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0일 수요일

소련, Soviet Union , 蘇聯. (러시아) 3

소련Soviet Union , 蘇聯.   (러시아)

시련을 이기고 승리로 ,대조국전쟁(1941년 ~ 1945년).


소련은 독일로부터 불의의 기습을 받으며 2차 세계대전에 빨려 들어갔다. 
일찍부터 전쟁 위험을 감지했으면서도 소련군의 전쟁대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로 인해 소련은 2차대전 참전국 중 최대의 피해를 입게 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스탈린의 오판이 참화를 더 크게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스탈린은 이상하리만큼 독소 불가침조약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아마도 독일이 유럽 중서부의 지배기반을 채 다지기도 전에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을 공격해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6월 22일의 날짜까지 언급하며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각종 보고들이 쓸데없는 소리라며 일축됐고, 전쟁 전날까지도 전선의 소련군에는 독일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 일체의 행동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되고 있었다.

게다가 1930년대 말의 '대숙청'으로 군 고위 지휘관이 비교적 경력이 짧은 사람들로 대폭 교체됨으로써 군 전력도 크게 약화됐다. 
고위 지휘관을 양성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스탈린의 말이면 두말 없이 따르는 개인숭배 풍조도 스탈린의 오판을 부추겼다. 
엄청난 국민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중차대한 정책이 몇 사람만의 판단으로 결정됐고, 군사 전문가와 각급 지휘관들이 자율적인 판단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길을 막았던 것이다.

대비를 못한 소련군은 초전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국경지대의 비행장에서 800대의 전투기가 이륙도 못한 채 박살났고, 첫날의 공중전에서 1,200대를 잃었다. 

전선의 포탄창고도 손도 못 대고 점령당해 막대한 보급물자를 잃었다.

전선의 소련병사들은 물자도 충분치 못하고 후방 보급체계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했다. 
병사들은 결사항전을 했으나, 곧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독일군도 곳곳에서 끈질긴 저항에 부딪쳐 서유럽 전투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희생자를 냈다. 
7월의 스몰렌스크 회전으로 독일군은 모스크바 진입 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키예프는 83일, 오데사는 69일간, 세바스토폴은 6개월 이상 저항을 계속했다.

항전과 후퇴가 거듭되는 가운데 소련인의 조국애에 불이 붙었다. 
전선으로 보내달라는 노동자들의 지원이 쇄도했고, 병사들의 투지도 갈수록 높아갔다. 
도시의 방어에는 병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시민이 몸바쳐 참여했다.

900일간에 걸친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대조국전쟁사에서 영웅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41년 9월, 독일군이 시를 포위했다. 
비축식량과 연료는 얼마 되지 않았다. 

외부와의 연결로는 비행기와 라도가 호를 가로지르는 수로(겨울에는 호수 위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빙판 길이 생긴다)뿐이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도시는 포격과 공습으로 부서져갔다. 
시민과 병사들은 놀라울 정도의 투혼을 발휘하며 제자리를 굳게 지켰다. 
독일군은 끝내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소련국민의 용감한 저항은 겨울까지 유럽 러시아 거의 전역을 점령하겠다는 파시스트의 속도전 전략을 무산시켰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히틀러 군대의 불패 신화도 깨졌다. 
1942년 1월 말 점령군은 모스크바 · 툴라 지방에서 물러났다.

반히틀러 연합이 결성된 것은 이 무렵이다. 
소련의 반파시즘 연대제의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나라들이 호된 시련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파시즘의 잔혹성을 깨닫고 반파쇼 전선에 합류한 것이다. 
1941년 말엽, 미 · 영 · 소 3국은 히틀러 독일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협약했다. 
그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일본,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반히틀러 연합은 더 단단해졌다. 
1942년 1월 1일까지 23개국이 추가로 연합에 가입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체제를 떠나 모든 민족과 국가가 파시즘 세력에 맞서 싸우는 반파쇼 해방전쟁으로 변했다. 
반파쇼 세력의 핵은 초지일관 파시즘 타도의 깃발을 든 소련이었고, 무기생산량이나 전선의 길이, 전투의 강도, 모든 면에서 소련은 비길 데가 없을 만큼 온몸을 내던져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고 있었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북부와 중부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져들자, 독일군은 주력부대를 남부로 투입했다. 
1942년 여름, 파시스트 군대는 피로 피를 씻는 전투를 계속하여 볼가 연안의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까지 진출했다. 
도시의 서쪽 절반이 포위되고, 2차대전 중 가장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다.

11월 19일, 소련군의 주력부대가 도시의 북쪽과 남쪽에서 볼가 강을 건너, 도시의 서쪽을 포위하고 있던 적병들을 역포위했다. 
포위부대의 박격포가 일제히 불을 뿜는 것을 시작으로 소련군의 대공세가 시작됐고, 22개 사단의 파시스트 군대가 후방부대와 고립된 채 괴멸당했다. 
파시스트군은 볼가 인근의 전투에서 독소 전선에 투입된 병력의 약 1/4인 150만을 잃고 후퇴했다. 
이를 기점으로 전쟁의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갔다.

치열했던 카프카스 지역의 전투도 8개월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독일군이 물러나면서 종식됐다. 
1943년 봄, 남부방면 전투의 주된 전장은 드네프르 강 동안으로 옮겨갔고, 북부에서는 1943년 1월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이 풀렸다.


1943년 여름, 독일군은 교착상태의 중부전선 쿠르스크 근교에서 강력한 공격을 시도했다. 
파시스트 사령부는 북쪽의 오룔과 남쪽의 하리코프 방면에서 동시에 쿠르스크를 급습하여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고 모스크바 방면으로 공격을 확대하고자 했다. 
독소 전선 파시스트 군대의 1/3 이상이 이 전투에 투입됐다. 
최전방에는 최신예 중전차 부대와 자주포 부대가 포진했다.

7월 5일, 전투가 시작됐다. 
모든 전선에서 엄청난 포화가 쏟아져 한밤중도 대낮 같았다. 
독일군은 큰 희생을 치르며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35㎞까지 전진했다. 
쿠르스크는 좀처럼 무너질 줄을 몰랐다. 

소련군 사령부에서 쿠르스크에 1,200여 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투입했다. 
7월 12일, 대전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짐과 동시에, 소련군이 남북 양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8월 5일,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고, 파시스트 군대는 30개 사단이 박살 나면서 50여 만의 병사를 잃었다.

이후 소련군은 맹렬한 반격을 펼쳐 전선을 계속 서쪽으로 몰고 갔다. 
대조국전쟁과 2차대전의 기류가 급선회했다.
정규군과 함께 유격대(파르티잔)도 큰 활약을 했다. 
독일 파시스트 군대에 점령당한 지역에서는 개전 초부터 유격대가 조직됐고, 1942년에는 유격대 군단까지 등장했다. 

유격대 군단은 소련군 사령부와 긴밀하게 연락하며 전투를 벌였다. 
쿠르스크 전투가 치열할 때에는 독일군의 철도수송을 방해하는 '레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70개 부대, 총 10만여 명의 유격대가 '레일 전쟁'에 가담했다.


개전 후 2년 동안 유격대는 3,000량 이상의 파시스트 군용열차를 전복시키고 800개소 이상의 무기탄약고를 폭파했다. 
해방 직전에는 점령군의 후방에서 35만 이상의 무장 유격대가 활동했고, 정규군이 파시스트 군대를 쫓아내기 전에 이미 많은 지역이 유격대에 의해 해방됐다.


후방에서의 인민들의 희생적인 활동도 전쟁의 반전에 큰 역할을 했다. 
1941~1942년 소련군이 후퇴할 때 대규모의 공업시설 소개 작업이 행해졌다. 
2,500여 개 기업이 전선 인접지역에서 동쪽 지방으로 이전됐다. 
그중 절반은 1942년부터 재가동에 들어갔고, 갈수록 소련군에게 최신병기를 대량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전황은 점점 파시스트 세력에게 불리해져 갔다. 
1943년 중엽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점령당했고, 1944년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졌다. 
모든 전선에서 강력한 추격작전이 전개됐다. 
소련이 거의 전 국토를 해방해가던 1944년 6월, 미 · 영 연합군이 도버 해협을 건너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소련이 다른 연합국에 집요하게 요구해온 서유럽의 제2전선이 이제야 개설된 것이다. 
연합국은 모든 방면에서 히틀러 독일을 죄어들어갔다.


1944년 가을, 소련 영토를 완전히 해방시킨 소련군은 이제 동유럽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동유럽 인민들은 그에 앞서 이미 자력으로 파시스트 군대들을 물리쳐가고 있었다. 
소련군은 가는 곳마다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았고, 히틀러 편에 가담했던 루마니아 · 핀란드 · 불가리아 · 헝가리가 이제 거꾸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45년 4월 중순, 독소 전쟁의 최후를 장식하는 전투가 시작됐다. 
독일 파시스트 사령부는 베를린에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주코프 등 3명의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 3개 방면군의 합동공격이 시작됐다. 
포병대의 통렬한 준비사격이 끝난 후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밤을 대낮처럼 밝힌 가운데 전차부대가 적진으로 돌진했다. 
4월 25일, 베를린의 독일군 40만 명이 완전 포위됐다.

독일 파시스트 사령부는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거절했다. 
베를린 총공격이 시작됐다. 4월 30일, 마침내 독일 국회의사당에 승리의 진홍빛 적기가 꽂혔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5월 2일 베를린 수비대가 항복했다. 
5월 8일, 파시스트 독일은 베를린 근교에서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4년간의 독소 전쟁은 소련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세계지배를 꿈꾸던 히틀러의 야망이 소련군과 소련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소련, 강대국으로 떠오르다, 종전과 소련의 국제지위 격상(1945년).

1945년 5월 8일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5월 11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6년을 끈 유럽전쟁은 끝났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아시아 지배를 꿈꾸던 일본 제국주의는 한때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서태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전황이 반전되어 일본군에 후퇴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독일이 항복할 즈음, 일본은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의 점령지에서 거의 철수한 상태였으나, 아직까지도 500만여 지상군과 강력한 공군을 보유하고 마지막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일본 전투력의 2/3 이상이 중국대륙과 만주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독일을 항복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소련군은 얄타 협정에 따라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지 3개월 후인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해 들어갔다. 
8월 20일까지 만주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 관동군은 거의 분쇄됐고, 잔당들은 항복했다.

일본 점령하에 있던 우리나라에도 소련군이 진주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다. 
당시 오키나와에까지밖에 이르지 못했던 미국측의 분할점령 제의를 소련이 받아들여, 소련군의 남진은 38도선에서 멈추었다. 
한민족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은 8월 6일에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30만이 죽고 수십만 명이 방사능 피폭으로 큰 고통을 치렀다. 
그 위력에 일본인은 물론 온 세계가 경악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공할 핵무기가 등장한 것이다.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항복 의사를 밝혔고, 9월 2일 미주리 호 함상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세계 제패를 꿈꾼 파시스트 동맹의 추축국 세력은 세계평화를 지키려는 반파쇼 연합에 의해 타도됐다.

승리의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참전국 중에서도 소련의 피해가 가장 컸다. 
소련은 반파시스트 전쟁 중 가장 넓은 영토가 전장으로 변했고, 가장 긴 전선에서 가장 오랜 동안 치열한 전투를 했다. 
가장 많은 병사들이 전장에서 산화했고, 후방의 공장에서는 연합국 최대의 무기와 전투차량 · 군수물자를 생산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독일군도 독소 개전 이후 줄곧 전 병력의 2/3, 심지어는 3/4까지를 동부전선에 투입하여 소련군과 맞섰다.

2차대전 중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5,000만 이상이 사망했는데, 그중 절반인 2,700만 명이 소련인이었다. 
동유럽 해방전쟁에서만도 소련병사 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물질적인 피해도 엄청나, 전 국부의 약 1/3이 파괴됐다.

혹독한 희생의 대가로 소련과 소련인민은 커다란 영예를 안았다. 
종전 후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싸워 이긴 제일의 승리자로 부상했다. 
체제를 달리하는 서유럽 열강도 소련의 승전 기여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주도로 반히틀러 연합이 형성된 이후 소련은 가장 앞장서서 반파시스트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서유럽 열강 일부의 반소 감정과 반파쇼 전선 이탈 움직임을 누르고 세계인들 사이에서 세계평화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엄청난 전쟁물자의 투입, 가장 많은 병사의 참전, 연합국 성원으로서의 성실한 임무수행도 소련의 지위를 높이는 데 큰 몫을 했다. 

한 예로, 1945년 1월 독일 서부전선에서 영 · 미 연합군이 고전하고 있을 때, 소련은 영국수상 처칠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미처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 동부전선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소련군은 큰 희생을 치르며 서부전선 연합군의 숨통을 터주었던 것이다.


