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9일 월요일

퇴계 이황.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주자의 사상을 깊게 연구하여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주리론(主理論) 전통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로 숭앙된다.

본관은 진성()이며 초명()은 서홍()이다. 자()는 경호()이며, 호()는 퇴계(退)인데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른다’는 뜻의 ‘퇴거계상(退)’에서 비롯되었다. ‘계()’는 이황이 물러나 머물렀던 ‘토계(谿)’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해석된다. 청량산() 기슭에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도옹()ㆍ도수()ㆍ퇴도(退)ㆍ청량산인()이라는 별호()도 사용했다. 

시호()는 문순()이다. 1501년 11월 25일(음력) 예안(,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진사 이식(,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됨)의 7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1528년에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34년 식년시()에서 문과()의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외교 문서의 관리를 담당하던 승문원()의 부정자()ㆍ박사()ㆍ교리()ㆍ교감() 등을 역임했으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문학() 등의 직위에도 있었다. 

1542년에는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고, 1543년에는 성균관의 교수직인 사성()이 되었다. 1545년을사사화() 당시 삭탈관직()되었으나, 곧바로 서용()되어 사복시() 정()ㆍ교서관() 교리() 등을 지냈다. 1547년에는 안동대도호부사(使), 홍문관() 부응교(), 의빈부() 경력()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계() 인근에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48년에는 충청도 단양의 군수()가 되었는데, 형인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상피제()에 따라 경상도 풍기의 군수로 옮겼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병으로 물러났어도 왕을 가까이서 섬기던 이황에게 갑자기 외직()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황은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주세붕()이 1543년에 세운 백운동서원()에 편액()과 서적(), 학전() 등을 내려줄 것을 건의하였다. 조정에서는 이황의 건의를 받아들여 1550년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편액과 함께 면세와 면역의 특권도 부여하였는데, 이로써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1549년에는 병을 이유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토계 인근에 한서암()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1551년에는 계상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황은 1550년 형인 이해가 참소()를 당해 유배지로 가던 도중 억울하게 목숨을 잃자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관직에 올랐다가도 곧바로 사퇴하기를 되풀이하였다. 1552년에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어 경연()에 시독관()으로 참여해 왕에게 불교를 멀리하고 왕도()를 행할 것을 간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헌부 집의(), 홍문관 부응교, 성균관 대사성(), 형조()와 병조() 참의(), 충무위() 상호군(), 첨지중추부사()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번번이 사양하고 물러났다. 

명종()은 이황을 아껴 1555년에는 낙향해 있던 그에게 음식물 등을 전하며 되도록 빨리 돌아오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하였고, 화공()을 보내 도산()의 풍경을 그려오게 하여 감상하기도 했다. 1558년과 1559년에는 공조참판()과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이황은 사직을 청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566년에는 공조판서(), 예문관() 제학()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고, 명종은 이황에게 내의()를 보내 문병하기도 했다.

이황은 1570년 12월 8일(음력) 7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574년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의 뒤편에 도산서원이 세워져 그의 위패를 안치하였으며, 이듬해선조는 도산서원에 한석봉()이 쓴 편액을 하사하였다. 1600년에 조목() 등이 그의 글을 모아 51권 31책으로 구성된 문집을 편찬했으며, 1610년에는 공자()와 명유()를 섬기는 문묘()에 배향되었다.그는 ‘도산십이곡()’을 비롯해 다수의 시를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조식()ㆍ기대승() 등과 교류하며 나눈 편지 등도 전해진다. 그가 쓴 편지글은 <퇴계서절요(退)>로 따로 편찬되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자성록()>, <주자서절요()>, <이학통록()>, <계몽전의()>, <전습록논변()>, <경서석의()>, <심경후론()> 등의 저술을 남겼다. 유묵()으로 <퇴계필적(退)>과 <퇴도선생유첩(退)>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958년 대동문화연구원에 의해 <퇴계전서(退)>로 편찬되었다. 이황은 명종의 잇따른 부름을 사양하고 고향인 예안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1556년에 예안향약()을 만들었고, 1561년에는 도산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1567년 명종이 죽고선조()가 즉위한 뒤에는 명종의 행장()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고,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황은 병을 이유로 곧바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선조는 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이황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선조가 특별히 교서()를 보내 다시 부르자 상경하여기대승() 등과 함께 경연()에서 <대학()>과 <예기()> 등을 강론하였다. 1568년에는 숭정대부() 우찬성()으로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리며 사직을 청하였고, 다시 판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계속해서 조정에 들어올 것을 청하자, 

