 수프가 첨부돼 있다 #1966년 3월 21이라는 제조일자 #최고의 맛 #정확한 양 #최선의 서비스”라는 문구가 써 있다 #라면은 일본의 명성식품주식회사와 기술 제휴하여 만든 제품으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삼양라면 1980년대에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한국식 라면이 만들어진 계기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한국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코로나19로 수출 여건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치 라면 수출 #김종구 농식품부 식품산업정책관 #국가별 전략 품목을 선정 #민간과 정부가 협력해 온라인 비대면 사업을 적극 추진한 결과 농식품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 #장기보관 #가정 내 간편식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미국·일본·중국 주요 수출대상국 #주요 수출대상국에서 큰 폭으로 증가하여 전년 동기대비 36점7% 증가한 4억 5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 #소스류 #쌀 가공식품 #즉석밥 #떡볶이 #가정에서 요리에 활용되는 고추장 등 장류의 인기가 오르면서 수출액이 증가했다 #닭고기는 홍콩·미국에서 간편식 삼계탕 수요가 증가했으며 베트남에서 닭가슴살 인기가 오르면서 5000만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1971년 ‘컵 누들’이라는 최초의 컵라면 개발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침체 #미스터 누들”이라 부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한 안도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 마땅하다고 칭송했다 #실제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채 #그는 2007년 1월 5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면의 종류 #유탕면 #호화건면 #숙면 #유탕면은 가장 기본형태의 라면으로 기름에 튀긴 면 #호화건면은 한번 익힌 면을 다시 말린 것을 말한다 #숙면은 반쯤 익혀서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상태에서 포장한 면이다 #용도에 따라 #비빔면 #컵라면 #라면사리 등으로 나눌 수 있어 비빔면은 비벼 먹을 수 있게 얇고 꼬들꼬들한 면으로 만들어지고 #컵라면은 끓이지 않고 뜨거운 물을 부어도 완전히 익을 수 있게 면의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많이 나 있다 #라면사리 #음식점에서 부대찌개나 전골 등에 추가해서 먹는 것 #분말 수프와 건더기 수프 없이 면만 포장하여 판매한다 #조리법
고려 창왕 1년(1389) 2월, 전선 100척이 박위의 지휘하에 대마도로 출정했다. 박위는 공민왕 때 왕을 호위하는 숙위병인 '우다치'에 임명된 후 김해부사, 상주부사, 영흥부사, 진주목사, 계림 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상주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했고, 김해부사로 재임했을 때 황산강(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당도한 왜선 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으로 전멸시켰다. 그후 창왕 즉위년(1388) 요동정벌 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가담해 회군공신에 올랐다.
대마도에 당도한 박위는 왜구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고려 백성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한 뒤 고려에 무사히 귀환했다. 이에 창왕은 박위를 칭송하는 교서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여러 해 동안 태평하여 군비가 차츰 해이해졌다. 그러므로 섬에 사는 왜적들이 함부로 노략질을 한지 이미 40여 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3면의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으나 국가는 다만 수세만 취하고 장수들은 아직도 가서 칠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대는 용기를 분발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험한 바다를 건너가 다년간 자라오던 화근을 전복하고 건물과 함선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포로되었던 우리 백성들을 고향에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로써 국가의 수치를 씻었으며 이로써 신민의 원수를 갚았도다.
승전 보고가 처음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진실로 기뻤다. 이제 문하평리(門下評理) 서균형(徐鈞衡)을 보내 그대에게 의복, 안마(鞍馬), 은덩이 등 물건을 주노라.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위는 다만 집과 배를 불살랐을 뿐이고 실상 포로를 찾아온 일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원된 병력의 규모가 나와 있지 않고 자세한 전투 경과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1차 대마도 원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며, 박위가 백성 100여 인을 구출한 게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적선 3백 척과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을 볼 때 왜구의 피해가 컸음은 분명하다.
일본 후쿠오카 까지는 138Km이지만 부산까지는 49.5Km의 거리에 있어 맑은 날은 대마도 (쓰시마)의 서해안에서 한국의 산과 거리를 볼 수 있다,
대마도 우리 땅. 독도가지고 버티는 것은 대마도를 빼앗길가 봐 전전긍긍하는 일본의 수작.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무식한 미국 실무자들 때문에 대마도가 일본 지배로 들어갔다. 이래저래 한국은 미국 때문에 피해가 많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친일파 정군들이 일본에게 침묵한 결과가 대마도를 내 준 것이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사용하던 지도,
대마도, 독도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
지도 한가운데 한일 사이에 노랗게 떠 있는 섬이 대마도인데, 조선땅으로 표기돼 있다.
