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가 소설이
계모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소설, 설화 등에서 숱하게 다루어져 왔다.
'신데렐라형 이야기'로 불리는 계모형 소설은 유럽에만 500편 이상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재산을 탐내 친아들과 모의하여 전설적인 성군 순(舜)임금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흉악한 계모의 이야기를 비롯해 수많은 소설에 계모가 등장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계모의 모진 구박을 받다 세상을 떠난 처녀의 원혼이 접동새가 되었다는 설화에서부터 조선의 제12대 임금 인종이 계모 문정 왕후가 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야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계모의 모진 구박을 받다 세상을 떠난 처녀의 원혼이 접동새가 되었다는 설화에서부터 조선의 제12대 임금 인종이 계모 문정 왕후가 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야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장화홍련전』을 비롯해 『김인향전』(金仁香傳)·『황월선전』(黃月善傳)·『정을선전』(鄭乙善傳)·『김취경전』(金就景傳)·『양풍운전』(楊楓雲傳)·『어룡전』(魚龍傳) 등 많은 고전 소설로 작품화되었다.
고전 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계모형 가정 소설을 꼽으라면 역시 『콩쥐팥쥐전』과 『장화홍련전』을 들 수 있다.
고전 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계모형 가정 소설을 꼽으라면 역시 『콩쥐팥쥐전』과 『장화홍련전』을 들 수 있다.
탄탄한 소설 구조를 갖추고 있는 『장화홍련전』은 이본이 30여 편에 이를 정도로 널리 유행했던 작품이다.
그러한 유명세를 타고 1924년에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지난 2003년에는 이 작품을 재해석한 새로운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장화홍련전』의 줄거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실제 사건 '장화홍련전'은 효종대 전동흘이 평안도 철산 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겪은 일로, 그의 문집인 『가재사실록』(嘉齋事實錄)에 실려 있다.
전동흘은 전라도 출신의 무장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군사를 요청하러 갔다가 화의가 성립되어 도중에 돌아온 일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모시고 내려가는 등 국가에 대한 의리를 철저히 지켰던 인물이다.
1651년(효종 2)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북벌 정책을 추진하던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발탁돼 선전관을 지냈다.
1651년(효종 2)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북벌 정책을 추진하던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발탁돼 선전관을 지냈다.
세상에서는 그를 이상진(李尙眞), 소두산(蘇斗山)과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이라 불렀다.
1656년(효종 7)에는 흥덕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수군을 조련하던 중 폭풍우로 배가 침몰하자 직접 물에 뛰어들어 군사들을 구해 낸 공으로 특별히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철산 부사에 임명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철산현은 원귀(寃鬼) 때문에 매년 가뭄이 들고 수령들이 죽거나 갈려 거의 폐읍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철산현은 원귀(寃鬼) 때문에 매년 가뭄이 들고 수령들이 죽거나 갈려 거의 폐읍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효종 연간(1649~1659)에는 거의 매년 가뭄이 들다시피 하였다.
이렇게 가뭄이 계속 들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억울하게 죽은 귀신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귀신 이야기는 21세기인 지금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대궐 안에 돌덩이가 날아들거나 의복에 불이 붙고 궁인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등 귀신이 부리는 요상한 변괴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현종이 직접 할 정도였던 것을 보면 민간에서 그러한 소문이 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적당한 수령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전동흘의 지모(智謀)가 수령직을 감당할 만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적당한 수령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전동흘의 지모(智謀)가 수령직을 감당할 만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정동우로 나오는데 이는 전동흘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철산 부사로 파견된 전동흘은 장화와 홍련의 죽음에 얽힌 사건을 해결하였으며, 그런 연유로 부민들은 그를 '신명철인'(神明鐵人)이라 부르고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철산 부사로 파견된 전동흘은 장화와 홍련의 죽음에 얽힌 사건을 해결하였으며, 그런 연유로 부민들은 그를 '신명철인'(神明鐵人)이라 부르고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가재사실록』에 기록된 '장화홍련전'은 전동흘이 밝혀낸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 분명하다.
문집에서는 전동흘이 관아에서 실제로 장화와 홍련의 원귀를 만난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물론 이는 사실로 보기 힘들다.
