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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부경남 코로나19 확진자는 마산과 양산까지 가야 합니까? 경남도민의 공론화로 확정된 서부경남 공공병원, 하루 빨리 설립해야 합니다."
박석용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진주의료원지부장이 거리에 서서 호소하고 있다. 박 지부장은 2일부터 진주시청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1인시위에 들어갔다.
최근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경남도가 추진 중인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 진주와 사천, 하동 등 서부경남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들이 속출했다. 일부 확진자들은 마산의료원뿐만 아니라 양산부산대병원에 입원하고 있다. 특히 11월에 발생한 사천과 진주 확진자 3명이 현재 양산부산대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박석용 지부장은 전화통화에서 "최근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에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없어진 옛 진주의료원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특히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시민들도 진주의료원 폐업은 아쉬워하고, 공공병원이 절실하다는 실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은 진주의료원이 그대로 있었다면 진주 쪽 확진자들이 마산이나 양산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중증환자만 대학병원을 이용하도록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며 "코로나19 사태 속에 진주의료원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공론화 과정을 거쳐 결정된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이 더디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 지부장은 "서부경남 공공병원을 짓자는 결정을 하기까지 정부에 건의하고, 도민토론회를 여는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며 "없앨 때는 이렇다 할만한 토론회 한번 없었는데, 세우려고 하니 엄청 힘이 든다"고 했다.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을 위해서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 정책적 결정이 필요하다. 그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짓기로 한 공공병원을 하루라도 빨리 건설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 가운데 생략도 해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석용 지부장은 "최근 진주시 이통장 제주 연수 이후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감염 확산 차단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며 "하루라도 빨리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을 해야 하기에 거기로 나섰다"고 말했다.
박 지부장은 이날부터 당분간 진주시청 앞에서 1인시위를 계속 하기로 했다.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은 언제?
옛 진주의료원은 홍준표 전 경남지사(현 국회의원) 때인 2013년에 문을 닫았다. 옛 진주의료원 건물은 홍 전 지사가 내걸었던 '경남도청 서부청사'로 활용되고 있다.
대법원은 "진주의료원 폐업‧해산은 조례로 결정할 사항이다"며 "경남도의 폐업 방침 발표 후 일련의 조치는 홍준표 전 지사의 폐업 결정에 따른 것이고, 이 폐업 결정은 법적 권한 없는 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진주의료원 폐업이 위법하나 실익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진주의료원이 폐업한 뒤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은 공공의료가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후 정부와 경남도는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을 추진했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11월 '믿고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의료 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진주권을 공공병원 신축 대상지에 포함시켰다.
경남도는 같은 해 11월 '공공보건의료 강화 대책'을 발표했고, 2020년 5월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에 대해 '공론화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이에 지난 5~7월 사이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공론화협의회, 도민토론회'가 진행됐다.
그 결과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공론화협의회 도민참여단'은 지난 7월 "도지사는 서부경남지역에 공공병원을 반드시 신설하고, 3곳 후보지를 검토해 부지를 결정하며, 취약지역의 공공의료 확충에 최선의 노력을 한다"고 정책권고했다.
#확진자 속출에 진주 의료원 폐업 아쉬워 하는 사람 많아 #아쉬움이 너무 많아!??? #나쁜 행정의 예??? #진주의료원 폐원의 교훈!? #진주의료원 폐업 지시' 홍준표 전 경남지사 고발 #진주의료원 폐원의 교훈 #진주의료원 폐원의 교훈 #경남일보 #진주의료원 폐업 지시 #홍준표 전 경남지사 고발 #박석용 진주의료원지부장 #1인시위 돌입 #서부경남 공공병원 빨리 설립해야 #서정인 진주시의원이 작성한 글 #과거 본인이 진주의료원의 폐쇄 이후 #공공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추진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반성하는 글 #진주시는 창원보단 서쪽 통영이나 거제보다 북쪽 즉 서부경남에 위치 #2014년 7월 진주시의회 ㅡ> 진주의료원 건물을 서부청사 등 공공시설로 활용 #2013년 3월 당시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강성노조의 특혜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이유로 폐원 #이후 경남도는 진주의료원 재개원 불가 #도시계획변경 결정 #이후 코로나 발생 후 서부경남의 의료시설의 취약함이 드러나 #경남 총 108개 병원 중 서부경남에는 22개 #종합병원은 경남 24개 중 3개만 서부경남에 위치 #의료원 수요공급 – 환자 수에 비해 투입되는 비용이 컸고 노조의 도덕적 해이 문제로 적자가 심각했다고 함 #경영문제 #공공의료원 – 민간의료원과 달리 복지형 의료체계를 위해 존재했던 곳 ㅡ> 이를 폐쇄시킨 건 홍준표 도지사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위였다는 분석 #위치 – 혹자는 진주가 인구에 비해 병원이 많다고는 하지만 위 글에 언급된 것처럼 #서부경남 전체로 본다면 종합병원 수는 경남 전체 24개 중 진주는 3곳으로 적은 편 #이것도 인구 대비 병원 수 그리고 병원의 접근성이 분석되어야 함 #진주의료원 폐업 지시’ 홍준표 전 경남지사 고발 #진주 의료원 강제폐업 진상조사위원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의 경남 진주의료원 폐업에 대해 직권남용 등으로 고발 #고발 사유 – 폐업 의결서 조작 #공공기록물 무단 폐기, 공무원 동원 환자 퇴원 전원 회유, 직무대행으로 직권 남용 등 #홍준표는 페이스북으로 정당한 정책 결정으로 직권 남용죄의 범죄 구성요건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 나를 고발 하다니 #직권 남용죄의 범죄 구성요건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 나를 고발 하다니 #니들 맘대로 해봐라며 비난! #진주의료원 폐원의 교훈 #진주의료원 폐업 지시 한 홍준표 #경남일보 #진주의료원 폐업 지시 #홍준표 전 경남지사 고발 #박석용 진주의료원지부장 1인시위 돌입 #서부경남 공공병원 빨리 설립해야 #왜 서부경남 코로나19 확진자는 마산과 양산까지 가야 합니까? #경남도민의 공론화로 확정된 서부경남 공공병원 #하루 빨리 설립해야 합니다 #박석용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진주의료원지부장이 거리에 서서 호소하고 있다 #박 지부장은 2일부터 진주시청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1인시위에 들어갔다 #최근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경남도가 추진 중인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 진주와 사천 하동 등 서부경남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들이 속출했다. 일부 확진자들은 #마산의료원뿐만 아니라 양산부산대병원에 입원하고 있다 #특히 11월에 발생한 사천과 진주 확진자 3명이 현재 양산부산대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박석용 지부장은 전화통화에서 #최근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에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없어진 옛 진주의료원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특히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시민들도 진주의료원 폐업은 아쉬워 #공공병원이 절실하다는 실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진주의료원이 그대로 있었다면 #진주 쪽 확진자들이 마산이나 양산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중증환자만 대학병원을 이용하도록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진주의료원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공론화 과정을 거쳐 결정된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이 더디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 지부장은 서부경남 공공병원을 짓자는 결정을 하기까지 정부에 건의 #도민토론회를 여는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 #없앨 때는 이렇다 할만한 토론회 한번 없었는데 세우려고 하니 엄청 힘이 든다"고 했다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을 위해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 정책적 결정이 필요하다
축구선수출생1987년 6월 24일, 아르헨티나신체170cm, 72kg소속팀FC 바르셀로나 (FW 공격수, 10)데뷔2004년 FC 바르셀로나 입단수상2020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득점왕경력2018 제21회 러시아 월드컵 아르헨티나 국가대표사이트공식홈페이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리오넬 메시(33·FC바르셀로나)가 ‘축구 황제’ 펠레를 넘어 최다골의 주인공이 됐다.메시는 23일(한국시각) 스페인 바야돌리드의 호세 소리야 경기장에서 열린 2020~2021 프리메라리가 레알 바야돌리드와 경기에서 팀의 세번째 골을 챙기며 3-0 승리를 이끌었다.