미국도 인정한 지도. 대마도는 한국땅.
대마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한 1734년 프랑스제작 지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고미술·지도 전시회에서 1864년 발행된 아시아 지도를 사게 됐다.
지도 하단에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현지 정찰과 측량으로 작성했다. 일본과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 의회의 지시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했다'고 나온다.
이 지도에는 대한해협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 남단에 있었다.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대마도는 우리 땅과 똑같이 무색이었다. 그게 첫 단서였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 어떤 섬이 소속됐는지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은가?
"페리 함대는 앞서 말한 '오가사와라'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을 했던 당사자다. 그때 일본이 하야시의 프랑스어판 지도를 제시해 협상에서 이겼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한 지도였다. 그러니 대마도가 어느 영토에 속하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지도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유추???
"1855년 영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일본 각 지방을 구역별로 번호를 매겨놓았다. 그 지도의 하단에 '대마도와 이끼섬은 일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1945년 국내에서 발행된 '조선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해놓았다."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미국 등 전승국 간에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체결했다. 이 문안에 '독도'와 '대마도'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도 날아갔던 셈이다.
"우리는 '전승국' 신분이 아니어서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6·25전쟁 중이었다. 외교적 제약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를 염두에 두고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고 했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일본 에도시대 대학자 하야시 시헤이(1738~93)이 1785년에 지은 삼국통람도설은 조선, 오키나와, 북해도 3국에 대한 정치지리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지도중 주목할 부분은, 삼국접양지도와 조선팔도지도이다.
김일성 때문에 찾지 못한 대마도. 멍청한 김일성.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사흘 뒤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에 일본 총리가 일왕(日王)에게 '한국인이 실제 2000명쯤 거주하고 있다'는 대마도 상황까지 보고했다. 하지만 여섯 달 뒤 6·25가 발발했다.
일단 이번에 발견된 고지도부터 살펴보자. 2018년 8월 24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한일관계사 전문가인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2월11일 일본의 지도 학자 구보이 노리오 교수를 통해 고지도를 입수했다.
이 지도는 영국에서 활동하던 이태리인 지리학자 J.H.Kernot이 1790년 탐험에 나서면서 작성했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32, 세로 24센치로 소형 판본이며, 채식인쇄 기법을 사용했다. 지도 상단 중앙에 일본 수도 YEDO, 좌측 하단에 조선의 관리로 보이는 3명이 COREANS, 우측 하단에 거북선으로 보이는 STATE BARGE 라고 적힌 3장 삽화를 첨삭한 것이 특징이다.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 뿐만 아니라 대마도가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위 지도의 빨간색 원안에 표시된 곳이 대마도인데, 한국 해협 안에 포함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독도와 울릉도, 대마도는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색깔로 분류했는데, 모두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이 지도에는 독도를 일본식 발음인 ‘Dagelet(다제레트)’, 울릉도는 ‘Argonaut(아르고노우트)’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즉 J.H.Kernot가 이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것이 일본 자료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소장은 “당시 일본인들도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적잖이 발견됐다. 대마도는 일본 고지도나 고문서에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했던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에 발견된 지도는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에 의미가 있다. 또 세계인들도 오래전부터 대마도는 한국 땅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마도 고지도에 숨겨진 비밀, 그것은 바로 ‘대마도는 반드시 찾아와야 할 대한민국 영토’라는 것이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정치가.)이 조선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전도' 에는 독도와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표기하여 '일본 영토' 가 아닌 '침략 대상' 으로 명시하고 있다.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소속된 대마도(일본명 쓰시마). 그런데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의, 일본인이 작성한 고지도가 21년 전인 1996년 발견됐습니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이 나던 1592년 우리나라를 침략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신하들에게 명령해 만든 것으로 독도와 함께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명기돼 있습니다.
