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0일 화요일

배비장전 , 裵裨將傳 .

배비장전 , 裵裨將傳 .


조선 후기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배비장전』()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작자 미상의 한글 소설이다. 
일찍부터 판소리 〈배비장타령〉으로 불려 오다가 소설화되었다. 
먼저 판소리로 널리 불렸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이야기가 서민들의 정서에 잘 맞았음을 의미한다.

소설은 배씨 성을 가진 비장()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기생 애랑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와 함께 관인 사회에서 한 번은 거쳐야 할 신참례() 문화가 중심을 이룬다. 

평범하면서도 고지식한 배 비장은 전임 비장이 애랑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여 이까지 빼 주는 것을 보고 한심해 하면서 자신은 여자의 유혹에 절대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후에도 배 비장은 술자리나 여자의 유혹을 멀리하면서 기존의 관행에 쉽게 휩쓸리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다른 관리들의 미움을 산다. 
목사·방자·애랑까지 합세한 배 비장 곯려 주기 계책이 추진된다.

어느 봄날 야외 놀이판에서 애랑의 교태에 반한 배 비장은 꾀병을 핑계로 대열에서 이탈하고, 이후 방자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애랑과의 정분을 키워 간다. 
급기야 애랑의 집까지 찾아가나 미리 계획을 꾸민 방자에 의해 혼비백산 쫓겨난다.

겨우 궤짝에 몸을 숨겼으나 목사와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궤짝은 동헌으로 운반되었으며, 알몸으로 궤짝에서 나온 배 비장은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다.

『배비장전』은 관인 사회의 야합상()을 소재로 관인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는데, 시종 웃음을 선사하며 해학적으로 풀어 나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 하급 관인의 위선적이고 호색적인 모습과 당시 관행으로 굳어진 신고식 문화를 잘 묘사하고 있다. 
『배비장전』은 관인 사회의 말단 벼슬인 비장과 함께 방자·기생 등 사회의 하급 계층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의 친근감을 더한 점과, 조선 후기까지 그다지 이목을 끌지 못했던 제주도를 공간 배경으로 선택한 점이 주목된다.

내용

1권 1책. 국문구활자본. 판소리로 불리어진 「배비장타령()」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판소리 열두마당에 속하지만, 고종 때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을 여섯마당으로 정착시킬 때 빠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배비장타령」은 판소리로서의 생명을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재효가 창작한 것으로 보이는 「오섬가()」에 「배비장전」의 한 부분인 애랑과 정비장의 이별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배비장이 애랑에게 조롱당하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시기까지 「배비장타령」은 부분적으로 불리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1938년에 「배비장전」은 판소리가 창극으로 공연되었으며, 최근에는 재창조되기도 하였다.
인쇄된 「배비장전」의 자료로는 중요한 이본()의 차이를 보이는 두 종류가 전해지
고 있다. 
하나는 1916년부터 발간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구활자본이고, 또 하나는 필사본을 대본으로 한 1950년에 나온 주석본이다.
앞의 자료에서는 배비장이 애랑과 방자의 계교에 빠져 온갖 곤욕을 치른 뒤에 정의현감()이라는 관직에 오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뒤의 자료에서는 배비장이 애랑과 방자의 계교에 빠져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알몸으로 궤 속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다.

「배비장전」의 소재가 되었을 것으로 지적된 근원설화()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기생과 이별할 때 이빨을 뽑아 주었던 소년의 이야기인 발치설화()이다.
다른 하나는 기생을 멀리하였다가 오히려 어린 기생의 계교에 빠져 알몸으로 뒤주에 갇힌 채 여러 사람 앞에 망신을 당하는 경차관()의 이야기인 「미궤설화()」가 지적되어 왔다.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에 실려 있는 발치설화는 애랑과 정비장의 이야기에 수용되었다. 
이원명()의 『동야휘집()』에 실려 있는 「미궤설화」는 애랑과 배비장의 이야기에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있었던 일이 어떻게 설화로 바뀌어지는가 하는 관점에서 「배비장전」의 바탕이 된 「미궤설화」의 근원이 더욱 자세히 밝혀지기도 하였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에 수록된 「모안렴위기광욕()」, 『실사총담()』에 실린 「풍류진중일어사()」라는 이야기 등이 「미궤설화」의 근원이 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관인사회()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이 겪어야 되는 입사식()인 신참례()도 소재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의 형성시기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나, 유진한()이 남긴 만화본()「춘향가」에 「배비장타령」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영조 때까지는 판소리 한 마당으로 성립되었던 「배비장타령」이 판소리로서의 생명을 잃고 그 사설만 기록되면서 소설화된 것이 「배비장전」으로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 기생 애랑은 여러 모로 빼어난데, 배비장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김경()을 따라온 평범한 인물이다. 
이러한 설정은 배비장에 대한 애랑의 우위()를 예견하게 한다.

