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Aurochs.
넓은 뜻의 소는 소과 중에서 산양류·면양류·영양류(羚羊類) 이외의 것을 가리키며, 가축인 소 이외에 물소류·들소·야크·가우르·가얄·밴팅 등을 포함한다.
몸은 건장하고 머리가 낮으며, 목 부분의 아랫면에는 많은 육수(肉垂)가 있고, 꼬리는 가늘고 길며 끝에 모총(毛叢)이 있다.
뿔은 암수 모두 있는데, 마디 모양의 융기가 없고 꼬이거나 사리를 트는 일이 없다.
이 중에서 물소류·야크·가얄·밴팅 등은 가축화되어 있다.
좁은 뜻에서는 가축으로 사육하는 소를 가리킨다.
뿔의 단면은 원형으로 정수리의 양쪽에서 나오며, 어깨의 융기가 약하고 체모(體毛)가 짧다.
소는 한자로는 우(牛)라고 하고 영어로 거세하지 않은 수컷을 불(bull), 암컷을 카우(cow)라 하고, 가축화된 소를 총칭하여 캐틀(cattle)이라고 한다.
넓은 뜻의 소는 소과 중에서 산양류·면양류·영양류(羚羊類) 이외의 것을 가리키며, 가축인 소 이외에 물소류·들소·야크·가우르·가얄·밴팅 등을 포함한다.
몸은 건장하고 머리가 낮으며, 목 부분의 아랫면에는 많은 육수(肉垂)가 있고, 꼬리는 가늘고 길며 끝에 모총(毛叢)이 있다.
뿔은 암수 모두 있는데, 마디 모양의 융기가 없고 꼬이거나 사리를 트는 일이 없다.
이 중에서 물소류·야크·가얄·밴팅 등은 가축화되어 있다.
좁은 뜻에서는 가축으로 사육하는 소를 가리킨다.
뿔의 단면은 원형으로 정수리의 양쪽에서 나오며, 어깨의 융기가 약하고 체모(體毛)가 짧다.
소는 한자로는 우(牛)라고 하고 영어로 거세하지 않은 수컷을 불(bull), 암컷을 카우(cow)라 하고, 가축화된 소를 총칭하여 캐틀(cattle)이라고 한다.
갈색(가축소-흰색에서 갈색, 검정색까지 다양하며 얼룩이나 반점이 있는 것도 있다.) .하루에 8시간 이상씩 풀을 뜯으며 한번 먹을 때마다 70kg의 풀을 뜯어 먹는다.
먹는 시간 외 나머지 시간은 되새김질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데 보낸다.
겨울이 되면 털이 더 촘촘해진다.
가축화가 이루어지지않은 소는 초원이나 목초지에서 주로 서식한다.
가축화가 이루어지지않은 소는 초원이나 목초지에서 주로 서식한다.
한 마리의 수컷과 몇 마리의 암컷, 그 새끼가 한 무리를 이루며 풀을 먹고 산다.
소는 지구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은 큰 포유류? - 소는 일찍이 8000년 전부터 인간에게 가축으로 길들여져왔다.
그에따라 개체수도 늘고 다양한 종으로 나누어지기도 했는데 큰 포유류들 중에 인간 다음으로 가장 많은 동물이 바로 소라고 한다.
소과 우속(牛屬)에 속하는 동물.
학명은 Bostaurus L.이다. 소의 명칭은 우리말로는 수소·암소·송아지 등으로 불리지만 한자어로는 더욱 복잡하고 상세하다.
즉 수소를 특(特), 암소를 고(牯)라고 하며 송아지도 갓난 것은 독(犢), 두 살짜리는 시(), 세 살짜리는 삼(犙), 네살짜리는 사(○)라 한다. 또 한 가지 색으로 된 것은 전(牷)이라 한다.
형태
소의 형태는 그 종류나 품종에 따라, 또는 같은 품종이라 할지라도 지역, 개량도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어 일괄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사육되어 오면서 독특한 형태적 발달을 한 전형적인 역용우(役用牛)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머리는 몸체에 비하여 작고 짧으며 이마는 넓고 콧대는 길고 뺨은 풍부하게 발달되어 있다. 눈의 동작은 느리고 귀는 작다. 뿔은 짧고 굵은 편으로 일자형이 많은데, 암소에 있어서는 외하방(外下方) 또는 외후방(外後方)으로 구부러진 것이 많다.
목은 짧고 흉수는 적당하며 배선은 바르고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엉덩이가 빈약하고 경사진 것이 결점이며, 유방은 작고 사지(四肢)는 강건하며 발톱의 질도 치밀하다.
털색은 적갈색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예전에는 흑색 또는 흑색얼룩이가 있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도태되었다. 무게는 수컷이 450㎏, 암컷이 350㎏ 정도이고 털은 약간 길고 거친 편이며, 피부는 치밀해서 질이 좋은 가죽원료가 되고 있다.
품종
소에는 형태·생리적 특성 등에 따라서 여러 가지 품종이 있다.
용도에 따라서는 우유를 주목적으로 할 때에는 유용종, 고기를 주목적으로 할 때에는 육용종, 노동력의 이용을 주목적으로 할 때에는 역용종으로 구분한다.
대체로 그 이용가치 전체를 100으로 할 때 위의 세 가지 중 어떤 한 가지 목적에 이용되는 비율이 70∼80이상을 차지할 때에는 이용되는 용도의 명칭을 붙이고, 두 가지 또는 세 가지의 용도가 서로 겹쳐서 그 비율이 비슷할 때에는 겸용종이라 한다.
유용종에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육되고 있는 네덜란드 원산의 홀스타인(Holstein)을 비롯하여, 영국 원산의 건지(Guernsey)·저지(Jersey)·에어셔(Ayrshire) 등이 있으며, 육용종으로 유명한 것은 역시 영국 원산의 쇼트혼(Shorthorn)·해리포드(Hereford)·애버딘앵거스(AberdeenAngus)와 프랑스 원산의 샤로레(Charoray), 열대지방 원산의 브라만(Brahman)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해리포드·샤로레 등의 품종은 최근 우리나라 재래우의 육용능력 향상을 위한 개량에 많이 이용되고, 브라만은 일찍이 제2공화국 때 제주도 송당목장에 도입되어 사육된 일이 있으며, 쇼트혼 등도 일제시대 한우개량에 이용이 시도된 일이 있다.
한우와 중국의 황우(黃牛) 등은 대표적인 역용이었으나 한우는 최근 육용으로 개량이 진행되고 있고, 일본의 화우(和牛)는 과거 역용종이 육용종으로 이미 개량된 것이다.