문집에서는 전동흘이 관아에서 실제로 장화와 홍련의 원귀를 만난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물론 이는 사실로 보기 힘들다.
'장화홍련전' 자체가 전동흘이 쓴 것이 아니며 전동흘 생존시의 기록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재사실록』은 전동흘의 8대손 전기락(全基洛)이 1865년(고종 2)에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 실려 있는 '장화홍련전'은 1818년(순조 18)에 박인수(朴仁壽)라는 사람이 전동흘의 6대손 전만택(全萬宅)으로부터 한글본을 한문으로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그 대략의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다.
『가재사실록』에 기록되기 이전에 한글본 『장화홍련전』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 장화와 홍련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소설적인 요소들이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가재사실록』의 '장화홍련전'도 일정 부분은 소설이다.
『가재사실록』에 기록되기 이전에 한글본 『장화홍련전』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 장화와 홍련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소설적인 요소들이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가재사실록』의 '장화홍련전'도 일정 부분은 소설이다.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장화홍련전』이 『가재사실록』에 실린 것보다 좀 더 소설적인 성격이 강하다.
장화가 정혼을 하게 되자, 혼수를 많이 장만하라는 좌수의 말에 재물이 축날것이 아까워 장화를 죽이기로 흉계를 꾸며, 큰 쥐를 튀하여 장화의 이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 좌수에게 보이고 장화가 부정을 저질러 낙태하였다고 속여, 아들 장쇠를 시켜 못에 빠뜨려 죽였다.
그 순간 범이 나와 장쇠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잘라가 장쇠는 병신이 되었다.
이에 계모는 홍련을 더욱 학대하고 죽이려 하였다.
홍련은 장쇠에게서 장화가 죽은 것을 알았고, 또 꿈에 장화가 현몽하여 원사한 사실을 알고, 장화가 죽은 못을 찾아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로부터 그 못에는 주야로 곡성이 났으며, 원사한 두 자매가 원정(寃情)을 호소하려고 부사에게 가면 부사는 놀라서 죽었다.
그로부터 그 못에는 주야로 곡성이 났으며, 원사한 두 자매가 원정(寃情)을 호소하려고 부사에게 가면 부사는 놀라서 죽었다.
이런 변고로 부사로 올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정동우(鄭東佑)라는 사람이 자원하여 부사로 부임하였다.
도임 초야에 장화 · 홍련이 나타나 원사한 시말과 설원(雪寃)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튿날 부사는 좌수 부부를 문초한 바, 장화는 낙태하여 투신자살하였고, 홍련은 행실이 부정하더니 야음을 틈타 가출하고 종무소식이며, 장화의 낙태물이라고 증거물을 제시하는 것을 본 바 낙태물인 것 같아서, 좌수 부부를 훈방하였다.
그날 밤 꿈에 두 소저가 나타나 계모가 제시한 낙태물의 배를 갈라 보면 알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
그날 밤 꿈에 두 소저가 나타나 계모가 제시한 낙태물의 배를 갈라 보면 알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
이튿날 부사는 다시 그 낙태물을 살피고 배를 갈라 본즉 쥐똥이 나왔다.
이에 부사는 계모를 능지처참하고, 장쇠는 교수형에 처하였으며, 좌수는 훈방하였다.
그리고 못에 가서 자매의 시신을 건져 안장하고 비(碑)를 세워 혼형을 위로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두 자매가 다시 나타나 설원해 준 일을 사례하며, 앞으로 승직할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 부사는 승직하여 통제사에 이르렸다〔Ⅰ〕.
한문본은 전동흘의 철산부사 재임시에 겪은 실력담을, 그의 6대손 만택(萬宅)의 간청에 의하여 박인수(朴仁壽)가 1818년(순조 18) 섣달 초하룻날에 쓴 것이다.
이 한문본은 전동홉의 8대손 기락(基洛)등이 1865년(고종 2)에 편찬한 《가재사실록(嘉齋事實錄)》과 《가재공실록(嘉齋公實錄)》(全庸甲, 1968)에 실려 있고, 국한문본은 《광국장군전동흘실기(光國將軍全東屹實佳)》에 실려 전한다.
