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기념물, & 문화재, (오래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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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1,0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나이가 얼마나 될까? 미국 캘리포니아의 비숍 근처에 있는 화이트 산에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므두셀라'가 살고 있다. 이 나무는 소나무의 일종으로 무려 4,9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너무 오래 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무려 969살까지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므두셀라의 이름을 따서 '므두셀라'라고 부른다고 한다.
므두셀라 나무에게도 형성층이 있어 굵기가 계속 굵어진다. 그러면 4,900년이나 굵어졌으니 지금은 엄청나겠다고? 아니다. 이 나무는 아주 더디게 자라기 때문에 100년 동안에 고작 3cm밖에 굵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된 나무들은 보통 속이 텅 비어 있다. 나무가 굵어지는 것은 나무껍질 바로 아래의 형성층에서 새로운 세포를 계속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무는 몸통 안쪽에 있는 것일수록 오래된 세포다. 그런데 오래된 세포는 시간이 지나면 죽게 되므로, 그 속에 여러 균들이 서식하게 되고, 결국 중심부는 썩어 구멍이 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목들은 속이 썩어 텅 빈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나무는 너무 오래 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무려 969살까지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므두셀라의 이름을 따서 '므두셀라'라고 부른다고 한다.
므두셀라 나무에게도 형성층이 있어 굵기가 계속 굵어진다. 그러면 4,900년이나 굵어졌으니 지금은 엄청나겠다고? 아니다. 이 나무는 아주 더디게 자라기 때문에 100년 동안에 고작 3cm밖에 굵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된 나무들은 보통 속이 텅 비어 있다. 나무가 굵어지는 것은 나무껍질 바로 아래의 형성층에서 새로운 세포를 계속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무는 몸통 안쪽에 있는 것일수록 오래된 세포다. 그런데 오래된 세포는 시간이 지나면 죽게 되므로, 그 속에 여러 균들이 서식하게 되고, 결국 중심부는 썩어 구멍이 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목들은 속이 썩어 텅 빈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장과 죽음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계속 성장하여 키가 커지고 줄기의 둘레도 커집니다. 또 나이테가 늘어나고, 잎의 수도 많아지며, 거대해진 몸을 지탱해야 하므로 뿌리도 크게 발달합니다. 그러다가 더 오래되면 나무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나이테는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무가 오래될수록 이 부분이 썩어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오래된 나무라도 나무가 건강하면 썩는 부분이 겉 부분까지 퍼지지 않도록 막기 때문에 속이 빈 나무라 할지라도 계속 살 수 있습니다. 썩지 않은 겉 부분에 물관이 있기 때문에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식물의 여러 기관까지 이동하여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나무는 썩은 부분이 겉 부분까지 퍼지기 때문에 결국 죽게 됩니다. 이런 나무는 썩은 속을 파내고 대신 톱밥이나 독성을 없앤 시멘트로 속을 채워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나무라도 나무가 건강하면 썩는 부분이 겉 부분까지 퍼지지 않도록 막기 때문에 속이 빈 나무라 할지라도 계속 살 수 있습니다. 썩지 않은 겉 부분에 물관이 있기 때문에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식물의 여러 기관까지 이동하여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나무는 썩은 부분이 겉 부분까지 퍼지기 때문에 결국 죽게 됩니다. 이런 나무는 썩은 속을 파내고 대신 톱밥이나 독성을 없앤 시멘트로 속을 채워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빈 나무의 활용
오래된 나무는 속에 구멍이 나 있거나 비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 중 아주 큰 나무는 관광지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국립공원은 고목이 많이 있기로 유명한데, 이곳에 있는 고목들은 키가 크고 줄기도 매우 굵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 '레드우드'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곳이 유명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속 빈 고목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속 빈 나무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 빈 나무는 새나 다람쥐 등의 숲속 동물의 좋은 보금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나무가 만들어 준 구멍은 동물이 힘들이지 않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속 빈 나무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 빈 나무는 새나 다람쥐 등의 숲속 동물의 좋은 보금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나무가 만들어 준 구멍은 동물이 힘들이지 않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게 해 줍니다.
1. 의령 세간리 현고수[ 宜寧世干里懸鼓樹 ],
경남 의령 현고수
지정번호지정일소재지종류/분류크기
천연기념물 제493호 |
2008년 03월 12일 |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1000 지도 |
식물 |
줄기둘레 7m, 높이 15m |
2008년 3월 12일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되었다. 이종삼(李鍾三)이 소유하고 있다.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곽재우가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면서 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쳤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크기는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7m, 높이 15m에 달하며 나이는 600년 정도이다.
곽재우는 이곳에서 매부인 허언심(許彦深)과 함께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고 가재(家財)를 털어 병사의 의식주를 해결하였다고 전해진다. 근처에 있던 곽재우의 생가(生家) 터는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 있다.
곽재우는 이곳에서 매부인 허언심(許彦深)과 함께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고 가재(家財)를 털어 병사의 의식주를 해결하였다고 전해진다. 근처에 있던 곽재우의 생가(生家) 터는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 있다.