생태
소는 발육상태에 따라서 조숙종(早熟種)·중숙종(中熟種)·만숙종(晩熟種) 등으로 나누어져 체격과 생태에 차이가 있다.
소는 대체로 조숙종은 생후 14∼18개월, 만숙종은 18∼24개월이면 번식에 이용할 수 있다.
약 280∼285일간의 임신기간을 경과하여 출산하면 포유기간 3∼5개월을 거친 뒤 사료를 먹기 시작한다.
소의 치아는 문치(門齒)·우치(隅齒)·전구치(前臼齒)는 유치(乳齒)로 나타났다가 나중에 영구치가 나오고, 후구치(後臼齒)는 처음부터 영구치로 나타난다.
유치의 교환도 소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중숙종에서는 만 4세까지 유치의 교환상태로 연령을 정확히 감정할 수 있다.
후구치가 완전히 다 나는 시기는 중숙종의 경우 26개월 후가 된다.
건강한 소의 호흡 수는 환경과 몸의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수소는 1분에 20∼30회 정도이며, 맥박은 수소 40∼56회, 암소 70∼90회이고, 체온은 평균 38.5℃이다.
체질은 유용종 또는 육용종에 많은 정미한 체질, 외견상 활발하여 보이고 식욕이 왕성한 강장한 체질, 골격이 발달하고 사지가 커서 주로 역용으로 이용되는 조야한 체질이 있다.
성질은 일반적으로 온순한 편이지만 품종과 개체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신경질:
동작이 경쾌하고 약간의 자극에도 흥분해서 다루기가 곤란하며 정미한 체질에 많다.
다혈질:
아주 온순한 것으로 역용종에 많다.
임파질:
온순의 도를 넘어서 신경작용이 둔하며 육용종에 많다.
[한우의 특성]
한우는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 고유의 역용종으로, 수천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품종이다.
성질은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면서도 영리하다.
털색은 적갈색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있고, 체격은 북부지방의 것은 크고 남부지방의 것은 작은 편이다.
젖은 겨우 송아지를 키울 정도로 나오고 유기는 3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쇠고기를 식용으로 하던 풍습이 있어 쇠고기의 맛은 좋으나, 한우의 주목적이 농경용·태용(駄用)·만용(輓用)이었으므로 그 방면으로 발달, 개량시킨 결과 고기의 생산량은 적다.
아무것이나 잘 먹고, 특히 산과(産科) 부문의 질병이 적은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의 전파경로
소의 기원
고대의 문명국들은 일찍부터 소의 이용법을 알고 있었고, 또 이것 때문에 생활의 터전이 잡히고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중국대륙에서는 서기전 2200년, 인도에서는 서기전 2500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서기전 4000∼3500년, 이집트에서는 서기전 3500년에 이미 정주적인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쟁기를 끄는 데에 소를 이용한 덕택으로 높은 문명국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1,800∼2,000년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세계적 분포
1982년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보고에 의하면 전세계의 소는 약 12억 2,700만 두인데 이 중의 약 60%인 7억 2,000만 두가 이른바 선진국에서 사육되고 있고, 남아메리카와 동아시아 제국에서 많이 사육하고 있다.
이것을 지역별로 다시 세분하여 보면 북아메리카 약 1억 3,000만 두, 서유럽 1억 두, 대양주 3,000만 두, 라틴아메리카 2억 8,000만 두, 아프리카 1억 3,000만 두, 극동지역 2억 7,000만 두, 근동지역 6,000만 두이며,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에 약 1억 5,000만 두의 소가 사육되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유우를 많이 사육하고 개발도상국 또는 미개발국일수록 육우·역우 등의 사육두수가 많다.
지세가 농경에 적합하지 않고 소를 이용할 수 없었던 지역 중 몽고·아프리카 내륙·서아시아의 일부 민족은 아직도 유목생활을 하면서 집소를 기르지 않고 있다.
물소는 약 1억 2,000만 두를 헤아리고 있는데, 그 중 약 80%가 동아시아의 열대 또는 아열대지방에서 농경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의 도입경로
우리나라의 한우계통에 대한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슈테그만(Stegmann,P.)의 설:
한우를 비롯한 동아시아계통의 소는 뿔이 짧다는 것을 근거로 그 원산지를 중앙아시아로 추정하고 여기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간 것이 한우, 서쪽으로 이동하여 간 것이 고대 이집트의 단각우(短角牛)라고 하였다.
슈테그만은 동아시아계통과 이집트 단각우의 원시형태를 원우의 지방형인 보스 나마디커스(Bos namadicus)에서 찾는다.
오크리치의 설:
시베리아 가우는 순수한 원우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서, 만약 시베리아의 가우와 동아시아의 가우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다면 동아시아의 소도 원우종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모지즈키(望月瀧三)·가나타니(金谷復五郎)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하다면 한우는 물론 한우와 같은 계통인 일본의 화우도 이 계통에 속한다.
켈레르(Keller,C.)의 설:
중국·우리나라·일본의 재래우를 남아시아계통의 소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혹소[瘤牛]의 조상인 반텡(Banteng)계통의 소로 본다.
위와 같은 골학적인 몇 가지 설에 대하여 일본의 아베(阿部) 등은 동아시아지방의 소에 대한 혈액형 연구에서, 일본의 화우는 한우에서 나왔고 한우는 제뷰의 계통이 약간 들어 있기는 하지만 순제뷰계통인 중국의 황우와는 다르고, 오히려 만주·몽고에 이르는 아시아대륙 중부지역의 소와 그 혈통이 가깝다고 하였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이나 ≪신당서 新唐書≫ 변진조(弁辰條) 등의 기록에도 부여에서는 육축(六畜)을 사육하고 이것들의 이름을 관명으로 사용할 만큼 중요시한 반면, 변한이나 진한에서는 소를 사육하기는 하였으나 부여처럼 중요시하지 않고 대부분 장송용(葬送用)으로 이용하였으므로 소의 사육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서기전 1, 2세기 때의 유적인 김해조개더미에서 소의 치아가 출토되어 우리나라에서의 소의 사육연대를 적어도 서기전 1, 2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유입경로를 확실히 밝히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
일본에의 전파
한우의 사육연대는 고고학적으로는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800∼2,000년 전의 일이다. 일본에 있어서의 소 사육은 이카다(鑄方貞亮)에 의하면 3세기에서부터 5, 6세기경이라고 하는데, 이 사실은 우리나라의 소 사육보다 약 200∼600년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육연대에 관한 고고학적·문헌적 자료와 더불어 전기한 소의 계통설을 종합하여 볼 때 일본의 소는 한우 계통의 소가 건너간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소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것뿐만 아니라 소의 생산물의 이용, 즉 가죽다리기[鞣製]·우유음용 등도 우리나라에서 전파되었다.
