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2일 토요일

우리나라속담.

속담의 발생과정과 그 의미 

속담은 만들어 낸 이가 누구이며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그 뿌리를 찾아들어가다 보면 처음에 누군가가 만들어낸 말이 점차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그 사용이 확대되고 거기에 사상과 감정, 경험, 철학이 담기면서 속담으로 완성된 것일 터이다. 
그리하여 속담에는 민족의 특성과 생활양식, 정신이 짙게 배게 되는 것이다. 

속담은 민중 속에서 싹트고 자라왔기 때문에 서민적이면서도 토속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시대의 변천과 맞물리면서 자연과 인간사회의 희로애락, 생활 환경 등의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 점점 그 수가 늘어왔으며,앞으로도 또한 늘어나게 될 것이다. 

물론 속담은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화되어 생활양식이 바뀌게 됨에 따라 그 말의 개념도 바뀌고 그 뜻이 달라지기도 한다. 
속담은 한 민족의 앞서간 사람들의 삶에서 얻어진 촌철살인의 지혜로서, 그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존속해 나가는 것이다. 


속담의 내용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속담에는 그 민족의 특성이나, 정신, 생활양식 등이 반영되어 있어 한 민족의 역사나 종교, 풍속, 사회구조 등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상놈이 구레나룻이 다 무엇이냐?’ 하는 우리나라의 속담은 조선시대 계급사회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도 우리 서민들은 다음과 같은 속담들로 양반들의 허세를 풍자하였다. 

양반은 죽어도 짚불은 안 쪼인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 
닷새를 굶어도 풍잠 멋으로 굶는다. 
나룻이 석자라도 먹어야 샌님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가난한 집 신주 굶듯 한다.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크다
가는 말에 채찍질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
가는 세월 오는 백발
가는 손님은 뒤꼭지가 예쁘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가랑잎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한다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한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가마솥 밑이 노구솥 밑을 검다 한다.
노구솥: 놋쇠나 구리쇠로 만든 솥
가마가 검기로 밥도 검을까?
가마가 솥더러 검정아 한다.
가마 타고 시집가기는 다 틀렸다
가마 타고 시집가기는 코집이 앵글 어졌다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
가을볕에는 딸을 쬐고 봄볕에는 며느리를 쬐인다.
가을비는 장인의 나룻 밑에서도 피한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
가장 현명한 사람이란 자기가 현명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
간다 간다 하면서 아이 셋 낳고 간다.
간에 붙고 쓸개에 붙는다.
간장이 시고 소금이 곰팡 난다
갈치가 갈치 꼬리 문다
감기 고뿔도 남 안 준다.
감나무 밑에 누워 연시 입 안에 떨어지기 바란다.
감나무 밑에 누워도 삿갓 미사리를 대어라
미사리: 머리에 걸려 얹도록 된 둥근 테두리
감나무 밑에 누워서 홍시 떨어지기를 바란다.
감사 덕분에 비장 나리 호사한다.
감투가 커도 귀가 짐작한다.
갓 쓰고 박치기해도 제 멋이다
강물도 쓰면 준다.
강물이 돌을 굴리지는 못한다.
강아지 메주 멍석 맡긴 것 같다
강한 말을 매 놓은 기둥이 상한다.
같은 값에 분홍치마
같은 값이면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랬다




가는 말에 채찍질
빨리 달리는 말도 더 빨리 가게 하기 위하여 채찍질을 하라함이니, 부지런히 하느라고 하는데도 자꾸 더 빨리 하라고 한다는 뜻.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
이쪽에서 방망이로 치면 저쪽에서는 그보다 몇 배나 큰 홍두깨로 친다는 뜻이니, 남을 조금 건드렸다가 크게 당한다는 말.

가는 세월, 오는 백발
세월이 가면 나이를 먹어 늙게 된다는 말.

가을 다람쥐 같다
욕심 많은 사람을 나무랄 때 쓰는 말.

가을 상추는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
가을 상추는 특별히 맛이 좋다는 말.

모난 들이 정 맞는다.
사람의 성격이 둥글지 못하고 모가 있는 사람은 남에게 미움을 산다는 뜻.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바늘은 작고 가늘어 모래밭에 묻혀 있다면 찾기가 힘든것.
도무지 이루기 힘든 경우를 두고 하는 말.

시주는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마라.
남에게 도움은 못줄 망정 악행은 하지말라는 뜻.