2. 충남 태안군에 있는 흥주사:
다른 사찰과 달리 일주문이 없다. 주차장과 경내를 이어주는 계단이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계단을 오르다 보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양쪽으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천왕문의 사천왕을 대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얽힌설화:
흥주사에는 다양한 문화재가 있지만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건 이 나무들다. 흥주사 좌측에 서있는 은행나무는 흥주사 창건과 관련된 전설을 갖고 있다. 옛날 먼길을 가던 노승이 백화산 기슭에서 잠시 쉬던 중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노승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리키며 "이곳은 부처님이 상주할 자리이니 지팡이로 표시하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은행나무
노승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노승은 산신령이 가리킨 자리에 지팡이를 꽂아두고 아침 저녁으로 정성껏 기도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팡이에서 은행나무잎이 피기 시작했다. 이후 기도하는 노승앞에 다시 나타난 산신령은 "자식이 없는 자가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고 태어난 자식들이 부귀를 얻어 부처님을 모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몇 십년 후 그 자리에 흥주사가 세워졌다. 흥주사는 부처님 손길이 자손만대 전해지길 바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흥주사 은행나무 왼쪽 가지 아래를 보면 남근(男根)을 닮은 조그만 돌기가 보인다. 예로부터 자식을 낳는데 효험이 있다해서 흥주사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한다. 이 돌기는 또 유주(젖꼭지)라 불린다.
흥주사 은행나무 왼쪽 가지 아래를 보면 남근(男根)을 닮은 조그만 돌기가 보인다. 예로부터 자식을 낳는데 효험이 있다해서 흥주사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한다. 이 돌기는 또 유주(젖꼭지)라 불린다.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가지에 돋아난 뿌리의 일종이다.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에서 나나타는 현상이다.유주는 뿌리호흡만으로는 모자라 허공으로 드러난 뿌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산천이 진동할 듯한 울음을 터뜨리거나 가끔 목탁소리를 내어 신도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오고 있다.
흥주사 은행나무는 태안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임에도 불구하고 생육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매년 이른 봄에 막걸리를 은행나무 주변에 뿌려주어 해마다 수많은 새순(맹아)이 돋아나고 있다. 느티나무는 흥주사에서는 사슴나무라 불린다.
흥주사 은행나무는 태안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임에도 불구하고 생육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매년 이른 봄에 막걸리를 은행나무 주변에 뿌려주어 해마다 수많은 새순(맹아)이 돋아나고 있다. 느티나무는 흥주사에서는 사슴나무라 불린다.
흥주사의 지정 문화재들보다 더 유명한 이 사슴사무는 어느 곳에서 봐도 사슴과 닮아 보이지 않는다. 스님들을 따라 제대로 위치를 잡고 서면 사슴과 마주하게 된다.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금방 찾는다고 한다. 세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동공이 만들어져 있다고 하는데 겉에서는 안보인다. 절은 작지만 900여 년 된 은행나무와 4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고찰인 흥주사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나무는 둘레 22m, 8.4m이고 느티나무는 높이 18m, 둘레 8m이다.
3,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낙우송이 있다.수령 127년에 높이는 23m, 둘레는 34m다. 낙우송은 침엽수이면서 낙엽수이다. 침엽수는 낙엽하지 않는게 보통지만 낙우송은 침엽이면서 낙엽하는 특이한 나무다. 나무가 굵고 쭉 뻗어 있고 수피는 붉은 갈색, 세로로 갈라져 작은 조각으로 벗겨진다. 어린 가지는 녹색이다.
잎은 어긋나며, 홑잎이지만 여러 장이 깃털 모양으로 붙고, 선형으로 길이 1.5-2.0cm, 밝은 녹색이고 얇다. 암꽃과 수꽃이 한 그루에 핀다. 수꽃차례는 가지 끝에 발달하며, 아래로 드리우는 원추꽃차례로서 길이 1.5-2.0cm, 자주색이다. 열매는 구과이며, 둥글고, 지름 2-3cm이다. 꽃은 4, 5월에 피고 열매는 9월에 익는다.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어린 가지가 잎과 같이 떨어지나, 동아가 달린 끝 쪽 어린 가지는 떨어지지 않는다.
잎은 어긋나며, 홑잎이지만 여러 장이 깃털 모양으로 붙고, 선형으로 길이 1.5-2.0cm, 밝은 녹색이고 얇다. 암꽃과 수꽃이 한 그루에 핀다. 수꽃차례는 가지 끝에 발달하며, 아래로 드리우는 원추꽃차례로서 길이 1.5-2.0cm, 자주색이다. 열매는 구과이며, 둥글고, 지름 2-3cm이다. 꽃은 4, 5월에 피고 열매는 9월에 익는다.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어린 가지가 잎과 같이 떨어지나, 동아가 달린 끝 쪽 어린 가지는 떨어지지 않는다.