그 해 7월에 상경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그리고 실록청()의 도청당상()을 겸임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때선조에게 <무진봉사()>와 <성학십도()>를 지어 제출하였다. <무진봉사>는 왕이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을 여섯 조항으로 정리하여 상소한 것으로 ‘무진육조소()’라고도 불리며, 이이()의 <만언봉사()>와 더불어 조선 시대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잘 드러내는 저술로 꼽힌다. 1569년에는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낙향하였다.그는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따랐으며, 불교와 도교는 물론 양명학()과 나흠순()의 주기론() 등을 비판하며 리()를 강조하는 주리론()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기초하여 우주를 리()와 기()로 나누어 파악하였고, 우주 만물의 근원인 리()는 형이상()의 도(), 현상인 기()는 형이하()의 기()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주자와 마찬가지로 리()와 기()는 서로 구별되는 실체이며(), 서로 섞일 수 없고(), 떨어져 있을 수도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리()와 기()의 관계에서 서로 섞일 수 없다는 분별성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했고, “작용이 있는 것은 모두 형이하()의 것”이라며 리()의 운동성을 부정했던 주자와는 달리 “태극()에 동정()이 있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요, 

천명()이 유행()하는 것은 천명이 스스로 유행하는 것이니 어찌 또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리()의 운동성을 인정하였다. 이황은 주자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초로 성리학 연구의 길을 본격적으로 닦았으며, 이이()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기본 틀과 특징을 형성한 인물이다. 1543년 주희()의 문집과 어록인 <주자대전()>과 <주자어류()>가 간행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주자의 학설을 본격적으로 접하며 성리학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켰다. 특히 이황은 평생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깊게 연구하여 ‘동방의 주자’라고 불릴 정도로 주자학 해석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혔으며, 나아가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쟁()을 통해 심성론() 연구를 독창적 으로 발전시켰다. 

주자는 모든 사물은 리()의 원리와 기()의 작용이 결합하여 나타나며, 리()는 절대적이고 순선()하지만 기()는 상대적이고 가선가악()하다고 보았다. 리()는 사물의 존재 원리이자 목적으로 도()나 천명으로도 표현된다. 

주자는 리()를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마땅히 그리되어야 할 원칙()이라고 나타냈으며, 기()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형이하()의 존재들은 리()를 따라야 존재의 목적을 이룰 수 있고 리()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악()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리()와 기()의 관계는 리()가 기를 주재()하고 제어()하며, 명령()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리()는 형이상()의 본체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부동()의 절대성을 지니므로 오직 기()만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을 인간의 심성()에 대한 해석에 적용하여 이기호발설을 펼쳤다. 주자는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본성을 ‘성()’, 그것이 드러난 양태를 ‘정()’이라고 하였으며, 성()을 정()으로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 ‘심()’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을 보편적 본성인 ‘본연지성()’과 각 개체의 특수한 성질인 ‘기질지성()’으로 구분하였다. 

성()이 정()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도 둘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천명으로 받은 고유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 ‘도심()’, 그렇지 못한 것이 인심()이다. 주자는 인심은 인간의 감각적 욕구의 영향으로 악해질 수 있으므로 인심에서 비롯된 인욕()을 억누르고, 도심에 담긴 천리()를 따르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황은 이러한 주자의 논리를 바탕으로 측은지심()ㆍ수오지심()ㆍ사양지심()ㆍ시비지심()의 4단()을 본연지성에서 드러난 정()으로, 희노애락애오욕()의 7정()은 기질지성에서 드러난 정()으로 보았다. 그리고 4단()은 도심(), 7정()은 인심()이라 하였고, “4단은 리의 작용으로 나타나며(), 7정은 기의 작용으로 나타난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했다. 