작품 첫머리에는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김경 일행이 풍랑을 만나 고생을 겪은 뒤에 제주도에 도착하는 사건이 묘사되었다. 
이 부분에는 비장들의 자탄사설()이 끼어 있는데, 이는 「적벽가()」에 나오는 군사들의 자탄사설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애랑과 정비장의 이별장면이 벌어진다. 
이 장면은 그 자체가 희극적이지만, 동시에 애랑과 배비장 사이에 벌어질 사건을 준비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정비장이 애랑에게 창고에 넣어둔 자신의 짐을 모두 내어주고 이별하려 할 때, 애랑은 정비장의 몸에 지닌 것을 남김없이 얻어 내고는 끝내 그의 이빨까지 빼게 만들었다.

서울을 떠날 때 어머니와 부인 앞에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떠났던 배비장은 이 장면을 보고 정비장을 비웃다가 애랑을 두고 방자와 내기를 걸게 되었다. 
기생과 술자리를 멀리하면서 홀로 깨끗한 체하는 배비장을 유혹하기 위해서 방자와 애랑은 계교를 꾸몄다.
이러한 계획은 목사가 지시한 일이었다. 
목사는 계교의 실행을 돕기 위하여 야외에서 봄놀이판을 벌였다. 
목사 일행을 따라나와 따로 자리잡은 배비장을 유혹하려고 애랑은 수풀 속 시냇가에서 온갖 교태를 부리며 노닐었다.
이에 크게 마음이 움직인 배비장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뒤처졌다. 
이 부분에 금옥사설()이 끼어 있는바, 이것은 앞 부분에 끼어 있는 기생점고()와 함께 「춘향전」에 나오는 금옥사설·기생점고 부분과 비교될 만하다.

배비장은 방자를 사이에 넣어 애랑이 차려주는 음식상을 받아 먹고서, 애랑을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이 들게 되었다. 
배비장은 방자를 매수하여 애랑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만날 기약을 얻어냈다. 
배비장은 방자가 지정하는 개가죽옷을 입고 애랑의 집을 찾아갔다.
배비장은 애랑의 집 담 구멍을 간신히 통과하여 애랑을 만나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방자가 애랑의 남편 행세를 하며 들이닥치자, 황급해진 배비장은 자루 속에 들어갔다. 
방자가 술을 사러 간다고 틈을 내준 사이에 배비장은 피나무궤에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 

방자는 배비장이 숨어 들어가 있는 피나무궤를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다가, 다시 톱으로 켜는 흉내를 하면서 궤 속에 든 배비장의 혼을 뽑아버렸다.
배비장이 든 피나무궤는 목사와 육방()의 아전들 및 군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헌()으로 운반되었다. 
바다 위에 던져진 줄 안 배비장이 궤 속에서 도움을 청하자, 뱃사공으로 가장한 사령들이 궤문을 열어주었다. 
배비장은 알몸으로 허우적거리며 동헌 대청에 머리를 부딪쳐 온갖 망신을 다 당하였다.
1950년도 출간본은 희극적 파탄이 최고조에 도달한 이 부분에서 끝났다. 
구활자본에서는 이와 같은 망신을 당한 배비장은 목사를 하직하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하여 배를 기다리다가, 애랑이 해남()에 간다고 소문 내면서 준비해 놓은 배에 숨어 들어갔다가 다시 애랑을 만나고, 뒤에 정의현감으로 임명되어 애랑과 함께 부임해서 그 고을을 잘 다스리고 행복을 누렸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평가

이 작품은 판소리 사설이 기록화되면서 소설화된 것이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판소리 사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의 문체는 판소리 사설의 문체적 특징을 수용하고 있다.
판소리로 불리어진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삽입가요()도 발견된다. 
1950년도 출간본은 판소리 사설에 더욱 가까운 면을 지니고, 구활자본은 소설로 바뀌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방자는 배비장의 약점과 위선을 폭로하고 파괴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런 면에서 가면극에 등장하는 말뚝이와 상통한다.
「춘향전」에 나타나는 방자보다도 더 날카로운 풍자의 기능을 보이고 있다. 
「배비장전」의 방자는 판소리 사설이나 판소리계 소설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개입시키는 장치로 형상화되는 인물유형의 하나로 주목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위선적인 인물 또는 위선적인 지배층에 대한 풍자를 주제로 하는 작품으로 이해된다. 
「배비장전」은 관인사회의 비리()와 야합상()을 소재로 하여 관인사회 일반을 풍자한다. 
그러기에 날카로운 웃음의 긴장상태가 계속되는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배비장전()〉은 여색에 빠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배비장이 제주목사의 명을 받은 기생 애랑과 방자의 계교에 속아 망신을 당한다는 내용의 실전판소리 작품이다. 
〈배비장타령〉이라고도 한다.

