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국가,
이슬람 공동체와 국가,
메디나에 공동체(움마)를 건설한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 각지의 부족집단과 맹약을 맺어서 이들을 개별적으로 움마에 연결시키고, 그 결과 성립한 완만한 정치구성체(쟈마아 ; jamā 'a)를 움마의 지배하에 통합했다. 여기에서 이슬람 국가의 원초형태를 인정할 수 있다. 쟈마아는 무함마드의 권위를 승인하는 부족민의 집합체이었는데, 결국 칼리프의 지휘하에 대정복이 행하여지자, 움마와 쟈마아를 구성하는 아랍전체가 정복자 집단으로서 제국 내의 이민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아랍 이교도 중에서도 개종해서 움마의 구성원이 되고, 아랍 무슬림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의 수가 점차로 증대했다. 이들 신개종자를 마와리라고 하는데, 아랍 우위체제하에서 그들에 대한 세금의 지불의무에서도, 또한 사회적 신분상에서도 확실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무슬림은 인종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움마의 성원으로서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아랍제국인 옴미아드 왕조(661~750)는 결국 이와 같은 이슬람의 이념에 합치하는 정치체제를 창출하지 못했다.
아바스 왕조(750~1258)의 성립에 의해서 아랍의 특권은 상실되고, 제국 내에서의 무슬림의 평등 원리가 확립되었다. 이 왕조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제국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9세기경까지는 이슬람법(샤리아)의 체계화도 행하여져, 움마의 지도자로서 샤리아의 집행에 임하는 칼리프의 권한은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움마의 통일은 이미 상실되고, 동서로 분열한 이스라엘 세계는 칼리프 또는 왕(마리크, 아밀)을 주권자로 받드는 왕조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실정이었다. 다우라는 원래 <시간의 추이>나 <계절의 전환>을 의미하는 아라비아어인데, 이것이 <왕조>의 의미로 이용된 것은 아바스 왕조 시대 이후이다. 물론 다우라는 지배권을 담당하는 칼리프족이나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개념으로, <국가> 그 자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왕권의 지배영역에 착안하면 맘라카(mamlaka, 왕국)라는 말도 잘 이용되며, 또한 정부나 통치기관을 의미하는 윌라야(wilāya, 오스만 왕조에서는 후쿠마 ; hūkuma)도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이슬람 국가의 하나의 측면을 나타내는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국가 그 자체를 나타내는 고유한 용어가 이슬람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무슬림에 있어서 이슬람 국가의 본질이 칼리프의 권위를 서약에 의해서 인정하는 각 무슬림의 집합체, 즉 움마나 쟈마아로서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공간적 확산이 <이슬람 세계(다르 알이슬람)>이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권력국가론을 전개한 이븐 할든(Ibn Khaldūn)을 제외하면 무슬림 지식인(울라마)에 의한 이슬람 국가론은 오로지 움마의 대표로서의 칼리프(이맘)를 중심논제로서 전개되며, 실질적으로 국가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왕조(다우라)는 그 시야 밖에 놓여져 있었다.
칼리프권과 왕권,
<신의 사도의 대리>로서 초대 칼리프에 취임한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종교ㆍ정치의 두 권한 중 정치적 권한만을 계승했다. 그나마 그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겨우 무슬림의 정리역, 즉 움마의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가지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대정복에 의해서 국가영역이 확대되고, 막대한 부가 칼리프에 집중하게 되자 칼리프의 권력은 현저히 강대하게 되었다. 제2대 칼리프, 우마르 1세는 <신도의 수장>을 의미하는 아미르 알무미닌의 칭호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성전(지하드)의 지휘관인 칼리프에 어울리는 칭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수니파의 울라마가 이용하는 이맘은 무슬림의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칼리프에 무게를 두는 칭호였다. 또한 아바스 왕조 시대에 칼리프는 <신의 사도의 대리>에서 <신의 대리>로 보게 되고, 법학자도 칼리프권은 신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았다는 칼리프권 신수설(神授設)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단, 이와 같은 칼리프의 신권화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가 공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초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칼리프에 대한 무슬림의 바이아와 타아(복종)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마을이나 거리의 주민이 이 계약을 파기해서 모스크에서의 설교에서 주권자의 이름을 깎는 것은 그 지역의 무슬림이 공적으로 반란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바스 왕조는 군대와 관료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였는데, 칼리프권이 강대하였던 시대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9세기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 맘무크(노예군인)의 대두와 함께 칼리프권은 점차로 약체화되고, 936년에는 군인총독을 대아미르(아미르 알울라마)에 임명해서, 군사ㆍ재정의 양 권한을 포함한 제국의 행정권을 위양했다. 이때 전국의 모스크에서는 칼리프와 대아미르의 이름하에 프토바를 행할 것이 명령되었는데, 이는 칼리프가 프토바의 권한을 독점하였던 시대의 종지부를 의미했다. 시아파를 받드는 브와이프 왕조(932~1062)의 대아미르도 칼리프가 가진 특권을 차례차례로 빼앗고, 칼리프에는 이맘(신앙상의 지도자)으로서의 명목적인 권한만이 남았다.
그러나 브와이프 왕조나 셀주크 왕조(1038~1194)의 군주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칼리프에 의한 정당화가 필요하였는데, 여기에 칼리프는 대아미르나 술탄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보증한다는, 칼리프권과 왕권(물크)과의 상호의존시대가 끝났다. 이와 같은 현실 변화에 대응해서 울라마도 국가의 사실상의 지배자인 군주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알 마와르디는 지배자가 샤리아에 따라서 정치를 행한다면 칼리프는 왕권에 합법성을 주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가자리는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임하는 술탄을 칼리프는 무조건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에는 타협과 추인의 칼리프론을 비판하는 이븐 타이미야와 같은 사상가도 나타났는데, 대방의 울라마는 현실적으로 차례차례로 양보를 거듭해서 결국에는 이븐 쟈마아(Ibn Jamā 'a)와 같은 폭군의 용인에까지 이르렀다.
국가의 구조,
칼리프나 술탄에 의한 통합(윌라야)의 실태에 대해서 살펴보면, 아랍제국의 시대에는 아미르가 정복지의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그중에서 아랍 전사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시스템이 취해졌다. 이를 아타체제라고 한다. 군영도시를 통괄하는 아미르는 칼리프에 의해서 임명되며, 그 체제하에서 조세징수의 실무를 담당한 것은 사산 왕조나 비잔틴제국시대 이래의 촌장이었다.
