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일 토요일

콜로세움,Colosseum.

콜로세움 [Colosseum,


둘레 527m, 높이 48m에 이르는 거대한 극장인데, 불과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토록 웅장한 건물을 손색없이 지은 로마인의 건축기술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건물은 1층부터 도리아, 이노니아, 코린트 양식으로 4개층이 서로 다르게 지어졌다. 5만명이 넘는 사람들 이 수월하게 입장할 수 있도록 80개가 넘는 아치문이 있었고, 관객은10분이면 모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분제 사회였던 까닭에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으며 황제가 드나드는 입구가 따로 있었다.

영어: Colosseum(콜로세움)
이탈리아어: Colosseo(콜로세오)
라틴어: Amphitheatrum Flavium(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프랑스어: Colisée(콜로세)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지에 위치한,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된 투기장. 원래 이 타입의 것은 원형극장(Amphitheatre)이라고 하는 건축물이다. 
원형극장도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콜로세움처럼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 관람 등을 하는 스타디움의 개념인 앰피시어터가 있고, 다른 것으로 원형 좌석이 있어서 희곡, 연주 등을 행하는 예술적 상영장인 앰피시어터가 있다. 
콜로세움은 전자의 것으로, 로마가 건축한 것 중에서 가장 큰 원형극장이다.

흔히 원형경기장 아무것에나 콜로세움이라고 붙이는 일이 많으나, 로마 시의 중심부에 있는 그것만을 콜로세움이라고 부른다. 
다른 지방에도 원형극장(경기장)이 여럿 있지만 콜로세움이라고 부르지 않고 각각의 이름(예를 들어 베로나의 앰피시어터는 일반적으로 아레나라고 한다), 내지는 어디어디의 앰피시어터로 부른다. 
콜로세움은 그중에서 로마 중심지에 있고 제일 크고 보존도 잘된 편이라서 유명하다보니 대명사처럼 사용될 뿐이다.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전역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로마 안에 위치한 콜로세움도 역사 지구에 포함되어 등재되었다.

명칭의 유래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식 명칭은 건설자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일족 명을 딴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이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근처에 세워진 아주 거대한 네로 황제의 동상(콜로서스)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 콜로서스 동상은 건설 당시부터 평판이 아주 나빴기 때문에 네로 황제가 실각한 이후 머리 부분이 태양신의 두상으로 교체되었었고, 나중에 구리로 재활용하기 위해서 완전히 철거되었다.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계속 남아서 원형극장 쪽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플라비우스 경기장을 어떤 명칭으로 불러야 하냐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일단 현대에 대중적, 공식적으로는 콜로세움의 사용률이 높다.


콜로세움
영어 표기를 찾아보면 Colosseum과 Coliseum으로 두 가지가 나온다. 영어권 사람들에게도 꽤나 골때리는 문제인지 이에 대한 논문도 존재한다. 원래 발음을 생각하면 Colosseum이 변형을 거쳐 Coliseum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야외 경기장 등을 Coliseum, 로마에 있는 걸 Colosseum으로 구분을 시도하기도 하나 구분이 모호한 건 여전. 의외로 이걸 열심히 지키는 게 일본어 쪽으로, 로마의 콜로세움을 가리키는 게 아니면 コロシアム로 표기한다. 
정작 일본어는 그렇게 해놓고 영어 명칭은 Colosseum으로 하는 등 표기에 혼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인 모양. 한국에서는 Coliseum 표기의 인지도가 낮은 편이기에 가리지 않고 콜로세움이라고 읽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Coliseum/コロシアム이라고 나와있는 표현이 현지화될 때에도 보통 저 발음을 살리지 않고 콜로세움으로 번역된다.