이황은 리()가 운동하지 못한다면 죽은 것[]에 지나지 않아 기()를 주재하고 제어하는 절대성을 지닐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리가 움직이면 기가 따라서 생긴다()”며 ‘이동설()’을 주장하며 리()의 능동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리()를 체()와 용()의 두 측면으로 구분하였고, 체로서의 리()는 변화하지 않지만 용()으로서의 리()는 변화하고 운동한다고 보았다.그는 이러한 관점을 인간의 심성()에 대한 해석에 적용하여 이기호발설을 펼쳤다. 

주자는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본성을 ‘성()’, 그것이 드러난 양태를 ‘정()’이라고 하였으며, 성()을 정()으로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 ‘심()’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을 보편적 본성인 ‘본연지성()’과 각 개체의 특수한 성질인 ‘기질지성()’으로 구분하였다. 성()이 정()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도 둘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천명으로 받은 고유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 ‘도심()’, 그렇지 못한 것이 인심()이다. 

주자는 인심은 인간의 감각적 욕구의 영향으로 악해질 수 있으므로 인심에서 비롯된 인욕()을 억누르고, 도심에 담긴 천리()를 따르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황은 이러한 주자의 논리를 바탕으로 측은지심()ㆍ수오지심()ㆍ사양지심()ㆍ시비지심()의 4단()을 본연지성에서 드러난 정()으로, 희노애락애오욕()의 7정()은 기질지성에서 드러난 정()으로 보았다. 그리고 4단()은 도심(), 7정()은 인심()이라 하였고, “4단은 리의 작용으로 나타나며(), 7정은 기의 작용으로 나타난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했다.그러나 이러한 이황의 주장은기대승의 비판을 받았다.기대승은 이황처럼 4단()과 7정()을 각각 리()와 기()의 작용에 따른 것으로 나누면 4단에는 기()가 없고 7정에는 리()가 없게 되는데, 이는 리()와 기()가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한 주자의 견해와 대립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4단과 7정은 모두 정()이므로 도심()과 인심()과는 달리 리()와 기()로 나눌 수 없으며, 7정 밖에 4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기대승의 비판에 대해 이황은 리()와 기()는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별이 없을 수는 없다며, 4단이 7정과 무관하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선한 4단과 선악이 결정되지 않은 7정을 분별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또한 성()을 리()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정()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기대승의 견해를 일부 수용하여 “4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요, 

7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그것에 타는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하였다.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논쟁은 8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성혼()과 이이() 등도 이 논쟁에 참여하면서 조선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후대의 학자들도 다양한 연구 성과를 남겨 이 주제는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특징을 구성하였다.

이황이 주자와는 달리 리()의 능동성을 강조한 것은 도덕의 원리가 사회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황의 사상은 명분론에 기초한 양반 관료 중심의 지배체제를 뒷받침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리()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황의 사상은 도덕적 원리를 강조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변화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이황의 사상은 인간의 내면에서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찾기 위한 심성론()에 치중되었다고 평가된다. 이황의 사상은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일본 성리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조목()ㆍ이덕홍()ㆍ정구()ㆍ류성룡()ㆍ김성일() 등이 이황의 사상을 계승했으며, 그의 사상을 계승한 영남학파는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기호학파()와 더불어 동서(西) 분당()의 배경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저술 들은 일본 에도 시대[]에 11종 46권 45책 으로 간행되어 17세기 이후 야마사키 안사이 [, 1619∼1682]의 기몬 학파 [] 와 오쓰카 다이야 [退,1678∼1750]의 구마모토 학파[] 등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에도 ‘퇴계학'(退)’이란 용어를 낳을 만큼 국내외에서 매우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황이 주자와는 달리 리()의 능동성을 강조한 것은 도덕의 원리가 사회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황의 사상은 명분론에 기초한 양반 관료 중심의 지배체제를 뒷받침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리()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황의 사상은 도덕적 원리를 강조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변화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이황의 사상은 인간의 내면에서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찾기 위한 심성론()에 치중되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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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 https://youtu.be/fKNbbj5Mjic

https://youtu.be/NHjc6etIQUM
https://youtu.be/Wlt1b3YBK8E
https://youtu.be/ZrFU5S4JeDI
https://youtu.be/jmIMLWW8WWs

콩나물국밥.