소련은 전쟁 중 카이로 · 모스크바 · 테헤란 · 얄타에서, 유럽 종전 후 포츠담에서 열린 일련의 연합국 수뇌회담에서 미국 · 영국과 함께 전쟁방침, 전후 파시스트 동맹국 처리문제, 전 세계 안전보장체제의 확립 등을 논의, 결정했다. 
소련은 연이은 회담에서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건설적인 결론을 유도했다. 
종전 후 소련은 국제무대에서 미국과 함께 양대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국제연합(UN)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2차대전에서의 소련의 분투와 승리는 전 세계에 10월혁명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제국주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에, 사회주의 세력은 크게 성장했다. 
동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소련의 간접 지원하에 또는 독자적으로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해가면서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성립했다.

그와 더불어,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어 제국주의의 식민지 체제가 흔들리면서 수십 개의 독립국가가 생겨났다. 
그중 많은 나라가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을 택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함과 아울러, 자본가와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많은 양보를 하면서 복지국가의 개념이 실체를 갖게 됐다. 
전면전의 호된 시련을 겪은 후, 자본주의 선진국 간의 갈등은 이제 경제전으로 변질돼갔다.

소련은 동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들,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을 택한 신생국들, 자본주의 국가 내 의식 있는 노동자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굳혀갔다.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의 약진에 위협을 느꼈다. 
파시즘의 위협하에 힘을 합쳐 싸운 두 세력 간의 갈등은 표면적인 평화공존 합의로 덮어지기에는 그 도가 너무 심했다. 
바야흐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1922∼1991년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에 위치하는 여러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구성된 최초의 사회주의 연방국가.
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 동유럽에서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차지, 유럽에서는 노르웨이·핀란드·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와, 아시아에서는 터키·이란·아프가니스탄·중국·몽골·한국과 국경을 접하였다. 
구성체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우즈베크·카자흐·아제르바이잔·몰다비아·키르키스·타지크·아르메니아·투르크멘·그루지야·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15개 공화국이다. 
소연방에 혼재한 많은 소수민족에게는 공화국 안에서 자치가 허락되었는데, 연방에는 20개의 자치공화국, 8개의 자치주, 10개의 민족관구가 있었다. 
러시아인·우즈베크인·타타르인 등 약 130개 민족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유럽계 민족이며, 아시아계 민족도 소수 포함되었다. 
각 민족은 민족어와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사용하였다.
1917년 11월 7일의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됨에 따라 로마노프왕조의 군주를 차르(황제)로 하는 제정국가()가 무너졌다. 
혁명정권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외국과 전쟁을 치르는 한편, 국내 적대세력의 내란을 진압하고, 1922년 12월 소비에트 연방을 결성하였다. 
그뒤 새 공화국의 가입으로 15개의 공화국이 공산당 일당독재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의 연방을 이루었다.

1924년에 레닌이 죽자 스탈린이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192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세 차례의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국민경제의 사회주의화와 공업화가 병행되었으며,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소련이 가진 강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은 5개년 계획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34년 말부터 1938년까지의 대숙청을 통하여 스탈린 독재정권을 확립,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발언을 봉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대전이 끝난 뒤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생겨남에 따라 소련은 그 지도국이 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말렌코프와 불가닌을 거쳐 1958년 2월에 흐루쇼프가 수상이 되었다. 
1956년 2월에 개최된 제20회 당대회에서는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으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하에서의 개인적·정치적 자유의 회복이 큰 의제가 되었다. 
1964년 10월에는 흐루쇼프 대신에 코시긴이 수상이 되었으며, 브레즈네프 당서기장, 포드고르니 최고회의간부회의 의장과의 집단지도제인 트로이카() 체제가 형성되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 및 그라스트노스트를 기초로 한 일련의 개혁정책의 여파로 자유화물결이 일어 1989년 동·서독이 통일되는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를 지향하게 되면서 보다 급진적인 개혁의 소리가 높아갔다. 
1991년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 이를 무력화시킨 옐친이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고, 1991년 공산주의 포기와 공산당 해체를 계기로 각 공화국이 독립을 강행함으로써 급속히 붕괴되었다.

연방 해체 후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3국을 제외한 12개 독립공화국이 1992년 1월 1일을 기해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을 형성함으로써 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소비에트연방,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 Союз Советских.

 1924년 1월 21일, 러시아 혁명을 응축시켜 몸속에 담고 있던 레닌이 죽었다. 

혁명운동과 사회주의 건설에 몸을 혹사한데다 1918년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총격의 후유증이 겹쳐, 세 차례나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마침내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1922년 12월 두 번째로 쓰러져 누운 병상에서 레닌은 여러 편의 논문과 편지를 구술하여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명제로서, 공업화의 강력한 추진, 협동조합의 발전을 통한 농업의 사회화, 문화혁명, 모든 민족의 평등우호 관계, 노동자 계급의 지도적 역할과 노농동맹의 강화, 대중의 창조력 중시, 당과 대중의 긴밀한 결합, 집단토론을 통한 의사결정 등을 역설했다. 
1923년 3월 사실상 폐인이 될 때까지 그는 마지막 불꽃을 사르며 혁명의 진전과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계속 쏟아냈다.

이 시기에 구술한 것 중에 흔히 레닌의 '정치 유언'이라고 불리는 〈대회에 보낸 편지〉가 있다. 
편지에서 그는 당 지도자들을 열거하면서 그 성격과 장단점을 묘사하고 그를 기초로 당의 단결과 중앙위원회의 확대강화 등을 제안한다. 
이 편지는 1년 이상 묻혀 있다가 레닌이 죽은 후 중앙위원회에서 낭독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편지 공개 시의 물의를 우려한 몇몇 지도자들의 뜻에 따라 비밀리에 일부 대의원에게만 회람됐고, 서기장 스탈린을 바꾸자는 레닌의 제안도 반트로츠키 투쟁에 밀려 조용히 거둬들여 졌다.

편지에 묘사된 몇몇 지도자의 특징 묘사는 날카롭고도 흥미롭다.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그의 '비볼셰비즘'을 지적하고 '멘셰비즘' 재발 위험을 경고하면서, "당 중앙위원 중에서 가장 유능하나 자신과잉에 빠져 있고 사업을 순행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 대해서는, 10월혁명 때 무장봉기를 반대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나, 트로츠키의 '비볼셰비즘'과 마찬가지로 이를 빌미로 그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하린은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나 변증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당의 뛰어난 활동가임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그의 결함을 비판하여 "서기장이 되어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쥔 그가 이 권력을 늘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닌은 며칠 뒤에 편지에 추신을 붙였다. 
"스탈린을 그 지위에서 해임하고, 다른 모든 점에서 그보다 못하더라도, 더 참을성 있고 신실하며 동지들에게 친절하고 그만큼 흥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보다 뛰어난 인물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법을 고려해보자. 
이것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레닌이 세 번째로 쓰러진 후 1923년 4월에 열린 제12차 당대회에서 레닌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당 지도자들은 레닌이 말한 특징묘사를 그대로 확인시키려는 듯했다. 
레닌이 편지에서 말한 핵심은 대중과 더 긴밀하게 결합하기 위해 당이 변화를 보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당이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회에서는 당의 권한이 강화되어 마침내 권력 피라미드의 정상에 올랐고, 당의 단합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당시 공산당 내에는 크게 세 가지 조류가 있었다.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좌파는 세계혁명의 뒷받침 없이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신경제정책도 어디까지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자본주의 방법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므로, 그 추진과정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계획화가 중시돼야 했다.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농업은 어느 정도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트로츠키와는 별개로 행동하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부하린이 이끄는 우파도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했다. 

세계혁명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로 직접 이행하려 하기보다는 신경제정책을 폭넓게 발달시켜 생산력을 높이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부하린은 신경제정책의 최대 이론가가 됐다.

스탈린이 이끄는 중도파는 처음에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않고 양자의 견해를 조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세계혁명의 기운이 점차 수그러들면서 거대한 영토와 인구와 자원을 갖고 있는 소비에트 연방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1924년 말,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정리된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이론투쟁에, 당과 중앙위원회와 서기국의 권한강화에 대한 반발이 덧붙여졌다. 당내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했다.

자신의 강력한 버팀대였던 레닌이 쓰러진 후, 신참 볼셰비키 트로츠키는 당에서 점점 고립돼갔다.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여전했고, 논쟁 시의 매서운 칼날은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당 지도자들이 트로츠키의 좌익 분파주의를 비판하는 데 힘을 모았다.

트로츠키가 1923년 10월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경제정책을 호되게 비판한 후 '서기국 관료주의'를 '당내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 지지자 '46인의 성명'이 뒤따랐다. 
당 중앙위는 곧 분파행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기 며칠 전, 트로츠키가 요양차 카프카스로 떠난 뒤에 열린 당 협의회는 트로츠키를 맹공격하고 반대파를 탄핵했다. 
요양지에서 레닌의 죽음을 맞은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레닌이 죽은 후 '레닌 입당'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했다. 
2년 사이에 당원이 35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당 기구를 관장하는 서기국의 권한이 강화되고 서기장 스탈린에게 권력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레닌 이후의 지도자를 공공연히 자처하는 지노비예프와 달리, 레닌의 충실한 제자를 자임하며 조용히 처신했다.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와 그 지지자들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트로츠키를 정치국에서 제명하자고 했으나, 스탈린이 반대하여 제명은 면했다.

궁지에 몰린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10월에 발간된 〈10월의 교훈〉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거기서 그는 레닌의 당부를 어기고, 카메네프와 '고참 볼셰비키'가 〈4월 테제〉에 저항한 것, 10월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무장봉기에 반대한 것을 조소했다. 
이것은 즉각 응수를 야기하여, 트로츠키가 레닌과 사사건건 대립하던 옛 시절의 얘기를 포함하여 그의 '멘셰비즘'과 '농민과소평가'가 연일 신문과 집회의 비판대에 올랐다. 
1925년 3월 그는 마침내 군사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됐다.

트로츠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공방과정에서 트로츠키와 두 사람의 '과거'는 적나라하게 까발려져 대중들에게 회자됐다. 
전면에 나서지 않은 스탈린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후 몇 년 간의 당 역사는 스탈린의 권력장악 과정을 잘 보여준다. 
먼저, 트로츠키 축출에 앞장섰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일국사회주의와 신경제정책의 우경화에 반기를 들었다가 우파와 손잡은 스탈린에게 패배했다. 
두 사람은 1926년 이제 트로츠키와 손잡고 '좌익 반대파'를 이루어 한목소리를 내지만 시곗바늘을 뒤로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세 사람은 그 후 당에서 축출됐다.

1927년 곡물수매 위기가 빚어지면서, 스탈린은 좌선회하여 이전 좌파들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이고 농업의 희생을 토대로 한 급속한 공업화에 착수한다. 
1929~1930년 부하린 등의 우파마저 당의 의사결정기구에서 밀려나고 스탈린은 마침내 대적할 자 없는 최고지도자로 부상한다.

스탈린이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 권력의 강화와 당의 대중화, 당내의 그의 지위에 힘입은 바 컸으나, 당시 상황에 가장 적합한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한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불투명한 세계혁명에 국가의 장래를 걸거나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틀려는 시도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비전과 그 프로그램을 제시했고, 대중들은 거기에서 매진하여 달성할 목표를 발견했다.

1927년 12월 27일 제15차 당대회는 '당의 일반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를 굳혀주었다.


1917년 11월 7일, 러시아에서 레닌이 이끈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11 월 15일에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선언’을 발표하여 ‘분리와 독립국가형성의 권리를 포함한 러시아 제 민족의 자유로운 입헌군주제’을 옹호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내전과 관련하여 핀란드와 발트3국이 러시아에서 독립하였다. 
1922년 12월 30일에 ‘제 민족의 자발적인 국가결합체’로서 소비에트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그러한 경위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당초의 정권의 의도로서는, ‘제 민족의 감옥’ 제정 러시아에서의 민족 해방이 지향되어 각 민족의 민족어에 의한 출판과 교육이 장려되었다.

레닌에 의해 ‘대 러시아 민족주의자’라고 비판되었던 그루지야인 스탈린이 1920년대 중반에 권력을 장악하자 민족 기본권리의 원칙은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큰 원인은 국가와 경제의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어 러시아인의 실제상의 권한이 증대한 것에 있다. 

각 공화국의 당 제1 서기에는 해당민족의 지도자가 취임 하였지만 제2 서기에는 러시아인이 차지하여 중에 연결되는 실권을 그가 장악하였다. 
민족어의 사용도시와 문학 이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소수민족의 부모도 장래를 생각하여 자녀의 러시아어 교육을 원하였다. 
1930년대에 국제위기가 절박하자 스탈린은 유대인, 독일인, 타타르인 등을 집단적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스탈린 비판이 이루어져 그 난폭한 민족정책은 시정되었지만 러시아인 중심의 국가ㆍ경제정책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브레즈네프 정권하에서 국내의 다원적인 요구가 강해짐에 따라 연방 내의 제 민족, 특히 중앙아시아의 제 민족의 권한이 확대되어 정치, 경찰, 교육 등의 ‘현지화’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권리의식으로 자각한 소수민족에게 요구실현에 대한 차이의 크기를 깨닫게 하는 결과를 낳아 인종분쟁을 확대시켰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당서기장으로 취임하여 개혁을 시작하자 연방 내에서 억압되어 왔다고 느낀 제 민족이 일제히 민족의 자기주장을 하여 카프카스 지방 등에서 무력분쟁이 확대되었다. 
1940년에 스탈린에 의해 소련에 합병된 이래 독립을 요구해 온 발트3국은 1990년에 독립선언을 하였지만 1991년에 소련군이 거기에 개입하자 국제적 비난이 쏟아졌다. 