유래 

〈배비장전〉의 근원설화로는 『태평한화골계전()』에 실려 있는 〈발치설화()〉와 『동야휘집()』에 실려 있는 〈미궤설화()〉가 거론된 바 있다. 
우선 〈발치설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장안에서 온 한 청년이 경주의 아름다운 기생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기생은 자신도 본래 양반 집안의 딸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는 달콤한 말과 갖은 애교로 청년을 더욱 미혹되게 했다. 

중 청년이 다시 장안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기생은 슬피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청년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겠다며 기생을 달래자, 그녀는 청년 몸의 일부를 신표로 요구했다. 
청년이 자신의 수염을 뜯어서 주자, 기생은 이도 뽑아 달라고 간청했다. 
청년은 이를 뽑아서 기생에게 주고 상경했는데, 훗날 경주의 기생이 다른 남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화가 난 청년이 기생에게 하인을 보내 자신의 이를 돌려달라고 하자, 기생은 박장대소하며 이가 가득 담겨있는 자루를 던졌다. 
이것이 남자들이 지금까지 빼준 이를 모아둔 자루이니 알아서 청년의 이를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미궤설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 관리가 경주에 부임했는데, 그는 유별나게 기생을 더럽게 여기며 기피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부윤은 기생들을 불러 만일 그를 유혹하는데 성공하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한 기생이 자원해 그 관리가 묵고 있는 객사의 소동()과 미리 짜고, 저녁마다 그와 객사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여염집 여자 행세를 했다. 
 어느 날 기생은 객사에서 관리를 꾀어 그가 자신의 집으로 오도록 했다. 
옷을 벗고 동침하려는 찰나에 갑자기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기생은 자신의 전 남편 목소리라며 당황한 체 했다. 
전 남편의 성질이 매우 사나우니 빨리 몸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숨을 곳을 찾던 관리는 기생이 시키는 대로 벌거벗은 채 뒤주 안으로 들어갔다. 
전 남편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의복과 재물을 가지러 왔으니 뒤주를 내놓으라 했고, 기생은 그럴 수 없다며 버텼다. 
관가로 가서 송사하기로 했고, 부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더니 뒤주를 톱으로 썰어서 나눠가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뒤주 속에서 톱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관리는 살려달라고 외쳤고, 놀란 사람들이 뒤주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벌거벗은 관리가 들어있었다.

〈배비장전〉은 판소리사에 있어 매우 이른 시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만화() 유진한(, 1711-1791)의 〈가사 춘향가 이백구()〉(1754)에 이미 그 존재가 확인된다. 
"제주에선 배비장의 이빨을 남겼듯이()"라는 〈가사 춘향가 이백구〉의 제82구를 근거로, 〈배비장전〉의 형성 연대를 18세기 초중엽으로 소급하기도 한다. 
적어도 기록상으로 보았을 때 〈배비장전〉은 〈춘향가〉와 함께 그 형성 연대가 가장 앞서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사 춘향가 이백구〉에서는 배비장이 기생에 홀려 이를 뽑는 장면을 〈배비장전〉의 가장 주요한 사건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판소리 창자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던 배비장 관련 서사가 바로 발치 사건이었으리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겠는데, 이는 현재 사설로 남아있는 〈배비장전〉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배비장전〉에서는 배비장이 아닌 정비장이 작품 초반에 이를 뽑히게 되며, 작품의 주축을 이루는 서사 역시 발치 사건이 아니라 배비장의 훼절 사건이다.