메시는 이날 골로 바르셀로나 한 팀에서만 총 644골을 넣어, 펠레가 과거 브라질 산투스에서 넣은 단일팀 최다골 기록(643골)을 넘어섰다.메시는 2004년 바르셀로나 1군에 데뷔한 뒤 2005년 5월1일 첫골을 신고했고, 이날까지 ‘원클럽맨’으로 17시즌 동안 총 749경기를 뛰며 644골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과거 펠레가 1956년부터 1974년까지 19시즌 동안 브라질의 산투스에서 뛰며 세운 기록을 깼다.영국의 선수 출신 축구해설가 게리 리네커는 “메시가 누구도 깰 수 없는 기록으로 여겨졌던 펠레의 기록을 새로 썼다. 메시의 새 기록은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리네커는 “한 시즌에 43골씩 15시즌을 한 팀에서 넣어야 한다”며 메시의 기록을 경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메시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바르셀로나를 떠날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 이번 시즌이 끝나는 내년 5월까지 기록 행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보다 이적이 잦아진 현대 축구에서 메시처럼 득점력을 갖춘 선수가 한 팀에서 오래뛰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메시의 기록이 ‘불멸’로 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메시는 올 시즌 리그 14경기 7골을 포함해 18경기에서 10골을 기록 중이다. 이날도 전반 21분 클레망 랑글레의 득점으로 연결된 크로스를 올려 도움을 기록했고, 전반 35분 마르틴 브레이스웨이트의 추가골의 시발점이 됐다. 후반 20분에는 페드리의 힐킥을 수비수 2명 사이로 침투하며 받은 뒤 왼발로 골망을 흔들었다.
바르셀로나는 5위(승점 24)로 올라서며 선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승점 32)와 2위 레알 마드리드(승점 29)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메시 644골, 펠레 를 넘었다,
리오넬 메시(33·바르셀로나·사진)가 ‘축구 황제’를 넘어섰다. 펠레가 갖고 있던 단일 팀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웠다.
바르샤 17시즌 749경기서 대기록
메시는 23일(한국시각) 열린 2020~21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14라운드 원정경기 레알 바야돌리드전에서 골 맛을 보며 바르셀로나의 3-0 완승을 이끌었다.
메시는 팀이 2-0으로 앞선 후반 20분, 쐐기 골을 터뜨렸다. 바르셀로나는 최근 4경기 무패(3승1무) 행진을 이어가며 시즌 초반 부진에서 벗어났다. 5위(승점 24)로 올라선 바르셀로나는 선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승점 32)와 간격을 좁혔다.
이날 골은 2005년 17세에 바르셀로나 1군 무대에 데뷔한 메시의 644번째 골이다. 그는 17시즌 동안 749경기에 출전했다. 이로써 펠레가 자국 명문 팀 산투스에서 세운 단일 클럽 역대 최다 득점(643골)을 뛰어넘었다. 펠레의 골은 1956~74년 19시즌 동안 659경기에서 기록한 것이다.
메시는 프리메라리가의 단독 득점왕이다. 대기록 수립 하루 전인 22일, 2019~20시즌 득점왕에게 주는 피치치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메시는 지난 시즌 33경기에서 25골을 넣어 4시즌 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피치치 트로피 수상은 통산 7번째다. 아틀레틱 빌바오의 레전드 텔모 사라(6차례)를 제치고 역대 최다 수상자 영예도 안았다.
대기록은 하마터면 중단될 뻔했다. 메시는 시즌 개막에 앞서 구단 고위 관계자들과 불협화음을 내며 이적설에 휩싸였다. 맨체스터시티(잉글랜드), 유벤투스(이탈리아), 파리 생제르맹(프랑스) 등 또 다른 빅 클럽으로 옮길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바르셀로나는 “계약서에 명시한 바이아웃(소속팀과 협상 없이 이적할 수 있는 금액·9170억원) 이하 금액에는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메시가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꾸준함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산하 국제스포츠연구센터(CIES)는 이날 전 세계 축구 선수의 이번 시즌 공식경기 출전시간을 집계해 발표했다.
메시는 3위(4293분)를 차지했다. 1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중앙 수비수 해리 매과이어(4745분), 2위는 브라질 명문 인테르나시오날의 수문장 마르셀루 톰바(4740분)다. 1~8위 중 골키퍼나 중앙수비수가 아닌 선수는 메시뿐이다.
메시와 바르셀로나 계약은 내년 6월에 끝난다. 이적 규정상 내년 1월 1일부터는 자유롭게 이적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 현재로는 ‘원 클럽맨’ 이력이 이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최근 파리 생제르맹과 맨체스터시티행 루머가 나돌았는데, 선수 자신이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서는 모습이다.
바르셀로나에서 17시즌 동안 644골, 단일 클럽 최다골 신기록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가 '축구황제' 펠레를 뛰어넘었다.
메시는 23일(한국시간) 스페인 바야돌리드의 호세 소리야에서 열린 레알 바야돌리드와 2020~2021 스페인 라리가 15라운드에 1골 1도움하며 3대0 승리를 이끌었다.
전반 21분 클레망 랑글레의 선제골을 도운 메시는 바르셀로나가 전반 35분 마르틴 브레이스웨이트을 더해 2대0으로 앞선 후반 20분 직접 쐐기골까지 꽂았다. 이 골로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만 644골을 기록했다.
이로써 메시는 산투스(브라질)에서만 643골을 기록한 펠레가 갖고 있던 단일 클럽 최다골 기록의 새 주인이 됐다. 이들의 뒤를 이어 570골의 게르트 뮐러(바이에른 뮌헨), 569골의 페르난두 페이로테우(스포르팅), 542골의 요제프 비찬(슬라비아 프라하)이 단일 클럽 최다골 기록의 상위 기록을 보유했다.
펠레는 1956년부터 1974년까지 산투스에서 643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메시는 2004~2005시즌부터 17시즌 만에 대기록을 달성했다. '축구황제'보다 빠른 기록 달성이다. 아직 여전한 기량을 가진 메시라는 점에서 자신의 기록을 더 늘릴 기회는 충분하다.
대기록의 새로운 주인이 된 메시는 경기 후 자신의 SNS를 통해 "축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어떤 기록을 세울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며 "특히 오늘 펠레가 가진 기록을 넘어섰는데 지금까지 도움을 줬던 동료와 가족, 친구, 그리고 응원해주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메시의 활약을 앞세워 승점 3점을 추가한 바르셀로나는 4경기 무패(3승1무)를 달리며 7승3무4패(승점24)로 5위가 됐다. 선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승점32)와 2위 레알 마드리드(승점29)와 격차를 다시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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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유의 무술이자 민속놀이로서 독특한 리듬으로 스텝을 밟으며 다리걸기, 발차기, 던지기등의 기술로 상대방을 공격하며 태권도나 씨름, 유도의 특성을 합친 듯한 기술을 구사한다.