예로부터 가장 재밌는 3대 구경이 불구경, 물구경, 싸움구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투기장은 그 세 가지 구경거리를 충족시켜 주는 장소였다.
특히 로마의 정치인들은 빵과 서커스로 국민들의 불만을 억제하려 했기 때문에 콜로세움의 운영은 정치인들에게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수용 규모에 대해서는 입석의 형태까지 고려하면 적어도 5만은 상회하고 최대 8만은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 결과. 매우 효율적으로 지어져, 각층, 각 섹션별로 현대의 경기장마냥 입, 퇴장 게이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 자신이 어느 구역에 있느냐에 따라 그 게이트를 이용하면 대규모 인원이 관람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붐비지 않고 입장, 퇴장을 할 수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3S정책과 유사한 것이기 때문에, 입장료가 없는 건 물론이고 관객들을 위한 점심 도시락과 포도주까지 공짜였다.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는 대결을 하기도 하고, 바바리사자카스피호랑이아틀라스불곰유럽불곰, 코끼리, 하마, 코뿔소 등 같은 맹수들을 싸움에 붙이거나 심지어는 검투사들이나 사형수들이 맹수들과 대결을 벌이는 것도 있었다. 
사람 대 황소의 투우 경기 또는 경기장에 물을 채워서 가상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항상 치고 박는 싸움만 한 건 아니었고, 동물들이 재주를 부리거나 하는 등 현대의 서커스와 같은 공연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코끼리, 호랑이, 악어, 하마, 기린, 코뿔소 등등 로마 시민들이 평소엔 볼 수 없는 신기한 동물들이 콜로세움 안을 한 바퀴 돌아 행진하는 사파리 같은 공연도 있었다. 현대인들에게는 경악할 내용이지만, 볼거리로 제공되는 이른바 '수간 쇼' 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미소녀, 혹은 미소년들이 관중들 앞에서 동물들과 수간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대 로마에서의 문화는 여성들이 성적인 목적으로 뱀을 애완동물로 길렀다는 기록이 남아있었을 정도였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검투를 보고 환호하던 로마인들이었기에 아마 지금으로 치면 스트립쇼 같은 개념이었을 수도 있다. 해전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고대 기록에 남겨져 있는데, 정말로 이루어졌느냐에 대해서 그동안 현대 학자들이 의문을 표했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어떻게 물을 채우고 수밀 구조를 유지했을지와, 물을 채워서 전함을 띄워 돌아다닐 만한 공간이 되기는 하느냐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모의 해전은 로마 시내의 대형 저수 시설에서 시행했다는 설이 이 설의 다수설이다. 실제로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모의해전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 저수지도 있다. 
평상시에는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였고 특별한 경우에만 모의 해전장으로 사용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특별한 경우라고 해도 아우구스투스의 그 긴 치세에도 모의 해전은 한 번밖에 없었다. 그냥 '저수지'보다는 '모의 해전장'이 간지 나서 그렇게 붙여 놓은 것 뿐이다.

연구에 따르면 콜로세움 내부의 석재 구조물은 도미티아누스가 확장공사를 할 때 세워졌었고, 티투스 당대엔 나무 판자와 기둥으로 임시 무대를 설치하는 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대를 치우고 물을 채우는 식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땡볕이 심한 낮에 경기가 벌어질 때는 후술하듯이 콜로세움의 천장에 미세노에서 파견 나온 해군 병사들이 범포를 덮어서 그늘을 제공했다고 하는데, 내벽 가장 위층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것들을 일종의 와이어(밧줄)로 연결해 접어놓은 천으로 덮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신화나 전설, 역사적인 사건들을 재연하는 공연도 펼쳐졌다. 
구체적인 예로는 자신을 화장하는 장작더미 위에 산 채로 타 죽은 헤라클레스, 리라를 연주하다 술 취한 여인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은 오르페우스, 로마 초기에 자신의 팔을 태워서 로마에 충성심을 보인 전설적인 영웅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이야기 등이었는데, 모두 분장한 노예들이 완벽하게 그들의 운명을 재연해 냈다고 한다.
크레타 여왕 파시파에(미노타우르스를 낳은 여성) 역을 맡은 여죄수가 황소에게 수간을 당하고, 다이달로스 역을 맡은 죄수가 날개를 잃고 경기장 바닥에 추락해 온몸이 뭉개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연의 목적은 젊은이들에게 산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16세 이하의 어린이들에게도 관람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네로의 교회 탄압 당시에도 크리스천들을 콜로세움 한 가운데에 묶어놓고 사자를 풀어놓아 뜯어먹히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 네로 시절의 기독교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인가에 대해서는 그 근거가 없다.
중세 시대에 콜로세움의 공간을 이용해서 민가로 불하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프란지파니 가문은 콜로세움을 사들여서 요새화해 성채로 삼기도 했다. 바위를 빼다가 건축자재로 써버리는 일도 잦았다. 
순교자가 생긴 장소에 대해 보여 주는 기독교적 숭배와는 영 딴판인 취급이었던 것이다. 콜로세움이 종교적 성소로 여겨지게 된 것은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가 난 성소라고 선포하면서였다. 
남아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네로 황제 때 타키투스의 기록인데 이 시기 콜로세움이 없었으며 16세기 이전에 기독교가 그와 같은 입장을 보인 적도 없다. 물론 죄인들을 이용해 콜로세움에서 베스티아리를 한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 신빙성이 낮다는 것은,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박해하였다는 떡밥에 관한 것이지, 로마가 원형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것은 엄연히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놀라운 행위(순교)는 어느 로마 도시에서나 가장 중요한 공공장소 가운데 하나에서 아주 암울하게 진행되었다.