메타세쿼이어(Metasequoia)와 비슷하지만 다른 나무다. 메타세쿼이어에 비해서 잎이 어긋나고 구과의 실편이 10개 이상으로 많다. 낙우송은 땅 위로 숨을 쉬기 위해 솟아오른 돌기(공기뿌리)를 많이 내밀고 있지만 메타세쿼이어는 공기뿌리가 올라오지 않는다. 나무 모양이 아름다워 풍치림으로 많이 심고 건축재로도 많이 쓰인다. 고향도 아닌 땅에서 침엽이지만 낙엽하면서 같은 듯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온 태안읍 낙우송. 암수가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을까? 누구나 평범한 삶을 원하지만 원만하게 사는 것 만큼 어려운게 없다. 평범하게 산다는 건 무얼까? 다른 삶과 비교하지 않은 것, 다름을 인정하는 것, 치밀하지만 버릴줄도 아는 것, 평생의 반려자와 함께 하는 것...태안읍 낙우송은 이런 이치를 깨달아 오래 살아남았으리라???
4, 부여 성흥산사랑나무:
높이 20m, 둘레 5m의 고목이다. 약 400년 전에 누군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보통 느티나무가 나지막한 마을의 입구 또는 중심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사랑나무는 산성 꼭대기 부분에 있다는 게 절묘하다. 이곳은 백제의 수도가 부여였던 당시 수도 외곽 방어진이 있던 곳이다. 정식 명칭은 가림성이다. 그 흔적은 지금도 유효하다.해발 1000m 이하의 산에서 이렇게 전망이 트인 곳은 흔치 않을 것이다. 부여를 둘러싼 금강 하류가 한눈에 잡히기 어려울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가림성 꼭대기에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며 성흥산과 가림성의 상징이 된 거목 ‘사랑나무’가 있다.
▶사랑나무 아래 상식적인 세상을 보다
성흥산 오르는 길은 예사롭지 않다. 난이도가 높다는 게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산길이지만, 곳곳에서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돌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에 돌을 뚫고 올라온 나무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림성 바위 소나무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이유는 그 나무들이 모두 등산로에 거의 붙어있고,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 가면 돌로 만든 사원을 뚫고 자란 나무들의 모습도 쉽게 볼 있다. 관건은 나무의 기본인 뿌리를 내렸냐 내리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바위를 뚫고 우뚝 서 있는 나무들에게 감탄사를 던지며 주차장으로부터10분쯤 오르면 오늘의 주인공 ‘사랑나무’가 갑자기 등장한다. 사랑나무는 가림성 중앙도 아닌, 성흥산 꼭대기도 아닌, 성 안의 끝부분, 부여와 금강 하구가 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있다. 몸이 가볍다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무 주변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주로 여자들, 또는 커플이다. 모두들 비슷한 성장 차림이었다. 휘날리는 베이지 컬러의 헐렁한 원피스, 또는 피트감이 강력한 흰색 정장 등, 해발 240m 남짓하긴 하지만 어쩐지 복장이 환경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차림새들이다. 그러나 가림성과 사랑나무 일대는 등산복보다는 심플한 정장이 더 어울리는 게 맞다. 현재 남아있는 가림성은 백제 디자인의 특징 중 하나인 심플한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 언덕을 오르면 유적지 몇 곳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정비가 필요해 보이는 전망대, 거친 산책로 등이 있다. 그래서 사랑나무를 보러 온 사람들은 오직 사랑나무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산책을 한 뒤 돌아간다. 사람들이 더욱 몰리는 시간은 늦은 오후. 사람들은 백만불 짜리 낙조를 배경으로 사랑나무의 추억을 만들길 바란다. 부여가 서쪽이고, 강경 등 서해안 연안을 향해 넘어가는 장엄한 석양을 사랑나무와 함께 마음과 사진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나무 사진은 최소한 두 컷을 찍어야 한다. 두 컷 중 한 컷을 반전해서 편집하면 하트 모양의 와이드컷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 또는 한 커플이 사진을 찍는 과정은 다소 긴 편이다. 그런데 주말이나 휴일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나무 앞에서 줄 서 있는 젊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그런 규칙을 만들었고, 누구 하나 크게 다르지 않게 그 상식을 지키고 있다. 나무만큼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가림성 사랑나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게 된 것은 ‘나무의 잘생김’ 때문이다. 사랑나무는 나무 자체도 잘 생겼고,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위치도 참 절묘하다. 나무가 있고, 그 뒤로 펼쳐지는 광활한 풍경이 있고, 그리고 등산과 산책이 쉬운 사랑나무의 주변 환경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나무는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잊을 만하면 주목받는 드라마에 등장,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곤 한다. 사랑나무는 높이 20m, 둘레 5m의 고목이다. 약 400년 전에 누군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보통 느티나무가 나지막한 마을의 입구 또는 중심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사랑나무는 산성 꼭대기 부분에 있다는 게 절묘하다. 그래서 이 사랑나무는 먼 곳에서도 잘 보이고, 반대로 이 나무 옆에 서면 전망도 탁 트여 있어서 여행자의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것이다.