주로 발을 사용하여 상대를 공격하고 넘어뜨려 승부를 결정짓는 무예의 일종. 198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등록되어 있다. 문화재지정을 받았기 때문에 태껸을 수련하는 체육관을 도장으로 부르지 않고 '전수관(傳修館)'이라고 칭한다. 민속 경기로서의 태껸은 옛 기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택견은 2천년 전 고구려시대부터 전승되고 있는 한국 무예의 뿌리로서 1987년 7월 작고(作故)한 초대 보유자 고(故) 신한승 선생에 의하여 체계화되고 정립되어 1983년 6월 1일 무예로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76호로 지정된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전통무예(傳統武藝)이다. 어느 무예에서도 느낄 수 없는 택견의 독특한 몸놀림은 능청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쭐거리기도 하며, 혹은 발로 차기도 하고, 혹은 상대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기도 하고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는 자연적인 무예라 할 수 있다.
택견에 대한 역사적인 유래는 현재까지 문헌적으로 언제부터 실시해 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단재 신채호(申採護)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 재위 53―146)에 이르러 신소도(臣蘇塗) 대제전 행사에서 수박(手搏), 격검(擊劍), 사예(射藝), 기마(騎馬), 덕견이(택견) 등 각종 무예를 겨루어 그 중 승리하는 자를 선배라 칭하여 무예를 장려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밖에도 역사적 사료를 든다면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만물보(萬物普),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普通志), 매하선인(梅下仙人), 최영년(崔永年)의 해동죽지(海東竹枝), 안확(安廓)의 조선무사영웅전(朝鮮史武士英雄傳) 등의 문헌에서 택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되었던 택견은 고려 때에는 호국무예로서 무과시제의 정규과목이 될 정도로 국가 차원에서 장려했던 무예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문천무사상(崇文賤武思想)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쇠퇴하기에 이르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문화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택견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는데, 해방 이후 조선후기의 택견꾼이었던 송덕기에 의해 되살아나 다시 맥을 이었다. 그가 전한 택견은 낱기술을 혼자 익히거나 두 사람이 상대하여 메기고(攻擊) 받기(防禦)를 주로 연습한 후 바로 경기를 하는 「겨루기 위주」의 체계였는데 이 체계를 그에게 배운 신한승이 1980년대에 본때뵈기 12마당으로 체계화하여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 76호로 지정받게 되었고 현재 제3대 인간문화재인 정경화로 명맥이 이어오고 있다. 정경화는 스승인 신한승이 「본때뵈기 12마당」을 체계화하였듯이, 구전으로만 전해오고 체계화되지 못하였던 「별거리 8마당」을 본 문화원형사업을 통하여 체계화하여 택견의 원형을 찾아가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택견 관련 단체로는 인간문화재 정경화가 속한 택견원형보존회 이외에 한국전통택견협회, 결련택견협회, 대한택견협회 등이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수박 경기로 재물을 내기하는 자 곤장 1백이며 이를 금지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여산군에서 해마다 7월 15일에 가까운 전라, 충청 양도의 백성들이 한데 모여 수박으로 승부를 다투는 풍속이 전해온다.'고 되어 있다. 조선 정조때의 재물보에는 '변, 수박을 변이라하고 힘을 겨룸을 무라 하는데 지금의 탁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태종실록에는 '의흥부에서 군사를 뽑는데 수박희를 시켜 세 사람을 이긴 사람을 방패군으로 삼았다.' 세종실록에는 '향리나 관노들이 수박을 잘하는 자를 군사로 뽑아 쓴다는 말을 듣고 모여 서로 다투어 수박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태껸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명분상 태껸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몰아붙여 태껸판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장난삼아 하는 애기 태껸마저 순사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쫓아다니면서 말렸다고 한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그 마을의 어른이나 집안 어른을 위협하였으므로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간곡한 만류 때문에 결국에는 태껸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해방 뒤 1958년 이승만 대통령 탄신기념 경찰무도대회에서 송덕기는 경무대의 요청으로 태껸시연을 보이게 되었고 1964년에는 한국일보에서 송덕기를 취재하여 인간문화재로 소개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부터 송덕기에게서 태껸을 전수받고 있던 신한승은 태껸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을 결심을 하게 되어 낱 기술 20~30여수에 불과한 송덕기의 태껸을 분석, 체계화하여 80여종의 기본기로 정리하였다. 신한승의 집념이 끝내 결실을 맺어 태껸은 1983년 6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고 송덕기와 신한승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문헌에 나타난 택견의 이칭에는 택권, 태껸, 탁견(卓見), 수박(手搏, 手拍), 각희(脚戱), 권법(拳法), 시박(厮撲), 변(卞)이 있다. 택견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시대 이전은 물론 고려시대에는 우리말을 표기할만한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수박(手搏) 또는 수박희(手搏戱)를 동일한 용어라고 여겨 『고려사(高麗史)』에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표기 방법은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수박(手拍), 타권(打拳)으로 나타나며, 특히 우리말 중에 택견이라는 고유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문헌에서부터이다. 『재물보(才物譜)』, 『해동죽지(海東竹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택견과 유사한 ‘탁견’이라는 용어가 보인다.
이후 1920년에 간행된 『조선어사전』에는 오늘날의 택견으로 표기되었다가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 택견을 ‘태껸’이라고 표기하면서 표준말이 되었고,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1973년 택견 조사보고서에도 명칭을 택견, 태껸, 탁견(卓見)으로 쓰고 있어 어떤 명칭이 맞는지 확정할 수 없다. 또한 초대 택견 기능보유자였던 고 송덕기는 택견을 탁견이라 하고, 탁견을 하는 사람을 택견꾼이라 하였으며, 한자로는 탁견(卓見)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태껸, 택견의 명칭을 혼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오래 살아온 많은 사람들에 의해 택견이라 불림으로써 1983년 문화재 지정 당시 택견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지정 명칭은 택견이지만 태껸의 표기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택견을 수련해 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오늘날의 택견의 동작과 비교했을 때 고구려 고분벽화에 택견과 유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이미 행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무용총(舞踊塚) 벽화에는 두 남자가 마주서서 택견의 견주기 동작을 취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삼실총(三室塚) 벽화에는 택견에는 품밟기의 굼실거리는 걸음걸이로 활갯짓을 하는 동작이 활달한 필치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신라에서도 택견과 유사한 신체활동을 볼 수 있다. 경북 경주 석굴암 입구에 있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택견의 주먹질 막기와 견주기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분황사(芬皇寺) 층탑(層塔) 출입문 좌우에 부조된 인왕상(仁王像)의 택견 자세는 신라 택견의 면모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러나 백제에서 행한 택견 기록이나 유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백제의 옛 땅이었던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되는 작지(鵲旨)마을에서 조선시대에 인근 마을사람들이 모여 택견 경기를 해마다 행했다는 기록을 통해 백제 택견의 유풍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는 『고려사』에서 택견을 수박(手搏, 手拍)이나 수박희(手搏戱)라 기록하였고, 이의민(李義旼)과 두경승(杜景升)이 택견을 하는 구체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대중들의 경기로 널리 확대되어 무인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보급되었다.
택견은 발로 차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주로 손으로 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권법, 수박(희)과는 대조적이다. 곧, 우리나라에는 씨름 외에 맨몸으로 하는 전통 투기종목으로 주로 손으로 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권법, 수박(희)과 발로 차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택견으로 구분할 수 있다.