연방해체에 대한 위기감으로 취해진 보수파와 군 수뇌부가 8월에 쿠데타를 시도하였다가 실패함으로, 연방을 유지하고자 하는 계기를 잃게 되었다.
1991년 9월 6일, 소련국가평의회는 발트3국의 독립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12월 8일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의 슬라브계 3국이 ‘독립국가연합’(CIS)를 창설하는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 후 발트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구 소련 의 11개의 공화국이 12월 21일 알마아타의 정상 회의에서 CIS에 참가하는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년 12월 31일 소비에트연방은 소멸하였다.

단, 아제르바이잔은 CIS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으며 또한 CIS의 규약, 통일정치기구, 통일군 등을 둘러싼 협의는 난항을 거듭하고 흑해함대의 관할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격화하는 등, 정치, 군사면에서의 기구구축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경제면에서는 러시아에 의한 석유공급의 대폭감소, 밀접한 상호의존 관계에 있던 생산체제의 단절은 모든 국가에서 심각하여 1993년 9월에 12개국이 공동체경제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소비에트 연방 창설.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공식 선포되다.
1922년 U.S.S.R., 또는 소비에트 연방을 창설하자는 결정은, 공산당 내에서 러시아가 통치하는 여러 국가들에게 얼마만큼의 자치를 허용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독립을 쟁취한 폴란드와 핀란드를 제외하면, 구 차르 치하의 러시아 제국의 재현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제나 러시아의 입김에 좌지우지된 소비에트 연방은 처음에는 4개의 공화국-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트란스코카시아-만으로 구성되었지만, 볼셰비키들이 통제권을 강화하면서 더 많은 공화국들-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카자흐스탄, 몰도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가입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 역시 강제로 합병되었다.

1929년 스탈린이 독재자가 된 뒤 소비에트 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국토의 황폐화와 강요된 집단화, 산업화, 그리고 기아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미국 다음 가는 세계 제2의 수퍼파워로 부상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동유럽으로 공산정권을 확장하였고, 전 세계 공산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의 군비 경쟁 비용과 공산주의식 중앙 통제 경제의 필연적인 비효율성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토대를 잠식하고 말았다.
"우리는…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복종을 강요할 수 없는 연합을 원한다…"
V. I. 레닌




러시아가 소련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1922년).
제정시대의 러시아 제국은 겉으로 보아 강력한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 통일은 서로 다른 언어 · 관습 · 문화 등등, 여러 민족의 고유한 특성들을 폭력으로 눌러서 유지해온 통일이었다. 
제국 내에 있는 각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해온 이러한 '통일'은 마땅히 타파돼야 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10월혁명을 성공시킨 뒤 2주 후에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동등권과 자주권, 나아가 분리독립권까지를 포함하는 각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을 확립하고, 모든 종류의 민족적 · 종교적 특권과 제한을 폐지했다. 
그 시행의 한 예로, 1979년 12월 인민위원회는 핀란드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핀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해주도록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에 제안했고, 중앙집행위는 이를 승인했다. 
그루지야가 독자행동을 하는 등 다소 유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공동의 혁명투쟁과 내전 속에서 형성된 여러 민족의 통일감은 곧 국가적 통일로 성장해갔다.

내전이 종반으로 접어든 1920년경,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는 크게 세 가지 범주의 권력이 확립돼 있었다. 
독일군이 진주했던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와 루마니아군이 점령한 베사라비야는 소비에트 국가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러시아의 중앙부에는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이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을 자치 단위로 끌어안고서 혁명국가의 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각기 성격이 조금씩 다른 8개의 공화국이 있었다. 
8개 공화국 중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5개 국가에는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됐고 당시 유일하게 멘셰비키가 주도하던 그루지야는 연합국과 연대하여 소비에트 정부에 저항했으나, 1921년 2월 민중봉기가 일어난 틈을 타 붉은군대가 진주하여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다. 
중앙아시아의 호레즘과 부하라에는 인민 소비에트공화국, 시베리아의 치타에는 극동공화국이 수립돼 있었다.

러시아까지 9개 공화국 중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한 6개 공화국에서, 힘을 합쳐 간섭군과 싸우고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동맹의 기운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공동투쟁 속에서 각 공화국의 군사 · 정치동맹이 형성, 강화돼가던 1920년 2월, 외교동맹이 먼저 성립됐다.
제노바에서 열린 유럽 경제회의에서 각 소비에트 공화국이 러시아 공화국에 자기네 이름으로 임의의 국가와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할 것을 위임한 것이다. 
1922년 4월에는 소비에트 대표단이 6개 형제국의 이름으로 전면 군축,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의 평화 공존 · 호혜평등의 경제협력을 제안했다.

공화국 간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공동의 행동을 조정 · 통합하고자 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조약들은 군대와 몇몇 경제 · 행정기관의 통합을 규정하고 있었다. 
1922년 봄, 카프카스 산맥 너머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3국은 자카프카스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공화국을 창설하는 조약을 맺었다. 
뒤이어 자카프카스 연방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 사이에서 단일 연방국가를 창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레닌의 제안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안이 마련됐다. 즉, 모든 공화국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자유의사로 연방에 가입하며, 중앙에 최고권력기관으로 연방 중앙집행위를 둔다는 안이었다.

1922년 12월 23일,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제10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자카프카스 연방, 벨로루시 공화국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으로 통합하는 데 찬성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직전에 열린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스의 각 소비에트 대회도 단일 연방국가의 창설에 찬동했다. 
극동공화국은 그보다 조금 앞서 미군과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후 러시아 연방공화국에 흡수 통합됐다.

12월 30일 네 공화국의 대의원들이 제1차 전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했다. 
대회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결성이 제창되고, 선언과 동맹조약이 채택됐다. 
선언문에는 "연방이 여러 민족의 자발적 통합이라는 것, 각 공화국의 자유로운 연방 탈퇴권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 지금 존재하거나 앞으로 세워질 모든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에게 연방가입의 문호가 열려 있다는 것, 새로운 연방국가는 1917년 10월에 이미 구축된 모든 민족의 평화공존과 협력의 토대를 더욱 확고히 다져 완성했다는 것"이 명시됐다.

1924년 1월, 제2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1차 대회의 선언과 조약을 토대로 해서 만든 소련 헌법이 승인됐다. 
1920년대 말, 중앙아시아의 3개 공화국이 소련의 연방구성 공화국으로 인정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은 완성됐다. 
소비에트 연방은 새로이 성립되는 소비에트 공화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모든 민족의 동등권을 확립한다는 취지하에 종래의 '러시아'라는 역사적 · 지리적 · 민족적 호칭을 버렸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은 그냥 '소련'으로 불리고, '러시아'는 연방 최대의 러시아 공화국과 대러시아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소련은 이후 유라시아 대륙 북부의 드넓은 영토에서 사회주의를 발전시켜가면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강력한 제2의 체제를 수립하여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레닌의 죽음과 스탈린의 대두(1924년).

1924년 1월 21일, 러시아 혁명을 응축시켜 몸속에 담고 있던 레닌이 죽었다. 
혁명운동과 사회주의 건설에 몸을 혹사한데다 1918년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총격의 후유증이 겹쳐, 세 차례나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마침내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1922년 12월 두 번째로 쓰러져 누운 병상에서 레닌은 여러 편의 논문과 편지를 구술하여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명제로서, 공업화의 강력한 추진, 협동조합의 발전을 통한 농업의 사회화, 문화혁명, 모든 민족의 평등우호 관계, 노동자 계급의 지도적 역할과 노농동맹의 강화, 대중의 창조력 중시, 당과 대중의 긴밀한 결합, 집단토론을 통한 의사결정 등을 역설했다. 
1923년 3월 사실상 폐인이 될 때까지 그는 마지막 불꽃을 사르며 혁명의 진전과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계속 쏟아냈다.

이 시기에 구술한 것 중에 흔히 레닌의 '정치 유언'이라고 불리는 〈대회에 보낸 편지〉가 있다. 
편지에서 그는 당 지도자들을 열거하면서 그 성격과 장단점을 묘사하고 그를 기초로 당의 단결과 중앙위원회의 확대강화 등을 제안한다. 
이 편지는 1년 이상 묻혀 있다가 레닌이 죽은 후 중앙위원회에서 낭독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편지 공개 시의 물의를 우려한 몇몇 지도자들의 뜻에 따라 비밀리에 일부 대의원에게만 회람됐고, 서기장 스탈린을 바꾸자는 레닌의 제안도 반트로츠키 투쟁에 밀려 조용히 거둬들여 졌다.

편지에 묘사된 몇몇 지도자의 특징 묘사는 날카롭고도 흥미롭다.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그의 '비볼셰비즘'을 지적하고 '멘셰비즘' 재발 위험을 경고하면서, "당 중앙위원 중에서 가장 유능하나 자신과잉에 빠져 있고 사업을 순행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 대해서는, 10월혁명 때 무장봉기를 반대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나, 트로츠키의 '비볼셰비즘'과 마찬가지로 이를 빌미로 그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하린은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나 변증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당의 뛰어난 활동가임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그의 결함을 비판하여 "서기장이 되어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쥔 그가 이 권력을 늘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닌은 며칠 뒤에 편지에 추신을 붙였다. 
"스탈린을 그 지위에서 해임하고, 다른 모든 점에서 그보다 못하더라도, 더 참을성 있고 신실하며 동지들에게 친절하고 그만큼 흥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보다 뛰어난 인물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법을 고려해보자. 이것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레닌이 세 번째로 쓰러진 후 1923년 4월에 열린 제12차 당대회에서 레닌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당 지도자들은 레닌이 말한 특징묘사를 그대로 확인시키려는 듯했다. 
레닌이 편지에서 말한 핵심은 대중과 더 긴밀하게 결합하기 위해 당이 변화를 보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당이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회에서는 당의 권한이 강화되어 마침내 권력 피라미드의 정상에 올랐고, 당의 단합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당시 공산당 내에는 크게 세 가지 조류가 있었다.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좌파는 세계혁명의 뒷받침 없이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신경제정책도 어디까지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자본주의 방법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므로, 그 추진과정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계획화가 중시돼야 했다.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농업은 어느 정도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트로츠키와는 별개로 행동하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부하린이 이끄는 우파도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했다. 
세계혁명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로 직접 이행하려 하기보다는 신경제정책을 폭넓게 발달시켜 생산력을 높이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부하린은 신경제정책의 최대 이론가가 됐다.

스탈린이 이끄는 중도파는 처음에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않고 양자의 견해를 조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세계혁명의 기운이 점차 수그러들면서 거대한 영토와 인구와 자원을 갖고 있는 소비에트 연방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1924년 말,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정리된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이론투쟁에, 당과 중앙위원회와 서기국의 권한강화에 대한 반발이 덧붙여졌다. 당내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했다.

자신의 강력한 버팀대였던 레닌이 쓰러진 후, 신참 볼셰비키 트로츠키는 당에서 점점 고립돼갔다.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여전했고, 논쟁 시의 매서운 칼날은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당 지도자들이 트로츠키의 좌익 분파주의를 비판하는 데 힘을 모았다.

트로츠키가 1923년 10월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경제정책을 호되게 비판한 후 '서기국 관료주의'를 '당내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 지지자 '46인의 성명'이 뒤따랐다. 
당 중앙위는 곧 분파행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기 며칠 전, 트로츠키가 요양차 카프카스로 떠난 뒤에 열린 당 협의회는 트로츠키를 맹공격하고 반대파를 탄핵했다. 
요양지에서 레닌의 죽음을 맞은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레닌이 죽은 후 '레닌 입당'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했다. 
2년 사이에 당원이 35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당 기구를 관장하는 서기국의 권한이 강화되고 서기장 스탈린에게 권력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레닌 이후의 지도자를 공공연히 자처하는 지노비예프와 달리, 레닌의 충실한 제자를 자임하며 조용히 처신했다.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와 그 지지자들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트로츠키를 정치국에서 제명하자고 했으나, 스탈린이 반대하여 제명은 면했다.

궁지에 몰린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10월에 발간된 〈10월의 교훈〉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거기서 그는 레닌의 당부를 어기고, 카메네프와 '고참 볼셰비키'가 〈4월 테제〉에 저항한 것, 10월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무장봉기에 반대한 것을 조소했다. 
이것은 즉각 응수를 야기하여, 트로츠키가 레닌과 사사건건 대립하던 옛 시절의 얘기를 포함하여 그의 '멘셰비즘'과 '농민과소평가'가 연일 신문과 집회의 비판대에 올랐다. 1925년 3월 그는 마침내 군사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됐다.