신라 때부터 우리 영토였던 것으로 알려진 대마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일본에 편입됐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인데요. 독도와 관련해 계속되는 일본의 망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려진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나오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무엇이 두려운지, 한국 사람들을 경계한다. 양심이 두려운거지,
대마도가 옛날 우리 고려의 땅 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문헌뿐 아니라 일본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일본 불교의 천태종 승려 현진(懸眞, 겡싱)의 저서 《사가묘략기》에 ‘대마도는 고려의 목(牧)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를 정벌할 때 병조판서 조 말생이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현 경주)에 예속되었으며 우리 땅이라는 문적(기록)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대마도는 고려에서 만호(萬戶)라는 지방관을 파견, 다스렸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본은 독도문제를 거론할 때 ‘대동여지도’를 들먹이지 않는다. 왜냐면 독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다가는 도리어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우산국(우산도와 울릉도)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계획을 세워 편입한 영토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은 여진족이며 우해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무 상자를 싣고 가 위협으로 굴복시켜 편입시키고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일대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주어야 할 땅이다. 실효적 지배보다는 역사적인 지배 상태다. 이에 비해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지만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
부산에서 49.5㎞, 히타카쓰항까지 배 타는 시간은 1시간10분이다.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길이 약 82㎞, 폭 약 18㎞에 면적은 거제도 1.7배 크기인 섬이다.
1)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와 조선말까지 대마도는 한국의 경상도 계림(신라)의 부속 도서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이었다.
5) 신라 때 볼모로 잡혀갔던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된 신라 국사 박제상 공의 순국비가 있다.
6) 고려 창왕(1389년) 때 박위 장군의 지휘로 왜구의 소굴로 변한 대마도를 완전히 소탕하고 대마도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고려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7) 그 후 조선 태조(1396년) 2차 정벌, 세종(1419년) 이종무 장군의 3차 정벌 후 대마도 도주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서약서도 있다.
8)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해 만든 지도(팔도전도, 1592년이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9)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 나선 군사들에게 내린 하교문, 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과 조선과 대마도를 부자관계로 비유한 퇴계 이황 선생, 순암 안정복 선생의 동사외전, 동사강목, 정약용의 비어고에도 한국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조선 왕조 500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11) 1750년 영조 때 해동지도의 대동총도의 설명문,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는 문구나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울릉도, 독도,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고 1855년 영국지도, 1865년 미국 지도 등 국내의 많은 역사 기록문에 명백히 표기되어 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하라! 대마도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무력 강점했지만 의병들이 격퇴한 전적비가 남아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촉구한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아래 표시된 부분은 하루빨리 우리가 복원해야하는, 조상이 물려준 우리의 영토이다.
대마도는 한국땅,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좋은 정보입니다.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 영토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과거 양국 간의 교류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습니다.
다만 대마도는 현재 일본의 영토입니다. 하지만 최근 이 섬이 한국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19년 12월 8일 일본의 유명 언론 매체 산케이 신문에서 보도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현재 한국인들이 대마도에 수많은 땅들을 매입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도하며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표현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고령화와 과소화가 진행되는 대마도에서
일본인이 없어지고 틀림없이 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대마도 땅 매입 소식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른바 한국의 큰 손들이 대마도의 많은 영도를 사들여서 호텔과 민박 등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부동산 열풍이 부는 이유는 대마도가 관광지로서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지기 전인 2018년 대마도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무려 40만 명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접근하기 쉬운 지리적 위치와 일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많이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마도에 대해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근거가 존재했습니다.
1592년 일본인이 제작한 조선 팔도총도에 대마도는 경상도에 속한 섬으로 그려졌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1830년에도 일본이 만든 조선국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기에 이 섬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 좋은 정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한 대한민국 땅 독도입니다.
한일 감정으로... 문제는 세계에서 보는 시각이 한국으로 그간 식민지 생활, 그들의 만행으로 잘못됨은 바로 잡히고 반전 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수수방관 하에 적당한 대응으로 잠자는 사자 건드려 봐야 이로워질게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무엇이 두려운가요?
내조국 내가 지킨다고 발언하는대 어느 국민이 머라하겠소 ! ??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능사는 아닐듯...?
이권 그만 챙기고 나라 위한 발언 한번 해보세요 ....정치인님 ????
일본 측과 대화도 간단합니다 ?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한다면?
대마도도 일본도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한국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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