송만재(, 1788-1851)가 1843년에 남긴 〈관우희()〉에도 "애랑에게 빠져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상투 자르고 이빨 빼기를 마지않네(imagefont). 술자리에서 기생을 업은 배비장이니() 이로 인해 멍청이라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구나()"라는 〈배비장전〉 관극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기생에 홀린 남성이 상투를 잘리고 이빨을 뽑힌다는 발치삽화 외에, 배비장이 기생의 유혹에 넘어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놀림을 받게 된다는 구체적인 훼절사건이 〈배비장전〉에 삽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구와 승구의 사건은 기생과의 이별을 전제로 하며, 전구와 결구의 중심 사건은 내기와 공모이다. 
사건 구성상의 합리성을 감안할 때, 상투를 잘리고 이빨을 뽑히는 인물과 주변인들의 공모로 망신을 당하는 인물은 각각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정리하면, 19세기 중엽 즈음에 불렸던 〈배비장전〉은 현전 〈배비장전〉의 형태와 유사하게 두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두 개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때 선행하는 발치삽화의 주인공은 정비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유원(, 1814-1888)도 비슷한 시기에 〈배비장전〉에 대한 감상을 토대로 "제주도 아녀자가 밝은 대낮에() 버들 드리운 정자에 멋진 말 매어 놓고(), 울음도 거짓 울음 웃음도 거짓 웃음() 기린 옥수 풍채로도 거짓 꾐에 속아 망신당하네()"라는 관극시를 남겼다. 
관극팔령()〉의 〈아영랑()〉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유원은 배비장이 아닌 애랑의 성격과 행동에 감상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배비장의 위선과 훼절을 문제 삼았던 송만재의 관극시와는 작품을 인식하는 관점에서부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배비장전〉을 기준으로 할 때, 이유원이 주목한 장면은 망월루에서 정비장과 애랑이 이별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조재삼(, 1808-1866)의 『송남잡지()』(1855)에도 "매화타령은 곧 배비장 이야기이다( )"라는 〈배비장전〉 관련 기록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19세기 중반 당시 판소리 향유층 사이에서는 〈강릉매화타령〉과 〈배비장전〉이 유사한 성격의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두 작품의 관계와 관련해, 애초에 〈강릉매화타령〉과 비슷한 형태의 〈배비장전〉이 존재했고, 후에 〈배비장전〉이 〈강릉매화타령〉과의 차별성을 보이는 서사구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궤설화〉를 첨가했으리라는 추론이 제기된 바 있다. 

배비장이 애랑에게 홀려 자신의 이까지 뽑아주는 망신을 당했다는 단순한 구조의 〈배비장전〉에서 발치 모티프가 배비장의 행적과 분리되고, 여기에 미궤설화식의 공모 구조가 부연되면서 구조적 안정성을 얻어, 현전 〈배비장전〉으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배비장전〉은 신재효(, 1812-1884)가 사설을 재정리한 여섯 마당 안에는 비록 들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가사체 작품 혹은 단가 〈오섬가()〉에 그 내용이 언급되었다. 
이를 통해 〈배비장전〉이 어느 시기에 이르러 전승이 중단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9세기 후반 무렵까지는 판소리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섬가〉에는 〈춘향가〉의 내용 뒤에 "또 웃을 일 있는 것이 제주기생 애랑이가 정비장을 후리랴고 강두()에 이별할 제 거짓 사랑 거짓 울음 두 발을 쭉 버티고 두 주먹 불끈 쥐고 가슴 쾅쾅 두다리며 엎어지락 자빠지락 하도 통곡 우는 말이, '나아리 떠나신 후 천수만한() 첩의 설움 어찌 할꼬 어찌 할꼬' 애랑이 하직()하고 돌아서며 웃더구나. 

배비장 또 둘러서 궤() 속에 잡아넣고 무수한 조롱작난() 어찌 아니 허망하며"라는 〈배비장전〉 관련 사설이 삽입되어 있다.

이후 〈강릉매화타령〉의 내용이 이어지고, "이러한 창기()들은 노류장화() 본색()으로 거짓 사랑 거짓 설움 속임질이 투연이라. 
허랑한 탕자()들은 두 눈을 번히 뜨고 그다지 혹할쏘냐. 미혼진함인갱()이 일로 두고 이름이라. 기인도 차오평생()은 현군자()의 탄식이요. 
막주창가() 견정몽()은 경박자()의 경계()로다. 

세상의 음양정욕() 여천지무궁()이라. 금할 수는 없거니와 이 사랑 이 설움을 억제하자 할량이면 부동심()이 제일이라. 
이 사설 지은 것이 비유한 말이로다"라는 당부로 마무리된다. 
정비장과 애랑의 이별 삽화가 전반부에 주요하게 배치된 것으로 보아, 이 당시까지도 많은 향유자들이 여전히 이 대목을 토막소리로 즐겼던 정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배비장전〉의 '정비장과 애랑이 이별하는 대목'은 1930년대까지 판소리 창의 형태로 녹음되었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높은 대목이었다. 

1933년에 김홍규()가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이 대목을 녹음했으며(Columbia 40465-B    ), 1936년에는 김소희(, 1917-1995)가 빅타레코드에서 가야금, 퉁소, 해금, 장구 등의 반주에 맞추어 이 대목 음반을 취입했다
(Victor KJ-1086  ()·( ···Victor KJ-1060  ( ···). 이처럼 〈배비장전〉의 일부 대목은 20세기 전반까지 어느 정도 전승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은 실전되고 말았다. 