2005년 SBS에서 방송한 백제 후기 배경 드라마 ‘서동요’, 2008년 KBS에서 방송한 세종대왕 일대기를 다룬 ‘대왕세종’, 2012년 SBS에서 방송된 의학 및 공상 드라마 ‘신의’, 2016년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사회상을 그린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2017년에 방송된 SBS 창작 드라마 ‘엽기적인 그녀’ 등도 여기에서 찍었다. 이후에도 고려 충렬왕과 원나라 원성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혼혈 왕 ‘충선왕’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왕은 사랑한다’(2017), MBC 미니시리즈 ‘로봇이 아니야’, 2018년 ‘계룡선녀전’, 영화 ‘흥부’, 그리고 최근에 방송된 tvN의 ‘호텔 델루나’ 등에 등장한 것 역시 사랑나무의 변치 않는 잘생김 덕이 아닐까?
성흥산 오르는 길은 예사롭지 않다. 난이도가 높다는 게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산길이지만, 곳곳에서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돌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에 돌을 뚫고 올라온 나무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림성 바위 소나무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이유는 그 나무들이 모두 등산로에 거의 붙어있고,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 가면 돌로 만든 사원을 뚫고 자란 나무들의 모습도 쉽게 볼 있다. 관건은 나무의 기본인 뿌리를 내렸냐 내리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바위를 뚫고 우뚝 서 있는 나무들에게 감탄사를 던지며 주차장으로부터10분쯤 오르면 오늘의 주인공 ‘사랑나무’가 갑자기 등장한다. 사랑나무는 가림성 중앙도 아닌, 성흥산 꼭대기도 아닌, 성 안의 끝부분, 부여와 금강 하구가 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있다. 몸이 가볍다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무 주변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주로 여자들, 또는 커플이다. 모두들 비슷한 성장 차림이었다. 휘날리는 베이지 컬러의 헐렁한 원피스, 또는 피트감이 강력한 흰색 정장 등, 해발 240m 남짓하긴 하지만 어쩐지 복장이 환경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차림새들이다. 그러나 가림성과 사랑나무 일대는 등산복보다는 심플한 정장이 더 어울리는 게 맞다. 현재 남아있는 가림성은 백제 디자인의 특징 중 하나인 심플한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 언덕을 오르면 유적지 몇 곳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정비가 필요해 보이는 전망대, 거친 산책로 등이 있다. 그래서 사랑나무를 보러 온 사람들은 오직 사랑나무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산책을 한 뒤 돌아간다. 사람들이 더욱 몰리는 시간은 늦은 오후. 사람들은 백만불 짜리 낙조를 배경으로 사랑나무의 추억을 만들길 바란다. 부여가 서쪽이고, 강경 등 서해안 연안을 향해 넘어가는 장엄한 석양을 사랑나무와 함께 마음과 사진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나무 사진은 최소한 두 컷을 찍어야 한다. 두 컷 중 한 컷을 반전해서 편집하면 하트 모양의 와이드컷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 또는 한 커플이 사진을 찍는 과정은 다소 긴 편이다. 그런데 주말이나 휴일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나무 앞에서 줄 서 있는 젊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그런 규칙을 만들었고, 누구 하나 크게 다르지 않게 그 상식을 지키고 있다. 나무만큼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가림성 사랑나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게 된 것은 ‘나무의 잘생김’ 때문이다. 사랑나무는 나무 자체도 잘 생겼고,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위치도 참 절묘하다. 나무가 있고, 그 뒤로 펼쳐지는 광활한 풍경이 있고, 그리고 등산과 산책이 쉬운 사랑나무의 주변 환경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나무는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잊을 만하면 주목받는 드라마에 등장,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곤 한다. 사랑나무는 높이 20m, 둘레 5m의 고목이다. 약 400년 전에 누군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보통 느티나무가 나지막한 마을의 입구 또는 중심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사랑나무는 산성 꼭대기 부분에 있다는 게 절묘하다. 그래서 이 사랑나무는 먼 곳에서도 잘 보이고, 반대로 이 나무 옆에 서면 전망도 탁 트여 있어서 여행자의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것이다.
2005년 SBS에서 방송한 백제 후기 배경 드라마 ‘서동요’, 2008년 KBS에서 방송한 세종대왕 일대기를 다룬 ‘대왕세종’, 2012년 SBS에서 방송된 의학 및 공상 드라마 ‘신의’, 2016년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사회상을 그린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2017년에 방송된 SBS 창작 드라마 ‘엽기적인 그녀’ 등도 여기에서 찍었다. 이후에도 고려 충렬왕과 원나라 원성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혼혈 왕 ‘충선왕’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왕은 사랑한다’(2017), MBC 미니시리즈 ‘로봇이 아니야’, 2018년 ‘계룡선녀전’, 영화 ‘흥부’, 그리고 최근에 방송된 tvN의 ‘호텔 델루나’ 등에 등장한 것 역시 사랑나무의 변치 않는 잘생김 덕이 아닐까?