≪일본서기≫ 고구려 관계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가죽다리기는 피혁공인 고구려인 스루기와 다루기가 일본에 그 기술을 전파하였고, 우유의 음용은 중국에서 이주하여 온 지총(知聰)이 우리나라 남부에서 거주하다가 내외전·약전·명당도 등을 가지고 일본에 귀화하여 가르쳐주었다.
지총의 아들인 복상(福常)도 일본으로 가서 고도쿠왕(孝德王)에게 우유를 진상한 공으로 화약사주(和藥使主)라는 성을 받았다.
소의 이용과 역사
[희생용]
고대에 있어서 소 사육의 가장 큰 목적은 희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유군사시역제천살우관제이점길흉제해자위흉합자위길(有軍事時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吉)”이라 하여 군사가 있을 때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그것이 벌어져 있으면 흉한 징조이고 합쳐져 있으면 길한 징조라고 점쳤다 한다.
이와 똑같은 기록이 ≪진서 晉書≫ 부여조에도 실려 있다.
이 사실은 소를 희생용으로뿐만 아니라 점술용으로도 이용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의 일파라고 하는 백제에서는 ‘부지승우마우마진어송사(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라고 하여 소를 기르는 목적이 순전히 순장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3세기에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스키토시베리아(skytosiberia) 문화에 이러한 풍습이 있었고, 중국대륙에서도 같은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희생의 풍습은 북쪽의 대륙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다시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제천(祭天) 후 쇠고기와 그 밖의 산물의 사용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식용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비록 제천행사 뒤에 사람이 식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용에 불과하고 주목적은 희생에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이와 같은 희생의 풍습은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왔다.
궁중의 희생용 동물을 관장하던 관청은 고려 문종 때에 그 제도가 완비되어 장생서(掌牲署)라 하였고, 조선 태종 때에는 전구서(典廐署)라 하다가 세조 때에 전생서(典牲署)로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농신(農神)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소를 바쳐 제사를 올렸다.
이 제단을 선농단(先農壇)이라 하였으며 해마다 풍년을 빌기 위하여 경칩 후 첫 해일(亥日)에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냈다.
선농제에 즈음하여 임금에게 바친 헌시 가운데에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해서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나이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선농제에서는 반드시 소를 희생의 제물로 하고 이것을 탕으로 하여 많은 제관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경
우리나라의 남쪽지방은 지리적으로 한문화의 영향력이 약하였고 환경조건도 목축보다는 어로와 농업이 알맞아 미숙한 농업을 영위하였다.
그러다가 뒤늦게 들어온 북방의 문화와 도작(稻作)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삼국유사≫ 유리왕조(儒理王條)에 ‘제이사급장빙고작차승(製犁耜及藏氷庫作車乘)’이라 한 기록으로 미루어 신라 전기인 3, 4세기경에는 이미 쟁기 등의 농기구를 제작하여 논밭을 갈고 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하고 수레를 만들어 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경을 시작하였다는 기록은 그보다 훨씬 뒤인 지증왕 3년(502)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이때에 비로소 소로 논밭을 갈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보다 먼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하간 인력에 의한 경작용 기구인 도끼·괭이·가래·낫 같은 것에 축력을 이용할 수 있는 쟁기·보습 같은 농기구가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농업기술상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축력에 의한 작업의 능률성과 인력의 피로감소, 심경의 가능성 등은 생산력 증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백제에 있어서는 우경이나 우차의 이용에 관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시대에 유입된 대륙문화 속에 우경기술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우차법
≪삼국사기≫에는 신라 눌지왕 22년(438) 백성에게 소로 수레를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우차법도 역시 문헌의 기록보다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이때부터 시작된 우차의 법이 민간에 이용됨으로써 교통·운반의 수단으로 경제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왔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안악고분벽화에도 바퀴가 큰 이륜차의 가마, 마구간 같은 것, 여물을 먹고 있는 소의 모습과 지금의 한우처럼 코뚜레를 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경주98호고분에서도 진흙으로 만든 우차가 출토된 것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는 소의 이용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래 희생용으로 쓰던 소가 수레를 끌고 논밭을 가는 데에 쓰게 된 것은 철의 사용이 무기제조에 국한되어 있다가 농기구 제작에 이용된 것처럼 농업사상 혁명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가 농업경영의 한 요소가 됨으로써 이때까지 관련성 없이 떨어져 있던 농업과 목축의 관계가 축산이 농업 속에 포함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소에 관계된 농기구
한사군의 설치로 우리 나라의 북방 대동강 유역에 있던 토착민의 원시농업은 한나라의 발달된 철기문명을 받아들여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많은 철제농기구 중에는 도끼·괭이뿐만 아니라 소에 관계되는 쟁기로 추정되는 것도 있었고, 김해패총에서도 철제농기구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소에 관한 농기구도 기원이 오래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소를 농사에 이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경(牛耕) 때문이며, 따라서 이에 필요한 쟁기와 부수품이 소에 관한 농기구의 주가 된다.
쟁기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 유리왕조의 ‘제여사’라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는 쟁기를 뜻하고 사는 보습을 뜻하는 것이다.
마소에 매어서 흙덩이를 부수는 데 쓰는 쇠스랑, 모심기를 하기 전에 논을 고르는 데 쓰는 써레 등이 우경에 필요한 연장들이다.
우경과 농업발달
도끼·괭이·가래·낫·꼬챙이와 같은 인력경작농구에 의존하여 오던 원시적인 농업기술에서 축력을 이용하여 쟁기로 논밭을 갈게 되는 기술로의 전환은 농업기술사상 실로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인력 대신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훨씬 능률적이고 보다 넓은 면적의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심경이 가능해짐으로써 토양을 부드럽게 하고 통기를 조장하여서 토질을 개선하고 비료용량을 확대하여서 비효를 높이며 노력의 이용합리화 등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에 큰 진전을 가져왔던 것이다.
역용(役用: 농사나 수레 등을 부리는 데에 씀)은 바꾸어 말하면 소의 힘을 작업에 이용하는 것인데 힘은 작업의 능력에 따라 견인력과 부중력으로 표현한다.