18세기 유숙(劉淑)의 ‘대쾌도(大快圖)’와 김준근(金俊根)의 ‘풍속도(風俗圖)’에는 씨름과 택견이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택견이 대중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조말 김민순(金敏淳)의 시조 구절에 ‘소년 십오 이십에 하던 일이 어제런 듯 소꿉질 뛰염질과 씨름 택견 유산하기’라는 대목이 있다. 따라서 택견과 권법은 더 전문화 된 두 가지 무예로 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발로 차는 특수하게 훈련된 기술이므로 이것을 택견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당시 민중들 사이에 택견이 상당히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택견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한 사료는 극히 드물다. 다만 얼마 전까지 전해 내려오는 민속자료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택견을 직접 수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더 전문적으로 분화된 도수무예(徒手武藝)가 널리 보급되어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택견 경기 방법에 대해서는, 고 송덕기의 증언에 의한 몇 가지 단편적인 자료를 소개하려고 한다. 민간에서 행하여진 택견은 일년 내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단오를 앞두고 보름이나 열흘 동안 진행되었다. 단옷날 밤 한 머리에서는 그네를 뛰고 다른 한 머리에서는 택견을 하는데, 동네와 동네가 패를 지어 시합하는 수가 많았다. 이때 으레 애기패부터 시작하여 맨 나중에 대장이 출전하여 승부를 결정하고, 다음에는 두 패가 모여서 서로 치하하며 음식을 먹고 놀았다.
택견 복장은 특별한 것이 없고 고의적삼에 솜버선을 신고 버선발로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때로는 가죽신에 징을 박은 갓신을 신는 경우도 있었다. 택견 기술은 기본적으로 20종류가 있고, 그 밖에 살법(殺法), 활법(活法) 같은 비법이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발로 각각 상대방의 다리를 걸어 뒤로 넘어뜨리거나 혹은 좌우로 쳐서 옆으로 넘어뜨리는 방법이다. 그리고 뛰어오르면서 역시 발로 각각 상대방의 상반신을 여러 모로 차서 넘어뜨리기도 하는데, 잘하는 경우에는 흔히 두 어깻죽지나 목덜미를 차서 넘어뜨린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 외발로 차기도 하고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에 따라 곁치기, 낚시걸이, 두발낭상, 명치기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하여 얼리거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손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막아서 밀어뜨릴 뿐, 절대로 손으로 잡거나 쳐서는 안 된다. 잘못하여 몸이 닿는 경우가 있어도 머리로 받거나 몸으로 떠밀어서는 안 되며 순전히 발로 차서 넘어뜨려야 한다.
택견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데는 발로 차는 것과 뛰어오르기를 기본으로 한다. 처음에는 짚단 같은 것을 세워 놓고 앞으로 나가면서 차고 뒤로 들어오면서 차는 연습을 하며, 다음에는 공중에 짚단 같은 것을 메달아 놓고 뛰어오르면서 점차 높은 것을 차도록 수련한다.
택견이란?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던 민족 고유의 맨손 무예이다. 원래는 지배 계급인 부사(副使)들의 상예(常藝)로 숭상되었으나, 고려 때는 궁중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성행하던 민속 경기였다.
조선시대에는 무과의 시재이자 군사훈련과목이기도 하였으나, 문존무비의 사조로 퇴색, 이후 민속 놀이화하여 대중문화로 전승되었다.
일제시대에 총독부의 탄압으로 금지되어 인멸 직전에 이르렀으나 택견꾼 송덕기(1893~1987)에 의해 그 맥이 이어지게 되었다.
1983년 6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고, 송덕기와 그의 제자 신한승(1928~1987)이 기능보유자로 인증되었다.
* 모든 결과물은 '대한택견협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시설
경기장은 사방 8미터의 매트(mat) 중앙에 지름 2.5미터의 원을 5센티미터 선으로 표시한다.
용구
선수의 복장은 흰색 한복 바지저고리를 착용한다. 등쪽에 0.5센티미터의 솜을 넣은 버선을 신고 필요에 따라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할 수 있다. 청백 양편을 표시하기 위해 폭 20센티미터의 백색, 청색 띠로 오른쪽 환도 뼈에 매듭을 매어 두 끝이 아래로 30센티미터 정도 내려오게 한다. 경우에 따라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재질로 만든 청백의 조끼를 착용할 수 있다.
경기 방법
태껸 경기는 두 선수가 두 발을 벌리고 섰다가 한쪽에서 가볍게 차주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발을 품(品)자로 밟는다는 약속 아래 서로 차서 쓰러뜨려 승부를 가른다. 이때 높이 차는 것도 허용되는데 얼굴을 강하게 맞을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나면 스스로 손을 땅에 짚어 패배를 자인한다. 찬 발을 잡는 것도 가능한데 이것은 상대방을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다. 경기자는 두발 가운데 한 발을 한 걸음 뒤 제3의 지점에 갖다 놓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발은 언제나 3개의 지점 가운데 하나에 놓여진다. 상대방은 차인 다리를 뒤로 물린 다음에는 발을 바꿔 찬다. 태껸 경기 규칙의 핵심은 한 발을 상대의 공격 가능 거리에 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경기자 사이의 거리를 한걸음 이내의 매우 가까운 상태로 유지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곧 견제 거리가 배제되어 서로가 상대방으로부터 항상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한쪽 발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송덕기는 '대접'이라 하였는데 상대방 앞에 발을 내 주었다가 공격을 피하거나 공격을 당하지 않을 목적으로 양발을 번갈아 불규칙적으로 내딛게 되므로 '품(品)밟기'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대한태껸협회에서는 이것을 토대로 현대 격투기 스포츠 종목에서 경기 규칙의 틀을 빌려 세세한 경기 규칙을 작성하였다. 태껸 경기의 형태를 단체전과 개인적으로 구분하고 이를 남자부, 여자부로 나누고 다시 애기태껸, 소년태껸, 어른태껸의 종별로 나눈다.
어른태껸의 경우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로 세분할 수 있다. 경기 시간은 3분 3회전, 중간 휴식 1분으로 한다. 단체전일 경우 3분 1회전으로 할 수 있다. 승패를 판정하는 데 있어서 손질, 발질로 상대의 무릎 이상의 부분을 바닥에 닿게 하면 이기며 발질로 목 이상의 부위를 공격하여 상대의 균형을 현저하게 깨뜨렸을 때도 이긴다. 두 발이 공중에 뜬 상태에서 발질하여 상대방을 두 걸음 이상 물러서게 하거나 균형을 현저하게 깨뜨렸을 때, 싸울 의사를 잃었거나 일방적으로 뒤로 물러나서 경기 진행이 곤란할 경우 패배를 선언할 수 있다.
택견의 계보
택견의 역사가 하나의 무예로써 옛 삼국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그 맥이 내려오고 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택견의 전승에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 있었던 시기는 한일합방에 의한 일제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은 한국 민속문화를 송두리째 말살시키고 택견꾼만 보면 잡아가 이때부터 민중 가운데 즐기었던 택견은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산과 들에서 몇몇 택견꾼들에 의해 간간히 행해져 오늘날까지 그 맥을 어렵게 이어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라 불행히도 구한말 시대 이전의 택견의 전승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구한말 이후 현재 택견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까지의 전승과정은 다음과 같다.
택견을 전승자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분은 종로 택견의 명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임호(林虎)’선생으로 그 분으로부터 계보(系譜)를 찾을 수가 있다. 임호(林虎)선생은 고종(高宗) 19년 곧 1882년 임오(壬午)생으로 당시 왕십리(往十里) 택견의 명인(名人) 신재영(辛在榮)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종로(鐘路) 택견의 명인이었다.