콩나물 국밥. [ Kongnamul guk bap ,  ]

쓰린 속을 달래 주는 해장국의  대명사 이다, 
녹두를 싹 틔운 숙주는 동남아시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먹지만 콩을 싹 틔운 콩나물은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먹는다. 콩 자체에는 들어 있지 않은 비타민 C가 콩나물에는 듬뿍 들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콩나물 한 접시에는 하루 필요량의 반이나 되는 비타민 C가 들어 있다. 콩나물에는 이외에도 아미노산의 일종인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해 알코올 분해를 돕는다. 콩나물해장국은 전주가 유명한데 이는 전주의 물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주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콩나물국밥의 진미는 바로 모주다. 막걸리에 생강, 대추, 계피 등을 넣고 푹 끓인 술인데, 뜨거운 콩나물국밥을 먹는 사이사이 이 모주를 마셔야 땀이 나며 술이 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분일 뿐, 실제로는 체내 알코올 농도가 더 높아져 해장에 방해만 된다.콩나물국밥에 달걀을 풀어 넣는 집도 많지만 먹다 보면 노른자가 터져서 국물이 지저분해진다. 원래 전주에서는 흰자만 가만히 흘려 넣거나 아예 수란(계란)을 따로 만들어 곁들인다.

콩나물국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은 감기나 몸살에 걸렸을 때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몸이 으슬으슬 춥다 싶을 때는 맑은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듬뿍 풀어먹는 것으로 감기를 다스렸다.조선시대에는 콩나물을 '물 되주는 방법' 즉, 준물을 다시 주는 방법으로 길러 말린 다음에 '대두황건'이라 하여 청심환의 원료로 중국에 수출까지 하는 매우 귀중한 약재로 여겨져 왔다 . 지금까지도 청심환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사시사철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콩나물국은 서민들의 가장 친근한 음식이다. 갓 시집온 새댁이 제일 먼저 끓이는 국, 음식 솜씨 없는 싱글들이 가장 손쉽게 끓여 먹을 수 있는 국, 바로 콩나물국이다. 콩나물국밥은 콩나물국에 밥을 말은 형태의 음식으로,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고춧가루와 송송 썬 파를 넣어 만들면 맛있는 한 끼 식사가 된다. 맛이 담백하고 국물이 시원한 콩나물국밥은 술 마신 다음날 먹는 해장 음식으로 첫손에 꼽힌다. 전라도 지방에서 유래된 음식이며 콩나물 해장국으로도 불린다. 속을 풀어주는 음식으로 특히 아침 식사로 즐겨먹는다.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 맛,

녹두를 싹 틔운 숙주는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먹지만 콩을 싹 틔운 콩나물은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먹는다. 콩 자체에는 들어 있지 않은 비타민 C가 콩나물에는 듬뿍 들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콩나물 한 접시에는 하루 필요량의 반이나 되는 비타민 C가 들어 있다. 콩나물에는 이외에도 아미노산의 일종인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해 알코올 분해를 돕는다. 콩나물해장국은 전주가 유명한데 이는 전주의 물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맑은 콩나물국과 고춧가루로 다스리는 감기,
콩나물국밥에 달걀을 풀어 넣는 집도 많지만 먹다 보면 노른자가 터져서 국물이 지저분해진다. 원래 전주에서는 흰자만 가만히 흘려 넣거나 아예 수란1)을 따로 만들어 곁들인다.

애주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콩나물국밥의 진미는 바로 모주다. 막걸리에 생강, 대추, 계피 등을 넣고 푹 끓인 술인데, 뜨거운 콩나물국밥을 먹는 사이사이 이 모주를 마셔야 땀이 나며 술이 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분일 뿐, 실제로는 체내 알코올 농도가 더 높아져 해장에 방해만 된다.