시집 갈 날 등창 난다.
하필 시집가는 날 등창이 난다니, 그런 낭패가 어디있나 ? 공교롭게 가장 중요한 날 탈이 생겼다는 뜻.
◎자식도 품안에 들 때 내 자식이지.
자식이 어릴때는 부모 말을 잘 듣지만, 크면 지 맘대로 하고 말을 안 듣는다는 뜻.

작게 먹고 가늘게 싼다.
일에 욕심내지 않고 힘에 알맞게 하는 것이 마음 편하고 좋다는 뜻.
천천히 여유있게 나아가야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로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다는 말.

치마 폭이 열 두 폭.
다른 사람 일에 간섭을 잘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
친구는 오래 사귄 친구일수록 좋고 그 우정이 더욱 두터워진다는 말.

재는 넘을수록 높고, 내는 건널수록 깊다.
일이 점점 험하고 힘들게 되어 간다는 뜻.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뙤놈이 번다.
서커스를 하면 곰이 재주를 하는데 돈은 중국사람이 가진다는 뜻에서 엉뚱한 사람이 이익을 본다는 뜻.

헌 짚신도 짝이 있다.
사람이 아무리 못났어도 결혼하여 살 수 있다는 말.

형만한 아우 없다.
아우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형만은 못하다는 뜻.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
제 힘에 부친 일을 억지로 남을 따라 하는 사람을 보고 이르는 말. 

황소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다.
미련하고 느린 사람도 어쩌다 한몫 할 때가 있다는 말.


* C'est la goutte d'eau qui fait deborer le vase.티끌 모아 태산.
▶방울의 물이 꽃병을 넘치게 한다는 직역으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꽃병이 대중화되지 않았고 자연적으로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는 자연환경에 빗대어 태산이라는 표현을 쓴 반면에 프랑스 에서는 꽃병을 즐겨 사용했다는 생활습관을 엿볼 수 있다.



* C'est la moutarde apres diner.사후 약방문.
▶직역을 하면 "저녁식사후에 양념장"즉 정작 필요할 제때를 놓치고 늦게 하는 것을 일컫는말. 
우리나라에는 moutarde가 없을뿐더러 프랑스 속담에서는 식습관에 빗대어 만든 것이 다르다. (moutarde:겨자씨로 만든 양념)

2018년 12월 8일 토요일

논개사당, 論介祠堂 .

논개사당,  .

논개 사당 / 의암사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위치하고 있는 장수삼절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의암 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 정식 명칭은 의암사이다.
이칭별칭의암사()
유형유적
시대조선
성격사당
건립시기·연도1954년, 1974년 이건
규모(면적)2만여 평
소재지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한누리로 393
문화재 지정번호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46호
문화재 지정일1981년 04월 11일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있는 사묘·제단.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위치하고 있는 장수삼절()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의암()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 
1981년 4월 1일 전라북도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명칭은 의암사()이다. 
의암사()라고 도한다.


장수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장수읍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논개사당(의암사)

논개의 본관은 신안으로, 현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천부락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경회() 장군이 경상병사로 진주성에 들어갔다가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이곳은 진주 의기 논개로 알려져 있는 의암 주논개(1574~1593)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선조 7년(1574) 9월 9일 현 전라북도 장수군 임내면 주촌부락에서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논개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숙부 주달무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숙부가 임내면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보내자 그곳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장수현감 최경회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무죄방면은 되었으나 의지할 곳이 없는 논개는 최 현감 부인의 주선으로 최 현감의 후실로 들어앉게 되었다. 
그후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 현감은 의병을 모집해서 왜군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워 1593년 4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되어 논개와 함께 진주에 부임하였다. 

동년 6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 절도사는 김천일, 고종후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이에 논개는 국치의 설욕과 최 절도사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엿보던 중, 동년 7월 7일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군의 승전 잔치에 기생을 가장하고 참석하여 주흥에 도취된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남강가의 바위로 유인해서 그의 허리를 껴안고 함께 물 속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당시 논개의 나이는 방년 19세에 불과하였다. 
그후 조정에서도 논개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여 의암이라는 사호를 내렸고 진주 촉석루 곁에 논개사당을 지어 그 넋을 위로 추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논개의 생장지인 이곳 장수에 논개의 사당을 세우고 의암사라 명명하였다.