트로츠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공방과정에서 트로츠키와 두 사람의 '과거'는 적나라하게 까발려져 대중들에게 회자됐다. 
전면에 나서지 않은 스탈린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후 몇 년 간의 당 역사는 스탈린의 권력장악 과정을 잘 보여준다. 
트로츠키 축출에 앞장섰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일국사회주의와 신경제정책의 우경화에 반기를 들었다가 우파와 손잡은 스탈린에게 패배했다. 
두 사람은 1926년 이제 트로츠키와 손잡고 '좌익 반대파'를 이루어 한목소리를 내지만 시곗바늘을 뒤로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세 사람은 그 후 당에서 축출됐다.

1927년 곡물수매 위기가 빚어지면서, 스탈린은 좌선회하여 이전 좌파들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이고 농업의 희생을 토대로 한 급속한 공업화에 착수한다. 
1929~1930년 부하린 등의 우파마저 당의 의사결정기구에서 밀려나고 스탈린은 마침내 대적할 자 없는 최고지도자로 부상한다.

스탈린이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 권력의 강화와 당의 대중화, 당내의 그의 지위에 힘입은 바 컸으나, 당시 상황에 가장 적합한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한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불투명한 세계혁명에 국가의 장래를 걸거나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틀려는 시도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비전과 그 프로그램을 제시했고, 대중들은 거기에서 매진하여 달성할 목표를 발견했다.

1927년 12월 27일 제15차 당대회는 '당의 일반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를 굳혀주었다.




소비에트 연방 최후의 날 ,


한 장의 간단한 성명서와 함께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91년 말,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브추크, 벨라루스 대통령 스타니슬라우 슈슈케비치가 한자리에 모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지난 8월 모스크바에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난 뒤 소련 공산당은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그 권력과 특권도 붕괴되었다.

옐친에게 소련과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불편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전자를 없애면 후자도 자연히 따라서 사라지게 되며, 러시아 연방 내에서 옐친의 권력을 확고하게 해줄 것이었다. 

그는 독립국가연합(CIS)이 소비에트 연방을 대체하고 세계에서 소련이 차지해왔던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공화국 대다수, 특히 우크라이나는 CIS가 러시아에의 종속을 끝낼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은 아예 CIS 가입을 거부하였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소련이 소유했던 힘의 상실을 아쉬워했고, 우크라이나가 영구적으로 떨어져나갔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못했다. 
러시아와 전 소비에트 연방 회원국들과의 관계는 항상 불편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러시아가 자국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분노하였다. 

이들 나라에 거주하는 2,500만 러시아인들은 하루 아침에 외국인이 되어버렸으며, 종종 심각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러시아 연방 내에 존속한 민족 가운데 일부도 독립 투쟁에 나섰다. 
1994년 체첸이 독립을 선언하자 야만적인 전쟁이 발발하였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세력이 등장하여 인종 차별적인 폭력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지금도 전 소련 회원국들은 많은 러시아인이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기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브레즈네프와 1970년경의 소련사회

'발달한 사회주의' 선언(1971년)
1964년 10월, 흐루쇼프는 '건강상의 이유'로 당 제1서기직과 수상직을 내놓고 초야에 묻혔다. 
당 기구를 공업과 농업의 두 부문으로 분할한 것, 경제관리의 지역 분권화, 스탈린 비판의 본격화, 독선적인 결정과 집행 등이 당 간부들의 불만을 산데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중점사업으로 추진한 농업정책에서까지도 부작용이 일어나면서 흐루쇼프의 기반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후임으로는 당 제1서기에 브레즈네프, 수상에 코시긴이 취임했다.

브레즈네프는 직업기술학교 출신의 농업기사로, 1930년대에 당 주위원회 서기로 진출한 뒤 승진을 거듭해온 전형적인 당료였다. 
브레즈네프-코시긴의 양두체제는 당과 정부의 권한을 분할 장악하여 서로 협력하며 국정을 이끌어갔다.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은 흐루쇼프의 여러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돌리고, 안정성장을 지향하는 정책을 유도했다. 
그와 더불어, 기업관리자에게 어느 정도 자율권을 부여하고, 이윤을 많이 내는 기업에 상여금을 많이 배당하여 물적 자극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부분적인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코시긴 개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60년대 전반에 비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기는 했으나,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고, 60년대 말에 이르러 임금상승에 대비한 생산성 상승폭이 떨어지면서 노동규율의 강화라는 이전 방식으로 회귀하고 만다.

개혁조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브레즈네프는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쌓아올린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민의 복지향상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새로운 연금법이 시행됐고, 1967년에는 주휴 2일제가 전면 도입됐다.

1971년 제24차 당대회에서 브레즈네프는 소련이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가 됐다고 선언했다. 

사회주의의 초급단계를 지나 완전한 공산주의 단계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발전에 관한 흐루쇼프의 지나친 낙관론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여 새로운 성장전략을 수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새로운 전략에서는 소비재 생산의 확대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강조됐다.

브레즈네프는 그와 함께, 국민들의 지나친 기대상승과 이념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과도한 소비를 배격하고 '사회주의적 생활양식'과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강조했다. 
사회주의적 연대 · 도덕성 등이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됐다.

농업과 소비재 산업의 저성장에 따른 국민경제의 불균형 발전, 행정 · 명령형 경제관리체계의 문제점 등이 노출되기는 했으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며 소련에서는 공업화 · 기계화 · 계획경제의 성과가 축적되어 1970년경에 이르면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가 형성된다.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알타이 등지의 처녀지 개척사업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점점 그 웅자를 드러내, 제2, 제3의 곡창지대를 출현시켰다. 
아무다리야 강의 운하는 서투르케스탄의 사막을 옥토로 바꾸어놓았다. 
낙후돼 있던 외곽의 소수민족 거주지에 많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역적인 불균형과 격차도 크게 해소됐다. 
곳곳마다 거대한 콤비나트, 강력한 발전소가 건설됐고, 그 주변에 광공업과 농업을 연관 지은 복합생산단지가 만들어졌다.

과학기술이 진보하면서 산업이 계속 성장함과 동시에 공업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노보시비르스크 교외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비롯한 대단위 연구단지의 훌륭한 시설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소련의 과학자들은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그에 따라 무선공학 · 전자공학 · 원자력공학 · 화학공학 · 기계공학 등, 고도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공업부문의 연이은 고도성장에 힘입어 미국과의 총산업생산 격차는 1950년의 3.6:1에서 1970년에는 1.2:1로 줄어들었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50년 동안에 소련인구는 1억 4,000만에서 2억 5,000만으로 늘었고, 그중 도시민의 비율은 20% 미만에서 50% 이상으로 증가했다. 
노동자의 수도 급증하여 1970년대에는 전 국민의 약 60%가 노동자가 됐다. 
공업화의 진전이 사회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더욱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노동자와 콜호스 농민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각별하여, 인텔리겐치아와 다름없는 생활을 보장받았고, 그 자녀들도 전혀 차별 없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의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없어졌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비된 각종 연금 · 보험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무료 진료체계가 효율적으로 재편되어 모든 국민이 유사시나 노후의 걱정을 덜었다.

4년제 초등과정과 8년제(후에 10년제로 바뀜) 중등과정의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됐고,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의 수도 크게 늘어, 청년층의 약 30%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도서관과 장서도 크게 늘어 소련인은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됐다. 
거의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알았고, 예술창작과 체육활동에도 뜻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소련인민들은 혁명이 그들을 위해 이뤄놓은 성과를 깊이 의식하고 그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간혹 체제의 엄격함에 눈이 돌아가기도 했으나, 적어도 1970년대 중엽까지는 혁명의 성과가 그것을 덮어두기에 충분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사회는 변화무쌍한 자본주의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절대적인 안정을 유지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계속되는 건설의 기계 소리, 망치 소리를 빼고는 변화의 움직임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소련은 이 무서운 힘을 배경으로 미국과 맞서며 세계의 한 축을 형성했다.

그러나 사회의 안정은 한편으로 정체와 부패를 낳았다. 
노동규율은 점점 느슨해졌고, 경제성장은 갈수록 둔화됐다. 
국민들 사이에 공과 사의 구분이 만연하면서 공적인 영역의 공동화()가 진행됐고, 이론파() 탄압을 계기로 사회에 폐쇄적인 분위기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1977년 새헌법인 '브레즈네프 헌법'이 제정되고 '성숙한 사회주의' 체제가 공표됐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소련의 상처는 안으로부터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 별 위험이 따르지 않는 수술로 치유할 수 있는 정도였다. 
더 무서운 것은 폐쇄적인 관료체제였다. 
경직된 관료체제는 이 위기를 깨닫지 못했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 사이에 상처는 하루하루 더 깊어만 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ev .

요약 러시아의 정치가로서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최초의 대통령(재임 1990.3~1991.12.25)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의 개혁과 개방뿐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다.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1991년 공산당을 해체하여 소련의 공산 통치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출생-사망1931.3.2 ~
국적러시아
활동분야정치
출생지러시아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블례
주요수상노벨평화상(1990)
캅카스산맥 북쪽의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블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콤바인을 운전하며 5년간 농장일을 하다가 19세 때인 1950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2학년 때인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교내의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약하였다. 
5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로 일하다가, 1968년 지구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로 취임한 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농업투자정책을 수행하였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권에 접근, 유리 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도 제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당서기장에 선출된 뒤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을 겸하고, 1990년 3월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계급투쟁 포기의 소련공산당 새 강령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지는 1991년 8월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유발시켜 한때 실각하였다가 쿠데타의 실패로 3일만에 복권하고, 공산당을 해체, 소련의 70년 공산 통치사에 종막을 고하게 하였다. 
보리스 옐친 등의 주도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사임 후 1992년에 국제 환경보호 운동과 전쟁난민 아동구호 사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고르바초프재단을 설립하였으며, 1993년 4월에 설립된 국제환경비정부기구 그린크로스인터내셔널의 초대 총장을 맡았다. 

이후 환경운동에 앞장서 2007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45인의 환경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에는 2011년의 러시아 총선을 목표로 정계 복귀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1991년 한국과 소련의 수교 기념식 참석차 방한하였고, 2001년 11월 동아일보사와 인촌기념회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고려대학교에서 '세계 정세와 한반도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2008년 9월에도 그린크로스인터내셔널의 의장으로서 환경재단 기후변화센터와 세계사이버대학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러시아에서 투발루까지-기후변화와 인류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분이 최고 같읍니다...

보리스 옐친, Boris Nikolaevich Yeltsin .

러시아의 정치가로서 급진적인 개혁논리를 주창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저지시키고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여 실질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요약러시아의 정치가로서 급진적인 개혁논리를 주창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저지시키고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여 실질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원어명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출생-사망1931.2.1 ~ 2007.4.23
국적러시아
활동분야정치
출생지러시아 우랄산맥 부근 부트카촌()
우랄산맥 부근 부트카촌() 농가에서 태어나 공업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성장하였다. 
건축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 공산당에 입당, 1976년 스베르들롭스크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거쳐 198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M.S.고르바초프와 친분을 맺기 시작하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옐친은 그에 의하여 모스크바시 당 제1서기와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 일약 중앙정계로 부상하였다. 
1987년 당 중앙위원회에서 당의 개혁의지 부족을 비판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다 당내 보수세력에 의하여 정치국으로 밀려났다. 
그 후 더욱 급진적 개혁논리를 주창, 수구적 자세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하였으며, 1989년 새로 구성된 소련인민대표대회의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의회 내에서 공산당 권력독점의 폐기를 주장하는 야당세력을 이끌어 오다가, 1990년 5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체제내 야당'에서 권력의 핵심부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선 후 그는 “나는 소련의 주권과 15개 공화국의 평등 및 독립을 지지하며, 그것이 연방(소련)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991년 8월 19일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즉각 반()쿠데타세력의 선봉에 서서 소련 국민에게 저항할 것을 호소하며 총파업을 촉구, 60시간 만에 쿠데타를 실패로 끝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후 고르바초프의 권력은 급속히 약해지고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 해 12월 21일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을 참여시켜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고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우크라이나공화국과의 CIS 주도권 싸움과 경제개혁의 실패, 군부의 반발 등으로 그의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92년 3월 러시아연방의 자치공화국들과 신연방조약을 맺고, 4월 경제개혁을 주도해 온 가이다르와 함께 내각 총사퇴를 표명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보수파가 주도하는 인민대표대회와의 날카로운 대립을 12월 타협으로 이끌고 1993년 4월 25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결국 자신의 개혁의지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999년 12월 31일 건강문제와 후진 양성을 이유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하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2007년 4월 23일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타계했다.