한우의 견인력을 체중에 대한 백분율로 표시하면 암수 평균 80% 정도인데 물소는 113%, 심멘탈·앵거스 등은 130%에 달한다.
한우는 온순하고 인내성이 있으며 기민성이 있어 작업능률이 높다.
부중력에 있어서는 체중에 비하여 큰 편으로 중국의 황우를 제외하고는 가장 세다.
작업속도는 부리는 사람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대체로 논을 갈 때의 속도는 0.5m/sec, 달구지를 끌 때와 걸어갈 때는 0.8∼1m/sec정도이다.
한우 한 마리는 하루 논 4∼5㏊, 밭 6∼8㏊를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한우를 역용으로만 사용한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경지면적에 필요한 수는 50만∼60만 두 정도가 된다.
농경의 기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역용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하된 반면, 식생활의 향상으로 인한 쇠고기의 소비는 증가하는 추세에 있어 한우를 육용형으로 개량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고, 아울러 더 많은 수의 소가 필요한 실정이다.
육용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선사시대 부여에 인접하여 있던 읍루족에 대한 기록 가운데, 그 풍속이 돼지를 좋아하여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는 풍속이 있었다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가축을 식용하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제천 때 소를 희생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다. 제사용으로 사용한 가축의 고기를 그대로 버렸을 리는 만무하므로 식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가축을 길러 그 고기를 식용으로 하고, 그 요리방법도 계속하여 여러 가지로 개발하였으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구려를 통하여 삼국에 퍼진 불교의 식육금단사상은 고려 말까지 긴 세월에 걸쳐 식육에 결정적인 제약을 가하고 축산발전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시대로 내려와서는 유교적인 계급사상과 인의 사상도 식육저해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불교적인 살생금단과 유교적인 인(仁)의 영향
불교의 오계 중 첫째인 살생의 금단은 신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법흥왕 16년(529)과 성덕왕 4년(705)·11년(711)에는 ‘하령금살생(下令禁殺生)’ 또는 ‘금살생(禁殺生)’이라 하여 왕명으로 도축을 금하였다.
백제에서도 법왕 때 ‘하조금살생방민가소양응전지류분어렵지구(下詔禁殺生放民家所養鷹鸇之類焚魚獵之具)’라 하여 가축의 도살은 물론 사냥용으로 쓰는 매와 새매도 기르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어로 도구까지도 불태워 살생을 금하는 범위는 물고기에까지 이르러, 일반 국민들까지도 물고기조차 입에 댈 수 없게 된 정도이었던 것이다.
고려 때에는 불교가 국교이었던 관계로 금살령은 더 엄격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정사(正史)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드물고 다만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그 편모를 엿볼 수 있다.
“기정심인호불계살고비국왕상신불식양시역불선도재(其政甚仁好佛戒殺故非國王相臣不食羊豕亦不善屠宰)”라 하여, 극히 일부의 상류계급에서만 육류를 먹고 일반 백성은 불교를 좋아하여 살생을 하지 않으므로 도살하는 방법도 서툴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는 배불숭유정책으로 일반 국민에 대한 금살의 굴레는 풀어지고 오히려 식육을 권고하는 처지였지만 인의 사상은 소에서 젖을 짜는 것조차 가엽게 여겼다.
소는 영농에만 사용하여도 항상 부족한 상태이었기 때문에 자주 우마의 금살령을 내렸고, 일부 상류계급에서만 먹던 우유의 금식령도 가끔 내렸다.
뿐만 아니라 식생활의 기초가 유럽의 육식문화권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미식문화권(米食文化圈)에 속하고 있어 밀을 주로 먹는 서구사람과 달리 고기를 덜 먹어도 어느 정도 건강은 유지할 수 있었다는 등의 조건과, 식용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동식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기독교문화에 따른 가축의 사육자·도축업자 등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반면에 불교적 살생금단이나 유교적인 천민사상의 작용도 대단히 컸다.
현재에 이르러 근대문명에 접함에 따라 모든 면에서 서구화하는 가운데서 경제력의 향상으로 인한 육식 경향은 상승일로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 한구석에 유교적인 실업기술천시의 의식이 잠재하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월에 따라 많이 진보되고 축산도 발달해서 동물성 식품과 식물성 식품의 섭취비율이 영양적인 적정수준에 도달할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내다 보인다.
쇠고기요리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쇠고기를 많이 먹어온 편으로 그 요리와 이용법도 상당히 발달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생육용이고, 가공저장법은 외국에 비해서 비교적 뒤진 편이다.
쇠고기회(膾): 수육(獸肉) 가운데에서 회로 이용되는 것은 쇠고기뿐이다.
가늘게 저민 것을 회라 하고 굵게 저민 것을 헌(軒)이라 하며 양념간장에 찍어 먹는다.
고기구이[炙]:
고기구이에는 쇠고기뿐 아니라 다른 수육도 이용되지만, 특히 우리 나라의 불고기·불갈비 등은 독특하고 훌륭하여 장차 세계적인 식품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포(脯):
우리나라에서는 쇠고기를 비롯한 사슴고기·멧돼지고기 또는 말고기 등의 저장방법으로서, 이것을 말려서 포로 하는 방법이 발달하여 왔다. 고기를 얇게 썰어서 가미하지 않은 것을 포라 하고, 생강·육계(肉桂) 등을 가미한 것을 수(脩)라고 한다.
국[羹]과 탕(湯):
국으로 이용하는 것은 주로 전육이고, 꼬리와 엉덩이뼈 등은 곰탕, 갈비는 갈비탕, 네 다리는 족탕, 그리고 여러 가지를 섞은 설렁탕 등이 있다.
수육[熟肉]과 편육(片肉):
쇠머리를 곤 살코기 부분을 수육이라 하고, 머리껍질과 뼈에서 나온 젤라틴(gelatin)을 굳힌 것을 편육이라 하며,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특유의 방법이다.
장조림:
살코기를 단독으로 또는 풋고추·마늘 같은 것과 함께 우리나라 고유의 간장에다 넣어 조린 것으로 역시 요리법의 하나이다.
이 밖에 염통·콩팥 등은 불고기와 수육의 재료로, 피는 선짓국이나 순대의 원료로, 양·간은 회, 곱창은 국과 곱창구이·탕 등의 원료로, 골·고환 등은 삶아서 술안주 등으로 버리는 것 없이 이용되고 있다.