1987년 7월 23일 작고하신 초대 인간문화재 고(故) 송덕기(宋德基)옹이 바로 임호선생으로부터 전수 받았으며, 송덕기 옹의 재자이며 초대 인간문화재였던 신한승(辛漢承)선생께서는 어린시절 종조부이신 왕십리 택견의 명인 신재영으로부터 전수받아 택견의 정립을 위해 1970년대부터는 직접 송덕기옹으로부터 그가 가지고 있는 택견의 모든 기술을 전수 받았으며 그 밖에 구리개 택견의 명인 이었던 김홍식(金弘植)옹과 왕십리 살곶이다리의 명인이었던 이경천(李敬天) 옹으로부터 재차 택견을 전수 받은 신한승 선생은 택견 명인들의 계보를 두루 이은 옛 택견의 마지막 계승자(繼承者)라고 할 수 있다.
걷기
분류
문화/기타 > 택견 배우기 - 택견의 기본동작 > 혼자익히기 > 나아가며 익히기
걷기1
설명 : 택견의 걸음걸이는 굼실대거나 우쭐우쭐하면서 갈지 자 형태로 걷는 것이 독특하다. 원품자세에서의 한쪽 발을 약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양 무릎을 구부렸다가 몸 중심선을 기점으로 하여 들어 올렸던 발을 45° 대각선 방향으로 양 무릎을 펴면서 일보 앞으로 내딛는다. 무릎을 구부렸다 펴면서 왼발을 갈지(之)자방향으로 내디딘 자세이다.
택견은 우리나라 고유의 기본적인 부드러운 곡선의 몸짓을 이어온 민족무예로서 우리 민족을 대표할만한 무예이다. 날카롭고 세련되어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무리가 없고 모든 몸놀림이 질박하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곡선의 몸놀림으로서 자연스럽게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낭만적인 무술이라 할 수 있다.
일본 가라대의 동작은 딱딱하고 동작의 기본을 직선에 두고 맺고 끊음이 명확한 것에 비해 택견 동작의 특징은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동작의 기본을 굼실굼실 곡선에 두고 있다. 또한 택견은 중국권법처럼 동작이 길게 흐리지도 않고 순간적으로 우쭐거려 튕기는 탄력에 그 중점을 두고 있고 중국 권법에서 많이 쓰는 주먹은 없고 칼잽이라고 하여 손바닥이나 손아귀로 미는 것이 있으며 주로 발을 많이 사용하므로 발로하는 기술이라 해서 택견을 각희(脚戱), 비각술(飛脚術)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다양한 발기술을 가지고 있다.
특히 택견은 품밟기, 활갯짓, 발질의 독특한 몸놀림으로서 상대로 하여금 타격점을 흐트러 놓아 공격의 기세를 둔화시킬 수 있고 몸을 굼실댐으로서 충격을 완화시켜 자기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무예가 손기술이나 발기술 중 단편으로 구성돼있는데 비해 택견은 손기술과 발기술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서 공격과 방어술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몸놀림이 자유롭고 부드러워 성(性)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배울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택견의 구성요소
택견은 품밟기, 활갯짓, 발질의 모양새 형태로 짜여져 있으며 우리나라 전래(傳來)의 민간희(民間戱)가 대부분 그러하듯 택견도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아 상세하게 체계화되어 있지 않으나 무계획 속에서도 계획이 있듯이 대체적으로 혼자익히기(기본연습), 마주메기기(상대연습), 견주기(맞서기, 주연습)등 3단계의 순서로 되어있는 무예이다..
혼자익히기는 품밟기, 활갯짓, 발질을 혼자서 멋대로 익히는 것이며, 마주메기기는 택견의 기본적인 기술을 둘이 마주서서 반 약속 하에 마주차고 마주걸이를 하며 익히는 과정이며, 견주기는 택견의 모든 기술을 총 동원한 응용기술로서 걸이 50%, 차기 50%의 비율로 겨루는 것을 말한다.
택견은 크게 나누어 「서기택견」과 「결련택견」으로 나눌 수 있다. 「서기택견」이란 활수, 즉 방어위주의 택견으로서 위에서 기술한 3단계를 거쳐 일정한 경기규칙의 적용을 받아 맞서기 하는 것을 말하며, 「결련택견」이란 활수보다는 살수, 즉, 공격위주의 택견으로서 일정한 규칙의 적용을 받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겨루는 문자 그대로 쌈 택견을 말한다. 현재,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서기택견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련택견은 12가지만 기록이 되어 있다.
품밟기란 택견의 기본적인 발놀림으로서 택견의 몸짓을 익히는데 가장 중요한 보법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택견의 품밟기는 우리의 전형적인 가락 중에서도 굼실굼실하는 균형이 깨진 듯한 3박자로 되어 있다.
활갯짓에는 활갯짓 긁기, 제치기, 헤치기, 활갯짓치들기, 활갯짓돌리기의 5가지 형태로 되어있으며, 택견의 공격과 방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손놀림을 말한다.
공격의 모체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발질에는 걷어차기, 째차기, 후려차기, 내차기, 곧은발질, 는질러차기가 있으며, 모두 곡선적인 발질을 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특히 택견은 기본기만 잘 수련하면 몸의 어느 방향에서도 응용기를 구사할 수 있는 변화무궁한 운동이다.
택견에는 모든 동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본때뵈기가 있다. 그러나 원래 택견에서는 일정한 형(型)이라는 것은 없고 기술구조가 맞서기 위주로 되어 있으며, 형(型)과 비슷한 것이라면 ‘본때’라는 것이 있지만 틀에 박힌 실전의 표본이 되는 공격과 방어의 수가 아니고 품을 밟으며 활갯짓을 하면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수를 멋있게 보여 자기의 실력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본때는 마당을 돌며 한 마당째다, 두 마당째다 하며 열두 마당까지만 돌며 본때를 보인다.
일정한 공격과 방어의 모양새를 갖춘 태권도의 품새처럼 택견에서도 현대에 이르러 고(故) 신한승(辛漢承) 옹이 일정한 동작으로 정립한 본때뵈기는 ‘붓뵈기’로서 앞의거리 여덟마당과 뒤의거리 네 마당으로 짜여져 있으며 도합 열두 마당으로 되어있다. 또한 택견의 위계(位階) 표시로는 보통 다른 무술에서 사용되어지는 ‘급’이나 ‘단’대신 ‘째’나 ‘동’을 사용하고 있어 용어상으로도 우리의 전통적인 맛을 풍기고 있다.
택견의 기법
예로부터 각희, 비각술로 일컬어질 만큼, 발질을 위주로 한 투기 경기이다. 유연하면서도 탄력적인 몸짓의 선은 한국인의 전통 리듬을 타고 있다. 숙련자의 기력과 체력, 기술이 조화를 이루면 마치 춤과도 흡사하게 보여, 춤의 영역에서도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택견의 이와 같은 독특한 기법은 경기방식에 따라 발전된 것으로 보이는데, 고정된 세 지점을 밟으면(품밟기) 상대를 차서 쓰러뜨리도록 하는 택견의 경기 방식은 참으로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어 원
택견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어 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수박(手搏)’, 또는 ‘수박희(手搏戱)’라는 이름이 ≪고려사≫, ≪왕조실록≫등에 보이고, 1900년대 간행된 ≪청구영언 靑丘永言≫, ≪재물보≫ 등에서 ‘탁견’이란 명칭이 등장한다. ≪조선어 사전. 1921. 조선총독부≫에는 ‘택견’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1933년 맞춤법 통일안 발표 이후 출간된 국어사전에는 ‘택견’으로 적고 있다.