▶가림성 산책'
가림성은 오랜 세월 ‘부여 성흥산성’으로 불려오다 2011년부터 ‘부여 가림성’으로 불리는 백제 성이다. 이름이 ‘가림성’이 된 것은 백제 시대 때 이 지역의 이름이 ‘가림’이었기 때문이다. 한자로는 더할 ‘가(加)’에 수풀 ‘림(林)’을 사용, 숲이 점점 깊어지는 곳에 위치한 성이라는 뜻으로 추측된다. 가림성은 성곽 위에서 내려다 볼 때 굉장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산세도 결코 만만치 않아 삼국시대든 어느 시대이든 감히 단숨에 정복할 엄두가 나지 않는 곳으로 보여진다. 백제와 나당 연합군이 전쟁을 펼치던 때에도 그랬다고 한다.
가림성은 오랜 세월 ‘부여 성흥산성’으로 불려오다 2011년부터 ‘부여 가림성’으로 불리는 백제 성이다. 이름이 ‘가림성’이 된 것은 백제 시대 때 이 지역의 이름이 ‘가림’이었기 때문이다. 한자로는 더할 ‘가(加)’에 수풀 ‘림(林)’을 사용, 숲이 점점 깊어지는 곳에 위치한 성이라는 뜻으로 추측된다. 가림성은 성곽 위에서 내려다 볼 때 굉장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산세도 결코 만만치 않아 삼국시대든 어느 시대이든 감히 단숨에 정복할 엄두가 나지 않는 곳으로 보여진다. 백제와 나당 연합군이 전쟁을 펼치던 때에도 그랬다고 한다.
백제를 공격했던 나당 연합군이 굳이 가림성을 정복할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 물론 가림성이 전장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면 결사 정복 후 다음 성으로 향해야 하겠지만, 이미 대세는 나당 연합군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고, 가림성에 주둔하고 있는 백제 군사가 전쟁의 형국을 완전히 뒤바꿀 만한 규모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나당 연합군도 애써 가림성 정복을 회피하고 곧장 부여(당시 이름 사비성)와 공주(당시 이름 웅진성)를 향해 진격했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백제의 결기가 많이 꺾인 건 사실이지만 백제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의 멸망은 공식적으로 서기 660년으로 확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역사 학자들은 ‘그것은 백강 전투를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지 않은 결과’로, ‘백강 전투의 가치까지 생각하면 실질적인 백제 멸망은 663년’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의 멸망을 660년 8월29일로 한 것은 그날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정복하고 마지막 왕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왕과 왕족, 그리고 주요 대신들 포함 2000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고 백제의 시민들이 당나라 군대에 능욕을 당하고 있었던 생각을 하면 나라가 망하긴 망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백성이 살아 있었고, 모든 국가 권력이 소멸한 상태도 아니었다.
백제의 옛 장수 귀실복신, 흑치상지 그들은 백성이 살아있고 왕족이 남아있는 한 국가는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일으킨 운동이 바로 ‘백제 부흥 운동’이다. 귀실복신은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의자왕의 정실 아들 부여풍을 백제의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고 부여풍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풍왕’(풍장왕)이라는 이름으로 백제로 돌아왔다.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은 왕만 옹립한 게 아니다. 당시 백제는 일본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풍왕이 일본에 간 것 역시 백제와 일본의 우호를 위한 당시 외교 관례 중 하나였다. 당시 일본에서 풍왕 휘하로 조직해 보내 준 2만7000명의 지원군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백강(금강)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백제의 운명은 완전히 끝이 났다.
백제의 공식적인 멸망 시점은 660년이지만, 일본의 역사서적, 또한 조선의 일부 역사책(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서는 백제의 최후를 663년으로 보고 있다. 물론 가림성 역시 백제 부흥 운동 때 중요한 요새로 자리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림성에는 복원하고 있는 성벽 터에는 특별한 백제의 유물을 볼 수는 없다. 가림성에서 일반 여행자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적으로는 고려 개국 공신인 유금필 장군의 사당 정도이다. 장군의 후손들이 만들어 기부 체납한 공간이다. 가림성 산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고 만져보고 읽어볼 수 있는 곳이다. 가림성이 완전한 역사 공원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조금 더 무르익는 시간이 필요하는 생각이다.
▶구절초, 종이등과 함께 한 대조사!
▶구절초, 종이등과 함께 한 대조사!
가림성에서 솔바람길을 따라 내려오거나 정식 임도를 이용해 내려오면 곧 ‘대조사’라는 멋들어진 사찰이 나온다. 이 작은 사찰을 ‘멋들어지다’고 표현한 것은 사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대조사는 가파른 언덕 위에 지은 절이다. 그런데 주차장이 있는 평지와 사찰의 높이 차이가 큰 편이다. 계단으로 조금 올라가야 대웅전 마당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 계단에 너무도 예쁜 구절초가 한 가득이다.
구절초는 흔한 이름이지만 실제로 키우거나 자주 보기는 어려운 꽃이다. 구절초는 얼핏 땅에 붙어있는 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키가 50cm쯤 되는 풀꽃이다. 9~11월에 줄기 끝에 지름 4~6cm의 연한 홍색 또는 흰색 두상화가 한 송이씩 피는데, 워낙 많은 양이 한꺼번에 흐드러지는 바람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싱숭생숭해질 정도다.