아바스 왕조 시대가 되어서 관료기구가 정비되자, 중앙에서 파견된 징세관(아미르)이 촌장 대신에 징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군대나 관료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아타체제는 거의 그대로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초 무렵까지는 군벌간의 항쟁이나 궁정의 난비, 또는 징세기구의 파탄 등에 의해서 국가재정은 점차로 궁핍의 도를 더해갔다. 국고수입의 저하는 아타체제의 유지를 어렵게 하였다. 10세기 중반에 군인에 대해서 직접 토지의 지배와 관리를 위임하는 이크타제도가 성립한 것은 이와 같은 구 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였다. 도시에 사는 이크타 보유자(무크타)는 대관을 파견해서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그 수입을 이용해서 지배하는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 의무시되었다. 이와 같이 이크타 제도는 군인을 매개로서 국가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체제였기 때문에 그후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서도 국가의 기본제도로서 널리 채용되었다. 사파비 왕조의 투유르나 소유르갈, 오스만 제국의 티말 등도 본질적으로 이 이크타를 계승하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칼리프나 술탄의 권력은 군대나 관료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관청은 옴미아드 왕조 시대부터 현실의 필요에 따라서 차례차례로 증설되고, 아바스 왕조 시대에 되자 이란인을 중심으로 한 재상(와질)이나 서기(카티브)가 정치 세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군대의 주력은 아바스 왕조 혁명을 계기로 아랍군에서 홀라산군으로 바뀌고, 9세기 이후에는 맘루크군인이 관료를 억압해서 국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크타보유에 의해서 농촌을 지배한 맘루크는 그 부를 기초로 도시의 경제를 좌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으나, 군인의 지배권에는 무슬림에 대한 재판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샤리아에 의한 재판은 각 도시에 파견된 카디(재판관)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또한 이들 카디는 재판의 업무를 넘어서 지방행정에 참여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카디를 포함한 울라마는 불법적인 지배자에 대한 이슬람 정의의 수호신인 동시에 이민족의 군사정권을 지지해서 국가와 민중을 연결하는 고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이라크나 이집트에 수니파 정권이 부활하는 셀주크 왕조나 아이유브 왕조(1169~1250) 또는 맘루크 왕조(1250~1517) 시대에 특히 현저하다.
맘루크 왕조를 쓰러뜨리고 메카, 메디나의 종주권을 장악해서 이슬람 국가로서의 본질을 밝힌 오스만 제국은 아랍 이외에 발칸의 그리스도 교도 등을 옹호하는 다민족 국가의 양상을 띠는데, 국가의 성격이나 구조에 대해서 보면 그 이전의 이슬람의 여러 왕조와 거의 변함없었다. 최성기인 술탄은 동시에 칼리프를 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대하였는데, 그 정치는 샤리아에 따라서 행하여지며,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전대의 샤사(행정법)에 상당하는 카눈이 발포되었다. 또한 술탄권력을 지지해온 것은 군대나 관료이며, 군대는 그리스도교의 자제를 노예로서 징발한 이에체리군단과 티말이 수여된 시파히(기사)군단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관료는 중앙관처 이외에 주, 현, 군, 향, 촌 등 정비된 행정기구 중에 조직되었는데, 샤리아의 유효한 시행을 위해서 울라마로서의 재판관도 이들 지방행정조직과 결합해서 계층적으로 임명된 것이 오스만제국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이슬람 국가론,
19세기를 통해서 점차로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난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변동하에서 <이슬람 세계>라는 관념도 <이슬람 국가>의 이데올로기도 모두 해체ㆍ붕괴되었다. 근대 이슬람의 위기감의 주요 내용은 이슬람 국가의 상실감(제도ㆍ사상 양면에서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샤 와리 울라의 아들 압두 알아지즈가, 영국인 지배하의 인도는 오로지 이슬람 세계의 범위 밖에 있는 달 알할브(전쟁의 집)라고 선언한 파토와(1803)에서 시작되어서, 터키혁명하의 칼리프제 폐지(1924)에 이르는 과정 중에서 점차로 전혀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조는 이슬람법(샤리아)과 이슬람 신비주의의 복합으로 나타나며, 울라마와 교단(카리카)이 정치적ㆍ사회적 통합의 채널로서 기능하였는데, 이와 같은 전통적 시스템은 급속하게 약체화되어 분해되었다. 유럽의 법 체계가 실질적인 힘을 가지기 시작해서 법의 이중 과정이 발생한 것은 신수(神授)의 법으로서의 이슬람법의 절대성ㆍ자기완결성의 이데올로기가 심하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유럽 상품의 압력에 의한 길드적 동업동직조합의 해체와 지주제 경영확대에 의한 <촌락>사회의 변질은 교단조직을 붕괴시키고 이슬람 신비주의의 형해화를 초래했다.
울라마에 대신해서 기사, 군인, 법률가, 관리 등 새로운 형태의 지식층이 엘리트로서 등장했다. 세계 자본주의적 편성의 심화와 함께 여러 지역에서 여러 가지 에스닉 그룹(민족집단)이 대중적 레벨에서 이동해서 혼합과정이 심하게 전개되었다. 평화와 안전의 체계였던 오스만 제국의 미레트제는 동방문제 중에서 오히려 분쟁의 요인으로 전화되었다. 시오니즘을 이용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설정은 이슬람 국가 상실감의 증폭에 의한 초조와 지하드론적 대응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 국가론은 현대 이슬람의 중심적 쟁점이 되었다. 거기에서 먼저 현저하게 인정되는 첫 번째의 입장은 현상 유지파적ㆍ국제 정치론적 이슬람 국가론이다. 그것은 20세기에 발생한 여러 국가 시스템을 전제로서, 다수의 이슬람 교도를 옹호하는 제국을 이슬람 제국으로 보는 입장으로, 이슬람 제국회의(1971년 발족, 가맹국 42개국)는 그에 의거하고있다. 이에 대립적인 두 번째의 입장은 현상타파적ㆍ종교사회운동론적 이슬람 국가론이다. 그것은 1930년대 이후, 우슬림 동맹단으로 대표되는 대중적 사회운동 중에서 공정과 정의에 의한 이슬람 국가의 재건ㆍ획득의 요구로서 전개되었는데, 그후 대중의 정치적 급진화하에서, 70년대 말의 이란혁명론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입장의 혁명적 성격이 현저하게 강해졌다. 파키스탄 국가가 어떤 의미에서 이슬람 국가인가라는 논의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입장 사이를 흔드는 것이었다. 또한 70년대에는 두 번째 입장의 발전과 함께 그에 대해서 대항적으로, 첫 번째 입장 중에서도 <이슬람 경제>론이 발생하고, 자원주권이나 은행개혁 또는 파트너십에 의거한 경제개발이나 자카트의 제도화를 널리 논의하게 되었다.