우유의 음용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우유문화권에서 벗어나 있지만 우유의 음용은 불교문화를 타고 일찍이 들어온 흔적이 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에 우유의 음용을 전한 것이 우리나라라는 사실이나, ≪삼국유사≫에 제호(醍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이를 잘 입증하여 주고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문헌에는 우유음용에 관한 기록이 별로 실려 있지 않아 보다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고려에서는 명종 때 타락죽을 만들어 먹은 일이 있고 충렬왕 때에는 타락죽을 명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왕 11년(1385)에 왕이 사냥가는 도중에 우유소를 지나가다가 소가 수척한 것을 보고 선부에게 우락(牛酪)을 바치지 말라고 명하였다는 일화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왕실 또는 상류계급에서는 우유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 제도는 계승되었다.
수(酥)·낙(酪) 또는 타락죽이란 어떤 것인가? 중국의 농서인 ≪농정전서≫의 설명을 보면 3, 4월에 우유를 짜서 불에 조려서 냉각한 뒤에 유피를 걷어내어 수를 만들고, 그 나머지에 기성락(旣成酪)을 첨가하여 체온 정도의 온도로 발효시켜 응고시키면 낙이 된다고 하였다.
수는 지금의 크림(cream)과 같은 것이고 낙은 지금의 치즈(cheese)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내의원조우유낙이진(內醫院造牛乳酪以進)’이라 하여 낙을 만들어 왕이나 기로신(耆老臣)에게 주었다고 한다.
≪규합총서 閨閤叢書≫에는 이 낙으로 끓이는 타락죽의 조리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타락죽은 물에 불린 쌀을 맷돌에 갈아서 체에 받쳐 앙금을 가라앉힌 다음 그 앙금으로 잣죽 정도의 묽기로 죽을 쑤다가 반쯤 익었을 때 우유를 부어 익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는 우유음용이 일반화되지는 못하였지만 예로부터 일부나마 이것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1902년에 외국에서 개량종 젖소가 들어온 것을 효시로 하여, 일제시대에는 주로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부근에 우유목장이 경영되고 비로소 우유의 판매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수요는 주로 일본인들 사이에만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유음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복 후 6·25전쟁을 거쳐 196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낙농업은 보잘 것 없어서 서울 근교의 얼마 되지 않는 젖소에서 생산되는 우유도 서울 시민이 소비하지 못하고 남아도는 형편이었다.
그 뒤 196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낙농진흥정책과 경제발전에 힘입어 유용의 홀스타인종이 다수 도입되고, 우유와 그 가공품의 소비가 대중화하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유우사육두수는 총 42만 1,746두에 이르고 있다.
기타
소를 도살할 때 나오는 여러 가지 부산물은 식용 이외에 공업용·약용·미술품의 재료로 쓰이고 있다.
뿔과 발굽
소의 뿔은 활과 같은 무기, 우산·칼 등의 공산품, 인재(印材)와 담배물부리 같은 세공품의 재료로 쓰이고, 발굽은 단추·제유(蹄油)·비료·사료 등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우피
우피는 다른 동물의 가죽보다 질기고, 특히 한우의 가죽은 질이 좋아서 그 용도가 대단히 넓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죽다리기가 일찍부터 발달하고, 삼국시대에는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기술을 전파할 정도였다.
용도는 다양하여 가죽신·가방·옷·벨트·지갑 등의 공산품 제조에 이용되고 있다.
뼈와 건(腱)
이러한 부산물로는 아교와 젤라틴을 만든다.
아교는 목공용 접착제·제지용 먹·인조상아 등의 원료로 쓰이고, 젤라틴은 아이스크림·세균배지(細菌培地) 등으로 이용된다.
뼛속에서 나오는 골유(骨油)는 비누와 초의 원료로 쓰이고, 뼈는 단추·젓가락·도장 등으로, 또는 사료용 골분, 의료용 골탄, 설탕의 정백용 등으로 쓰인다.
내장과 피
소의 내장은 식용으로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이용된다.
창자는 테니스라켓이나 악기의 줄, 수술용 봉합사의 원료로 쓰이고 위(胃)에서는 펩신·렌넷을, 이자에서는 인슐린·트립신·판크레아틴, 간에서는 조혈해독제·성장촉진호르몬, 담즙에서는 강장제와 진통제, 갑상선에서는 티록신, 부신에서는 아드레날린, 생식기에서는 호르몬제재 등을 추출한다. 피는 제과·약품·접착제 등의 원료로 쓰이고 혈분은 사료로 쓰인다.
털
소의 털은 쿠션·의자·침대 등의 충전용으로 사용하고 담요·띠·머플러·솔 등의 제조원료로 사용된다.
일제시대나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옷감의 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우황
소의 담석을 말하는 것으로 담석증에 걸린 병우(病牛)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모양은 구형 또는 타원형·둔각삼각형이며 쪼갠 면에 황갈색 또는 적갈색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 특산약품의 하나로서 오늘날까지 귀한 약으로 쓰이고 있는데, 예전에는 인삼과 함께 당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성덕왕조·경덕왕조·혜공왕조·경문왕조 등에는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문무왕 2년조에는 김유신이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 우황 19냥을 증정하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 약효는 ≪동의보감≫에 의하면 “혼을 안정시키고 사기(邪氣)를 멀리한다. 또 간질·경계(驚悸)·중풍·소아백병을 다스린다”고 한다.
특히,우황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 우황청심환은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었다.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에서도 “납일에 내의원과 여러 영문(營門)에서 각종 환약을 만드는데 이와 같은 풍속은 공사 및 경향 할 것 없이 보급되어 있다.
이들 환제 가운데서 특효가 있는 것은 청심환과 소합환(蘇合丸)이다.
연경(燕京) 사람들은 청심환을 기사회생의 신약이라 하여 우리 사신이 연경에 들어가기만 하면 왕공·귀인이 서로 다투어 이것을 달라 하니 들볶이는 것이 귀찮아 처방을 가르쳐 주어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약반을 못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연경에는 우황이 없어서 타황(駝黃)을 대용하기 때문에 처방에 따라 만들어도 효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그 명성을 기록하고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이 우황청심환이 졸중풍에 인사불성하고 구안(口眼)이 와사(喎斜: 입과 눈이 한쪽으로 비틀어져 쏠리는 병)하고 수족이 불수(不隨)하는 등의 증상에 유효하다고 하였다.
우황청심환은 우황·인삼·산약(山藥: 마)·신국(神麴)·대두황권(大豆黃卷: 건조한 콩나물)·금박 등 29종의 약물을 가루내어 조고(棗膏: 대추기름)와 꿀로 반죽하여 만든다.