〈배비장전〉은 여전히 풍자 문학의 진수로 인정받으며 소설본으로 읽히거나 창극으로 공연되는 것은 물론, 연극, 마당놀이, 무용극, 오페라 등의 장르로도 재창작되었다.

1916년에 신구서림본 활자본 〈배비장전〉이 간행되었으며, 1950년에 국제문화관에서 김삼불() 교주본이 발간되었다. 
창극으로는 1936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주도 하에 이동백(, 1866-1949), 김창룡(, 1872-1943), 정정렬(, 1876-1938), 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이 동양극장에서 공연한 바 있다. 
국립창극단(당시 국립국극단)은 창단 이듬해인 1963년에 제3회 정기공연으로 이 작품을 무대화 했다. 

이후 이진순의 연출로 1973년과 1975년, 허규의 연출로 1988년, 김홍승의 연출로 1996년과 2000년, 이병훈 연출로 2012년에 창극 〈배비장전〉이 공연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배비장전〉이 1930년대까지도 창극으로 공연되었던 정황을 고려할 때, 『조선창극사』에 〈배비장전〉의 명창으로 거론된 창자나 〈배비장전〉의 더늠과 관련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은 매우 의외이다. 

『조선창극사』에 〈변강쇠타령〉의 명창으로 송흥록과 장자백(, ?-1907), 〈무숙이타령〉의 명창으로 김정근(), 〈장끼타령〉의 명창으로 염계달()과 한송학이 지목된 것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판소리 〈배비장전〉이 전승에서 탈락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작품 구조의 특성상 더늠 창출이 어려웠을 것이다. 
〈배비장전〉은 서사 구조상 골계적 아니리 중심으로 판을 짤 수밖에 없는 작품 후반부에 무게 중심이 놓여있는 작품이지만, 실제 연행에서는 전반부를 토막소리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괴리에 따라 더 이상의 더늠 창출이 힘들게 되면서 정상적인 전승까지 어렵게 되었을 수 있다.

둘째, 〈배비장전〉의 웃음은 양반층에 무난히 수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배비장전〉에서 배비장의 호색적 본성을 폭로하는 웃음의 주체는 민중이다. 
〈배비장전〉과 같은 유형의 〈정향전〉, 〈종옥전〉, 〈지봉전〉, 〈오유란전〉 등이 지방관아라는 제한된 공간 내에서 지방수령과 양반 사이의 일화적() 웃음을 유발하는 작품이라면, 〈배비장전〉은 그 제한된 공간을 넘어 민중이 웃음의 주체가 되는 양상으로 전환된 작품에 해당한다. 
양반층 내부의 일화적 웃음이 민중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으로 인해, 〈배비장전〉은 양반층의 환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배비장전〉만의 더늠이나 대표적인 사설을 창출해내는 데 실패했다. 
〈배비장전〉에서 애랑이 배비장을 유혹하고, 배비장이 그에 홀려 안절부절 못하는 장면은 〈춘향가〉에서 이도령이 춘향을 처음 발견하는 장면과 유사하다. 
〈배비장전〉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나 고사를 지내는 장면은 〈심청가〉에서 인당수로 가는 중에 고사를 올리는 장면과 비슷하다. 

〈배비장전〉에서 배 안의 비장들이 신세한탄을 하는 대목은 〈적벽가〉의 '군사설움 대목'과 닮아 있다. 
'산천경개사설-목욕 장면-배앓이 삽화-정체확인사설-방자를 통한 의사 전달-음식사설-책 읽는 장면-편지 전달-행장치레-방자와의 수작-담배사설-사랑가' 등 일련의 장면과 단위사설을 〈춘향가〉로부터 수용했다는 점에서, 〈배비장전〉은 〈춘향가〉의 패러디라고도 할 수 있다. 

