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사당, 論介祠堂 .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있는 사묘·제단.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위치하고 있는 장수삼절(長水三節)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의암(義岩)주논개(朱論介)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
1981년 4월 1일 전라북도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명칭은 의암사(義巖祠)이다.
의암사(義岩祀)라고 도한다.
장수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장수읍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장수읍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논개의 본관은 신안으로, 현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천부락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장군이 경상병사로 진주성에 들어갔다가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이곳은 진주 의기 논개로 알려져 있는 의암 주논개(1574~1593)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선조 7년(1574) 9월 9일 현 전라북도 장수군 임내면 주촌부락에서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논개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숙부 주달무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숙부가 임내면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보내자 그곳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장수현감 최경회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무죄방면은 되었으나 의지할 곳이 없는 논개는 최 현감 부인의 주선으로 최 현감의 후실로 들어앉게 되었다.
그후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 현감은 의병을 모집해서 왜군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워 1593년 4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되어 논개와 함께 진주에 부임하였다.
동년 6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 절도사는 김천일, 고종후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이에 논개는 국치의 설욕과 최 절도사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엿보던 중, 동년 7월 7일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군의 승전 잔치에 기생을 가장하고 참석하여 주흥에 도취된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남강가의 바위로 유인해서 그의 허리를 껴안고 함께 물 속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당시 논개의 나이는 방년 19세에 불과하였다.
그후 조정에서도 논개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여 의암이라는 사호를 내렸고 진주 촉석루 곁에 논개사당을 지어 그 넋을 위로 추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논개의 생장지인 이곳 장수에 논개의 사당을 세우고 의암사라 명명하였다.
논개는 선조 7년(1574) 9월 9일 현 전라북도 장수군 임내면 주촌부락에서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논개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숙부 주달무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숙부가 임내면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보내자 그곳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장수현감 최경회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무죄방면은 되었으나 의지할 곳이 없는 논개는 최 현감 부인의 주선으로 최 현감의 후실로 들어앉게 되었다.
그후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 현감은 의병을 모집해서 왜군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워 1593년 4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되어 논개와 함께 진주에 부임하였다.
동년 6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 절도사는 김천일, 고종후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이에 논개는 국치의 설욕과 최 절도사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엿보던 중, 동년 7월 7일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군의 승전 잔치에 기생을 가장하고 참석하여 주흥에 도취된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남강가의 바위로 유인해서 그의 허리를 껴안고 함께 물 속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당시 논개의 나이는 방년 19세에 불과하였다.
그후 조정에서도 논개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여 의암이라는 사호를 내렸고 진주 촉석루 곁에 논개사당을 지어 그 넋을 위로 추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논개의 생장지인 이곳 장수에 논개의 사당을 세우고 의암사라 명명하였다.
의암사(논개사당)는 1954년장수군내 각계 각층에서 성금을 모아 남산공원의 아래봉우리 꼭대기에 창건하였고, 논개 영정은 이당(以堂)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렸다.
당시의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이 친필로 휘호를 내려 현판을 각자(刻字)하여 걸었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 추진된 성역화사업은 1973년에 문화공보부 승인을 얻어 정화사업에 착수하여 장수읍 두산리에 2만여평에 이르는 부지를 조성하여 1974년 사우(祠宇)를 이건(移建)하여 삼문(三門)과 담장을 설치하고 주위 조경공사를 시행하고 관리사 및 광장을 조성하였으며, 주논개 수명비(竪銘碑)도 경내에 이건하였다.
의암사가 창건된 뒤에 주논개가 순절한 7월 7일을 택하여 추모대제(追慕大祭)을 모셔오던 중 1968년부터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大祭)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어 계속하고 있다.
논개 사당 / 의암사
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 정식 명칭은 의암사이다.
장수삼절(長水三節)로 알려진 논개는 조선 중기의 의기(義妓)로, 진주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위치하고 있는 장수삼절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의암 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 정식 명칭은 의암사이다.
장수삼절(長水三節)로 알려진 논개는 조선 중기의 의기(義妓)로, 진주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끝까지 저항하던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기생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논개는 성의 함락과 군관민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바위 위로 유혹해 껴안은 채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를 훗날 의암이라 하였다.
지금 사당을 의암사라 부르는 연유이다.
조선 헌종 12년(1846)에 현감으로 장수에 온 정주석(鄭胄錫)은 이 곳이 논개가 자란 고장임을 기념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는데, 사당 건립 당시 발굴되어 경내에 옮겨져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56년에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삼강록(湖南三岡錄)·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사실(史實)에 근거하여 장수군내 각계 인사가 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여러가지 고서와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그린 영정을 봉안하고, 의암사(義岩祠)라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의 친필 휘호로 현판을 각자하여 걸었다.
그 후 1960년대 후반부터 의암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전체 2만 여 평에 이르는 대지를 조성하여 사우(祠宇)를 이건(移建)하였다.
구조는 삼문 안의 안마당과 중문으로 막은 사당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 층을 이룬다.
삼문 좌우로 사당채 뒤까지 담을 두르고, 중문 좌우에서 역시 담을 둘러 영역을 확연히 구분하였다.
삼문 좌우로 사당채 뒤까지 담을 두르고, 중문 좌우에서 역시 담을 둘러 영역을 확연히 구분하였다.
조성은 안마당 영역을 지면보다 한층 높게 마련하였으며, 사당 영역은 안마당에서 다시 층계를 오른 후 중문을 통해 들어가게 하였다.
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의암사가 창건된 후에 장수군은 매년 9월 9일을 택하여 논개제전을 열다가 1968년부터는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大祭)를 지내고 있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09:00∼18:00 (동절기 17시까지)
주차시설
있음
유모차대여여부
불가
애완동물가능여부
불가
문의및안내
063-352-2550
관련 홈페이지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상세정보
입 장 료
무료
이용가능시설
기념관, 비각 등
화장실
있음
주차요금
무료
한국어 안내서비스
가능
출처원문보기 대한민국구석구석 원문보기 |
---|
논개사당 [論介祠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