이 름
재임기간
제1대 대통령
1991.07 ~ 1999.12
제2대 대통령
1999.12 ~ 2008.05
제3대 대통령
2008.05 ~ 2012.05
제4대 대통령
2012.05 ~ 현재

개혁과 개방의 진통, 보 · 혁 갈등 시작(1987년).

페레스트로이카가 궤도에 오르면서 개혁의 목표와 방향에 대한 열띤 논쟁이 시작됐다. 
소련의 지도층은 크게 세 파로 나뉘어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하나는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주도파이고, 하나는 리가초프로 대변되는 정통보수파이며, 다른 하나는 옐친 등의 급진개혁파이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에 착수할 당시, 세 파는 모두 같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소련에 체제위기가 왔고, 이 위기는 폭넓은 개혁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으며, 개혁의 방향은 행정 · 명령형 지도에 물든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진전시킴으로써 대중들의 창발성을 높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슬로건, '더 많은 공개,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사회주의'에 이들은 모두 공감했다.

세 지도자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도 사실 같은 개혁파라는 공통점으로 맺어진 것이었다. 
체르넨코 사후 후계자를 선출할 당시 당서기였던 리가초프는 젊은 정치국원 고르바초프의 집권을 도왔고, 집권 후 고르바초프는 리가초프를 정치국원으로 끌어올려 제2서기직을 맡겼다. 
개혁 프로그램 작성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긴밀하게 협력했다. 
옐친은 개혁 착수 후 리가초프의 천거로 고르바초프가 지도부에 발탁한 인물이었다.

1987년 후반까지 페레스트로이카는 세계인의 관심하에 온 국민의 호응을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됐고, 세 사람 사이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1987년 10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옐친이 개혁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비판하면서 바야흐로 보 · 혁 논쟁의 막이 올랐다. 
옐친은 특히 리가초프를 지목하여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소극적이며 당 서기국을 비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때까지 옐친은 지지자가 별로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자유주의자와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몇몇 비공식단체를 만들어 급진적인 주장을 펴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은 그 힘이 미약했다. 
11월 11일, 옐친은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에서 해임됐고, 다음 해 초에는 정치국 후보위원직에서도 물러났다. 
해외보도를 통해서야 옐친의 해임 소식을 접한 급진적인 몇몇 단체는 소련 대중매체의 침묵을 문제 삼으며 옐친 해임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정통보수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페레스트로이카의 과도한 진전에 우려를 갖기 시작했다. 
그 후 1988년 3월, 스탈린의 공적과 사회주의의 전통을 옹호하고 개혁의 과도한 진전을 공격하는 안드레예바의 논문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가 《소비에츠카야 러시아》 지에 게재되면서 정통보수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보수파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개혁이 도중 하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고르바초프는 《프라브다》 편집부에 반박 논문을 게재하도록 요청했다. 
《프라브다》 편집부에서 쓴 〈페레스트로이카의 원칙은 사고와 행동의 혁명성이다〉라는 논문은 '원칙을 방기하는 것'이라거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주문을 욈으로써 페레스트로이카에 제동을 걸려는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벌어진 논쟁에서 개혁주도파가 승리하고 정통보수파는 후퇴했다.

광범한 정치개혁을 결의한 1988년 6월 제19차 당협의회를 기점으로 보 · 혁 논쟁의 2단계가 시작된다. 
당협의회에서 옐친은 개혁촉진을 요구하고 보수파 비판을 선도하여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보수파도 이제 페레스트로이카의 변질을 문제 삼으며 대반격을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양날개의 균형을 잡으며 안정 속의 개혁을 지속하고자 애썼다.

개혁파 · 보수파 · 급진개혁파의 구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이 무렵이다. 
개혁파와 보수파는 이제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지난 70년간의 사회주의 건설의 공과 과,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 시장요소의 도입 폭과 속도, '새로운 사고'에 입각한 외교, 민족분리운동, 페레스트로이카에서의 당의 주도성, 페레스트로이카 부진의 원인 등, 모든 면에서 개혁파와 보수파는 평가와 견해를 달리하며 충돌했다.

급진개혁파는 페레스트로이카, 즉 개혁과 재편의 차원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곧 사멸하지 않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자체 법칙에 따라 병행 발전해갈 거라는 개혁파의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효율적인 관리 · 통제방식은 주식회사제이며 자본주의적 시장요소를 대폭 도입하여 상품 화폐 관계를 매개로 시민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당제를 수용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일각에서 제기됐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속을 강조하면서, 당내 보수파의 입지는 약화됐다. 1988년 9월의 정치국 인사에서 보수파인 그로미코가 은퇴하고 리가초프가 이데올로기 담당에서 물러나 농업 담당으로 좌천됐다.

1989년 3월의 인민대의원 선거에서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압승을 거두고 정계에 복귀했다. 
반면에 몇몇 보수파 지도자를 비롯한 고위 당관료들이 대거 낙선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별효과를 내지 못하고 경제가 활력을 되찾지 못하는 가운데, 인민대중이 개혁주도파와 보수파에 등을 돌리고 급진개혁파를 정치적 대안의 하나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7월에는 광부들의 대파업이 일어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노동조건의 개선, 노동자 민주주의의 확대, 광산의 노동자 통제, 생산물의 일부 처분권 등을 요구한 정치성 파업은 개혁주도파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결과적으로 급진파의 입지를 크게 강화해주었다.

정치경제의 위기에 더하여 이념적 혼란이 극심해진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당 개혁을 통해 개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1991년으로 예정된 제28차 당대회를 1990년 7월에 앞당겨 열었다. 
보수파는 그 직전인 6월에 이제까지 소련공산당 내에 없던 러시아 공산당을 만들어 내부결속을 다졌고, 급진파는 주권선언까지 한 러시아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28차 당대회의 다수파는 여전히 정통보수파와 중간파였다. 
고르바초프는 당 개혁을 유보하고 서기장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중간파와 짜고 리가초프 제2서기를 축출하는 전술을 택했다. 
리가초프와 몇몇 보수파 지도자가 당 지도부에서 밀려났고, 옐친 등의 급진파 지도자는 개혁의 부진에 불만을 품고 탈당했다. 
그로 인해 고르바초프와 개혁주도파의 당내 입지가 크게 강화됐다. 
고르바초프는 나아가 당 권력의 많은 부분을 정부로 이양시켜 당을 약화시켰다.

제28차 당대회를 계기로 보 · 혁 대립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화국을 장악한 급진파 지도자들은 공산당을 이탈하여 당외 투쟁을 개시했고, 보수파는 '소유즈 파'와 러시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뭉쳐 당내에서 개혁파를 계속 압박했다. 
격화된 민족분리 운동도 고르바초프의 발목을 계속 잡아챘다. 
고르바초프는 당 안팎의 반대파와 분리독립으로 방향을 굳힌 공화국들로부터 세찬 공격을 받으며,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를 오가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시작했다.

이후 보 · 혁 대립은 사실상 이념투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정통보수파와 개혁주도파는 경제와 사회 전반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재건하려는 목적은 같았으나, 정통보수파가 더 이상의 개혁진행, 특히 시장요소의 급속한 도입은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여 반대한 반면에, 개혁주도파는 개혁을 계속 진전시키고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급진개혁파는 그에 반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길로 전환해야 러시아가 산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질척거리기 시작하면서 국론은 크게 양분됐다. 
사회주의 원리를 지킬 것이냐, 자본주의로 전환할 것이냐? 싸움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하나는 대중들에 대한 선전전이었고, 하나는 국가권력 장악 싸움이었다. 
정세는 갈수록 긴박해져갔고, 수면 위와 아래에서 불꽃 튀는 싸움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무너진 3일천하, 좌익 쿠데타의 실패와 옐친의 대두(1991년).

8월 19일 오전 6시 30분(모스크바 시각), 소련의 쿠데타 발생을 알리는 급전이 세계의 모든 통신사와 언론사로 날아들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와병으로 사임하고 전국에 6개월간 비상사태가 선포됐다는 소식이었다. 
모스크바 시내에 전차와 장갑차가 진주했고, 국가 비상사태위원회가 전권을 장악했음을 알리는 담화문이 발표됐다. 
세계는 아연 긴장했다. 가능성으로만 여겨지던 사태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세계의 눈은 온통 모스크바로 쏠렸다.

곧, 8인 비상사태위원회 위원의 면면이 밝혀졌다. 
야나예프 부통령, 파블로프 총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 크류츠코프 KGB(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야조프 국방장관, 푸고 내무장관, 스타로두부체프 농민연맹 위원장, 티지야코프 국가기업협의회 의장. 체제유지를 적극 옹호하던 온건 보수파가 총결집돼 있었다.

이들은 하루 전인 8월 18일, 크림 반도의 별장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선언 동조냐 사임이냐의 선택을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르바초프는 별장에 감금됐고, 다음 날 쿠데타가 결행됐다.

최고권력을 눈앞에 두고 있던 옐친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몇 시간 안 돼서, 옐친은 주저 없이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자신이 전면 장악한다고 선언하고 불법 쿠데타에 대한 시민항쟁과 총파업을 촉구했다.

비상사태위원회는 그제서야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검거하려 했으나, 이들은 이미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으로 피신해 있었고, 의사당 주변에는 옐친 지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오후에, 시위와 야간통행, 일부 국영신문을 제외한 모든 출판물의 발간 금지령이 내려졌다. 
밤에는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 부근에서 시위대와 군대 간에 작은 충돌이 있었다.

8월 20일 오후, 주요 도시에서 총인원 80만이 참여하는 반쿠데타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모스크바에서는 옐친, 레닌그라드에서는 시장 소브차크의 주도하에 각각 20만 규모의 쿠데타 규탄집회가 열렸다. 
군대는 시위를 적극 봉쇄하지 않았고, 일부 병사들은 시위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날 밤, KGB 특수부대에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 날 새벽, 전차부대가 의사당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의사당 앞의 시민들은 인간사슬을 만들어 탱크에 저항했다. 
시민과 군대의 충돌로 5명의 청년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방어태세를 굽히지 않자, 군대는 진압을 포기했다.

일단 거사하면 시민들이 묵묵히 사태를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한 쿠데타 지도부는 의외의 사태전개에 당황했다. 
비상사태위원회 멤버들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이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탐지, 옐친에게 알려주었다. 
옐친은 자신감을 갖고 저항을 총지휘했다. 
8월 21일 오후, 비상사태위원회 멤버 7명이 모스크바 탈출을 기도하고 푸고 내무장관이 자살하면서 쿠데타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군 병력은 곧 모스크바에서 철수했고,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공화국 루츠코이 부통령의 호위하에 모스크바로 무사귀환했다.

이것이 '3일천하'로 끝난 8월 19일 소련 보수 쿠데타의 전말이다.

소련에 쿠데타 가능성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말부터다. 
1990년 말,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이 부여됐고, 민족분리운동이 격화되고 식량난이 발생하면서 고르바초프의 보수회귀 경향이 감지됐다. 
내무부 장차관에 보수 강경파인 푸고와 그라모프가 임명됐고, 당 부서기장과 부통령에도 보수파인 이바슈코와 야나예프가 선임됐다. 
이로써 고르바초프는 보수파들에게 포위됐다.

1991년에 들어서면서 경제위기가 점점 심각해졌다. 
1990년에는 산업생산이 1920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1991년에는 초반부터 위기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옛 체제의 파괴가 가속화된 반면에 새 체제는 아직 만들어지지 못해, 대혼란을 빚기 시작한 것이다. 
공화국 간, 지역 간, 기업 간의 협력관계가 무너지면서 원료와 자재 등의 유통 · 공급 시스템이 급속도로 파괴돼갔다. 
많은 사람들이 장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자신과 가족 · 국가의 운명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가장 큰 불만은 예전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로 쏠렸다. 
그 획일적이고 관료적인 체제가 우리 사회와 경제를 파탄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는 주장은 이제 더이상 논거를 제시할 필요조차 없었다. 
불만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주도세력에게도 쏟아졌다. 
금방 좋아질 것처럼 말하더니, 지난 6년 동안 나아진 게 뭐냐는 얘기였다. 
그 대안으로 옐친의 급진개혁, 즉 자본주의적 개혁에 대한 지지가 높아져 갔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빈부격차와 실업을 초래한다지만, 이렇게 꽉 막힌 체제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와 동경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온건개혁 주장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고, 급진파는 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도입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고르바초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갔다. 
3월 10일에는 옐친을 지지하는 50만 명이 혁명 이후 최대의 시위를 벌이면서 고르바초프의 사임을 요구했다.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민족주의자들도 급진파와 함께 반고르바초프 전선에 가담했다.

한편, 체제수호 세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KGB와 군부, 일부 관료를 근간으로 하는 보수파들은 소련인민의 불행을 가져올 게 분명한 연방의 분열, 시장경제의 급속한 도입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고르바초프에게 더이상의 분열과 혼란을 막을 단호한 조치를 요구했다.