콩나물국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은 감기나 몸살에 걸렸을 때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몸이 으슬으슬 춥다 싶을 때는 맑은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듬뿍 풀어먹는 것으로 감기를 다스렸다.
동의보감기록에 의하면 콩나물은 독성이 없고 맛이 달며 오장과 위장에 맺힘을 풀어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백질, 칼슘, 칼륨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으며 아미노산의 일종인 아스파라긴산이 함유되어 알코올을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아스파라긴산은 알코올 탈수소효소 활성을 증가시키고 알코올 농도를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콩나물을 주재료로 만든 콩나물 국을 숙취해소를 돕는 술국으로 즐겨먹기도 한다. 

멸치국에 콩나물이 아삭아삭 씹힐 정도로 뚝배기에 국을 끓여 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후 쫑쫑 썰어 놓은 대파와 풋고추, 구워서 부셔 놓은 김, 결대로 찢은 장조림 등을 얹고 달걀을 얹어서 한소끔 끓인다. 신김치를 쫑쫑 썰어 얹기도 한다.

냄비에 황태 육수 재료를 넣고 센 불에서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약한 불로 줄여 20여 분간 한소끔 끓인다. 체에 면보를 깔고 걸러 황태 육수를 따로 둔다. 콩나물은 끓는 물에 넣어 데친 후 체에 밭쳐 찬물에 헹군 후 물기를 뺀다. 대파와 청양고추는 송송 썰고 배추김치는 1cm 폭으로 썬다. 

뚝배기에 황태 육수와 콩나물, 마늘과 새우젓,배추김치 를 넣고  대파, 청양고추, 김가루를 올려 간하여 바글바글 끓인다. 달걀을 올리고 불을 끈다. 콩나물에는 각종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하며, 아스파라긴산이 함유되어 있어 신진대사를 도와주어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다. 각 지방에도 여러가지 국밥들이 무수히 많다. 개개인의 각자 음식 하는손 에 맛을 자우한다.

콩나물국밥
콩나물국밥(Kong-namul-Gukbap)
청심환의 원료, 콩나물
조선시대에는 콩나물을 '물 되주는 방법' 즉, 준물을 다시 주는 방법으로 길러 말린 다음에 '대두황건'이라 하여 청심환의 원료로 중국에 수출까지 하는 매우 귀중한 약재로 여겨져 왔다.

지금까지도 청심환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 참고문헌,
[콩나물국밥 [Kongnamul guk bap, 黄豆芽汤饭] - 쓰린 속을 달래 주는 해장국의 대명사 (맛있고 재미있는 한식이야기, 2013...)
[한국음식 2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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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 https://youtu.be/fKNbbj5Mjic

https://youtu.be/NHjc6etIQUM
https://youtu.be/Wlt1b3YBK8E
https://youtu.be/ZrFU5S4JeDI
https://youtu.be/jmIMLWW8WWs

보수동 깡통시장 과 책방골목.

부평깡통시장이 물질문화를 대변하는 공간이라면, 정신문화를 대변하는 공간이 바로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전쟁 때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을 때 북한에서 피란 온 부부가 보수동사거리에 목조건물 처마 밑에 박스를 깔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와 만화, 헌책 등을 좌판으로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부평깡통시장이 물질문화를 대변하는 공간이라면, 정신문화를 대변하는 공간이 바로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전쟁 때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을 때 북한에서 피란 온 부부가 보수동사거리에 목조건물 처마 밑에 박스를 깔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와 만화, 헌책 등을 좌판으로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 있던 학교 외에도 서울 등지에서 피란 온 학교들이 보수동 뒷산 등에서 노천교실, 천막교실 등을 열게 되면서 골목길은 학생들로 붐비게 되었다. 당시 물자의 부족으로 변변한 책을 구할 수 없었던 학생들을 상대로 하나둘씩 골목에 서점이 등장하면서 노점과 가건물로 이루어진 책방골목이 형성되었다. 

1960~1970년대에는 70여 개의 점포가 자리를 잡으면서 부산의 명소가 되었고, 학생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책을 사고팔았다. 종종 값비싼 고서가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면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과거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다양한 행사를 통해 부산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구심점으로 자리해 왔다. 