이들 현대 이슬람국가론의 여러 조류로 인해서 실제로는 항상 세속화ㆍ세속주의적 행동의 경향을 나타내는 제국정부도 헌법에서의 이슬람의 국교규정을 둘러싼 문제나 샤리아의 실행(가령 하드와 같이 코란에 규정된 형벌)을 둘러싼 문제에 관해서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팔레스타인의 운동사이에서는 명확한 탈종교의 비종파주의 입장이 이슬람국가론을 적극적으로 극복해서 지양하는 것으로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슬람 사회,
유목민, 상인, 농민,
자힐리야라고 불리는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메카나 메디나 등 일부 정주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베드윈에 의한 유목생활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작은 가족집단마다 일정한 수장(水場)을 이동해서 낙타, 산양, 양 등의 가축을 사육하고, 전쟁이나 기근이 일어나면 보다 큰 혈연집단을 조직해서 비상사태에 대처했다. 오래전부터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던 메카는 6세기 중반 이후, 예멘과 시리아를 연결하는 남아라비아 무역을 독점해서 번영하였는데,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자는 아직 쿠라이슈족의 일부 상인에 한정되었다. 통상적인 범위와 규모는 이슬람 이념에 의한 아랍의 대정복에 의해서 일거에 확대된다. 각지에 건설된 미슬(군영도시)은 여기에 아랍전사와 그 가족이 정주하고, 또한 가까운 곳에서 상공업자가 모여듬으로써 마침내 생산과 소비의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 미슬을 연결하는 광대한 국내 경제권의 형성은 화폐수요의 증대를 초래하고, 이에 호응해서 7세기 말에는 아랍화폐의 주조가 개시되었다. 또한 미슬로의 아랍 이주는 마침내 원주민의 아랍화를 촉진하고, 아라비아어를 공통어로 하는 일대 문화권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바스 왕조 시대(750~1258)에는 바그다드를 비롯한 도시의 상공업 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모스크에 인접한 시는 교역의 장인 동시에 생산의 장이기도 하여서, 거기에서 생산된 각종 직물이나 유리제품, 종이, 비누 등의 특산물은 각지의 도시를 향해서 많이 수출되었다. 도시상인에는 외국무역에 종사하는 대상인부터 시장의 소상인까지 있었는데, 아바스 왕조 시대에 특히 유력한 계층을 형성한 것은 전자의 대상인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 인도의 후추, 목재, 철, 러시아의 모피와 노예, 비잔틴의 공예품, 그 외에 아프리카의 금이나 도예 등을 구입해서 칼리프나 고급관료 또는 군인 등의 유력자에게 판매했다. 그리고 9세기 이후에는 그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정치 세계로 진출해서, 그중에는 국가의 재상에까지 올라간 상인도 나타났다. 또한 그 재력을 학문 분야에 활용해서 스스로 각지를 돌아다녀 예언자의 전승을 수집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상인도 다수 존재했다. 정부에 의한 재산몰수가 빈번하게 행하여졌기 때문에 몇 세대에 걸쳐서 호상이 존속하는 예는 드물었지만, 군사정권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경제, 정치, 문화의 면에서 상인의 이와 같은 활약을 볼 수 있는 것은 이슬람 사회의 현저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목민이었던 아랍 정복군은 지배하의 농촌사회나 농업에는 흥미를 나타내지 않고 거기에서 조세를 징수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였다. 종래대로의 토지보유가 인정된 경작농민에게는 인두세 외에 토지세가 부과되는데, 이 토지세만으로 수확의 약 반에 이르렀다고 추정되고 있다. 면세특권을 가진 아랍 무슬림과 원주민과의 세제상의 불평등이 해소된 것은 이슬람의 조세제도가 정비되고 토지의 경작자는 모두 지대로서의 지세를 지불한다는 원칙이 확립되는 8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또한 촌장도 종래와 마찬가지로 사유지의 소유가 인정되고, 조세를 일괄해서 정부에게 납부하는 마을의 책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8세기경부터 아랍이 지주가 되어서 마을에 살고, 관료적인 징세기구가 정비되게 되면 이들 촌장은 지방명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대신에 샤이프라고 하는 아랍의 촌장이 촌락사회를 책임지고 관리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이미 아바스 왕조 시대 초반부터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변화에 대응해서 촌락에서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농민의 수가 점차로 증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정복지의 토지와 농민은 아랍전사에게는 분배되지 않는 것이 최초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옴미아드 왕조(661~750) 초반부터 칼리프는 일족이나 총신에 대해서 사유지인 카티아를 수여하게 되고, 또한 황무지 개간이나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서 보다 대규모 사령지도 계속 성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서 카티아나 다이아를 기초로 군인이나 관료, 상인에 의한 대토지 소유가 현저하게 발달했다. 그들은 대리인을 이용해서 수로의 개삭이나 염해를 입은 토지의 개량에 노력, 특히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다이아에서는 소맥이나 대맥외에 상품작물인 벼나 사탕수수의 지배가 성행하였다. 상공업 활동의 진전과 함께 여기에 이슬람 사회 번영의 경제적 기반이 거의 확립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슬람 사회의 생활의 기초는 상공업과 농업과 목축에 있었는데, 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함없다. 그것도 이들 요소는 상품유통과 인간의 이동을 통해서 상호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노예군인과 울라마,
샤리아(이슬람법)에 의한 정치 원리가 확립되고, 무슬림 상인의 광범위한 활약과 농민의 개종이 서서히 진행됨에 따라서, 9세기 초 무렵에 이슬람 사회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내실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가 이와 같이 충실한 한편, 특권적인 대토지 소유의 발달이나 아바스 왕조의 상비군인 홀라산군의 해체는 새로운 역사적 전개를 촉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변혁은 터키인을 중심으로 하는 맘루크(노예군인)의 대두에서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터키인은 이미 8세기 초부터 어떤 자는 전쟁포로로서, 어떤 자는 구입노예로서 이슬람 사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란의 다이람인이 오로지 보병으로서 이용된 것에 반해서, 이들 터키인은 기마전사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칼리프 무타심(재위 833~842)은 약 7000기의 터키인 맘루크를 구입해서 친위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이후 맘루크는 홀라산군에 대신해서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마침내 칼리프의 폐위도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0세기 중반 이후에도 유리한 이크타 보유에 의해서 농촌을 지배하고, 12세기 말에는 흑인노예병의 세력을 구축해서 아미르나 지방 총독의 자리를 독점했다. 물론 자유신분의 비맘루크기사도 다수 존재하였는데, 맘루크 왕조(1250~1517)는 물론, 그후의 오스만제국(1290~1922)이나 사파비 왕조(1501~1736)에서도 노예군단 우위의 체제에 변함은 없었다.