구절초 줄기의 매듭이 아홉 마디라 ‘구절초’라 명명되었다. 9월9일이 되면 아홉 마디가 완성된다는 풀이다. 구철초는 약초로도 애용되는 식물이다. 주로 부인병, 위장병 치료에 사용된다고 한다. 그때 사용되는 약재 이름이 바로 ‘구절초’이다. 약으로 쓰기 위해 가을에 꽃이 아직 피지 않은 상태에서 식물을 잘라 햇볕에 말려 사용한다. 하지만 대조사 구절초는 신체 질병이 아닌 마음의 불안을 위로해 주는 계절의 선물이다.
대조사는 아주 작은 사찰이다. 사찰이 갖춰야 할 요건은 모두 갖추고 있다. 공력도 느껴진다. 일단 대웅전인 ‘원통보전’이 있다. 원통보전이란 대웅전, 적멸보궁, 대적광전과 함께 실력자를 모신 곳이라는 뜻을 지닌 가람으로, 원통보전은 특별히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의미한다. 원통보전 앞에는 고려 초기에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원통보전에 들어가기 전 이 탑을 세 바퀴 도는 게 소원성취에 도움이 되는데, 대조사 삼층석탑에는 탑돌이를 하기 편리하도록 동선까지 만들어 놓았다. 새로운 주지 스님이 설치한, 기도의 힘을 높여주기 위한 시설물로 보인다. 범종각, 산신각, 명부전 등 불교는 물론 민간신앙과 함께하는 전각들도 모두 갖춰져 있다. 원통보전 뒤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서 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굽은 길을 걸어야 하는데, 예불을 올리는 재단이 있는 용화보전이 길가에 우뚝하게 앉아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초에 만든 미륵상인데, 당시 불교 미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좋은 모델이다.
대조사에서 특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요사채 앞 마당에서 벌어진 ‘성불도’ 놀이가 그것이다. ‘성불도’라는 이름이 크게 프린트된 커다란 천을 기왓장으로 눌러 고정시키고 참가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부처가 되는 단계를 즐기는 게임이다. 요새는 윷놀이처럼 말을 움직여 게임을 하도록 쉽게 만든 놀이가 보편화 되어 있지만, 대조사의 성불도는 ‘말’을 ‘사람’이 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성불도는 이렇듯 육도윤회를 벗어나 부처가 되는 과정을 놀이로 즐기는 게임인데, 단계별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눈으로 보며 즐길 수 있다. 주지스님과 불자들이 함께 주사위를 던지고 단계별 이름의 의미 즉, 십행, 십주부터 법신을 거쳐 대각(부처)에 이르는 수행 단계를 설명하는 불경 공부도 할 수 있다.
대조사에서 특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요사채 앞 마당에서 벌어진 ‘성불도’ 놀이가 그것이다. ‘성불도’라는 이름이 크게 프린트된 커다란 천을 기왓장으로 눌러 고정시키고 참가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부처가 되는 단계를 즐기는 게임이다. 요새는 윷놀이처럼 말을 움직여 게임을 하도록 쉽게 만든 놀이가 보편화 되어 있지만, 대조사의 성불도는 ‘말’을 ‘사람’이 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성불도는 이렇듯 육도윤회를 벗어나 부처가 되는 과정을 놀이로 즐기는 게임인데, 단계별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눈으로 보며 즐길 수 있다. 주지스님과 불자들이 함께 주사위를 던지고 단계별 이름의 의미 즉, 십행, 십주부터 법신을 거쳐 대각(부처)에 이르는 수행 단계를 설명하는 불경 공부도 할 수 있다.
종 목 | 천연기념물 30호 |
명 칭 | 용문사의은행나무 (龍門寺의은행나무) |
분 류 | 노거수 |
수 량 | 1주260㎡ |
지정일 | 1962.12.03 |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6-1 |
소유자 | 용문사 |
관리자 | 양평군 |
5,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천년기념물(제398호)
우리나라 최초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6,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1970년 4월 24일 천연기념물 제223호 지정 되었다.
소재지는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1395-14 영국사(寧國寺) 앞에 있다.
수령은 약500년에서 1000년 내외로 추정되는 노거수 이며, 높이는 31m, 가슴높이둘레 11m 특이한 것은 서쪽 가지가 땅에 닿아 뿌리가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가 이러한 현상은 기이한 보기 드믄 현상이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이며, 우리나라, 일본, 중국등지에 분포되어 있고 유교와 불교가 중국으로 부터 들어오면서 같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병충해가 없고 그늘이 좋아 정자나무 및 가로수로 많이 식재되고 있으며 은행잎은 혈관성 관련 약제에 쓰인다.
7, 안동에 천연기념물' 용계리의 은행나무,(安東 龍溪里 銀杏,,)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에 있는 수령 700년의 은행나무.
문화재, 지정서식지, 성격, 유형, 크기, 분야, 수명,
천연기념물 제175호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744 |
식물, 나무, 은행나무 |
동식물 |
높이 37m, 가슴높이둘레 14.5m |
과학/식물 |
700년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에 있는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175호. 수령은 7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37m, 가슴높이둘레 14.5m에 달한다. 이 나무는 가슴높이둘레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이며,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있는 암나무이다. 냇가를 통한 길가에서 훌륭한 정자나무 구실을 하고 있다.