진퇴양난에 빠져 있던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상황의 발전을 받아들이고, 4월 들어 옐친과 화해한 후 공화국들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연방을 구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6월에 옐친이 러시아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더 다져졌다. 7월에는 연방정부와 각 공화국 간에 신연방조약에 대한 최종합의가 이루어졌다. 
조약 체결일은 8월 20일로 잠정 타결됐다.

보수파는 다급해졌다. 
연방권력의 대폭 공화국 이양을 규정한 신연방조약은 사실상 연방의 해체나 다름없었고, 각 공화국에 체제의 선택권까지를 위임한 조약이 체결될 경우 러시아와 각 공화국이 급속도로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체제수호 세력은 마침내 KGB를 중심으로 뭉쳐 쿠데타를 결행하기에 이른다. 
앞에서 보았듯이, 서방측에서까지 '정말 기이한 쿠데타'라고 부를 만큼 준비도 엉성하기 그지없었고, 상황판단도 치밀하지 못했으며, 불만으로 가득 찬 대중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즉각 제시하지 못한 채, 쿠데타는 3일도 못 버티고 무너지고 만다.

쿠데타는 옐친이라는 영웅을 탄생시켰다. 
쿠데타 군의 탱크 위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그의 모습은 러시아인들의 뇌리에 그를 새로운 지도자 상으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대중들 사이에 옐친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반면에, 쿠데타 주모자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민주적인 방법을 지키려 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급강하했다. 
소련인들에게는 이제 고르바초프까지도 구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가장 참담한 파멸을 맞은 것은 공산당이었다. 74년간이나 소련을 이끄는 집단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누려온 공산당은, 쿠데타 실패 후 며칠 만에 구악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지탄받으며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8월 23일 옐친은 러시아 공산당의 활동정지 명령을 내렸고, 24일 고르바초프는 소련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하고 당 중앙위원회에 자진 해산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 공산당은 해산했고, 당의 자산은 국가에 몰수됐으며, 저항하는 당원들은 체포됐다.

쿠데타의 결행과 실패는 소련정국을 덮고 있던 안개를 깨끗이 걷어내고 옐친이 나아갈 길을 닦아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사실상 해체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시간문제였다.

9월 6일, 전 세계에 생중계된 외국 언론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땅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옐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 땅에서 그런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들에게 큰 비극이었습니다."

후회많이들 했겠다.???? 글쓴이생각입니다.