순교는 원형경기장의 구경거리라는, 로마인들의 생활을 특징짓는 폭력과 질서가 복잡하게 뒤얽히는 축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7년 리옹에서 한 무리의 기독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중은 기독교도들이 고문대에서 찢기고, 철판 의자에서 그을려지고, 황소 뿔에 받히고, 굶주린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며 갈채를 보냈다.

원형경기장에 질서 있게 앉은 잘 차려입은 군중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행위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로마 다수파의 권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Christopher Kelly,「The Roman Empire」

오랜 내전 기간을 끝마치고 파탄 상태에 이른 로마의 상태에서 어디서 돈이 나와서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런 초대형 사업을 벌였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콜로세움을 건설하는 데에 든 재정은 대부분 아들이자 후대 황제가 되는 티투스가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보물들로 충당했다고 한다.




만약 시민들을 쥐어짜서 지었다면 당연히 반발이 나왔을 테지만 남의 나라 보물(...)을 판 돈과 후술할 네로의 사치스러운 궁전을 뜯어다가 자재를 보충했으므로 반응이 좋았다. 
전대 네로 황제의 개인 궁전인 이른바 '황금 궁전'이 있던 것을 헐고 그 자리에 시민들의 유흥 시설인 경기장을 지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신분에 따라 관중석이 위에서 아래로 나뉘어져 있었고 나무쪼가리의 혹은 흙으로 구워진 입장권에 쓰인 번호가 적힌 출입구로만 드나들 수 있어 수만 명의 관중이 들어가는 당대 초 거대 경기장임에도 불구하고 30분이면 모두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완공됐을 당시의 원형 경기장의 크기는 일부만 남아있는 현재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외벽의 높이는 52m에 달했으며 상술한 네로의 개인 궁전에서 뜯어낸 각종 조각상들을 외벽의 아치 내부에 배치했다. 
외벽 처마와 기둥도 1, 2, 3층이 각각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으로 다른 외양을 취하고 있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나오는 화산재를 이용한 콘크리트 같은 특수 건축재와 무게를 분산시키는 아치형 구조를 채택해 비교적 적은 자재로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최상층에는 나무 기둥이 설치되어 햇빛이 강한 날에는 오늘날의 돔구장처럼 천으로 된 차양막이 하늘을 가릴 수 있는 구조였다. 
이 큰 경기장의 부지를 제공하고 그 많은 아치에 들어갈 조각상을 죄다 충당하게 한 네로의 '황금 궁전'이 얼마나 사치스러웠을지 예상할 수 있다. 
궁 중앙의 인공 연못은 마치 바다를 연상시켰다고 전할 정도이니.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크기의 건물인지라 베스파시아누스 대도 아니고 티투스 때도 아닌 도미티아누스 대에 완공되었다.

아래쪽이 키르쿠스 막시무스.