민속
소에 관한 우리 민족의 관념
소는 생구(生口)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식구는 가족을 뜻하고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데, 소를 생구라 함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소가 힘드는 일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며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값이 비싸서 재산으로서도 큰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정월 들어 첫번째 맞은 축일(丑日)을 소날이라 하여, 이 날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소를 잘 먹였다.
도마질이나 방아질을 하지 않고 쇠붙이연장을 다루지도 않았다.
도마질을 하지 않는 것은 쇠고기로 요리를 할 때에는 으례 도마에 놓고 썰어야 하는데 소의 명절날이므로 이와 같은 잔인한 짓을 삼간다는 뜻이다.
방아는 연자방아를 의미하는데, 연자방아는 소가 멍에에 매고 돌리는 것이므로 자연히 소에 일을 시키는 결과가 된다.
방아질을 하지 않는 것은 연자방아를 찧지 않던 풍속이 그 밖의 방아에까지 번진 것이다.
쇠붙이연장을 다루지 않는 것도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풍속이다.
한편, 우리 민속에는 기형이나 이상한 털색의 새끼가 태어나면 음양오행과 관련시켜 길흉을 예측하는 습속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84년 고타군주가 신라 사파왕에게 청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청우는 털색이 검은 소로 추정되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늙은 소나무의 정이 청우로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청우는 선인·도인·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소에 관한 일화·전설
우리는 소를 한 집안의 가족처럼 여겼기에 소를 인격화한 일화가 많다.
인의 사상에 따라 소를 인격화한 이야기로는 황희(黃喜)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황희가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농부에게 묻기를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느냐?” 하니 농부는 황희 옆으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쪽 소가 더 잘 갑니다”라고 하였다.
황희가 이상히 여겨 “어찌하여 그것을 귓속말로 대답하느냐?”고 물으니, 농부는 “비록 미물일지라도 그 마음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한 쪽이 이것을 질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는 것이다.
김시습(金時習)이 소의 꼴 먹는 것과 불자(佛子)가 설법을 듣는 것을 비교한 것 등도 있다.
소의 우직하고 인내력 있고 충직한 성품을 나타내는 전설이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에는 권씨라는 농부의 생명을 구하고자 호랑이와 격투 끝에 죽은 소의 무덤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개성에는 눈먼 고아에게 꼬리를 잡혀 이끌고 다니면서 구걸을 시켜 살린 전설이 전해지는 우답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나경의 습속
우리나라의 관동·관북지방에는 예로부터 나경(裸耕)의 습속이 있었다.
나경이라 함은 정월 보름날 숫총각으로 성기(性器) 큰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어 목우(木牛)나 토우(土牛)라 하는 의우(義牛)를 몰고 밭을 갈며 풍년을 비는 민속이었다.
땅은 풍요의 여신이요 쟁기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산력을 지닌 대지 위에 남자의 성기를 노출시킴은 풍성한 수확을 비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풍습이 관동지방에만 있고 남쪽에 없었다는 것은 토질이 척박하여 곡식의 결실이 잘 되지 않는 데서 풍년을 비는 마음이 절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소싸움
두 소를 마주세워 싸우게 하고 이를 보며 즐기는 놀이로서, 보통 추석날에 벌인다.
싸움날 아침이 되면 소 주인은 소를 깨끗이 씻어준 뒤에 여러 가지 천으로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에는 각색의 아름다운 헝겊으로 장식하며 목에 큰 방울을 달아준다.
순서에 따라 도감이 호명하면 주인이 소를 끌고 들어온다.
이때 소와 소 사이에는 포장을 쳐서 가려두어 미리 싸우지 않도록 한다.
승패는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거나 밀리는 소가 패하는 것으로 한다.
주로 경상남도 지방에서 성행하였으며, 강원도·황해도·경기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었다.
양우養牛 와 축산
우상(牛相)
소를 감정하는 것이다.
소의 형태를 관찰해서 새끼를 잘 낳을 상, 건강할 상 등을 조목조목 열거한 것인데 이 방법은 중국의 ≪농정전서 農政全書≫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택일
예전에는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그러했듯이 소를 사들이거나 외양간을 짓거나 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음양오행에 기초를 둔 택일을 해서 길일이라 하는 날을 받아 시행하였다.
소를 사거나 송아지를 새로 들여오는 날을 납우일(納牛日)이라 하였다.
사양관리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소기르는 방법은 봄이 오면 외양간을 깨끗이 쳐내고 다시 겨울이 닥치기까지는 보름마다 청소를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농사철이 되어 밭갈이가 시작되면 낮에는 풀을 뜯기고 밤중에 죽을 많이 먹여서 새벽에 끌고 나가서 일을 시키는 것이 소를 부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삼복 더위에 소를 부릴 때면 야경(夜耕)을 하는 경우가 많고, 소를 한 식구같이 대접하여서 항상 사랑과 아낌으로 관리하였다.
외양간은 사랑채의 부엌과 가까이 설치하고 통기가 잘 되도록 배려하고, 외양간 위층은 가마니·짚 등의 창고로 삼아 보온의 효과를 겸한다.
사료는 아침 저녁으로 삶아서 주는 것이 관습이었으며, 이슬이 묻은 풀은 먹이지 아니하고 일철에는 힘을 쓰게 하기 위해서 특히 콩을 많이 먹였다.
한우의 사육과 개량은 일제시대에 들어서서 숙사(熟飼)로부터 생사(生飼)가 장려되고, 외국의 육용종·유용종 등을 도입해서 이에 의한 품종개량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총독부는 한우의 역용으로서의 순수번식에 의한 능력향상을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광복 후에는 경제력의 향상, 영농의 기계화, 육류의 수요증가 등의 여건변화로 1960년대 후반에 극심한 공급부족으로 인한 ‘쇠고기파동’을 겪기도 했다.
그리하여 잡종번식에 의한 산육량 증가와 순수번식에 의한 육용능력의 향상을 꾀하여, 경진대회·인공수정 등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시대감각에 맞는 새 품종개량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외양간의 보온뿐만 아니라 덕석[牛衣]을 만들어 등을 덮어주었다. 덕석을 입힐 때에는 소의 복부의 피부에 상처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명끈으로 부드럽게 하고 솔질도 하지만, 엉덩이는 분뇨가 말라 붙어 지저분한 것도 많았다.