이외에도 ‘착견’ ≪오가젼집 1935. 리선유≫, ‘택견’ ≪조선무사 영웅전 1919. 안자산≫, ‘덕견’ ≪조선상고사 1935. 신채호≫, ‘탁견’,托肩戱 ≪해동죽지1921. 최영년≫등의 표기가 있으며, 송덕기는 ‘탁견’이라 하고 탁견하는 사람을 ‘택견꾼’이라 한다고 증언하였다.
문화재 지정 당시 ‘택견’으로 정하였으나 ‘ㅏ’ 발음이 다른 말과 합해질 때 ‘ㅐ’로 발음되는 서울, 경기 사투리의 특성에 의해 ‘탁견’이 ‘택견’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택견, 또는 탁견은 ‘차기’라는 뜻을 가진 한자 ‘척’의 중국 발음인 ‘티(ti)’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또한 순수 우리말과 달리 택견이 거센 소리(激音), 된소리 (硬音)라는 점에서, 한자어의 변음일 가능성이 많다.
≪코리언게임스≫에는 ‘택견하기’를 Kicking, 불어로 Savate로 번역하고, ‘물택견하기’ (MOUL-HTAIK-KYEN-HA-KI)도 ‘WaterKicking’이라고 영역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과 택견의 기법이 발질 위주라는 사실을 연관시켜 볼 때, 택견이란 말은 곧 ‘차기’라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사상과 철학
택견은 한민족 기층 문화의 하나로, 겨레의 오랜 역사 가운데 체득된 인식 체계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으나, ‘공리(公理)’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민족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민족 고유의 사상은 단군신화에 담겨있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민족의 사상이라기보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개념으로, 누구나 함께 더불어 이로워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택견 경기는 공격적이며 적극적이어서 매우 격렬한 반면에,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거나 옷을 움켜잡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상반되는 요소가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단군신화가 암시하고 있는 상생공영(相生共榮)의 사상과 통한다.
즉, 택견 경기는 평등의 원칙과 경쟁 원리를 가르쳐 주며, 소유 욕구의 절제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운다. 또한 집단의 공동체의식을 높이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지혜를 난겻기(다툼)을 통하여 얻게 한다. 순리를 좇아 인간이 본래 가진 신체능력을 효과적으로 발휘케 하는 것을 중심원리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택견은 경기를 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을 통해, 존재에 대한 사유를 하게 하고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원리를 깨닫게 하는, 하나의 철학이며 민족의 고상한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전승가치
택견은 귀중한 인류문화유산으로서 문화재적, 체육적 가치는 물론, 무술로서의 의의도 탁월하다. 또한 다른 종목의 체육, 무술, 레포츠 등의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제반 효과를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획득할 수 있는데, 엘리트의식에 뿌리를 둔 다른 동양무술과는 달리, 오랜 세월 동안 민중과 더불어 대중성을 지니고 발전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 동양 무술 종목들이 경쟁적으로 국제 스포츠화를 지향 하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경기로서의 오랜 역사는 택견이 곧바로 현대적, 국제적 스포츠가 될 수 있는 큰 장점이다.
특히 스포츠 경기로 발전한 한 대부분의 동양 무술들이 기존의 수행적 가치를 잃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데 반해, 이미 오래 전부터 경기와 무술의 중층구조로 발달해 온 택견은 이 두 가지의 개념을 상호 조화하고 통합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 외에도 다른 투기 종목과 차별되는 독특한 경기 방식, 그리고 보급에 용이한 합리적인 요소들을 생각해 볼 때, 앞으로도 우리의 전통 무술 택견은,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택견의 이치(理致)는 한마디로 원(圓), 방(方), 각(角)으로 표현 할 수 있다. 택견의 가장 기본적인 손놀림인 활갯짓은 선의 흐름과 방향이 원(圓)을 그리는 것이다. 원은 3차원적 공간인 구(球)의 2차원 평면의 단순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활갯짓하는 손끝의 선의 흐름은 원 (圓)의 방향을 여러 방향으로 바꾸어 줌으로서 구(球)를 이루는 다양한 손동작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택견에서 상대방과 서로 마주보고 설 때 서기(standing)는 서로 방(方)자 형태가 된다.
방(方)은 평면을 구획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의 모습이다. 즉 서기(standing,立)할 때에 서로 마주하여 팔자형(八字形)의 발모양을 취하게 되어 공간의 구성이 방자(方字)임을 나타나게 되고 서로가 움직일 수 있는 확보된 공간의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택견의 가장 기본적인 발놀림(step)인 품(品)밟기는 각(角)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각(角)은 여러 방향의 힘이나 무게에 대하여 가장 안정적인 구조물의 형태인 것이다.
즉 품밟기는 앞쪽 방향에 대하여 좌(左), 우(右)로 빗기는 삼각구조(三角構造)의 보법(步法)을 수련하는 것으로서 일명 ‘삼각보법(三角步法)’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이치를 가진 택견의 구성은 보법의 일종인 품밟기. 손놀림의 활갯짓. 발기술에 해당하는 발질 등의 모양새로 짜여있으며 우리나라 전래의 민간희 대부분이 그러하듯 택견도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아 상세하게 체계화 되어있지 않으나 무계획 속에서도 계획이 있듯이 대체적으로 삼 단계의 순서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 혼자익히기(基本練習), 둘째 : 마주메기기(相對練習), 셋째 : 견주기(맞서기)의 수련과정에 따라 수련하게 된다. 모든 만물은 음양의 조화에 의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리대로 생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예의 대명사는 강함에 있다. 그러나 그 강함을 조율하는 것은 약함에 달려있다. 강과 약이 잘 조화를 이룰 때 좋은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강과 약이란 힘의 세기와 힘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상호보안관계로 보아야한다. 즉 빠르고 느림(迅,緩)과 마음과 몸의 관계, 직선과 곡선 정(精)과 동(動), 지(知)와 능(能), 질(質)과 양(量), 성(性)과 상(像), 원형(原形)과 현형(現形) 등 상대성 조리적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택견의 근본 원리는 바로 유연성과 음악적 리듬에 있다고 하겠다. 이 유연성과 음악적인 리듬을 형성하는 것은 택견의 품밟기와 활갯짓의 독특한 몸놀림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다. 그럼 택견의 품밟기는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알아보자.
택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몸가짐으로서 원품, 좌품, 우품이 있다. 품이란 형식명사로써 동사아래 붙어 그 동작이나 됨됨이를 표하는 말로서 무예를 수련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몸가짐인 것이다. 무예에서의 품의 자세는 곧바로 공격과 방어를 하기 위한 기본체로서 몸의 중심과 안정성, 정확성이 유지되도록 하며 유사시 언제 어느 때고 민첩하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한다.
품밟기를 구성하고 있는 원품은 적의 공격에 빨리 대항할 수 있는 중심자세로서 바로 자세(양발 뒤꿈치를 붙이고 발끝을 좌우 45°로 벌려선 자세)에서 오른발을 어깨넓이로 자연스럽게 벌려선 자세이며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듯이 여유로움을 가져야한다.