이민족으로 노예출신인 맘루크에 의한 지배가 이와 같이 오래 계속된 것은 맘루크와 울라마(종교지도자, 학자)와의 긴밀한 제휴에 의하는 점이 적지 않다. 시아파의 여러 세력에 대해서 수니파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기 위한 마드라사(학원)의 건설은 이미 셀주크 왕조 시대(1038~1194)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정책을 답습한 아이유브 왕조에서 맘루크 왕조에 걸쳐서 울라마의 사회적 역할은 더욱더 증대하였다. 맘루크는 모스크나 마드리사를 많이 건설해서 이슬람문화를 보호해서, 무슬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울라마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맘루크 체제에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랍 유목민은 이민족 노예에 의한 지배에 이론을 제기하고 가끔 반란을 일으켰으며, 도시의 젊은이 집단인 아이야르('ayyār)도 군인의 폭력에서 하라(마을)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였다. 유목민이나 아이야르는 정부에 협력해서 군대의 보조군을 구성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10~12세기의 시리아나 쟈지라에서는 일시적이기는 하였지만 상인이나 아프다스(아이야르)의 지지를 얻어서 도시에 울라마의 연합정권이 수립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맘루크가 대두하고, 이크타제가 성립한 후에도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활동이 활발히 행하여졌다. 아바스 왕조 시대와 같이 정치가로서 활약하는 상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지만, 술탄의 보호하에 향료무역이나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상인 중에는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거나 외교사절로서 멀리 중앙아시아나 러시아까지 가는 자도 있었다.
맘루크의 대두에 따른 정정(政情)의 혼란은 이란이나 이라크의 농촌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군벌상호의 전투에 의해서 수리기구는 파괴되고, 부와이 왕조(932~1062)의 성립 후에도 군인에 의한 자의적인 수탈이 계속되었다. 셀주크 왕조는 군인의 이크타보유를 엄격하게 감독함으로써 농촌사회에 어느 정도의 안정을 가져왔으나, 그래도 과거의 농업생산력을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서방의 이집트ㆍ시리아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농업생산이 유지되어, 아이유브 왕조에서 맘루크 왕조에 걸쳐서 도시와 농촌의 인구는 확실히 증가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촌락사회를 구성하는 주요한 계층은 자소작의 농민이었는데, 이크타제가 성립하자 그들은 점차로 군인에 대한 예속도를 더해서 마침내 이크타 보유자의 농노적인 상태로 전락해갔다. 또한 이크타제의 성립과 함께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결성도 농촌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요인이었다. 12세기 이후, 각 도시에 성립한 타리카는 그 조직의 틀을 농촌에도 확산시킴으로써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강력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수공업자나 농민은 이들 타리카에 참가함으로써 비로소 이슬람의 신앙을 친근한 것으로서 체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시와 촌락,
전통적인 이슬람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은 이상과 같은데,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의 결합원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대부분 시대의 이슬람 사회에도 공통되는 것이 있었다. 도시는 직물을 비롯한 수공업제품이나 도서무역에 의한 향료, 노예 등이 거래되는 장인 동시에, 정부관리나 군인에 의한 농촌지배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한편, 주변 촌락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도시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촌락은 자급자족적인 공통체가 아니라, 이미 이슬람 시대 초기부터 직물의 원료나 각종 과일 등의 특산물이 근처 도시를 향해서 출하되었다.
촌락의 쿳타브(절의 소옥)에서 코란의 암송을 끝낸 소년은 도시로 나와서 마드라사에서 공부하고, 바그다드나 카이로 등에서 면학을 계속하는 것이 유력한 울라마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촌락에는 농민이외에 농경지의 관리인이나 순찰인, 목수, 설교사 등도 존재하였는데, 그들 중 특히 순찰역은 유목민에 의해서 청부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동력과 무력을 가진 유목민은 전투집단으로서의 성격도 갖추었기 때문에, 그들은 계약에 의해서 촌락을 순찰할 뿐만 아니라, 정부에 보조군을 제공하거나 일정 지역에 보호권을 행사해서 여행객이나 순례에 대한 안전보장을 하는 대신에 보호료를 징수했다. 그러나 이들 유목민은 농촌사회와 공존하며 국가체제에 협력하는 반면, 중앙권력이 약해지면 즉시 농촌이나 메카순례의 약탈자로 변할 위험성도 항상 지니고 있었다.
사회계층은 칼리프나 술탄의 일족, 군인, 대상인, 고급관리 등으로 이루어진 지배층과 중소 상인이나 직인, 또는 농민으로 이루어진 민중으로 나뉘어졌다. 그 중간에 무슬림 지식인이 존재하였는데, 도시에 마드라사가 건설되기 시작하는 11세기 이후에는 서서히 이 중간층이 두터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핫사와 안마 및 각 직업은 결코 고정적인 신분인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자제가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상인이나 직인의 자녀가 부모의 직업을 잇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단, 아바스 왕조 중기 이후의 군사는 터키인이나 몽고인 등 이민족에 의해서 독점되며, 도시민이나 농민 출신의 군인이 거의 전무하였다는 것은 이슬람 사회에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도 존재하였는데, 군인노예이건 가내노예이건 해방 후의 경력에 노예였던 것이 큰 장해가 되지는 않았다. 만술이나 하른알라시드를 비롯해서 아바스 왕조의 역대 칼리프에 노예의 자녀가 많았던 사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는 이와 같은 신분ㆍ직업의 유동성과 함께 인간의 이동이 매우 활발히 행하여진 사회이다.