러시아역사 연표

BC 10세기 - BC 9세기
자카프카스, 중앙아시아, 흑해 북안 등지에 우라르투, 호라즘, 킴메리아 등 고대국가 성립
BC 8세기
스키타이인, 흑해 북안 초원지대에 진출
BC 5세기
흑해 북안에 보스포루스 왕국 성립
BC 3세기
이란계 사르마트인, 흑해 북안 진출
AD 1세기
훈 족, 볼가 강 · 우랄 강 유역에 정착
AD 3세기
게르만계 고트 족 남하, 흑해 초원에 출현
372년경(이하 AD)
훈 족, 서진 개시
453년
훈 족의 아틸라 제국 붕괴
5세기경
슬라브인, 동 · 서 · 남의 세 갈래로 분화
6세기
슬라브인, 드네프르 강 유역 진출. 흑해 초원에 투르크계 아바르인 진출
7세기
흑해, 카스피 해 연안에 하자르 국 성립
8세기
바랴기(노르만인), 루시의 땅에 출현
862년
류리크, 노브고로트에 진출
863년
비잔틴의 키릴로스, 글라골 문자를 만들어 모라비아에서 선교
882년
올레크가 남하, 키예프 점령('키예프 러시아' 탄생)
907년
올레크, 콘스탄티노플 공략, 조약 체결
10세기 초
투루크계 페체네크인, 흑해 초원 진출
945년
이고리, 트레블랴닌 족과 싸우다 죽음
10세기 중엽
키릴 문자 전래
957년
올가, 기독교로 개종
965년
스뱌토슬라프, 하자르 공략
968년
스뱌토슬라프, 불가리아 원정
972년
스뱌토슬라프, 페체네크인에게 피살
980년
블라디미르, 키예프 대공위에 오름
988년
블라디미르, 기독교(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정하고 비잔틴 황제의 누이 안나를 왕비로 맞아들임
1019년
야로슬라프, 키예프 입성
1039년
키예프에 성 소피아 대성당 건축
11세기 전반
〈루스카야 프라브다〉편찬 착수
1068년
투르크계 폴로베츠인, 흑해 초원 진출
1097년
키예프 대공국, 분열 시작
1113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즉위. 〈원초 연대기〉 편찬
1130년경
노브고로트에 민회 중심의 공화제 성립
1147년
한 연대기에 '모스크바' 처음 등장
1169년
동북 루시의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 키예프 공략
1187년경
〈이고리 공 원정기〉씌어짐
12세기 말
독일인, 발트 해 동안의 리보니아에 식민 개시
1202년
리보니아에 '도검기사 수도회' 세워짐
1223년
칼가 강변의 전투(몽골군, 러시아에 출현)
1237년
바투 휘하의 몽골군 침입, '타타르의 멍에' 시작
1238년
몽골군, 모스크바 공략. 블라디미르 대공국 괴멸
1240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네바 강변에서 스웨덴 군 격파. 몽골군, 키예프 점령
1242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독일 기사단 격파
1243년
몽골인, 킵차크 한국 세움
1276년경
다닐 공, 모스크바 공에 오름. 모스크바 러시아 발전 시작
1304년경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를 두고 모스크바와 트베리의 쟁패 시작. 리투아니아, 동방진출 개시
1325년
이반 칼리타, 모스크바 공에 오름(1328년, 블라디미르 대공)
1340년경
세르기 라도네슈스키, 트로이체 수도원 창설
1359년
디미트리 돈스코이, 모스크바 대공이 됨
1380년
쿨리코보 전투, 디미트리 휘하의 러시아 군이 몽골군 격파
15세기 초
성상화가 루블료프 활약
1437년
카잔 한국 성립, 킵차크 한국 분열
1448년
러시아 정교회,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관으로부터 독립
1462년
이반 3세 즉위
1478년
모스크바, 노브고로트 병합
1482년
이반 3세,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와 결혼하고 쌍두 독수리 문장과 '차르' 칭호를 쓰기 시작
1497년
이반 3세의 법전 완성(농민 이전의 자유 제한)
1503년
러시아 교회 내에서 소유파가 무소유파에 승리
1533년
이반 4세 즉위
1547년
이반 4세, '차르'를 공식칭호로 채택
1549년
최초의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 소집
1551년
스토글라프 회의
1552년
카잔 한국 병합. 바실리 대성당 건축 개시. 수도 대주교 마카리, 〈대성자전 집성〉 편찬
1556년
아스트라한 한국 병합
1558년 - 1583년
스웨덴과 리보니아 전쟁
1564년
이반 표도르, 최초의 인쇄본 〈사도행전〉 출판
1565년 - 1572년
오프리치니나 체제
1569년
루블린 연합 결성,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성립
1579년
에르마크, 시베리아 원정 개시
1581년
농민 이전 '금지의 해' 시작
1589년
모스크바 총주교관 창설
1598년
류리크 왕조 단절. 보리스 고두노프, 차르로 선출됨
1604년
가짜 디미트리 거병, 동란(스무타) 시대 시작
1606년 - 1607년
볼로트니코프의 난
1610년 - 1612년
폴란드 군, 모스크바 점령. 러시아 국민군, 모스크바 해방시킴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 즉위, 로마노프 왕조 성립
1631년
키예프 신학교 설립
1645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즉위
1648년
모스크바 '소금 폭동'. 우크라이나, 흐멜니츠키의 대 폴란드 반란 시작
1649년
〈회의법전〉 편찬(농노제, 법적으로 완성)
1654년
총주교 니콘의 종교개혁, 분리파(라스콜니키) 형성
1654년 - 1667년
러시아-폴란드 전쟁
1670년 - 1671년
라진의 난
1682년
분리파 지도자 아바쿰 화형
1689년
표트르 1세, 실권 장악. 중국과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697년
표트르 1세, 서유럽 '대사절단' 파견. '표트르의 개혁' 시작
1700년 - 1721년
스웨덴과 북방전쟁
1703년 - 1712년
신도시 페테르부르크 건설
1711년
원로원 개설
1713년
페테르부르크 천도
1719년
참사회(콜레기아) 설치
1721년
표트르, '황제' 칭호 사용, 러시아 제국 성립. 총주교제 폐지, 종무원(시노트) 설치
1722년
인두세 부과. 관등표 제정
1725년
과학 아카데미 창설. 베링의 북태평양 탐험 시작
1727년
중국과 캬흐타 조약 체결
1741년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즉위
1755년
모스크바 대학 창립
1756년
페테르부르크에 최초의 극장 개설
1762년
표트르 3세, 〈귀족의 자유에 관한 칙서〉 발표. 예카테리나 2세 즉위
1772년 - 1795년
폴란드 분할
1773년 - 1775년
푸가초프의 반란
1774년
투르크와 쿠추크 카이나르지 조약 체결, 흑해 진출
1783년
크림 한국 병합
1785년
귀족과 도시에 '특권인가장' 하사
1790년
라디시체프,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 발표
1797년
장자 상속에 따른 제위계승법 제정
1798년
제2차 대불동맹 가담. 수보로프, 이탈리아와 스위스 원정
1801년
파벨 1세 암살, 알렉산드르 1세 즉위. '비밀위원회' 활동 개시. 그루지야 병합
1807년
틸지트 화약, 러시아 대륙봉쇄 가담
1809년
핀란드 병합. 스페란스키, 국가개조안 작성
1810년
국가평의회 발족
1812년
나폴레옹, 모스크바 원정(조국전쟁)
1814년
러시아군, 파리 입성. 알렉산드르 1세, 빈 회의에서 신성동맹 제창
1816년
아락체예프, 실권 장악. 카람진, 〈러시아 국가사〉 발간 시작
1817년
카프카스 전쟁 시작
1819년
페테르부르크 대학 창립
1823년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 2장 집필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니콜라이 1세 즉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완공
1826년
황제직할청 제3부 설치. 검열법 제정
1828년 - 1829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1830년
〈러시아 제국 법률집성〉(전45권) 편찬
1830년 - 1831년
폴란드 반란
1832년
문교장관 우바로프, '전제 · 정교 · 국민정신'의 삼위일체론 제창
1833년
〈러시아 제국법전〉(전15권) 편찬
1836년
차다예프, 〈철학서한(제1편지)〉 러시아어로 출간. 서유럽파와 슬라브파의 논쟁 개시. 고골리의 〈검찰관〉 초연
1837년
러시아 최초의 철도 개통(페테르부르크-차르스코예 셀로)
1847년
네크라소프, 〈현대인〉 창간
1849년
페트라셰프스키단 사건. 러시아군, 헝가리 혁명 압살
1853년 - 1856년
크림 전쟁
1855년
알렉산드르 2세 즉위
1857년
농노해방 준비 착수. 게르첸, 〈종(콜로콜)〉 발간
1858년
중국과 아이훈 조약 체결(아무르 강 동쪽 해안 획득)
1859년
북카프카스 민족 지도자 샤밀 체포. 곤차로프, 〈오믈로모프〉 발표
1861년
농노해방령 발표. 대개혁 본격 착수
1862년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발표. 이 무렵, 러시아 국민악파 형성
1863년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 발표. 대학령 제정
1863년 - 1864년
폴란드 반란
1864년
사법개혁. 젬스토브 설치
1865년
타슈켄트 점령, 중앙아시아 진출 개시
1866년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발표
1867년
알래스카, 미국에 매각
1869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발표. 멘델레예프, 원소주기율 발견
1872년
〈자본론〉 제1권 러시아어 번역
1873년
3제동맹 결성(러 · 독 · 오)
1873년 - 1875년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운동
1874년
무스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초연
1876년
'토지와 자유' 결성
1877년 - 1878년
러시아 · 투르크 전쟁
1878년
자술리치, 수도 지사 저격
1879년
'토지와 자유' 분열. '인민의 의지', 테러리즘을 주요 투쟁수단으로 채택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알렉산드르 3세 즉위
1883년
노동자해방단 결성
1884년
신대학령 발표, 대학자치 철폐
1885년
플레하노프, 〈우리 의견의 차이〉 발표
1889년
지방관리관(젬스키 나찰니크)제 실시, 농민지배 강화
1890년
젬스트보 법 개정, 지방자치 제한
1891년
대기근. 시베리아 철도 착공
1892년
비테, 재무장관이 됨. 트레티야코프, 회화 소집품 모스크바 시에 기증
1893년
블류소프, 시문집 〈러시아 상징파〉 발표
1894년
러 · 불동맹 결성. 니콜라이 2세 즉위
1895년
독 · 불과 대 일본 삼국간섭.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 결성
1896년
동청철도 계약. 페테르부르크 방직 노동자 총파업
1897년
금본위제 도입. 최초의 전국 국세 조사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 〈예술세계〉 창간. 모스크바 예술극장 개관
1900년
만주 점령. 〈이스크라〉 창간
1901년
학생운동 격화. 사회혁명당(SR) 결성
1902년
농민폭동.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발표. 주바토프의 경찰사회주의 활발해짐
1903년
남부의 노동자 총파업. 유태인 포그롬.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해방동맹' 결성
1904년 - 1905년
러일전쟁
1904년
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체호프의 〈벚꽃 동산〉 초연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포튬킨 호 반란. 두마 설치법 공포. 10월 총파업.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결성. '10월선언' 발표. 모스크바 봉기
1906년
국가기본법 공포. 제1두마 열림. 스톨리핀, 수상이 됨. 스톨리핀, 농업개혁 착수
1907년
제2두마 열림. 두마 선거법 개정. 삼국협상 성립. 제3두마 열림. 고리키, 〈어머니〉 발표
1909년
발레 뤼스, 파리 공연
1911년
스톨리핀 암살
1912년
볼셰비키 당 결성. 레나금광 학살사건. 제4두마 열림
1914년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총파업.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5년
러시아군의 대퇴각
1916년
중앙아시아 민족반란. 노동자들의 반전파업. 라스푸틴 피살
1917년
3월혁명(러시아력 2월혁명), 제정타도.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이중권력' 탄생. 레닌 '4월 테제' 발표. 7월사건. 케렌스키의 연립정부 구성. 코르닐로프의 반란. 11월혁명(러시아력 10월혁명). '평화에 대한 포고' '토지에 관한 포고'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 발표.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위원회 성립. 체카 창설. 최고국민경제회의 창설. 좌파 사회혁명당 입각
1918년
헌법제정회의 해산. '근로 · 피착취 인민의 권리선언' 발표. 적군 창설. 그레고리 력 사용(2월 1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체결. 좌파 사회혁명당 퇴진. 모스크바 천도. 전시 공산주의 채택. 좌파 사회혁명당 반란. 헌법제정. 내전 및 외국간섭군과의 전쟁 시작
1919년
백군 총공세. 코민테른 창립.
1920년
GOELRO 창설. 붉은군대의 대공세. VAPP 결성
1921년
GOSPLAN 창설. 크론슈타트 반란. 노동조합 논쟁. 신경제정책(NEP) 채택. 볼가 유역의 기근
1922년
스탈린 서기장 취임. 소비에트 연방 수립
1923년
트로츠키아 스탈린의 대립 시작, 공업화 논쟁
1924년
레닌 죽음. 연방헌법 공포. 프레오브라젠스키,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 발표. 스탈린, '일국사회주의론' 제기
1925년
트로츠키, 군사인민위원에서 해임됨. '사회주의적 공업화' 방침 결정. 에이젠슈타인, 〈전함 포튬킨〉 제작. RAPP 결성
1926년
합동반대파 형성.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간행 개시. 트로츠키, 정치국에서 추방됨
1927년
영국이 단교 선언. 곡물조달 위기. 제15차 당대회(합동반대파 괴멸, 5개년계획. 농업집단화 결정)
1928년
스탈린과 부하린의 대립. 숄로호프, 〈고요한 돈 강〉 발표. 제1차 5개년계획 착수(10월)
1932년
우크라이나 등지에 대기근 발생
1933년
제2차 5개년계획 착수
1934년
국제연맹 가입. 작가동맹 발족('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기본적 창작방법으로 채택). 키로프 암살
1935년
아르텔 모범정관 채택. 모스크바 지하철 개통.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인민전선 전술 채택. 스타하노프 운동 개시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재판. 대숙청 개시. 예조프, 내무인민위원 취임. 스탈린 헌법 채택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
1938년
제3차 5개년계획 착수. 제3차 모스크바 재판
1939년
독 · 소 불가침조약 체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소련군, 폴란드 진주. 소련 · 핀란드 전쟁
1940년
발트 3국, 몰도바 병합
1941년
독 · 소 전쟁(대조국전쟁) 개시. 독일군, 레닌그라드 봉쇄, 모스크바 공격
1942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개시
1943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 괴멸
1944년
소련군, 전영토 수복 후 동유럽 진공 개시
1945년
얄타 회담. 독일 항복. 포츠담 회담. 대일 참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1946년
동서냉전 개시. '주다노프 비판'. 제4차 5개년계획 착수
1947년
코민포름 결성
1948년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 제명. 베를린 봉쇄 시작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코메콘 창설. 원자폭탄 보유
1950년
중 · 소 우호동맹조약 체결. 한국전쟁에서 북한 지원
1951년
제5차 5개년계획 착수
1953년
'의사단 음모사건' 발표. 스탈린 사망. 후임 수상에 말렌코프 취임. 베리야 사형. 수소폭탄 보유. 흐루쇼프, 제1서기 취임
1954년
처녀지 개간운동 시작. KGB 발족. 원자력발전소 가동. 에렌부르크, 〈해빙〉 발표
1955년
바르샤뱌 조약기구 결성. 피숙청자 명예회복 시작
1956년
제20차 당대회, 평화공존 선언, 스탈린 비판 비밀보고. 유고슬라비아와 관계 개선. 헝가리 사건. 〈역사의 문제들〉지, 스탈린 비판 개시
1957년
'반당 그룹' 추방. ICBM 개발. 스푸트니크 1호 발사
1958년
흐루쇼프, 수상 겸임. 파스테르나크, 노벨 문학상 사절
1959년
흐루쇼프 미국 방문
1960년
U2기 격추사건. 중소대립 표면화
1961년
가가린, 보스토크 1호로 지구궤도 일주. 제22차 당대회, 전인민국가론 채택, 제2차 스탈린 비판
1962년
리베르만의 논문, 〈프라브다〉 게재. 쿠바 위기. 〈노비 미르〉지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게재
1963년
중소논쟁 개시. 미 · 영 · 소, 부분 핵실험 정지조약 조인
1964년
흐루쇼프 해임. 후임에 브레즈네프 제1서기, 코시긴 수상 취임
1965년
'코시긴 개혁' 실시. 숄로호프, 노벨 문학상 수상
1966년
다니엘 · 시냐프스키 재판, 이론파 대두
1967년
주휴 2일제 도입. 솔제니친, 〈수용소군도〉 완성
1968년
미 · 영 · 소 등 62개국, 핵확산 금지 조약 조인. R. 메드베데프, 〈역사의 심판에 부쳐〉 완성. 체코슬로바키아 사건. '브레즈네프 독트린' 발표
1969년
우수리 강에서 중 · 소 무력충돌
1970년
서독과의 조약 조인. 사하로프 등, '인권위원회' 설립
1972년
미 · 소, SALT 1 조인
1974년
BAM 철도 착공. 솔제니친 국외 추방
1975년
유럽의 안전보장과 협력에 관한 헬싱키 선언. 미 · 소 우주선 도킹에 성공. 사하로프, 노벨 평화상 수상
1977년
브레즈네프,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겸임. 브레즈네프 헌법 채택
1979년
미 · 소 정상, SALT 2 합의. 소련군, 아프가니스탄 진주
1980년
코시긴 수상 사임. 사하로프, 고리키 시로 유형당함.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
1982년
미 · 소 START(전략무기 감축교섭) 개시. 브레즈네프 사망, 후임 서기장에 안드로포프
1983년
자슬라프스카야, 〈노보시비르스크 각서〉 작성. KAL기 격추사건
1984년
안드로포프 사망, 후임에 체르넨코
1985년
체르넨코 사망, 고르바초프 서기장 취임. 경제의 '가속화' 강조. 반 알코올 투쟁. 제네바 미 · 소 정상회담
1986년
개인영업 인가. 제27차 당대회(새 강령. 규약 채택). 체르노빌 원전 사고. '페레스트로이카' 노선 채택. '글라스노스트' 본격화. 알마아타 민중폭동 발생
1987년
합작기업법 제정. 국영기업법 제정(기업의 자주관리와 독립채산제). 크림 타타르인, 자치 요구 시위. 옐친, 고르바초프, 스탈린 시대의 행정 · 명령형 지도체제와 정치탄압 비판. 옐친, 당 지도부와 보수파를 비판하다 모스크파 시당 제1서기에서 해임됨. 워싱턴 미 · 소 정상회담에서 INF 전폐조약 조인
1988년
부하린, 리코프 등 명예회복.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민족분규 시작. 안드레예바의 논문, 〈원칙을 양보할 수는 없다〉 발표. 협동조합법 채택.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복권. 제19차 당협의회(간부의 임기제, 당과 국가의 분리, 법개혁 등 확인). 발트 3국에서 '인민전선' 결성. 헌법개정(인민대의원대회 설치 등)
1989년
아프가니스탄 철병 완료. 연방 인민 대의원 선거, 옐친 정계복귀. 고르바초프 중국방문, 중 · 소 화해. 대규모 광부 파업. 발트 3국, 주권선언. 급진파, '지역 간 대의원 그룹' 결성. 고르바초프,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 발표. 몰타 미 · 소 정상회담, 냉전종식선언
1990년
아제르바이잔 사태 격화. 당 강령 및 규약 개정(공산당의 권력 독점 폐지 및 다당제 도입, 사유재산 인정). 독 · 소 정상회담, 독일통일의 무조건 지지 천명. 발트 3국 독립 선언. 대통령제 도입, 고르바초프 대통령 취임. 대통령 자문위 설치. 고르바초프 '신연방안' 제시. 시장경제 도입 결정. 500일 계획 작성. 한 · 소 정상회담 및 수교. 러시아 공화국 주권선언. 제28차 당대회. 리가초프, 정계 은퇴. 급진파 탈당. 러시아 공화국, 급진 개혁안 채택. 고르바초프, 노벨 평화상 수상. 셰바르드나제 사임. 인민대의원대회 '신연방조약안' 승인
1991년
소련군, 리투아니아 유혈점령. 옐친, 고르바초프 사임 요구. 대규모 반정부 시위.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 미 · 소 START 조인. 보수파의 쿠데타와 실패. 공산당 해산. 발트 3국 완전 독립. 독립국가공동체(CIS) 발족. 고르바초프 사임, 소련 소멸
1992년
러시아, 급진개혁 착수. 군수산업 전환법 제정. 의회 내 반옐친 다수파 '구국전선' 결성. 급진파 가이다르 사퇴, 온건파 체르노미르딘 총리 취임. 전 시민에게 바우처(사유화 증권) 배부. 리투아니아, 옛 공산계 민주노동자당 재집권. 미 · 러, START 2 합의
1993년
'구국전선' 불법화. 러시아 공산당 재건. 옐친과 의회의 대립 격화. 대통령 신임 국민투표. 루츠코이 부통령 해임. 옐친, 새 헌법안 마련(대통령의 최고권력기관화, 양원제). 러시아 통화개혁. 미 · 러 합동군사훈련 협정 체결. 옐친, 의회해산령 발표. 의회와 시민 반발, 유혈 진압. 그루지야, CIS 가입. 친옐친 파 '러시아의 선택' 결성. 러시아 총선 및 개헌안 국민투표. 가즈프롬 민영화 등 사유화 정책 가속
1994년
반옐친계, 러시아 의회 재장악. 신흥재벌(올리가르히) 대두. 체첸 봉기, 무력 점령
1995년
러시아 경제, 성장 추세로 전환. '조-러 상호원조 및 우호협력조약' 폐지
1996년
옐친, 대통령 재선. 러시아군 체첸 철수
1997년
병력 감축, 군비 축소,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 강력 추진.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로 경제위기 닥침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 화폐개혁(1,000:1). 중도연합인 '조국-전러시아당' 강력한 야당으로 부상
1999년
경제회복 및 성장 재개. 체첸 분리독립운동 재점화. 옐친, 푸틴 총리 임명. 12월 옐친 사임 후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
2000년
푸틴, 체첸 강경진압. 푸틴, 대통령 당선 후 '위대한 러시아' '강력한 러시아 국가' 재건이라는 국가주의적 슬로건 아래 경제사회적 안정화 추구. 신흥재벌 숙청. 루블화 평가절하. 원자력잠수함 크루즈크 호 침몰
2001년
체첸 전쟁 종전 선언. 우주정거장 '미르' 폐기. 통합러시아당(푸틴 지지자들과 조국-전러시아당이 합친 당) 결성
2002년
석유, 가스 등 전략 자원의 재국유화 추진. 체첸 분리주의자, '문화의 집'에서 대규모 인질극
2003년
의회(국가두마) 선거에서 푸틴의 통합러시아당 압승
2004년
푸틴, 대통령 재선. 가즈프롬 등 에너지산업의 재국유화
2005년
가즈프롬, 석유회사 시브네프트 인수합병
2006년
우크라이나 가스 공급 중단. 러시아, 세계 최대의 산유국으로 부상. 가즈프롬, 영국과 프랑스의 가스 공급업체 인수
2007년
의회 선거에서 통합러시아당 압승(64.1% 득표, 공산당 11.6%, 자유민주당 8.2%, 러시아정의당 7.8%). 당국의 선거개입, 국영 TV 매체의 여당 편향 방송, 금권선거 문제가 불거짐
2008년
러시아-그루지야 전쟁. 가을부터 경제위기 심화. 메드베데프, 대통령 당선.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 푸틴을 총리로 지명
2009년
유럽 가스 공급 대폭 축소. 경제위기에 따른 반정부시위 확산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들. 사하로프, 노벨 평화상 수상(1975년).