하지만 제일 큰 건물은 아니고 사실은 로마 건축계의 콩라인인데, 전차경주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는 무려 15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초초거대 경기장이었다. 
물론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보면 알겠지만 콜로세움보다 훨씬 낮은 높이에 횡으로 길쭉한, 현대로 치면 일종의 레이싱 경기장으로, 말하자면 스타디움에 가까운 콜로세움과 일대일 비교는 좀 힘들다. 
물론 둘 다 어마어마한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로마의 강대한 국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상징

요즘에는 로마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로 여겨지고 있다. 놀랍게도 가톨릭의 의례 장소로도 자주 사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금요일에 열리는 십자가의 길 행사로, 교황이 순례자 행렬을 이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콜로세움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방치된 콜로세움에는 진귀한 식물이 자랐고, 식물학자들이 식물을 연구하러 콜로세움에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석재 장식 등은 계속 파괴되거나 도난되었고,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다시피 한 상태. 
구조체조차 상당수가 사라져 그냥 놔두면 연쇄적으로 무너질 우려가 있어 콘크리트로 버팀벽을 세워놓았다. 
콜로세움 근처의 도로를 정비하고 콜로세움의 정비를 시작한 건 다름 아닌 무솔리니. 주요 관광지인 만큼 표 구입 행렬이 정말 길다. 
너무 길어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면 팔라티노&포로 로마노 입구에서도 콜로세움과 묶어서 표를 파는 데다가 사람들이 그쪽은 잘 모르는지 줄이 상대적으로 짧으므로 이 쪽을 이용하도록 하자. 표가 있다면 프리패스가 가능하다. 
언뜻 봐서는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표를 사러 서있는 것인지 입장하러 서있는 것인지 헷갈릴 수 있으므로, 포로 로마노에서 표를 샀다면 긴 줄에 서지 말고 바로 들어가도록 하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내부 매표소에서 표를 사기 위해 서있는 것이다.

고대 로마를 상징하는 매우 유명한 건물이다보니 여기저기서 자주 튀어나온다.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 잠입, 암살, 경주, 로물루스의 유물 등 주요 미션 장소로 등장하며, 이 게임에 등장하는 유적 중 주인공 에치오 아디토레가 가장 자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건물이다. 유희왕 ZEXAL에서 No.54 반골의 투사 라이언하트가 발견된다.




애니메이션 탑블레이드에서는 유럽팀의 안토니오(잔카를로 토르나토레)가 여길 임대해서 팽이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재키찬 어드벤처에서 물의 악령이 봉인해제를 할 때 나온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2부에서는 고대 로마의 파문 전사들과 싸우고 난 뒤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해진 기둥 속 사내들이 콜로세움 지하에서 2000년 동안 동면을 시작했다. 
후반부에는  이 마피아 파시오네의 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와 접선하기 위해 향한 곳이기도 하다. 원피스의 드레스로자에서 나오는 코리다 콜로세움도 위 건축물을 모티브로 한 것.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 불가사의로 등장하지만 현재의 훼손상태가 아닌 깔끔한 상태로 나온다.
특히 오늘의 유머에서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는 글을 '콜로세움'이라 부르기도 한다.

에서 행복도를 올려주는 일반 건물로 등장한다. 모든 도시에 콜로세움을 지으면 행복+5를 올려주는 불가사의인 원형 경기장을 만들수있다. 분명히 신 7대 불가사의임에도 일반 건물로 나오는 게 참으로 안습하다.(투기장 내지는 결투장과 헷갈린 듯하다. 