아랍제국의 성립 이후, 터키인이나 몽고인은 정복에 의해서 사방에 대한 이주를 실현해서, 페르시아인 마와리나 맘루크는 유력자의 예속민으로서 이슬람 사회에 들어갔다. 또한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상호이주는 정정의 불안이나 기근을 계기로 단속적으로 행하여졌으며, 농민이나 유목민의 도시로의 유입도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학문의 습득방법을 보아도 마드라사의 학생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서 법학이나 전승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충분한 지식을 얻으면 선생으로부터 면허를 받아서, 다른 마을의 마드라사에게 새로운 선생을 구해서 여행을 떠났다. 또한 동서를 연결하는 활발한 상업활동이나 1년에 한 번의 메카순례도 이와 같은 인간의 이동을 더욱 촉진하는 요인인 것에 틀림없다. 와크프(기부 재산)에 의한 캐라반 사라이의 건설에 더해서 유력자가 일정기간 여행자의 생활과 안전을 보장하는 지와르(jiwār)의 관행도 살아 있기 때문에, 여행인이 이향에서의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는 경우는 없었다. 민족이나 지역의 전통이 복잡하게 혼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회가 대략적으로 균질적인 문화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이동에 의해서 새로운 기술이나 학문의 정보가 원격지에 신속하게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과 문화.
무슬림의 생활은 복수의 달력을 기본으로 영위되었다. 이드라고 하는 이슬람의 이대 제사(단식이 끝난 후의 제사와 희생제), 예언자의 성탄제(마우리드) 등은 헤지라력에 의해서 개최되었는데, 농사나 조세의 징수는 각지에 고유한 태양력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가령 이집트에서는 나일이 증수하는 8월말을 연초로 하는 콥트력이 사용되며, 시리아에서는 가을을 연초로 하는 시리아력이, 이라크나 이란에서는 춘분을 연초로 하는 페르시아력이 이용되었다. 근년 이후에는 이에 그레고리오력이 더해져서 많은 지역에서 3력 병용의 상태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민족이나 종교도 결코 단일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다.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아랍, 페르시아인(이란인), 터키인, 몽고인, 버버 이외에 쿨드, 아르메니아인, 누비아, 슬라브인, 그루지아인, 다이람 등의 소위 <소수민족>도 수없이 많이 존재하였다.
종교별로 보면 이슬람 교도 외에 인두세의 지불을 조건으로 <계전의 민족>으로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그리스도 교도나 유대 교도, 또는 조로아스터 교도 등이 있으며, 이슬람 교도 수니파, 시아파, 아라위파, 도르즈파 등의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다. 이들 민족이나 종파는 페르시아인은 서기ㆍ문인으로서, 터키인은 군인으로서, 유대 교도는 상인ㆍ금융업자로서 특히 눈에 띤 작용을 한 것처럼 각각 고유한 기술이나 재능을 살려서 이슬람 사회에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민족이나 종교가 이와 같이 다양한 것에 대응해서 언어 또한 복잡했다. 물론 코란의 언어인 아라비아어는 오랫동안 이슬람 세계의 공용어로서 이용되고 학문이나 문학활동도 아라비아어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10세기 이후가 되면 이란에서는 근세 페르시아어가 부활하고, 또한 터키민족의 서진과 함께 터키어의 사용 지역도 점차로 확대되었다. 또한 쿨드나 아르메니아인, 또는 그루지아인 등의 사이에서는 각각의 민족언어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주된 생업이 도시의 상공업이건, 시골의 농업이나 목축이건, 생활의 기초가 되는 단위는 역시 가족이었다. 부계의 혈연그룹의 집합체인 가족은 그 집합의 정도에 따라서 대소 여러 가지였으나, 현실의 생활은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에 의해서 영위되었다. 가족의 성원은 부친의 권위에 따르고, 필요하면 먼 혈연에게까지 원조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요구되었다. 개인주의적인 행동의 원리가 강하게 살아 있는 사회로, 가족이나 일족의 긴밀한 유대는 도시나 촌락의 공동체와 함께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에 대한 규제력으로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는 현실의 소가족과는 별도로 공통의 선조에 의해서 결합된 <집>의 의식도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이라크의 바르마크가나 이집트의 맘마티가는 관료의 명가로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맘루크 왕조나 오스만 왕조의 아미르는 맘루크와 의제적인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집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이와 같은 가족이나 집의 관념은 크게 동요되기 시작했다.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도시화의 진행과 촌락공동체의 붕괴, 또는 서구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의 유입은 혈연에 의한 기반을 점차로 약화시켰다. 또한 사회변동의 물결은 사람들의 행동 규범이 된 이슬람 그 자체에도 미쳤다. 혼합 재판소의 설치에 의해서 샤리아가 적용되는 범위는 대폭으로 제한되며, 그 담당자인 울라마의 역할도 점차로 저하되었다. 이슬람 사회의 전개 이후, 거의 유일한 사회조직으로서 기능하였던 타리카도 19세기 이후에는 급속하게 해체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구세력인 맘루크는 일소되며, 농촌에서도 이크타제의 시행 이후 비로소 본격적인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10세기 이후의 이슬람 사회는 맘루크에 의한 지배와 그것을 지지하는 울라마의 사회적 역할, 이크타제의 성립과 발전, 타리카에 의한 사회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근대 여러 국가는 비이슬람화의 방향을 거치건, 이슬람 재생의 길을 걷든 이들 모두를 개혁의 대상으로 들어서 새로운 사회와 그에 어울리는 가치의식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사,
이슬람의 제사는 외형상 ①신성ㆍ엄숙ㆍ근행형 ②순교기념ㆍ비통형 ③환희활달ㆍ해방형의 세가지 타입으로 나뉘어진다. 종파의 구별없이 이슬람법에 정해진 이대제사(이드)는 단식후의 제사와 희생제이다. 이외에 ①헤지라력의 원단 ②무함마드의 성탄제 ③밤의 여행과 승천기념의 밤 ④샤반 달의 15일의 전야 ⑤라일라 알카드르(layla al-qadr) 등이 있다. 시아파에서는 이외에 무함마드가 알리의 칼리프권을 암으로 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기념하는 카딜품제나 알리, 하사인의 순교기념일을 중시한다. 특히 푸사인의 순교기념일 아슈라는 시아파 최대의 행사이다. 이외에 시아파에서는 역대 이맘(6대, 8대, 12대 등)의 성탄제나 명일이 중시된다. 또한 종파 구별없이 이슬람 신비주의의 성자의 성탄제가 지방적인 제사로서 널리 행하여지고 있다.