의암사(논개사당)는 1954년장수군내 각계 각층에서 성금을 모아 남산공원의 아래봉우리 꼭대기에 창건하였고, 논개 영정은 이당()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당시의 부통령 함태영()이 친필로 휘호를 내려 현판을 각자()하여 걸었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 추진된 성역화사업은 1973년에 문화공보부 승인을 얻어 정화사업에 착수하여 장수읍 두산리에 2만여평에 이르는 부지를 조성하여 1974년 사우()를 이건()하여 삼문()과 담장을 설치하고 주위 조경공사를 시행하고 관리사 및 광장을 조성하였으며, 주논개 수명비()도 경내에 이건하였다.

의암사가 창건된 뒤에 주논개가 순절한 7월 7일을 택하여 추모대제()을 모셔오던 중 1968년부터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어 계속하고 있다. 
논개 사당 / 의암사
논개 사당 / 의암사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위치하고 있는 장수삼절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의암 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 정식 명칭은 의암사이다.


장수삼절()로 알려진 논개는 조선 중기의 의기()로, 진주병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끝까지 저항하던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기생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논개는 성의 함락과 군관민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바위 위로 유혹해 껴안은 채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를 훗날 의암이라 하였다. 
지금 사당을 의암사라 부르는 연유이다. 
조선 헌종 12년(1846)에 현감으로 장수에 온 정주석()은 이 곳이 논개가 자란 고장임을 기념하여 논개생향비()를 세웠는데, 사당 건립 당시 발굴되어 경내에 옮겨져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56년에 호남절의록()·호남삼강록()·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사실()에 근거하여 장수군내 각계 인사가 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이당(김은호()가 여러가지 고서와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그린 영정을 봉안하고, 의암사()라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의 친필 휘호로 현판을 각자하여 걸었다. 
그 후 1960년대 후반부터 의암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전체 2만 여 평에 이르는 대지를 조성하여 사우()를 이건()하였다.
구조는 삼문 안의 안마당과 중문으로 막은 사당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 층을 이룬다.

삼문 좌우로 사당채 뒤까지 담을 두르고, 중문 좌우에서 역시 담을 둘러 영역을 확연히 구분하였다. 
조성은 안마당 영역을 지면보다 한층 높게 마련하였으며, 사당 영역은 안마당에서 다시 층계를 오른 후 중문을 통해 들어가게 하였다. 
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의암사가 창건된 후에 장수군은 매년 9월 9일을 택하여 논개제전을 열다가 1968년부터는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를 지내고 있다.
논개사당(의암사) 관련 이미지 8


이용안내

이용시간

09:00∼18:00 (동절기 17시까지)

주차시설

있음

유모차대여여부

불가

애완동물가능여부

불가

문의및안내

063-352-2550

관련 홈페이지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상세정보

입 장 료

무료

이용가능시설

기념관, 비각 등

화장실

있음

주차요금

무료

한국어 안내서비스

가능


출처원문보기
대한민국구석구석 원문보기

논개사당(의암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논개사당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돌베개)
논개사당 [論介祠堂] (두산백과)
논개사당 [論介祠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11월 16일 금요일

논개 , 論介.

논개 , 論介.

분야역사/전통 시대,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인물/인물(일반)
지역경상남도 진주시
시대조선/조선 전기
출처디지털진주문화대전-논개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순절한 의기().


본관은 신안(). 아버지는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허씨이다.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혹은 충청병사 황진()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오랑캐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며 / 숱한 세월 흘러, / 붉은 누각 우뚝이 / 산과 언덕을 베고 있네. / 그 옛날 꽃다운 물위론 / 가인의 춤 추는 모습 비추었고, / 단청 매긴 기둥엔 / 길이 장사가 남아 있네. / 전장터로 봄바람 불어 / 초목을 휘어감고 / 황성에 밤비 내려 / 안개 낀 물살에 부딪히네. / 지금도 영롱한 영혼이 / 남아 있는 듯 / 삼경에 촛불 밝히고 / 강신제를 올리네.- 정약용, [촉석루에서 회고]



논개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위는 1779년(정조 3년) 진주 남강 변에 논개(論介, ? ~ 1593)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의기사(義妓祠)를 보수하면서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정약용이 쓴 추모 시이다.

흔히 논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끌어안고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하여 전공을 세운 의로운 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죽음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 직후 바로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출신과 삶, 그녀가 죽인 왜장의 이름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논개의 순국 사실은 임난 직후에는 민간에서만 전해지다가 1620년경에 가서야 마침내 문헌으로 기록되었다. 
그녀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문헌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이다. 
유몽인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미처 그 의로운 죽음이 기록되지 못하고 신분상의 문제로 나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 논개에게 측은함을 느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자신의 문집에 실었다.
논개(論介)는 진주 관기(官妓)였다.