부산이 1914년 부산부가 되었을 때 부평정이 되었다가 1947년 동제로 바뀌면서 부평동 1, 2, 3, 4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5년 부산광역시가 되면서 중구 부평동 1, 2, 3, 4가가 되었다. 부평동은 거주 인구에 비해 유동 인구가 많은 곳으로 주민들 대부분이 상업에 의존 하는 것이고 또한 부산광역시 중구이며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서쪽에는 용두산이 있고, 동쪽에는 광복동이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민동과 함께 동래구의 부평리였다. 풀밭과 갈대밭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부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깡통시장은 부산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에서 내리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남포사거리에서 접근하면 부평깡통시장과 국제시장이 마주하고 있는 길로 갈 수 있고, 부평교차로 방향에서 가도 된다.

깡통야시장거리는 시장 4번 출구, 패션거리는 시장 2번 출구, 먹자거리는 시장 1번 출구로 들어가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야채와 청과, 육류, 수산물, 곡류, 반찬, 의류와 침구류, 잡화 등 다양한 품목의 물건들을 판매한다.

여기 = https://youtu.be/fKNbbj5M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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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깡통시장" 2(먹거리)

부평깡통시장" 2(먹거리)
부평깡통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중구로 39번길 32에 위치한 시장으로 국제시장자갈치시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 중 하나이다. 과거부터 부평동 일대에 장이 열리던 것이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곳에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하고 이 곳에서 장을 보기 시작하면서 '한일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1915년 일제에 의해 공설시장으로 지정되고 명칭도 '부평정시장'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엔 이름이 '부평시장'으로 바뀌고 이 곳에서 미군 군수품을 들여와 팔기 시작했고 특이 미군 통조림을 많이 팔았기에 부평깡통시장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 곳에는 특히 먹거리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비빔당면과 유부주머니전골이 제일 유명하다,

비빔당면을 먹지 않으면 부산을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역 특유의 음식이 비빔당면이다. 비빔당면은 처음에 부평깡통시장의 상인들의 허기를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비빔당면은 애초에 허기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기에 만드는 것도 간단하다. 당면을 불려서 삶고, 사각어묵 역시 끓는 물에 데쳐 썬 다음 그릇에 담아 양념장을 넣어 비비면 완성된다. 여기에 시금치 등의 채소를 넣기도 한다. 죽집골목 역시 부평깡통시장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온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했다. 1950년대 후반 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을 하나로 모아 죽을 끓여 파는 집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죽집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돼지 먹이를 의미하는 꿀꿀이죽 또는 유엔탕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이 죽은 값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피란민을 비롯해 가난한 상인들에게는 허기를 채울 수 있는 훌륭한 한 끼였다. 

유부주머니전골 또한 부평깡통시장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버섯과 대파를 잘게 썰고, 무는 납작하게 썬다. 그리고 멸치의 내장을 뺀 다음에 냄비에 끓여 육수를 만든다. 데친 유부에 잡채를 넣고 미나리로 묶은 다음 냄비에 육수를 넣고 끓이면 유부주머니전골이 만들어진다. 

한국 최초 공설시장

연중무휴의 신식시장, 부산 부평동시장

요약
'각설이 타령' 일명 '장타령'은 각설이들이 장날을 따라 떠돌아다니며 구걸할 때 부르는 노래.

공설시장은 신식이라 각설이 타령에 끼지 못함. 1910년 6월, 부산 부평동시장이 생김.
일본인 거주자들의 필요에 의해 한·일 상인이 함께 설립, 초기엔 일한시장으로 불렸음.
시장은 주로 5일장이었던 한국인에게 연중무휴 공설시장은 신선, 급속도로 발전함.
'각설이 타령'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일명 '장타령'이라고도 한다. 장날을 따라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던 각설이들이 흥을 돋울 때 부르는 노래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노래 가사에는 팔도 각지의 유명한 장이란 장은 그 이름이 다 나온다. 그중 경상도 쪽 장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보자.
"샛바람 반지 하단장 너무 칩어서 못 보고, 나리 건너 맹호장 선개없어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못 보고, 미지기 짠다 밀양장 싸개 묶어서 못 보고, 고개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아가리 크다 대구장 너무 널러서 못보고, 코 풀었다 홍해장 미끄럽어서 못 보고, 똥 쌌다 구례장 냄새가 나서 못 보고···."
하단장은 샛바람을 받아 너무 춥다 보니 못 가보고, 명지장은 내를 건널 배삯이 없어 못 가보며, 부산장은 골목이 많아 길을 못 찾을 것 같아 못 가본다는 노래다. 비록 각설이패의 노래지만 그 속에는 해학이 있고, 여유가 있고, 낭만이 있다.