동남아시아권 이슬람,
동남아시아의 총 인구 중 무슬림(이슬람 교도)은 그 40%를 차지하며 2위의 불교도, 3위인 그리스도 교도를 웃도는 지역내 최대의 종교그룹이다. 무슬림 인구의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동서부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군도, 필리핀 군도 남부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 분포범위는 그리스도 교도가 차지하는 필리핀 북부ㆍ중부를 제외하면 소위 말레이계의 언어ㆍ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분포범위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슬람은 교도개인의 신앙ㆍ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지역내 각국의 문화, 사회, 정치, 국제관계의 동적인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은 전 세계의 무슬림 총 인구의 20%에 이르고 있으며, 1970년대 초기 이래의 세계적 이슬람 부흥의 동향도 현저하게 받아들여지며, 이슬람 세계의 유력한 구성부분으로서 발언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역사,
고대, 동남아시아는 중국과 인도대륙ㆍ서아시아ㆍ지중해의 여러 문명을 연결하는 해상교역의 루트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랍상인은 이 교역루트에서 일찍이 활약하였다. 무함마드에 의해서 제창된 이슬람의 가르침도 이 교역루트를 통해서 전해졌다.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말경부터이다. 개종은 아라비아, 인도, 중국 등으로부터의 무슬림상인의 정착과 현재사회에 대한 동화, 울라마(이슬람 학자)나 스피즘(이슬람 신비주의)도사에 의한 포교, 토착권력자의 정치적 배려ㆍ경제적 타산 등 여러 가지 양태와 동기로서 진행되었다. 어떤 경우든 외부로부터의 대량의 무슬림 이민이나 무력침공은 보이지 않으며, 개종은 전체로서의 평화적ㆍ자발적ㆍ점진적 과정을 거쳤다.
먼저 13세기 말 수마트라섬의 북부 연안에 몇 개의 무슬림 왕국이 일어났다. 15세기 초기에는 말레이반도 남부의 동서교역의 거점지인 믈라카 왕국의 왕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슬람화는 이 믈라카 해협지역을 기점으로서 한편에서는 말레이반도를 돌아서 중국을 향하는 동북방향의 교역루트를 따라서 인도차이나 남부, 보르네오(카리만탄)섬 북안, 필리핀 군도에 미치며, 한편에서는 모르카제도(향료제도)를 동단으로 하는 동남방향의 교역루트를 따라서 수마트라섬 남부, 자바섬 북안, 보르네오섬 남부, 스라웨시(셀레베스)섬 남부 등으로 퍼졌다.
1511년 믈라카가 포르투갈의 손에 함락된 후에도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의 술탄 이스칸달 무다(재위 1607~1636), 자바 내륙부의 마타람 왕국의 술탄 아군, 수라웨시 남부 말카살의 하사누딘왕(동년 1631~1670) 등 강력한 무슬림 권력이 각지에서 일어나, 17세기를 통해서 유럽세력의 진출을 용이하게 허용하지 않았다. 19세기 초기부터 네덜란드에 의한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서수마트라의 이맘 본로 대표되는 파드파의 저항(파드리 전쟁), 자바삼 죠크쟈카르타의 술탄가의 왕자 디오포네고로의 반란(자바 전쟁), 테운크 디 티로를 정신적 지도자로 하는 아편 전쟁 등, 이슬람 성전(지하드)의 기인(旗印)을 드는 격렬한 무력저항이 20세기 초기까지 이어졌다. 이는 20세기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가 되고, 이슬람동맹(1911년 결성) 등으로 이어졌다. 1945년의 독립선언, 49년의 주권위양에 의해서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을 주요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탄생했다.
필리핀 남부의 무슬림은 모로족이고 불리며, 16세기 중반부터 4세기반에 걸쳐서 스페인, 아메리카의 식민지화ㆍ그리스도 교화에 계속해서 저항해서, 현재에는 분리ㆍ자치를 요구하기에 이르고 있다.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북안의 무슬림의 모든 권력은 19세기 후반부터 전체적으로 영국식민지 권익의 진출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고, 화교ㆍ인도이민의 노동력 수입을 인정하고, 오늘날까지 이르는 다민족의 복합사회가 각지에서 형성되었다.
생활ㆍ문화,
동남아시아의 무슬림 주민의 생활은 많은 면에서 이슬람을 기조로 하고 있다. 남자의 할례(5~15세), 결혼계약(아카드 니카), 토장에 의한 매장 등 주요한 통과의례는 이슬람에 따른다. 역은 태음력에 의하며, 1일은 일몰부터 시작해서 일몰에서 끝나며, 1주는 금요일을 성일로 하는 7요일, 1개월은 29일부터 30일, 1년은 12개월로 354일로, 태양력보다 약 11일 짧다. 따라서 이슬람의 연중행사는 자연의 계절과 관계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외에 태양력, 자바의 주 5요일 등 복수의 역법이 병용되고 있다.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아라비아어ㆍ아라비아 문자의 사용이 동남아시아에서 보급되었다. 말레이계의 무슬림 사회전역에서 말레이시아어를 아라비아 문자로 표기한 쟈위(Jawi)가 정치, 외교, 종교, 교육 등의 분야에서 기본용어가 되었다. 자바에서는 산스크리트계의 자바문자와 자바 외에 자바어를 아라비아 문자로 표현하는 페곤(Pegon)이 이슬람법, 스피즘, 이슬람 교육 등의 분야에서 이용하게 되었다. 이 영향은 라틴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화의 초기부터 다수의 동남아시아ㆍ무슬림이 메카를 순례했다. 특히 1869년의 수에즈 운하 개통 후,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순례자수는 급격히 증대했다. 또한 순례 후에도 메카에 머물러서 이슬람 교의의 연찬에 노력하는 자도 많아지고, 동남아시아ㆍ무슬림의 코로니가 자바(Jawah)의 총칭하에 발전했다. 자바ㆍ코로니에서는 자바, 아체, 미난카바우 등의 출신의 울라마를 중심으로서 필리핀,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역으로부터의 무슬림이 말레이시아어를 공통어로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동남아시아ㆍ무슬림동포로서의 연대성이 형성되었다.
이슬람은 동남아시아의 문학ㆍ예능에 샤일(페르시아 신비주의 계통의 시 형식), 히카야트 스쟈라(전기ㆍ역사 이야기 등) 등 새로운 장르를 가져오고, 와얀의 레퍼토리에 이슬람 설화, 무슬림 영웅전을 더했다. 또한 스피의 행(行) 등에서 여러 가지 무용ㆍ음악이 발달했다. 건축, 조형미술의 분야에서는 힌두ㆍ불교기에 특징적이었던 석조사원건축, 불상조각이 모습을 감추었으며 이슬람 예배당은 동남아시아의 독특한 목조건축양식으로서 세워졌다. 조각, 장식에서는 꽃ㆍ동물의 양식화, 기하학 모양이 주류를 이루었다.