선조 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이 이곳에 낙향한 다음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과 행계(杏契)를 조직하여 매년 7월에 이 나무 밑에 모여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탁씨의 후손들은 아직도 이 나무를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한 번씩 간단한 제를 드린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밑부분의 속이 썩고, 윗부분에서도 썩은 가지를 통하여 빗물이 들어가 나무가 상하기 시작하였으므로 1982년에 외과수술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임하(臨下)댐 건설로 이 나무의 9m 정도가 수몰될 처지가 되자 1990년부터 2년 9개월간에 걸려 높이 15m에 이르는 가산(假山)을 조성한 후 올려 심어 보호하고 있다.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의 은행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75호), 전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바로 은행나무다.
이러한 은행나무는 전국적으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 중 하나인데요. 그 쓰임새가 다양합니다. 우선 가을철의 불청객인 열매(=은행)는 한방의 재료로 활용되는가 하면 목재 역시 쓰임새에 맞게 활용되었습니다. 때문에 나름 귀하게 대접받은 은행나무는 처음 심은 나무의 열매를 손자 때에 거둔다 해서 공손수(公孫樹)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대중적으로 친근한 은행나무 가운데,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5호)는 그 수령만 무려 700년으로 조선왕조보다 더 오래된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안동 용계리의 은행나무 전경, 한 눈에 수령이 오래되어 보임을 느낄 수 있다.
용계리의 은행나무 안내문, 천연기념물로 수령이 무려 700년이다.
재미있는 건 용계리의 은행나무로 가는 도로 양쪽에 어린 은행나무가 줄을 지어서 있다는 점인데요. 인근에 은행나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용계리의 은행나무는 도로에서 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야 만날 수 있는데요. 별도의 주차장은 없고, 도로 한쪽에 몇 대의 차를 주차할 공간이 있어, 이곳에 주차한 뒤 걸어서 가시면 됩니다. 화장실의 경우 은행나무 뒤쪽에 있다는 점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다리를 건너다 은행나무를 바라보면 우선 그 외형에 놀라게 되는데요. 오랜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도로 건너편 다리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용계리의 은행나무, 자세히 보면 외딴 섬 같은 모습으로, 본래의 자리에서 15m 가량 높이는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공사와 관련한 비석, 과거에는 용계국민학교에 자리하고 있었다.
임하호의 물줄기를 건너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보이는 곳에 우뚝 솟아있는 은행나무는 왠지 주변 환경과는 조금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는데요. 왜 그런가 하니 이는 임하댐의 건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용계초등학교 안에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임하댐 건설이 계획되면서, 수몰 예정인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해 본래의 자리에서 15m 가량 올려서 보존하는 작업이 진행된 것입니다. 다행히 공사는 잘 마무리 되어 현재까지도 은행나무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것도 당시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은행나무를 지지하기 위한 지지대, 그럼에도 왕성하게 은행잎을 피우는 나무의 모습은 그 자체로 늠름함을 느끼게 한다.
용계리의 은행나무 표석, 그 자체로 용계리의 상징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용계리의 은행나무 후계목
세월의 흔적 탓에 은행나무 여기저기 지지대가 많이 보이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늠름하게 700년을 버틴 은행나무의 외관은 말 그대로 웅장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현재 은행나무 주변으로, 후계목을 심어 두고 있는데요. 과거 행계(杏契)를 조직해 은행나무를 보호, 관리했으며, 지금도 은행나무에 대한 제사가 진행될 만큼 어떻게 보면 용계리의 상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치로 보면 안동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곳이라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는 접근성이 좋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노란 잎이 물든 가을 녘 용계리의 은행나무를 방문해보실 것을 권해드리는데요. 은행나무 곁에서 추억을 만들어가는 기회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나무는 용계리의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중국 원산으로 암수딴그루이며, 봄에 피는 꽃은 3㎜ 내외로 관찰하기는 힘들다. 중국에서는 압각수(鴨脚樹)라고 하는데, 잎이 오리발과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학명 가운데 종명 biloba는 ‘두 갈래로 갈라진 잎’을 뜻한다. 은행나무의 수꽃가루는 유일하게 편모를 달고 있어서 스스로 몸을 이동시킬 수 있는데, 이를 정충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진화가 덜된 채 오래도록 살아남았다고 해서 화석식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열매가 살구[肉杏]와 비슷하고 은빛이 난다 하여 은행(銀杏)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헌에 따르면 방화·방풍 기능을 하여 방화목이라고 하며, 공손수(公孫樹)라고 하여 조상들은 은행나무를 귀하게 여겨 불교 용품의 재료로 많이 사용하였고 함부로 베면 재앙을 받는다는 속설이 있다.