그러나 시장으로 유명하면서도 이 각설이들의 노래에 끼지 못하는 시장이 바로 공설시장이다. 이른바 신식시장으로 새로 생겨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 6월. 부산의 부평동에 새로 생긴 '부평동시장'은 당시의 여느 시장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어서 상인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쉬는 날이 없어 매일 문을 열고 영업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그 지역의 한국인 상인들과 일본인 상인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한국 최초의 공설시장이었다. 설립 당시엔 명칭이 '일한시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시장은 주로 5일장이었다. 19세기 실학자 서유구의 명저 「임원 경제 십륙지」에는 저자가 조사한 전국의 시장이 1,052군데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909군데가 5일장으로 나타나 있다. 5일장 이외의 시장으로는 약령시·우시장·어시장 등이 있었다.

'장타령'에 등장하는 장은 바로 이렇게 9백 군데가 넘는 이 땅의 시골 장터 중 일부인 셈이다. 해운대장은 1일과 6일에 장이 섰고, 동래장은 2일과 7일, 구포장은 3일과 8일, 그리고 부산장이 4일과 9일, 하단장이 2일과 7일, 수영장이 5일과 10일이었다. 그러니 일한시장처럼 매일 서는 장터가 들어갈 리가 없었다.

재래시장은 물론 노천에 있었고, 상품의 매매에도 특별한 제약이 없었다. 또 장날에는 반드시 오락과 유흥이 있었고, 친교와 통신이 있었다.

시장을 그런 정서로 이해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부평동시장'은 이색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장의 설립은 일본인 거주자들이 늘어나면서 그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일본인들의 생활 근거지는 중구지역이었고, 곡물이나 채소·어물 등 생활필수품을 구하려면 5일장인 동래장이나 구포장으로 나가야 했다. 이에 한일 합작으로 1천여 평의 부지에 상설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 시장은 이후 시장 규칙을 만드는 데에도 모델 역할을 했다. 5년 후에는 부산시가 직영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규칙에 '공설시장은 20인 이상의 경영자가 일정한 건물 내에서 주로 곡물이나 식료품의 매매를 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부평동시장'은 시영이 되면서부터 급속도로 발전하여 시장권역이 사방 70리에 이르렀고, 연간 거래액은 3백만 원으로 전국 최고였다. 일제 말에는 점포수가 약 5백 군데에 이르렀다. 하루 드나드는 사람의 수는 2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 시장은 광복 후에 속칭 깡통시장으로 불렸다가, 6·25 후에는 외제상품 시장이 되기도 했다. 깡통시장이란 말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식품을 노점에서 파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들의 장사가 잘 되자 점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깡통식품을 취급하기 시작해서 '부평동시장'은 외제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장이 되었다.

조선조 때에도 교역의 현장이었던 부산지역에 최초의 공설시장이 들어선 것은 역사적인 면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서울에 공설시장이 한 군데 있었던 1938년에도 부산에는 8군데가 있었으며, 평양에 7군데, 인천에 4군데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선식이나 이유식, 건강 죽을 파는 죽집으로 변화하고 있다. 길에서 노점을 펼치고 죽을 파는 상인도 있고 점포를, 가진 죽집들도 있다. 죽 외에도 국수, 국밥, 만둣국 등도 팔고 있고, 야채와 잡곡을 이용해 미숫가루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터키 케밥, 베트남.기타 여러나라... 
여기 =  https://youtu.be/fKNbbj5Mjic,
출처 ^ 참고문헌,
[한국 최초 공설시장 - 연중무휴의 신식시장, 부산 부평동시장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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