불가사의로 등장.
영화 점퍼 에서의 장면 중 주인공이 여자친구와 로마로 여행을 가고 콜로세움에 몰래 들어가는 장면과 내부 촬영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콜로세움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콜로세움에 장비를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카메라와 기타 촬영장비를 모두 들고 촬영을 한 것이라고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공식 포스터에서도 활용되었다.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글래디에이터(영화)에선 당연히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막시무스와 동료들이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하기 위해 로마에 막 도착했을 때 동료인 주바가 콜로세움을 보며 '저런 거 본 적 있어? 사람이 어떻게 저런 걸 지었을까?'라고 말한다. 해신 같은 한국 사극에서도 종종 비슷한 것이 사용되곤 한다. 복면가왕에서는 우리집 부서져또... 콜로세움이라는 가명이 나왔다.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 Centre historique de Rome, les biens du Saint-Siège situés dans cette ville bénéficiant des droits d'extra-territorialité et Saint-Paul-hors-les-Murs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흔히들 전차 경기가 콜로세움에서 벌어졌다고 착각하는데, 전차 경기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이루어졌다. 문명 시리즈에선 대대로 일반 건물로 나온다.
콜로세움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네로 황제가 거대한 인공 호수를 만들려던 곳이었다. 이 인공 호수를 포함한 하술된 개인 궁전과 거대한 도심공원을 만들려던 것이 네로 황제의 원래 계획이었고 그래서 건축을 기획한 네로를 본딴 거대한 동상을 인공 호수가 들어설 자리 부근에 세운 것이라고. 애초에 네로의 이 도심공원 프로젝트 자체가 로마 시민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코끼리를 훈련시켜 코끼리가 걸어가다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한다거나...수간을 종교적인 행위로까지 인식하였다. 수간이 유럽에서 죄악시된 건 기독교가 압도적인 지배적 위치를 가진 중세 무렵이다
도시국가 시절의 로마를 침략한 적국의 왕 포르센나를 암살하려다 사로잡히자, 포르센나의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오른손을 집어넣고 손이 다 타버릴 때까지 비명 한 번 안 지르고 버텨 로마인의 용기를 증명해 보였다는 애국자.
유명한 영화인 글래디에이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검투사 노예들과 로마군을 섭외하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한니발의 자마 전투를 재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선 막시무스의 주인공 보정으로 로마군이 끔살.(...) 근데 무장 상태를 보면 막시무스와 동료 검투사들이 글라디우스필룸스쿠툼 등 로마군의 표준 무장을 했고 로마군이라고 나온 패거리는 채리엇을 타고 활을 쏘는 등 전혀 로마군답지 않다.
네로 시절의 그 유명한 기독교 박해 때는 당연히 콜로세움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건 네로가 죽은 뒤 내전을 거쳐 황제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 의 말년 부터 티투스 황제 때의 일이고 완전개장은 도미티아누스 때이다.. 네로가 죽은 십수년 뒤 에야 콜로세움이 있었다.
이건 콜로세움만이 아니라 로마가 유지되던 시대의 건축물 중 현재까지 원래모습인 건축물은 판테온뿐이다. 다른 건축물은 모두 석재공급장 취급을 받았다. 오히려 비슷한 시기의 포로 로마노와 비교하면 성지지정 때문에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한 편이라는 주장도 있다.
로마가 교회를 탄압하면서 초기 신자들을 사자에게 물어죽이게 한 장소. C.M.B. 박물관 사건목록 4권에서는. 베니틱토 14세가 콜로세움 지하에 묻혀 있는 제2신전의 유물의 존재를 알아채곤, 유적 훼손으로 그 존재가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순교지로 지정했단 가설을 내세운다.
콜로세움이 없었을 때에도 수용인원이 5배가 되는 대경기장이 있었다. 로마가 제국이 되기 전 아직 공화정이었을 때부터 범죄자들의 처형을 이런 식 으로 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2대황제 티베리우스 때부터 산적, 도적의 수괴를 기둥에 묶어두고 사자에게 잡아먹히게 했다고....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도 콜로세움에서가 아닌 다른 경기장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네로 황제 당시에는 콜로세움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케임브리지 대학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교수. 로마 제국사(고대 말기) 전공.
참고로 저 헤롯 왕의 성전은 벽돌 하나하나에 금박을 입혀서 무지막지하게 화려했다고 전해지는 건물이다. 로마병들이 이걸 하나하나 벗겨가는 데 고생깨나 했다고. 이 정도이니 콜로세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일부 충당할 수 있었다는 것도 이해가 될 것이다.
귀족이 경기를 제일 잘 볼 수 있는 아래쪽, 시민들은 중간,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나 노예, 여성들은 가장 위의 자리였다고 한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은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됐다고.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의 입장료와 통합적으로 받고 있다. 표 한 장을 사면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언덕을 모두 볼 수 있다. 콜로세움을 직접 보면 외벽에 구멍이 숭숭 뚫린 걸 볼 수 있는데 이 구멍은 전부 철 쐐기와 나무 쐐기들이 있던 자리로, 전부 빼 가서 없어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바티칸 박물관은 로마는커녕 이탈리아령이 아닌 교황령이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뿐입니다.고대 로마인들의 뛰어난 건축공학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세우기 시작해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으며 이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한 층을 더해 4층의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nfiteatro Flavio)을 완성했다. 현재는 원형의 3분의 1만 남아 있다. 