교의, 특징,
동남아시아의 이슬람은 코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언행(수나)과 무슬림 공동체의 합의(이주마)를 중시하는 수니파에 속한다. 수니파의 교의는 신앙ㆍ의례적 규범(히바다트)인 육신오행(六信五行)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우수한 공통성ㆍ보편성을 나타내는데, 사회윤리적 규범(무아말라트)에서는 코란과 수나를 원칙으로 하며, 시대나 환경, 관습(아닷트) 등을 고려해서 유연성 있는 다양한 적응을 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수니파 이슬람법학(피크프) 4학파 중에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샤피이파가 주류이다. 수피교단(탈레캇트)의 활동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 초기부터 활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나크슈반디야, 카디리야, 샤타리야 등이 현재에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슬람ㆍ시아파의 영향은 단편적으로 말레이시아어, 인도네시아어 중에 페르시아어 기원의 단어가 보이는 점, 수마트라 서ㆍ북부 등에서 하산 후사인의 수난제의 흔적이 보이는 점, 이븐 아르알라비계통의 <존재의 단일성론>이 신비주의 사상의 일단을 이루고 있는 점 등에 머물렀다. 그러나 1979년의 이란혁명 이후에는 시아 정치사상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이 강해지고 있다.
교육,
할례 전기의 아동에 대한 양친이나 코란교사에 의한 코란 낭독의 교육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더욱 발전한 이슬람 교육을 위해서 폰도크(아라비아 어원 푼도크, 숙사라는 뜻. 자바에서는 푸산트렌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하는 기숙사가 각지에 산재하고, 울라마(자바에서는 키야이)의 지도하에 아라비아어 문법, 코란해석,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 이슬람법, 이슬람 신비주의 등 전통적인 커리큘럼에 따른 교육이 행하여졌다.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주민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교육이었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폰도크 프산트렌 교육은 근대적 학교교육의 영향을 받아서 여러 가지 내부개혁이 일어나고, 종교학교나 일반학교를 병설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에서의 이슬람의 유지ㆍ발전에 의연히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슬람의 위치와 역할,
동남아시아 각국에서의 이슬람의 위치와 역할은 역사, 인구 구성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네이에서는 이슬람이 국가생활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에서 무슬림은 국가적 통합에 관련된 중요한 마이널리티의 위치에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는 소멸의 위기에 처한 극소수파이다.
인도네시아는 총인구 중 88%가 무슬림이며, 동남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최대의 무슬림 인구를 가지는 국가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헌법상 국교로서의 위치에 있지는 않다. 헌법은 그 전문에서 건국 5원칙의 제1원칙으로서 유일 최고신으로의 귀의를 들고 있으며, 무슬림의 대다수는 이를 이슬람의 근본원리인 타우히드(신의 유일성)의 승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이슬람을 국가원리로서 명기할 것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의연히 존재한다. 현행 헌법체제하에서 무슬림의 결혼, 이혼, 상속, 기부 등에 관한 행정과 사법, 이슬람 교육 등은 종교성(宗敎省)의 관할하에서 놓여있어 이슬람법의 적용이 보증되어 있다.
말레이시아는 식민지화 이전부터 연속되고 있는 토착의 무슬림 여러 권력을 주체로서 연방국가로서 형성되어 있다. 연방헌법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있는데, 총인구의 44%에 이르는 말레이계 무슬림은 대부분이 농민으로, 공업, 상업을 지배한 화교에 대해서 경제적으로 약세의 위치에 있다. 현 정부는 말레이계 주민을 부미프트라(<토지의 자손>)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줌으로써 경제적ㆍ사회적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브루네이(총인구 중 말레이계 55%)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술탄 통치국인데, 최근 영국연방에서 독립해서 풍부한 천연자원(천연가스)을 활용해서 독특한 국가형성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화교가 주체인 복합민족국가로 총인구 중 말레이계 무슬림 15%와 인도계의 무슬림 상당수가 있는데, 결혼, 이혼, 상속 등의 영역에서의 이슬람법의 적용과 종교활동의 자유가 보증되고 있다. 필리핀과 태국의 무슬림 인구는 모두 총인구의 4%, 그것도 독자적인 역사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또한 국가의 남부에 있어서 근린국의 무슬림 주민과 긴밀한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분리ㆍ독립의 요구가 반복되었는데, 양국 정부 모두 현재의 국경선을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서 양보하지 않고, 교육, 사회복지 등의 면에서 내부자치를 높임으로써 무슬림 주민의 합의를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얀마에도 총인구의 4%의 무슬림이 존재하는데, 그 실태는 불분명하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챰족의 무슬림이 지금도 캄보디아에 거의 10만 명, 베트남에 5만 명 정도, 라오스에 수천 명이 현존하고 있다고 추정되는데, 장기의 전란에 의해서 마이널리티로서의 입장도 위협당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부는 이미 난민으로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주했다.
오늘날 메카 순례에 임하는 무슬림 중에서는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순례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친 ASEAN제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번영이 같은 지역에서의 이슬람 재활성화의 경향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국가적 통합, 개발노선과 전략, 기본적 이권과 사회복지, 마이널리티의 생존권 등 여러 문제에서 이슬람 부흥의 움직임,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의 새로운 대두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앞으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프리카 권 이슬람,
현황,
아프리카 전역에서는 현재도 매년 이슬람 교도가 증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는 대륙이다. 1981년의 추계에 의하면 이슬람 교도가 약 1억5000만 명, 그리스도 교도(전종파)가 약 1억3000만 명이며, 이슬람 교도는 아프리카 전 인구의 3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아프리카제국 독립 전의 1950년대의 2000만 정도에 비해서 7~8배의 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의 사바나지대, 수단 중앙부, 동아프리카 연안부의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 교도이며, 지금도 서아프리카의 기니아만 연안부나 동아프리카 내륙부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근년 아랍 산유국의 경제원조나 이슬람 자조운동의 전개에 의해서 각지에서 신모스크의 건설, 신자조직의 활성화가 진행되고, 또한 아프리카 각지에서 공로에 의한 메카 순례자의 수도 격증하고 있다.
이를 현재의 국가 레벨에서 보면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모리타니아, 수단, 지브티, 소말리아의 9개국을 특별히 아랍ㆍ이슬람 문화의 강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9개국은 이슬람 교도가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아라비아어를 주요 언어로 하는(소말리아를 제외) 아랍민족으로서의 의식이 높으며 아랍연맹에 가맹하고 있다.