어느 사회에나 비판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생각과 경험 역시 모두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판세력들은 사회의 정체와 부패를 막고 새로운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으로, 사회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반사회적 대중운동을 부추기는 등 부정적인 역할도 한다. 
평가의 척도는 그들의 행동이 사회의 진보에 부합하느냐 역행하느냐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뒤, 모든 종류의 착취를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숭고하고도 지난한 이상을 추구하는 소련사회에서, 그 목표와 방향을 둘러싸고 여러 이견이 표출되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체제대결을 벌이면서 때로는 말로, 때로는 무력으로 서로 자기를 관철하려 들려는 속에서, 두 체제는 자연히 상호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영향은 어떤 식으로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파급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반체제 운동은 물론, 혁명 직후부터 시작됐다. 
혁명 직후의 내전을 거치며 반혁명 세력은 거의 제거되거나 망명했고, 남은 적대세력은 이후 스탈린 시대에 가혹하게 처형 또는 추방되거나, 강제수용되어 노동을 통해 교정을 받는 운명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적대세력이 아닌 정치적 반대자와 양민들까지도 무더기로 피해를 당한 사례가 많았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수백만의 억울한 피해자가 감옥과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나 명예회복됐고, 사회 일각에서 스탈린 비판을 진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사태의 악화를 우려한 정부의 태도변화로 1차 제동이 걸렸다. 
그 후 1961년 제2차 스탈린 비판은 막힌 출구를 뚫어놓는 구실을 하여, 일단의 지식인들이 철저한 스탈린 비판과 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타자기로 찍어서 유포하거나(사미즈다트), 광장에서 낭독집회를 열고, 해외에서 출판하기도 했다(타미즈다트).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부가 다시 이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스탈린 시대에 성장해온 브레즈네프 정부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의 비판이 불러올 폐해를 우려하여 역사의 재고찰을 봉쇄했다.

1966년 2월 '반소련 선전' 내용이 담긴 자신의 작품을 해외출판한 작가 다니엘과 시냐프스키의 재판을 시작으로 1968년 1월까지 세 차례의 재판이 열리면서 공개적으로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의 탄압이 본격화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유죄판결을 비판, 항의하고 감형탄원에 참여했다.

1968년 여름의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을 계기로 억압은 더욱 강화됐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 진압에 항의하는 붉은광장의 5인 시위자에게는 4~5년형이 선고됐다. 

정부는 체제비판을 억제하는 한편으로, 개인적인 자유는 폭넓게 인정했다. 
체제를 문제 삼는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하는 것은 억압을 받았으나, 사생활에서는 금지된 간행물을 읽는 것도 용인됐다.

비판세력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지식인들의 태반은 체제 내로 복귀했으나, 이들 사이에서는 '공식적인 입장'과 '속마음'을 각각 달리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견해를 타이핑, 복사하여 사미즈다트(지하출판물)로 널리 유포시키며 저항을 계속한 사람들이 이론파()다. 사미즈다트는 해외에서 출판되어 다시 역수입되곤 했다. 
1970년대 초의 대표적인 해외출판물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와 메드베데프의 〈역사의 심판에 부쳐〉다.

이론파 운동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정권타도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반대운동은 아니었고, 지도층의 권위주의적 지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합리성과 도덕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적 개량운동이었다. 
운동은 체제 개선, 체제 민주화, 이데올로기 정화, 인권운동 등에 초점을 두고 진행됐다.
이론파에는 다양한 갈래가 있었다. 


물리학자 사하로프는 지하출판물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고찰〉에서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정함으로써 체제의 모순을 개선할 수 있다는 온건한 주장을 폈다. 
그에 반해 아말리크는 구조적 병리의 시정 가능성조차 의심한 과격파였다. 
R.메드베데프는 민주개혁에 기대를 거는 공산주의자인 반면에, 솔제니친은 정교신앙에 기울어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회의를 품었다(솔제니친은 망명 후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소련 비난의 선봉에 선다)
시냐프스키는 이념과 리더십의 쇄신을 통한 사회주의적 도덕성의 회복을 주장한 반면에, 카피차는 과학과 경제의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1970년대 초 이론파, 즉 반체제 지식인들은 억압에 대한 저항을 강화해나갔고, 정부는 새로운 억압책으로서 반체제 인사들의 출국을 허용하고 대신 시민권을 박탈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에 따라 솔제니친을 비롯해 첼로 연주자 로스트로포비치, 작가 보이노비치, 악쇼노프, 시냐프스키, 생물학자 J.메드베데프 등, 체제비판적인 이론파들이 잇따라 국외로 출국 또는 추방됐다. 
해외이주를 희망하던 유태인의 출국도 용인되어 1973년까지 13만 명이 출국했다.

그로 인해 반체제 경향이 뚜렷한 이론파는 거의 망명자가 됐고, 이들 출국자와 이들이 낸 출판물들을 통해 소련사회의 어두운 부분이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소련의 대외적 위신이 적잖이 실추됐다. 

망명자들은 해외에서 반소 신문 · 잡지와 서적을 활발하게 출간하여 세계적으로 반소련 운동을 북돋우는 한편, 국내로도 출판물을 대량 유입시켜 국내의 반체제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 중엽까지 소련에 남아 있던 비교적 온건한 체제비판 인사들은 합법단체를 조직, 합리적인 정책개발을 자극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단체들에는 야키르 등의 '인권옹호 그룹', 사하로프가 이끄는 '인권위원회', 투르친 등의 '앰네스티 국제 그룹', 오를료프 등의 '헬싱키 모니터 그룹' 등이 있었다.

1975년, 유명한 핵물리학자로 반체제 지식인들의 기둥이자 대변인 역할을 해온 인권운동가 사하로프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됐다. 
당시 사하로프는 사회주의의 개량 차원을 넘어서서 자유주의 성향을 점점 드러내고 있었다. 
소련에 서방측의 편파적인 시각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반 사하로프 캠페인이 벌어졌다. 

사하로프는 그 뒤에도 소련정부의 묵인하에 인권운동을 계속하다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출병을 비판한 뒤 1980년 1월 고리키 시에 행정유형됐다.

그 뒤로도 이론파 운동은 미미하게 계속되다가 1982년 '헬싱키 모니터 그룹'의 해산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몇몇 연구소의 개혁 성향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경제개혁 주장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 
1980년대 중엽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개혁운동과 함께 체제비판운동이 다시 맹렬하게 타올랐고, 체제 내 개혁을 요구해온 사하로프, R.메드베데프 등의 지도자는 개혁파의 중추로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찢겨져나가는 소비에트 연방, 민족문제의 심화(1989년 ~ 1990년).


동유럽의 대변혁은 부메랑이 되어 소련으로 되돌아왔다. 
시장경제의 도입 요구가 거세지면서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갔고,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을 중심으로 탈소 독립운동이 열도를 더해갔다. 
그중에서도 날로 격화되는 민족운동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변질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소련체제를 위협하는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본래 120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 
인구의 약 절반이 러시아인이고, 거기에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을 합친 슬라브계가 약 70%이다.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은 원칙적으로 민족단위의 공화국이고, 연방구성 공화국들 안에도 20개의 민족 단위 자치공화국이 있다. 
그보다 더 작은 단위로 8개의 자치주, 10개의 민족 관구가 있고, 별도 행정단위를 갖지 못한 민족도 많았다.

이 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이념과 소련시민으로서의 평등성, 그리고 소수민족의 자치권과 그들에 대한 정치 경제적 배려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 소련은 사회주의의 실현과 더불어 민족문제는 해결됐다고 말해왔다. 
그것은 해결된 게 아니라 잠복하고 있었던 것임이 곧 드러났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봉합돼 있던 민족문제가 폭발적인 양상을 띠며 표출되기 시작했다.

1986년에 카자흐 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면서 일어난 폭동은 민족문제의 해소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카자흐 청년들의 주장은 러시아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1988년 2월에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아르메니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소요를 일으켰다. 
아제르바이잔인과의 충돌이 시작됐고, 숨가이트에서 다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습격 ·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태는 날로 확산되면서, 인근지역에까지 번져갔다. 
당 지도부는 사태의 진전을 주목했으나, 이때까지도 민족문제는 부차적인 관심사였다. 
당 중앙위원회에서 고르바초프는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천명했다.

1989년 인민대의원대회가 창설되고 각 공화국과 자치단체에서도 선거가 실시되면서 민족문제가 전연방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가장 앞서 나간 것은 서유럽과의 동류의식이 강하고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오랫동안 분리, 반목한 경험을 갖고 있는 발트 연안 3개 공화국과 몰도바, 그리고 전통적으로 독립의식이 강한 그루지야였다. 
발트 3국은 2차대전 직전의 발트 3국 합병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고, 그루지야에서는 1921년 소비에트 정부로의 반강제 합병, 고르바초프의 반 알코올 투쟁으로 인한 포도 생산업의 파괴가 문제화됐다.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는 '민족 우선'을 내세우는 인민전선이 조직되고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규모로 발전해갔다. 
1989년 7월 발트 3국은 마침내 사실상 독립을 의미하는 주권선언을 했고, 8월 23일에는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200만 주민이 세 공화국의 수도를 잇는 총연장 600㎞의 '인간사슬' 시위를 벌여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소련정부와 공산당은 민족주의 감정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발하는 한편으로, 공화국들의 주권이 형식에 그친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 공화국에 더 많은 주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민족강령'을 발표했다. 
국방과 당 부문을 제외하고 '연방의 헌법이나 이해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권한의 행사를 공화국에 위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완전 독립으로 방향을 굳힌 발트 3국 인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989년 말의 동유럽 사태는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을 더욱 부추겼다. 
12월에는 리투아니아 공산당마저도 소련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다음해 1월 고르바초프가 직접 리투아니아로 건너가 더 진전된 '새로운 연방'을 만들겠다며 설득작업을 폈으나, 이미 상황은 물 건너가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민족 간 유혈투쟁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발트 3국은 1940년 병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독립의 길로 달음질쳐 갔다. 
소련 중앙정부는 거의 100% 연방에 의지하고 있던 에너지 공급을 차단하며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을 저지하려 했다. 
발트 3국은 2차대전 이전의 발트 위원회를 복원하고 사실상 소련에서 이탈해갔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6월에 옐친과 급진파가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 공화국이 공화국법을 소련헌법에 우선시키겠다면서 주권선언을 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 공화국은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의 하나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많은 기구가 연방정부와 중첩되는 허구적인 공화국이었다. 
이 러시아 공화국이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모스크바에 고르바초프의 소련과 옐친의 러시아가 공존하는 이중권력 상태가 출현했다.

이어 몰도바와 우즈베크 공화국의 주권선언이 있었다. 
이제까지 소련의 한 주와 같았던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이 제각기 실질적인 권력으로 부각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에 예리한 균열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설득과 위협을 병행하면서 연방을 유지해야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하고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다고 호소했으나, 공화국들의 탈소 원심력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공화국들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혁신적인 신연방안을 내놓았다. 

새 연방조약안은 "각 공화국은 주권국가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며, 연방은 조약 가맹국이 위임하는 범위 내에서 권력을 집행한다"고 규정해, 연방보다 공화국의 권력이 우선함을 인정했다. 

연방의 권한은 국방, 대외정책, 전략자원관리, 재정 · 통화정책으로 축소 조정됐다.

1990년 12월에 열린 인민대의원대회는 이 안을 승인하면서, 이와 함께 연방 존속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발트 3국과 몰도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의 6개 공화국은 즉각 신연방조약에의 불참을 선언했다.

1991년 1월, 분리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하던 리투아니아에서 소련군부의 강경파가 독단으로 빌뉴스 텔레비전 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던 시민 1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사전에 이를 몰랐으나, 사건발생 후 점령을 사후 승인했다. 
이어 라트비아에서도 소련군과의 충돌로 시민 5명이 죽었다. 
민족문제의 해결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었다.

3월 17일, 6개 공화국이 불참한 가운데 소련 존속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투표 결과, 총투표자의 77%가 소련 존속에 찬성했으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비롯한 몇몇 대도시에서는 찬성률이 50%를 약간 웃도는 데 그쳤다.

사태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갔다. 
소련이 점점 실체를 잃고 껍데기로 변해가는 가운데, 경제는 계속 악화되고 인민들의 불만은 고조돼갔다. 

2월 19일 옐친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독재국가로 몰아가고 있다고 맹비난하면서,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후 옐친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보수파의 맞불 작전이 전개되면서, 소련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개 정국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음성듣,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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