『가재사실록』에 실려 있는 '장화홍련전', 즉 가장 역사적 사실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 사건의 내막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순치(順治, 청나라 세조의 연호) 연간(1644~1661) 평안도 철산에 배시경(裵時慶)이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순치(順治, 청나라 세조의 연호) 연간(1644~1661) 평안도 철산에 배시경(裵時慶)이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재주와 기품이 있어 백성들의 천거로 좌수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화와 홍련이라는 두 딸을 두었는데, 장화가 여섯 살 되던 해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손수 두 딸을 길렀다.
어머니 없이 크는 두 딸이 안쓰러워 재혼을 하게 되었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필동(弼童)과 응동(應童)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장화홍련전』의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 작품이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중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평안도 철산 일대의 모습.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일찍 생모를 잃었지만 장화와 홍련은 예쁘고 교양 있는 처녀로 성장하여 사족(士族)들이 서로 며느리로 맞이하기를 청할 정도였다.
배 좌수는 고심 끝에 장화가 스무 살이 되던 1651년에 훌륭한 가문의 아들과 정혼하였다.
배 좌수는 직무로 관부에 있던 중에 혼인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후처에게 혼수를 잘 준비하도록 기별을 넣었다.
후처는 성격이 본래 탐욕스러워 항상 두 딸을 살해하고자 벼르고 있었는데, 혼수를 마련해 주어야 하자 한 가지 흉계를 궁리해 실행에 옮겼다.
계모는 새끼 쥐의 껍질을 벗겨 낙태한 태아처럼 만든 다음 장화의 이불 속에 몰래 집어넣었다.
계모는 새끼 쥐의 껍질을 벗겨 낙태한 태아처럼 만든 다음 장화의 이불 속에 몰래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방에 들어와 태연하게 "장화야 무슨 병이 있어 이렇게 곤히 자느냐?"며 장화를 깨웠다. 장화의 옷과 이불에는 당연히 피가 묻어 있었다.
계모는 웬 피가 이렇게 많이 묻었냐며 이불을 젖혀 보고는 쥐를 꺼내면서 "네가 양반집 여자로서 이처럼 음탕한 짓을 하였으니 정말 놀랍구나"라고 말하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장화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며칠 뒤 배 좌수가 돌아오자 후처는 집안에 큰일이 났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며칠 뒤 배 좌수가 돌아오자 후처는 집안에 큰일이 났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배 좌수가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자, 후처는 "장화가 몇 일 밤에 낙태를 하였는데 믿지 못하실 것 같아 보관해 놓았습니다.
만일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저 두 아이들은 필시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니 강에다 던져 자취를 감춥시다"라고 하였다.
크게 노한 배 좌수는 필동을 불러 "네 누이의 행실이 이와 같으니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주암(舟巖) 용수(龍湫)에 밀어 죽여라"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장화를 불러 외삼촌이 보고 싶어 하니 다녀오라고 하였다.
이상한 예감이 든 장화는 "여자의 행실은 문밖에도 가볍게 나갈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밤에 다녀오라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상한 예감이 든 장화는 "여자의 행실은 문밖에도 가볍게 나갈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밤에 다녀오라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아버지가 재촉하자 장화는 홍련에게 "내가 가고 나면 너는 아버지를 모시고 아무 일 없이 살았으면 좋겠구나" 하는 말을 남기고는 필동과 함께 길을 나섰다.
용추에 이르자 필동은 갑자기 장화에게 "누나의 행실이 말할 수 없이 음탕하여 아버지가 나보고 죽이라고 하였으니 죽어야겠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용추에 이르자 필동은 갑자기 장화에게 "누나의 행실이 말할 수 없이 음탕하여 아버지가 나보고 죽이라고 하였으니 죽어야겠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장화는 크게 놀라 말에서 내려 통곡하면서 외삼촌을 보고 온 후에 죽을 수 있도록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였다.
필동은 아무리 목숨을 구걸해도 아버지의 명이 엄하여 자식된 도리로 사사롭게 놓아줄 수 없다고 하고는 장화를 용추 연못에 밀어 넣었다.
그날 밤 홍련의 꿈에 언니가 나타났다.
그날 밤 홍련의 꿈에 언니가 나타났다.
꿈에서 장화는 아버지가 계모의 말을 듣고는 자기를 연못에 빠뜨려 죽게 만들어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하다며, 후에 황천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홍련은 부모에게 이상한 꿈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래도 언니가 죽은 징조 같다고 하였다.