다 자란 은행나무는 높이가 10~15m에 이르며, 간혹 40m까지 자라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이며 봄에 피는 꽃은 3㎜ 내외 크기로 관찰하기는 어렵다. 가을에 암그루에 노란색 열매를 맺는다.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는 높이 37m, 가슴높이 둘레 14.5m이다. 나무줄기의 굵기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선조 때 훈련대장을 역임한 송암(松庵) 탁순창(卓順昌)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로 낙향하여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은행계를 만들어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는 본래 당시 용계국민학교 운동장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나무가 수몰될 것을 염려하여 그 자리에서 15m 높이로 들어 올려 다시 심어졌다. 대지개발에서 HB공법이라는 기술을 이용하여 1990년 11월부터 1993년 2월까지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높이 15m의 인공섬을 만들고 점진적으로 나무를 들어 올렸다. 공사비는 약 20억 원이 투입되었다. 노거수로서 1966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 제17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관리 면적은 2,499㎡이며, 안동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 안동 용계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5호)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744-1
편의시설 : 주차장의 경우 도로 쪽 공간 활용, 화장실 있음, 전시관은 있으나, 현재 문을 닫은 상태임
비고 : 은행나무의 특성상 가을에 방문해보시길 권합니다,
10, 우리나라 1,100년… 당상관(정3품) 은행나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는 용문사의 은행나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6-1에 있는 용문사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이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9, 오산 궐리사: 공자의 후손인 공서린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문화재 지정건립시기성격유형소재지분야
경기도 시도기념물 제147호 |
1792년 |
사당 |
유적 |
경기도 오산시 궐리동 |
예술·체육/건축 |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1483∼1541) 선생이 후학지도를 위해 세운 곳으로 지금은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대사헌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후학을 지도할 때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쳤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에서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은행나무 곁으로 모여들었고, 이를 괴이하게 여긴 임금이 가까이 가서 보니 죽은 은행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 17년(1792)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고 사당을 세운 후 ‘궐리사’라고 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00년 다시 세우고 1981년 강당을 세웠으며,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 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셨다.
사당은 앞면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동쪽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강당 건물이 있어 동학서묘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익공식 맞배지붕의 건물.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 공서린(孔瑞麟)의 사당이다. 이 곳은 원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로서 조선 후기 사당형식을 잘 보여 주는 곳이며, 해마다 지방 유림들이 모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 당시 뜰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나무가 자연 고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花山)에서 남쪽 멀리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들므로 괴이하게 여겨 그곳에 행차해 보니, 죽었던 늙은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그리하여 1792년(정조 16) 이 곳에 사당을 짓게 하고, 이곳의 지명을 궐리로 고치게 하였으며,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게 하고 ‘闕里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궐리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현재 솟을삼문 주위로 사고석담[四塊石墻 : 돌담]이 둘러 있고, 사당이 있으며,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삼문에는 ‘聖廟(성묘)’라는 현판이 있다. 이 곳에는 1904년에 제작된 〈궐리사성적도 闕里祠聖蹟圖〉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 보관되어 있으며, 지방의 유림들이 해마다 봄·가을에 엄격한 제례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 이는 행단(杏壇)이라고 해서 공자가 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친 것에서 유래했는데요. 우리의 경우 해당 나무를 은행나무로 보고, 공자에 대한 제향을 지내는 향교에 은행나무가 심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오산에는 궐리사(闕里祠)라는 곳이 있는데요. 공자의 사당인 이곳에는 공자의 후손인 공서린(孔瑞麟)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고, 교육 공간의 이름을 행단이라 부르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어떻게 보면 나무에 담긴 역사의 흔적이라 생각하니 달리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1483∼1541) 선생이 후학지도를 위해 세운 곳으로 지금은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대사헌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후학을 지도할 때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쳤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에서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은행나무 곁으로 모여들었고, 이를 괴이하게 여긴 임금이 가까이 가서 보니 죽은 은행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 17년(1792)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고 사당을 세운 후 ‘궐리사’라고 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00년 다시 세우고 1981년 강당을 세웠으며,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 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셨다.
사당은 앞면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동쪽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강당 건물이 있어 동학서묘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로서 조선 후기 사당형식을 잘 보여 주는 곳이며, 해마다 지방 유림들이 모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오산 궐리사 성적도(烏山 闕里祠 聖蹟圖)는 경기도 오산시 궐동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목판이다. 1974년 9월 26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은 공자의 생애를 그림으로 새긴 목판으로, 공자의 76대손인 한국인 공재헌이 1904년 중국 산동성에 가서 구한 것을 본떠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을 간행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목판은 피나무로 되어 있고 모두 60장인데,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32cm이다. 이것을 보관하고 있는 궐리사(공자를 모신 사당)는 우리나라에서 오산과 노성 2곳 밖에는 없다. 오산 궐리사는 정조 16년(1792)에 착공하여 그 다음해에 완성하였는데, 이 곳은 중종 때 문신이자 공자의 64대손인 공서린이 서재를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정조가 사당을 지어 공자의 영정을 모시게 했다. 이에 정조는 친히 궐리사라는 현판을 친히 썼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출처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의령 세간리 현고수 [宜寧世干里懸鼓樹]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속 빈 오래된 나무, 고목 (천재학습백과 초등 과학 5-1)
- 굿모닝충청(http://www.goodmorningcc.com)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 -천연기념물편(天然記念物編)-』(문화재관리국, 1993)
안동시 디지털안동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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