품밟기를 형성하고 있는 두 번째 자세로는 좌품이다. 좌품은 닫힌 자세로서 적의 공격을 왼쪽으로 변화하여 서있는 방어 자세로서 원품에서 왼발을 들어 양발 사이로 중심선을 따라 반족장(半足長) 앞으로 내딛은 자세이며 양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몸의 중심을 뒷발에 2/3 앞발에 1/3정도로 서며 몸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 왼 반몸(左半身)으로 선다. 이때 뒷발의 발끝은 45°로 향하며 앞발의 발끝은 정면을 향하여야 한다. 이런 자세는 완전한 방어자세로서 몸의 방향을 비껴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충격의 완충작용을 할 수 있는 자세인 것이다.
다음은 우품 자세이다. 우품은 우(右)로닫힌 자세로서 적의공격을 오른쪽으로 변화하여 서있는 방어를 대비한 자세이며 원품에서 양발사이의 중심선을 따라 오른발을 반족장 앞으로 내디딘 자세로서 양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몸의 중심을 뒷발에 2/3, 앞발에 1/3정도로 하여 자세를 유지한다. 이 자세는 좌품과 같이 적의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좋은 자세이다. 이와 같이 품밟기는 안정된 정삼각형의 고정된 세 점의 꼭짓점을 발 장심으로 밟는다 하여 일명 삼각보법이라고도 하며 원품, 좌품, 우품의 기본자세를 연결하여 지속적으로 삼박자의 리듬에 맞추어 밟는 것을 품밟기라 한다. 이 떄 양 무릎을 약간 구부려 품을 밟아야 굼실거리는 택견의 독특한 율동적인 몸놀림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활갯짓은 품밟기와 더불어 택견의 아름다운 몸짓을 형성하는 손놀림으로서 활갯짓긁기, 활갯짓제치기, 활갯짓헤치기, 활갯짓쳐들기, 활갯짓돌리기의 다섯 가지 형태로 짜여져 있으며 발의 보조수단으로 사용되는 손놀림을 말한다. 공격의 모체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발질에는 걷어차기, 째차기, 후려차기, 내차기, 곧은발질, 는질러차기가 있으며 모두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튕기는 탄력을 이용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택견의 정신
분류
문화/기타 > 택견의 세계
택견의 정신은 고구려의 선배정신과 신라의 화랑정신과 고려의 호국정신과 조선의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을 실현하는 것이다.
국을 대표하는 무술인 우슈는 공격이나 방어보다는 그 기법이 형(型) 위주로 짜여져 있음을 알 수 있고, 일본의 가라테는 방어보다는 공격 일변도의 스포츠 형태로 되어 있는가 하면 서양의 무술들은 대개가 무술적인 요소보다는 스포츠 중심으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무술들이 정신적인 면보다는 기술적인 면에 치중했다면 민족무예인 택견은 정신적인 면을 보다 더 중시했다고 본다.
상무정신이 투철했던 고구려는 문무에 힘쓰는 훌륭한 선배 제도가 있었기에 국민들의 협동심과 애국심을 배양하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무술의 근간이 되었던 신라의 화랑도를 보더라도 원근산수에 탐험하여 자연과 벗하며 학문에 힘쓰고 무술을 연마하여 환난시(患難時)에는 나라를 구제하고 화평시(和平時)에는 신의(信義)로서 국가발전에 이바지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택견의 정신은 곧 고구려의 선배정신과 신라의 화랑도 정신과 그를 바탕으로 한 고려의 호국정신으로 이어져 조선의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참의 정신을 실현해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럼 이 ‘참’이란 무엇인가? 어찌 보면 그 뜻은 너무도 광범위 할지 모르지만 한마디로 전통문화의 계승을 의미한다 하겠다.
관련자료
택견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이전 초대 인간문화재였던 고 신항승옹이 스승이며 초대 인간문화재였던 송덕기 옹에게 택견의 원형복원과 발전에 대한 고민과 함께 교류한 서간문들,
우대마을인 사직골의 이름난 선비로서 그의 제자 송덕기 보다 11세 정도 나이가 더 많았다 한다. 고종 19년 1882년생으로 필운동에 살았으며 70여 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얼굴뿐만 아니라 학식을 겸비한 호남아였으며 힘이 장사여서 장안 팔장사에 뽑힌 인물이다. 특히 택견의 기술은 범과 같이 힘차고 날쌔어 담장을 뛰어 넘거나 상대의 어깨를 밟고 차는 두발쌍걸이 등 발질이 뛰어나 여러 사람과 겨루는 만인상대 겨루기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송 덕 기 (宋德基)
1896년(실제 1893년생) 본적지인 서울 종로구 내수동 25번지에서 1월19일 송태희(宋泰熙)씨의 7남7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동네 사직골 뒷산 잔디밭에서 13세부터 택견을 익혀오다가 18세 되던 해에는 그 당시 29세인 임호(林虎)라는 종로택견의 명인으로부터 택견을 자세히 배웠으며 17세 때 결혼을 한 후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서는 사병들에게 뜀틀과 철봉 등의 근대식 체조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불교축구선수단’에 선수로 발탁되어 선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택견 수련은 어려웠으며 택견인들끼리 모여 가끔씩 몰래 산이나 들에서 수련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20세에는 동네선수인 일류 택견꾼들과 같이 삼청동, 옥동, 유각골, 애오개 등 동네끼리 견주는 택견판에 나아가 싸우기도 하였다 한다. 22세 때부터는 황학정에서 국궁을 배우기 시작했다. 23세 때 군을 정식제대하고 26세 때까지 축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평양 축구단과의 경기에 참가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 1958년 3월26일 이승만 전 대통령 생신축하 경찰무도대회에서 (서울 중구 소공동 구유도 중앙도장)택견시범을 보였다 한다. 1983년 6월 1일 신한승과 함께 초대 예능 보유자가 되었으며 1977년 4월 9일 제1회 한국전통택견발표회에서는 신한승과 함께 택견 대걸이를 시범보이기도 했다.
학습체계 송덕기옹은 임호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때 연습의 체계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고 선생이 동작을 보여주면 따라서 하고 말로 일러 주는 대로 혼자서 연습을 하였다 한다. 나무밑둥치를 발장심을 좌우에서 번갈아 차거나 짚으로 사람형상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매달아 놓고 발질을 익혔다한다. 1970년도 신한승 선생께서 전수받을 때만 하더라도 체계가 없었으며 품 밟기를 하다말고 발질을 하는가 하면 또 걸이 기술을 하는 등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수를 순서 없이 가르쳤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령으로 기억력이 감퇴했음을 알 수 있다. 신한승 선생이 송덕기 옹을 찾아가 택견을 배우려고 하면 송덕기 옹께선 “신선생, 아무도 찾지 않는 택견을 배워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충주에서 서울까지 다니면서 고생하느냐.”고 만류하기도 하였다 한다.
왕십리 택견의 명인
박 털 백
왕십리 택견의 명인 박털백은 종로택견의 명인 임호보다는 37세 우인 1845년에 태어나 택견계를 주름잡던 명인이다. 신한승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박털백이라는 이름이 본명인지 별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기다란 수염이 산징적일 정도로 탐그런 수염을 갖고 있어 세인들로 하여금 털백이라는 별호가 붙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리에 밝았으며 의리를 지킬 줄 아는 호걸이었으며 학문도 높아 문무를 겸한 정의의 사나이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한다. 그는 왕십리 일대를 주름잡던 택견꾼으로서 특히 실전경험이 풍부하여 감히 그를 대적할만한 대상이 없을 정도로 손 기술이 능해 결련수(쌈수)를 잘 활용했다 한다.