계사년(癸巳年)에 김천일(金千溢)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은 모두 죽고 말았다.

임진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火)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충(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유몽인은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논개의 공이 안타까워 이런 글을 썼지만 이로 인해 논개는 오랫동안 그녀의 삶 자체가 묻힌 채 진주의 관기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전반까지 논개는 나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진주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제사가 해마다 남강 변에서 일반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왜장을 안고 떨어졌던 남강의 바위에 의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이를 보면 당시 진주성 백성들은 진주성 함락 후, 완전히 절망상태에 빠졌던 상황에서 여인의 몸으로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그녀의 복수에 통쾌함을 느끼고 승리의 희망 속에서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희망을 가지고 결국 왜적을 내몰 수 있는 기운을 준 논개에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논개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18세기 초 경종대에 가서야 가까스로 이루어졌다. 
진주성민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비변사에 건의하여 논개를 기리고 그 자손들에게 포상을 하려 한 것이다. 
이미 1세기가 넘은 상황에서 논개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띄워 수소문했지만,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 나라에서는 의암사적비를 세워 그녀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녀를 의로운 기생이라 하여 의기(義妓)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739년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논개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나라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졌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약용이 논개를 기리는 시를 쓴 것은 정조 초의 일이었다.
근 2세기 간 기생으로 알려졌던 논개는 그간 그 자취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19세기 들어서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논개가 2차 진주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의 첩이었다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최경회의 삶을 기리는 [일휴당실기]에 논개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부실이란 정실 부인이 아닌 첩을 뜻한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최경회의 첩이었던 여인을 조사하게 되었고 이는 [호남절의록], [호남상강], [동감강목] 등에서 고증과 민간에 떠도는 구전까지 포함하여 기록하면서 대략 논개라는 인물의 가계와 일생이 재구성되게 되었다.

최경회의 첩을 논개라고 상정하고 보면 그녀의 삶과 가계는 대개 이러하였다.
논개의 성은 주씨이며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주달문,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나름 양반가의 딸이었던 것이다. 
논개가 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한다.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부자이던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났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돈을 낸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들의 재판을 맡은 것이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였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죄방면했으며 모녀가 살 길이 막연하자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며 살게 하였다.
최경회는 해주최씨로 전라도 능주 사람이었다. 
양응정,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67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장성한 논개는 최경회의 첩으로 들어갔고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뒷바라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쌓아 경상도우병사가 된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전황에서 진주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성이었다. 
진주는 왜병들이 많이 주둔해있던 경상도의 주요성일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넘어가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주성은 일본입장에서는 꼭 차지하고 싶은 성이었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내어주면 안 되는 성이었다. 
1592년 10월 왜군의 1차 진주성 공격은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을 중심으로 관군과 민간인, 의병들까지 합세해 이를 물리쳤다. 
이를 진주대첩이라고 부른다.
조선에 들어와 매 전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왜군으로서는 진주에서의 패배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기 위해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1593년 7월 조선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일본군을 동원한 10만 병력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이때 조선의 중앙정부는 명나라 군이 진주성을 지키는 원병을 보내주지 않기로 하자, 진주를 포기하라고 명령하였다. 
1차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의병들과 민간인들은 다시 한번 똘똘 뭉쳐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전투는 7일간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진주성은 7월 29일 왜군의 거대한 병력이 휩쓸고 들어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던 날 논개의 남자였던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보복이라도 하듯이 성안의 민간인과 살아 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왜장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남강 변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들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중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내어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를 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였다.
논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후, 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거기에다가 왜군도 7일간의 전투 동안 진주성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에 큰 손실을보아 진주에 계속 점령할 힘이 모자랐다. 
그들은 어렵게 진주성을 차지했지만 병력손실이 커,주변 지역 약탈에 그쳤을 뿐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지도 못했고, 조선군이 거점을 부산 방향으로 옮겨가자 이를 막아내느라 서둘러 진주에서 떠났다.