〈적벽가〉, 〈수궁가〉, 〈심청가〉로부터 수용한 사설까지 고려해, 〈배비장전〉 전체 서술량의 약 2/3 이상이 기존 사설에서 차용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설의 차용이 '교섭'이 아닌 일방적인 '수용'이었다는 데서 〈배비장전〉 전승력 약화의 요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배비장전〉이라는 작품의 시대적 부적합성이 문제가 되었을 수 있다. 
〈배비장전〉과 〈강릉매화타령〉은 그 성격이 매우 유사한 작품이다. 
이처럼 비슷한 작품이 거듭 레퍼토리로 등장한 배경과 관련해서는, 이런 작품에 대한 요구가 급격히 일어났을 가능성, 이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이나 대상이 그 당대의 현실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반대로 비슷한 작품들이 함께 실전된 배경으로는, 그러한 작품을 요구했던 향유층 자체의 소멸 혹은 작품의 시대적 부적합성을 들 수 있다. 
〈배비장전〉의 실전 배경은 이 중 후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배비장전〉은 지나치게 골계미 일변도로 치우쳐 다른 미적 특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다섯 바탕을 살펴보면, 비장미, 골계미, 숭고미, 우아미 등의 미적 특질이 비교적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이 실전된 판소리 일곱 바탕의 작품들은 대개 골계미 혹은 비장미가 과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배비장전〉의 실전은 작품의 이러한 미적 불균형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배비장전〉의 구체적인 줄거리는 신구서림본과 김삼불 교주본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한양에 살던 김경()이 제주목사에 제수되자, 
서강에 사는 배선달을 불러 예방의 소임을 맡긴다. 
사또 일행은 제주도로 가는 배 위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대풍을 만나 위험에 처하지만, 다행히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때 마침 배에서 내린 배비장은 정비장과 기생 애랑이 이별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애랑은 갖은 아양과 애교를 부리며 정비장이 가진 재물을 모두 빼앗고, 입고 있던 의복을 벗겨낸다. 
정비장은 자신의 보검을 내어주고, 앞니까지 뽑아서 애랑에게 준다. 

모든 광경을 지켜본 배비장은 정비장을 조롱하면서, 자신은 결코 여색을 가까이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한다. 
이에 방자는 배비장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사또를 비롯한 다른 무리들이 기생과 함께 즐길 때에, 배비장은 도덕군자를 자처하며 도도하게 군다. 
배비장을 곯려 주리라 작정한 제주 목사 김경이 배비장을 훼절시킬 기생을 찾고, 애랑이 이 일에 자원한다.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목사 및 다른 비장들과 함께 한라산 놀이를 떠난 배비장은 기생 애랑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애랑의 자태를 잊지 못해 상사병이 날 지경에 이른 배비장은 방자를 시켜 자신의 마음을 담은 서신을 그녀에게 전달한다. 
방자는 서신을 애랑에게 전달하고, 애랑의 허락을 받은 배비장은 한밤중에 개가죽 두루마기에 노벙거지를 쓰고 담 아래 구멍을 통해 애랑의 집으로 들어간다. 
애랑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간 배비장은 그녀와 함께 운우의 정을 나눈다. 
이때 갑자기 바깥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고, 애랑은 배비장에게 자신의 남편이 왔다고 이야기한다.

고함소리의 실제 주인공은 방자이다. 

몸을 숨길 곳을 찾던 배비장은 애랑의 말에 따라 자루 속으로 들어가고, 자루 속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묻는 방자의 물음에 애랑은 거문고라고 답한다. 
방자가 자루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퉁기자 배비장은 거문고 소리까지 내며 벌벌 떤다. 
잠시 방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배비장은 자루 밖으로 나와 다시 애랑의 권유대로 피나무 궤 속에 숨는다. 
애랑의 남편으로 가장한 방자가 들어와 자신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와 궤를 불사르라 했다고 말한다. 
애랑은 그럴 수 없다며 만류하는 체하고, 방자는 궤를 공평하게 나누자며 톱질을 시작한다. 

배비장은 궤 속에서 업궤신 흉내를 내며 이 궤를 계집에게 주라고 소리친다. 
이에 방자는 궤를 강물에 버리겠다고 큰 소리로 이야기한 뒤, 궤를 짊어다 동헌 마당에 내려둔다. 
배비장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궤 안에서 바다에 당도했다고 생각하고, 지나가는 어부에게 살려달라고 구원을 요청한다. 
 배비장이 헤엄을 치면서 궤 밖으로 나와 보니 그곳은 다름 아닌 관청 마당이었고, 목사와 육방 관속, 기생들이 둘러서서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김삼불 교주본은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바로 이 장면에서 끝이 난다. 

김삼불은 교주본의 '일러두기'를 통해, 60장 이후는 문장과 어법이 이전과 달라 후인에 의해 덧붙여진 것으로 판단해 교주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이에 비해 활자본인 신구서림본 〈배비장전〉에는 김삼불 교주본에서 제외한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피를 당한 배비장은 겨우 배를 구해 떠났지만 어느 객사에 갇히게 된다. 
애랑이 그곳으로 찾아와 그를 위로하면서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얼마 지나 배비장은 김경 목사가 자신에게 정의현감직을 제수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배비장은 목사의 주선에 의해 애랑을 첩으로 맞아들이고, 정의현감으로 부임해 선정을 베푼다. 