우역(牛疫)
우리나라의 우역은 시베리아와 몽고지방을 경유해서 들어온 소의 무서운 전염병으로 예전에는 매 3, 4년 간격으로 큰 피해를 냈다.
문헌에 우역이라고 기록된 전염병 중에는 지금의 과학적인 정확한 병명인 우역 이외에 소의 다른 급성 전염병도 포함되어 있다.
우역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이미 고려 인종 20년(1142)의 ‘이서남로주군우마역견일관분도기양(以西南路州郡牛馬疫遣日官分道祈禳)’이라고 한 것을 비롯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이 때에는 이것을 천재지변의 하나로 알고 음양오행에 의해서 다스리려고 일관(日官)을 파견, 치제하게 했던 것이다.
이른바 경술국치를 당하던 1910년 부산에 우역혈청제조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우역 예방에 착수하여, 1915년에 <수역예방령>이 제정되고, 가키사기(蠣崎) 등 일본인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1932년에 이르러 우역은 이땅에서 사라졌다.
축산
축산행정
삼국시대 이전의 상황은 문헌에 상세하지 않으나 고려 현종 때에는 관영목장의 사료 급여량을 정하고, 의종 때에는 진일보해서 오늘날의 사양표준 같은 것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를 관장하는 관청으로 전목사(典牧司)·사복시(司僕寺)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관영목장의 소는 병조가 관할하는 사복시에서, 소를 비롯한 축산의 일반행정은 호조에서 맡아 보다가 갑오경장 이후에는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일제시대에는 농림국(農林局) 안에 축산과(畜産課)를 두어 축산과 수의행정을 담당하고, 광복 후에는 여러 가지 변천을 거쳐 현재 축산국 안에 축정·가축위생 등 여러 개의 과를 나누어 각기 분장사무를 집행하고 있다.
우마적(牛馬籍)과 낙인(烙印)
일찍이 조선 초기인 1398년(태조 7)에 ‘제주도축마점고사내헌우마적(濟州島畜馬點考使來獻牛馬籍)’이라 하여 제주도목장의 우마적을 조정에 바쳤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이전부터 각 목장에 우적 또는 마적이 비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소의 국외 반출을 감시하기 위해서 낙인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장
삼국시대 신라의 말목장인 거(阹)를 효시로 하여, 고려시대에도 용양(龍驤: 지금의 황주)을 비롯한 내륙과 서남해 제도에 많은 관립목장이 국초부터 설치되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계승되었다.
이들 목장은 주로 군용에 대비한 목마가 목적이었지만 이에는 소도 상당수 사육되고 있었다.
소는 농경용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군용 또는 운수용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국립목장 또는 둔전(屯田)에서 사육하였고, 민간에 대해서도 적극 권장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159개 소의 목장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40개 소가 폐장이 되었다. 그 뒤 1668년(현종 7) 허목·김석주 등이 작성한 목장지도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복 이후
공업화에 따른 경제성장과 유육(乳肉) 수요의 급증, 농기계의 발달과 사료체계의 현대화에 힘입어 뚜렷한 산업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광복 전에는 필수적인 농경의 역우로서 호당 1, 2마리씩 사육한 데 반하여 광복 후에는 농기계의 발달, 특히 경운기가 산촌에까지 보급됨에 따라 밭갈이하는 역우가 불필요하게 되었다.
서구적 식생활문화의 확산과 산업화의 촉진으로 소 사육의 용도가 쇠고기와 우유 생산목적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점차 사육 규모의 대형화·집단화를 통해서 전업형태, 즉 목장으로 발전되고, 특히 1970년대부터는 낙농이 전업축산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괄목할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사료체계와 사양관리 기법도 빠른 속도로 현대화되었으며, 종래의 자연교배 대신 인공수정이 보편화되고 첨단과학인 수정란 이식(embryo transfer) 기술을 도입하는 등 선진된 육종개량 방법을 통해서 고능력·고생산성 실현에 도전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젖소와 비육우 등 외국소의 대량 입식(入殖)으로 우리나라에도 다국적 가축품종시대가 열렸다.
경제성장과 소득향상으로 쇠고기와 우유의 수요가 크게 신장됨에 따라 유가공산업(乳加工産業)이 급격히 부상되는 등 구조적 측면에서부터 큰 변모와 발전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반의 충격적인 소값파동과 역대 정권의 공업화위주, 농업경시정책으로 인하여 사육농가의 소득기반은 부채경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1980년대 말 이후 국제간 농산물수입개방 압력의 가중으로 우리나라 축우사육기반은 또다시 불안정한 국면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축우산업은 다 아는 바와 같이 태양에너지의 순환이용성이 강한 농업의 한 분야이며, 농업 부문 중에서 가장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이다.
사료자원을 확보, 개발하는 문제로부터 사양 및 경영관리, 품종개량과 가축병리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지식산업인 동시에 상당한 투자자본이 수반되는 두뇌사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축산은 곡식 위주의 식생활전통과 1000만㏊(남한)에도 못 미치는 국토의 3분의 2(66.7%)가 산지이며, 연평균 1,350㎜ 내외의 강우량 중에서 60% 내외가 7∼8월에 집중되는 불리한 자연조건을 지니고 있다.
산업성장의 토대가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전문지식이 부족하며, 정부의 농업소외정책으로 기초적 지원(기반시설과 장비)이 전연 없는 상태에서 그간 일부 도시자본에 의한 산발적 진행을 보았을 뿐, 국토이용 측면에서부터 계획성 있는 개발성장을 이루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광복과 동시에 일본인 학자와 축산기술자가 철수함에 따라 한동안 축산지식과 기술의 공백을 이루었던 학문적 토대와 기술인력 문제는 1960년대 이후 기존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를 비롯해서 건국대학교를 선발로 여러 정규 축산대학과 전문대학이 창립되어 많은 전문인력이 배출되었다.
관민간의 연구소와 학회활동이 전개되고 일부 전업축산의 경험축적으로 축산지식의 기반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화폐가치 위주의 비교우위론이 주도하는 농업경시정책에는 변화가 없었다.
축산선진국의 예를 보면, 가파른 산지와 메마른 땅도 목축을 함으로써 비옥하게 만드는 이중효과를 도모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연간 700만t(1988년도 709만 2,000t)의 사료곡물을 수입하면서도 초지 조성이 가능한 100만㏊ 이상의 자원[國公有林野]을 산업적으로 이용할 발상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자연 및 인위적 조건하에서도 우리나라 축산은 1960년대 이후 낙농을 중심으로 일부 전업화에 발돋움하기 시작하였다.