이슬람화의 루트,
아프리카 대륙의 이슬람화의 전개는 역사적으로 보아서 크게 세 가지의 루트가 고려된다. 즉, ①이집트에서 나일강을 따라서 남하해서 수단, 에티오피아로, 나가서 사바나를 따라서 챠드호 지방으로 ②이집트에서 서쪽으로, 마그리브(튀니지, 알제리, 모로코를 포함한 북서 아프리카)를 거쳐서 사하라의 교역 루트를 따라서 남하해서 서아프리카로 ③홍해, 인도양을 거쳐서 동아프리카 연안부로, 여기에서 동아프리카 내륙부로, 동서 양 아프리카의 이슬람화를 크게 유형화하면 동쪽으로는 선형(線型), 서쪽은 면형(面型)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화의 거점이, 연안부에 선상으로 나열된 교역도시의 연결이라는 지역 전개를 한 것에 대해서, 서아프리카에서는 왕국의 영토라는 넓은 면에 교역 루트, 국가통치조직의 망이 정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의 이슬람화의 과정에 대해서 영국의 인류학자 H. J. 피셔는 격리, 혼합, 개혁의 세 가지 기본적 단계를 상정하고 있다. 격리는 무슬림(이슬람 교도)인 아랍상인, 전도자, 망명자 등의 집단과, 비무슬림인 아프리카인 집단이 분리해서 거주지를 구분하고 있는 초기 단계이다. 이어서 아프리카주민의 이슬람화가 일어났는데 아프리카인 사회의 개종은 아프리카 국가의 중추부, 즉 왕이나 수도의 상인 등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어 아랍의 여행객 엘 바클리에 의하면 11세기에 발흥한 마리제국에서 왕이 한발시의 기우에 실패해서 곤경에 처했을 때, 모로코에서 일어난 모라비트파의 수도사가 왕의 개종과 인환해서 은혜의 비를 내리게 해서 이로써 왕국이 이슬람화했다고 한다. 모라비트파의 수도사들은 서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지하드(성전)를 전개하고, 이슬람화의 길을 열었다.
14세기에는 마리의 왕 만사 무사가 마린케(만딘고)족의 많은 추종자들과 재보를 갖추어서 메카로 순례하고(1324~25), 카이로나 마그리브에서 많은 이슬람 신학자를 톤브크투로 데리고 돌아가서 서아프리카에서의 정통 이슬람 증흥의 기초를 형성했다. 또한 스피즘(신비주의)의 경향이 있는 카딜리아파, 티쟈니아파, 또는 마흐디즘(종말론) 등 여러 이슬람 신들의 사상도 이 루트를 통해서 소개되고, 각지에 퍼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만사ㆍ무사가 메카에서 돌아왔을 때에 여행의 안전을 감사해서 마린케족의 조령을 제사지내는 전통적 의례를 행하였다는 고사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통치자는 국가의 통치상 사람들의 전통적인 비무슬림적 가치지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안비바렌트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교와 전통적 종교의 여러 요소와의 신크레티즘(습합)은 피할 수 없었다.
19세기 개혁기에는 이와 같은 습학적 이슬람을 주된 공격대상으로서 북나이지리아의 플루베족인 우스만 단 포디오에 의한 프라니 왕국, 마찬가지로 플루베족에 의한 마시나제국, 현 세네갈의 투크롤족의 하지우말에 의한 투크롤 제국 등의 신성 지하드 국가의 건설이 계속되고 이슬람화를 보다 넓은 지역에서 일으킴과 동시에 유럽의 식민지 세력의 침략에 대해서 최종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장기간 강하게 저항했다. 또한 마흐디즘 사상은 수단의 무함마드 아흐마드의 마프디(구세자)선언과 반란(1881), 교단국가의 성립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었다(마흐디파).
동아프리카,
한편, 동아프리카에서는 환인도양 교역의 일단으로서 발달한 연안부의 여러 도시에서 토착의 반투문화와 아랍ㆍ페르시아 문화와 접촉하였고, 7세기에는 이슬람이 더해지고 아플로ㆍ아시아적 스와힐리 도시문화가 형성되었다. 15~17세기, 포르투갈에게 제해권을 빼앗겨 이슬람 중핵지대와의 항상적인 문화접촉의 길이 끊어진 연안도시는 필연적으로 부득이하게 반투 사회와의 밀접한 사회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해서 아플로ㆍ아시아적인 이슬람문화인 스와히리 문화는 한층 아프리카적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18~19세기, 몬바사의 마즐루이가, 마스카트 오만의 부 사이드가 등과의 전쟁에 의해서 포르투갈 세력은 점차로 남쪽으로 이동하고, 1840년에는 부 사이드가의 사이이드 사이드에 의한 잔지발을 수도로 하는 연안부 일대의 술탄국가가 성립했다. 19세기 중기에는 아랍 스와힐리 상인에 의한 내륙교역이 시작되고, 그 교역루트를 중심으로 주민의 이슬람화가 일어났다. 이들은 연안부의 스와힐리 이슬람인을 모델로서 스스로를 <스와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19세기 말, 유럽인에 의한 식민지화가 일어나자 식민지 통치자에게 징세 청부인이나 안내인으로서 고용된 스와힐리 사람들이나 서아프리카의 이슬람인은 내륙 각지에 이슬람교를 전했다. 또한 화폐경제의 침투와 함께 시장네트의 확립, 플랜테이션이나 철도건설 등에 대한 주민의 타향벌이가 이슬람화를 진행시키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프리카ㆍ서아프리카에서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이슬람문화와 아프리카문화가 융합한 아플로 이슬람을 수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종교 그 자체와 함께 아플로 이슬람적인 생활양식 전체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를 들면 이슬람 교도에게는 신앙고백, 예배, 희사, 단식, 순례가 <오주(五柱)>로서 의무지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소중히 하는데, 또 한편에서는 부족의 전통적인 종교의례나 제사도 수용되어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종파,
아프리카계 이슬람인은 거의 전부가 수니파(정통파)가 차지하고 있다. 그외에는 동아프리카의 인도ㆍ파키스탄계 주민에게는 시아파계의 이스나 아샬리파, 이스마일파, 보홀라파 등 이란, 인도에 발달한 종파에 속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잔지발에 왕조를 형성한 부 사이드가는 이바디파에 속한다. 수단에서는 마흐디즘을 신봉하는 마흐디파의 사람들이 지금도 정권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출처 & 참고문헌,
[이슬람 [Islam, al-Islām]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사전연구사]
[재미있는 지구촌 종교 이야기]
[(CC BY-SA)Tab59@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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