고을에는 배비장의 송덕비가 세워지고, 배비장은 목사 김경의 집안과 대대로 절친하게 지낸다.

〈배비장전〉의 주제는 우선 지배층의 허위의식 혹은 위선적인 행태에 대한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작품에서는 배비장이라는 인물을 통해 공허하고 위선적인 유가윤리 혹은 호색성을 풍자한다. 
구대정남()을 자처하던 배비장을 훼절시키고, 나아가 알몸으로 만들어 망신을 주는 전 과정에는 익살맞고 재치 있는 재담, 유쾌하고 즐거운 해학이 담겨 있다. 

배비장의 위선적인 모습을 폭로하는 과정 자체가 애랑과 방자라는 피지배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를 읽어낼 수 있다. 
〈배비장전〉을 관인사회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입사식()으로서의 신참례() 의식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보거나 관인사회의 비리와 야합상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배비장을 희화화하는 궁극적인 의도 역시 배비장을 당시 관료사회의 관습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배비장전〉의 주요 등장인물은 배비장, 애랑, 김경 목사, 방자 등이다. 
배비장은 평소 구대정남을 자처하는 경직된 윤리의식의 소유자로, 작품에서 교정의 대상이 된다. 

그는 애랑, 방자 등 주변인들의 공모에 의해 개, 거문고, 업궤신 등으로 우스꽝스럽게 전락하며 끊임없이 풍자된다. 
이러한 과정을 신참자의 경직성을 제거하기 위한 신참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배비장의 경직성을 교정하는 주체가 관장이 아니라 애랑과 방자로 대표되는 민중이라는 데 작품의 묘미가 있다. 
정비장도 배비장과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다. 작품의 초반에 등장하는 정비장은 애랑에게 홀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는 한심하고 우스운 인물로 풍자된다.

애랑은 천하일색의 기생으로, 전반부에 배치된 정비장과의 이별 장면에서는 자기 몫을 단단히 챙기는 현실적인 인물이자, 양반을 철저히 조롱하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작품 후반부의 애랑은 방자와 함께 배비장 훼절 사건을 주도해 배비장의 허위의식과 호색적 본능을 적극적으로 폭로하는 풍자의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신구서림본에는 애랑이 배비장의 첩으로 들어가 아들 형제를 낳고 영화를 누린다는 후일담이 덧붙어 있는데, 이러한 결말은 애랑의 기본적인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김경은 양반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작품에서 전형적인 기득권층으로 형상화된다. 
자신이 속해 있는 관료집단의 인물들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면서 밖으로 겉도는 배비장에 대한 김경 목사의 시선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려는 성향이 강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경은 애랑이나 방자와 같이 배비장의 훼절 사건 전면에 나서지는 않으나, 그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데 분명히 기여한다. 

처음 기생들에게 배비장의 훼절을 제안함으로써, 〈배비장전〉의 훼절담 성립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다.

방자는 애랑과 함께 배비장 훼절 사건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이다. 
배비장을 유혹할 기생을 찾은 것은 김경이었지만, 처음으로 배비장에게 내기를 제안한 인물은 방자였다. 
 애랑의 거짓 남편 역을 수행하면서 배비장을 점차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추락시키는 방자의 역할은 연출자에 비견되기도 한다. 
공모의 배경에 김경 목사가 있기는 하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공모 사건은 애랑과 방자에 의해 연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전의 위선을 폭로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배비장전〉의 방자는 〈춘향가〉의 방자나 〈적벽가〉의 정욱보다 가면극에 등장하는 말뚝이에 더욱 가까운 캐릭터이다.

〈배비장전〉의 창자로 알려진 명창은 없다. 
김홍규가 1933년, 김소희가 1936년에 〈배비장전〉 중 '정비장이 애랑과 이별하는 대목'을 유성기 음반에 녹음한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배비장전〉은 창극 음반의 형태로도 발매되었는데, 정남희(, 1905-1984)와 조앵무()가 1935년에 창극 〈배비장전〉의 '이별편'(Regal C364  ()·()(  )을 취입한 음원이 남아있다. 
이후 1972년에 박동진(, 1916-2003)은 실전판소리 〈배비장타령〉을 자신이 새롭게 작창해 발표했다.