신 한 승
근세 택견의 유일한 마지막 전승자이며 현대택견의 계승자인 신한승 선생은 호상(虎象)에 단구였지만 이곳 충주에서 별명이 호랑이였다. 그는 생김새부터가 부리부리한 두눈과 눈썹 마치 범의 형상 그대로였다. 선생은 힘이 장사였으며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동네 앞의 냇가에 도끼를 메고 나가 얼음을 깨고 그 속에 들어앉아 냉수욕을 하는가 하면 연세가 50이 넘으셨는데도 제자들과의 맞서기를 보일 때면 딴죽, 낚시걸이, 배대 뒤치기 등의 기술이 일품이었다. 신한승 옹은 1928년 서울 하왕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키는 작으나 다부진 체격으로 운동에 큰 소질을 보였다. 그는 유년시절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의 천석꾼 부자인 작은 할아버지 신재영의 집에서 처음 택견과 접하게 된다. 활쏘기나 씨름 등을 좋아했던 신재영의 사랑반엔 항상 당시의 무인들이 몇 명씩 묵으며 택견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한량들이어서 집안 어른들은 어린 신한승이 택견을 흉내 내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호기심 많은 그는 적삼에 짚신을 신고 팔을 휘저으며 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뒤로 거두며 발길질을 해대는 모습을 눈여겨보곤 혼자 연습했다.
해방 전 만주로 가서 1944년 만주 사평성립 산성진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방 뒤 다시 서울로 와서 1949년 지금의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 체육학과 1기생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 레슬링을 전공한 그는 1956년에 열렸던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국가 대표 선발전에 나가지만 최종 선발전에서 져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레슬링을 그만두고 아버지 신우선이 충주 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받아 1957년 충주로 함께 내려간 그는 한 때 충주 한림 중학교 체육교사를 했으나 1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 아시아 극장에서 기도 일을 맡기도 했다. 그가 아시아 극장 기도로 있을 때 단월동에 사는 이름난 씨름꾼이 건달 패거리들과 함께 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다가 신한승 선생과 싸움이 벌어졌을 때, 신한승 선생은 그들 중 두목쯤 되어 보이는 키가 9척이 넘는데다 힘이 장사인 명성이 자자했던 김모라는 씨름꾼의 멱살을 잡아 딴죽을 치니 순간 그 거한의 몸이 한길높이 솟아오르며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을 지켜보던 패거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다.
신한승은 1960년도부터 어린 시절 증조부 슬하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택견이야말로 유일한 한국의 전통무예라는 것을 깨닫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택견 명인들을 찾아 사라져가는 택견정립에 온 정열을 쏟게 된다. 그는 마침내 ‘택견’을 고스란히 몸속에 감추고 있던 송덕기 옹을 만났다.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전해 내려온 이 무술은 구한말 활동하던 지역의 이름을 따 종로택견, 왕십리택견, 구리개택견 등으로 불렀다. 또 대궐에서 가까운 곳의 택견을 윗(웃)대 택견, 먼쪽을 아랫대 택견이라 분류했다.
신한승 옹은 1970년 한 신문에 난 송덕기 기사를 보고 서울로 달려가 5년간 본격적으로 택견을 익혔다. 그는 1973년부터는 그동안 정립한 택견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또 74년에는 박털백의 전수자인 이경천과 박무경의 전수자인 김홍식을 찾아가 활갯짓활용법과 낚시걸이 등의 수를 익혔다.
배움과 가르침을 통해 택견의 원형을 어느 정도 복원했다고 생각한 신한승 옹은 1977년 4월 서울 YMCA 체육관에서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를 시작으로 고려대 강당, 충주 탄금대 야외음악당 등에서 발표회를 잇달아 열어 민속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통무술의 복원에 대한 집념은 현 택견 인간문화재 정경화와 같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1981년 11월에는 그동안 정리한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 받는 것이 택견의 원형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고 문화재 관리국에 정식으로 택견무형문화재 지정조사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1982년 7월 문화재 위원 임동권 박사를 충주로 보내 현지 조사케 하였으며 1982년 7월 문화재위원 임동권 박사는 문화재 심의위원회에 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146호를 작성 제출하여 마침내 1983년 6월1일 전통무술로는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된다.
학습체계 신한승 옹은 김홍식 옹으로부터 택견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라는 조언을 받아서 체계를 잡아갔다. 기본동작(서서 익히기, 나아가며 익히기)을 정하고 그 기술을 반복 연습하여 익히게 한 뒤 마주서서 약속하여 공방을 하는 막음질, 마주걸이, 마주차기, 얼러메기기를 익히게 한다. 그리고 본때뵈기를 정형화하여 혼자 종합적으로 연습케 했다. 견주기는 차기기술이 없는 대걸이와 모든 차기와 걸이 기술을 구사하는 맞서기가 있으며 결련수(쌈수)를 복원하여 무예의 면모를 보였다. 본때뵈기는 택견의 낱 기술을 연결하여 공방에 관계없이 택견의 거침없는 아름다운 몸짓을 나타내는 예술적 성격을 지닌 옛것을 종합하여 정형화시킨 수련방법 중 하나이다.
구리개 택견의 명인
박 무 경
구리개 택견의 명인 박무경은 고종19년 종로 택견의 명인 임호와 같은 연배로서 구리개에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한다. 구리팔개 또는 박팔개라고도 불리웠으며 거한에다 천하장사라 씨름판이나 택견판에서 그와 싸우기를 꺼려 했다하니 그의 택견 솜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가는 바라 하겠다. 그는 발차기의 명수였으며 그 거구가 한 번 땅을 짚고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하면 바람이 일 정도였다 한다. 조선 포병대 하사관 시절 박격포를 메고 광화문의 해태상에 뛰어올라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김 홍 식 (金弘植)
김홍식은 세검정에서 태어났고 여러 택견꾼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는 대부분이 스승의 땀 냄새를 맡아가며 스승의 기술뿐 아니라 정신마저 배우는 집지사사의 기술전수라기 보다는 택견하는 모습을 보고 그저 흉내를 내고 있으면 길 가던 택견꾼들이 보고 한두 가지씩 기술을 가르쳐주어 배우곤 했다 한다. 나중에 유도를 배워 해방 직후 한국인으로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단자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에서 경호를 맡기도 하였으며 이승만 박사 경호시절 만주에서 권총 든 일경을 순식간에 잡아 낚아채어 강물로 던져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해방 후 경기도 보사국장과 전라남도 내무국장을 지냈는가 하면 유도회, 육상연맹, 축구협회 등의 체육단체의 임원이 되어 체육계를 무대로 활동하기도 했다한다. 그의 택견 동작은 매우 커서 거침이 없었으며 오늘날 활갯짓의 기본이 되는 활갯짓 돌리기는 김홍식 옹이 즐겨 쓰던 활갯짓이다. 하지만 노익장을 자랑하던 그도 중풍으로 쓰러져 1984년 8월 20일 9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의의
택견은 경기이면서 놀이 성격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몸을 보호하는 호신술(護身術)이 되고 공격을 하면 무예(武藝)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택견의 몸짓은 우리 조상의 생활풍속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택견은 민족적이요 집단적인 놀이로서 민중의 생활과 연관되어 있으며, 상무정신과 진취적 기상을 함양하는 오락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택견의 전승은 민중들의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고, 나아가 민중의 융화를 진작시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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