공업화에 따른 경제의 고도성장으로 유육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급증되었으나 국내 축산물 생산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여 한때 쇠고기파동을 겪기도 하였다.
역대 정권 중 정부가 축산정책에 열성을 보인 것은 쇠고기파동 후의 한 차례뿐인데, 상징적인 ‘산지초지개발 10개년계획(1982.10.15.)’도 당초 개발정책의지를 바로 상실하고 말았다.
외국산 생우를 대량 입식한 이 시책에 따라 1980년대 말에는 사육두수가 300만 두에 육박하기도 하였으나, 1981∼1984년까지 육우와 젖소(4년간 17만 5,395두) 및 외국산 쇠고기(20만 2,519t)의 무분별한 과다도입으로 사상 유례없는 소값파동을 초래하여 농가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 후 다시 감소추세를 보이기 시작한 축우사육두수는 1990년말 현재 한우와 육우 162만 1,654두, 젖소 50만 3,947두 합계 212만 5,601두이며, 2000년 말에는 한육우 159만 20두, 젖소 54만 3,708두 합계 213만 3,728두로 나타난바 있다.
1995년 이후 2000년 사이 한육우 사육두수가 259만두에서 159만두로 급격한 감소를 나타내고 있는 주된 요인은 우루과이라운드(UR)협정에 따른 우리나라 가축동물의 수입개방(2001년 완전개방) 으로 인하여 사육기반에 불안을 느낀 한우 사육농가의 기피현상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열강의 경제패권주의 상징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소위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의 파장은 국가적 지역 특성이 무시되는 점에서 특히 자연조건에 따른 생산원가 경쟁력이 크게 열세인 우리나라의 쌀과 가축(소)등 농산물의 생산기반 붕궤 및 산업적 종속화를 우려하는 세론이 대두되고 있다.
여기서 하나 기록해 두어야 할 사건은 21세기의 문턱에서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던 광우병 파동과 구제역은 전파억제를 위한 소의 대량도살 처분이 유럽지역을 풍미하게 되어 국제간의 축산물 유통에 혼란과 역현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 광우병은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영국에서 1985년에 시작되었으나 1996년부터 다시 크게 창궐하여 전 유럽을 전율케 하였는데 특히 그 병리의 원인체가 변형피리온(Prion 단백질 입자)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소(우제 동물)에게 동물의 골육분(骨肉粉)을 사료로 먹인데서 발생되었다.
원명이 소해면상뇌종(BSE)이라는 이 광우병은 그 쇠고기를 먹은 사람에게도 전염되어 크로이츠벨트 야콥(CJD)병을 발생시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우리나라 젖소의 개량사업은 1966년 한국홀스타인 등록협회가 발족되면서 등록사업을 개시한 이래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일부 기업목장에서 도입정액(導入精液)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사양관리 기술이 보급되어 국산정액을 생산, 보급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의 전국 평균 두당 산유량은 1980년대까지도 거의 답보상태였는데 주 요인은 근친퇴화 현상으로 평가되었다.
소수 제한된 종모우로부터 생산된 국산정액을 무분별하게 공급 및 반복 사용함으로써 전체 축군의 근친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능역검정사업은 한국종축개량협회와 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가 1979년부터 실시해 왔으나 참여두수는 선진국 수준에 비교가 안되는 초보적 단게를 맴돌고 있었다.
근친계수(近親系數)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지면서 계획교배 실시노력이 강조되고, 1980년대 초부터 수정란 이식기술의 도입 개발 등, 유전자 베이스의 육종사업에 높은 관심을 보인 이후 1만 ㎏ 이상의 고능력우가 점증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2001년 4월) 농업협동조합중앙회 검정사업에 참여한 젖소 80,902두 중 200일 이상 기준 산유량이 1만 ㎏ 이상되는 젖소 마리수가 511두로 발전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한우의 육종사업은 1970년대에는 순수한 우품종 유지 개량방안과 한우와 샤로레의 교잡 신품종 개발방안의 두가지 방안에서 시도 되었는데 육질이 양보다 주요시 되는 시대적상황에 따라 한국종축개량협회내에 등급부를 설치하고 부위별 등급제 실시 방안을 설정함으로써 순수 고유품종 개량방향으로 통일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황우석((黃禹錫)교수는 과학기술부 G-7 프로젝트(신기능 생물소재개발사업)을 통하여, 다 큰 젖소에서 떼어낸 체세포를 다른 소에서 체취해 핵을 제거한 난자와 융합시킨 대리모에 이식시켜 키워온 복제 송아지를 1999년 2월 12일에 경기도 화성의 한 농장에서 성공시킨 데 이어 한 달 뒤인 3월 27일에는 복제 한우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국내 연구진이 체세포 방법으로 우수한 형질의 젖소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복제 송아지를 태어나게 한것은 처음이다.
이는 1997년 세계최초로 로슬린연구소 연구팀이 복제양(羊) “둘리”를 탄생시킨 영국과 소를 복제한 일본과 뉴질랜드, 그리고 쥐를 복제한 미국에 이어 5번째로 다 자란 동물(소)을 체세포 복제로 성공시킴으로서 우리나라의 생명공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앞으로 유전 능력이 개량된 복제 한우를 전국에 보급할 경우 우리 축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크게 높아질 것이며, 머지 않아 싼값에 우수한 육질의 복제된 한우를 먹을 수 있게 될것으로 기대된다.
한우 개량의 구조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하여 1990년∼1994년까지 전국에 선별적으로 250개소의 축산단지를 설치하고 우수 유전자 발굴과 연대별 전국진흥대회를 개최하여 출품축의 능력검정사업을 꾸준히 지속한 결과 600㎏미만(595.88) 한우 체중이 800㎏(789.3)으로, 체고 138㎝에서 142㎝로, 체장 159.59㎝에서 168.8㎝로 신장을 보게 되었으며, 유통시설과 유통망의 체계화 개선에도 주력하고 있다.
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규합총서(閨閤叢書)』
- 『젖소의 개량과 등록관리』(한국육종개량협회, 2000)
- 『축산물 가격 및 수급자료』(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 1987)
- 『사료의 자립기반확립을 위한 조사연구』(한국산업경제연구원, 1986)
- 『한국식품사회사』(이성우, 교문사, 1984)
- 『한국의 축산』(농업협동중앙회, 1974)
- 『삼국지(三國志)』
- 『신당서(新唐書)』
- 『고려도경(高麗圖經)』
- 『육우사육현황』(농림부·한국낙농육우협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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