연희본

〈배비장전〉의 연희본으로는 1916년에 발간된 신구서림본과 1950년에 국제문화관에서 간행한 김삼불 교주본의 2종이 있다. 
박순호 소장본이 있으나 이는 신구서림본의 필사본이며, 세창서관본은 신구서림본과 동일본이다. 
두 이본 모두 생성 연대가 그리 높이 소급되지는 않아, 실전 이전의 판소리 〈배비장전〉의 실체적인 모습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가의 여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신구서림본 〈배비장전〉은 소설적 윤색을 거친 이본이며, 김삼불의 교주본은 후인의 첨가라는 판단 하에 결말 부분을 삭제한 형태이다. 
삭제된 결말부의 "망망한 대해에 물결은 거울 같고 부상에 뜨는 달은 광명을 널리 흘려 만경창파에 금사를 뿌리는 듯한데 부모처자 이별하고 천리도중 내려와서 남의 막비나마 명예를 얻지 못하고 망신살이 뻗쳐 진정으로 마쳐 논 일 생각사록 절통하고 말할수록 분이 나서 살아서 무엇하며 무슨 면목으로 귀성하야 부모처자 상대할고, 이처럼 자탄하고 배속에 한 편에 업데여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는 사람은 기생 오입 잘못하다가 예방 소임 자퇴하고 한양으로 회정하는 배비장이오"라는 대목은 문체가 완전히 신소설식이다. 
"배비장이 분한 마음은 기가 막히건마는 다시 그 아양부리는 데 눙쳐져서 외양으로는 깍지거리한 애랑의 손을 잡어 뿌리치며 놓아라 놓아라 하며 못이기는 체 안방으로 끌려 들어가니 그 형상을 활동사진으로 한번 박어내여 연극을 꾸몄으면 장안장외 구경꾼들이 못되여도 백만명 이상은 되겠더라"라는 결말부 대목에 활동사진의 존재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역시 최소한 개화기 이후에 부연된 것이 분명하다.

박동진이 1988년에 주봉신(, 1934- )의 북반주에 맞추어 녹음한 〈인간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대전집 배비장타령〉이 음반으로 발매된 바 있다. 
여기에는 '배선달 예방소임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내려가는 대목', '바다에서 풍랑 만나 고사 지내고 제주에 당도하는 대목', '정비장과 애랑의 이별 대목', '신임사또 도임행차', '배비장 회절시킬 음모 꾸며 한라산으로 천렵 가는 대목', '배비장이 애랑에게 반하는 대목', '배비장이 상사병 나는 대목', '배비장이 애랑 만나러 가는 대목', '방자와 애랑이 짜고서 농간 부리는 대목', '애랑이 배비장에게 사죄하는 대목'이 실려 있다. 
박동진의 〈배비장전〉 녹음은 〈변강쇠타령〉, 〈숙영낭자전〉, 〈장끼타령〉, 〈옹고집전〉 등과 같은 실전판소리 복원 작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것이었다.

〈발치설화〉와 〈미궤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배비장전〉의 서사는 남성이 주변인의 책략에 속아 자신의 금욕적 절개를 스스로 훼절함으로써 웃음거리가 된다는 남성훼절담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남성훼절담의 모티프는 〈지봉전〉, 〈정향전〉, 〈오유란전〉, 〈종옥전〉 등의 소설, 〈배비장전〉, 〈강릉매화타령〉과 같은 판소리 및 판소리계 소설을 통해 널리 공유되어 온 것이다. 
실전판소리 〈배비장전〉 역시 남성훼절담을 모티프로 하는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배비장전〉에는 두 가지 성격의 웃음이 공존한다. 
배비장을 망신시키는 웃음의 주체로, 방자의 관점에 서 있는 하층 민중, 목사 및 여러 비장들의 관점에 서 있는 중인층 혹은 양반층 모두를 들 수 있는 것이다. 
박동진은 〈배비장전〉과 관련해 "양반 모인 고관 앞에 많이 불렀다고 하는 소리를 1932년 조선성악회에서 자주 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으며, 〈발치설화〉라 하는 것도 양반층이 주로 즐겼던 문헌 설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를 근거로 애초에는 중인층 혹은 양반층이 주체가 되는 웃음이 〈배비장전〉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으나, 여기에 점차 하층 민중이 주체가 되는 웃음이 개입되었고, 이후에는 후자의 웃음이 작품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은 하층 민중을 향유 기반으로 성립되었다가 점차 중상층으로 향유층의 폭을 넓혀간 판소리사의 전반적인 흐름과는 상반된다고도 할 수 있다. 
상하층 간의 구분의식이 점차 엷어져가던 20세기 초에 〈배비장전〉이 의도한 웃음은 또 다른 시각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배비장전〉이 창극으로 새로이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하층 민중의 웃음과 상층 양반의 웃음 사이의 불편한 공존이 사라지고, 그 웃음의 기제 전반이 대중적 웃음으로 새로이 수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의 대중적 웃음이란 〈배비장전〉의 성적() 측면에 국한되는 웃음으로 상업성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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