그렇다면 논개가 물에 함께 빠져 죽은 왜장은 누구일까?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 장수가 게야무라 로쿠스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농민 출신으로 카토 키요마사에게 발탁되어 사무라이가 된 자로서 사무라이가 된 후 이름을 기다 마고베(木田孫兵衛)로 바꾸었다. 
그는 카토 키요마사의 중요한 부장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 때 철포 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를 소재로 한 가부키가 있을 정도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인데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함경도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62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대한 기록이 가토 키유마사의 함경도 진출 후에도 계속 나오다가 2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기록 후, 그의 이름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점, 
일본에 있는 그의 무덤이 가부키의 소재가 된 이후 조성되었다는 점, 
그의 죽음에 대한 한 이야기로 조선에서 한 여성의 복수로 죽었다는 것이 있어 논개가 함께 죽은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 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들어와 일본의 어느 건축가가 자신의 땅에서 발견한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관한 비석에 근거하여 논개의 영정을 모셔가 함께 전시하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 하나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 번듯한 가문의 아녀자가 아니고 기생이라고 전해지면서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고 외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의 일반 백성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자발적으로 기리고 있었다. 
논개가 기생이었든 아니었든, 그녀가 죽인 왜장이 왜군의 병력에 손실을 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정자의 역사기록이 그녀를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 살아남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논개의 죽음이 전쟁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일반 백성들에게 전쟁의 극복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약하고 미천한 위치에 있던 한 여인의 결연한 행동으로, 임진왜란 시기 백성들은 위안과 위로 속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6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 1562~1611] , 고니시 유키나가[西, ?~1600]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 인륜편의 ‘효열’ 대목의 기록에 따르면,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과 백성이 모조리 죽자, 논개는 구국의 일념으로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였다. 
논개는 곱게 단장하고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베푸는 자리에 나아가 술에 만취해 접근하는 왜장을 남강으로 유인한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 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이때부터 의기 논개가 강물에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방지마을에 있다는 묘가 논개의 실묘라고 구전으로 전해지지만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진주목 관기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 물에 빠져 순국한 사실은 성민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로 추정된다. 
당시 관기로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신분이지만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논개의 충절어린 죽음에 감동한 유몽인[, 1559~1623]이 『어우야담』에 논개를 진주의 관기라고 채록한 것이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진주 사민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해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이다.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리고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가 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같은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했고,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을 내려주고 사당()을 건립해 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의 제시를 요구하기에 이르러 이에 최진한은 관민 합동으로 의암사적비()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에 대한 특전을 허락 받았다. 

이는 진주 성민들의 숙원이었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논개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계기가 됐으며 논개를 공식적으로 ‘의기()’라 지칭하는 계기가 됐다.

논개의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년 뒤에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됐다. 

1740년(영조 16)경에 경사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의기사()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치러짐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기녀가 모여 가무를 곁들여 3일 간 치제하는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가 마련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에 전해지고 있었는데 지난 2000년부터 의암별제가 부활돼 진주성을 중심으로 3일 간 열리고 있다.


논개의 사실을 최초로 기록한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임진왜란 후 쑥대밭이 된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돌아본 뒤 저술된 한국 최초의 야담집이다. 
논개가 순국하던 1593년 세자시강원()에서 광해군의 교육을 맡고 있다가 그해 가을 광해군을 모시고 수원, 전주, 진주 등 현장으로 다니며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참혹상을 기록하고 그 자료를 수집하게 된다. 

유몽인은 삼도순안어사(使)로 왜적이 휩쓸고 간 곳곳을 살피고 사실을 기록하여 세자에게 전했다. 
이처럼 유몽인의 기록은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적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논개에 대한 유몽인의 기록 또한 이런 점에서 사실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일본군이 촉석루에서 벌이는 잔치에 참석해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성은 주씨()이고, 본관은 신안(:중국)이다. 전북 장수()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어우야담()》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어 벽류()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불렀으며,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이 장수군 장수면()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을 열고 있다.



문헌

  • 정덕연, 정희여, 윤태, 권달영, 『충렬실록(忠烈實錄)』(1831)
  • 『진주목읍지(晉州牧邑誌)』(1831)
  • 『내 고향 전통』(진주문화원, 1983)
  • 성계옥, 『진주의암별제지』(진주민속예술보존회, 198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 이명길, 『진주성 문기』(진주문화원, 1995)
  • 황대영, 『진주의 문화유산』(진주문화원, 1996)
  • 유승우, 「진주성의 의기논개고」(『한국사학논총』, 1987)
논개 [論介] -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로운 여인 (인물한국사)
 논개 [論介] (두산백과)
  •  논개 [論介]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