계모는 장화의 행실이 나쁜 까닭에 아버지가 노하여 죽인 것이니 언니를 생각해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홍련은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내 꿈이 과연 맞았구나. 언니가 죄 없이 죽었으니 천지신명은 반드시 그 원통함을 알 것이다.
혼자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하다"며 용추 연못에 가서는 "만일 내가 죽은 후 3월에 가뭄이 있으면 원혼 때문임을 알라"는 유언을 남기고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그런데 과연 홍련의 유언대로 3월에 큰 가뭄이 들었으며, 하늘이 음침하고 비가 축축히 온 날 밤에는 곡성이 들렸다.
그런데 과연 홍련의 유언대로 3월에 큰 가뭄이 들었으며, 하늘이 음침하고 비가 축축히 온 날 밤에는 곡성이 들렸다.
원혼이 된 두 자매는 원통함을 호소하기 위해 관을 찾았다.
자매의 원혼을 보고 수령이 놀라 죽거나 줄행랑을 치기 일쑤여서 몇 해 동안 인심만 흉흉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평안 감사는 국왕에게 철산 지방에 원귀가 있어 하늘이 가물고 관리가 교체되니 인재를 가려 보내 읍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평안 감사는 국왕에게 철산 지방에 원귀가 있어 하늘이 가물고 관리가 교체되니 인재를 가려 보내 읍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전라도 진안에 사는 전동흘이 재주와 도량이 뛰어나며 용맹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철산 부사로 임명하였다.
철산에 부임한 전동흘은 원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밤에 호롱불을 환히 밝히고 기다렸다.
철산에 부임한 전동흘은 원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밤에 호롱불을 환히 밝히고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장화와 홍련의 원귀가 뜰에 들어와 슬피 울며 "저희들은 본래 양반집 여자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자매가 함께 죽어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이 쌓였는데 몇 년 동안 풀지 못하였으니 명쾌하게 결단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호소하였다.
부사가 그들의 집안과 이름, 전후의 자세한 사정을 고할 것을 명하니 그동안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부사가 즉시 형리를 불러 본읍에 배 좌수라는 자가 있으며 혹 처를 다시 얻은 일이 있고 자녀는 몇인지를 물으니 과연 장화 자매의 말과 일치하였다.
부사가 즉시 형리를 불러 본읍에 배 좌수라는 자가 있으며 혹 처를 다시 얻은 일이 있고 자녀는 몇인지를 물으니 과연 장화 자매의 말과 일치하였다.
이에 부사가 즉시 배 좌수 부부를 불러 심문하니 후처는 장녀 장화가 음탕한 짓으로 낙태를 하여 스스로 부끄러워 물에 빠져 죽었고, 홍련 역시 그 사실이 부끄러워 따라 죽었다면서 숨겨 놓은 새끼 쥐를 낙태의 증거물로 제시하였다.
의심이 들었지만 증거물까지 제시하자 부사는 어쩔 수 없이 배 좌수 부부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날 밤 장화와 홍련이 다시 나타나 그것은 쥐이니 배를 갈라 보면 사실을 알 것이라고 하였다.
그날 밤 장화와 홍련이 다시 나타나 그것은 쥐이니 배를 갈라 보면 사실을 알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부사가 장화와 홍련이 시킨 대로 하니 뱃속에서 쥐똥이 나왔다.
크게 노한 부사가 좌수와 후처, 그 아들들을 잡아들여 죄를 다그치자 계모는 모든 사실을 실토하였다.
부사가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자 임금은 배 좌수는 유배를 보내고 처자는 죽이도록 하교하였다.
부사가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자 임금은 배 좌수는 유배를 보내고 처자는 죽이도록 하교하였다.
다음 날 부사는 장화 자매의 시신을 건져 올려 후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밤이 다 되어 관아로 돌아오자 장화와 홍련이 기쁜 표정으로 나타나 백배를 하며 사례하고는 자기들이 다시 꿈에 나타나면 그때는 필시 자품(資稟)을 올리라는 임금의 하교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이후 전동흘은 좌·우 수사, 남·북 병사, 포도대장, 통제사 등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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