장축지름은 187m이고 단축지름은 155m, 둘레 527m, 높이 48m의 타원형 건물이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각 층마다 양식을 달리했으며 외벽은 아치 80개가 둘러싸고 있다.
신분과 성별에 따라 1층의 가장 낮은 곳에 설치된 특별석에는 황제와 베스타 여신이 마주하고, 그 옆으로 흰 토가(로마 시민의 겉옷)를 입은 원로원, 2층에는 귀족과 무사, 3층에는 로마 시민권자, 4층에는 여자, 노예, 빈민층이 자리 잡았다. 

한 번에 5만 명이나 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경기장에서 로마인들은 치열한 검투사의 격투 시합, 맹수 등의 사냥 시합 등 목숨을 건 잔인한 전투 경기와 모의해전(이를 위해 경기장에는 물이 채워졌다) 등을 즐겼다. 
티투스 황제는 100일의 축제 기간 동안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이 경기장에서 경기를 했던 검투사들은 전쟁 포로들로 시합에서 일정한 승리를 거두면 자유의 신분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콜로세움은 햇빛이 강할 때나 비가 올 때, 벨라리움(Velarium)이라는 천막 지붕을 설치해 하늘을 가렸는데 천장 가운데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벨라리움으로 콜로세움을 덮는 작업은 고도의 공학기술을 요하는 일이었다. 
경기장 바닥에는 나무 바닥을 깔고 그 위에 모래로 덮었는데 원형경기장을 이탈리아어로는 아레나(Arena)라고 한다. 이는 라틴어의 '모래'를 뜻하는 아레나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경기장 바닥이 파헤쳐져 있지만 옛날에는 지하실 위에 덮개를 씌워 그 위에서 경기를 했고 바닥 밑에는 지하실을 만들어 칸을 막고 검투사들의 대기실과 맹수들의 우리로, 그리고 경기 시 필요한 도구들의 보관 창고로 사용했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그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의 이름인 콜로소(Colosso)에서 와전되었는데 이는 라틴어 'Colossus', 즉 거대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217년 화재, 442년에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그 후에는 성당 건물들이나 귀족들의 저택을 짓기 위한 건축자재와 대리석의 채석장이 되어 파헤쳐지기도 했다. 
1744년 베네딕트 교황 14세는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콜로세움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거의 죽지 않았다고 한다.
콜로세움 내부 계단의 꼭대기 층은 힘들더라도 꼭 올라가 보자. 
바깥 전경도 멋있지만 내부의 모습이 매우 웅장하다. 
과거에 결투가 벌어졌던 1층 바닥 일부분에는 다리가 놓여 있으니 다리 위에서 옛 지하의 모습(맹수 우리와 검투사실 등)을 상상해 보자. 
밤에 보는 콜로세움의 스펙터클한 야간 투광 조명도 무척 멋있다. 
콜로세움의 야경은 웅장하고 화려해 낮에 즐긴 내부의 황량함과는 대조적이다. 
콜로세움을 방문하기 전에 영화 <글래디에이터>나 미국드라마 <스파르타쿠스>를 미리 보고 가면 더욱 좋다. 
콜로세움 주변에서 로마 군인 제복을 입고 상행위하는 장사치를 조심하자.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 반드시 미리 흥정해야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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